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탐정 홈즈걸 2 : 출장 편 -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 명탐정 홈즈걸 2
오사키 고즈에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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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작이 꽤 인기가 있었던 모양인지 속편도 출간되었다. 속편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는 무려 장편! 이번 이야기는 교코와 한때 같이 일했던 미호라는 아가씨의 편지로 시작한다. 미호는 현재 나가노의 고서점 '마루우도'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 서점에서 때때로 유령이 출몰해 영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단다. 더구나 그 유령은 27년 전에 유명했던 작가 기타야마를 살해한 후 체포되어 감옥에서 병사한 제자 아키오로 보인다는데...이번에도 역시 서점에서 벌어진 미스터리다. 서점의 영업을 방해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서점 탐정단 교코와 다에는 휴가를 맞아 마루우도로 향한다. 유령의 정체도 밝혀내고, 27년 전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끝간 데 없이 소박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전편과 흡사하다. 다만 27년 전에 일어난 기타야마 사건이, 그가 자고 있는 사이 누군가 침입해 칼로 난도질해 죽였다는 끔찍한 내용이라 전편보다는 정통적인 미스터리 색채를 보이고 있다. 전편이 소소한 일상의 미스터리였다면, 이번 작품은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나간 살인 코지 미스터리 정도라고 할까. 단 3박 4일 동안의 휴가 동안 모든 걸 밝혀내는 내용이라 제법 속도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조금 지루한 느낌도 받았다. 27년 전 기타야마 사건과 관련된 당사자들을 하나하나 만나서 당시 일에 관한 증언을 듣고 점차 단서를 모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구성인데, 뭐랄까 탐문 과정에서의 배리에이션이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관련자 A를 만난 다음 차를 타고 이동해 B를 만나고 끝나면 또 자리를 옮겨 C...이런 내용이 계속 반복되니까 좀 물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히가시노 게이고 같은 작가라면 처음부터 모든 관련자들을 한자리에 모은다거나, 몇 명의 관련자는 전화나 서면을 이용해 증언을 얻기도 하는 등 변화무쌍하게 처리했을 텐데, 이 작가는 그런 점이 좀 아쉽다.

 

아니면 어차피 사건을 파헤치는 인물이 셋이니까 첫날부터 교코가 A를 만나고, 다에는 B, 미호는 C...이런 식으로 몇 명씩 나눠 관련자들을 인터뷰해서 나중에 그 결과를 취합하면, 실은 하루 안에도 충분히 해결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는가. 탐문 과정에서 별다른 사건도 없이 그냥 주구장창 옛날 이야기만 듣는 셈이니까 솔직히 그 과정을 축약하면 단편으로도 충분히 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작가 오사키 고즈에는 <한쪽 귀 토끼>라는 작품이 국내에 이미 소개된 바가 있는데, 평범한 아동용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작품에서도 오래된 일본 고택에 관한 작가의 애호 취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에서도 역시나다. 기타야마 저택에 관한 묘사가 특히 뛰어나다. 모든 단서를 모은 다음 다에가 펼쳐낸 마지막 추리는 꽤 괜찮은 수준이었지만 그 추리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평범해 어느 정도 감점 요소가 있다. 다만 이번 작품은 '책을 파는 사람'에 포커스를 맞춘 전작과 달리, 그 '책을 쓰는 사람'에 시선이 맞춰져 있어 흥미로운 부분이 분명히 있다. 특히 결말에 제시되는 작가의 업보라는 테마와 교코가 책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는 장면들은 몹시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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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탐정 홈즈걸 1 -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명탐정 홈즈걸 1
오사키 고즈에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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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어릴 적 꿈은 서점 주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동네 서점에 가면 책을 붙들고 몇 시간이고 나올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다 못한 서점 아저씨가 안 사려거든 좀 가다오, 핀잔을 주면 겨우 안 움직이는 발을 떼며 나오기 일쑤였으니. 갖고 싶은 책을 살 수 있는 돈이 없었던 시절이기에, 서점에 산처럼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군침을 얼마나 흘렸는지 모른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면 서점을 해서 마음놓고 책을 읽어야겠다는 상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에 많은 인기를 모았던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서는 우승자에게 서점에서 자신이 들고오고 싶은 만큼 책을 주는 혜택을 주었는데, 나도 한 번 저런 기회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에 꿈까지 꿨을 정도. 그러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서점이란 역시 동경과 추억, 황홀한 꿈으로 온통 파랗게 채색된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뿐이랴. 예전에는 동네 서점이 사랑방 역할도 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우리 아파트 상가에 있던 서점에 가면 책 한 권 사놓고, 서점 주인 아저씨가 쌍팔년도에 데모했던 이야기 듣느라 몇 시간을 앉아 있다 오곤 했으니까.
 
