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쓰게 된다 - 소설가 김중혁의 창작의 비밀
김중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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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작가와 그의 작품을 좋아한다. 내가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소설 속에서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중혁 작가의 단편 중에 [보트가 가는 곳]이란 작품이 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어느 날 지구에 탁구공 모양만 한 셀 수 없는 우주선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이 땅에 지금 1미터 정도의 구멍을 수없이 만들어 낸다. 사람들은 그 구멍 속에 빠져서 죽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우주선들이 몰아붙이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우주선들이 사람들의 뒤와 양옆에 구멍을 뚫어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방향으로 계속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남쪽 끝에 이르자 일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바다를 헤엄쳐 간다. 이런 혼란 중에 겨우 주인공만 살아남는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상상을 어떻게 글로 표현하고, 소설로 남겼을까? 작가의 창작 세계가 궁금하던 참에 그의 창작의 비밀을 담은 [무엇이든 쓰게 된다]라는 책이 나왔다. 이 책에는 김중혁 작가 자신의 사소한 글쓰기 습관이나 환경, 그리고 그의 창작의 아이디어를 만드는 과정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소설에 대한 애정과 집념, 그리고 소설을 쓰기 위해 끊임없는 갈등의 과정들을 접하게 되었다.

"여기가 어디지. 현실이다. 소설을 쓰고 있을 때, 현실이라는 것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가상의 공간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어젯밤에 내가 만들어낸 소설 속 세계가 진짜 현실 같다. 늦은 밤까지 나는 소설 속 공간에서 실재하고 있었다. 주인공에게 차마 하지 못할 짓을 했다. 주인공을 잘못된 길로 보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그 길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오늘은 어떻게든 끝을 봐야 한다." (P 41)

"소설은 잡식성 괴물이다. 소설을 쓰고 있을 때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들리는 모든 소리,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소설의 먹잇감이 된다. 모든 걸 집어삼킴 소설은 소화되지 않는 먹잇감을 다시 내뱉는다. 평소에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대단한 자료가 된다. 간절한 만큼 보이고, 잘 쓰고 싶은 만큼 많이 느낄 수 있다." (P 43)

그가 제시한 글쓰기의 팁도 몇 가지 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내용이 첫 문장 쓰기이다. 작가가 첫 문장 쓰기에서 권하는 격언은 최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최선의 문장을 완성할 수 없다. 최선의 문장을 쓰려고 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그래서 첫 문장은 그냥 쓰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수정하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할 수 없으므로, 모든 글쓰기의 첫 문장은 대충 쓰는 게 좋다. 어차피 우리는 최선의 문장을 쓸 수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 문장을 쓸 수 없다면 아무 문장이나 쓰면 된다. 그래도 좀 나은 문장이 있지 않겠냐고?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위악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골라봤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 첫 문장이다."

개인적으로도 무슨 글을 쓸 때면 항상 첫 문장 때문에 고심한다. 그런데 이제 나도 한번 막 써보려고 한다. 작가의 말처럼 일단 쓰면 어떻게든 굴러간다.

또 기억에 남는 팀 중에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결국에 작가가 기억되는 것은 작가의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스타일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남과 같아지려고 하지 말고, 자기만의 내면에서 나오는 스타일을 만들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작가의 스타일로 강조하는 것은 대화의 상상력이다. 소설의 인물을 그려보면서 그들이 실제로 대화할 것 같은 내용을 상상해 보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소설이나 타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설명하는 이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팁을 제공하면서도 결국은 글 쓰는 본인이 깨닫는 것을 써야 한다는 말을 한다.

"수많은 작가들의 글쓰기에 대한 충고를 한데 끌어모았을 때, 그 교집합이 최고의 비법일까. '열심히 쓴다', '꾸준히 쓴다' 정도만 교집합에 남아 있겠지. 충고 따위 무시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 해설을 보지 않고 문제집을 풀 때처럼, 작가들의 충고는 모두 잊고 혼자서 밤을 꼬박 지새우며 글을 쓰다 보면 저절로 작은 깨달음이 올 때가 있다. 자기만의 공식이 하나씩 생겨나고, 작가들의 충고가 무슨 말인지 몸으로 알게 되는 때가 온다. 그 사소한 깨달음이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다." (P 132)

이 책을 읽으면서 막 소설이 쓰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소설 쓰기를 포기한 적이 오래되어서 다시 소설을 쓰지는 못 할 것 같다. 그러면 작가가 주는 이 풍성한 글쓰기 비법을 어디에다 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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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8-03-20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읽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글쓰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오히려 욕심을 버리고 막 쓸때 글이 잘 써지더군요ㅎㅎ

