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야수 블랙 캣(Black Cat) 24
마거릿 밀러 지음, 조한나 옮김 / 영림카디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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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거의 소개된 적 없는 영어권 서스펜스 거장 마거릿 밀러의 대표작이다. 본연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 맥도널드의 아내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내 안의 야수> 출간을 계기로 그녀의 대표작들이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본다.

<내 안의 야수>는 평범한(해 보이는) 인물들이 범죄와 악의에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공포와 불안감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심리 서스펜스 계열의 선구자 격인 작품으로 1955년에 나온 고전이지만 지금 봐도 손색 없는 깊이와 완성도를 자랑한다.

서스펜스라는 용어가 낯선 사람을 위해 적절한 예를 찾아본다면 아마도 동화 <푸른 수염> 같은 게 아닐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러 명의 아내가 죽은 남자에게 시집간 평범한 새 아내에게 남편 '푸른 수염'은 열쇠를 하나 주며 다른 방은 다 들어가도 좋지만 마지막 방은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새 아내가 방문을 열자 그곳에는 죽은 아내들의 시체가 줄줄이 놓여 있고, 푸른 수염은 자신의 비밀을 눈치챈 새 아내 역시 살해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서스펜스의 모든 것이 있다. 비밀을 간직한 배우자, 호기심 많고 영리하지만 연약한 주인공, 마침내 드러나는 진실과 경악스런 결말! 굳이 동화에서만 이런 얘기를 찾을 필요도 없는 게 얼마 전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결혼한 남편들마다 수면제를 먹여 재운 다음 눈을 바늘로 찔러 실명시킨 악녀가 신문지상을 장식하지 않았는가. 만약 이 악녀의 남편이 잭 리처였다면? 잘 훈련받은 헌병 출신답게 바늘을 붙잡은 손을 뒤로 꺾어버린 다음 악녀 위에 올라타 망치와 같은 주먹을 내리칠 것이다. 아마도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악녀의 남편이 링컨 라임이었다면? 악녀 소매에 묻은 흰 가루를 몰래 분석해 수면제와 동일한 성분이라는 걸 밝혀내겠지. 그리고 함정을 파놓고 기다린 후에 기분 좋게 범인 체포~

그러니까 서스펜스의 주인공은 범죄수사의 천재도, 완력이 남다른 터프가이도 안 된다.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평범한 남녀에게 닥친 위기를 통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게 필수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 안의 야수>의 여주인공 헬렌이 신경쇠약 직전의 광장공포증 환자인 건 적절했다. 옛 친구의 전화 협박을 받고 불안에 떤 그녀가 아버지의 투자상담가였던 블랙쉬어에게 협박을 한 친구 에블린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이야기는 굴러가기 시작한다.

당대에는 결정적인 반전으로 유명했을 듯한데, 요즘에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수십 번은 써먹은 듯한 반전이라 그쪽에서는 유효가 다했다고 본다. 다만 간결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문장과 폭력 장면을 거의 넣지 않고도 스물스물 공포감이 피어오르게 하는 솜씨에서 거장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은근히 유머도 있고, 특히 처절하리만큼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은 다섯 번쯤은 다시 읽게 만든다. 여러모로 명성에 부끄럽지 않은 클래식이라는 생각이다.

1955년 에드거상 수상작으로 당시 라이벌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 씨(태양은 가득히)>였다. 그 작품은 아직 읽지 않았는데, 이참에 읽은 다음 비교해보고 싶다. 그리고 서두에도 썼지만 <엿듣는 벽>, <천사처럼>, <내 무덤의 이방인>, <이 뒤에는 괴물들이 산다> 등 마거릿 밀러의 다른 심리 서스펜스 걸작들도 꼭 다시 만나보고 싶다.


