완역 사기본기 1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으로 부터 2000여년전에 탄생한 사마천의 <사기> 만큼 오랫동안 많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역사서는 드물 것이다. 특히 우리에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비견할 정도로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고 알려져 있는 저서이다. 삼국지연의가 역사소설이라는 대중성으로 인해 인기가 식지 않고 꾸준할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사서인 <사기>의 폭넓은 독자층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특히나 중국 전설시대인 오제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대사를 다루고 있기에 역사적 이해가 어느 정도 선행되지 않고서는 쉬이 접근하기 곤란한 책임에 틀림없으나 꾸준하게 읽혀 나가는데는 뭔가 <사기>많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매력은 아마도 <사기>라는 책의 탄생과정과 저자인 태사공 사마천의 삶속에 묻어 있지 않을까라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일어난다.사마천은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아 중국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 매진하였고 억울하게도 사형을 면했지만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처했던 이유가 바로 자신과 아버지의 뜻을 피력하기 위해 <사기>의 완성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알려진 대로 사기는 그 질적인 내용만큼이 방대한 양으로 인해 쉽게 접근하기 힘들며 그 해석이나 번역에 따라 천차만별적인 이미지를 전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래서 어떠한 번역서를 통해서 사기를 접하는냐에 따라 사기에 대한 진면목을 제대로 보느냐 아니면 그저 따분하고 어려운 책으로 몇 페이지 넘기지 않고 덮어버리느냐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동안 국내에 수 많은 학자들을 통해서 <사기>번역본이 출간되었고 일본학자들의 <사기>번역본등이 선을 보였다. 그러나 기존의 이러한 번역본들의 공통점은 거의 <사기> 중 그나마 흥미롭다는 <열전>편에 가장 집중되었고 <본기><세가><표><서>등에 대한 관심은 떨어졌던게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현상은 너무 사서를 흥미위주로 몰고갔다는 점도 있다. 더구나 거의 비슷한 번역과 편집방식으로 인해 실상 <사기>의 진정한 맛을 느낄 수 없었고 상당히 따분한 역사서로만 인식 되었던 것 역시 현실이다. 그저 책장에 두꺼운 <사기>한권쯤은 간직하고 있어야 제대로된 지성인으로서의 겉치레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의미로 여겨져왔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이번 국내학자중 <사기>에 가장 권위자인 역자의 <사기> 완역작업은 상당한 반향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역자는 전작중 <난세에 답하다>에서 그동안 사기가 가지고 있어던 다소 무겁고 지루한 사서의 이미지를 180도 바꾸어 놓았다. 사마천의 집필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맞게 풀어가는 <사기>전반에 대한 해제는 그야말로 멋진 강의를 보는 듯하게 술술 사기에 대한 매력속으로 이끌어갔다.

이번 완역 <사기본기 1>편 역시 역자만의 사기에 대한 특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무겁고 지루하게 느껴질 사서에 대해서 그동안의 편집방식에서 벗어나 각종 사진자료와 왕조의 계보도 그리고 왕조별 인명표와 지명표, 사마천이 참고했던 관련 서명 일람표를 추가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각 본기 서두에 해제만으로도 전체를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정도로 쉽고 빠르게 다가온다. 특히 단락별 주요내용을 간단 명료하게 집약하여 자칫 방만하게 흘러갈 수 있는 내용들을 바로 잡아준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점은 본기 각 부분별로 <주요사건>을 별도의 주석으로 추가했다는 점이다. 역자는 각 본기중에 발생했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다시한번 정리하고 해제를 덧붙여 한번 읽었던 내용들을 차분하게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이러한 유니크한 편집방식으로 인해 제대로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흥미로운 부분들도 새롭게 다가오게 한다. 대표적으로 춘추오패중에 하나였던 秦목공의 백리해 영입과정과 그로 인한 晉문공과 그 아들 양공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복날과 보신탕의 공식적인 기원을 볼 수 있는 소소한 재미도 제공하게 된다. 이렇듯 이번 <사기본기>는 기존 번역서와는 상당히 혁신적인 방식과 편집으로 <사기>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보기드문 완역본이다. 이는 역자가 그동안 사기에 대한 남다른 노력을 경주하기도 했겠지만 <사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왔을 것이다.