가을벚꽃 2018-03-21 20:21   좋아요 1 | URL
저도 최근에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읽은 후 오히려 글이 더 잘 안 써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ㅎㅎ 글을 쓰며 여러 가지 규칙이나 방법을 생각하다보니 ㅠㅠ 자신의 스타일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습니다
최명기 지음 / 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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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바른길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들부터도 성실하게 공부하고,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은 대기업이나 공무원에 취직하는 것을 가장 안정적인 취업이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한 칸 한 칸 집을 늘려가서 안정적인 노후를 만드는 것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이런 인생들이 성공한 인생일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마치 자로 정해진 것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성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조금이라도 인생의 모험을 하려는 사람들을 무모하다고 말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병들어 가는 것은 아닐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습니다]라는 책은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말하는 바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저자는 정해진 길로만 걸어가는 인생이 아닌, 다른 길도 걸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매번 인생을 계획하고 계획한 대로만 살다 보면, 결국 삶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하게 된다고 말한다. 때로는 무모한 도전이 삶의 에너지를 부어 준다는 것이다.

"연료가 바닥난 자동차는 아무리 핸들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봐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험난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기 위해 활발함과 적극성이라는 연료를 다시 채우고 액설러레이터를 밟는 방법부터 새로 배우자. 계획성, 참을성, 끈기, 조심성, 인내력과 같은 자기조절 브레이크를 신경 쓰기에 앞서 힘껏 달려야 한다. 에너지를 가득 충전한 뒤 액셀러레이터를 밟아서 차를 굴려 보자. (P 5)"

이렇게 이야기하면 저자가 마치 모험 예찬가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가 이렇게 삶에서 무모한 선택을 이야기하는 것은 때로는 이것만이 삶의 돌파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살면서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는 비록 현실도피라고 손가락질 받더라도 눈 딱 감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보는 것도 필요하다. 현실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괴로워서 죽고 싶어진다면, 적극적으로 현실을 외면하자.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눈 뜨고도 코가 베이는 세상이다. 무서운 호랑이의 이빨을 눈앞에 두고 언제 죽을지 몰라 공포에 떨고만 있으니, '이것 꿈이야'라고 생각하면서 딴 생각에 빠지는 것이 낫다"

"어려운 상황에 처할수록 더 아득바득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한다는 조언들이 넘쳐난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꼭 해결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생은 모든 일이 반드시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는 순간들이 자주 닥쳐온다. 너무나 절망스러워서 '로또에 당첨되면 돈을 어디에 쓸까?' '유학을 간다면 어디 가 좋을까?' 같은 상상을 하면서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밖에 할 도리가 없을 때도 있다. (P 50)"

저자는 이 책에서 다른 많은 서적들이나 영화들을 인용하며 인생의 다양한 면을 이야기한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이 깊은 영화가 조엘 코엔 감독의 [오 형제여, 어디있는가?]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감옥의 죄수 셋이 탈출을 하는 영화이다. 그중 에버렛이란 죄수는 자신이 감옥에 오기 전 거액의 돈을 숨겨 두었다며 두 명을 꼬셔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숨겨 두었다던 거액의 돈은 거짓말이었고, 이들은 그 거짓말에 속아서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 거짓말을 쫓다가 오히려 행운을 발견한다. 저자는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며 인생도 때로는 이와 같다고 말한다.

"큰 보물을 찾아봐, 자네들이 같이 사슬에 묶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찾을 수 있을 거야. 혹시 자네들이 원하는 보물이 아닐 수도 있어. 그래도 일단은 멀고도 어려운 길을 가야 해. 가는 동안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 이야깃거리도 많아지겠지. 그 길이 얼마나 먼지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장애물들을 두려워하지 말게. 운명이 자네들에게 보상할 테니까. 가는 길이 굽이치고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따라가다 보면 결국 구원을 받게 될 거야. (P 52)"

모두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며 일한다. 학생들은 학교나 학원에서, 젊은이들은 취업 준비나 일터에서, 나이 든 사람들은 각자의 장소에서...... 그렇게 밤늦게까지 정해진 바른 길만을 달려간다는 것이 꼭 정답인 인생은 아닐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때로는 다른 곳에 눈도 돌리고, 다른 길을 가면서 마음도 새롭게 다짐하다 보면, 오히려 의외의 수확이 있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답답한 시간과 실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여유를 가지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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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4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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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의 초반부에는 주인공들이 옷장을 통해 나니아라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쩌면 소설이라는 것이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소설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경험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최근에는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내 감수성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소설의 흡입력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인지. 그럼에도 아직도 나를 소설 속의 새로운 공간으로 빨아들이는 책들이 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이 그랬다. 읽는 내내 내가 소설 속의 여름 별장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그 숲속의 길을 운전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기다리던 마쓰이에 마사시의 신작이 나왔다고 해서 읽어 보았다. 제목은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이다.

