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
기타쿠니 고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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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서점에서 꽤 많이 만나볼 수 있는 일본산 일상 미스터리 계열의 작품이다. 흔히 일상이라고 하면 날마다 반복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들의 집합을 말할 텐데, 비일상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미스터리하고 과연 합이 맞을까? 이 참신한 시도를 처음 해낸 사람이 80년대 말의 기타무라 가오루이다. 그는 데뷔작 <하늘을 나는 말>에서 평범한 여대생이 논리력과 추리력이 비범한 예능인 아재(?)와 일상 속에 숨은 미스터리들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을 써냈고, 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켜서 일약 '일상 미스터리'의 창시자가 되었다. 사실 영미권에서 그나마 일상 미스터리와 비슷하다고 할 만한 코지 미스터리도 분위기는 포근할지언정 살인이나 강력 범죄가 나오지 않는 경우란 거의 없다. 하지만 일본의 일상 미스터리는 홍차가게에서 여대생들이 홍차에 설탕을 일고여덟 스푼이나 때려넣는 이유를 밝힌다거나 초등학생이 읽지도 못하는 초대형 영어사전을 들고 학교에 간다거나 하는 그야말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하기 때문에 확실히 일본에서만 존재하는 유니크한 장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작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도 이러한 일상 미스터리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 전형적인 소도시를 배경으로 별 볼일 없는 변호사(변호사라는 직업 자체가 별 볼일이 없기가 힘들긴 하다만)와 그의 조수 격이지만 실제로는 탐정 역할을 도맡는 동생이 동네의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는 연작 단편집이다. 명색이 일상이라면서 탐정의 성격은 본격 추리소설처럼 광인에 가까운 괴짜 일색이라면 분위기가 맞지 않으니까 일상 미스터리의 탐정은 비교적 정상인(?)이나 건실한 생활인이 많다. 하지만 매일 지하철에서 만날 것 같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사건을 해결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반드시 독자들을 사로잡을 만한 개성이나 특별한 추리 기법, 독특한 분위기 등이 있어야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터. 그래서 일상 미스터리의 탐정은 서점 직원이라서 서지학에 강하다거나 꽃집 주인이라서 꽃에 대해 잘 알아 그 전문지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식으로 평범함의 함정을 피해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에서의 탐정 역인 동생은 동서고금의 명언 덕후라서 사건 해결 과정 곳곳에 명언을 쏟아놓는다. 그밖에 주인공들이 기거하는 카페에 고양이가 여러 마리 있고, 수천 권의 만화책이 있는 것 또한 독자의 호감을 사고 공감대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가의 유인책(?)이 아닐까 싶다.

 

다루는 사건은 일상 미스터리답게 강력범죄는 일절 없고 소소한 편이지만 미스터리로서의 완성도는 크게 빠지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아무리 우리네 일상 속의 가벼운 미스터리를 다루는 이야기라고 해도 추리소설은 추리소설다워야 한다. 한마디로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고, 해답을 도출해나가는 과정 속에서 치밀한 논리와 추리가 없다면 아무리 따뜻하고 편안한 이야기라도 추리소설로서는 실격이라는 말이다. 다행히 <고양이가 있는 카페의 명언탐정>은 위에 언급한 공정한 단서와 논리의 견고성, 단숨에 정답으로 도약하는 추리의 탁월함이 만만치 않았다. 다른 일상 미스터리들과 비교해도 다소 가벼운 분위기에 별 기대없이 책장을 넘겼다가 의외로 추리 파트는 날카로워 읽는 맛이 있었다고 할까, 작가가 본격이나 하드보일드에도 손을 댄 적이 있다고 하는데 아마 추리에 좀 더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 작품들도 괜찮은 완성도를 보이지 않을까 상상이 된다. 