 

그러나 2010년 3월 현재, 나는 꿈만으로 동네 서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수지가 안 맞는 장사인지 아는 나이가 되었다. 열혈 운동권 출신 아저씨가 하던 동네 상가 서점은 이미 도산한 지 오래. 그 아저씨는 간 곳을 모른다. 물론 나는 요즘도 가끔 서점을 가곤 하지만, 책표지나 만든 꼴만 확인하고 냉큼 집에 들어와 인터넷으로 주문을 한다. 집에서 편하게 받아볼 수 있고, 각종 할인이나 적립금, 이벤트 등이 온라인에서 훨씬 풍부해 굳이 서점에서 책을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게 다 편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바뀌어버린 생활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가끔 서점에 얽힌 즐거운 옛 생각이 날 때면 가슴 한구석의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렇듯 조금쯤은 예전에 분명히 있었던 훈훈함과 재미가 사라진 시절에 우연히 만난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은 서점이라는 공간을 너무도 따뜻하게 그리고 있어 읽는 동안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점에 얽힌 사건은 서점이 해결한다'는 모토를 내세운 일종의 서점 미스터리인 이 작품은 총 다섯 편이 수록된 단편집. 주인공은 6년차 나름 베테랑 서점 직원 교코와 날카로운 추리력을 지닌 아르바이트생 다에(실제 사건들은 전부 다에가 해결한다). 불후의 명콤비 홈즈와 왓슨을 떠올리게 만드는 두 파트너가 역앞 중규모의 '세후도 서점'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기껏해야 책값으로 몇 만 원 정도가 오가는 서점에서 강도나 살인 같은 초강력 범죄가 일어날 리 있겠는가. 치매로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가 사다달라고 한 책을 찾아준다거나(다만 할아버지가 병으로 말씀도 잘 못해 책 제목을 적어준 쪽지가 암호를 방불케 하는 수준이다), 손님이 병원에 있을 때 너무도 좋은 책을 추천해준 이름 모를 세후도 서점 직원을 밝혀낸다거나, 서점에서 준비한 판촉물을 훼손한 범인을 알아내는 등의 소소한 내용이니 일상의 미스터리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사건 자체의 강도가 약한 편이라, 치밀한 추리나 경천동지할 반전...그런 건 없다. 어디까지나 안락한 분위기와 서점에 관한 공감 가는 정서로 승부하는 진짜 서점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을 듯.

 

무난하고 잘쓴 단편들이라 누가 읽어도 만족스럽겠지만, 책과 관련된 직업을 가졌던 나는 딱 두 배의 재미를 더 느꼈다. 서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전차남>이나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등 일본에서 꽤 화제가 되었던 책들이 자주 언급되니,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더 흥미로울 듯하다. 특히 첫 번째 단편에 나오는 중요 단서 중 하나인 신초샤(일본 메이저 출판사 중 하나)의 판다 마스코트와 문고본 카탈로그 책자 같은 건 실물을 본 적이 있기에 읽는 동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막기 힘들었다. 미스터리로서도 완성도가 떨어지지 않지만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 서점이나 서점 일에 관한 정밀한 묘사가 아닐까 싶은데, 작가는 실제로 서점 직원으로 13년이나 일했다고 한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서점 직원이 하는 일을 그려낸다거나 평소 서점에서 일하면서 느낀 생각 등을 적재적소에 녹여내 한 편의 직업 소개서로도 충분할 정도다. 주인공 교코는 서점에 깊은 애정을 가진 평범한 직장인으로, 요즘 유행하는 소설들의 등장인물처럼 온갖 자의식이나 트라우마로 가득찬 우울한 내면 세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구김살 없는 보통 아가씨라 오히려 한층 더 호감이 가는 것이다. <명탐정 홈즈걸의 모험>은 서점이라는 우리가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잘 알지 못하는 세계를 손에 잡힐 듯 분명히 보여주고, 단지 책을 사랑하는 손님들을 돕기 위해 별난 모험에 뛰어드는 두 아가씨의 매력이 가득한 정말 사랑스런 서점 미스터리다.