소설은 주인공 다다시가 아내와 이혼을 하면서 시작된다. 다다시는 출판사의 중간 직책 정도 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증권회사 연구원이라는 잘 나가는 아내를 두고 있었다. 아들은 이제 다 커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 그런 다다시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요구해 왔고, 다다시는 아무런 변명 없이 집과 가구를 모두 놔둔 채 혼자 집을 나온다. 소설 초반에는 왜 이혼을 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다시는 혼자 조용히 있고 싶은 집을 구하다가 근교의 오래된 낡은 집을 구한다. 집주인인 소노다 씨는 나이 든 여성으로서 혼자 생활을 하다가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 집을 헐 수가 없어서 집을 잘 관리해 줄 세입자를 구했고, 다다시가 적임자가 되었다. 다다시는 낡은 목조주택을 고쳐 가면서 그곳에서 다시 추억을 쌓아간다. 그러다가 아내와의 이혼의 원인이 되었던 가나라는 여성이 근처에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다다시는 가나와 우연히 마주치며 다시 가나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끊아지는 것도 아닌, 그렇게 유지만 되어 간다. 그 과정에서 그는 타인들이 말하는 혼자만의 '우아한?" 생활을 즐긴다. 결국 소설은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며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소설은 언뜻 보면 지루해 보일 수 있지만, 그 지루함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한 그의 뛰어난 묘사력이 소설 곳곳에 존재한다. 특히 전편과 마찬가지로 인물에 대한 묘사력이 매우 뛰어난다. 소설을 읽다 보면 마치 그 인물을 옆에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이 책에서는 아내와 가나를 묘사하면서 전혀 다른 두 여성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 이 힐은 인도를 급히 걸으라고 만든 게 아니란 말이야!- 아내는 긴자의 미유키 거리를 걸으며 너무 빠르다, 더 천천히 걸어라, 하고 내게 불평을 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아내가 신는 힐은 굽이 높고 가늘어서 엘리베이터 홈 이나 길도랑의 격자에 끼면 부러지거나 안 빠지거나 했다. 콘크리트 위를 걸으면 가죽 밑창이 순식간에 찢어졌다. 그러니 건물 밖으로 나오면 차를 타는 게 옳다고 아내는 내게 가르쳤다. (P 39)"

 "가나는 주황색이나 녹색 같은 선명한 색깔이 어딘가에 들어 있는 옷을 곧잘 입었다. 묘하게 품위 있는 코디네이션으로 세상의 유행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자연스럽게 입었다. 하지만 그를 처음에 매료한 것은 머리 모양도, 패션도 아니고 그녀의 눈이었다. 가나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아주 약간 밑에서 올려다보듯 한다. 눈동자 아래, 흰자위 부분이 살짝 벌어지는 것이다. 일과 관련된 미팅을 할 때도 그녀가 꼼짝 않고 쳐다보면 내 감정이며 비밀까지 꿰뚫어보는 느낌이 들었다. (P 51)"

특히 주인공이 살고 있는 낡은 목조 주택에 대한 묘사는 주인공의 감정과 함께 썩여서 특유의 소설적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나는 북쪽으로 난 이 창문이 좋았다. 옆집에서 보이지 않도록 사이에 가시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나무만 보인다. 창문에는 차양을 깊게 쳤다. 지붕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내뻗은 서까래가 차양을 지탱한다. 오랫동안 아파트에 살았더니 이층 어느 방에서나 창문으로 차양이 보인다는 게 생각 외뢰 신선했다. 서까래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집에  산다는 게 실감 났다. 보자챙처럼 내민 차양은 집 내부의 연장 같고 나무도 불그스름하게 변색되어 마치 잘생긴 귀를 몰래 엿보는 기분이 든다. 아주 짧은 커트머리였을 때 가나의 귀. 저번에 국숫집에서 만났을 때는 머리가 가려 보이지 않았다. 가나의 귓바퀴는 얇고 커브가 작은 데다 고양이처럼 언제나 차가웠다. 아아...... 틀렸다. 차양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다면 비누를 봐도 계단 난간에 손을 얹어도 문 손잡이를 잡아도 가나를 떠올리지 모른다. ( P63)"

