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르부크 부인의 초상 샘터 외국소설선 4
제프리 포드 지음, 박슬라 옮김 / 샘터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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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은 이미 <유리 속의 소녀>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제프리 포드의 작품입니다. <유리 속의 소녀>가 상당히 평이 좋아 책을 구해놨지만 아직 읽지는 못했는데, 어쩌다 보니 나중에 나온 이 작품을 먼저 읽게 되었네요. 순서야 어찌 됐든 제프리 포드의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당장 <유리 속의 소녀>도 읽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책도 찾아놨구요. 그만큼 매력 넘치고 재미있는, 한마디로 글 잘 쓰는 작가라는 결론입니다.


배경은 1800년대 후반의 미국입니다. 한때 빛나는 재능으로 다양한 주제의 실험적인 그림을 그렸던 피암보라는 화가가 주인공이고요. 현재 피암보는 부유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많은 돈을 벌고 있습니다. 사진이 발명되면서 이제 초상화의 수요가 떨어지리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사진은 커다란 비용이 들지 않아 개나 소나(?) 다 찍을 수 있지요. 때문에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싶은 특권층들은 여전히 사진 대신 초상화를 원합니다. 그러니 피암보의 사업은 계속 번창일로에 놓여 있는 것이죠.


허나 피암보는 늘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향했던 예술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렇게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던 어느 날 피암보는 샤르부크 부인으로부터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습니다. 고객 면담을 위해 부인의 집을 방문하지만 그녀는 병풍 뒤에 모습을 숨기고 목소리만 들려줄 따름입니다. 그리고 샤르부크 부인은 뜻밖의 제안을 해요. 절대로 나를 보지 말고, 내가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만 듣고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제안이 바로 그것입니다.


초상화라는 그림의 성격 자체가 모델의 특성을 낱낱이 화폭에 재현하는 것인데, 얼굴을 보지 않고 그리라니요. 여기서 피암보가 '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가보슈. 난 그렇게는 못 그리우." 했다면 이 이야기는 허무하게 끝났겠지요. 하지만 당연히 그렇게 전개되지는 않으니 안심하기 바랍니다. 부인은 본인이 만족할 만한 초상화가 나오면 거액을 주기로 약조했습니다. 피암보는 결심해요. 어려운 도전이지만 이 그림을 잘 끝내 목돈을 바짝 땡겨서 앞으로는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그리자고.


피암보는 병풍 뒤의 샤르부크 부인으로부터 그녀의 과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부인의 이미지를 온전히 상상력만으로 구체화할 작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부인의 이야기는 피암보가 전혀 생각도 못했던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예컨대, 그녀의 아버지는 예언과 점술을 숭배하는 재벌에게 고용되어, 눈(雪)의 결정을 보고서 미래를 점치는 점술가예요. 여담이지만 재벌의 또 다른 고용인은 사람들의 배설물 모양을 보고 앞날을 예측합니다(물론 그분도 책에 등장합니다).


부인은 어렸을 때 아버지를 도와 눈을 채취하고 그 표본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자연계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져 아연실색하고 맙니다. 이 세상의 모든 눈은 마치 사람의 지문처럼 완벽히 동일한 모양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해요. 하지만 부녀가 우연히 채취한 눈 결정 두 개는 형태가 완전히 똑같습니다. 부인의 아버지는 동일한 결정 두 개를 '쌍둥이'라 부르며 딸이 차고 있는 목걸이 안에 넣어줍니다. 신기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으니, 샤르부크 부인이 쌍둥이를 손에 넣은 순간부터 그녀에게 미래를 환시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피암보는 이 여자가 누구 앞에서 약을 팔아, 하며 절대로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아요. 부인이 제대로 미쳤거나, 얼치기 소설 지망생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속속 드러나는 증거들은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해줍니다. 그뿐만이 아니죠. 피암보 앞에 두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자들이 자꾸 나타나는 것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을 만나고 나서 피암보의 익숙하고 편안한 세계는 점점 붕괴됩니다. 그는 혼돈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그림쟁이의 숙명에 따라 초상화를 그리는 데 열중합니다. 예술혼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타올라야 하는 것이니까요.