 

p.s/ 책 말미에 실제 서점 직원으로 일하는 아가씨 네 명의 인터뷰가 꽤 길게 수록되어 있는데, 이게 또 무척 재미있다. 이 책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손님들보다 더 골 때리는 실제 손님들의 일화라거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책을 읽고 나서 느낀 공감대 등이 아가씨들 특유의 끝없는 수다로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첫 직장이었던 출판사는 당시 영세한 곳이라 편집자인 나도 영업을 도우면서, 실제 서점 아가씨들을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중 국내 굴지의 서점 아가씨가 참 네가지가 없어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한 적이 있는데, 이 인터뷰를 보니 서점 아가씨들 고충도 만만치 않더라. 우리는 한 사람이지만, 그분들이 만나야 할 출판사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명이 넘을 테니 어찌 모두 친절하게만 대할 수 있겠는가. 바빠서 그런 거라 이해해줄 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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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린 머리에게 물어봐 - The Gorgon's Look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0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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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벽두부터 올해 최고의 기대작 중 한 편이 출간되었다. 2005년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제5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에 빛나는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가 바로 그 작품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2006년작 <용의자 X의 헌신>처럼 그해를 대표하는 일본 미스터리라고 보면 될 것이다. 작가는 '신본격 미스터리' 작가군 중 한 명인 노리즈키 린타로. 이 작가의 작품은 그간 국내에서는 단편 몇 개만 겨우 소개된 데 그쳤는데, 특히 잡지 <판타스틱>에 실렸던 <도시전설 퍼즐>과, <계간 미스터리>에 수록된 <이퀄 Y의 비극> 같은 단편들은 짧은 분량에 비해 아주 재미있었고 그 수준도 높았다는 기억이 난다. 참고로 <도시전설 퍼즐>은 제55회 일본추리작가협회 단편상을 받은 바 있다. 이 두 단편을 비롯해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탐정으로 활약하는 주인공은 추리소설가 노리즈키 린타로로 실제 작가와 같은 이름이다. 추리소설 황금기를 빛나는 작품들로 수놓았던 작가 엘러리 퀸(프레드릭 더네이, 맨프레드 리, 사촌형제의 합작 필명)이 주인공 탐정의 이름을 역시 엘러리 퀸으로 한 것과 같은 설정이라 흥미롭다.


