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세트 - 전3권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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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동화 속의 세상은 항상 아름답니다. 왕자와 공주가 나오고, 공주는 어려움을 당하지만, 왕자의 도움으로 항상 해피앤딩을 맞는다. 마음씨 착한 공주는 이쁘기까지도 하고,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실제 세상도 동화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이 동화같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빨리 알아 버린다. 어쩌면 세상의 살벌함을 감추기 위해 동화를 만든 것은 아닐까. 어린 아이가 너무나도 살벌한 세상을 보지 않기 위해 동화로 잠시 눈을 가리는 것은 아닐까.

백설공주의 나라 핀란드의 작가 살라 시무카가 쓴 세 편의 시리즈가 완간되었다. 화이트 스노우 트릴로지로 불리는 이 시리즈는 백설공주라는 동화를 오마주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18살의 소녀 루미키의 이름은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라는 의미이다. 그녀는 무언가 비밀을 감추고 핀란드의 제2의 도시 탐페레로 전학을 온다. 1편에서는 항상 복잡한 일에 관여하지 않고, 눈에 뜨지 않게 생활하는 것이 신조인 그녀지만, 범죄집단의 돈뭉치 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친구들이 우연히 주운 돈뭉치가 무시무시한 범죄집단의 돈이었던 것이다. 결국 범죄집단의 추격을 받던 그녀는 범죄집단에 잠입해 그 실체를 밝혀낸다.

2편에서는 루미키는 체코의 프라하로 여행을 간다. 그곳에서 자신의 언니라고 주장하는 여성을 만난다. 그런데 그녀는 사악한 종교집단에 빠져 있었다. 종교집단의 리더는 그녀를 비롯한 사람들을 불태워 죽이려는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언니일지도 확실치 않은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종교집단고 맞선다.





3편에는 본격적인 루미키의 비밀들이 밝혀진다. 소설의 분위기는 한층 더 어두워졌다. 핀란드로 돌아온 그녀는 새로운 남자 친구도 사귄다. 하지만 계속해서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를 쫓는다. 3편에서는 다른 곳에서보다 더 완벽하게 백설공주 동화를 오마주한다. 백설공주가 왕자에게 키스를 받고 깨어나듯이, 그녀도 누군가의 접촉으로 인해 그녀 속에 봉인되어 있던 기억이 깨어난다. 문제는 그 기억이 너무나 끔찍한 기억이고, 그녀에게 접촉해 오는 사람도 왕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루미키에게 접근하며 그녀를 협박한다.


"넌 나랑 많이 달았어. 네 일부는 불타는 집을 그냥 지켜보고 싶었어. 그 안에 갇힌 사람ㄷ르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네 안엔 파괴의 요소가 있잖아. 물론 널 그걸 감추고 살지. 우리 사회가 용인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파괴와 몰락의 아이들인 우린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지." (P 103)


실제로 백설공주 동화의 원본은 성적인 이야기와 잔혹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동화에서는 백설공주는 마녀의 사과를 먹고 잠이 들지만, 왕자의 키스를 받고 깨어난다. 그러나 원래 이야기에서 백설공주는 방탕한 성생활하고 함께 잔혹한 성격으로 나온다. 또한 백설공주의 주변에도 온통 살인과 성적인 이야기들로 난무하다. 이 소설은 YA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조금 섬뜩하고 어두운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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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으로 인해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사건을 접한 사람들은 분노나 경악을 넘어 충격에 빠지고 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세상이 무너지고, 자신이 알지 못한 세상 속에 던져진 느낌이다. 마치 지금 우리 사회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상황을 보면서 오래전에 보았던 위쇼스키 형제의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의 충격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처음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이 영화를 단순한 SF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았다. 영화 초반부터 무언가 낌새가 이상했다.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에게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고, 경찰관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고, 주변의 현상들이 왜곡되며, 무언가 비현실적인 일들이 벌어진다. 결정적으로 모피어스라는 인물을 만나며 네오는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모피어스는 레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내민다. 빨간약을 먹으면 그동안의 이상한 일들은 모두 잊고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반면 파란약을 먹으면 진짜 현실을 접하게 된다. 결국 레오는 파란약을 먹게 된다. 그리고 레오가 매트릭스의 기계 안에서 깨어나는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수많은 인간들이 벌거벗은 채 매트릭스라는 기계의 영양분을 공급하는 장치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은 꿈에서 보는 환상을 현실이라고 믿으며 그들이 믿는 현실에 순응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레오와 함께 자신들이 믿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을 함께 접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충격이 이와 같지 않을까? 바로 얼마 전까지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를 이루고, 경제적으로는 선진적이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지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민주주의 체제도 아니고, 자본주의 경제도 아니었다. 봉건시대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매트릭스와 같은 거대한 무속신앙의 지배를 지도자와 국민이 받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미리 예견하고 지적한 책이 있다.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란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가 근대화를 이루었지만, 실질적으로 시민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근대적인 이성이 아닌, 기복제화(祈福除禍)의 무속신앙이라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서 무속문화는 생산력의 합리화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 도를 더해가는 경향이 보인다. 그 원인이 아마도 자본주의의 소비문화와 기복제화의 쾌락주의적 무속문화 간에 어떤 친화력이 작용하는 데 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상품 숭배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오관에 주어지지 않는 것들은 인식 대상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일고의 가치도 없게 된다. 모든 것이 현세적이며, 초월적 존재나 이념의 세계는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상대성을 넘은 절대적 윤리 규범은 상상될 수도 없다. 오로지 쾌와 불쾌가 도덕 기준이 될 뿐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세속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무속신앙과 상통하면서 외래의 상품 숭배와 토속의 물신 숭배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특징이 되어버린 셈이다." 차인석, [근대성과 자아의식] (아카넷, 2016) P 29