이상이 앞부분의 줄거리인데, 신비스럽고 불가해한 일들이 연속되어 읽는 이를 아주 홀려버립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한 번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는 책이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예요. 무엇보다 다채로운 소설들의 맛을 한껏 즐길 수 있지요. 눈의 결정을 보고 미래를 점친다거나 하는 초현실적인 설정들과 고대의 유물 등이 나오는 장면들에서는 빼어난 판타지 소설의 환상성을 흠뻑 즐길 수 있습니다. 실감나게 재현한 1800년대 후반의 미국 풍경이나 당시 예술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영락없는 역사소설이구요. 예술가로서 피암보의 방황과 고뇌, 그리고 진정한 자신의 예술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종의 예술소설로 봐도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샤르부크 부인의 정체나 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여인들의 비밀을 풀어가는 과정은 그대로 한 편의 추리소설입니다. 모든 의문은 남김없이 풀리고, 그 의문에 대한 설명들은 추리소설의 논리에 확실하게 부합합니다(일부 초현실적인 설정들은 예외입니다). 다만 추리소설로서의 측면에서만 보자면 최후에 밝혀지는 몇몇 비밀이 어느 정도 진부한 감은 있죠. 하지만 이 작품은 오직 추리소설로만 한정되는 작품은 아니기에 큰 결점은 되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왜 같은 얘기를 해도 더 재미있고 실감나게 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아무리 들어도 뻥인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믿어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천생 이야기꾼이 아닐까 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런 능력은 아마 타고나는 것이겠지요. 제가 본 제프리 포드도 타고난 이야기꾼입니다. 기품 있는 문장력은 물론이고, 질릴 만하면 적당히 큰 사건을 펼쳐 독자의 시선을 붙잡아두는 감각, 성실한 자료조사와 발군의 아이디어까지 모든 면이 탁월합니다. 이런 작가가 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뻔해 보여도 외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상 한 번 들어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죠.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에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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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
아와사카 쓰마오 지음, 권영주 옮김 / 시공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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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마디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걸작 미스터리 단편집. 일본에서 1978년에 출간된 단편집이라 왜 이제야 왔어, 하고 대체로 황홀한, 그러나 조금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책을 몇 번 쓰다듬고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미남 탐정 '아 아이이치로'가 8개의 독특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 수록된 이 단편집은 몇 번이고 꺼내 읽고 싶어질 정도로 위트 있고 기발한 플롯과 트릭들로 가득하다. 뜬구름이나 곤충 등 별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만 촬영하는 카메라맨 아이이치로는 촬영 현장에서 늘 우연히 사건과 맞닥뜨리는데, 워낙에 꽃미남인지라 사건에 관계된 여자들은 그를 보고 항상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이내 여자들이 헛웃음을 짓고 마는 것은 아이이치로의 굼뜬 행동과 둔한 운동신경, 그리고 말더듬이 때문. 세상은 역시 공평해, 저렇게 잘 생긴 사람이 이토록 헐렁할 줄이야 하고 비웃는 순간, 아이이치로의 날카로운 추리력이 빛을 발한다. 물론 명추리를 선보이는 상황에서도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덜덜 떨며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그 효과가 반감되지만...

 
조각 미남에 얼빠진 행동, 그러나 비범한 추리력이 한데 뭉친 이 사랑스러운  탐정은 아 아이이치로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가 혹시 나중에 '일본탐정 인명사전'이라도 발간되면 제일 먼저 등장하게끔 하려고 일부러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일본어의 50음도는 '아이오에우' 순이기 때문에 이름과 성이 둘다 '아'로 시작하는 이 탐정이 첫 타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만약 '일본탐정 인명사전'이 한국에서 번역되어 나온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교이치로'가 처음이 될 것이다. 우리 말은 '가나다라' 순이니까^^ 

 
아이이치로도 그렇지만, 네이밍 센스에서도 볼 수 있듯 작가 아와사카 쓰마오도 걸물이다. 기발한 장난감과 마술을 좋아해서 실제로 마술사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자기 이름을 딴 마술상도 있단다. 1970년대 일본 추리소설계의 풍경을 엿볼 수 있어 무척 흥미진진한 해설을 보면, 특히 바에서 호스티스들에게 마술을 선보여 인기만점이었다고 하니 만나면 언제나 유쾌하고 즐거운 술친구 같은 작가였던 모양이다. 나오키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같이 받을 만한 상도 다 받고 잘 나가던 분인데, 2009년초에 별세했다고. 한국어판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가 표지부터 책의 모든 부분에서 만듦새가 출중해 한국어판을 보고 아이같이 좋아했을 장면이 상상되는데, 조금 늦은 한국어판 출간이 영 아쉽다.