사실 전작의 감동을 기대하고 읽었지만, 전작만큼의 감동은 느끼지 못했다. 소설적인 스토리나 묘사의 부분도 전작에 비해 무언가 조금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 특유의 필체가 나를 소설 속의 목조주택으로 끌고 들어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가끔 오래된 고향집에 가면,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생각날 때가 있다. 결국 사람은 사라지고, 사람의 감정은 사라져도, 그 사람과 함께 했건 공간은 남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공간은 그 시절의 추억과 감정을 그대로 담아둔 채 나이가 들어간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집이란 이런 느낌이 아닐까. 올해도 계속해서 아파트들이 입주를 하고, 인터넷에서는 서로 자기 집값인 높다고 아웅다웅하며 싸우고 있다. 이런 우리들에게 집은 무엇일까. 단순히 재산을 증식하기 위한 수단일까. 비록 낡은 목조주택이라도 추억과 감정이 담겨 있는 값어치 있는 집들이 많아지기를 바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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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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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윤리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이 많았었다. 현대 서구의 윤리사상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 학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정 속에서 자라왔지만, 그 시절에는 새로운 윤리적 대안에 대한 관심이 많았었다. 피터 싱어나 존 롤스 같은 사상가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대안으로 제시하는 새로운 윤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서양은 근대 이후부터 신의 존재를 배제한 사회계약이라는 기초에 의해 그들만의 윤리적 법칙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내게 그런 윤리적 법칙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극복하기 위해 서로의 권리를 존중해 주는 계약으로부터 출발하는 그들의 정치체제와 윤리가 매우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생각이 되었다. 서로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국가와 법이라는 틀로 개인을 보호하는 체계가 너무나도 멋지게 들려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무언가 망치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듯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자신이 빼앗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고, 자신은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하자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결국 근대 이후 서구사회는 신이나 영혼, 사후 심판 등의 과거의  존재를 배제한 채, 사람들끼리의 계약을 통해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윤리와 법칙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이 계약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는 과연 무슨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젊은 시절 짧게 스쳐 지나갔던 생각을 최근에 다시 하게 되었다. 뉴스에서 등장하는 끔찍한 범죄를 볼 때이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폭주하면서 온갖 범죄와 학살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과연 저들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특히 미국에서 이유 없이 총기를 난사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너무나도 간단히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으로 일단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때의 끔찍한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지난해에 출간된 [콜럼바인]이란 책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총기난사 사고인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사건을 다룬 책이다. 이 사건은 에릭과 딜런이라는 두 명의 학생이 폭탄과 총기를 통해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를 살해하고 수많은 학생들을 다치게 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이 책이 출간되기 전에 이 사건의 주범인 에릭의 어머니가 쓴 [나는 가해자의 엄마이다]이 출간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조금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콜럽바인 총기난사 사고의 준비과정에서부터 사건 진행과정, 그리고 사후 수습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람을 선입관을 가지고 대하는 것을 배제하려고 노력을 하지만 에릭이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를 볼 때면 마치 영혼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뜩함을 느꼈다. 피자 가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폭탄을 제조하고 수많은 살상 무기를 준비한다. 그리고 당일이 되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총을 난사 한다.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람들, 살기 위해서 도망치는 사람들, 부상을 입고 쓰러진 사람들에게도 스스럼없이 총을 쏘아댄다. 그리고 마지막이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반면 딜런은 마지막까지 주저한다. 이 책에서는 에릭이 주도적으로 범행을 계획했다면 딜런은 에릭에게 끌려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딜런은 마지막까지 주저했으며, 총기를 쏠 때도 망설였다. 이런 딜런을 범죄에 가담시키기 위해 딜런을 더 몰아붙인 사람이 에릭이다. 물론 딜런도 자신의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만약 딜런이 에릭을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원래 이 에릭의 계획은 더 끔찍했었다. 공원에서 폭탄을 터뜨려 경찰의 시선을 돌리게 한 후, 식당에서 대형 폭탄을 터뜨리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폭발로 살아남아 식당에서 뛰쳐나오는 학생을 에릭과 딜런이 양쪽에서 교차사격해서 학살하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다. 만약 폭탄이 불발되지 않고 에릭의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 책에서는 100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을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모든 사건이 그렇지만, 이 사건이 난 후 미국 사회에도 과연 이런 범죄가 왜 일어났는지, 동기가 무엇인지를 조사했다. 물론 완전한 동기는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이 이 책에서는 에릭이 뉴스나 신문에 나온 유명한 폭탄 테러범을 흉내 내어 자신이 더 유명해지고 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고 본다. 또 안일한 대응으로 사건을 일찍 수습하지 못한 공권력의 무능을 지적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우리나라에서도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끔찍한 영아살해, 어린아이들을 강간하고 살해하는 범죄, 묻지마 식 살인, 도덕이나 안전 불감증으로 인한 수많은 화재들... 과연 이런 범죄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제도와 법에 대한 지적들이 있다. 그러나 과연 제도와 법이 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무언가 인간의 마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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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의 모든 것 - 2017년 제62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김금희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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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 많은 문학잡지를 구독하며 읽었었다. 그중 [현대문학]과 [문학사상사]라는 두 문학잡지는 매월 정기구독을 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쌓이던 책을 처지 곤란해서 지금은 고향집 창고 어딘가에 쌓여 있을 것이다. 이제는 매월 읽을 시간과 책을 쌓아 둘 공간도 없이 바삐 살아간다. 그래도 매년 두 출판사에서 나오는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구입해서 읽으려고 노력한다.