 

여기서 저자가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무속신앙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를 자본주의와 무속신화의 '친화력'에서 보았다. 즉 우리들 마음속에는 기복제화에 맹신하는 무속신앙적 사고가 남아있고, 그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물신숭배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처럼 현대 자본주의에 열광하는 이유가 어쩌면 우리 안에 있는 물신숭배를 만족시키기 위한 이기심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석은 우리와는 다른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에도 적용이 된다. 중국 학자인 '리쩌허우'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사상가는 아니다. 그나마 이택후라는 이름으로 그의 중국 미학 사상이 소개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이란 책에서 중국의 사회주의 과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상으로 중국 사회처럼 최단 시간에 그토록 광범위한 지역이 사회주의화 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사회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사회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사회를 경험하지도 못한 채 급속이 사회주의화가 되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중국의 사회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몇 천년 동안 중국 시민 속에 있었던 유교사상이 사회주의의 탈을 쓰고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 증거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사상과 음양사상 등을 유물론과 변증법에 비교한다.

 

"그러나 중국 근대에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라는 역사의 전제가 없었으며, 기나긴 봉건사회와 반식민, 반봉건 사회 이후 곧바로 사회주의가 들어섰고, 따라서 사회의 정치, 경제적 구조에서건 사람들의 문화심리구조면에서건 결코 자본주의의 세례를 거친 적이 없었다. 이것은 또한 기나긴 봉건사회가 낳은 사회, 심리구조가 자본주의사회의 민주주의와 개인주의에 의해 결코 파괴되지 않았으며, 날은 습관, 세력과 관념, 사상이 여전히 완고하게 존속되면서 심지어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의 싶은 곳에까지 침투해 있었다는 점을 얘기해 준다. 그것들이 사회주의적 집단주의라는 옷을 입고,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와 개인주의를 반대한다는 명목 아래, '문화대혁명'에서나 심지어는 그 이전에 각종 복벽을 순조롭게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도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 이택후,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 (지식산업사) P 49

 

지금의 현상황은 지도자나 지도자의 측근의 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이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배후에 있는 우리의 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무속신앙과 비합리적인 물신숭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전히 지식의 전당이라는 대학교에서 축제 때마다 굿판이 벌어지고 있고, 개인이나 단체가 사업을 시작하면서 고사상을 차리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선거때마다 묏자리를 보러 다니고 있다. 심지어 여러 종교에서 그 종교의 교리와는 다르게 이런 기복제화의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이런 무속의 과정을 통해 개인의 입신양명과 물질적인 복이다. 그를 위해서는 도덕이나 정의도 모든 차후의 문제가 된다. 그것이 마치 거대한 매트릭스 기계처럼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어쩌면 이런 의식이 국정 농단의 핵심세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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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을 읽을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주체'라는 단어이다. 지젝의 책을 읽을 때마다 계속해서 '주체'나 '주체화'라는 단어가 나오고,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해서 독해가 방해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젝에게서 '주체'란 무엇인가?