 
아와사카 쓰마오의 별명은 '일본의 G. K 체스터튼'이다. 과연 '브라운 신부' 시리즈로 추리소설 역사에 찬란히 남은 명단편들을 선보인 체스터튼과 유사한 작풍이 보이는데, 인간의 행동 뒤에 감춰진 심리에 기반을 둔 추리나 기발한 착상의 트릭, 탐정 캐릭터의 유사상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브라운 신부 역시 아이이치로처럼 총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얼빠진 행동만 보고 무시하면 큰코다치는 추리력의 소유자다. 둘다 항상 박쥐우산을 들고 다니고, 자주 잃어버리는 것도 비슷. 다만 유일하게 다른 건 외모도 둔중한 브라운 신부와 달리, 아이이치로는 꽃미남이라는 것뿐이다.


 
체스터튼의 단편들처럼 'DL 2호기 사건'과 'G선상의 족제비' 같은 작품은 일견 무질서한 행동처럼 보여도 거기에 그만한 이유가 따르는 인간 심리의 맹점을 파고든 일종의 심리 트릭이 쓰였다. 물론 '비뚤어진 방', '검은 안개' 등 주어진 물리적인 단서들을 착실하게 분석해 정답에 이르는 트릭도 훌륭하다. 이외에도 암호 트릭이나, 몇 십 년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설명만 듣고도 진실에 이르는 등 그야말로 트릭의 종합 선물세트다. 30년도 더 된 단편들이라 어느 정도 빛이 바랜 작품들도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아직도 대부분은 쓸만한데 개인적으로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황금불상의 손에서 광고지를 뿌리다 권총으로 사살된 남자의 사건을 해결하는 '손바닥 위의 황금 가면'을 꼭 추천하고 싶다. 꽤 공감이 가는 인간 심리와 물적 증거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와사카 쓰마오는 아무래도 마술사 출신의 작가라 사람을 속이는 테크닉은 물론 인간의 주의력의 한계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출중한 트릭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작가 자체가 유쾌한 사람이라서 그런지,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도 산뜻하고 귀여운 분위기가 흐른다. 살인사건을 저지른 범인도 별로 독이 느껴지지 않고, 우연히 사건에 관계된 아이이치로를 갈구는(?) 무서운 형사들도 뒤를 돌아서면 슬쩍 한쪽 눈을 찡긋 감고 윙크할 것 같은 애교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시체가 발견된 어느 사건 현장에서 아이이치로는 코냑을 마시고 있었다. 얼큰히 취해 떡이 되어 있는데, 형사가 도착하자 아이이치로는 무람없이 술을 권한다. 그때가 추운 날씨였던지라 형사 왈, "어이쿠, 이거 감...아니 지금은 근무 중이라 곤란합니다." 이게 얼마나 귀여워.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아시다시피 2차대전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남아에 식민지가 많았다. 남방의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서 파견한 군대와 미국의 해군이 수 차례 격전을 치룬 바 있고, 당시에 낙오된 일본 병사가 항복한지도 모르고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발견된 사례도 종종 해외토픽에 나온다. 당시 참전해 겨우 살아 돌아온 옛 군인. 그는 동료 병사들의 유골을 거두는 '유골 조사단'에 합류하여 남방으로 가는 배를 타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젊은 남자(아이이치로)가 주변의 일행들에게 자꾸 '뼈, 뼈' 운운하는 것이 아닌가. 옛 군인은 분노한다. 저런 되먹지 못한 놈, 우리는 생사를 걸고 싸웠건만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세대가 저렇게 예의없이 전우의 유골을 뼈라 칭하다니. 옛 군인은 아이이치로에게 항의한다. "쓸데없는 참견일지는 몰라도 '뼈'라는 말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일본어에는 '유골'이라는 말이 분명히 있는데요." 뜻밖에 아이이치로는 선선히 잘못을 인정하고 주변 일행들에게로 돌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말이죠, 선생님. 그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유골 말씀인데, 톨레미 원정대가 발견한 건 어느 부분의 유골이었습니까?" 선생님이 답한다. "음, 톨레미 원정대의 발표로는 그 뼈...유골은 제8경골이네만." 아이이치로 일행은 '유골 조사단'이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검은 안개'라는 단편에서는 서로에게 분노한 상가 사람들이 누구는 두부를, 다른이는 케이크를 던지며 뿔난 어린이들처럼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처럼 어딘지 상쾌하고 즐거운 기운이 감도는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놀랄 만한 트릭의 향연. 이쯤되면 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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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10-07-1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뭐;; 사지 않을 도리가 없군요. ㅎㅎ

BRINY 2010-07-14 0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깃하네요.

