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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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이 끝나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만든다. 이미 상영은 다 끝나고 불이 켜져 사람들이 일어서 나가는데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있다. 영화가 주는 강렬한 감동이, 때로는 처연한 슬픔이 나를 그 자리에 잡아 둘 때가 있다. 소설 중에도 그런 소설이 있다. 소설의 끝장을 덮었음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소설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소설을 읽은 후에도 며칠 동안 소설의 이미지가 문뜩 문뜩 머리에 떠오를 때가 있다. 소설이 주는 감동의 이미지나 슬픔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소설이 끝났음에도 그 이미지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경우이다.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이라는 소설이 그랬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 소설 케이시와 수전의 사랑이 나를 붙잡고 있다. 과연 이런 처절한 사랑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은 서로를 그렇게 아프게 했음에도 이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서로에게 아프게 할만큼 서로를 사랑했을까? 그리고 그런 대가를 치를 만큼 그들의 사랑은 가치가 있었을까?
 
[연애의 기억]은 모두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소설의 1부에서는 철없는 - 물론 소설의 주인공은 그 당시 절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 19살의 케이시와 48살의 유부녀 수전의 만남과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방학을 맞아 런던 외곽의 조용한 마을에 돌아온 케이시는 엄마의 권유에 테니스 클럽에 가입한다. 당시 테니스 클럽은 영국의 보수적인 중산층 이상이 사람들의 사교 장소였고, 케이시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례를 생각해서 가입을 하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과 달리 케이시는 그곳에서 수전을 만난다. 처음에는 그냥 테니스 동료로 만나다가 서로 친근하게 되고, 결국 사랑하게 된다. 그들은 처음에는 각자의 삶의 영역을 유지하며 사랑을 하지만, 결국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된다. 여기까지의 과정을 이제는 나이가 든 케이시가 마치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하듯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읽었을 때는 젊은 날에 관습과 뛰어넘어 뜨거운 사랑을 한 노인이 젊은 날의 사랑을 감성에 젖어서 회고하는 정도로만 느껴진다.
 
그런데 2부가 되면 이야기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전개된다. 런던의 허름한 건물을 사서 도피한 두 사람은 처음에는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수전 서서히 무너져 가기 시작했다. 1부에서는 케이시와 수전이 단순히 서로에 대한 열정으로 사랑을 하고 도피를 한 것처럼 보였지만, 2부에서는 그 속 사정을 이야기한다. 케이시의 남편은 지독한 술꾼으로 술만 먹으며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했으며, 그로 인해 케이시를 만나기 오래 전부터 둘은 각 방을 쓰고 있었다. 계속되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수전을 보호하기 위해 케이시는 수전과 도피를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수전은 점점 망가져간다. 계속해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술을 마시고, 그리고 결국은 스스로를 무너뜨려 간다. 케이시는 10년 가까이 그 과정을 지켜본다. 케이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고, 어느 시점이 되어 감당할 수 없는 지점이 되어 간다.
 
소설의 마지막인 3부에서는 나이 든 케이시가 자신과 수전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독백처럼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너무나 강렬했기에 그는 더 이상 수전과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하고, 그 사랑의 기억을 영원히 간직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아름다운 기억인 동시에, 어둡고 황량했던 어두운 기억이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기억 중 무엇이 맞는 지를 고민한다. 아니, 자신이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고민한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익숙한 기억의 문제. 그는 기억이 믿을 만하지 못하고 치우쳐 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어느 쪽으로 치우쳤을까? 낙관 쪽으로? 그게 처음에는 말이 되었다. 사람들은 과정를 기분 좋게 기억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주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이 어떤 승리라고 볼 필요는 없지만 - 그 자신의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 재미있고, 즐길 만하고, 좋은 목적을 추구했다고 자신에게 말할 필요는 있었다. 좋은 목적을 추구했다? 그 말은 약간 인생을 과장하는 것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낙관적인 기억은 인생을 떠나는 것을 쉽게 해줄지도 모르고, 소멸의 고통을 완화해 줄지도 몰랐다. 하지만 똑같이 그 반대도 주장할 수 있었다. 기억이 비관 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돌아보았을 때 모든 게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 검고 황량해 보이고, 이렇게 되면 삶을 떠나는 게 더 쉬워질 수도 있다. (P 292)"
 
