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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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좋아하는 한국작가 중 한 명을  꼽으라면 은희경 작가를 이야기한다. 처음 그녀의 소설을 접한 것은 1998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인 [아내의 상자]를 통해서이다. 소외되고 거절 당하던 과거를 가진 아내가 결국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일탈을 선택한다는 내용의 소설이었다. 소설을 다 읽고서도 소설 속의 아내의 선택이 끝내 마음에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이 작가처럼 느껴져 연민을 느꼈었다. 얼마 후 출간한 그녀의 장편소설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에라는 소설을 읽었다. 누구에게도 사랑을 주지 못하는 주인공 진희라는 여성이 마치 [아내의 상자]의 주인공의 결혼 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읽은 은희경 작가의 [새의선물]이라는 소설을 읽었다. 또 다른 진희라는 주인공이 어린시절 세상이 거짓을 일찍 깨닫고 냉소적인 생각을 가지는 이야기였다.  결국 이 소설을 읽고 [새의 선물]의 어린 진희,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의 성인인 진희, 그리고 [아내의 상자]의 주인공이 같은 여성이며, 그것이 모두 작가의 이야기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만든 착각이자 환상이었다. 그러나 그 환상에서 깨어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소설 속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담겨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소설이 된 작가의 이야기는 그것이 진짜 작가의 이야기가 아님을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소설은 이런 소설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더 확신시켜 주는 소설이다. 작가인 델핀 드 비강은 얼마 전 [길위의 소녀]로 만났었다. 소설 속에 뭍어나는 그 진실함이 독자를 감동시키는 작가였다. 작가는 자전적인 소설로 데뷔했고,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다룬 소설로 프랑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책 [실화를 바탕으로]라는 소설은 제목부터 작가가 본격적으로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뉘앙스를 준다. 소설의 주인공의 이름도 작가의 이름과 같은 '델핀'이다.


델핀은 자전적 소설로 순시간에 인기를 얻는다. 그녀는 수많은 싸인회와 인터뷰를 다니며, 갑자기 닥친 유명세에 어리둥절한다. 내성적이고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 때마침 그녀의 우체통으로 그녀의 삶과 작품을 비난하는 편지가 온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거짓으로 그려서 유명세를 누리고 있고, 그런 작품으로 인해 그녀의 부모와 주변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로인해 델핀은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를 두려워한다.


이렇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때 우연히 L이라는 여성을 만난다. L은 그녀가 가지고 있지 못한 당당함과 우화함, 그리고 여성적인 매력까지 담고 있었다.

"내가 멋진 여자(내가 되고 싶었던 나무랄 데 없는 여자, 두말할 나위가 없는 여자 말이다)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한테는 늘 뭔가가 ​ 모자라거나 지나치거나 곤두섰거나 늘어져 있었다. 나는 곱슬곱슬한 동시에 뻣뻣한 이상한 머리결을 지녔고, 입술에 바른 립스틱을 한 시간 이상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마스카라 바른 것을 잊고 밤늦게 눈을 비비기 일수였다. 극도로 조심하지 않는 한 자주 부딪혔고, 계단이나 튀어나온 지면에서 발을 헛디뎠고,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층수도 헷갈렸다. 그러나 이런 일과 나머지 모든 일들을 달게 받아들였다.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것이 나으니까. 그런데도 그날 아침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L에게 배울 것이많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관찰할 시간이 충분히 있다면 어쩌면 항상 놓쳤던 뭔가를 나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녀와 가깝게 지내다 보면 그녀가 어떻게 그 모든 것에, 그러니까 우아함과 자신감과 여성다움에 동시에 도달하는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P62-63)


항상 당당하고, 불의나 폭력을 보면 참지 못하고 맞서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재치있게 대응하는 L을 보면서 델핀은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차츰 그녀와 자신의 소설 이야기를 하게 된다. L은 그녀의 광팬이었으며 모든 작품을 읽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사실을 쓰기를 권고한다. 그녀는 독자가 원하는 것은 결국 사실이라고 말한다. 이미 독자들은 왠만한 픽션은 모두 접하고 있으며, 그것에 식상해 하고 있고, 픽션으로서의 소설은 이미 생명을 다했다고 말한다. 작가 델핀이 써야할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그녀 안에 있는 것으로, 그것을 끄집어 내기만 하면 된다고 확신을 준다. 델핀은 L의 말에 감동을 받고, 점차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나 델핀은 사실을 써야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점점 글을 쓰 수가 없게 된다. 수많은 강연회와 인터뷰, 기고 등을 할 수 없고, 심지어는 세 문장 이상은 글은 전혀 쓸 수가 없게 된다. 대필작가였던 L은 델핀의 집에 살면서 그녀를 대신해 글을 쓰고 모든 것을 대신해준다. 그리고 델핀으로 변장해 강연회까지 나가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L에게 의지하며 L이 그녀를 대신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L이 주는 압박은 점점 강해진다. L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사실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작가가 사실을 쓸 수 있을까? 델핀은 L에게 이 세상에 진정한 실화소설이나 자전적 소설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네가 느끼는 거, 그건 단순히 그걸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안들어? 그게 진짜 이야기 혹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거나 '매우 자전적인'이야기라고 네가 믿게끔 공들였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 들어? 간단한 광고 몇 마디로 너한테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고 있는, 신문 3면 기사에 관한 호기심 같은 걸 불러일으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란 생각은 안들어? 하지만 나는 현실만으로 충분하다고 믿진 않아. 현실, 그것이 존재하다면,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해. 네 말대로 현실은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변화되고, 해석될 필요가 있어, 소설가의 시선과 관점 없이는 아무리 잘 풀려봐야 죽도록 지루하고, 잘 안 풀리는 경우엔 엄청난 불안을 야기하지. 그리고 어떤 재료에서 출발했든 그 작업은 언제나 픽션이라는 형태야." (P 273)