 

평범한 갑남을녀인 우리의 인생에서는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 반대도 물론이고. 그런데 이 소설의 무대는 착한 사람과 좋은 일들과 고운 마음씨들만 있는 희귀한 마을로 보인다. 주인공에게는 사회생활에는 매우 서툴지만 무슨 사건이든 척척 해결해주는 도라에몽(?) 같은 동생과 어렸을 때부터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짝사랑해주는 아이돌 간호사, 룸살롱을 좋아하지만 때로 인생에 깊은 조언을 남겨주는 멘토 등 따뜻한 사람만 주변에 한가득이다. 심지어 가끔은 잔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귀찮은 부모님도 안 계시고, 그저 응원만 해주는 이모 내외랑 산다. 꼭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담은 쇼핑백을 보는 것 같은 판타지스러운 설정이라 오히려 웃음이 나오더라. 소소한 일상의 따뜻함과 행복을 전달해주는 것만이 일상 미스터리의 미덕은 아니다.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이 있는 것처럼 때로는 이웃의 사소한 악의를 목도하고 씁쓸함을 느끼기도 하고, 욕망이나 욕정에 결국 무너지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에 한숨 짓기도 하는 것도 분명한 우리의 '일상'이다. 책장을 다 덮고 나서 작가의 다음 작품에서는 일상의 다른 면도 좀 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차피 팍팍하고 끔찍한 얘기는 뉴스에서 매일 접하는데, 가끔은 이런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따뜻함 일변도에 푹 젖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 없는 어떤 곳에 가보고 싶어서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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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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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일본산 추리소설을 별로 보지 않았다. 특히 신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런데 히가시노 게이고나 미야베 미유키같이 예전부터 많이 읽어왔던 작가들은 왠지 신선하지 않고, 요즘 대세라는 라이트노벨풍 미스터리는 애정이 없어 구매를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아키요시 리카코의 <성모>는 출간 전부터 기대할 만하다는 소리를 이곳저곳에서 들은 터라 나오자마자 얼른 구해 읽어보았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좀 짧기도 했지만) 내린 결론은 모처럼 나온 일본 추리소설의 수준작이라는 것이었다. 여기다 요약하기도 좀 뭣할 만큼 아주 엽기적인 사건이 연속되어 (좀 끔찍하긴 했지만) 독자의 눈을 계속 잡아끄는 효과가 확실했고, 세 명의 등장인물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줄거리를 진행시키는 구성이라 조금 질릴 만하면 화자가 계속 바뀌니 읽으면서 지루할 새가 없었다. 특히 수준급이라는 반전은 확실히 인상적이라 이 정도면 그간의 일본 추리소설 가뭄(?)을 확실히 해갈시켜줄 물건이라는 생각이다.

 

흔히 반전이 중요한 추리소설은 줄거리를 비롯해 어떤 사전 정보도 없이 읽는 게 가장 재미있는 법이라서 내용 설명을 최소한으로 줄이자면, 우리나라의 일산 같이 애 키우기 좋은 신도시에서 유치원 남학생들이 연속해서 유괴되어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다. 그 동네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은 모두 초비상 상태로 특히 난임으로 아주 어렵게(처절하리만큼 어렵게) 딸아이를 가진 한 엄마는 당연히 거의 신경쇠약 직전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엄마가 '주인공1'이고, 남아 연쇄유괴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두 남녀 형사가 '주인공2' 격이다. 마지막으로 인근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도 적당히 잘하고 검도부로 활동하며 후배들도 잘 이끌어 학교에서 인기가 아주 높은 학생이 있다. 특기인 검도로 지역 어린이들에게 검도 가르치기 봉사활동도 하는 이 쿨한 학생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는데, 특정 아동에게 살인의 충동을 느끼면 멈출 수 없다는 것. 즉, 신도시를 공포에 물들게 한 이 사건의 범인이 분명한데 이 녀석이 바로 '주인공3'이다. 한마디로 사건의 관찰자, 수사관, 범인의 삼각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모든 세계가 뒤집힌다는) 마지막 20페이지에 하나로 합쳐진다.

 

책표지에 적혀 있는 모든 세계가 뒤집힌다는 반전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책의 결정적인 홍보 포인트로 내세우는 부분이기도 해서 반전이 너무 궁금했다. 서둘러 뚜껑을 열어보니 반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부 두 개였다(독자에게 다가올 충격파의 비중으로만 보면 2:8 정도). 흥미롭게도 첫 번째 반전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두 번째 반전의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끝나기 60페이지 전쯤에서 나오는 첫 번째 반전이 공개되면서 자연스럽게 두 번째 반전으로 연결되는 구조인데 이런 방식은 별로 본 적이 없어 제법 신선했다. 나 같은 경우 첫 번째 반전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막상 첫 번째 반전을 알게 되자 어렴풋이 최종 반전은 이렇지 않을까 짐작이 갔고, 그 짐작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 책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대개 동의하겠지만 첫 번째 반전을 넣지 않고 독자들에게 범인과 관계되는 모종의 사실을 처음부터 오픈했더라면 분명 난이도가 많이 낮아졌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고심 끝에 첫 번째 반전을 넣은 다음 책이 끝나기 직전에 터뜨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는 순간을 최대한 지연시켰다고 생각한다. 