그동안 <사기>는 중국역사서나 우리의 역사서등 한자권 국가의 역사서 기술방식의 표준이 되어왔다. 본기, 세가, 표, 서, 열전으로 구성되는 기전체는 정례화되고 부동의 방정식과도 같이 보편화되어 왔다. 하지만 사마천 이후의 사가들은 진정한 역사기술방식을 곡해해왔다. 단지 사기의 형식상 분류방식과 방법론에만 집착을 했을뿐 사마천의 혁신적인 역사적 인식과 시각만큼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 본기에 진본기와 진시황본기를 별도편으로 기술했고, 비록 황제라는 칭호는 받지 못했지만 항우와 여태후를 본기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사마천의 역사인식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유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이들에게 진시황은 폭군으로 낙인찍혀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사마천은 가감히 본기 특히 진본기와 별도로 기술했던 것은 진시황이나 항우, 여태후가 한시대를 풍미했고 한획을 긋었던 혁신적인 인물임을 제대로 인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고 이는 사기를 집필하는 방식과 전제로서 사마천의 역사인식과 인물평가방식을 대변하고 있다.

특히 <사기>는 비록 역사서이지만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는 의식이 저변에 깔려있는 어찌보면 인물백과사전을 방불케할 정도로 각시대를 풍미했던 인물에 대한 평가 남다르게 기술되었있다. 사마천은 계층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간심성자체에 대한 그만의 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인물과 더불어 평가하고 기술했던 것이다.

지금처럼 한치앞을 예견할 수 없는 시대를 이른바 난세라고 칭한다. 사기의 주무대인 춘추전국시대 역시 난세였고 우리는 <사기>를 통해서 난세를 살아가는 법을 엿볼 수 있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사기>는 특히 지금처럼 가치관의 아노미 상태와 더불어 인간 본연에 대한 가치판단 상실의 시대에 어쩌면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책중에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데자뷰처럼 되풀이 과정을 거치면서 진화하고 우리는 그 수레바퀴를 어떠한 방향으로 돌릴 힘을 가지고 있다. <사기>는 바로 우리에게 수레바퀴를 어떤 방향으로 돌려야할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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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평전 - 민생을 살펴 태평성대를 이룩한 대통합의 지도자 중국 역대 제왕 전기 시리즈
장자오청 지음, 이은자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조선은 청태종 홍타이지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하고 결국 인조가 삼전도에서 전무후무한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겪고 청과 부자의 관계를 강요당했지만 여전히 숭명배청사상의 뿌리는 그대로 이어지면서 자력강생보다는 복제문제(예송논쟁)등으로 서인과 남인의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여지고 있을때 중원땅 청이라는 제국에서는 향후 135년간 중국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안정적인 황제의 시대를 알리는 한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바로 애신각라현엽, 후대에 강희제라고 불리우는 황제가 등극했다. 그리고 강희 이후 옹정과 건륭의 제위기간은 청제국 뿐만 아니라 중국역사를 통틀어 가장 안정적인 정치적 순항을 이룩하는 태평성대의 시대라고 평가받게 된다. 이는 로마제국시대의 3현제의 시대를 방불케할 정도로 정치적 안정과 강역의 확장 그리고 민생의 안정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치적을 남기게 된다.  

