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금수저의 슬기로운 일상탐닉
안나미 지음 / 의미와재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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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천대받던 존재들이 지금은 대접 받으며 산다는 말이 있다. 하나의 예로 들어보자면 개와 여자가 아닐까 싶다. 마당 귀퉁이에서 사람이 먹다남긴 찌꺼기를 받아먹으며 복날이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신세로 툭하면 걷어차이던 개가 이 시대에는 사람보다 더 잘 먹는다고 한다. 사람처럼 옷을 입고 하다못해 사람등에 업혀다니는 개도 본 적이 있다. 이뻐서 그렇단다. 부엌데기 신세를 못면하고 밥한그릇 제대로 먹기도 힘들었으면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죽도록 일만 해야했던 여자들의 위상이 조금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남존여비사상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한 일부 기성세대의 시선에서는 아직도 놓여나지 못한 신세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반려동물이 있었다는 글이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의 선비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이 책의 주제이다보니 그들이 탐닉했다던 여덟가지의 부제를 목록에서 먼저 보여주고 있다.


먹고, 놀고, 반려동물을 키우고, 꽃을 보고 즐기며 꽃그림자놀이를 했다. 3대에 걸쳐 문과 합격자가 없으면 양반행세를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시험을 인생의 전부로 생각했다. 양반이라고해서 다 잘 먹고 잘 살았던 건 아니라서 그 시험을 보기 위해 패가망신한 사람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대한 다양한 이견이 있었으며, 계모임이나 문학동호회를 즐겼고, 당시에도 한류스타가 있었다는데... 창덕궁 후원 답사를 가면 갈 때마다 주돈이의 '애련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조선의 선비들이 사랑했다는 꽃이야 뻔하지 않은가. 저마다의 이유를 붙여가며 사랑했던 꽃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것은 유교의 관념에 억눌린 인간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왕실에서도 꽃을 마음놓고 즐기지 못했다는데 그 이유가 참 허망하고 서글프다. 곡식을 심을 수 있는 땅에 먹지도 못하고 보고 즐겨야 하는 꽃을 심는일이 유행한다면 백성들의 삶이 고단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지금 사람들이야 꽃놀이를 가기 위해 일부러 꽃길도 조성하고 군락지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삶이 고단해지지는 않는다. 선비들을 굳이 금수저라고 바꿔 말한 이유를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3년에 한번씩 치루고 합격자가 33명밖에 되지 않는 과거시험에 급제를 하면 그 순간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난장'이라는 말이 과거시험에서 나온 말이다. 빨리 문제를 보고 빨리 답을 써서 빨리 제출해야 유리했던 까닭에 있는집 자제들은 시험장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사람을 샀는데 그들이 서로 몸싸움을 하여 다친 사람도 많이 나왔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던 셈이다.


계영배라는 게 있었다. 잔이 차면 넘치니 넘치지 않도록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술잔이다. 그런데 계일정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역시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는 의미다. 정자 밑에 연못이 있었는데 그 연못 아래에 도랑을 파서 물이 차면 돌을 치워 물길을 열어주고 물이 줄어들면 돌을 막아 물을 가두었다고 한다. 선비가 머무는 집이라는 부제속에 보이는 글이다. 이것은 곧 사람의 욕심을 경계했다는 말일터다. 경계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게 되면 다산의 집 '여유당'이 떠오른다.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신중하게 살라는 뜻으로 붙였다는 당호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난 이가 적지 않았으니 한사람의 마음이 오롯이 들어앉은 당호가 아닐까 싶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이나 허균이 '누실명'이란 당호를 붙여 불우한 삶을 불우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니 사람에게 집이 주는 의미를 다시한번 새겨볼 만한 일화다. 누실陋室은 누추한 집이라는 뜻이고, 명銘은 스스로를 경계하거나 남의 공덕을 기린다는 뜻이라 한다. 치헌痴軒이라는 기가 막힌 당호도 있다. 先代에 어찌 이런 집이 많지 않았는지 한탄스러울 뿐이다.


친한 선비들 중에서 70세 이상되는 사람들끼리 모여 연꽃감상을 했다는 계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모두 12명의 계원들이 그날의 기록을 그림으로 그려 하나씩 간직했는데 지금은 단 하나만 남아 있단다. 그 하나 남은 '남지기로회도'에 발문을 써달라고 12계원중 한명이었던 이인기의 5대손이 박세당에게 그림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1691년 12월에 썼다는 그 발문이 또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어 소개한다. " 오늘날 사대부들을 보면, 서로 교유하는 꼴이 한 배를 타고서도 서로 해치려 키를 뽑고 상앗대를 꺾으며, 같은 방을 쓰면서도 서로 해치려고 상을 던지고 의자를 밀치고, 심지어는 한 쪽은 고기가 되고 한 쪽은 식칼이 되고서도 분쟁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니 어떻게 다시 이 그림속의 선배들처럼 흰머리에 비둘기 지팡이를 짚고 자제들을 거느리고 한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기쁨을 나눌 일이 있겠는가."(-230쪽) 마지막으로 조선의 한류스타들을 다루고 있다. 대체적으로 문인들의 이름이 보인다.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이라거나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다는 이정귀, 허균, 허난설헌등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명나라 주지번의 역할이 컸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명나라가 망하는 바람에 한류열풍이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동남아시아권까지 우리 문인의 시가 읽혔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중국의 이백이나 두보를 따라하기 보다는 자신의 시를 쓰고 싶었다던 허균의 한마디가 시선을 끈다. 지금 이시대의 우리에게 전하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지금 내가 시를 쓰는 목적은 이백과 두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진정한 '나'를 찾는 데 있다. 나는 내 시가 당나라 시와 비슷해지고 송나라 시와 비슷해지는 것을 염려한다. 도리어 남들이 나의 시를 '허자許子의 詩'라고 말하게 하고 싶다."(-274쪽) 울림이 크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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