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리커버 에디션)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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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을 읽는 재미 중에 하나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로 돌아가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고전소설의 중세 시대의 경직된 성곽 마을이나 혁명 전야의 황량한 러시아의 사회나 전쟁 후의 허망함을 느끼는 유럽의 뒷골목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그런데 가끔 고전소설을 읽다 보면 황당함을 느끼다 못해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몇 백 년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왔는데도 그 시대의 인간 군상과 사회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 시대의 추악함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결국 인간이란... 결국 사회란 변하지 않는 건가라는 절망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바로 에밀 졸라의 소설 [여인의 행복 백화점]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다.

에밀 졸라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작가이다. 특히 그는 루공-마카르 총서라는 시리즈를 통해 나폴레옹 3세가 정권을 잡던 1850년대부터의부터 19세기 후반에 걸친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목로주점]이나 [나나] 역시 이 시리즈 중의 하나이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역시 이 시리즈의 11번째 작품의 하나로서 루공-마카르 가문의 후손인 '옥타브 무레'가 등장한다. 그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을 운영하면서 광기적인 모습까지 보이며 백화점을 확장해 간다.

소설은 파리에 생긴 세계 최초의 백화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는 여러 명이 등장하지만, 주로 드니즈라는 발로뉴라는 시골 출신의 여성의 시각에서 전개된다. 드니즈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어린 여동생인 페페와 남동생인 장을 데리고 큰아버지가 있는 파리로 상경한다. 그리고 몰락해 가고 있는 큰아버지의 상점과 대비되는 거대한 백화점을 맞닦드린다. 그녀에게 백화점이란 동경의 대상이며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드니즈는 아침부터 엄청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지켜보았을 뿐인데 그녀가 코르나유에서 6개월 동안 본 것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백화점은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면서 동시에 매료시켰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갈망 속에는 결정적으로 그녀를 유혹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큰아버지 가게에서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그것은 구태의연한 영업 방식이 유지되고 있는 음습하고 후미진 가게에 대한 본능적인 경멸과 반감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느꼈던 모든 것들, 그들 가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대의 불안감, 친척들의 시큰둥한 대접, 지하 독방을 비추는 것 같은 빛 아래에서의 음울한 점심 식사, 몰락해가는 초라한 가가에서 느껴지는 나른한 고독감 속의 기다림 등은 그녀 안에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은밀한 거부와 활기찬 삶과 빛을 향한 이끌림으로 귀착되었다. (P 31)"

그녀는 큰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백화점에 판매원으로 취직을 한다. 소설의 초반은 그녀가 경험한 백화점 판매직원에 밑바닥 생활을 어둡고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기본급도 없이 판매 수입만으로 생활을 해야 하기에 그녀의 생활은 처참했다. 백화점의 옥상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조금의 판매 수입 역시 동생의 양육비와 남동생 장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는데 다 사용한다. 항상 낡은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는 그녀는 동료들에게 놀림의 대상이 되고, 곧 동료들의 모략으로 인해 백화점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 과정에서 백화점 사장이 무레는 드니즈를 향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되고, 그녀를 다시금 파격적인 조건으로 백화점으로 데려온다. 그리고 결국엔 드니즈와 결혼을 하게 된다.

소설은 백화점을 단순히 하나의 건물로 보지 않고, 마치 주변의 모든 상권들을 빨아들이고 여인들의 욕망으로 계속해서 성장하는 하나의 생물과 같이 표현한다. 소설에는 이런 표현을 '기계'라는 단어로 묘사한다. 소설에서 백화점은 살아서 움직이며, 여인들의 욕망을 삼키는 살아있는 기계같이 묘사된다.