케이시에게 수전과의 사랑은 아름답고 즐거운 기억일까? 아니면 검고 황량한 이는 기억이었을까? 어쩌면 그 둘 다가 아니었을까? 아름다웠지만, 검고 황량함을 내포한 처연하고 슬픈 사랑이 아니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미 오래 전에 고인이 된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이라는 노랫말이 떠올랐다주로 아름다운 기타와 하모니카를 반주로 김광석의 담담하면서도 처량한 목소리가 들린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 이제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기를

 

어쩌면 소설 속 케이시의 심정이 이렇지 않았을까? 너무나 강렬했고, 외면할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않기를, 만약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면 수전이라는 여성을 만나지 않기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소설은 케이시의 시각에서만 이야기가 되기에, 수전이 왜 그렇게 망가졌는지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는 내내 수전의 아픔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면서도, 왜 그렇게 자신을 망가뜨리고, 옆에 있는 케이시까지 망가뜨려야만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소설 중간 중간에 이미 수전의 어두움이 암시되어 있다. 수전은 케이시를 만나는 순간부터 농담처럼 이렇게 말을 한다. "아직은 나를 포기하지 말아줘!" 그리고 또 비슷한 농담도 한다. "나는 지금 이렇게 사라지고 있어!" 이미 수전은 암환자가 자신 안에 있는 암세포가 자신을 잠식해 가는 것을 느끼듯이,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이 자신을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케이시와의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비록 소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수전 역시 스스로 무너지는 자신을 느끼고, 그런 자신 옆에서 함께 무너지는 케이시를 보며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처음 시작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을 한다.
 
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아니면 덜 하고 덜 괴로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P 13)”
 
이 고민은 작가만의 고민이 아니라, 케이시와 수전의 고민이었을 것이다. 둘은 사랑하면서 매순간 이렇게 고민했을 것이다.
 
가을 날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 지나간 사랑이나 변해가는 사랑으로 가슴 아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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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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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거울을 보면 새치가 부쩍 많아진 모습을 보게 된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간다니 서글픈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음이 지나가고, 나이가 들어가고, 흰머리가 나고, 그렇게 노쇠해지며 몰락해가는 것이 인간의 육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점점 자라고, 젊어지고, 그리고 내 자리를 대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현인(賢人)처럼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육체적으로 몰락해 가는 나 자신을 부정하며, 다시금 육체적 젊음을 돌이키기 위해 몸부림을 칠 것이다. 결국에 몰락할 것을 알면서도 몸부림을 치는 것,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가을날 디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감성적인 생각들을 해 보게 된다. 디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이라는 작품을 통해 만났다. '자기 비하'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점점 그 늪 속에 잠식되어 가는 한 인간의 비참한 운명을 그린 작품이었다. 한 인간 내면의 어둡고 음침한 모습과 함께, 스스로를 파멸해 가는 과정들을 읽으며, 조금의 답답함과 무거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또 그만큼 인간 내면의 어두운 감정에 대해 공감하기도 했었다.

[사양]은 [인간실격]보다는 조금 덜 어두운 면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처럼 몰락해 가는 일본의 귀족 가문과 그 가문의 여성을 주인공 설정하고 있어서, 어두운 부분은 어쩔 수가 없었다. 사양(斜陽)이란 지고 있는 해를 의미한다. 소설의 몰락해 가는 가즈코의 가문을 이야기한다. 소설의 배경은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망 직후이다. 가즈코의 가문은 권위 있는 귀족 가문이었으나 패전과 아버지의 죽음으로 몰락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일본이 패전하던 해에 집을 팔고 이즈이의 산장으로 집을 옮긴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시름시름 앓고 죽어간다. 전쟁에서 돌아온 동생 역시 아편과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의 재산을 축낼 뿐이다. 주변의 상황과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가즈코는 점점 압박을 당한다. 그 과정에서도 동생의 스승인 우에하라를 사랑하게 된다. -물론 소설을 읽다 보면 이것이 정말 사랑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반적인 사랑과는 다른 모습이다 - 우에하라는 한때 이름있는 소설가이지만, 지금은 아내와 자식이 있지만 술과 폐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우에하라를 연모하고 그의 아이를 낳는 것이 마치 마지막 희망처럼 생각한다.