 

역자후기를 읽어보니 일본에서 언페어 논쟁이 있었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첫 번째 반전 쪽에서 독자들이 눈치챌 만한 공정한 단서가 좀 부족해서 그렇지 않았나 싶다(단서가 아예 없지는 않다). 참고로 두 번째 반전에서는 별로 걸리는 구석이 없었다. 작가는 우타노 쇼고의 팬이라고 하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꽤나 히트를 쳤던 모 작품의 핵심 트릭과 닮았다. 다만 우타노 쇼고의 그 작품이 무리수에 가까운 트릭이라도 대단히 교묘하게 설계해서 결국 독자들을 굴복시켰다면, <성모>는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닳고 닳은 추리소설 독자들의 입조차도 싹 다물게 만들 만한 교묘함이 아주 조금 부족했다고나 할까. 물론 80년대에 데뷔해 수십 편의 추리소설을 쓴 노장과 이제 서너 편을 쓴 신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을 테고, 리카코 작가도 매우 선전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요즘 본격 추리소설을 보면 고래로 세상에 안 나온 트릭이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면서 트릭에는 힘을 덜 기울이고, 드라마적인 완성도나 힐링 요소 등의 분위기로 때우는 경향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성모>와 아키요시 리카코 작가는 본격 추리소설의 재미는 역시 세상이 뒤집히는 트릭과 반전에서 나온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밀어붙여 그럴싸한 성과를 거두었다. 신예의 인상적인 활약에 앞으로도 나를 비롯한 추리소설 팬들의 주머니가 좀 더 엷어질 것 같다는 기분 좋은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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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국의 성 1 학생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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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 팬들이 가장 기다려왔던 선물이 드디어 도착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제4편 <여왕국의 성>이 제3편 <쌍두의 악마>에 이어 6년 만에 출간된 것이다. 재미있는 건 일본에서도 <쌍두의 악마>는 1993년에 나왔고, <여왕국의 성>은 2008년에 출간되어 무려 15년 만의 후속작이었다는 것. 우리나라 출판사에서도 일본과 비슷하게 어느 정도 텀을 맞춰주느라 일부러 6년을 기다린 걸까? 잘은 모르지만 일본보다 9년 앞당긴 것에 충분히 만족한다. 개인적으로도 학생 아리스 시리즈와는 작은 인연이 있는데, 예전 출판사를 다닐 때 제2편 <외딴섬 퍼즐>을 담당 편집한 적이 있다. 그때가 2008년 봄이었지, 아마. 당시는 이미 <쌍두의 악마>는 일본에서 출간된 지 오래였고, <여왕국의 성>도 일본 출간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외딴섬 퍼즐>은 물론 작품도 재미있었지만, 그전 출판사에서 이직하고 처음 작업한 책이라 꽤나 열의를 기울였는데 안타깝게도 판매가 썩 좋지 못했다. 게다가 <쌍두의 악마>와 <여왕국의 성>은 둘 다 2권으로 나와야 할 만큼 분량도 만만찮아 윗분들께서 시리즈 중단을 통보했었다. 편집자이기 전에 추리소설 마니아였기 때문에 내가 일을 잘 못해 학생 아리스 시리즈가 여기서 끝나는구나 죄송했는데, 웬걸 나보다 훨씬 훌륭한 편집자님이 3편과 4편을 뚝심 있게 출간해주셔서 그저 반갑고 기쁠 따름이다.

 

 

