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시선 너머의 지식 - 9가지 질문으로 읽는 숨겨진 세계
윤수용 지음 / 북플레저 / 2025년 7월
평점 :
경쟁, 평가와 생존만이 과도하게 강조되며 가치 합리성보다는 목적 합리성이 더 중요시되는 분위기 속에서는 물질만능주의적인 사고관이 싹틀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실용주의를 극도로 추구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싱가포르의 젊은이는 정치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반면 돈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철학이나 지성적인 면은 등한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지요. 싱가포르가 생존을 위해 채택한 국가적 원칙인 능력주의는 사회적으로 성공의 여지가 좁다고 느끼게 만들어,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해타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키아수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싱가포르의 이러한 초경쟁사회의 분위기는 초등학교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싱가포르에서는 학교야말로 경쟁사회의 압축판이자 시험판입니다.(-73~74쪽. 초경쟁사회의 민낯, 싱가포르편에서)
우선 묻고 싶어진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일까? 선진국 기준은 단순히 GDP가 높다는 것이 아니다. 그에 따른 교육수준이나 중산층 비율이 높아야 하고, 의료·교육·복지 제도가 잘 운영되어야 한다. 거기에 정치적 안정성과 시민의식까지 높아야 진정한 선진국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선진국이라고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은 아직 아닌 듯 하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들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이면의 이야기들이 상당히 이채롭게 다가온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나라들 앞에 붙어있는 소제목들이 먼저 눈길을 끄는 이유다. 행복 이면에 숨겨진 모순, 덴마크... 초경쟁사회의 민낯, 싱가포르... 청산되지 않은 과거, 미국... 타자화된 역사의 그림자, 아이슬란드... 콤플렉스의 거울, 일본... 엘리트주의의 실체, 프랑스... 신자유주의의 그늘, 영국... 가족주의의 덫, 이탈리아... 물질만능주의 사회, 중국... 앞에 정의되어진 소제목들만 보고 저자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어렴풋하게 유추해 보게 된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현재와 맞닿아 있을테니 말이다.
블레어는 1997년 10월, 영연방 정부 수반 회의 연설에서 "엘리트의 영국은 끝났습니다. 새로은 영국은 실력사회입니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의도야 어떻든 분명 사회 정의를 위해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제공해야한다는 외침으로 들렸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사회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은 채 외치는 실력주의란, 신노동당이 표심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중산층에게라면 모를까 노동계급의 약자들에게는 전혀 공정한 것이 될 수 없었습니다.(중략) 그의 '실력사회' 선언은 모순적이게도, 대처 집권 시기 열심히 일할 기회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신노동당 집권 시기에 이르러 부유층의 자녀들과 공평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그 자녀들의 현실을, 마치 실력이 부족해서 비롯된 것으로 정당회해버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295~296쪽. 신자유주의의 그늘, 영국편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능력주의 혹은 실력주의라고 정의되곤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진정한 능력주의시대는 아닌 듯 보여진다. 민주주의라는 사회는 공평과 공정을 말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자본주의 시대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시대는 이익을 목표로 한다. 결과적으로 10을 가진 사람보다 90을 가진 사람이 더 잘 될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말이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교과서적인 이론만을 앞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절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낮은 출산율은 단지 경제적·인구적 차원에서 국가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도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신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한 사회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려는 의지가 극도로 낮다는 사실은 그 사회가 가진 많은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신호이자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높은 고용 불안정성 때문에 출산 의향이 지연되는 노동시장의 여건,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안정된 주거 환경,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보다는 정규직 근로자의 보호에 중점을 두는 사회보장제도, 불충분한 돌봄 서비스 때문에 보육과 요양에 있어 가족 구성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 또 잦은 정권교체와 포퓰리스트 정당들의 집권으로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의 무능 등, 이런 이탈리아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결국 이탈리아를 '아이를 낳고 기르기 힘든 사회'로 만들고 말았습니다.(-309쪽. 가족주의의 덫, 이탈리아편에서)
가족주의의 덫,이라는 말은 큰 울림을 준다. 우리 역시 그런 사회를 살고 있는 까닭이다. 이탈리아의 이야기를 보면서 공감하지 않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처해진 상황이 모두 대한민국의 현실과 다를 바 없으니. 덴마크의 '휘게'가 갈등 회피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 이나 될까? 폴리텍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직업교육훈련이라는 개혁 의지를 담고 있다고 나오지만 모두가 공평하게 교육을 받자는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 시기에 국가 엔지니어로서의 독점적 지위와 특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제 나라의 현실은 고려하지도 않고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은 것들만 죄다 가져오니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실험실의 쥐나 비이커 속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갈 뿐이다. 무리한 경쟁과 고강도 근무에 피로를 느끼는 일부 중국 청년들은 "적게 벌고 적게 쓰며 경쟁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젊은이들은 어떨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사회주의조차 이겨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번 되뇌어본다. 과연 마르크스가 말한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는, 지금 이 역사 속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단언컨대,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뇌구조를 가졌다고 하니.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한 오류를 짚어본다. 만들어진 것들의 세계라는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아니 간사하다. 인간에게는, 인류의 역사속에는 숨기고 싶은 이면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많이 보인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아이비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