"저는 불량한 사람이 좋아요. 더구나 딱지 붙은 불량이 좋아요. 그리고 저도 딱지 붙은 불량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단지 제가 살아갈 방도가 없을 것 같아요. 당신은 일본 제일의 딱지 붙은 불량이겠죠. 그리고 최근 다시 맣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추접스럽다. 역겹다며 몹시 미워하고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동생한테서 듣고, 더욱더 당신이 좋아졌습니다. 당신에겐 틀림없이 애인이 여럿 있을 테지만, 머지않아 저 한 사람만 좋아하게 될 거예요. 어째선지, 제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P 92)"

결국 가즈코의 어머니는 폐병으로 죽고, 동생도 자살하지만, 가즈코는 우에하라는 만나 아이를 임신하며 소설을 끝낸다. 저자는 가즈코의 주변의 모든 것이 몰락해 가고,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아이를 임신한 것 한 가지로 희망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소설을 끝낸다. 아마 그런 희망 밖에 찾을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이 소설에 반영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몰락해가는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이미지에 뱀의 이미지를 더해서 조금 더 섬뜩하고 잔인한 느낌까지 더 하게 된다. 이 뱀의 이미지는 소설의 복선적인 역할과 함께 가문의 몰락과 어머니의 죽음을 암시한다.

"저녁 해가 어머니의 얼굴을 비추어 어머니의 눈이 푸르스름하니 반짝였다. 얼핏 노여움을 띤 그 얼굴은, 대뜸 달려가 안기고 싶을 만치 아름다웠다. 그리고 나는 아아, 어머니의 얼굴을 아까 본 그 슬픈 뱀과 어딘가 닮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내 가슴속에 살무사처럼 흉측한 뱀이 굼실굼실 자리 잡고 있어, 깊은 슬픔으로 덧없이 아름다운 어미 뱀을 언젠가 물어 죽이고 마는 게 아닐까, 어쩐지 자꾸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p 19)"

아마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때 패망해 가던 일본인의 심정이 되지 않고서는 온전히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일본의 제국주의는 우리에게는 끔찍한 경험이었지만, 일본인에게는 나름 한여름 밤의 꿈처럼 화려한 경험이었을지도 모른다. 몇 천 년간 섬나라에 갇혀서 대륙으로의 진출만을 꿈꾸었던 그들이, 태평양의 대부분과,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점령하는 것을 지나서 인도와 호주까지 영역을 넓혔을 때, 마치 세상이 자기 것인 양 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거인이 서서히 몰락해가고, 미국의 압박에 의해 점점 심장이 조여 왔을 때 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미국에 의해 패망하고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몰락하고 있는 사양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몰락 속에서도 작은 희망이라도 잡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 시대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설은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이, 디자이 오사무의 [사양]이라는 소설에 딱 맞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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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2 : 정종·태종 - 피와 눈물로 세운 나라의 기틀 조선왕조실록 2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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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역사드라마는 전쟁 장면들과 같은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 주는 매력이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뇌하는 한 인간을 묘사하는 전혀 다른 다른 매력도 있다. 이런 역사적 인물의 인간적 고뇌를 잘 그린 드라마로 기억나는 것이 오랜 전 JTB에서 방영한 [인수대비]라는 작품이었다. 수양대군의 며느리이자, 남편을 잃고 아들 성종을 왕위로 올리지만 손자인 연산 대군에게 핍박을 받는 비운의 인물인 인수대비를 그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화려한 전쟁신 등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왕권이라는 권력 앞에서 각 인물들의 고뇌가 너무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더 오래전 작품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용이 눈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를 대적하고, 이복형제를 죽이고, 신하들과 친척들마저 죽여야 했던 조선의 3대 왕 태종의 고뇌를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

