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으로 향하다 - 리암 니슨 주연 영화 [툼스톤]의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97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전부 16권이나 되는 로렌스 블록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가 출간된 미국에서 이런 광고가 새로 나왔다면 분명 독서를 즐기는 사람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지게 될 터이다. 하지만 그동안 단 2권만이 어렵사리 소개된 우리나라에서는 이 외침이 조금은 공허하게 들리는 게 못내 섭섭하다. 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시리즈를 모두 즐길 수 없다니, 지금껏 세상에 선 보였던 어떤 탐정보다 매력적인 매트 스커더의 인생역정을 처음부터 따라갈 수 없다니 이것이이야말로 진짜 비극이지 싶다.

 

뭐 미국만큼은 덜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입에 거품을 물고 높이 평가했던 바로 그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하지만 전에 출간됐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은 1982년작으로 1992년에 발표된 본작 <무덤으로 향하다>와 무려 10년의 간극이 있는 건 안타깝다. 두 작품 사이에 출간된 총 네 편에서 매트가 어떤 사건을 만나고 무슨 변화를 겪는지는 그저 독자들이 추측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오래전에 고려원에서 미국에서 <무덤으로 향하다>의 1년 전에 출간됐던 <백정들의 미사>가 나온 적은 있다. <백정들의 미사>는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 수상작이다).

 

<800만 가지 죽는 방법>에서 단 두 문장으로 이뤄진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스피치를 선 보인 바 있는 매트는 알콜 중독으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허름한 뉴욕의 뒷골목을 전전하는 무면허 사립탐정이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술을 끊지 못해 번민하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술을 완전히 끊고(물론 사건이 벽에 부딪칠 때마다 다시 술병을 잡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만), 엘레인이라는 여인과 사귀고 있다. 죄악으로 가득찬 사회에 완전히 절망했던 염세주의자 매트가 점차 세상과 화해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매트가 부녀자를 납치한 뒤 잔인하게 강간살해하는 유괴범과 대결하는 <무덤으로 향하다>의 또 하나의 기둥 줄거리는 창녀일을 하고 있는 엘레인과의 로맨스.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창녀일을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한번 결혼에 실패한 매트는 어쩐지 그녀를 완전히 책임지기가 부담스럽다. 서로에게 번잡한 구속을 하지 않는 지금의 관계가 편하기도 하고. 그러나 점차 엘레인의 손님들이 신경 쓰이고 그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매트가 어떤 선택을 할지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녀를 잡아! 속으로 10번도 더 외친 듯. 독자들의 생각보다 두 배쯤 아름다운 로맨스의 결과는 직접 확인하시길.

 

1966년에 데뷔해 수십 편의 장편 추리소설을 남긴 이 장르의 대가 중의 대가 로렌스 블록. 그의 롱런 비결은 무엇일까. 아마도 늘 변화를 시도하는 그의 창의성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 1982년의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을 보면 살해된 어느 흑인 창녀의 사건을 수사하는 매트의 이야기와 로스 맥도널드, 로버트 파커 류의 하드보일드 소설과 특별한 차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무덤으로 향하다>에 와서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토머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 <레드 드래건> 같은 작품들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 사이코 연쇄살인범을 등장시키고, <백정들의 미사>에서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포르노를 찍는 악당들과 대결하기도 하는 등 다루고 있는 범죄의 양상이 매번 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쯤 되면 추리소설 작가로서 한번 확립된 시리즈의 안정된 공식을 마다하고 매번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며 항상 사회에 대한 예리한 관찰자의 눈을 거두지 않는 로렌스 블록이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그랜드 마스터 반열에 오른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멈추지 않는 창의성을 증명하는 또 한 가지 예는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의 매트 스커더 시리즈와 재기발랄한 유머가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바니 로덴바 시리즈를 동시에 쓰고 있다는 사실. 낮에는 끝간 데 없이 어두운 탐정 매트의 이야기를 쓰고, 밤에는 방방 뛰는 도둑 바니의 이야기를 쓰는 셈이니 이야기꾼의 재능을 타고난 건지...

 

그밖에 꼭 말해두고 싶은 건 로렌스 블록의 대사 쓰는 실력이다. 흔히 미국식 대화의 전범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 에드 맥베인에 비해 전혀 꿀리는 게 없다고 생각한다. 넘실대는 미국식 유머와 간결하면서도 통렬한 메시지를 간직한 대사들은 특히 한없이 늘어지기 일쑤인 지루한 대사를 양산하는 얼치기 작가들이 꼭 배워야 할 기술이 아닐까. '작가들의 작가'라는 세평을 듣는 거장답게 한 수 제대로 배운 느낌이다. 공들여 구상한 플롯을 A-B-C...순서대로 진행시키는 데만 여념이 없는 작가 지망생들에 비하면 매트는 여유가 있다. 사건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는 미술관에 가거나 친구를 만나 수다를 떠는 매트. 그러다 단서를 얻으면 그 순간부터 사건은 실타래가 풀리듯 순식간에 진행된다. 느긋한 여유와 빠른 페이스를 교차시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완급 조절에 감탄을 넘어 감동하고 말았다.

 

담배는 어떤 걸 피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모든 게 궁금해지는 매트 스커더는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 느리지만 조금씩 착실하게 성장하는 매력적인 탐정으로 필립 말로나 루 아처의 계보를 잇는 한번 보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소설 속 인물이다. 이 개성 넘치는 매트 스커더 시리즈를 창조한 로렌스 블록 역시 루스 렌들이나 PD 제임스 급의 현존하는 세계 최고 거장으로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영광일 정도의 작가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가 이 근사한 두 남자의 조합을 놓쳐서야 곤란하지 않겠는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방에 '매트 스커더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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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9-04-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말이요 ㅜ.ㅜ
언제 쌓아놓고 차례대로 볼 수 있을까요...

jedai2000 2009-05-01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시리즈 하나만 선택해서 국내에 다 낼 수 있다면 매트 스커더를 고르고 싶네요...쓰고 보니 잭 리처 시리즈도 탐나네요 -_-;;;

앨런 2009-05-25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렇게 감질나게 하지 말구, 시리즈로 촥촥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요.

jedai2000 2009-05-28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런님...저도 소원입니다만 과연 쉽게 이뤄질지 모르겠네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