'관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함께 일본 신본격 추리소설을 대표하는 작가가 바로 <여왕국의 성>의 아리스가와 아리스이다. 특이한 이름이라 필명임을 짐작케 하는데, 본명은 우에하라 마사히데. 이 작가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와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두 가지 시리즈로 잉크밥을 먹고 산다.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화자이자 왓슨 역을 맡는 추리소설가 아리스(저자와 동명)가 범죄학 조교수 히무라 히데오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고, <여왕국의 성>이 포함된 학생 아리스 시리즈는 화자이자 왓슨 역을 맡는 추리소설가 지망 대학생 아리스(저자와 동명)가 28살 늙다리 선배(이지만 명탐정) 에가미 지로와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이다. '아리스'라는 이름이 많이 나와 처음 보시는 분들은 좀 헷갈릴 수도 있겠다. 아무튼 두 시리즈의 화자인 작가 아리스와 대학생 아리스는 둘 다 추리소설을 쓰는 사람들이라 작가 아리스가 쓰는 추리소설이 '학생 아리스 시리즈', 학생 아리스가 쓰는 습작 추리소설이 '작가 아리스 시리즈'라는 재미있는 설정을 보여주고 있다. 쉽게 설명하려 했으나 왠지 설명하면 설명할수록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여왕국의 성>과 인연이 없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다음에 소개하기로 하고,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제일 독특한 특징이라면 주인공들이 전부 대학생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19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추리소설 연구회 대학생들이 엠티만 갔다 하면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김전일'스러운 전개의 원조 격이다. 화자 아리스가 신입생이었던 여름방학 엠티 때는 화산 분화로 고립된 산에서 연쇄살인이 일어나고(<월광게임>), 2학년 때는 신입 회원으로 들어온 어여쁜 여대생 마리아의 할아버지가 소유한 섬에서 또 연쇄살인이 벌어지고(<외딴섬 퍼즐>), 2학년 2학기 때는 전작에 얽힌 모종의 사정으로 상심한 마리아가 틀어박힌 산중의 예술가 마을에서 또또 연쇄살인이 벌어진다(<쌍두의 악마>). 이쯤 되면 여행이라면 신물이 날 법도 한데 지치지도 않고 떠나는 녀석들이 더 대단할 지경이다. 아무튼 아리스가 3학년이 된 <여왕국의 성>에서는 UFO와 외계인을 숭상하는 신흥 종교 교단에서 또또또 발생하는 연쇄살인에 맞서는 추리소설 연구회의 경천동지할 활약이 펼쳐진다. 화자 아리스와 그가 짝사랑하는 마리아, 허당 선배 콤비 오다와 모치즈키, 부드럽고 섬세한 인품의 소유자이면서 뜻밖의 놀라운 추리력도 겸비한 에가미 지로. 멤버 모두가 대학생이다 보니 자연스레 경쾌한 분위기와 코믹한 만담, 미묘한 사랑 이야기 등 청춘소설로서의 싱그러움도 아울러 느낄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다른 추리소설들이 별로 가지지 못한 작가 아리스 시리즈만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이 시리즈의 진짜 작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학생 아리스 시리즈를 5편에서 끝낼 계획이라고 오래전부터 밝혔는데, 아마 평범한(?) 대학생들이 잇달아 연쇄살인에 휘말리는 이야기는 다섯 개까지가 한계라고 본 것 같다(나는 솔직히 두 개도 많다고 생각한다ㅎㅎ). 그렇다면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추리소설 스타일은 어떨까? 그야말로 애거서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 등 고전적인 퍼즐 추리소설을 현대에 계승한 정통파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특히 엘러리 퀸의 영향을 많이 받아 논리를 강조하는 축이며 퀸의 전매특허인 소거법으로 추리를 전개해 나가는 점이 영락없이 퀸과 판박이이다. 아야쓰지 유키토도 그렇고, 요즘 인기 있는 마야 유타카 같은 추리소설가는 범인의 의외성 측면에서 정말 생각지도 못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는데,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완벽한 페어플레이어라서 용의자로 한정한 인물 외의 범인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그러니 이 작가 책을 읽을 때는 마음을 편히 먹고 용의자 명단을 살펴가면서 하나하나씩 아닐 것 같은 사람을 지워나가라. 그러다 보면 (운이 좀 받쳐주면) 범인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 고전적인 본격 추리소설의 난점이랄까, 예전만큼 오늘날 사랑받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것은 어쩌면 천편일률적인 단서 수집 장면과 용의자들과의 기나긴 탐문이 지루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탐정이 사건을 해결하려면 살해 현장을 오가면서 핵심 단서를 수집하고, 용의자들과 대화를 거듭하며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본격 추리소설에서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이 장면들이 액션과 스릴에 치중하는 요즘 독자들에겐 너무 느린 템포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렇다고 분량을 대폭 줄여 사건 해결과 직결되는 단서만 적는다면 단번에 답이 나오게 마련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해결과 상관없는 가짜 단서와 쓸데없는 증언들 속에 진짜를 살짝 숨겨두어야 독자들이 속아 넘어갈 게 아닌가. 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바로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주인공들을 대학생으로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같은 단서 수집과 탐문 장면이라도 대학생들이 찢고 까불고 만담을 하면 그래도 좀 더 유쾌하게 페이지가 넘어가며, 미묘한 연애 감정이나 20대 초반 순수한 젊은이가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는 단상 같은 내용들이 조사 중에 더해지면 꼭 추리소설이 아니더라도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작품에 유독 책이나 영화 얘기, 지방의 역사, 음식 등 잡설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을 웬만큼 읽은 나도 아리스가와 아리스만큼 흥미롭게 단서 수집과 탐문 대화를 전개해 나가는 본격 추리소설 작가를 본 적이 없다.