p.s/ 스포일러가 될 소지가 다분한 제목과 표지는 불만족. 특히 팝아트풍의 느낌을 내려 했던 것 같은 표지는 작품 내용이나 밀러의 명성과 그다지 맞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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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교실 - 제48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소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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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95년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침묵의 교실>, 무려 654쪽이다. 보통 책 분량이 이쯤 되면 이걸 언제 다 읽나 하는 당혹감이 첫 번째고, 들고 다니면 팔이 빠지겠다 싶은 두려움이 두 번째다. 하지만 작가가 오리하리 이치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래도 오리하라 이치는 결말이 이렇게 날 것이라는 독자들의 예측을 몇 번이고 엎었다가 또 뒤집는 반전의 선수이니만큼 654쪽이면 한 다섯 번쯤은 속겠군, 하면서 오히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침묵의 교실>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는 통쾌하게 속는 쾌감은 살짝 덜한 편이다. 국내에 나온 그의 작품 중에서는 <원죄자>가 가장 강력한 반전을 선 보였다고 생각하는데, 안타깝게도 <침묵의 교실>에서는 그 만한 충격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추리소설’도 분명 ‘소설’일진대, 무슨 야바위 사기꾼마냥 오직 독자를 얼마나 멋들어지게 속여 넘겼는지로만 평가받아야 하는가. 작품의 주제의식이 분명하고, 읽는 내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몰입감이 있으며, 그럴싸한 인물과 실감나는 대사가 있으면 그게 바로 좋은 소설이 아닐까? 다행히 <침묵의 교실>은 언급한 좋은 소설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으니 귀한 시간과 돈을 날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붙들어 매두시길.


과거와 현재를 뒤섞어 독자를 혼란에 빠트리는 작풍이 주특기인 작가답게 <침묵의 교실>의 줄거리는 다소 복잡하다. 먼저 현재.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린 삼십대 남자가 등장한다. 이름이며 집, 직장 등 자신에 관한 건 무엇 하나 생각나지 않는 그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물건은 ‘아오바가오카 중학교 동창회 살인 계획서’, 단 한 장뿐. 남자는 고뇌에 빠진다. 정말로 나는 대량살인을 꿈꾸었던 예비 살인마인가. 답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분명하다. 직접 조사에 나서면 된다. 남자는 아오바가오카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을 한 명씩 찾아다니며 자신의 정체에 한 발, 한 발 접근해 나간다.


한편, 기억상실의 남자와 더불어 20년 전 그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관한 과거의 이야기도 번갈아 전개된다. ‘숙청’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 따돌림과 학교 안에서 벌어진 온갖 뜬소문들을 왜곡해 학생들을 불안에 떨게 하는 ‘공포신문’으로 학교는 온통 얼굴 없는 침묵과 공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침묵의 교실’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또 한 명의 주인공으로, 그는 비록 초보 교사에 불과하지만 나름의 사명감으로 학생들을 세심하게 신경 쓰며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숙청은 단지 학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게 문제였다. 칠판에 쓰인 자신의 숙청 메시지를 보고 교사가 느꼈을 아찔함은 지금 생각해도 모골이 송연하다. 여기까지가 1장의 내용. 2장에서는 20년 만에 학생들 전원이 다시 모이는 아오바가오카 중학교의 동창회를 다루고, 3장은 동창회 이후의 풍경 그리고 모든 사건의 전말이 낱낱이 밝혀지는 최종장이다.


오리하라 이치를 정의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서술트릭’과 ‘서스펜스’이다. 그의 모든 작품은 이 두 개의 큰 틀을 벗어나는 법이 거의 없으며, 그것은 <침묵의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자, 그, 혹은 복수자 등 3인칭으로만 등장하는 범인은 만약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단번에 정체가 ‘보여졌겠지만’, 모든 정보를 작가가 제공하는 만큼밖에 받을 수 없는 소설 텍스트에서 독자는 작가가 오해하기 딱 좋게끔 이곳저곳 깔아둔 가짜 복선과 단서에 휘말려 이리저리 표류하는 난파선 신세에 불과하다. 오리하라 이치는 이렇듯 서술 트릭으로 독자의 오독을 유발케 하는 솜씨가 가히 장인 급이라 몇 번을 주의해도 결국은 속게 된다. 또 하나의 강점인 서스펜스는 아마도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계속되는 긴장감이나 불안감을 말하는 것일 텐데, 작가는 여기서도 굉장한 재능을 발휘한다. 기억상실, 집단 따돌림, 공포신문, 연쇄살인, 집단납치, 화재 등 질릴 만하면 한 번씩 충격적인 사건이 터지니 도무지 지루할 새가 없는 것이다.