청제국이 군사력을 앞세워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주인으로 자리 잡았으나 강희가 제위에 오르기까지도 안정이 이루어 지지 않을 정도로 한족의 저항은 뿌리 깊었으며 권력중심부를 비롯한 정권의 안전성 역시 신생국가에서 볼 수 있듯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이런 시기 여덟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제위에 오른 강희제에게 청의 미래가 걸려 있는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결과론적으로 보아서 강희제의 치세가 청제국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것은 그의 60여년이라는 기나긴 제위기간의 표면적인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 대만을 복속시키고 러시아의 문제를 해결하는등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대 황제등 중에서 가장 많은 과업을 달성했기에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라 보정4대신의 보신정치를 받으면서 정치력을 스스로 키웠던 강희제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선조들과는 다른 정치관을 키웠고 결국 강희제만의 차별화된 정치역량을 가지게 된다. 이점은 로마제국이 개방성과 다양성을 수용함으로서 팍스로마나를 달성할 수 있었듯이 강희제 역시 개방적인 사고와 큰것을 취하기 위해 작은것을 과감하게 버릴수 있는 정치적 용인술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삼번의 난이나 대만의 평정등에서 보여준 그의 용인술은 한두걸음 앞을 내다보는 근시안적 접근방식이 아니라 수십년을 기다리면서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인내의 정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희제의 치세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이런 외형적인 강역의 확대나 반란을 처리하는 과정보다 대내적인 정국의 안정을 이룩했기에 더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 여타의 권력자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걷게 했다. 강희제는 " 백성들을 쉬도록 하는것도 치도의 첫 번째 중요한 일이다. 백성들을 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아야 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므로 먼저 휴식이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말은을 자신의 치세철학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지배계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경면전(국가소유 황무지를 민중의 소유로 이전) 시행함으로써 민중들의 부담을 덜어주게 한다. 그리고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 민중의 토지를 강탈하는 행위를 근절시키고 노예를 해방시켜 농민층의 증대를 이끌게 된다. 또한 각종 요역과 부세의 경감을 통해서 경제적부담을 덜어주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강희제는 그저 정책의 시행만을 단행한 것이 아니라 수시로 순행을 하면서 지방관들의 착취를 근절하고 민중들의 고충을 확인하는 피드백작업을 통해서 정책의 실효성을 더욱 높였다는 점이 돋보인다. 여기에 군대의 황무지 개간을 통한 둔전의 활성화를 통해 군량의 비축과 더불어 조세의 증가를 가져오는 이중효과를 통해서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게 되는 효과를 거두게 된다. 특히 농업뿐 아니라 상업분야에 대한 개혁을 통해서 농업과 상업이 상호 적절히 작용할 경우 경제가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선례가 되었다. 

또한 당시 서양문화의 대명사인 서학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강희제의 또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강희제는 서학을 철저히 자신의 용도에 맞게 부합하여 취사 선택하였다. 서학이 가져다 주는 우수하고 선진적인 과학문물에 대한 수용은 오히려 제신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청제국의 현실에 맞추어 리모델링하면서 획기적인 비약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강희제는 서학의 종교적인 색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이는 당시 조선과는 상반된 길을 가게 되고 조선은 한없는 늪의 구렁으로 빠져들게 되지만 청은 탄탄대로를 질주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를 볼때 최고권력자 한사람의 판단이 국가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굳이 논거하지 않더라도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겐 부모의 나라를 앗아간 불구대천의 원수였지만 청제국은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물줄기를 바꾼 나라였다. 