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불가 라틴아메리카
장재준 지음 / 의미와재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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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중남미지역을 말한다. 쉽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잉카문명, 마야문명과 아즈텍문명이다. 이 두 문명의 중앙에 멕시코가 있었다. 멕시코는 신에게 축복을 받은 나라였을까? 또하나 떠오르는 것이 있다면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권총으로 자살을 했다던)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가서 죽다>라는 소설이다. 새들이 왜 페루에 가서 죽는다는 건지 그 의미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자기앞의 생>을 쓴 에밀아자르가 그의 필명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라틴아메리카만 그럴까? 대체불가, 라는 말을 보고 하는 말이다. 어느 곳인들 저마다의 사연이 없으며 저마다의 의미가 없을까 싶어 하는 말이다. 그만큼 글쓴이가 라틴아메리카에 빠진 사람이라는 말도 될 터다. 그러니 얼마나 세세하게 그렸을까 내심 기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만큼 약간은 지루한 면도 있었다. 한편의 신화를 읽듯이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왜냐고? 유럽열강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지구촌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싶어서. 지금 아프리카가 겪고 있는 지역간의 갈등과 배고픔의 고통도, 중남미지역의 고통도 모두가 유럽열강들로 인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힘없고 욕심없는 게 죄라면 죄일까? 사실 우리도 힘이 없어서 일제강점기를 겪었으니... 그렇게나 멋진 문명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렇게나 많은 자연자원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그것을 제대로 이용하지도 못한 채 그것들로 인해 더 많은 고통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중남미지역을 보면서 그랬기에 그토록이나 짙은 역사가 탄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역설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중에 애니깽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오래전 '애니깽'이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하와이농장이나 독일의 광부, 간호사로 팔려간 사실보다 기억되지 못하는 역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노예보다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돈을 벌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진채로 살아야 했다던 애니깽들의 서글픈 역사가 가슴을 숙연하게 만든다. 생각보다 쿠바에 관해 지면을 많이 할애한 듯 하다. 체 게바라라는 혁명가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고 쿠바의 문화나 사회현상등이 구구절절하게 쓰여져 있다. 왜 쿠바였을까? 많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애니깽'에 대해 조사하러 갔던 여인이 쿠바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쿠바의 연인>이라는 영화도 등장한다. 그 영화를 통해 쿠바의 환부와 우리 사회의 치부를 덧대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결핍과 과잉의 악순환, 독단과 배제의 논리, 속도와 소비 신화, 불평등과 비정규직 문제 등을 천천히 돌아보게 한다고. 책을 읽으면서 문득 <쿠바의 연인>이라는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정말 그렇게 그려졌다면 쿠바라는 나라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잉카제국 전성기에 관한 부분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잉카의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던 그들 문화의 단면이 이채로웠다. 우리 역사속의 '역'이나 '원'같은 역참문화가 그들에게도 있었으며 우리의 파발마같은 전달수단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전달 수단은 '차스키' 라는 인간이었다. 하체가 튼실하고 폐활량이 좋은 아이들을 '차스키'로 양성했다는 말도 보인다. 어찌되었든 한나라의 역사를 알아간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텍사스가 원래는 멕시코의 땅이었다는 것도 이제사 알게 된다. 밭의 세자매로 불린다는 옥수수와 콩, 호박등과 같은 웬만한 식재료의 원산지가 멕시코였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럼에도 지금의 그들은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옛날에는 유럽열강들에 의해 사탕수수와 싸움을 했다면 지금은 미국의 기업들을 위해 옥수수와 싸움을 하고 있다. 그토록이나 풍성했던 그들의 대지가 사탕수수와 옥수수로 인해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배부른 자들을 위해 배고픈 자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씁쓸한 인류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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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금수저의 슬기로운 일상탐닉
안나미 지음 / 의미와재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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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천대받던 존재들이 지금은 대접 받으며 산다는 말이 있다. 하나의 예로 들어보자면 개와 여자가 아닐까 싶다. 마당 귀퉁이에서 사람이 먹다남긴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복날이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로 툭하면 걷어차이던 개가 이 시대에는 사람보다 더 잘 먹는다고 한다. 사람처럼 옷을 입고 하다못해 사람등에 업혀다니는 개도 본 적이 있다. 이뻐서 그렇단다. 부엌데기 신세를 못면하고 밥한그릇 제대로 먹기도 힘들었으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죽도록 일만 해야했던 여자들의 위상이 조금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남존여비사상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일부 기성세대의 시선에서는 아직도 놓여나지 못한 신세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반려동물이 있었다는 글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제이다보니 그들이 탐닉했다던 여덟가지의 부제를 목록에서 먼저 보여주고 있다.