"그러나 드니즈는 강력한 엔진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기계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 요란한 움직임이 진열대까지 들썩거리게 하는 듯했다. - 중략 - 지나가던 사람들마다 시선을 그곳으로 향했고, 모두가 탐욕으로 인해 거칠어진 듯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 여자들은 서로를 떼밀었다. 거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쇼윈도의 천들도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레이스 천이 가볍게 떨리며 백화점 내부를 감추려는 신비한 베일처럼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두터운 사각의 나사는 유혹적인 숨결을 뱉어냈다. 팔토를 걸친 마네킹은 마치 살아 있는 여인처럼 몸을 더 뒤로 젖혔다. - 중략 - 쉬지 않고 힘차게 돌아가는 기계의 윙윙거림이 느껴지는 가운데, 전시된 상품들에 정신을 빼앗긴 고객들이 화덕 속으로 뛰어들 듯 너도나도 매장 앞으로 몰려들었다가는 다시 서둘러 계산대로 향했다. 이 모든 건 기계 같은 정확함으로 계획되고 작동되고 있었다. 마치 온 나라의 여인들이 톱니바퀴 장치의 힘과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P 30-1)"

이렇게 살아있는 기계 같은 백화점은 점점 자신의 크기를 성장시키고, 그 안의 판매와 자본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면서 드니즈의 큰아버지의 가계와 같은 소상공인들의 몰락시키고, 백화점 직원들을 경쟁 시스템 속에 혹사시킨다. 마치 현대의 백화점의 횡포의 모습을 백여 년 전의 백화점이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은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을 몰락시키고 타락시키며 자신의 자신을 성장시켜 간다. 그리고 백화점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여인들의 욕망이다. 저자는 백화점을 향한 여인들의 욕망을 매우 성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새롭고 화려한 물건을 향한 욕망을 마치 성적인 욕망처럼 그려내며, 백화점과 여인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그리고 있다.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린 여자들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강물이 계속의 지류를 끌어당기듯, 백화점 입구를 가득 메운 인파는 거리를 지나나는 행인들과 파리의 사방 곳곳의 주민들을 빨아들였다. 줄을 선 채 아주 느리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는 동안, 서로를 지탱해주는 어깨와 배에서 부드러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들의 충족된 욕망은 그러한 힘겨운 전진마저도 기꺼이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상황은 오히려 여인네들의 호기심을 한층 더 자극했다. 실크로 우아하게 차려입은 여인들과 소박한 옷 차임의 프티부르주아 여성들, 맨머리 차림의 여자들까지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채 모두가 그 열기에 들뜨고 흥분돼 있었다. 넘쳐나는 여인들의 가슴 아래 파묻힌 몇몇 남자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P 404)"

이런 백화점의 광기 어린 탐욕과 이에 맞서는 소상공인의 무모한 투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드니즈의 시선이다. 저자는 드니즈의 시선을 통해 19세기 말 자본주의의 광기 어린 물결과 그 물결에 휩쓸려 가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결국 드니즈는 백화점으로 돌아가고, 그곳의 사장인 무레와 결혼을 하게 된다. 물론 소설은 그녀가 단지 수동적으로 무레의 연인이 되는 것이 아닌, 나름 적극적으로 자신이 깨달은 백화점의 생리와 주변 사람들의 피해를 조화해서 무레에게 경영에 대한 적극적인 조언을 하는 여성으로 묘사한다. 그럼에도 거대한 자본주의의 기계인 백화점의 시스템에 그녀가 편승해 가는 과정은 읽는 이로써는 좀 씁쓸하다. 저자는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당시 자본주의의 거대한 흐름과 이로 인해 몰락해 가는 소상공인들, 그리고 그 흐름 속에 자신을 읽어가는 여성들과 판매원들을 그리고 있지만, 드니즈의 목소리와 행동을 통해 이 흐름이 거부할 수 없는 흐름임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자본주의의 거대한 물결 앞에 대항하는 자는 모두 몰락하고, 그 물결에 편승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19세기의 말의 프랑스 파리의 광기 어린 자본주의의 욕망의 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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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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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보면 헤어진 연인을 향한 치졸하고도 잔인한 보복에 대한 소식이 자주 들린다. 헤어진 여자에게 계속 협박성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헤어진 남자에게 스토커처럼 집착하는 일들도 생긴다. 이 정도에서 그치면 다행이지만, 상대에게 직접적인 신체적 해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만남도 중요하지만 헤어짐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라는 책은 이런 헤어짐을 위한 책이다. 저자인 디제이 아오이는 일본의 유명한 상담가로서 주로 SNS를 통해 상담을 한다. 우리가 아는 뻔한 상담이 아닌, 사람과의 만남과 헤어짐에 대한 실질적으로 도움이 줄 수 있는 내용들이 많다. 그러기에 어떤 때는 조금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이 책은 이런 저자의 상담 내용을 묶은 책이다.