전매특허인 서술트릭과 서스펜스는 여전하지만 위에 언급한 것처럼 범인의 정체나 반전의 순도는 조금 약한 편이다. 작위적일 정도로 심하게 줄거리를 꼬고 또 꼬았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담백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오리하라 이치가 능력이 없어 이 정도 결말밖에 못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작품의 주제에 맞추기 위해 철저하게 인공적인 플롯을 배제한 게 아닐까. 20년 전의 치기 어린 장난과 아직 덜 성숙한 사춘기 소년의 악의가 먼 길을 돌아 현재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가를 주목한 이 작품에 몇 번이고 계속되는 뒤집기 한 판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해자가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피해자의 아픔은 오래 지속된다. 아주, 아주 오래…… 비록 많은 아픔이 있었지만 결국 과거와 화해하는 주인공들의 훈훈한 모습 역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 물만두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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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 왕수비차잡기 밀실살인게임 1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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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유독 많이 나오고 있는 우타노 쇼고의 작품. 가만보면 이 작가 참 스타일리스트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들 중 서로 비슷한 소재와 형식을 취하는 게 거의 없을 정도. 히트작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공정하다, 아니다의 논란이 벌어졌던 서술트릭, 에도가와 란포의 오마주에 가까운 <시체를 사는 남자>는 고전 추리소설의 맛을 재현했고,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본격추리 중편집, 살인자로 몰린 어느 오타쿠의 험난한 여정을 그린 <여왕님과 나>는 판타지 요소까지 녹아들어가 있다. 이쯤되면 안정적인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기존의 방식을 계속 쓰느니 실패하더라도 새로운 길을 걸어보겠다는 작가로서의 자세를 높이 사야 하지 않을까.

 

<밀실살인게임>에도 물론 작가 특유의 새롭고 신선한 면모가 있다. 각자 분장을 해서 나이도 성별도 알 수 없게 꾸민 5명의 인물들이 화상채팅을 한다. 영화나 아이돌가수 등의 주제를 놓고 떠드는 친목 모임도 아니고, 조막만 한 채팅창을 통해 음란한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다. 실은 그들 모두 살인자다. 살인의 목적은 그저 재미를 위해. 그들은 사람을 죽인 다음 사건 현장을 카메라로 충실히 찍어온다. 그러고는 자신의 범행을 토대로 문제를 내는 것이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사건 현장에는 외부인이 침입할 수 있는 어떤 통로도 없었어요,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죽인 걸까요?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게임 감각의 추리소설이다. 단지 게임의 재미를 위해 사람을 죽인다는 설정에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책 띠지에 '19금을 박아넣을까 고민하게 만든 책'이라는 문구가 삽입되었지만, 이런 정신적인 테러(?)를 제외하고는 살해나 폭력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고 그 수위도 높지 않다. 읽으면서 어쩌면 5명의 출제자들이 추리작가의 고뇌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들은 특별한 원한이나 동기가 있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고, 다만 재미있고 수준 높은 트릭을 만들기 위해 죽인다. 추리작가들 또한 재미를 위해 (비록 가상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이들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유독 시시한 알리바이 트릭만을 만드는 참가자는 채팅 멤버들에게 온갖 비난을 듣는다. 이 역시 추리작가들의 팔자와 비슷하지 않나. 시시한 트릭을 내놓으면 수많은 독자들의 비난은 물론 심지어 욕까지...이런 점에서 <밀실살인게임>이 추리소설과 추리작가에 대한 추리소설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각자 한 문제 정도씩 출제하니 대략 대여섯 개 정도의 사건이 나오는데, 어차피 범인과 동기는 처음부터 알려져 있다(범인은 출제자들, 동기는 단순히 재미). 독자들이 이 게임 속에서 추리해야 할 건 오로지 사건의 트릭뿐. 이중 가장 긴 분량의 첫 번째 트릭은 뛰어나지만, 나머지는 솔직히 그다지다. 심지어 유명한 일본 고전 추리소설의 트릭을 그대로 재현한 것도 있다. 서술트릭이라 할 만한 마지막의 반전도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다수 눈치 챌 것이다. 그럼에도 흥미롭게 읽히는 이유는 채팅 참가자들의 재기발랄한 말장난과 비록 살인자들이지만 게임을 게임답게 즐길 줄 아는 그들의 행동에서 기묘한 흥취가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결말에는 채팅 참가자들이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만나는데, 내로라하는 살인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필연적으로 사건이 벌어질 게 뻔하지 않은가. 누군가 죽음의 위기에 몰리는 절박한 상황에서 'to be continued.' 다음 이야기는 속편 <밀실살인게임2.0>에서 이어진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모여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살고 죽는지 몹시 궁금하다. 속편은 평도 더 좋은  것 같으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내 생각에 <밀실살인게임>은 그 자체로 얘기하기보다 속편까지 보고 나서 두 작품을 동시에 얘기하는 게 더 좋을 듯하다. 그래야 작품의 분명한 진가가 드러날 듯...그러니까 얼른 속편을 출간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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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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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작가가 나왔다. 무려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신이라고 불리는 아유카와 데쓰야. 줄여서 본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국내 최초로 그의 대표작 중 한 편인 1958년작 <리라장 사건>이 출간되었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아유카와 데쓰야는 1919년생이라는 연배도 그렇지만, 발표한 작품들의 높은 수준으로도 일본 추리소설계의 전설적인 이름들, 즉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 마쓰모토 세이초 못지않은 명성을 얻은 대가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마쓰모토 세이초풍 사회파 추리소설에 맞서 줄기차게 본격 추리소설만을 추구한 그의 업적을 높이 산 후배 신본격 추리소설 작가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런 작가가 왜 이제야 겨우 소개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의 작풍에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다. 아유카와 데쓰야의 전매특허는 사실 기차 및 각종 운송수단의 시간차를 통한 알리바이 트릭에 집중되는 걸로 알려져 있어, 국내 추리소설 기획자들이나 편집자들이 복잡한 시간표를 꼼꼼이 따져자며 읽어나갈 독자들이 많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리라장 사건>은 외딴 별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한 명씩 살해되고, 미궁에 빠진 사건을 명탐정이 등장해 멋지게 해결해내는 전형적인 애거서 크리스티식 플롯을 가지고 있어 열차 시간표 등으로 골머리를 썩일 이유가 전혀 없으니 안심해도 좋다.