보석 2010-07-1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 보관함에 어제 담은 건 어떻게 아시고 이렇게 뽐뿌질을..제다이님 나빠요!

무해한모리군 2010-07-14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담아놓고 이번달엔 책을 더사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는 중인데 이러시면 안되요 --;;

jedai2000 2010-07-1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Kitty님...ㅎㅎㅎㅎ 사셔도 아마 큰 후회 안 하실 것 같아요^^;;

BRINY님...세월이 좀 지난 책이라 어떻게 보실지는 모르겠는데, 옛날 느낌의 산뜻한 추리소설 좋아하시면 대만족하지 않으실까 싶네요^^

보석님...당장 보관함에서 장바구니로 옮기시기 바라요ㅎㅎ

고고씽휘모리님...흑흑, 저도 이미 7월달 구매를 끝낸 상태인데, 데니스 루헤인의 <운명의 날> 때문에 고민이예요. 지금 사야 사인본 받는데...그렇다고 또 살 수도 없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말 힘들어요ㅠ.ㅠ
 
뉴욕을 털어라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이원열 옮김 / 시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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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털어라>는 미국 추리소설계가 자랑하는 거장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도트문더 시리즈' 제1작입니다. 그는 지난 2008년 12월 31일 75세의 연세에 멕시코에서 휴가 중에 눈을 감았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2009년에 처음 떠오르는 해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1960년부터 작가 생활을 시작해 무려 95편의 작품을 남긴 웨스트레이크는 손 꼽히는 다작가였죠. 한 작품, 한 작품에 몇 년간 공을 들인다기 보다 타고난 아이디어의 샘과 천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슥슥 가볍게 써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비할 데 없이 많은 작품량과 후배 작가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거성의 위치에 오른 행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4권이나 되는 이야기가 이어진 범죄소설의 고전 '파커 시리즈'가 그의 대표작으로 1999년에 멜 깁슨이 주연한 영화 <페이백>은 파커 시리즈의 첫 작품(1962년 출간)을 스크린으로 옮긴 거예요. 국내에도 <인간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어 있는데, 걸인의 돈까지 양심의 가책없이 슈킹(?)치는 진짜 악당 파커가 자신을 배신한 친구와 애인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내용이랍니다. 갱스터가 등장하는 미국 소설을 보면 실제 범죄자에 불과한 그들이 어느 정도 미화되고, 그들의 범죄 행위도 이런저런 이유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지만, 파커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득과 복수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간 늑대니 출간 당시에 꽤 화제가 되었을 것 같네요.            


파커 시리즈로 새로운 유형의 장르와 캐릭터를 만든 웨스트레이크가 새로이 도전한 시리즈가 바로 도트문더 시리즈입니다. 1970년 이 작품 <뉴욕을 털어라>에 첫 등장한 전문 도둑 도트문더가 매 작품마다 불가능한 도둑질에 도전하며 대소동을 벌이는 이 시리즈도 전부 14권이나 되니, 파커와 더불어 작가가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에는 틀림이 없는 듯합니다. 2004년부터는 파커와 도트문더를 매년 한 권씩 번갈아 가면서 썼는데, 2009년에 출간된 유작이 도트문더니 작가와 함께 50년을 살아 숨 쉰, 아마도 문학을 넘어 미국 대중문화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친 캐릭터들이 아닐까 싶네요. <뉴욕을 털어라>의 원제는 <Hot Rock>. 이 작품에서 도트문더는 가상의 아프리카 작은 왕국을 상징하는 에메랄드를 털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는데, 그래서 제목에 Rock(돌)이 들어갔나 봅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도트문더는 원래 파커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구상하다가 뜻밖에 분위기가 너무 코믹해지자 이건 무자비한 파커에는 어울리지 않아!, 하고 접어둔 걸 나중에 아예 새로운 인물(도트문더)을 등장시켜서 만들어보자!, 하며 쓴 것이라고 하네요.