이 책에는 연인과 헤어져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 가지 상담과 조언이 언급되어 있다. 그중에서 저자가 가장 많이 언급하는 내용은 이별의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별의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상담을 많이 받는데요, 그럼 어떤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겠어요? 애인이 나와 사귀기 전 만났던 사람에게 미련이 남아서 이별을 고대했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겠어요? 받아들이지 못할걸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는 수긍할 수 있겠어요? 이해할 수 없겠죠. 만약 당신이 싫어졌다는 말을 들어도 순순히 상대를 놓아주기는 어려울 거예요. -중략- 헤어지자는데 납득할 수 있는 이유 따위 없는 게 당연해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헤어지는 일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니까요. - 중략 - 이유 같은 거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헤어졌다는 사실만 정확히 바라보세요. 헤어졌다는 사실을 묵묵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납득할 수 있는 이유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P 81)"

"좋은 이별이 둘이 만나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동의 아래 아무 원한도 없이 '바이바이'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건 환상이에요. 헤어진다는 건 잔혹한 일이에요. 사귈 때는 서로 동의가 필요지만 이별에는 필요 없거든요. 어느 한쪽이 '더 이상 안 되겠어'라고 말하면 거기서 끝인 겁니다. 인정하고 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이별이에요. (P 119)

이렇게 이별의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저자가 조언하는 것을 아파할 수 있는 만큼 아파하고 울 수 있을 만큼 울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실컷 아파하고 울어야 이별의 후유증에서 쉽게 털고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성장한다고 말한다.

"헤어진 후에 두 사람 모두 상처 없이 지낼 수는 없어요. 이별하고도 상처 입지 않은 사람이라면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해요. 이별을 먼저 말한 사람이나 들은 사람이나 아파하는 건 잘못된 만남이 아니었다는 의미예요. 사랑이 끝났을 때는 괴로운 게 당연하니 마음 편히 아파하세요. (P 61)"

"사람은 아픈 기억을 겪으면서 변해가는 존재예요. 사랑에 진심이 담길수록 이별은 아픈 법입니다. 때문에 실연은 우리를 한껏 성장시킵니다. (P 127)"

그래도 이 책에서는 이별하는 상대를 향한 최소한의 배려의 조언도 아끼지 않는다. 그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상대에게 여지를 주지 말라는 것이다. 친구로 남자고 말한다든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든지, 조금 거리를 두 자는 등의 말은 오히려 역효과를 나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상대를 배려한다면 과감히 상대와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랑과 이별의 감정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을 열고, 다시 그 열었던 감정을 닫아서 정리하는 과정이 사랑과 이별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숙한 사람일수록 이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잘 정리하고,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는 사람이다. 이별은 가슴 아픈 시기지만, 때로는 자신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자신의 감정을 성숙시킬 수 있는 시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별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과 자신의 감정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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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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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는 흔히 도시적인 감성으로 표시된다. 짧고 담담한 문제 속에서 현대인이 도시 속에서 느끼는 단절감과 고독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버스데이 걸]이란 소설은 이런 하루키의 색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짧은 단편인 이 책은 '카트 멘시크'라는 독일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의 그림과 함께 매우 세련된 감각으로 출간되었다. 도시 속에서 느끼는 단절감과 다른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마치 [애프터 다크]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주인공인 여성은 스무 살의 생일을 맞이한다. 그녀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로 음식을 나르고 있었는데, 스무 살의 생일 하루만은 아르바이트를 쉬기로 한다. 그러나 대신 일하기로 했던 친구가 몸살이 걸려 별 수 없이 스무 살의 생일날도 변함없이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별로 특별한 계획도 없었던 그녀는 실망감도 없이 일을 한다.