아마도 노리즈키 린타로는 거장 엘러리 퀸의 대단한 팬인 모양인지, 엘러리 퀸(추리소설가, 탐정)과 리처드 퀸(엘러리의 아버지, 경감) 부자가 협력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플롯도 그대로 빌려왔다.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추리소설가, 탐정) 또한 아버지 노리즈키 사다오 경시의 도움을 받아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는 경찰 내부의 정보를 입수하곤 한다. 코난 도일 사후에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탐정 셜록 홈스 이야기를 다른 작가들이 이어 쓰듯(이런 장르를 '패스티시'라고 한다고), 엘러리 퀸을 일본을 배경으로 새롭게 부활시켰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심지어 추리하는 스타일도 비슷한데, 노리즈키 린타로도 엘러리 퀸처럼 번뜩이는 천재성에 의거한 추리가 아니라, 엄정한 논리에 따른 소거법을 주축으로 삼고 있다. 범행 시간에 A는 빨래를 널고 있었으므로 제외, B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님, 그러므로 범인은 알리바이가 없는 C. 대충 이런 식으로 가능성이 없는 용의자를 하나하나 제거시켜 나가고, 마지막에 남는 사람이 범인임이 틀림없음을 증명하는 식이다. 여담으로 '일본의 엘러리 퀸'을 표방하는 또 한 명의 유명 추리소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도 비슷한 스타일이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주인공 노리즈키 린타로와 매력적인 여대생 에치카의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한다. 알고 보니 에치카의 아버지는 유명한 전위조각가 가와시마 이사쿠. 그는 실제 사람의 몸에 석고붕대를 감아 그 사람의 외양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라이프캐스팅 조각 기법의 명인이다. 이사쿠는 암에 걸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딸 에치카를 본뜬 마지막 작품을 제작 중이다. 필생의 걸작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작품의 완성과 동시에 생명의 불이 꺼져버리고 만다. 이사쿠의 장례식이 끝나고 에치카를 비롯한 유족의 슬픔이 사라지기도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사쿠의 유작, 즉 에치카를 그대로 본뜬 조각상의 머리만 잘려 도난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편 에치카는 고등학교 시절에 저질 사진가에게 스토킹을 당한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이사쿠의 위세가 만만찮을 때라, 다시는 사진가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손을 썼는데 이제 이사쿠가 가고 없으니 걸릴 것이 없다. 혹시 그 사진가가 이번에야말로 진짜 에치카의 머리를 잘라 죽이겠다는 메시지를, 에치카를 꼭 닮은 조각의 머리를 잘라 가져가는 것으로 표현하려는 게 아닐까? 노리즈키 린타로는 에치카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사건에 개입하는데, 결국 에치카는 누구도 보지 못한 사이에 실종되어 버린다.

 
보통 애거서 크리스티나 밴 다인 등의 작품을 보면 탐정은 사건이 이미 벌어지고 나서 범행 현장에 도착하는 경우가 많다. 벌써 일어난 살인 사건의 현장을 발생 후에 조사하고, 관계자들의 증언을 청취해 점차 증거가 쌓이면 그걸 추리의 재료로 삼아 진실에 도달하는 게 본격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흐름이라면, 이 작품은 조금 다른 지점을 보여준다. 린타로는 사건다운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에치카를 알고 있었고, 사건의 시작점부터 이미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나설 만한 강력 사건이 벌어진 것도 작품의 중반을 지난 무렵이라 통상적인 추리소설의 진행과는 무척 다른데, 실제로 사건은 그 시점에서부터 벌어진 게 아니라 책의 맨 첫 장부터 서서히 그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작가는 범행-탐정 도착-조사-추리-범인 도출의 순서대로 착착 흘러가는 추리소설의 일반적인 진행이 지나치게 소설적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실제의 범죄와 수사는 이렇게 시간의 흐름이나 일의 순서에 따라 구획되지 않는다. 가장 극단적인 인간의 행동이니만큼 이 범죄에 관련된 여러 사람들(범행 당사자, 수사관 등)의 의지와 실수, 악의와 오해 등이 뒤섞여 무질서하게 돌아간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를 무 자르듯 가볍게 구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실제적인 범죄의 양상과 흐름에 포커스를 맞춘 작가의 탁월한 구상은 깊은 고민의 산물인 듯해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나 시마다 소지의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처럼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본격 미스터리는 그만큼 소구점이 명확해 집중이 잘 된다는 장점도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한 장소 한 군데서만 모든 일이 벌어져 좀 지루하게 느껴지는 단점도 분명하다. 반면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는 탐정 린타로가 사건과 관련된 곳곳의 장소를 방문하고, 제법 많은 관련자들의 이야기를 일일이 청취하는 과정이 비중있게 묘사되어, 흡사 하라 료나 작중에서도 가끔 언급되는 로스 맥도널드의 하드보일드를 읽는 기분이었다. 특히 로스 맥도널드의 모 작품과는 줄거리도 아주 비슷해, 직접적인 모티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마디로 관련자 D의 증언을 통해 가설을 세우고, 다른이 E의 증언에 따라 그 가설의 헛점이 노출되면 새로운 가설을 세우는 등 탐문이 중요한 수사 기법으로 사용된다. 덕분에 본격 추리소설에 더해 하드보일드의 재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실은 '하드'까지는 아니고 '소프트'보일드에 가깝다). 작가의 문체는 비교적 유머도 적고 문장도 담백한 편이라 확 읽히는 맛은 적지만,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증언을 듣고, 가설을 세우고 허무는 과정이 자주 반복되어 적어도 지루할 틈은 없었다. 또한 사건의 암부에 불륜과 배신 등 일그러진 가족 관계가 깊숙이 도사리고 있어 시쳇말로 막장드라마를 보는 듯한 다소 꺼림칙한 재미도 충분하다. 이래저래 재미만큼은 확실한 소설이라고 보장한다.