영화 <토머스 크라운 어페어>나 <오션스11> 같이 몇 명의 전문 도둑들이 모여 계획을 짜고 온갖 역경을 딛고 마침내 도적질에 성공하는 장르를 케이퍼(Caper)라고 부른답니다. 이 장르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도널드 웨스트레이크는 도트문더 시리즈를 특히 웃음이 넘실대는 코믹 케이퍼로 만들었어요. 천재적인 작전가 도트문더만 비교적 정상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절친한 친구 켈프는 나사가 조금 빠진 인물이죠. 운전담당 스탠 머시는 마마보이 기질이 있는 속도광, 자물쇠 담당 체프윅은 기차 오타쿠, 장비 담당 그린우드는 경찰이 몰려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여자를 꼬득이는 구제불능의 바람둥이입니다. 각자 맡은 일에서는 걸출한 능력을 자랑하지만 뭔가 사랑스럽게 맛이 간 이들이 벌이는 에메랄드 강탈 계획은 성공했다 싶으면 어긋나고, 이번에야말로 하면 역시나, 하면서 무려 여섯 번이나 계속됩니다. 똑같은 보석을 여섯 번이나 털어야 하는 이들의 기구한 사연은 정말 웃음 없이는 볼 수 없죠. 인간의 행동이라는 게 비록 도둑질 같은 범죄라도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인 모양입니다. 냉혈한 파커와 헐렁한 도트문더는 어쩌면 도널드 웨스트레이크가 바라본 범죄의 양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욕을 털어라>는 320페이지의 짧은 분량에 반 이상이 유머 넘치는 대화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혹시 보석을 빼돌린 게 아닌가 하고 도트문더가 체프윅을 의심하자, 그는 자기가 비록 이런 일을 해도 신용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라며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다름 아닌 도둑질이죠^^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명대사. 켈프가 밉살맞은 변호사(도트문더 일당을 배신한 전력이 있죠) 프로스커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프로스커의 약속과 10센트가 있으면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죠. 하지만 그냥 10센트만으로 사 먹는 커피 맛이 더 좋아요." 여기서 한밤에 떼굴떼굴 굴렀습니다. 아주 사실적인 케이퍼물은 아니고, 요즘 작품들 같이 특수한 장비가 등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타고난 이야기꾼만이 펼칠 수 있는 탁월한 '구라'와 '썰'이 있죠. 이런저런 배경지식을 한 무더기 펼쳐놓으면 소설이 되는 줄 아는 요즘 대중작가들에게 꼭 권하고 싶네요. 제 생각에 소설의 본질은 거짓말이고, 또 이야기라는 것을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요즘 대중소설 작가들의 죄악 중 하나인 한없이 늘어지는 분량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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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불 블랙 캣(Black Cat) 22
C. J. 샌섬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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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몇 년 전부터 추리소설의 폭넓은 출간 열기로 인해 수많은 추리소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영미, 일본, 프랑스나 독일처럼 나라도 다양하고, 퍼즐, 스파이, 하드보일드, 스릴러 등 장르도 천차만별이죠. 이중에서 역사 추리소설은 멀게는 <장미의 이름>부터 최근의 <다빈치 코드>(팩션이지만 팩션도 넓게 보면 역사 추리소설의 범주에 들어가겠죠?)까지 간간이 슈퍼 베스트셀러가 되곤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독자들은 소설을 보면서 단순한 재미를 넘어 뭔가 얻어가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더군요. 심심풀이로 소설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역사에 대한 몇 가지 지식을 얻는 걸로, 그냥 하릴없이 소설 보면서 시간 때운 게 아니라는 변명을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요? 제 생각에는 소설에서 재미만 얻어도 충분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 독자들은 지나치게 깐깐한 거 같네요^^ 