그리고 비단 이민족의 제국이었으나 다양성과 개방성를 모토로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제국의 틀을 마련한 강희제에 대해서 그동안 국내의 독자들은 역사교과서 정도를 통해서 알려졌을 뿐 세세한 평가과 삶 그리고 치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번 <강희제 평전>은 우리에게 강희제라는 한 황제의 삶과 치세을 전해 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최고 권력자의 정치철학으로 인해 국가나 민족이 흥망성쇠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청과 조선은 그야말로 극과 극의 길을 걸었다. 한쪽은 열린사고로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것으로 재창조하였다면 다른 한쪽은 예송논쟁등 이미 사장화된 가치관에 목을 메고 철저히 은둔함으로써 암흑의 시대로 치달았다는 점에서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책은 강희제의 탄생에서 제위 그리고 죽음까지를 연대적으로 중요사건을 통해서 서술했고 더불어 강희제의 정치철학을 대변하는 경제와 민생 그리고 서학에 대한 수용등을 별도의 장으로 따로 서술하므로서 강희제 연간의 시간적 흐름을 인식할 수 있는 동시에 중점적인 각론의 분야까지 섭렴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 다시한번 느끼지만 강희제는 만주인,몽고인,한인의 결합을 다양성과 개방성이라는 대전제에서 포용하고 이끌어 가면서 청제국의 물질적, 사회적 기초를 세웠다는 점은 시간이 흐른 현실의 정치권에 좋은 본보기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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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 평전 - 사람을 얻어 난세를 평정한 용인술의 대가 중국 역대 제왕 전기 시리즈
장쭤야오 지음, 남종진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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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조조는 자의든 타의든 당시에도 그러했고 후대인 지금도 항상 세인들의 중심에 서 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조조를 간웅으로 묘사했지만 정작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조조에 대한 식지 않는 열의는 진행중에 있다. 마치 삼국지연의를 정사로 곡해하는 이들에겐 천하에 둘도 없는 몰인정하고 간사하기 이를데없는 간웅으로 회자되고 있고 이에 반해 정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에겐 희대의 영웅으로 남아있다. 그동안 삼국지의 주연들인 조조와 유비, 손권, 제갈량에 대한 많은 서적들이 출판되었고 특히 촉나라의 유비와 제갈량이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의 힘은 아직도 건재하게 세인들의 눈을 틀어 잡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반면 조조에 대한 평가와 위치에 대해선 얼마전부터 새로운 시각과 재조명이 이루어 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미흡한 면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황건적의 난등으로 제국의 앞길이 한치앞도 예견할 수 없는 난세에서 걸출한 영웅들이 출현했고 그런 난세를 사실상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한 사실상의 황제였던 조조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너무나 인색했던 것이다. 그동안 조조에 대한 연구나 그의 제대로된 평전하나 제대로 일반독자들에게 접해보지 못했던 차에 이번 장쭤야오의 <조조평전>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조조와 당시 시대상을 정사에 의거하여 기술된 이번 평전은 그동안 조조의 간괴나 전술전략등에 초점을 맞추었던 극히 일부분인 평가서에 비해 조조 개인의 삶과 그의 정치철학을 담고 있는 그야말로 조조에 관한 종합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조조의 거의 모든것을 말하고 있는 책으로 삼국지의 열렬한 메니아층 뿐만 아니라 삼국지에 대해서 일말의 관심이라도 있는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는 저서이다. 특히 조조에 대한 불편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겐 조조의 정확한 면모를 보게되고 조조를 어느정도 알고 있다는 이들에겐 진정한 조조의 진면목을 보게 한다. 

삼국이라는 구도는 솥의 다리처럼 3세력이 균형의 추를 맞추어 세상을 정립하고 있는 상태를 보통 삼국이라는 표현으로 대변한다. 대표적으로 한나라 붕괴이후 위,촉,오의 시대를 삼국시대라고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 보면 삼국시대라는 표현이 좀 민망할 정도로 조조의 위쪽에 무게 중심이 쏠려있다. 사실상 3국중 출신성분으로 따져 본다면 손권이나 유비에 비해 조조는 그 내막을 알 수 없을정도로 한미한 출생으로 그나마 환관인 조숭의 양자라는 갓끈을 부여잡고 시작해서 마침내 거대한 제국를 건설하게 된다.  