"실제로 그녀는 그다지 실망하지도 않았다. 함께 생일날 밤을 보냈어야 할 보이프렌드와 며칠 전에 심각한 말다툼을 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교제해온 상대로, 다툼의 원인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하지도 못하게 얘기가 꼬이면서 오는 말에 가는 말로 응수하는 거친 말다툼이 한바탕 이어진 뒤, 지금까지 두 사람을 이어주던 유대감이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말핬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녀 안에 돌덩이처럼 딱딱해져서 죽어버린 것이 있었다. (P 10)"

그녀가 일하는 레스토랑은 보통 레스토랑과 다름이 없다. 단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레스토랑과 같은 건물 빌딩 604호에 레스토랑의 주인이 살고, 그 주인에게 매니저는 매일 저녁 6시 식사를 배달해 준다는 것뿐이다. 비가 쏟아지고 손님이 별로 없던 스무 살의 그녀의 생일날, 하필이면 매니저는 배를 움켜잡고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간다. 그녀에게 오늘 저녁 하루 사장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을 부탁하고... 저녁 6시 604호로 찾아간 그녀는 한 노인을 맞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특이한 부탁을 한다. 스무 살의 생일을 기념해서 그녀의 소원을 한 가지를 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단 한 가지이고 되돌릴 수 없으니 신중히 선택하라는 말고 함께... 노인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소원을 말하고 그 소원이 그녀의 삶을 바꾼다. 과연 그녀는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삶을 살았을까. 아니면, 그 소원은 그저 노인의 장난이었을까.

하루키의 소설은 현실세계와 현실 이면의 세계를 오가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현실 이면의 세계는 아주 우연히 들어가게 된다. [태엽갑는 새]에서 주인공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다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1Q84]에서는 육교 다리를 내려가다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애프터 다크]에서는 호텔 방의 한 공간에서 잠을 자다가 들어가게 된다. 하루키 소설의 현실 이면의 세계는 하루키가 만든 상상의 공간이지만, 현실과 다를 것은 없다. 현실 속의 모든 것이 그대로 재현되고, 현실의 사람들도 그대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무언가가 상실되어 있다. 현실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그 세계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하루키는 이런 소설적 장치를 통해 현대인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게 한다.

그렇다면 [버스데이 걸]의 주인공 역시 스무 살에 우연히 들른 604호실에서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간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스무 살 이후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짧은 소설이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어려 가지 암시들이 등장한다. 먼저 스무 살을 담담히 맞는 그녀의 자세이다. 또한 생일은 축하하는 노인의 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생일 축하하네. 노인은 말했다. 아가씨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P34)"

오랜 시간이 된 후 스무 살의 생일날을 회상하는 그녀의 대사에도 이런 암시가 등장한다. 스무 살의 생일날 빌었던 소원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귓볼을 긁적였다. 예쁜 모양의 귓볼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야. (P 57)"

이전의 하루키의 소설처럼 알듯 모를 듯,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모호함이 이어지는 소설이었지만, 소설 속의 주인공이 느끼는 세상과의 단절감과 고독감은 더 깊이 다가오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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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르시아어 수업
마리암 마지디 지음, 김도연.이선화 옮김 / 달콤한책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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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자주 이사를 했던 경험이 있다. 그 나이에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새로운 학교에 적응한다는 것은 내게는 우주가 바뀌는 일이었다. 처음 낯선 학교에 발을 내딛고, 자기를 소개하고, 전학생이라는 이름으로 한동안 불렸던 경험은 인생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는 시간이다. 그런데 낯선 땅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이에게는 어떤 경험일까. 더군다나 고국에서 쫓기듯 도망쳐야 했던 신세라면... 어린 소녀의 눈으로 이 모든 과정을 이야기하는 소설이 있다. 이란 출신의 프랑스 작가 마리암 마지디가 쓴 자전적 소설인 [나의 페르시아어의 수업]이다.