 
그런데 역사 추리소설을 통해 실제로 얼마나 많은 걸 얻을 수 있나를 생각해보면 약간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아시다시피 역사라는 건 어느 특정한 시대의 의복이나 음식 같은 미시적인 부분이든, 정치, 경제 같은 복잡한 것들이든 제대로 다루자면 책 한 권 분량은 훨씬 넘게 필요할 테니까요. 그러니 기둥 줄거리가 따로 있는 소설에서 제아무리 깊이 있게 역사를 그리려고 발버둥쳐봐야 결국은 단순한 배경 노릇밖에 못하게 되지요. 일종의 주마간산이라고 할까요.  물론 '역사 추리소설'에서의 '역사'가 공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 읽어봐야 소용없다, 앞으로 읽지 마라, 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 주장은 그래도 안 읽는 것보단 읽는 게 낫다는 거니까요. 예를 들어 제가 <수도원의 죽음>이나 <어둠의 불>을 읽지 않았더라면 중세 영국에서 있었던 수도원 해산이나 비서장관 토머스 크롬웰 등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을 텐데, 이 책들을 읽음으로써 그래도 단편적으로나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으니 약간의 수확은 되는 셈이지요. 결론적으로 잘쓴 역사 추리소설은 재미와 더불어 미약하나마 소득도 얻을 수 있으니 평이 좋은 놈으로다가 골라서 많이들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C. J. 샌섬의 '매튜 샤들레이크 시리즈'는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헨리 8세 치하를 배경으로 합니다. 헨리 8세는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을 하고, 앤 불린과 재혼하고 싶어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이혼이 허락되지 않죠. 헨리 8세는 왕이 되서 이혼도 못하고 살 바에는 차라리 교황으로부터 독립하고 내가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겠다, 고 결심하고 영국국교회를 성립합니다. 이 선언이 바로 유명한 '수장령'입니다. 그동안 로마 가톨릭의 지배를 받는 영국 내 가톨릭 성직자들의 탐욕과 전횡에 불만이 많던 개혁 세력은 이러한 왕의 독립 결심을 이용하여 위세가 당당한 가톨릭 성직자들의 직위를 해제하고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는 일에 나서게 되죠. 이것을 역사적으로는 '수도원 해산(Dissolution)'이라고 부른답니다. 수도원 해산을 주도한 개혁파의 우두머리가 비서장관 토머스 크롬웰입니다. 크롬웰은 거대한 영국의 수도원들을 하나씩 해체하고 재산을 국고로 환수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는데, 그 과정 중에 스칸시 수도원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자신의 심복인 곱추 변호사 매튜 샤들레이크를 파견해 사건을 해결하라고 명합니다. 여기까지가 바로 시리즈 1권 <수도원의 죽음>의 줄거리로, 토머스 크롬웰과 수도원 해산은 실제고, 매튜 샤들레이크와 스칸시 수도원의 살인사건은 가상입니다.
 

이 정도만 알아두면 시리즈 제2작 <어둠의 불>을 읽기에 충분합니다. 전작에서 토머스 크롬웰과 사이가 벌어진 샤들레이크는 런던에서 평범한 변호사로 살아가는데, 사촌 남동생을 살해한 죄로 체포된 엘리자베스라는 소녀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소녀가 법정에서 결코 입을 열지 않고 증언을 거부하자, 판사는 무거운 돌을 배에 얹어 척추를 부러뜨려 죽이는 압살형을 선고합니다. 과연 중세는 사람 목숨을 목숨으로 보지 않던 시대에 틀림이 없군요. 그때 안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토머스 크롬웰의 명령에 따라 압살형은 2주간 연기되는데, 그는 샤들레이크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소녀의 죽음을 2주간 연기해줬으니, 그 기간 동안 소녀의 무죄를 증명할 증거를 찾아보게나. 그 대신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게.' 크롬웰의 부탁이란 과거 비잔틴 제국에서 이슬람의 전함을 불태웠던 '그리스의 불'이라는 화염 무기를 찾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그리스의 불 이야기를 듣고는, 2주 안에 그것을 찾아 대령하라고 크롬웰에게 명을 내린 상태입니다. 만약 그리스의 불을 찾지 못하면 크롬웰은 몰락할 것이 분명합니다. 샤들레이크는 단 2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영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해결하고, 크롬웰을 무너뜨리려는 정치 세력들의 방해 공작을 피해 그리스의 불을 찾아야 하는 난해한 미스터리를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도원의 죽음>은 616페이지, <어둠의 불>은 670페이지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압박에 읽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하겠습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남은 분량을 확인하기 일쑤였으니까요. 원래 샌섬은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이라는데, 학자 출신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필력이 좋은 작가입니다. 어려운 표현이나 상징은 최대한 배제하고, 가급적 쉬운 묘사나 표현, 비유를 써서 크게 막히는 부분없이 술술 잘 읽힙니다. 다만 이 작가는 주인공의 행적을 거의 시간대 별로 상세하게 그리는 버릇이 있어 분량이 지나치게 많아지죠. 누굴 만나러 갔다가 허탕치고 그냥 돌아온 얘기라면, 다른 작가는 "나는 A를 만나러 갔지만 자리에 없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한 줄로 끝낼 겁니다. 그러나 샌섬은 A를 만나러 가는 길에 본 런던의 풍경이나 저잣거리의 물건 등을 세세하게 짚어주기에 필연적으로 페이지가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야기를 앞으로 진행시켜 나가는 효율성의 관점에서는 빵점이라고 하겠지만, 중세 런던의 시대 분위기나 정취를 느끼고 싶은 독자에게는 매력적인 장면들일 테니, 아무래도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나올 듯하네요.