지젝이 말하는 주체를 알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코키토(cogito)'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통해 지금 자신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어쩌면 악마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유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록 악마가 자신을 속일지라도, 속임의 대상이고 생각의 주체인 자신은 존재한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그래서 나온 명제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근대철학이 바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 '코키토'에게서 시작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탈구조주의 이르러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데카르트의 이 코키토를 비난한다. 반면 지젝은 이 데카르트의 '코키토'를 계승한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 하이데거주의자, 인지과학자, 생태주의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페미니스들은 한결같이 '코키토'로 알려진 데카르트적 주체를 현대적 사유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거의 모든 이들이 코키토를 비난한다. 지젝의 비판적 사유에 매료된 사람들은, 지젝이 학계의 이런 흐름과는 반대로 데카르트적 주체 모델을 받아들이는 데 놀라지 않을 것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71



 

현대 사상가들이 '코키토'를 반대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가 외부 세계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함의 상태이다. 그 완전함은 어떤 것도 개인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이른바 고립된 섬으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것의 주된 결함 역시 아무것도 개인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고립된 섬으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의지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달리 말해, 개인에게 은총으로 보였던 모든 것들은 또한 불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개인은 전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기 책임 아래 있으며, 자기 통제에 따른다. 객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75



 

탈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주체를 부정하고, 주체는 외부 세계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당대의 역사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이전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본 반면, 탈구조주의자들은 주체적 생각은 원래부터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지젝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완전한 주체의 존재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주체는 외부의 영향들을 자신 안에서 통합해가며 새로운 생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 과정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설명한다.



 

"지젝은 이 영화 속 인조인간들이 지닌 위상을 들어, 우리 인간이 탈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힘들에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화 속 인조인간들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주입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의 개인 신화를 창조하는 그들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의 요소들을 개별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93

 

 

 

결국 지젝에게 있어서 주체화란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과 자기만의 생각이 통합되는 자기화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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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 쓴 책을 읽다가 난해함에 혀를 내두르고, 그에 대한 쉬운 인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지젝의 인문서로 가장 잘 알려진 영국 학자 토니 마이어스가 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책이다. 문제는 인문서도 난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몇 편에 걸쳐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주제는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세 명의 사상가인 헤겔, 마르크스, 라캉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과 마르크스, 라캉의 사상으로 현대문화와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한다. 문제는 이들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젝 나름대로 한 번 더 이들의 이론을 비틀어서 사용하고 있다.

먼저 헤겔의 이론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이야기하는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더 나은 통합을 이끌어 가는 과정이다. 헤겔은 관념이 이렇게 발전해 간다고 보았다. 지젝은 여기서 통합보다는 '테제'에 반대되는 '안티테제'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 모순의 존재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으로,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언제나 더 큰 진리로 화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헤겔 본인 시대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독창적으로 헤겔을 읽는다. 지젝에게 헤겔과 그의 변증법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인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 이 명제를 통해 헤겔은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은 언제나 불일치로 분해되며 이 불일치야말로 그 관념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필연성임을 주장한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46



 

결국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모순된 관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모순된 관념이 있기에 모순되지 않는 관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의 정치학이다. 마르크스는 문화나 정치를 이루는 상부구조는 경제를 중심으로 한 하부구조, 또 다른 용어로 토대(base)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지젝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헤겔의 변증법이 지젝에게는 이데올로기 비판에 필요한 분석 도구를 제공했다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그런 분석과 비판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서, 지젝은 자신의 작업을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원하도록 만드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일부로 간주한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49



 

마지막으로는 가장 난해한 라캉이다. 이 부분이 지젝이라는 철학자를 가장 특색 있고 매력 있게 만들어 주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라캉의 난해함이 지젝의 철학을 더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이어받아, 심리학을 통해 사회 전반을 해석한다.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영역을 이야기한다.

상상계는 불완전한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자신을 완전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라캉은 인간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상계의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상징계는 상상계를 통해 이상적인 모습을 좇아가던 자아가 언어와 상징의 세계를 만나면서, 이를 통해 상상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라캉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언어나 상징을 통해 규정하기보다는 언어가 이런 것들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결국 우리는 타인이나 사회가 만든 언어나 상징 속에서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계는 이런 언어의 상징계에 갇힌 자아가 원래 존재하는 실체를 좇아가는 것이다. 라캉은 실재계를 상징계에 의해 난도 당하기 전에 온전한 모습이라고 했다.