 

 

이 소설의 번역자 또한 자타 공인 아리스가와 아리스 마니아로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설에도 참 공을 들였는데, 결정적인 트릭에서 살짝 문제가 되는 부분까지 양심적으로(?) 밝혀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나도 읽으면서 이 부분은 조금 그렇지 않나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본에서도 조금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트릭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치명적인 결함까지는 아니고 살짝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고만 보면 될 것 같다.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몇몇 단어가 있다. 여행, 동아리, 사랑, 우정 등등... 이런 멋진 테마들을 본격 추리소설에 잘 녹여내 즐거운 읽을거리를 만들어낸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감탄해 개인적으로도 살짝 흉내내본 바가 있다. 물론 결과물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신작 <여왕국의 성>을 읽으면서 또다시 한 수 배운 느낌이다. 특히 조연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그러한데, 에가미 지로와 마리아, 아리스 등의 주연 캐릭터는 당연히 핵심적인 내용을 담당하지만 개그를 담당하는 오다와 모치즈키는 어디 그런가. 조금만 시선을 거두면 병풍으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두 개그 캐릭터를 위해 멋진 탈출 장면까지 만들어주면서 조연들도 충분히 뛰어놀 여지를 만들어준 수법은 정말 교묘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여왕국의 성>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에게 있어 여러 추억과 과제, 배울 점 등을 떠올리게 만든, 영감을 주는 멋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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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니 2016-12-27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잘 읽었습니다.
이 작가의 책은 아직 읽어본적은 없지만 잘 정리해주셔서 도움이 많이되네요 참고하겠습니다.



jedai2000 2016-12-27 17:20   좋아요 0 | URL
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작가가 장난도 좋아하고, 설정도 복잡해 설명이 넘 어려워진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도움이 됐다니 정말 다행이네요. 1권의 핵심 트릭이 일본어의 특징을 이용한 다잉메시지라 1권은 저희에게 크게 다가오지 않지만 2권부터는 정말 재미있는 소설입니다. 기회되시면 꼭 한 번 읽어보세요^^

쭈니 2016-12-2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일미 막 읽기 시작했을때
제다이님 추천도서 보고 구입하기도하고 읽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좋은 책 많이 알게됐습니다.
늦었지만 감사인사라도 드려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뻑 ^^