 
마지막으로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면, 추리소설 작가이면서 평론가이기도 하단다. 신본격 미스터리를 제창한 아야쓰지 유키토와 같은 교토대학교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으로, 유키토와 마찬가지로 걸작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시마다 소지의 추천을 받아 데뷔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출신 작가들이 줄줄이 데뷔하면서 신본격 미스터리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었는데,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보면 될 듯. 작가로서 한창 때인 20대의 아야쓰지 유키토가 다소 무리한 아이디어나 트릭이라도 이거 되겠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맹장 타입이었다면, 평론 활동을 주축으로 미스터리의 존재 의의나 구성 원리 등을 이론적으로 파고들며 가끔 한 번씩 완성도 높은 작품을 발표하는 노리즈키 린타로는 후방에서 신본격을 뒷받침하는 책사 정도가 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도 10년만에 발표한 소설이라는데, 다음 작품은 좀더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아야쓰지 유키토, 아리스가와 아리스, 야마구치 마사야, 아시베 타쿠 등 신본격 작가들이 국내에 제법 소개된 이때, 처음으로 노리즈키 린타로의 미지의 대표 장편을 만날 수 있어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린타로 탐정이 잘린 머리 석고상에 얽힌 모든 비밀을 밝히는 마지막 30페이지는 아껴 읽을 만큼 흥미진진했고, 린타로와 마지막 대화를 나눈 인물이 진실을 알고 나서 느끼는 깊은 회한은 모든 독자들로 하여금 때때로 우리의 삶을 슬픔으로 얼룩지게 만드는 오해라는 괴물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진실한 경험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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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추럴 셀렉션
데이브 프리드먼 지음, 김윤택 외 옮김 / 지성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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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스>가 <주라기 공원>을 만난다면?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데이브 프리드먼의 2006년 소설 <내추럴 셀렉션>을 읽는 게 어떨까 싶다. 심해와 지상에서 펼쳐지는 괴생명체와 여섯 명의 해양생물학자 간의 대결을 다룬 이 스릴러가 꼭 그런 이야기라 독자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히 이 책과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책이라면, 몇 해 전에 스티브 앨튼이라는 작가가 상어의 조상 격인 고대 괴수 메갈로돈이 현대에 출몰해 사람들을 살육하는 <메그>라는 소설을 발표해 아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난다. 유감스럽게도 <내추럴 셀렉션>은 <메그>만큼 파괴력 넘치고 몰입감이 강하지는 못했지만(상어공포증에 시달리는 개인 취향이 반영된 듯), 나름대로 짜임새 있는 설정에 매 페이지마다 액션이 넘쳐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거의 최초의 스릴러라 불리는 <39계단>이 1차대전을 일으키려는 독일 첩보조직(엄밀히 따지면 배후의 비밀조직이지만)과의 대결을 소재로 삼은 것처럼, 서구에서 독서계를 장악한 스릴러라는 장르는 항상 우리를 두려워 떨게 만드는(끊임없이 스릴을 자극하는) 어떤 것을 그리는 듯하다. 때문에 양차대전 때는 독일, 냉전시대에는 소련 세력 등을 주로 악역으로 설정했다면, 전세계적인 해빙 무드가 조성된 요즘은 그럴싸한 적을 찾기 어려워진 것 같다. 그래서인지 최근의 스릴러 작가들은 다양한 곳에서 독자의 본능적인 공포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대상을 정하는데, 의료 현장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사건들을 메디컬 스릴러로 푼다든가, 연쇄살인범이 등장해 주변의 이웃들을 살해하는 사이코 스릴러 등 종류가 무척 많아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렵다. 아무래도 최근의 스릴러들은 더 이상 독자들의 본능적인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국가 차원의 거대한 음모보다는, 개개인에게 닥치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공포를 다루는 쪽으로 유행이 바뀐 모양이다.