이덕일 작가의 [조선왕조실록 2권]을 읽게 되었다. 1권 태종 편에 이어 2권의 주인공은 정종과 태종이었다. 이 책에서 역사적 사건보다 더 관심 있게 읽었던 것은 정종과 태종이 가졌던 인간적인 고뇌이다. 먼저 정종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허수아비 왕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이복형제인 방석을 죽이고, 왕권을 탈취한 후 명분을 위해 바로 왕이 되지 않고 자신의 형 방과를 왕위에 올린다. 그렇게 왕이 된 정종은 비록 왕이었지만, 2년의 왕 세월에 눈치만 보게 된다. 우선은 아버지 이성계와 동생 방원 사이에서 눈치를 본다. 또 방원과 함께 난을 일으킨 공신들의 눈치도 보게 된다. 나중에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방간과 방원 사이에서도 눈치를 보아야 했다. 실권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눈치만 보다가 왕의 세월을 보낸 임금이었다.

그렇다고 정종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백성을 돌보고 나름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노력들을 했었다. 그런데 그는 왕의 일에 열심을 낼 수가 없었다. 그가 열심히 왕의 직무를 다하면 그것은 동생과 공신들에게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으려는 태도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다시 피를 부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정종은 자신의 자식들을 다 머리 깎아 절로 보내고, 자신 역시 하루 종일 격구를 하며 세월을 보낸다. 자신이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다.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정종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왕이지만 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고, 동생과 신하들의 눈치만을 보아야 했기에 그 자리가 너무나 괴롭고 힘든 자리가 아니었을까? 그렇고 정종의 성격이 결코 유약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평생 아버지 이성계를 쫓아서 전쟁터를 누빈 무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그것이 아마 그와 그의 가족들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태종의 부분에서는 더욱더 태종이 고뇌가 느껴진다. 배다른 동생들과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여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태종을 난폭한 왕으로 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그도 역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던 한 명의 불행한 인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만약 태종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방석이나 정도전이 과연 그를 살려 두었을까? 그들이 살려 주고 싶어도, 밑의 신하들이 방원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살기 위해서 왕이 되어야 했고, 살기 위해서 형제를 죽여야 하지 않았을까? 일단 그렇게 왕이라는 호랑이 위에 앉게 되자 저절로 앞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함께 군사를 일으킨 동료들을 견제해야 했고, 그들을 유배 보내거나 죽여야 했다. 심지어 1차 왕자의 난 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매제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들을 살려 두었다가는 반쪽짜리 밖의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후세에도 왕권이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행간을 읽어보면 살육 앞에서 매번 고뇌하는 태종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태조 이성계의 고뇌와 아픔도 느껴진다. 확고한 비전으로 고려 왕조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결국은 함께 했던 동료들이 죽임을 당하고, 아들들마저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평생 자녀들끼리의 살육이 그치지를 않는다. 아들 이방원을 왕으로 인정할 수도, 안 할 수도 없었던 아버지의 고뇌는 어떠했을까?