jedai2000 2017-01-13 01:20   좋아요 0 | URL
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쓴 리뷰가 266편이 넘는데 문득 그걸 쓴 시간을 생각해보니 편당 1시간만 걸렸다고 쳐도 266시간이더라고요(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걸립니다ㅠ.ㅠ). 인생의 많은 부분을 투자한 셈인데 쭈니님처럼 제 추천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다면 그만한 보람이 없습니다. 큰 힘과 용기 얻고 내년에도 더욱 리뷰에 매진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리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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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크리피> 이후 오랜만에 읽은 공포소설이다. 코미디만큼이나 호러도 각 나라의 문화적인 토양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일반적이라 서양에서 날고 긴다는 공포물을 봐도 뜨뜻미지근할 때가 많다. 그런데 전설적인 <링>이나 <검은 집>, 영화 <주온> 등 일본의 공포물은 비교적 한국에서도 잘 먹히는 것 같다. 같은 동북아시아권이라 생활상이나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비슷해서일까? 아무튼 이번에 소개할 <리카>라는 작품이 제2회 일본 호러 서스펜스 대상작이라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어보았다. 일본산 호러에다 문학상 수상작이라면 아무래도 기본 이상은 할 확률은 높으니까. 무심코 한밤에 반쯤 읽다가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어 책장을 덮고 말았다. 모든 게 잠든 한밤중에 그동안 의식하지 못했던 괴이한 잡음들이 왜 이리 많은지 무서워서 버틸 수가 없었다. 실체를 알고 나면 고작 전자제품이나 바람소리 등에 불과하겠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공포가 최고조에 달해 예사 소리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다음 날 환한 오전에야 다 읽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국가대표 쫄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 작품을 새벽 2시경에 끝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야밤에 공동묘지로 느긋하게 산보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소감을 말하기 전에 무심코 공포소설은 참으로 권선징악적(?)이고, 체제수호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리카>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공포물은 주인공이 꼭 하지 말라는 짓을 하거나 비도덕적인 일을 할 때 단죄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 대학생들이 놀러갔을 때 몰래 얼레리꼴레리를 하는 커플이나 만취할 정도로 술을 먹고 마약을 하는 녀석들은 저승에 이미 한 발짝을 걸친 셈이다. 그 밖에 외딴 곳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낯선 자를 태워주거나 절대 열지 말라고 써 있는 책을 펼쳤다면 그저 고통 없이 죽기만을 빌어라. 하긴 어렸을 때도 엄마가 곱게 방 치우라고 하면 어디 말을 듣는가. 몽둥이를 들고 와서 눈에 불을 켜며 소리소리 질러야 겨우 말을 듣지. 그런 의미에서 공포소설 작가들은 본질적으로 몽둥이를 든 엄마와 마찬가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나쁜 짓하면 흉악한 꼴을 당한다고 했지!!!" 그렇다면 공포소설 주인공들은 꼭 나쁜 짓을 해서 벌받는 사람만 나와야 할까? 뭐 아닌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지나가는 벌레 한 마리도 밟아 죽이지 않는 훌륭한 인격자가 원인도 모른 채 희생양이 되면 읽는 독자들의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한마디로 어느 정도는 당할 만한 놈이 당해야 보는 독자들도 마음 편히 책장을 넘길 수 있기 때문에 작가들이 그렇게 쓰는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리카>에서 주인공이 당하는 이유는 인터넷 채팅 때문이다. 사랑스런 외동딸을 두고 아내와도 큰 문제가 없는 40대의 중년 가장이 우연히 인터넷 채팅에 발을 들이면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채팅에 빠져들면서 낯선 여자들을 꼬시는 도입부가 전체 360페이지 중에서 100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제법 분량이 긴데, 이 부분은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흥겹게 묘사되어 있어 책장이 바람개비처럼 훌훌 넘어간다. 개인적으로 채팅으로 여자 꼬득여본 일이 한 번도 없어 한 수 배우는 느낌으로 묘하게 정독이 되더라. 아무튼 주인공은 채팅으로 십 수 명의 여자와 교류하며 그중 한 명과는 얼레리꼴레리도 성사시키는데 내가 정말 부러워서...흠흠. 작가가 도입부를 이렇게 밝게(?) 처리한 이유는 당연히 주인공의 도덕적 타락을 고발하는 면도 있을 테고, 또 중반부터 그가 겪는 지옥도와의 대비를 강렬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전반부가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후반부의 고통을 겪으면서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적인 낙폭이 훨씬 클 테니까. 절찬리에 채팅을 하던 주인공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얼레리꼴레리(이 표현이 이상하게 남발되네)를 하고 이 짓을 접자, 하고 마지막으로 공을 들이던 상대가 있다. 조금 소심해 보이지만 따뜻하고, 다른 여자들보다 좀 의존적인 성격 같지만 천성적인 상냥함이 있는 간호사의 이름이 바로 '리카'. 그런데 막상 만나서 얼레리꼴레리(또!)를 하기 직전, 리카가 조금 이상하다. 하룻밤 새 전화를 20통 이상 하는가 하면 집으로 괴이한 팩스를 보내고 몰래 사무실에 잠입해 스크린세이버를 바꿔놓는다. 짐작하겠지만 주인공이 이 여자, 이상하구나 싶어 연락을 딱 끊으려 했을 때가 바로 지옥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리카는 역대 어느 소설에도 나온 적 없는 최강의 스토커였으니 말이다.