대부분의 영웅들에게 볼 수 있는 면모가 인재경영이 남다르다는 점이다. 손권의 경우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굳건한 인적 인프라가 기반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 유비의 경우는 당시 시대상에 맞지 않는 감성에 호소하는 인화술를 바탕으로 인적 인프라를 구축했다. 실례로 자신의 아들을 살릴려고 적진을 뚫고 나온 조자룡 앞에서 자신의 못난 아들때문에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 했다는 멘트 한마디로 이미 조자룡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손권이 주어진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했다면 유비는 감성마케팅의 달인이었다. 이에 반해 조조의 인적 네트워크는 철두철미한 계산에 따라 형성된 듯이 보이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손권과 유비의 장점을 취하면서도 조조만의 특색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갔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자신만의 원칙하에 시행하였다. 무엇보다 조조의 강점은 다름아닌 "절대"라는 개념의 상실 그 자체라고 해야겠다. 조조에게 절대라든지 불변이라는 개념은 자리잡고 있지 않을 정도로 조조는 임기응변의 대가였고 항상 열려있는 사고방식으로 일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점이 조조 주위로 인재들이 몰려들게 하였고 그런 인재를 조조는 적극 활용했다. 자주 비견되지만 제갈량 사후 촉의 급격한 쇠퇴와는 달리 조조의 위는 철저한 인적 네트워크의 구성으로 인해 한 개인의 공백이 조직자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바로 이점이 조조의 치밀한 인적 구성원들의 조정능력이었던 것이다. 조조는 군사,경제,사회,문화등 여러방면에 걸쳐 다방면의 전문가를 육성하는 메트릭스구조체를 가동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로 가장 큰 수혜를 본 인물은 유비와 제갈량이지만 가장 혹독한 비판과 누명을 감내한 인물은 조조이다. 그러나 정사에서 거론되고 있는 상황은 이와 정반대이다. 진수는 위를 정통으로 삼국지를 찬수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조조라는 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단행되고 있다. 특히 기업경영측에서 조조의 인재관리 와 전략분석을 중점으로 그의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조조는 분명 정치,군사, 경제,문학등 다방면에 걸쳐 영웅적인 기질을 드러냈고 자신의 거대한 목표를 향해서 철저하게 계획된 수순을 밟았고 무리한 포석(칭제)을 두지 않았다. 

흔희 우리는 삼국지연의를 통해서 조조를 간괴와 그리고 의리도 없고 사람목숨을 파리 목숨 다루듯이 하는 일개의 모략꾼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타당한 면도 충분히 있다. 조조는 정적이나 적군들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않았고 또한 과도할 정도로 무자비한 복수의 향연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에서 이러한 모습은 비일비재하였고 조조만의 전매특허로 낙인 찍기엔 어딘가 부족함이 있다. 실례로 여포를 참하는 과정에서 유비가 보여준 모습은 오히려 의리를 저버린 행동으로 더 비난받을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조는 건안문학이라는 중국문학의 한줄기를 뒷받침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악부시나 오언절구시등의 통해서 문학적인 측면에서도 발굴의 기재를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고, 경제사로서의 경제정책(토지정책)에 남다른 기지를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군사적 지략가를 뛰어넘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돋보이는 역량을 발휘했다. 이는 조조가 정치가로서의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는 것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과 주희의 <통감강목>에서 조조를 희대의 간신, 찬역한 도적등으로 폄하하기 시작한 부분이 후대 나관중의 모티브가 되어 조조에 대한 이미지는 되돌리기 힘든 형국에 이르게 되었지만 거의 동시대 인물인 진수의 <삼국지>등에서 묘사되고 있는 조조는 천하의 영웅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극과 극을 달리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조가 이처럼 역사와 소설속에서 양극단의 평가를 받는다는 자체가 바로 그 만큼의 애증과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조조는 간웅과 영웅이라는 양면을 다가지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러한 면모를 한쪽면으로만 몰아가는것 역시 잘못된 인식일 것이다. 당시 난세의 형국에서 이러한 양면성을 보이지 않았던 인물은 단 한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지 못한 인물은 그야말로 역사의 저편으로 살아지는 그런 한치 앞도 못보는 시기에 한시대를 풍미했고 그리고 수천년이 흘러서까지 세인들의 하마평에 오르내릴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조조는 분명 영웅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저자는 조조의 삶을 통해서 후대에 치열하게 공방되는 조조에 대한 재평가 부분을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공명정대하게 이끌고 있다. 