 

흔히 테크노 스릴러라 부르는 과학을 기반으로 한 스릴러는 작년에 사망한 마이클 크라이튼의 수퍼 베스트셀러 <주라기 공원>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괴수를 등장시켜 사람들을 학살하는 고전적인 괴물 호러소설의 플롯에 현대생물학이나 유전공학 등의 과학 기술 등을 결합시켜 전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이 소설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화해 기록적인 흥행을 달성하기도 했다. 감독의 탁월한 연출력은 물론이거니와 워낙 소설 자체가 영화로 만들기에 그림이 딱 나오는 그런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과학 공부 좀 했고, 글도 좀 쓰며, 큰돈 만지고 싶은 배짱 좋은 후배 작가들이 나도 한번 써봐, 하며 나서기에 충분한 조건이 아닐까? 더구나 기초 교육의 확대로 독자들의 과학에 대한 교양 수준도 예전에 비해서는 크게 올라갔다. 이제 어느 정도의 해설 만으로도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과학 이론에 대해 충분히 독자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과학을 소재로 삼는 어려운 스릴러를 집필한다는 부담감도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나 요즘 독자들은 소설을 즐기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 웬만큼의 지식도 얻어가는 걸 원하므로 오락과 과학이 결합된 <내추럴 셀렉션> 같은 소설이 앞으로도 더욱 큰 인기를 끌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의 작가 데이브 프리드먼 역시 과학 공부 좀 했고, 글도 좀 쓰며, 큰돈 만지고 싶은 배짱 좋은 작가 중 한 명이다. <내추럴 셀렉션>에서 그가 비장의 무기로 내세운 건, 찰스 다윈의 그 유명한 <진화론>이다. 제목 '내추럴 셀렉션' 또한, 다윈 진화론의 핵심인 '자연선택'이라 풀이할 수 있다. 자연선택이란 어느 특정한 종의 개체 사이에 벌어지는 생존 경쟁 속에서, 특히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개체가 생존하여 후손을 남긴다는 뜻이란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원시 기린은 처음부터 오늘날처럼 목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기린들이나 다른 동물들이 나뭇잎 등의 한정된 먹이를 놓고 다툴 때, 유독 목이 긴 기린이 높은 가지의 잎사귀를 따먹을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목이 긴 기린들만 생존하고 목이 짧은 기린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이 긴 기린들의 암수끼리 결합하여, 목이 긴 유전자를 계속 후손들에게 퍼뜨렸고, 그 결과 오늘날 아프리카 초원의 기린들은 전부 목이 긴 기린만 남게 된 셈이다.

 

