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열의 교양 -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위의 법칙 ㅣ 세계척학전집 7
이클립스 지음 / 모티브 / 2026년 8월
평점 :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지위의 법칙'이라는 부제가 시선을 끈다.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우리의 삶 속에 숨겨진 지위의 법칙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서열'과 '지위'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이 책은 그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일종의 심리서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리처드 탈러의 <행동경제학>이 떠올랐다. 상당히 합리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던 사람들의 생각이 꽤나 이채로웠던 책이었다. 드발이 관찰했다던 침팬지의 정치학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담배보다 직급이 사람을 죽인다 (사폴스키의 서열 스트레스), 언제부터 남의 눈으로 살게 되었나 (루소의 자기애와 이기심), 인류 최초의 무기는 뒷담화였다 (보엠의 평등의 기원), 무릎 꿇는 법을 가르치자 사회가 태어났다 (순자의 예), 누가 먼저 말을 놓자고 하는가 (브라운과 길먼의 호칭 정치학), 믿으면, 없던 서열도 생긴다 (리지웨이의 지위 구성 이론), 인간이 하는 게임은 셋 뿐이다 (스토의 지배·미덕·성공), 당신의 장례식에서 아무도 이력서를 읽지 않는다 (브룩스의 두 이력서), 게임 밖에서 만난 사람만 남는다 (부버의 나와 너)... 목차를 보면서 시선을 끌었던 주제들이다. 읽으면서 많은 것에 공감하게 된다. 먼저 말을 놓자고 하는 쪽의 서열이 높아진다는 말에 동의하는가? 아마도 어느 정도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인간관계에서 느끼는 위축감이나 억울함은 누구나 한번 쯤은 다 겪어봤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가진 것이 많은 자의 서열이 더 높은 것도 사실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자라면서 이미 그렇게 교육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과 과시하고 싶은 마음 역시 서열의 기준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헨릭과 동료들은 심리학 연구의 표본을 조사했다. 널리 인용되는 추산으로는 연구 참가자의 96퍼센트가 세계 인구의 12퍼센트가 사는 나라들에서 나왔다. 서구의western, 교육받은educated, 산업화된indestrialized, 부유한rich, 민주주의democratic 사회. 앞글자를 따면 위어드WEIRD가 된다. 영어로 위어드는 이상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인류의 표준이라 여겨온 사람들이, 알고 보니 인류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개인주의,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 자기를 남과 분리해서 생각하는 습관. 이런 것들은 인간의 보편적 특성으로 보이지만 실은 위어드 사회의 특성이다. 우리가 매일 읽는 말들이 있다. 자존감을 높여라. 남의 눈치를 보지 마라. 내 삶의 주인이 되어라. 관계를 끊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 처방들은 어디서 왔는가.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고, 관계를 끊어도 살아남을 수 있고, 무리를 떠나도 굶지 않는 사회의 처방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에서는 관계와 평판이 여전히 훨씬 큰 영향을 미친다. 여기서는 관계가 곧 자원이고, 평판이 곧 기회이며, 무리를 떠나면 실제로 잃는 것이 있다. 그러니 그 처방이 잘 듣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를 탓한다. 나는 왜 남 눈치를 못 버리지. 나는 왜 이렇게 약하지.(-89쪽,90쪽) 이 글을 읽으면서 왠지 모를 분노감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저런 이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 또한 서열의 기준인가. 먼저 연구하고 분석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학설이 깨지는 걸 원치 않는다.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면 일단 어떻게 해서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들이 가진 지위나 서열에서 밀리고 싶지 않은 심리일 것이다.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가를 보면 안다. 그 심리의 안쪽에는 일종의 우월감도 자리했을 터다. 예는 옛 임금이 만들었다고 순자는 썼다. 그러나 그 임금도 사람이다.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고 방금 그가 말했다. 그러면 악한 자가 어떻게 선한 것을 만들었는가. 이 반문은 이천 년 넘게 순자를 따라 다녔다. 그러나 그는 <성악편>에서 이미 답해두었다. 성인도 우리와 같았다. 다만 그들은 더 오래 생각했고, 더 오래 배우고 익혔다. 진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 옹기장이처럼, 자기 본성을 재료로 삼아 그 위에 다른 성품을 만들어냈다. 욕망이 충돌하고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본 사람들은 그 다툼을 끝낼 방법을 궁리했다. 그렇게 빚어낸 질서가 예였다. 우리가 미덕이라 부르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궁리 끝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다시 만들 수도 있다.(-113쪽)
'당신의 장례식에서 아무도 이력서를 읽지 않는다'는 말은 커다란 울림을 준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침팬지의 정치학에서 보듯 힘센 지도자보다는 무리와 어울리는 자가 끝까지 살아 남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그토록 중요하다는 말일 터다. '게임 밖에서 만난 사람만 남는다'는 말도 시선을 끈다. 모든 경쟁에서 벗어난, 아무런 계산도 하지 않는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만이 곁에 남는다는 말이다. 진정한 친구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까닭 모를 위축감이나 억울함이 단순히 개인의 성격이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다. 숨은 지위의 규칙을 간파하는 지식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고. 그런 까닭으로 24명의 학자들이 탐구한 인간의 지위 욕구와 권력의 원리를 이 책에 담았다고 한다. 몰입도가 괜찮았다./아이비생각
자기 확대 문화. 이 문화가 반복하는 말은 이렇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자기를 믿으세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세요. 광고, 자기계발서, 소셜미디어, 학교의 표어, 부모의 격려. 어디를 봐도 같은 문장이 반복된다. 이 언어에는 가기 결함을 다루는 자리가 없다. 자기의 좋은 점을 확대하고, 부족한 점은 격려로 덮는다. 자기를 낮추는 태도는 소극적인 자세로, 자기의 부족을 응시하는 태도는 부정적인 태도로 여겨진다. 그 결과 우리는 자기의 결함을 이야기할 언어를 잃었다. 대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기 브랜드, 자기 성장, 자기 실현의 언어다. 자기 확대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자기의 부족을 응시하는 시간이 사라지고, 그 부족을 마주하는 말이 함께 사라진다.(-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