인적네트워크관리, 문학발전의 기여도, 경세가로서의 경제정책등 조조가 여타 인물들과 다르고 뛰어났던 부분에 대한 공정한 평가와 더불어 흔히 간사하게 여겨지는 인재술과 속임수등 부적절한 면에 이르기 까지 조조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서술하면서 독자들 스스로에게 조조에 대한 판단을 일임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역사적 조조와 개인적 조조를 둘 다 언급하면서 조조 개인의 삶에 대한 조명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그것도 지금까지도 상당한 인지도를 가진 인물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소설이라는 점 때문에 무시하는 것 보다 그로 인해 삼국시대가 가장 보편화되고 알려지게 된 기여를 했다는 점을 저자는 솔직히 인정하면서 소설과 역사속의 진실을 독자들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조조평전>은 한말에서 삼국이 정립되기까지의 시대적 상황과 조조를 중심으로 한 관도대전, 적벽대전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생생한 설명이 아우러져 또 하나의 삼국지를 읽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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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경남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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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위한 후보 경선에서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인가라는 대답에 대다수의 많은 유권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공감"을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는 이 보다 좀더 앞선 2002년 대선에서 "공감"의 힘이 무엇인지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고 지금 미국이나 그 당시 대한민국은 공감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을 온몸으로 겪고 느꼈으며 아직도 많은 부분에서는 진행중에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매일 3조2000억달러가 리얼타임으로 자본 시장에서 교환되고 있고 하루에도 4만9000여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가르며 사람과 화물을 불과 몇시간내에 지구 곳곳에 내려놓고 있다. 2500대가 넘는 인공위성은 지구 주위를 돌면서 40억 이상의 인간에게 정보를 주고 있다. GPS가 막다른 골목 구석까지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하고 있는 세상, 즉 코스모폴리탄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불과 7만여년전 아프리카의 구석진 곳에서 이동을 시작한 우리 인류에겐 아주 짧은 시간내(지구의 역사에 비견하면 정말 눈깜짝할 정도의 시간일 것이다)에 지구라는 행성을 정복해 버렸다. 그리고 그 끝이 어디인지 모를 약진을 감행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략 20억이 넘는 우리와 같은 종의 사람들이 하루 1-2달러로 하루를 버텨 가고 있으며 26억명 이상의 사람들이 기후이상으로 생존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 역시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면 우리가 살고 있는 풍요롭기 그지없는 지금의 시대가 과연 어디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또한 지금처럼 지속가능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실로 많은 고민거리에 봉착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소유의 종말], [유러피언 드림]으로 사유의 폭을 한층 넓혀준 제러미 리프킨의 신작 <공감의 시대>에서 다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공감"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공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 실천에 대해선 무지했고 등한시했고 또한 낯설게만 느꼈다. 또한 인류의 발전과정을 돌이켜 보더라도 공감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약간만 다른 시각으로 인류사를 되돌아 보면 상당히 다른 결과에 맞닿게 된다. 수렵채집의 생활에서 벗어나 지금의 발전된 문명을 누리게 만든 농업혁명, 산업혁명, 디지털혁명등 굵직 굵직한 새로운 패러다임들은 어느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게 아니라 상호간 커뮤니케이션의 총합으로 인해 등장했던 것이다. 즉 "공감"이라는 의식이 그 전제에 놓여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수렵채집생활을 청산하기에 발명된 농업혁명은 관개시설이라는 또 다른 혁신을 가져왔고 이러한 혁신은 농업경영이라는 또다른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리고 새로운 관리와 높은 수준의 조직이 필요했고 이를 지휘,감독,통제하는 또 다른 매커니즘을 탄생시겼듯이 바로 상호간의 공감을 통해 우리 인류는 역사의 바퀴를 진보시킨 셈이다. 

저자는 이렇듯 인류의 역사를 투쟁적이고 경쟁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커뮤니케이션 복합 이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가지고 전 인류역사에 걸쳐 그 발자취를 재해석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인해 인류가 겪게 되는 일대 혁명적인 시기를 새롭게 재조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의 근원적인 힘은 당연히 상호간의 공감이 밑바탕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일련의 변혁속에 공감이라는 존재는 주목받지 못했고 주목하지도 않았다. 그저 표면으로 보이는 현상에 역사적 발전의 근원을 찾았고 해석해 왔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 시대를 변혁했던 패러다임의 출현과 사멸에 대해서 극히 외관적인 판단을 해왔고 그런 판단의 근거는 사뭇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인류의 발전사에 대한 정확한 시각을 가져할 때에 봉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해마다 증가하는 예측불허의 기상이변과 피크오일의 시대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불확실한 세계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저마나 인류의 생존자체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하고 지금도 기아와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향후 인류가 생존해 나가야하는 올바른 방법론에 대한 심각한 기로에 서있기 때문이다. 