또한 순수하게 추리소설만의 기준을 적용했을 때, 미스터리 구조가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약점도 눈에 띕니다. 두 개의 사건은 비교적 처음부터 범인이 뻔하게 드러나고, 아예 용의자들 자체도 몇 명 없어요. 사건 해결에 필요한 단서들을 모으는 과정도 우연에 의지하는 게 너무 많습니다. 샤들레이크야 중세인이니 이 책의 핵심 미스터리인 그리스의 불의 정체를 당연히 모르겠지만, 현대인인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뻔하고요. 칠흑같이 시꺼만 색에 자그마한 불씨라도 닿으면 큰불로 번지는 액체. 더구나 로마에서는 만들 수 없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만들 수 있었다. 이쯤 되면 독자 누구나 아는 건데, 정작 주인공들은 몰라서 계속 헤매니 답답함만 가중될 따름입니다(샤들레이크는 중세 유럽인이기에 지식의 한계가 있지만 독자들은 아니니까요). 

 
솔직히 길기만 하고 지루한데다 추리소설적인 재미까지 별로니 별 세 개, 평작 정도로 평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읽었는데, 막상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는 평가가 확 달라지더군요. 실제 일어났던 역사의 빈 공간 속에 흥미로운 가상의 이야기를 위화감없이 맛깔나게 버무린 필력이 일단 감탄스럽고요. 한때 개혁 세력의 일원이었던 주인공 샤들레이크가 자신들의 개혁이라는 것도 사실은 끝없는 정치투쟁의 악순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 또 자신이 도도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고통받는 서민 한 명 한 명을 성심성의껏 돕는 역할을 하면서 이 사악한 세상을 조금이나마 바로잡겠다는 결심을 하는 결말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역사 '추리소설'보다는 비교적 상류층이라도 곱추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마음 한구석에 열등감을 안고 사는 샤들레이크 변호사의 영혼의 성장기로 읽으면 더 흥미로울 소설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횡행하는 암울한 시대에 주인공 샤들레이크의 정직함과 인간미가 빛난다'라고 평한 추리소설 거장 콜린 덱스터의 말에 절대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함께 개혁의 꿈을 꾸고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기 위해 청춘을 바쳤지만 여러 한계로 결국 몰락해버린 옛 동지를 향해 피를 토하듯 하는 샤들레이크의 절규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먹먹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느낌을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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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직장인이 가장 부러워하는 학생의 특권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역시나 방학이 떠오른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두 달 가까이 통째로 쉬면서 마음껏 뛰어놀기도 하고, 하릴없이 방 안에 뒹굴뒹굴 누워 지낼 수 있는 방학은 학생만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호사가 아닐까. 그런데 경험상 방학이라고 늘 기분 좋은 순간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초등학교 몇 학년 여름방학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모님이 나를 시골 외가댁에 한 달가량 머물게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엄마가 모처럼 손이 많이 가는 날 돌보는 일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런 계략(?)을 꾸민 게 아닌가 싶은데, 외삼촌들은 전부 대학생이라 말도 안 통하고 또 엄마가 장녀인 탓에 당시에는 이모네 아들딸들은 아무도 태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같이 놀 또래 하나 없는 시골에서 한 달을 버티려니 숫제 죽을 맛이었다. 당시 시골집 평상에 누워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며 눈물 짓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운 좋게도 <흑백합>의 주인공 스스무는 나 같은 고문을 당할 필요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1952년 현재, 스스무는 도쿄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열네 살 소년이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옛 동료에게 초대를 받아 그 아저씨의 오사카의 롯코 산 별장에서 한 달간 머물게 된다. 아저씨에게는 스스무와 동갑내기인 카즈히코라는 아들이 있어, 둘은 금세 친해진다. 두 친구는 롯코 산 이곳저곳을 탐험하며 매일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날 표주박 연못이라는 곳을 갔다가 거기서 자신을 '연못의 요정'이라고 주장하는 아름다운 한 소녀를 만난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는 스스무, 카즈히코와는 달리 카오루라는 소녀는 오사카에서도 유명한 부잣집의 고명딸. 그 나이에 신분이나 재산의 격차 따위가 무슨 의미람. 세 동갑내기 소년소녀는 매일같이 롯코 산을 누비며 점점 가까워지는데, 안타깝게도 스스무와 카즈히코가 하필 둘다 카오루에게 반하는 바람에 문제가 생긴다. 둘 중의 한 명은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하잖아.