먹고, 놀고, 반려동물을 키우고, 꽃을 보고 즐기며 꽃그림자놀이를 했다. 3대에 걸쳐 문과 합격자가 없으면 양반행세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시험을 인생의 전부로 생각했다. 양반이라고해서 다 잘 먹고 잘 살았던 건 아니라서 그 시험을 보기 위해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대한 다양한 이견이 있었으며, 계모임이나 문학동호회를 즐겼고, 당시에도 한류스타가 있었다는데... 창덕궁 후원 답사를 가면 갈 때마다 주돈이의 '애련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사랑했다는 꽃이야 뻔하지 않은가. 저마다의 이유를 붙여가며 사랑했던 꽃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것은 유교의 관념에 억눌린 인간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왕실에서도 꽃을 마음놓고 즐기지 못했다는데 그 이유가 참 허망하고 서글프다.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땅에 먹지도 못하고 보고 즐겨야 하는 꽃을 심는일이 유행한다면 백성들의 삶이 고단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지금 사람들이야 꽃놀이를 가기 위해 일부러 꽃길도 조성하고 군락지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삶이 고단해지지는 않는다. 선비들을 굳이 금수저라고 바꿔 말한 이유를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3년에 한번씩 치루고 합격자가 33명밖에 되지 않는 과거시험에 급제를 하면 그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난장'이라는 말이 과거시험에서 나온 말이다. 빨리 문제를 보고 빨리 답을 써서 빨리 제출해야 유리했던 까닭에 있는집 자제들은 시험장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사람을 샀는데 그들이 서로 몸싸움을 하여 다친 사람도 많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던 셈이다.