일본 예술대학의 미술학도와 음악학도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몰락한 대부호의 별장이었던 라일락장으로 휴가를 온다. 젊은이들답게 라일락을 줄임말로 리라라고 부르니, 이제부터는 리라장이다. 7명의 예술가 지망생 남녀는 아직 정식 예술가도 아니면서 예술가 특유의 아집과 괴팍한 성품만 미리 배웠는지 성격들이 장난이 아니다.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신경질적이고 비정상적으로 자존심이 강하며 공격적이어서 한마디로 비호감들. 작가조차 노골적으로 그들을 야유하고 조롱할 정도니 알만 하잖은가. 웃기는 건 분명히 친구들인데, 대부분 서로 싫어한다는 거. 그런데 왜 같이 놀러왔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함께 있으면 여지없이 재앙이 일어나는 인종들 사이에서도 로맨스는 싹트기 마련이니 그 안에서 몇 겹의 복잡한 삼각, 사각관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류의 소설에서는 보통 한 사나흘은 지나야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하는데 반해 <리라장 사건>은 놀랍도록 페이스가 빠르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마자 그날 오전에 한 명, 그 다음 날에 두 명이다. 시체들의 옆에는 그들이 들고 왔다가 잃어버린 트럼프의 스페이드 카드가 놓여 있는데, 처음에는 에이스, 그 다음에는 2, 이런 식으로 시체가 늘어날 때마다 카드의 숫자도 올라간다. 트럼프의 스페이드 카드는 전부 13장. 정신이상자같이 카드에 집착하는 범인은 13명을 죽여야 살인 행각을 멈출 것인가. 한편 노련한 경찰들의 눈앞에서도 살인은 계속되고, 이제는 완전히 벽에 막혀버렸다 생각될 때 도쿄에서 명탐정 호시카게 류조가 찾아온다.

이불에 배를 깔고 뒹굴뒹굴 누워 읽으니 극락이 따로 없는 기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 작품이라 어쩔 수 없이 낡은 부분이 있지만 그만큼 고전을 읽는 기쁨에 흠뻑 취하고 말았다. 사실 '여기서는 일단 넘어가고', '그래가지고 설라무네', '다른 곳에서는 뭐하고 있냐며는' 하는 식의 장면 전환 같은 건 확실히 요즘 소설에서 쓰는 기법은 아니다. 그러나 덕분에 외려 진짜 옛날이야기를 듣는 느낌이 나서 한층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본격 추리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트릭을 보면 여기에도 역시 지금 보기엔 약간 약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대에는 대단했던 트릭이라도 세월이 갈수록 후배 작가들이 그 트릭을 모방하고 차용하면서 점차 평범하게 돼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아유카와 데쓰야는 유독 신본격 작가들이 많이 사숙했던 작가라 더 그렇지 않았을까. 일부 독자들이 절대 알 수 없는 독약이나 음악, 미술 등의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해답을 이끌어내는 경우도 있고, 등장인물이 너무 많이 죽어나가 나중에는 범인이 거의 2지선다, 3지선다 정도밖에 안 되는 것도 걸리는 부분이다.