너무 뻔한 이야기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권력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결국 권력을 쥔 사람은 개인이나 가족이나 모두 불행을 겪었다. 과거뿐 아니라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일생을 받쳐 그 권력을 탐한다. 자신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이루어야 할 대의가 있었을까? 정종과 태종 편을 읽으며 권력을 가진 조선의 왕실이 만난 풍파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앞으로 겪을 풍파에 비하면 어쩌면 1,2차 왕자의 난은 작은 풍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 있을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과 신하들을 학살하는 계유정난이나 연산군의 무오사화 등이 계속해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이 이후의 책들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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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8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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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콜럼바인]과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책을 읽으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고등학교 총기사건인 콜롬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파악한 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건의 주범인 에릭이라는 인물은 168명의 사상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낸 오클라호마시티 참사의 범인인 멕베이를 모델로 삼아 맥베이 보다 더 유명해져서 신문에 나고 싶다는 열망으로 사건을 준비했고, 이 과정에서 우울증으로 자살을 준비하던 딜런을 끌어들여 범죄를 모의했다. 원래는 식당에 폭탄을 터트려 천 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려고 준비했으나, 폭탄이 불발하여 훨씬 적은 희생자를 내었다는 것이다. 아직 인격이 덜 형성된 고등학생이란 나이에 이들의 왜곡된 자의식이나 타인에 대한 피해 의식 등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사건이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비록 픽션이지만, 다시금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도 마치 에릭과 딜런과 같은 슈야와 나오키라는 두 명의 청소년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만의 황당한 이유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소설은 유코라는 중학교 1학년 여선생님의 1학기 종업식 인사로 시작된다. 학생들에게 덤덤하게 한 학기 동안 수고했다고 말하고, 자신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7년 동안의 교직을 관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언급하며 1달 전에 사고로 죽은 자신의 딸 이야기한다. 그리고 곧 충격적인 말이 나온다. 학교 수영장에서 사고로 죽은 것으로 알려진 딸이 실제로는 자신의 반 두 명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것이다. 유코는 그들의 신변을 보호한다며 그들을 A와 B라고 부른다. 유코는 일본의 소년범의 형사처벌 면제와 학생을 보호해야 하는 교사의 사명으로 인해 범인들을 형사고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쩌면 형사고발이 처벌은 없고, 범죄자만을 유명하게 만들어, 오히려 그들의 욕구만을 만족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대신 반성하라는 의미에서 자신만의 처벌을 남겨두고 떠났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 처벌이라는 것이 너무 끔찍한 형벌이다. 소설의 초반부는 이렇게 유코의 고백으로 일단락되는데, 읽는 내내 충격과 반전이 거듭되면서 거의 숨도 쉬지 못하고 읽게 된다. 독자를 자신의 소설로 빨아들이는 작가의 흡입력에 깜짝 놀랄 지경이다.

이 정도 되니 오히려 소설의 초반에 모든 긴장감을 쏟아부었으니 후반부에는 무슨 이야기가 진행될까 읽는 나 자신이 작가를 염려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염려도 잠시, 작가는 다시금 충격과 반전을 쉴 틈 없이 이어간다. 소설은 유코 선생님의 독백, 유코 선생님의 독백 이후 반에서 벌어진 일을 반장이었던 미즈키가 유코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 내용,  B라는 이니셜로 불렸던 나오키와 나오키의 어머니의 독백,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A라는 이니셜로 불렸던 슈야라는 아이의 독백이 이어진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은 유코가 던져 놓은 폭탄이 어떻게 파괴력 있게 작동하는지와 함께 유코의 딸이 미나미를 살해한 슈아와 나오키의 범행 동기 등이 언급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청소년 문제와 학교 문제가 언급된다. 소년범의 문제, 가정파괴, 은둔형 외톨이, 학교에서의 폭력과 왕따 문제, 학교에서의 선생님의 권한 문제 등이 계속 언급된다. 그 과정에서 유코, 미즈키, 나오키, 슈아, 나오키의 어머니까지 어떻게 자기만의 시각으로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만의 시각으로 외부 세계를 인식이 가져온 끔찍한 결과도 언급된다.  

소설은 충분히 나오키와 슈아가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 부모님의 왜곡된 학업 의식이나 경쟁의식, 또는 소외감,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다는 자신만의 감정 등을 마치 범죄 사건의 원인을 분석하듯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이들에게 대한 동정 의식이 전혀 들지 않는다. 아마 이것이 작가의 의도였을 것이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사건의 원인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런 원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에서 생긴 것인지를 계속 암시한다.

현대에는 청소년 범죄나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면, 범죄자들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에 대해 방대한 분석을 한다. 범죄자의 불우한 가정환경, 힘들었던 청소년 시절, 사회의 모순 등을 보도하며 그들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작가는 유코 선생님의 입을 빌려 결국 사건의 원인은 사건을 일으킨 범죄자이며, 그 범죄자는 처벌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유코 선생님의 초월적인 심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미나토 가나에는 청소년과 학교가 중심이 되는 여러 개의 소설을 발표하고, 학교와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문제 등을 언급한다. 작가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충격적인 반전으로 인해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고백]은 아직 읽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롭게 개정판이 출간되면서 드디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충격과 반전을 거듭해서 책을 읽을 덥은 후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왜 이 책이 미나토 가나에의 대표작이라고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미나토 가나에라는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이 작가의 작품을 관심을 가지고 읽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직 미나토 가나에라는 작가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이 소설을 먼저 읽기를 권한다. 충분히 독자를 사로잡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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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도둑 가족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6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장선정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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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무엇일까? 서로 같은 집에 살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서로를 위해주고...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에 아무런 혈연이 없으면서도 어쩌다가 서로 모여서 살게 된 가족이 이야기가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알려져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좀도둑 가족 (국내 개봉 : 어느 가족)] 이야기이다. 이 영화의 원작이 소설로 출간되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자신의 영화의 시나리오를 직접 소설로 출판하고 있다. 비록 영화로는 보지 못했지만 소설로 먼저 만나봤다.