공감한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마도 유교문화권인 우리에겐 맹자의 측은지심이말로 시의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게 상대방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정도의 편협된 해석이 아닌 확장된 개념의 공감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이해,참여 그리고 상대를 제대로 인식하는 일련의 의식일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 알아낸 것이 진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너에게서 나의 일부를 확인하고 너는 내 안에서 너의 일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라는 찬귁번교수의 표현처럼 공감은 내가 상대방를 알아가는 과정이고 상대방을 통해서 나를 알게 되는 의식인 것이다. 여기엔 상호간의 배려와 이해 그리고 참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공감의식은 결국 내가 아닌 우리라는 단순한 개념보다는 상대방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유한 존재라는 인식의 확장된 우리라는 개념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는 이제 인류라는 단순한 한 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범지구생물권이라는 총합적인 개념의 우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구라는 유기체를 형성하는 극히 일개의 부분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공감은 자칫 인류만의 파티로 끝날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1914년 세계1차대전이 한창이던 때 비록 크리스마스 단 하루만의 휴전이었지만 우리 인류는 공감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겪었다. 공감은 인류에게 농업,산업혁명등의 엄청난 풍요와 부를 안겨준 패러다임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공감을 가장한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퇴장시키는 무지한 사멸 또한 선사했다. 인류가 직면한 가장 불확실한 시대에 범지구적인 공감은 그 어느때 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그 희망의 불빛을 보고 있다. 물론 아직도 우리에게 당면한 절체절명의 위태로운 난관 앞에서는 가야할 길이 묘연할 뿐이지만 조금씩 서서히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도 감지되고 있다. 공감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경영분야에서도 예전의 경쟁발전 지상주의에서 탈피하여 협력,협동이라는 콜래보노믹스의 바람이 불고 있고 과학과 종교의 통섭을 통해 상호간의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작지만 일어나고 있는게 그나마 고무적인 일이다. 이렇듯 공감 의식은 자라나는 우리의 어린자녀 세대들에겐 더욱 더 많은 영향을 줄 것이고 공감의식의 필요성과 확대를 위한 여건조성은 우리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공감의 시대를 요구할 것이고 바로 그 중심엔 호모 엠파티쿠스가 자리매김하고 있을 것이다

<공감의 시대> 그야말로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수긍할 수 있는 공감 바로 그 자체였다. 인류사의 발전과정에 감추어진 역설과 그의 재해석을 통해서 역사발전의 원동력에는 다름아닌 공감이라는 의식이 내제되어 있었다는 저자의 추론에 십분 공감이 간다. 또한 그의 전작에서도 느꼇듯이 저자의 다양한 분야의 해박한 지식과 정곡을 찌르는 듯한 논리정연한 서술은 이번 책을 통해서 더욱더 빛을 발하고 있다. 특히 ""진리는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공통의 경험적 기반을 함께 만들기 위해 모이는 틈새 영역에 존재하는 이해이다. 존재는 관계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주변 사람이나 주변 세계와 공유한 경험에 부여하는 의미의 차원이다."" 에서 볼 수 있듯이 진리,존재,자유,평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면서도 공감의 시대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아마도 앞으로 공감의 시대를 살아갈 호모 엠파티쿠스들에게 ""나는 공감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이 아프리오리한 명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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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 - 영광과 좌절이 교차한 공부 귀재들의 과거 시험과 출세 이야기
정구선 지음 / 팬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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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외무고시,행정고시 그리고 각종 고시라는 타이틀속에 지금 이 시각에도 신림동을 비롯한 대학가 주변에서 전용면적 10㎡미만의 고시원에서 불철주야 책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럼 왜 많은 시간적, 금전적 투자를 감행하면서 확률적으로 극히 낮은 게임에 도전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뻔하지 않을까 싶다. 고시합격이라는 OUT-PUT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메리트가 기회비용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고위직 공직생활의 기본전제이고 세상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고시합격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신분상승의 공식적인 창구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빗나간 생각에 반기를 드는 이들도 수 없이 많겠지만 굳이 이러한 반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나열치 않더라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소위 출셋길의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고시가 근대화의 산물이었을까?  