다만 무수하게 깔린 복선들과 단서들을 탐정 호시카게 류조가 하나로 꿰어 단숨에 진상에 이르는 결말은 분명 압권이다. 예컨대 범인이 범죄 현장에서 사용하는 스페이드 카드들 말고, 클로버 잭과 하트3은 왜 가져갔을까 같이 몇 가지 사소한 의문들도 나중에 전부 설명되는데 죄다 범인찾기에 도움되는 힌트들이니 머리를 잘 굴려볼지어다. 여담이지만 원래 <리라장 사건>은 아유카와 데쓰야가 추리소설 동호회의 '범인맞추기 퀴즈용'으로 쓴 중편을 개작한 것이라 한다. 책 말미에 그 당시의 일들이 작가 자신의 입으로 술회되는데, 다 읽고 참으로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만으로 청춘을 불살랐던 친구들이 점차 생업에 바빠져 하나씩 연락이 끊기고, 겨우 30년 만에 연락이 되어 보기로 한 친구는 만남 며칠전에 세상을 떠나고...아아, 이런 게 추리소설광의 인생이런가. 나이도 국적도 다르지만 그 모든 선배 추리소설광들에게 경배를 바친다. 그때 당신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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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0-11-01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불에 배를 깔고 뒹굴뒹굴 누워 읽으니->우와~ 좋으셨겠습니다.

jedai2000 2010-11-02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세상에 이런 극락이 따로 없더라구요^^

상복의랑데뷰 2010-12-2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
 
어둠의 변호사 - 붉은 집 살인사건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1
도진기 지음 / 들녘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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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집 살인사건>은 현직 판사가 쓴 추리소설이라는 점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제1작이다. 판사라면 무척 바쁜 직업일 텐데, 언제 그렇게 집필할 시간이 있었는지 2권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도 함께 나왔다. 개인적으로 작품을 읽기 전에 우려보다는 기대를 조금 더 품고 있었는데, 판사라는 직업 자체가 범죄와 깊이 맞닿은 분야라 그만큼 리얼리티가 뛰어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얼마전에 우연히 읽은 <선택>이라는 이 작가의 단편도 꽤 좋았다(<계간 미스터리> 2010. 여름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미권의 경우,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한 존 그리셤이나 스콧 터로우, 윌리엄 랜데이 등 법조인 출신 작가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알기로 도진기 씨가 처음인 것 같다. 편견인지도 모르겠지만, 특정한 직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그 분야를 다룬 가장 정교한 소설을 쓸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전혀 관계없는 작가들이 취재나 자료조사를 통해 2차적으로 접근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그 일을 하며 그 분야에서 통용되는 용어들을 매일같이 툭툭 쓰는 사람들이 분명 유리한 점이 있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현직 판사의 추리소설 집필은 분명 환영받을 일이다. 여세를 몰아 앞으로는 현직 외과의사의 메디컬 스릴러, 현직 야구선수의 야구장 미스터리 등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둠의 변호사'라는 타이틀에서 당연히 법정 스릴러식의 전개를 예상했는데 뜻밖에 정통 본격 미스터리였고, 왠지 반 다인의 고전 <그린 살인사건>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언덕 위의 저택 '붉은집'과 그곳에 사는 기묘한 관계로 맺어진 두 가족, 그리고 3대에 걸쳐 벌어지는 살인사건. 암에 걸린 부잣집 노인의 유언장이 공개되면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영락없는 크리스티, 퀸, 반 다인의 세계다. 다시 말해 본격 추리소설 팬들에겐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반갑고 익숙한 설정이라는 얘기. 탐정 역의 인물은 '어둠의 변호사' 고진으로 판사 출신이지만 유별난 호기심의 소유자라 법정에 절대 서지 않는 변호사로 일하며 흥미가 당기는 사건만을 맡고 있다. 한편 본격 미스터리의 필수 요소인 '왓슨' 역은 강남서 형사반장 유현이다. 유현이라는 이름보다는 '감래'가 괜찮지 않았을까. 농담이다...아무튼 그는 경찰이라는 신분을 활용하여 고진에게 각종 수사 정보를 물어다주며 아울러 고진의 추리를 기꺼이 들어주는 역할도 한다. 어느 날, 고진은 60대의 여인에게서 의뢰를 부탁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부호인 오빠가 자신에게는 한 푼의 재산도 주지 않고, 딸에게만 전재산을 남긴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자기도 한 몫 받고 싶다는 내용이다.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기 위해 '붉은집'에 방문한 고진은 상속자인 딸의 엄청난 미모에 충격을 받는다. 더구나 그 초절정 미소녀는 눈이 멀기까지 했는데...