계영배라는 게 있었다. 잔이 차면 넘치니 넘치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술잔이다. 그런데 계일정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역시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정자 밑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아래에 도랑을 파서 물이 차면 돌을 치워 물길을 열어주고 물이 줄어들면 돌을 막아 물을 가두었다고 한다. 선비가 머무는 집이라는 부제속에 보이는 글이다. 이것은 곧 사람의 욕심을 경계했다는 말일터다. 경계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다산의 집 '여유당'이 떠오른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신중하게 살라는 뜻으로 붙였다는 당호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이가 적지 않았으니 한사람의 마음이 오롯이 들어앉은 당호가 아닐까 싶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나 허균이 '누실명'이란 당호를 붙여 불우한 삶을 불우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니 사람에게 집이 주는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볼 만한 일화다. 누실陋室은 누추한 집이라는 뜻이고, 명銘은 스스로를 경계하거나 남의 공덕을 기린다는 뜻이라 한다. 치헌痴軒이라는 기가 막힌 당호도 있다. 先代에 어찌 이런 집이 많지 않았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친한 선비들 중에서 70세 이상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연꽃감상을 했다는 계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모두 12명의 계원들이 그날의 기록을 그림으로 그려 하나씩 간직했는데 지금은 단 하나만 남아 있단다. 그 하나 남은 '남지기로회도'에 발문을 써달라고 12계원중 한명이었던 이인기의 5대손이 박세당에게 그림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1691년 12월에 썼다는 그 발문이 또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어 소개한다. " 오늘날 사대부들을 보면, 서로 교유하는 꼴이 한 배를 타고서도 서로 해치려 키를 뽑고 상앗대를 꺾으며, 같은 방을 쓰면서도 서로 해치려고 상을 던지고 의자를 밀치고, 심지어는 한 쪽은 고기가 되고 한 쪽은 식칼이 되고서도 분쟁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다시 이 그림속의 선배들처럼 흰머리에 비둘기 지팡이를 짚고 자제들을 거느리고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기쁨을 나눌 일이 있겠는가."(-230쪽) 마지막으로 조선의 한류스타들을 다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문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이라거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는 이정귀, 허균, 허난설헌등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명나라 주지번의 역할이 컸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명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한류열풍이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남아시아권까지 우리 문인의 시가 읽혔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중국의 이백이나 두보를 따라하기 보다는 자신의 시를 쓰고 싶었다던 허균의 한마디가 시선을 끈다. 지금 이시대의 우리에게 전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지금 내가 시를 쓰는 목적은 이백과 두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나'를 찾는 데 있다. 나는 내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고 송나라 시와 비슷해지는 것을 염려한다. 도리어 남들이 나의 시를 '허자許子의 詩'라고 말하게 하고 싶다."(-274쪽) 울림이 크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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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 에디터스 컬렉션 10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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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바로 전에 읽었던 책의 저자가 사르트르를 이야기 했었다. "지식인은 고독하며, 고독은 지식인의 운명"이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다는 것이다. 또한 피지배 계급은 지식인에게서 '이데올로기'가 아닌 '실천'을 요구한다며 '실천적 지식인'이 되기 위한 두 가지 자세를 요구했다. 첫째, 지식인은 끊임없이 자기비판하면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 둘째, 혜택 받지 못한 계급의 행동에 구체적으로, 거리낌 없이 참여해야 한다...<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라는 책속에서 정병석 교수가 했던 말이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궁금했다. 돌이켜보니 사르트르의 작품을 한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내친김에 사르트르에 대해 알아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장 폴 사르트르. 1905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고 외조부 밑에서 자랐다. 그의 외조부가 바로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의 큰아버지였으니 가풍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할 만 하다. 1929년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고 그 때 계약결혼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던 평생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를 만난다. 사르트르가 수석이고 보부아르가 차석이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1931년 군복무를 마치고 르아브르의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부임했는데 그 항구도시가 바로 이 작품 <구토>의 무대가 되었다고 한다. 1938년에 <구토>를 출간했다는 말이 시선을 끈다. 20대초반에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게 이채롭게 다가왔다. 세계제2차대전에 참전했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도 했다. 한때 마르크스 사상에 매료되어 공산당을 지지하는 글도 썼으며, 반전 운동을 하기도 했다. 1964년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문학성에 등급을 매기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참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실존주의 철학자로 유명했던만큼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말도 보인다. 실존주의라는 말을 보면서 그와 비슷한 극사실주의라는 말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의 작품해설에서도 극사실주의라는 말이 보이긴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두사상이 같아 보인다. 그래서 정병석 교수가 사르트르의 말을 거론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 책을 읽는 시간이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할만큼. 그저 주변의 일상을 문자로 그렸을 뿐이다. 보여지는 일상이 무의미해보이고, 보여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어 보인다. 그저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것일뿐. 그 무료함을, 글로 달래려고 애쓰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뭔가를 찾아서라도 써야 될 것처럼. 그런 무의미한 일상을 바라보며 하나씩 문자로 써나가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고민거리가 없다. 난 연금생활자만큼이나 돈이 있고, 섬겨야 할 상관도 없으며, 아내도, 자식도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이 존재한다는 고민은 너무나 애매하고 형이상학적인 것이라서 부끄러울 정도다.(-248쪽) 집도 없이 호텔에서 거주하면서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한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하마터면 거울의 덫에 걸려들 뻔했다. 나는 거울의 덫은 피했지만, 결국에는 유리창의 덫에 걸려들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서 창문으로 다가간다.(-79쪽) 대부분 그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카페와 도서관이다. 그곳에서도 역시 늘 만나는 사람들과 눈길을 주고 받는다. 카페 여주인과 묘한 관계를 맺기도 하며, 먹을 것을 시키며 여종업원과 노닥거리기도 하고, 도서관에서는 A부터 시작하여 모든 책을 읽기로 한 듯한 독서가와 짧은 대화를 주고 받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속에 그의 마음과 영혼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은 듯 하다. 그저 피상적인 인사나눔일 뿐이다. 우리가 살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배경이 계속 바뀌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갈 뿐이다. 여기에 시작은 결코 없다. 날들이 아무 이유없이 날들에 덧붙여지는데, 이것은 끝나지 않는 단조로운 덧셈이다.(-100쪽) 나는 멋진 문장들을 꾸며낼 필요가 없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상황들을 명확히 규명하기 위해서다. 문학을 경계해야 한다. 멋진 말을 찾아내려 하지 말고, 펜 가는대로 써야 한다.(-136쪽) 그런데 참 희안한 것은 책을 읽을수록 그가 표현하는 모든 일상이 마치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끼게 된다. 무엇일까? 이 낯설지 않음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지만 맘대로 되지 못하는 일상속의 내 모습을 이 책속에서 보게 된다.나는 떠나고 싶다. 진정한 나의 자리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내가 딱 들어맞는 곳으로.... 하지만 내 자리는 아무데도 없다. 나는 잉여적인 존재다.(-285쪽) 그 낯설지 않음속에서 그가 찾고 싶어하는 것들이 무언인가를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누가 그랬던가, 가장 위대한 것은 평범한 것이라고. 이 책은 내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작품해설을 읽는다고 이해되는 건 아니다. 철학자로서보다는 작가로서 더 유명하다는 사르트르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고 위안삼는다. 어쩌면 한번 더 읽을 수 있는 기회마저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긴 시간이 흐른후에 다시 책장을 펼칠지도... 그가 그 도시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듣고 싶어했던 노래의 제목이 알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Some of these days 머지않아서 You'll miss me honey 당신은 나를 그리워할거예요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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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 - 특권과 반칙 극복할 돌파구, 신뢰와 법치에 대하여
정병석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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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인가? 누구에게나 법이 평등하게 적용되는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로 시작하는 대한민국의 헌법. 정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에 의해 흘러가고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모든 일은 미리 정해진 법률에 의해서만 시행되어야 한다는게 법치주의의 원칙이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국회를 보면 마치 법을 만들어내는 공장처럼 보인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ㅇㅇ법, ㅇㅇ법, ㅇㅇ법, ㅇㅇ법... 참 많이도 만들어내니 말이다. 법을 만든다는 게 저리도 쉬운 일이었는가 다시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법을 아무리 만들어도 그 법에 저촉되는 일들은 쉼없이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그 문제를 피상적으로 들여다보았으며 겉으로 보이는 것만 졸속처리를 하여 법을 만든 탓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들여다보지도 않았다는 말이거나 보여주기식 행동에 불과하다는 말일터다. 기가 막힌 일이다. 한나라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가는 사람들이 어쩌면 저리도 가벼울수가 있는지....