 

 

대략 이런 줄거리이다. 본격적으로 리카가 활동하는 시점부터는 비교적 여성 스토커가 나오는 공포소설의 정석대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으나 템포도 빠르고 순간순간 섬찟한 장면들이 연속되어 단숨에 책장을 덮게 만든다. 편집자 출신이라는 작가는 배경 묘사나 분위기보다 사건 위주로 휙휙 이야기를 전개시켜 요즘 인기 있는 인터넷소설 같이 가독성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다. 데뷔작 <리카>가 대단히 히트해 10년 만에 속편 <리턴>도 나왔다는데, 아마 <리카>에서 10년 동안 성장한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비주얼적인 면에서나 성격적인 면에서나 '리카'라는 존재가 주는 압도감이 있어 <링>의 '사다코'처럼 속편 및 영상화도 얼마든지 이뤄질 수 있는 괜찮은 상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휘몰아치는 박력과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충격적인 공포 장면들이 공포소설 애호가들을 충분히 만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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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14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저요! 야밤에 공동묘지가 무섭지않은 1인!^^
근데 얼레리꼴레리가 뭘까요~^^ 대따 궁금해!!^^

jedai2000 2016-12-14 15:40   좋아요 1 | URL
막상 야밤에 공동묘지 가시면 무서우실 걸요ㅋㅋ 솔직히 끝까지 못 다녀오신다에 만 원 걸겠습니다ㅎㅎ

얼레리꼴레리는 참 남자에게 좋은 건데...뭐라 설명할 말이 없네요^^;;;

[그장소] 2016-12-14 21:41   좋아요 0 | URL
음..그럼 제가 만원 벌었네요! 확실히 공동묘지를 저는 밤에 가는게 좋거든요! ㅎㅎㅎ
사람도 없고..적요하고 얼마나 편안한데요! ^^

남자한테 좋은 , 마늘입니까? ( 아닌가? 그 무슨 광고가...퍼뜩!!)

jedai2000 2016-12-15 02:50   좋아요 1 | URL
헐, 진심이신가요? 혹시 공동묘지 근처에 사세요? 국가대표 쫄보인 저는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꼭 만 원 드리겠습니다ㅎㅎ

남자한테 참 좋은 건...그 광고에서는 아마 산수유였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가 적다고 합니다만 얼레리꼴레리가 잘만 되면 남녀 모두 좋은 경우도 있긴 할 겁니다^^;;

[그장소] 2016-12-15 04:29   좋아요 0 | URL
어릴때 공동묘지를 거쳐 학교를 다녀 그런가봐요. 거기 분위기 전 좋아해요. 겨울엔 특히 ~^^ 여름엔 반디불이도 잔뜩보고요!^^
제가 미스터리 심령썰렁물을 상당히 애호하거든요!^^ ㅎㅎㅎ

산유수 ㅡ 아! 핫!^^ㅋㅋ

jedai2000 2016-12-19 17:45   좋아요 1 | URL
낮에도 공동묘지 가면 무서운데 어렸을 때부터 단련하셔서 겁이 없어진 거로군요. 그장소님 학교 친구들은 전부 귀신 잡는 해병대이겠어요ㅎㅎ 귀신들도 먹고살려면 좀 겁에 질려줘야 하는데, 그장소님 만나면 걔네들도 당혹스럽겠는데요^^

기회가 되면 제가 꼭 미스터리 심령썰렁물을 써보겠습니다!!!

[그장소] 2016-12-19 23:03   좋아요 0 | URL
ㅎㅎ그러게요. 귀신이 무서워야 하는데, 사실 사람이 더 무서우니 신기하죠?

꼭 꼭 심령썰렁물 ㅡ부탁드려요!^^
 
유곽 안내서 - 제137회 나오키 상 수상작
마쓰이 게사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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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서점에서 이 책을 샀는데, 마침 계산대에 젊은 아가씨가 서 있어 책을 내미는 손이 무지 부끄러웠다. 모르는 사람이 <유곽 안내서>라는 제목만 보면 영락없이 어디 유곽이 괜찮고, 어디 아가씨가 예쁘고 잘해준다(?)는 걸 알려주는 안내서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인터넷으로 살 걸 그랬다는 후회를 하며 서점을 나왔다. 그런데 사실 요즘 우리나라 전통(?) 유곽은 거의 멸종 단계라서 굳이 안내서가 필요하진 않을 듯하다. 내가 쭉 살아왔던 인천에도 전국구로 유명한 곳이 두 군데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진작에, 나머지 하나는 동네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영업이 원활하지 않다고 한다(난 도대체 이런 걸 다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_-??). 아무튼 전성기 때는 대단했다던 파주나 평택도 최근에는 끝물이라 하니 몸 파는 여인들을 쇼윈도 아래에 전시하다시피 해서 손님을 맞는 속칭 '정육점' 방식의 유곽은 이미 시효를 다한 것 같다. 다만 밑천이 안 드는 이 장사(?)는 유사 이래 인간사회에서 없어져본 적이 없으니 사라진 유곽 대신 오피나 안마방 같은 신종 성매매로 대체되는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렷다.