한 해가 지났지만 지난해에 다 읽지 못한 [2017년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을 다시 읽었다. 2017년 현대문학상 대상은 2016년도부터 인기를 끌고 있던 김금희 작가가 차지했다. [체스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이다. 작품의 분위기는 2016년 문학동네의 젊은작가수상작인 [너무 한낮의 연애]와 비슷한 구조이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는 세상에서 정처 없이 달려가던 한 남자가 실패를 맞본 후 다시금 우연히 대학교 때 만났던 양희를 기억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양희의 연극을 보면서 세상의 흐름에 맞춰 온 자신에 달리,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양희를 보며 여러 가지 감정을 느끼는 내용이다.

[체스의 모든 것]의 주인공은 대학을 졸업한 후 치열하게 살고 있는 한 여성이다. 소설은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났던 노아 선배와 국화라는 친구에 대한 회상이다. 항상 다른 사람과 달리 삐딱하고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노아는 호적수인 국화와 체스판에서 부딪힌다. 둘은 체스판의 룰을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싸우면서도 계속 붙어 다닌다. 항상 자신만의 주장을 굽히지 않던 노아도 웬일인지 국화 앞에서만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이 오랜만에 만난 노아와 국화 모두 자신만의 길을 걷다가 매우 지친 상태였다.

소설집에는 김금희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세실리아]라는 작품도 실려 있다. 이 작품 역시 앞의 소설과 분위기가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더 어둡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혼을 하고, 빚도 많은 한 여성이 대학교 때 요트 동아리 멤버들과 만남에서 세실리아라는 친구를 떠올린다. 그리고 세실리아를 만나고 자신과 같이 힘겨운 삶을 살고 있는 세실리아를 만난다.

시대와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작품이 있다. 윤대녕 작가의 [경옥의 노래]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작가로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던 상욱이라는 주인공이 20여 년 전 통영에서 만났던 경옥이란 여성을 다시 만나면서 시작된다. 경옥은 짝눈이라는 놀림을 당하는 오드아이라는 특유한 눈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로 인해 어려서부터 선글라스를 끼고 다녔다. 태어나면서부터는 친엄마와 떨어져 계모 밑에서 매를 맞고 자랐다. 그럼에도 노래 실력이 있어 여기저기 떠돌며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 경옥은 상욱을 만나 둘이 사랑을 하지만, 무언가가 계속해서 경옥을 안착하지 못하고 떠돌게 한다. 그리고 결국은 속초로 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뉴스는 온통 강남 부동산, 비트코인, 주식 등과 같은 단어들이 되풀이된다. 모두들 살기 위해서 아둥바둥하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집과 돈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실패하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결국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 세상이 만든 체스판 룰대로 따라가는 사람들만이 인정받는 시대이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 자신의 룰 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가치는 무엇일까? 그렇게 자신의 룰대로 살아가다가 이리저리 찢기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판단하기보다는 세상에서 이리저리 찢기고 상처 입은 영혼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도 체스판의 룰에 조용히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이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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