작가는 대다수의 생물학자에게 공인받은 이 자연선택 이론을 기반으로 삼아 거기에 상상력을 더해 무시무시한 심해의 괴물을 창조했다. 몸길이가 7미터가 넘고 무게는 20톤이 넘는 거대 가오리떼가 깊은 바다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원인불명의 바이러스가 퍼져 익숙한 환경이 서서히 파괴되자, 원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있는 거대 가오리떼는 서서히 얕은 바다로 부상하고, 그중 선구자 노릇을 하는 가오리는 아예 거대한 날개를 사용해 뭍으로 상륙하는데 성공한다. 심해라는 환경이 파괴되자 그에 적응하기 위해 육지에 올라온 거대 가오리야말로 적자생존과 자연선택의 최종 승자가 된 셈이다. 날카로운 이빨로 3미터에 달하는 곰도 한 입에 물어죽이고 육지와 바다, 공중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식인 가오리를 뒤쫓던 여섯 명의 해양생물학자는 이 새로운 가오리를 '악마가오리'라 명명한다. 그들은 악마가오리로 인한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기관총과 활, 헬리콥터, 보트 등을 총동원해 사냥에 나선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 한 가지는 악마가오리 또한 역으로 그들을 사냥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오리가 아무리 커져봐야 하늘을 날고 사람까지 죽이는 게 말이 되느냐,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심해는 우주만큼이나 인간의 인식이 미치지 못하는 곳. 지구상에서 가장 깊다는 마리아나 해구에 인간들은 고작 수십 분을 들어갔다 나왔을 뿐이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곳에서 어떤 생물들이 살고 있을지, 그 생물들에게 어떤 능력이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추럴 셀렉션>이 보여주는 상상력은 충분히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진화론>에 바탕을 둔 비교적 그럴듯한 내용에 후반부 200페이지는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모험과 액션의 연속이다. 심심풀이로 책을 잡은 독자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듯하다. 다만 약간 아쉬운 건, 설정이나 줄거리의 정교함, 기발함에 비해 인물의 성격이 지나치게 얄팍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여섯 명의 과학자들 중 한 명이 악마가오리를 사냥하는 게 무척 위험한 일이라는 이유를 들며 빠지려 하자, 리더 격인 인물은 이 일은 인류에게 있어 전혀 새로운 종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며 아마 교과서에도 실리게 될 거라 회유한다. 리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교과서에 실리는 게 내 인생의 꿈'이었다며 참가를 결정한다. 그냥 한번 튕겨본 건가...백인 선남선녀 두 사람만 살아남게 되는 결말도 지나치게 할리우드 스타일이고, 살아남은 주인공들은 동료를 줄줄이 잃었음에도 그다지 슬퍼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아무리 아이디어나 플롯이 중요한 소설이라고 해도 이 정도라면 곤란하지 않을까. 문장이란 것도 죄다, '악마가오리가 다가왔다.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식이라 전개는 빠를지언정 문학 작품을 읽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데이브 프리드먼의 다음 작품은 흥미진진한 내용 못지않게 문장력이나 인물의 성격에도 공을 들이길 기대하며 이만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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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01-01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죠스가 주랴기 공원을 만난 책이라면 이미 메그라는 해양소설이 있읍니다.ㅎㅎ
제다이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jedai2000 2010-01-04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스피님...사실 재미도 <메그>가 더 있었어요-_-;; 카스피님도 올 한해 원하시는 소원 다 성취하시고, 늘 댁내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 해가 다 끝나가는 이맘때, 올해는 어떤 일이 있었나 생각해본다. 좋은 소식, 기쁜 일들만 가득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유감스럽게도 2009년은 늘 우리 곁에서 밝게 빛나고 길잡이가 되어주던 소중한 사람들이 우리를 아주 떠나간 슬픈 기억이 유달리 많은 것 같다. 고통받는 서민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온 노무현 대통령이나 평생을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김대중 대통령, 신의 영역과 맞닿은 음악으로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우리 지구와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하자는 메시지를 심은 마이클 잭슨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그러나 비록 지금 언급한 위인들만큼 유명하거나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니지만, 평생을 자신의 자리에서 조용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희망과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삶과 죽음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는 듯하다.