 

 

마쓰이 게사코가 지은 이 책의 원제는 <요시와라 유곽 안내서>이다. 지금 제목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요시와라'가 일본 에도시대(1603-1867)에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했던 대규모 유곽을 이르는 말이므로 제목만 봐도 시대소설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또한 지금은 사라진 요시와라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 유녀들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자세하게 '안내'하는 일종의 교양서 기능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접대나 청년 성공과는 큰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유흥을 접해본 일이 거의 없어 솔직히 이쪽 풍경에 제법 흥미를 가지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웬만하면 이런 이야기 다 흥미로워하지 않는가(개인적인 호기심을 남성 일반으로 확대하여 면죄부를 꾸미는 중). 뭐 그런 이유로 대단히 몰입하며 읽었다는 이야기다.

 

 

이 책은 대히트했던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처럼 인터뷰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인터뷰어가 요시와라에 직접 찾아가 관련자들을 하나씩 인터뷰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인터뷰를 받는 사람 중에는 요시와라의 일급 기루 사장도 있고, 손님으로 찾아간 사람도 있고, 심지어 유곽에 손님들을 실어나르는 뱃사공도 있다. 모종의 일로 이번에 최초로 요시와라에 발길을 들인 인터뷰어는 이곳에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들을 대변하는 존재라서 처음에는 요시와라의 운영 방식이나 유녀들의 등급 체계, 유녀들의 생활상, 손님을 받는 시스템 등 보편적인 정보를 얻는 일부터 시작한다. 한마디로 독자들과 스텝을 맞춰주는 것이다. 책이 중반쯤 지나 인터뷰어와 독자들이 어느 정도 요시와라에 익숙해졌을 때 저자는 얼마 전 이곳에 일어났던 '대사건'을 언급하며 슬그머니 분위기를 띄운다. 요시와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유녀들을 부르는 명칭 '오이란' 중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던 가쓰라기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벌인 것 같은데, 시원하게 다뤄주지 않으니 독자들은 애가 탄다. 이쯤 되면 요즘 아이돌같이 어마어마한 인기에 카리스마도 대단했던 가쓰라기와 그녀가 벌인 대사건이 알고 싶은 나머지 단숨에 끝까지 독파하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남자로서의 호기심이 이 책을 읽게 한 일등 동기지만 막상 다 읽고 나서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대개 집안이 가난해 6-8세에 팔려온 소녀들이 유녀로 키워져 운 좋게 낙적(부잣집에 팔려가는 일)되지 않는 한 살아서 나가기 힘든 곳이 요시와라였으니 말이다사실 당시나 지금이나 마음속 깊이 원해서 그런 일을 할 여자는 하나도 없을 텐데 오죽 현실이 녹녹치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까지 포기하겠는가. 아무튼 요시와라는 철저하게 여성들을 착취하는 공간. 인기 있는 오이란이 금방 돈을 모으면 나갈 게 뻔하니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놓는데, 그건 요즘도 절찬리에 통용되고 있는 방식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래저래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요시와라를 비판하는 것만은 아니고, 하룻밤 인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유녀와 손님 사이의 야릇한 풍정 등 풍속소설로서의 맛도 충분히 주고 있다. 짧은 분량에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점층시키는 기법을 잘 활용해 가독성이 높으며 무엇보다 재미가 있으니 꼭 일독해보시라. 마지막으로 <유곽 안내서>가 남자들에게 농락당하기만 하는 불쌍한 유녀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해 독서를 포기할 여성분들이 있을까 봐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이지면 가쓰라기는 그렇게 만만한 여자가 아니다. 그만큼 그녀가 벌인 '대사건'은 남성 위주의 에도사회에 던진 통쾌하고 장렬한 한 방이었다!

 

 

세상은 유곽이 거짓말투성이라고 하네만, 사실 이곳만큼 남자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도 없지. 아하하, 그거야말로 이 세상의 진실인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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