 

가본 적은 없지만 작가의 생생한 묘사 덕분에 수려한 풍광이 눈에 보일 듯 선명한 롯코 산을 배경으로 소년소녀의 풋사랑이 펼쳐진다. 고전적인 애정의 삼각 관계라 뻔하다고 생각할 독자들이 있겠지만,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이 딱 그 나이 대 소년의 행동과 사고를 보여 사랑에 미숙했던 어린 날의 추억도 떠오르는가 하면, 흡사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를 보는 듯한 애틋함과 아련함이 있다.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고, 혼자 오해하다가 잠 못 들지 못하는 밤이 계속되기 일쑤인 법. 예컨대 두 소년은 카오루의 집에 초대되어 그녀의 방에서 놀게 된다.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 카오루는 스스무에게는 자신이 평소에 쓰는 의자를 주고, 카즈히코에게는 고모의 화려한 벨벳 의자를 가져다준다. 스스무는 훨씬 좋은 고모의 의자를 카즈히코에게 준 것을 그녀가 카즈히코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열등감에 빠지지만, 카즈히코는 평소에 카오루가 쓰는 의자를 스스무에게 준 것을 두고 그녀가 스스무를 더 스스럼없이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좌절한다. 분명 카오루는 별 생각없이 의자를 나눠준 것일 테지만, 사랑을 경쟁하는 두 소년은 어디 그런가. 끊임없이 우리 중 누굴 더 좋아할까, 하고 고뇌하는 두 소년이 참을 수 없이 귀엽게 느껴진다.

 

이렇게 삼각 관계로만 진행되다 끝나면 어찌 이 작품이 2009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서 7위에 올랐겠는가. 풋풋한 십대 아이들의 사랑 이야기와 맞물려 하나의 살인 사건도 있다. 살해당한 이는 카오루의 둘째 삼촌. <흑백합>은 1952년 현재의 아이들 장과 나치스가 지배하던 1935년 베를린, 전쟁이 한창인 1942-45년의 장이 병행된다. 과거의 장에서 현재 아이들이 만나는 어른들의 옛 이야기가 설명되는데, 독자들은 이 옛 이야기들을 통해 지금은 단지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들로만 보이는 그들에게도 잔혹한 사랑의 엇갈림이 있었다는 걸 분명히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이 주로 내세우는 소년소녀들의 순박한 풋사랑이 유독 명징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그들과 대비되는 어른들의 은원 관계가 그만큼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백합은 원래 하얀 꽃인데, 검을 흑(黑)자를 앞에 붙인 게 아마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스포일러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소녀들은 누구 하나 살인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그저 어느 여름방학의 스쳐 지나가는 에피소드일 뿐.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온 어른들의 어두운 비밀을 알아차리기에 그들은 너무도 순수하고 맑은 존재였던 것이다. 단순히 미스터리로만 보자면 요즘은 잘 안 쓰는 평범한 서술 트릭을 사용한 것이나, 독자에게 모든 정보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감점 요소가 있지만 용의자가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뭐 했나를 차분차분 따지는 그런 본격 미스터리는 아니기에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곳곳에 복선이 있어 다 읽고 바로 한 번 더 읽으면 좋을 썩 괜찮은 미스터리 소설이다. 

 

작가 타지마 토시유키는 1948년생으로 실제 주인공들과 열 살 차이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 스스무들과 비슷하게 1950년에 소년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 막 전쟁의 참상을 벗어나 점차 발전 일로의 길로 나아가는 당시 오사카의 모습을 정확하게 스케치해낸다. 작가는 미스터리부터 모험소설까지 다양한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이 있다. 원래 10년 전에 한쪽 눈을 실명했다고 하는데, 점차 남은 눈의 시력도 사라져가자 실의에 찬 나머지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계획한 모양인지 맨션, 가재도구도 전부 처분하고, 전기, 인터넷 등도 모두 해약한 채 사라졌다고 하는데, 벌써 4개월째 소식이 없어 좋은 소식을 기다리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두 눈이 멀쩡한 우리가 시력을 상실한 작가를 두고 무책임한 자살이라고 무턱대고 비난하는 건 안 될 말이고,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마지막 작품으로 <흑백합>같이 여름날의 추억이 한없이 투명하게 빛나는 작품을 남긴 것에 작가 생활이 헛되지는 않았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이 주는 감흥에 흠뻑 빠져 책장을 다 덮은 새벽 3시부터 잠이 오지 않았으며, 죽기 전에 나도 이런 걸 꼭 써보고 싶다는 생각에 담배만 뻑뻑 물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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