 

전쟁통인 1952년에 태어나 올해 5월 9일 별세한 장영희 교수는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한쪽 다리를 쓰지 못했다(과거형으로 써야 하는 게 못내 가슴 아프다). 하지만 헌신적인 부모님의 보살핌 덕에 국내 최고의 대학 중 하나인 서강대 영문과를 무사히 졸업했다. 지금도 장애인들이 살아가기에 불편한 구석이 너무 많은 대한민국이거늘 하물며 아직 전혀 사회 전반이 정비되지 않았던 1970년대에 그런 성취를 얻었다는 게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뉴욕 주립대와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영문학을 공부해 박사 학위를 받았고, 곧 귀국해 모교에서 교편을 잡아 수많은 학생들을 길러냈다. 그러는 틈틈이 장미같이 화려하진 않아도 들꽃처럼 은은한 문장과, 장애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유쾌하고 진솔한 필치의 수필을 잡지에 기고해 당대의 문장가 중 한 명이라는 친사도 받았다. 하지만 좋지 않은 운명이 이대로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인지, 유방암으로 3년 가까이 투병 생활을 했고, 겨우 이겨냈다 싶더니 이번엔 척추암으로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내 탓, 네 탓, 심지어 부모 탓까지 하며 현재의 암울한 현실에 그저 좌절만 하기 일쑤인 요즘의 나약한 사람들 속에서 장영희 교수는 희망과 용기의 전도사로 칭송받아 마땅한 '슈퍼 히어로'인 것 같다. 남들이 천형이라 부르며 안타까워 하는 온갖 병마와 싸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하고 재주가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고,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써내려간 글이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데 자신이 왜 불행한 사람이냐고 되물었던 장영희 교수. 매일매일 바다 냄새를 닮은 아침 냄새를 맡고, 하트 모양 비슷한 푸르른 나뭇잎과 꽃을 볼 수 있어 자신은 천형이 아닌 천혜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진심을 담아 토로하는 그녀는 너무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온 천지를 순식간에 밝게 비추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유성처럼 짧아서 더 아름다웠던 사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이런 장영희 교수의 유고 수필집이다. 어제까지 있던 건물이 오늘 사라지고, 어제 인사했던 친구를 오늘 볼 수 없을 정도로 험하고 풍파가 많은 세상을 그동안 무사히 살아낸 게 이미 기적이니, 앞으로도 그 기적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암투병 동안에 쓴 글들이라지만 어느 한군데도 어두운 구석을 찾을 수 없고, 한 사람의 선생님으로서, 누군가의 이모나 딸로서, 그리고 수필가로서 평소에 겪고 느꼈던 소소하고 정겨운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이미 높은 성취를 이룬 문인인데도, 약속에 잘 늦고, 가끔 퉁명스럽게 구는 게 고민인 그녀의 이야기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만큼 아, 나도 그러는데 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공감을 이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고 마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들의 끝에는 힘든 삶을 이겨낸 그녀만의 깊은 지혜와 통찰, 용기와 희망 등이 오롯해 말로 표현하기 힘든 벅찬 감흥을 준다.

 

수필가로서 장영희 교수의 글은 수필을 쓰고 싶어하는 분들께 꼭 추천드리고 싶은 미덕으로 가득하다. 일단 쉽게 쓴다는 것. 영미 문학의 권위자면서도 전혀 어려운 비유나 비비 꽈서 멋부리는 문장 등을 쓰지 않는다. 물리, 수학 등 모르는 게 없는 석학부터, 힘든 설거지를 마치고 소파에 누워 뭐 읽을거리가 없나 찾는 주부, 삶이 힘들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죄수까지 누가 읽어도 이해가 어렵지 않은 수준이다. 누구나 알지만 쉽사리 인정하지 않는 진리 중 하나가 바로 알기 쉽게 쓰는 게 난해한 문장 쓰기보다 훨씬 어렵다는 거다. 장영희 교수는 이 진리를 알고 쓰는 글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미덕으로 그녀의 솔직함을 꼽고 싶다. 대학 교수로서의 체면이나 사회적 명사의 위치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가끔은 쪼잔하고 때로는 뒤틀린 자신의 감추고 싶은 마음까지도 가감없이 종이 위에 담아, 보다 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솜씨에 감탄하고 말았다. 먼저 자기가 속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어차피 그저 그런 교훈담을 늘어놓을 거잖아" 하며 굳게 닫힌 불량독자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무장해제시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소설 외에는 잘 읽지 않지만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무척 만족스러웠다.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분이 우리 곁에서 우리와 함께 살았다는 게 바로 기적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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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6 2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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