과연 델핀과 L 중 누가 맞는 걸까? 그리고 델핀은 자신의 생각과 L의 생각 중 누구의 생각을 따를까? 그리고 소설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광기를 드러내는 L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는 타인에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자신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얼마 전 읽었던 라캉의 글에서 라캉이 언급한 내용을 떠올리게 되었다. 라캉은 우리가 과거에 대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환자가 의사에게 아무리 과거의 사실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환자가 의사에게 말을 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의사를 대상으로 한 포장된 이야기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환자가 자신의 생각으로 과거를 말할 때, 그것은 이미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말한다. 그렇게 과거가 미래로 향해가는 순간(이 소설의 내용으로 말하자면, 실화가 픽션이 되는 순간), 환자는 과거로부터 나와서 치료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독자들은 작가가 사실을 이야기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런 소설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하더라도 이미 독자를 대상으로 글로 쓰여지는 순간, 그 이야기는 작가의 의식화와 글쓰기를 통해 이미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 변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소설이 모두 허구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 과정에 작가의 사실이 담겨져 있고, 그 과정에 작가의 회복이 포함되고, 그 과정에 독자의 치유과정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델핀 드 비강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소설의 힘일 것이다. 픽션의 힘, 사실이 아니지만 사실을 내포한 소설의 힘, 그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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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이 사람을 따르는가 - 가만히 있어도 사람이 따르는 리더의 조건
나가마쓰 시게히사 지음, 김윤수 옮김 / 다산3.0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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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더십하면 항상 오래 전에 보았던 여자 농구 경기를 떠올린다. 내가 여자농구를 즐겨보던 시기는 우리나라 농구팀이 한참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경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고, 그 여파로 여자 농구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에 단연 여자농구의 1등팀은 삼성생명이었다. 이에 비해 국민은행이 새로운 젊은 감독을 영입해 순신각에 삼성생명을 위협하는 팀이 되었다. 그리고 두 팀이 라이벌이 되어 우승팀을 결정하는 결승전을 비롯한 여러 경기에서 맞붙었다.


여자 농구는 남자 농구에 비해 팀웍이 절대적이다. 남자농구는 보통 개인의 기량으로 경기의 승부가 나지만, 여자 농구는 심리전이다. 여자 농구의 특성상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거의 승리하던 팀도 순시간에 팀웍이 무너지고 패전을 하게 된다. 이런 팀웍을 유지시키고, 팀원들의 심리를 안정시키는 것이 바로 감독의 몫이다.


당시 삼성생명과 국민은행의 감독의 스타일은 극과극이었다. 경기가 급박하게 흘르면 감독이 팀원들을 호출한다. 삼성생명 감독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선수들에게 숨돌릴 시간을 주며, 격려의 말을 하거나 잘하고 있는 부분을 더 잘하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면 선수들이 스스로 용기를 얻어 실수하고 있는 부분들을 보완한다. 반면 국민은행 감독은 쉴틈없이 선수들을 몰아붙이고, 화를 내며, 심지어는 욕설 비슷한 말까지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당시 두팀의 경기에서는 대부분 삼성생명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 작가 나가마쓰 시게히사가 쓴 [왜 나는 이 사람을 따르는가]라는 책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로 이런 리더십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다그치고, 끌고가는 카리스마형 리더십보다는 인정하고 용기를 주는 소프트형 리더십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리더는 팀원을 인정해 주고, 마음을 나누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을 '자기중요감'이란 단어로 설명한다.