 

"지젝은 '실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이 호칭은 지젝이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유럽 각국의 화장실 디자인이나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영화 등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된 '실재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한 라캉적 의미의 '실재' 확장하고 자기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젝의 작업에 개성을 부여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지젝이 국제적인 비평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66



 

사실 이런 라캉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라캉의 이론이 어떻게 지젝에게서 펼쳐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더 쉽지 않다. 이 부분은 앞으로 지젝의 책을 더 읽어가며 발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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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심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38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원시사회와 현대사회를 구분짓는 경계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주술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다. 원시사회는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주술적인 힘을 의지하고 그 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았지만, 현대사회는 이성을 통해 주술적인 두려움의 실체를 밝혀내고 이에 대항한다. 그러나 사실 이 경계는 명확한 것은 아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문명화 이전의 어둡고 두려운 주술적인 힘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어떤 경우는 전체 사회가 그런 힘에 사로잡혀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레드 바르가스는 바로 이런 전설과 어둠의 힘에 대항하는 형사 아담스베르그 시리즈로 유명하다.




아담베르그 시리즈는 아니지만, 최근에 [당시의 정원 나무 아래]라는 프레드 바르가스의 소설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이 책을 읽으려고 계획하던 중에, 아직 읽지 못했던 [죽은 자의 심판]을 먼저 읽게 되었다.


현재 아담베르그 시리즈는 비채에서 [죽은 자의 심판]과 [트라이던트] 두 권이 출간되어 있다. 원래는 [트라이던트]가 먼저 출간된 작품이고, [죽은 자의 심판]이 최근에 출간된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자의 심판]이 먼저 번역되어 출간되었었다.




[죽은 자의 심판]은 노르망디의 한 전설로 부터 시작된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는 죽음의 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엘르켕 두령의 군대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마치 [왕좌의 게임]의 화이트 워커(White walker)를 연상시키는 이 군대는 어두운 밤 노르망디 숲을 지나간다. 이 군대를 본 사람은 네 명의 죽음의 예언을 듣는데, 왠일인지 세 명 밖에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네 명 중 세명이 죽을 때 쯤이면, 자신이 네 번째 죽음의 예언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의 군대를 본 사람을 집단으로 살해하게 된다. 실제로 1777년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야기는 노르망디의 오르드벡이라는 시골마을의 한 부인이 파리의 아담베르그를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녀는 최근에 자신의 마을에서 마구잡이로 사냥을 해서 주위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에르비에라는 사냥꾼이 실종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얼마 전 자신의 딸이 오르드벡 근처의 숲에서 죽음의 군대를 보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딸이 그 군대에게 끌려가는 에르비에와 두 명의 사람을 더 보았다고 말한다. 터무니없는 전설을 믿는 시골 여인과 정신이 혼미한 그녀의 딸의 환상쯤으로 생각하던 아담베르그는 우연히 오르드벡 마을을 찾아갔다가 사라진 사냥꾼이 시체로 발견되는 것을 목격한다. 또한 그 시체를 발견한 레오라는 백작부인이 괴한에 의해 흉기로 살해될 뻔한 사건도 발생한다. 그 후 환상에서 죽음의 군대에 끌려갔던 다른 두 명 역시 차례대로 죽임을 당한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동요하고, 나머지 한 명이 누구일지 두려워한다. 그리고 네 번째 죽음을 막기 위해 죽음의 군대를 본 리나라는 여성과 그의 가족들을 죽이려한다.


과연 실제로 죽음의 군대가 존재할까? 아니면 누군가가 그 죽음의 군대의 전설을 통해 살인을 하고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하는 것일까? 아담스베르그 오르드벡이란 시골마을에서 여전히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마을사람들을 만난다.


과거의 영화와 구습에 얽매여 있는 백작, 자신이 나폴레옹 전쟁때 활약한 전쟁 영웅의 후손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헌병대 대위, 마을 사람들에게 악마와 접신을 한다는 비난을 당하는 리나와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여전히 죽음의 군대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마을 사람들...


아담베르그는 이전의 시리즈처럼 수많은 자료나 증거가 아닌 직관으로 이 사건에 감추어진 비밀을 밝혀낸다. 인간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 두려움 앞에서 놓치고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아담베그르처럼 두려움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직관이 있을 수 있을까? 온 나라가 주술적 권력에 놀아나고 있는 이 시대에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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