대한민국의 사회는 공정한가?

아니 그렇지 않다. 절대로! 공평하고 올바르게 처리되는 일이 그만큼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有錢無罪 無錢有罪 라는 말을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엊그제 뉴스만 보더라도 가습기 살균죄에 대한 판결이 무죄로 결정되었다. 정말 그들이 무죄였는지는 그들 자신이 더 잘 알것이다. 오죽했으면 그것을 연구했던 연구진들이 항의회견을 했을까 싶다. 현실을 무시한 처사가 아닐수가 없다. 제나라의 국민이 병에 걸리고 죽었음에도 그들에게는 그런 사실조차 강건너 불구경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코팅제로 인해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렸음을 알았던 한 변호사가 끝까지 싸워 마을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기사로 본 적이 있었다. 그 재판은 아직까지도 진행중이라 한다. 왜냐하면 기업이 여전히 코팅제를 써서 주방기구를 만들고 있는 까닭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대한민국의 사회는 절대로 공평하지 않다. 오죽했으면 돈만 있으면 살기좋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말이다.

대한민국의 사회는 정의로운가? 또한 대한민국의 사회는 도덕적인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올고 바름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다. 뜻이 맞으면 같은 편이고, 뜻이 다르면 적으로 간주하는 현상태를 돌아보면 대한민국 사회를 절대로 정의롭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라는 말을 그야말로 밥먹듯이 쓰면서 오로지 '나' 아니면 '너'만 존재하는 세상이 바로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이 사회가 도덕적인 모습을 보여줄리 만무하다. 위안부 할머니께서 눈물을 흘리며 기자회견을 하게 만들었던 사람은 지금 버젓이 국회활동을 하고 있다. 그 사건에 대한 결말은 흐지부지된채로. 비정상적인 노조의 움직임만 봐도 이 사회를 정의롭거나 도덕적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능력만큼 대우를 받은 사회인가?

이 질문은 참으로 서글픈 느낌을 불러온다. 타고난 신분이나 계급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능력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그 능력에 맞는 대우를 해준다고 말은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많은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깨지지않는 관료주의 아래 권한만 있고 책임은 없는, 학연이나 지연에 얽힌 파벌주의가 난무하는 현실속에서 과연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렇게 저렇게 따지고들면 어디 썩지않은 곳이 있을까 싶다. OECE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1위라 한다. OECE에 따르면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꼴찌라 한다. 시민의식을 탓하기에 앞서 사회 지도층이 특권의식을 빨리 버려야 한다. 특권을 버리고 공개하고 투명하면 국민들의 신뢰는 당연히 높아진다. 대한민국도 스웨덴처럼 국회의원의 모든 공식적인 일을 투명하게 처리하면 얼마나 좋을까?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를 하자고 몇번 목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그들 스스로 언제 그랬냐는 듯 슬그머니 꽁무니를 뺀 걸 보면 저들은 자신의 손아귀에 쥔 걸 보여주기도 싫고 내놓기도 싫은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다시한번 시선을 끈다. 대한민국은 왜 무너지는가...

