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고시,외무고시,행정고시 그리고 각종 고시라는 타이틀속에 지금 이 시각에도 신림동을 비롯한 대학가 주변에서 전용면적 10㎡미만의 고시원에서 불철주야 책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럼 왜 많은 시간적, 금전적 투자를 감행하면서 확률적으로 극히 낮은 게임에 도전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뻔하지 않을까 싶다. 고시합격이라는 OUT-PUT이 가져다 주는 다양한 메리트가 기회비용을 상쇄하고도 남기 때문이기 때문이다. 고위직 공직생활의 기본전제이고 세상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고시합격은 현대 자본주의 시스템속에서 어쩌면 유일하게 신분상승의 공식적인 창구로서의 역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물론 이러한 빗나간 생각에 반기를 드는 이들도 수 없이 많겠지만 굳이 이러한 반론에 대해 세부적으로 나열치 않더라도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소위 출셋길의 탄탄대로가 보장되는 고시가 근대화의 산물이었을까? 해답은 이미 고려시대 광종때 부터 자리잡기 시작한 과거제도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과거와 고시의 차이점은 아마도 근대적 패러다임의 영향으로 인해 응시자격의 정확하게 신분의 차별만 있을 뿐 나머지 부분은 대동소이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정도로 지금 고시의 역사적 연원의 뿌리는 아주 깊은 내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문화적 유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면에서 이번 <조선의 출셋길 장원급제>는 과거제도 특히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을 통해서 바라본 일종의 문화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방에서 치루어지는 향시부터 시작해서 군주앞의 최종시험인 전시까지 조선의 과거는 지금의 고시와 비교하면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힘든 여정이었다. 그래서 과거급제는 개인의 출셋길을 넘어서 대대로 가문의 영광으로 인식되었고 왠만한 양반가에서는 과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 생활 양식이 바뀔 정도였다. 개국의 이념이자 정권유지의 정신적 어젠더였던 성리학을 표방하는 조선에서도 과거의 급제를 위해선 민간신앙의 구복이나 이단시 되었던 불교의 귀의등 그 어떠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을 정도로 과거급제는 일생일대의 목표일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과거에 급제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난제를 극복해야 하는데 하물며 과거급제의 꽃이라 불리우는 장원급제는 그야말로 장미빛 인생이라는 달콤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기에 과거를 준비하는 모든 이들의 최종목표였다. 그리고 장원급제를 위한 개인, 집안마다의 독특한 교수법까지 등장하게 된다. 오죽했으면 태조 이성계는 아들 방원을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 물신양명으로 노력을 했고 결국 태종은 조선시대 국왕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된다. 임금이 이러한데 하물며 일반 사대부들은 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조선에서 과거는 국시인 성리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관리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은 물론이거니와 개개인의 인격적인 판단까지 아울러 제단했던 제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고시는 그저 성적의 상하로 합격기준이 나뉘어 지지만 과거제도는 성적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인재를 선택할 수 있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출신자들의 고위직 진출이 월등히 많았으며 이들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동량이었던 것이다. 이런면에서 보면 과거라는 제도는 조선이 500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인적시스템의 최상에 위치한 보기드문 제도였다. 하지만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이러한 과거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대두되면서 과거제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특히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인사적체가 만연되고 일부 가문의 세도 및 특정 당파의 독점으로 인해 순수한 과거선발제도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과거제도가 갖는 의미는 조선시대 그 어떠한 제도보다 많은 면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지금과 비교하면 당시 과거는 엘리트라고 지칭하는 사대부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사회전반에 미치는 여파가 컸다는 것이다. 현대처럼 직업의 다양성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조선시대 과거는 사대부로서 도가 아니면 모라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시험이라는 제도는 아무리 철저하게 관리감독을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다 보면 부패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 과거에서 부정을 하면 그에 대한 댓가는 참혹했다. 적어도 법규정에 의하면 과거라는 대안없이 사회에 진출할 기회가 전무한 사대부들에게 과거의 부정은 위험한 거래였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도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좀더 과거시험을 잘 보려고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고 이러한 부정들로 인해 조정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대리시험이든지 답안지 맞바꾸기에서 부터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과거급해한 인물들이 속속 출현하기도 했다. 또한 과거급제를 하고 관직에 나가서도 처음 예상처럼 장미빛 인생만이 펼쳐진 것은 아니다. 정치적 선택, 가문의 힘, 개인의 영달등 여러가지 변수로 인해 급제자들의 인생항로가 순식간에 역전되는 경우가 역사에는 허다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이 책은 조선시대 과거제도의 허와 실 그리고 과거시험에 새롭게 등장하는 부정 그리고 과거를 통해서 장차 관직생활을 했던 이들의 다양한 삶을 통해서 과거라는 제도가 조선 사대부들에게 미쳤던 영향을 사회문화적으로 접근하여 과거와 사대부들간의 역학관계를 재조명하고 있다. 과거는 비단 서생들만 발탁하는 제도가 아니라 이미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당하관이하의 관리들도 응시할 수 있는 제도였다. 조선은 이러한 제도를 통해서 인재등용의 POOL를 확대했고 이러한 바탕에서 과거제도는 인재산실의 요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대에 기상천외한 부정적인 방법들이 동원되어 그 의미를 퇴색시켰으나 결과론적으로 과거제도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가는 근간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과거급제를 위해 온갖방법을 동원하는 그들의 모습과 급제 이후 삶을 통해서 과거의 정책적인 차원이 아닌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유익한 담론들이 한편으로 역사에 재미있게 다가가는 방편이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