본격 추리소설의 세계에서 시력을 잃은 병약한 미소녀가 상속녀가 되는 순간, 그녀는 이미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다. 과연 미소녀는 부산 달맞이고개 별장에서 실족사로 죽는다. 그녀의 남다른 미모에 반해 있었던 고진은 충격을 받고 이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결심을 한다. 고진이 조사를 계속할수록 속속 드러나는 과거의 비밀들, 그리고 연속해서 벌어지는 살인. 경악할 만한 사건의 진상을 당신도 추리해보시라... 간단히 말해 두 건의 알리바이 트릭과 한 건의 밀실 트릭이 핵심인 작품이다. 단서는 비교적 공정하게 제시되는 편이며, 밀실 트릭은 저택의 평면도까지 제공되는 등 순도 100퍼센트의 본격. 세 개의 트릭은 전부 간단한 방법이지만 예외없이 독자의 허를 찌르는 통렬함이 있다. 특히 밀실 트릭에 감탄했는데, 이 정도 수준의 트릭이라면 시마다 소지나 아야쓰지 유키토 같은 일본의 유명한 트릭 제조기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추리소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니 뭣도 모르면서 무식한 소리한다, 라는 불평을 들을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인데 트릭만으로 한정한다면 그간 국내에서 이만한 추리소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추리소설에서도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는 느낌을 받고 싶은 분에게 감히 일독을 권하고 싶다.


물론 도진기 작가의 처녀 장편이니만큼 장점만 있지는 않다. 무엇보다 문장력이 조금 아쉽다(누구의 문장을 지적할 처지는 아니지만). 예컨대 인물 간의 대화는 재앙에 가까워 대사만 놓고보면 60대 노파와 20대 여성의 차이점을 구별할 수 없을 지경이다. 심하게 말해 모든 인물의 대사를 각각 남성형, 여성형으로 나눈 다음 어미만 바꾼 수준이랄까. 이제 데뷔한 작가에게 내가 너무 높은 기준을 제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들을 보면 각 인물의 대사 몇 마디에서 고집센 노처녀, 완고한 군인, 수줍음 많은 총각, 콧대 높은 아가씨 등 그 인물의 성격이 손에 잡힐 듯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이 작가에게는 그런 테크닉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위에서 유독 반 다인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는 것도 그래서 한 말이다. 골수 추리소설 팬들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오직 사건 현장의 조사와 논리, 추리에만 집중했던 반 다인 추리소설의 생명력은 다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주고받는 대화의 맛이 살아 있고 인물들의 성격이 매력적이고 선명하며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세계의 분위기를 작품 속에 깨알같이 녹여냈던 크리스티 추리소설은 여전히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도진기 작가가 이 점을 명심하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몇몇 인물들의 심리와 행동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점도 걸렸다. 냉철해 보이는 고진이 단지 미소녀에 대한 연정으로 사건에 그토록 몰두하는 것은 그리 공감이 가지 않고, 진범으로 제시되는 인물은 살의를 품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본인의 성격에 걸맞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치밀한 성격과 지성으로 대표되는 범인이 딱 한 가지 행동만 했어도 그는 아마 살인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는 건 추리소설 팬의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다. 준수한 데뷔작을 발표했지만 다음 작품들에서 조금만 더, 가 멋지게 충족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p.s/ '어둠의 변호사'라는 설정이 꽤 멋지게 느껴졌는데, 실제로는 작품 속에서 별로 활용되지 못하는 것 같다. 파일로 밴스처럼 법의 힘으로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못하는 범인을 직접 단죄하는 듯한 설정이 결말에 나와 아, 이래서 '어둠의 변호사'구나 하며 상당히 만족했었다. 그런데 역시나 현역 판사라는 신분이 맘에 걸렸을까. 아무래도 사적인 정의의 실천을 옹호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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