사회의 어른이 존재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속에서 아픈 청춘들의 아우성은 날로 심해져만 간다. 한쪽으로 치우친 정치는 기울대로 기울어 배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듯 하다. 국민은 국민대로 살려달라고 아웅성이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가 일어서서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런 염려로 이 책이 나왔을 것이다. 지식인들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지만 이 책 역시도 현실적인 대안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안타깝다.

한국에서 30년을 살았다는 영국의 기자 마이클 브린은 < 한국, 한국인>이라는 작품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의 당면 과제는 성공에 이르는 길을 다변화하고 사회적 서열을 자존감과 분리시키는 것이다" 라고. 브린은 '성공'을 판단하는 기준도 바꿔야 한다고 제안했다. 브린은 유교 전통의 영향을 받은, "체면을 중시하고 타인의 시각을 자신의 생각보다 더 따지는 문화에서 탈피하자"고도 이야기 했다.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의식하는 체면 중시 문화에서 성공의 기준이 너무 단순화되었고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만 성공했다고 대우하는 풍토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한민국은 이제 정치인, 관료, 볍조인, 의사가 과도하게 대우받는 문화에서 탈피해야 한다. 대개 체면 중시 문화의 유산이다. 조선의 문화유산은 아직도 한국인의 의식속에 남아 있다.(-214쪽) KOREA는 고려에서 온 이름이다. KOREA는 조선을 거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쯤 이 작은 나라가 덩치 큰 나라에게 호령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고려는 여러가지로 충분히 그럴만한 가능성을 지닌 나라였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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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청궁일기
박영규 지음 / 교유서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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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인... 일본의 떠돌이 무사, 봉건제도의 잔재이자 군국주의의 전초병, 한마디로 말해 무법자다. 그런 낭인들의 손에 의해 조선의 국모가 살해되었다는 건 한마디로 말해 치욕이다. 조선의 국모를 살해하기로 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이들은 낭인이 아니었다는 말을 이 책에서 보게 된다.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그토록이나 낭인들에 의해 조선의 국모가 살해되었다고 배워야만 했을까? 우리를 하찮게 보이게 하기 위한 일본의 전략적인 말이었음에도. 이제는 스토리텔링에 의지하지 않는 제대로 된 역사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의 모습은 그다지 많지 않은 듯 하다. 흔히들 말하는 "내가 조선의 국모다!" 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영화와 같이 떠도는 이야기만 무성할 뿐이다. 건청궁에 갈 때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갈 때마다, 덕수궁 석조전에 갈 때마다 늘 답답했었다. 도대체 한 나라의 국모였다는 명성황후의 얼굴을 우리는 왜 볼 수 없는 것일까? 하고. 그 당시의 나라 상황으로 볼 때 궁궐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많았다. 고종의 얼굴, 순종의 얼굴, 하다못해 엄귀비의 얼굴까지 다 볼 수 있는데 외국영사부인들과 그토록이나 가깝게 지냈다던 명성황후의 사진이 단 한장도 없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가끔 이런 엉뚱한 생각도 해 보았었다. 일본의 낭인들이 죽인 것은 조선의 국모가 아니었지도 모른다고. 분명히 어딘가에서 오욕의 세월을 견디며 살다가 죽었을 거라고.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런 엉뚱한 상상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되다니! 그것도 아니라면 정치적인 어떤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상상일 뿐이지만.


이 책은 명성황후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다. 한명의 여인으로, 아내로, 어머니로 살았던 여자의 이야기다. 오래전부터 왕비를 배출했던 집안의 딸로 태어나 막연히 왕비를 꿈꾸었던 소녀. 그 소녀가 대원군의 며느리가 되고 왕비가 된다. 남편의 여자를 보면서 질투를 하고, 아이를 유산하는 아픔을 겪게 되지만 세월의 풍랑을 겪으며 강해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어찌 그 안에 욕망이 없었을까? 힘든 시절에 만난 무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그녀에게 자신을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된다. 대원군과의 힘겨루기는 지금까지도 자주국방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게 하여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한다. 이 책을 통해 한일합병이 되기까지의 전반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지금의 우리에게 자주 들려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이 조선의 마지막을 닮아 간다고. 빼다 박은 듯이 조선의 마지막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고.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 묻지 않을수가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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