[나의 페르시아어 수업]의 주인공 마리암(저자와 이름이 같다)는 이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우리가 잘 아는 이슬람 극단주의자인 호메이니옹이 정권을 잡았을 때이고, 이란은 온통 혁명과 이에 대한 반체제 운동으로 시끄러웠다. 마치 우리나라 군사정권 때와 비슷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잡혀가고 고문을 당한다. 마리암의 아버지는 은행원이었고 어머니는 의대를 다니고 있었지만, 둘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반체제 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들의 집은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였고, 심지어 마리암까지 연락책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오로지 할머니만이 이런 마리암을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그러나 삼촌이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부모님 역시 점점 투옥될 위기가 찾아오자 결국 이란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먼저 아버지가 망명을 하고, 그 뒤 아슬아슬하게 엄마와 어린 마리암이 아버지를 따라 망명을 한다. 소설은 어린 마리암의 눈에 비친 이란의 혼란 상황과 고단하고 궁핍한 파리에서의 정착 생활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장실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왠지 걱정이 되어 아버지에게 화장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복도에 공용화장실이 있어. -중략- 아버지는 샤워실을 곧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며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을 감추려 억지로 웃음을 비친다. 어머니는 침통한 표정으로 하나 밖에 없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오래전부터 말수가 적어진 어머니의 침묵은 이때부터 더욱 심해진 것 같다. 방을 둘러본다. 세면대 하나, 작은 텔레비전 하나, 붙박이장 하나, 식탁 하나, 의자 세 개, 화분 하나, 창문 하나. 창문으로 달려가 거리와 파리의 지붕들과 전철 입구를 본다. 우리 셋은 파리 십팔 구의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칠에 둥지를 틀었다. 숱한 난관과 시련 끝에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는데 나는 오로지 공용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P 115)"

이후 소설은 마리암이 프랑스 학교를 다니고, 프랑스어를 몰라 배척 당하고, 다시 프랑스어를 배우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부모님은 그녀가 페르시아어를 잃어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해 페르시아를 가르치려 하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부모님과도 조금씩 멀어진다.

"몇 년이 더 흘렀다. 소녀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점점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딸이 새 언어를 말하면 휘둥그레 눈을 떴다. 단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의 놀라움은 곧이어 두려움으로 변했고 이 언어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딸이 예전에 그랬듯이 아버지도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소녀 역시 아버지의 두려움과 거부를 이해했다. 그래서 아무 말없이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새로운 단어와 알파벳을 익혔다. (P 207)"

이 작품은 세계 삼대 문학상 중 하나로 불리는 프랑스의 콩쿠르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읽어 본 콩쿠르상은 주로 소수자나 이민자의 불안정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반대자는 많지만, 그래도 프랑스가 이런 소수자나 이민자에게 얼마나 따스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이 콩쿠르상을 수상한 것은 단지 프랑스인의 이방인에 대한 따스한 시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묘한 마력이 있다. 이 책을 읽게 되면 어린 소녀 마리암이 되어 그녀가 보았던 것을 함께 보고 느꼈던 것을 함께 느끼게 한다. 그만큼 작가의 문체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과 힘이 있다. 특히 그녀가 페르시아어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성인이 되어 다시 페르시아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녀가 느꼈던 혼란과 방황, 그리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시적인 비유나 그녀가 만든 동화와 함께 어우러지면서 소설은 묘한 분위기를 낸다. 특히 소설 속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이입되는 부분이 매우 뛰어나다. 프랑스 생활에서 점점 정치사상과 신념이 무너지고 소수자로 전락하는 부모님을 보는 과정에서는 나 역시 그녀의 마음이 되어 눈물이 날 정도였다.

"당신 꿈들은 이란에서부터 이미 조금씩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작은 꿈들조차 프랑스에 온 후로는 하나둘 의자 아래 카펫 위로 떨어져 서서히 죽어갔다. 원하지 않았던 망명으로 갈기갈기 찢긴 꿈들. 계획이나 야심, 인생에서 이루고 싶었던 작은 목표들. 이 모든 것이 잘게 부서져 스러지고 당신 모습도 조금씩 지워져 희미해졌다. 얼굴도 흐릿해지고 목소리는 작아지고 몸짓은 완전한 현실도 몽상도 아닌 꿈에서 움직이는 사람처럼 느려졌다. (P 126)"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자가 자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타의에 의해서든지, 환경에 의해서든지 자기의 언어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잃어버린 자신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 소설 곳곳에서 배여 나오며 진한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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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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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들어 사람에게 있어서 '성공'이란 어떤 것일까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있어서 그가 원하는 성공은 무엇이고, 과연 그 성공을 위해서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나는 성공을 위해서 이런 것까지 해 봤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 자신을 버려야 성공이라는 것을 손에 쥘 수가 있을까.