빈집만이 넘치는 일본 도시의 재개발 지구에 한 가족이 살고 있다. 이들이 여기 살고 있는 것은 원래 집 주인인 하쓰에 할머니 외에는 비밀이다. 하쓰에와 하쓰에의 배다른 두 딸 노부요와 아키, 그리고 노부요의 남편 오사무, 그리고 오사무의 아들 쇼타, 그리고 매 맞아 울고 있어 그냥 데리고 온 유리라는 여자아이까지... 이들이 어떤 관계인지 잘 모르지만, 혈연으로 얽혀있는 가정은 아니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서 각자의 삶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하쓰에는 젊은 시절 남편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을 갔다. 그녀는 남편이 남겨두고 간 허름한 집에서 자신을 버린 남편의 사진과 향을 피우는 불당을 차려 놓고 산다. 근근이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노인연금으로 살아가면서 파친코는 꼭 들리지 않고 간다. 노부요는 남편으로 폭력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술집에서 일을 하다가 오사무라는 남자를 만나 동거하게 되었다. 그리고 둘은 우연히 하쓰에의 집에 살며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쇼키는 오사무가 데려왔다. 일을 하기 싫어하는 무능력한 오사무는 쇼키를 데리고 근처 슈퍼마켓을 돌며 생필품을 훔치고 있다. 노부요 역시 세탁소에 일하며 손님들이 옷에 넣어둔 물건들을 슬쩍하며 살고 있다. 노부요와 자매는 아니지만, 하쓰에를 어머니라고 함께 부르는 아키는 퇴폐업소에서 일하며 아무런 미래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온몸이 멍 자국이고 화상 자국인 '린'이라는 여자아이가 있다.

처음에 이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이곳에 모여 산다. 그러나 조금씩 서로를 향한 정(情)이 생기고,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를 돌보기 시작한다.

"노부요는 현관에서 가져온 철제 석유통 속에 불붙인 신문지를 넣었다. 그리고 린이 처음 이 집에 온 날 입고 있던 옷을 던져 넣었다. 노부오는 린을 위에서 안듯 무릎으로 감싼 책 재를 바라보았다. 윗옷 소매에 붙은 흰 리본이 순식간에 휩싸이더니 까맣게 변색되었다. 노부요는 린을 뒤에서 안듯 무릎으로 감싼 채 재를 바라보았다. -때리는 건 말이지...... 린이 나빠서가 아니야......- 노부요는 천천히 말해 주었다. -사랑하니까 때린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노부요는 삼십 년 전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어투가 어딘가 자신의 엄마를 닮아 있었다. - 좋아하면 이렇게 하는 거야.- 노부요는 린을 꼬옥 안아주었다. 뺨과 뺨이 찌부러질 만큼 힘껏 끌어안았다. 노부요는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옷을 태우는 불 때문인지 눈물이 따뜻했다. 린은 뒤돌아 노부요의 얼굴을 보며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 아이가 무척 귀엽다든지 안쓰럽다든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이 아이를 안고 안기는 것만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더는 이 아이를 내버려 두지 않아. 노부요는 맹세했다. (P 135-136)"

이들은 세상의 시각에서 보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아닐 수도 있고,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부도덕한 일을 하는 불량 집단일 수가 있다. 실제로 소설 말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피가 아닌 정으로 맺어진 이들은 서로가 예전의 가정에서 느끼지 못했던 따스한 사랑을 이 좀도둑 가족에서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사실 부부 사이도 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서로 함께 살고 서로의 연약함을 품어주면서 피로 맺어진 관계보다 더 끈끈한 관계가 되는 것 아닐까?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는 가슴 뭉클한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고 나니 영화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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