해답은 이미 고려시대 광종때 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과거제도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고시의 차이점은 아마도 근대적 패러다임의 영향으로 인해 응시자격의 정확하게 신분의 차별만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대동소이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지금 고시의 역사적 연원의 뿌리는 아주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 유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면에서 이번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는 과거제도 특히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을 통해서 바라본 일종의 문화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방에서 치루어지는 향시부터 시작해서 군주앞의 최종시험인 전시까지 조선의 과거는 지금의 고시와 비교하면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여정이었다. 그래서 과거급제는 개인의 출셋길을 넘어서 대대로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되었고 왠만한 양반가에서는 과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 생활 양식이 바뀔 정도였다. 개국의 이념이자 정권유지의 정신적 어젠더였던 성리학을 표방하는 조선에서도 과거의 급제를 위해선 민간신앙의 구복이나 이단시 되었던 불교의 귀의등 그 어떠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정도로 과거급제는 일생일대의 목표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과거에 급제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난제를 극복해야 하는데 하물며 과거급제의 꽃이라 불리우는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달콤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과거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의 최종목표였다. 그리고 장원급제를 위한 개인, 집안마다의 독특한 교수법까지 등장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을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 물신양명으로 노력을 했고 결국 태종은 조선시대 국왕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임금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반 사대부들은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조선에서 과거는 국시인 성리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관리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은 물론이거니와 개개인의 인격적인 판단까지 아울러 제단했던 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고시는 그저 성적의 상하로 합격기준이 나뉘어 지지만 과거제도는 성적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인재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출신자들의 고위직 진출이 월등히 많았으며 이들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동량이었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면 과거라는 제도는 조선이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적시스템의 최상에 위치한 보기드문 제도였다. 하지만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이러한 과거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대두되면서 과거제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인사적체가 만연되고 일부 가문의 세도 및 특정 당파의 독점으로 인해 순수한 과거선발제도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과거제도가 갖는 의미는 조선시대 그 어떠한 제도보다 많은 면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과거는 엘리트라고 지칭하는 사대부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사회전반에 미치는 여파가 컸다는 것이다. 현대처럼 직업의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조선시대 과거는 사대부로서 도가 아니면 모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시험이라는 제도는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감독을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부패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과거에서 부정을 하면 그에 대한 댓가는 참혹했다. 적어도 법규정에 의하면 과거라는 대안없이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전무한 사대부들에게 과거의 부정은 위험한 거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좀더 과거시험을 잘 보려고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고 이러한 부정들로 인해 조정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리시험이든지 답안지 맞바꾸기에서 부터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과거급해한 인물들이 속속 출현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급제를 하고 관직에 나가서도 처음 예상처럼 장미빛 인생만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정치적 선택, 가문의 힘, 개인의 영달등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급제자들의 인생항로가 순식간에 역전되는 경우가 역사에는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허와 실 그리고 과거시험에 새롭게 등장하는 부정 그리고 과거를 통해서 장차 관직생활을 했던 이들의 다양한 삶을 통해서 과거라는 제도가 조선 사대부들에게 미쳤던 영향을 사회문화적으로 접근하여 과거와 사대부들간의 역학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과거는 비단 서생들만 발탁하는 제도가 아니라 이미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당하관이하의 관리들도 응시할 수 있는 제도였다. 조선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인재등용의 POOL를 확대했고 이러한 바탕에서 과거제도는 인재산실의 요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에 기상천외한 부정적인 방법들이 동원되어 그 의미를 퇴색시켰으나 결과론적으로 과거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근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급제를 위해 온갖방법을 동원하는 그들의 모습과 급제 이후 삶을 통해서 과거의 정책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유익한 담론들이 한편으로 역사에 재미있게 다가가는 방편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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