[단지 뉴욕의 맛]은 음식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티아라는 변두리 출신의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뉴욕에서 유명 레스토랑의  음식을 맛보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제목에 '뉴욕의 맛'이라는 문구가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보면 사실 그녀가 맛본 것은 뉴욕의 음식 맛이 아니라, 뉴욕의 성공과 욕망의 맛일 것이다. 그리고 환상적인 음식 맛에 중독되어 가듯이 그녀는 뉴욕의 성공의 맛에 중독되어 간다.

티아는 갓 뉴욕에 상경해서 요리 칼럼니스트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를 위해 음식을 만든 후 그 경험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리고 그녀의 글이 뉴욕타임스에 실리며 잠시 유명세를 누렸다. 그 유명세가 지나간 후에도 그녀는 요리에 대한 열정을 잊을 수가 없어서 이 분야를 더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에 온다. 그러나 뉴욕의 그녀의 열정 하나로 감당하기에 벅찬 곳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의 입구에서 고객들의 옷과 휴대폰을 보관하는 일을 하게 된다. 고급 옷과 그녀가 상상하지 못하는 가격의 음식들을 먹는 사람들을 보며, 그녀는 뉴욕과 뉴욕에서의 성공이 마치 딴 세상처럼 멀어져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갑자기 환상적인 기회가 다가왔다. 우연히 뉴욕타임스의 음식 평론가인 '마이클 잘즈'를 만난 것이다. 그가 평가하는 별의 개수와 뉴욕타임스에 기고하는 글을 통해 유명 레스토랑의 운명이 판가름 날 정도로, 그는 그 세계에서는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어느 순간 미각을 잃었다. 그리고 그 미각을 대신해 달라는 달콤한 제안을 티아에게 해 온다. 티아는 성공을 위해서 그 제안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갈 길을 안다고 생각했었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명문대에 들어갔다. 요리 칼럼니스트라는 진로를 정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꼭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람들 말은 흘려 들었다. 학위는 나를 입증해줄 배지 같은 것이라 믿었다. 이제 그 또한 순진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것도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헬렌 시간을 통해 그걸 배웠다. 어떤 것을 너무 원하며 그 욕망이 말 그대로 이마에 네온사인처럼 새겨질 수 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바르게 살아도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 나는 남들보다 특별히 잘나지도 않았고 모두가 원하는 그 상을 나만 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대고 그 상들을 원한다고 말만 하거나 가장 예쁜 드레스를 꺼내 입고 매혹적인 미소를 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 어떻게든 헤치고 나가 앞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P 233)

이제 그녀는 마이클이 제공하는 유명 브랜드의 옷을 입고, 그와 함께 유명 레스토랑의 고급 요리들을 맛본다. 그리고 비록 마이클의 이름을 통해 기고되는 글이지만, 그녀의 글로 레스토랑을 살리고 죽이는 권력의 힘을 맛본다. 그러는 사이에 그녀는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소설은 성공을 위해 뉴욕에서 고분분투하는 이야기이다. 마치 앤 헤세웨이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순식간에 뉴욕의 화려함 속에 빠져들어 그 속에 자신을 잃어가는 티아의 위태로운 삶이 속도감 있게 읽힌다. 무엇보다도 푸드 블로거 출신의 저자답게 각종 고급 요리와 레스토랑, 그리고 그 음식에 대한 맛깔스럽고 감미로운 평가들이 언급되면서 읽는 재미를 더 하게 한다. 음식뿐만 아니라, 뉴욕의 패션이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들이 묘사되면서 읽는 사람을 티아처럼 뉴욕의 맛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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