"예로부터 우수한리더는 인간의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으로 정신적 메리트를 잘 활용했다. 사람이 무엇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아는 리더가 훌륭한 리더인 것이다. 또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요감을 갈망한다. 자기 중요감 없이는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기중요감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인데, 이는 태생적인 인간의 본능이다.아기가 큰 소리로 우는 것도 나를 알아달라는 신호이고,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려는 행위의 밑바닥에도 자기중요감을 충족하려는 욕구가 깔려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표현을 갈망하는 생물이기 ㄷ매누에 언제나 '나 여기 있어'라고 표현하고 싶어 한다. 이는 좋고 나쁘고의문제가 아니라 그저 본능이며 정신적 메리트와자기중요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P 18)


결국 팀원의 잘못을 지적해서 다그치며 일을 하게 하는 것보다, 잘한 것을 격려하고 그 사람이 스스로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강조하는 것은 리더의 그릇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리더의 그릇이 커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보다 우수한 직원들을 질투하거나 밀어내지 않고 품을 때 효과적인 팀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이렇게 무조건 하하호호 웃는 속없는 리더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리더는 결단하고, 팀원들을 이끌어야한다. 저자는 리더가 팀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부분과 팀원들을 이끌어 가는 부분의 균형을 이야기한다.


"조직의 분위기를 파악할 줄 모르고 부하 직원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는 리더는 좋은 리더라고 하기 어렵다. 반대로 분위기 파악을 너무 잘하고 남의 마음을 지나칠 정도로 잘 헤아리는 이타심 때문에 할 말도 못하는 사람 역시 리더에는 맞지 않는다." (P 131)


"직원들의 자기중요감을 높이는 것은 중요하지만, 뭐든 받아들인다고 해서 자기중요감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리더가 직원의 기분까지 맞춰줄 필요는 없다. 반대로 표정이 안 좋은 직원에게 '뭔가 불만 있어요? 있으면 말해 봐요'라고 일부러 물을 줄도 알아야 한다. 리더의 입장에서 물러설 수 없는 지점도 분명히 있다. 부당한 지시도 있지만 부당한 반발도 있다. 이를 분멸하는 능력을 길러 소모적인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P 133)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이 둘의 균형을 맞추기가 가장 힘든 것 같다. 사람들을 살듯하게 챙기다보면 어느새 지도력이 무너져 있을 때가 많고, 지도력만 강조하다보면 어느새 사람들과의 소통이 단절될 때가 많다. 이러저래 리더의 자리는 힘들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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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글에서 '주체'라는 단어와 함께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구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조주의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마르크스적 용어)이나 사회, 언어나 의식구조 등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회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채오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히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P 27

비록 구조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런 구조주의의 시작을 마르크스에게서 보는 경우가 많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란 '왜곡된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의 의식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어 있고, 이런 이데올로기를 깨는 방법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사회의 국가체제나 경제체제가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순응적으로 끌려 가고 있다가,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런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사람이 알튀세(알튀세르)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가 군대나 학교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이론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호명'모델이다. 내가 경찰이나 누군가에서 호명을 받을 때 나도 모르게 대답하는 즉시 나도 모르게 그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알튀세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이 이론이 이데올로기의 전부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페테 슬로다익의 글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슬로터다익은 이미 사람들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조정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냉소적인 주체'라고 한다. 지젝은 이 슬로터다익의 사상을 이어받는다.

"슬로터다익과 지젝이 주장하는 바는 이런 냉소가 이미 공식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냉소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냉소주의적 주체는 현실에 대한 공식적인 전망이 이미 왜곡되어 있다는 것, 그런 왜곡된 전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129

지젝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으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 믿음은 생각의 믿음이 아니라 행동의 믿음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돈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제젝을 라캉의 용어를 빌려서 이것을 그는 이렇게 인간이 그렇다면 인간은 이 이데올로기 체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순전히 이원론적인 방법이 아닌, 삼원론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이원론적인 방법은 이데올로기와 현실을 이원론으로 나누지만, 삼원론적인 방법은 현실에서 상징계로 인식되지 않고 남아 있는 실재를 의미한다. 지젝은 이것을 상징계 내부의 틈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의 유령이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화되지 않은 실재계를 의미한다. 지젝은 이런 유령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확인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이야기함으로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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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가 '탈근대성'이란 용어이다. 탈근대성은 근대성이 추구한 거대서사(거대담론)과 대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도 불리는데, 탈근대성은 사회-역사적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에 대한 문화적 반응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탈근대성은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위험사회 이론'에서 시작된다. 그는 산업화로 인해 세상이 여러 가지 위험요소에 처해 있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할수록 더 알지 못하는 위험요소가 생긴다고 말한다. 결국 이런 현상은 세상을 설명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거대서사나 대타자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탈근대는 '거대서사(grand narrative)'의 종말로 설명된다. 거대서사란 모든 삶과 사물의 총체성을 해명하고자 하는 해석 혹은 서사이다. 가장 대표적인 거대서사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인데, 리오타르는 (다른 거대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거부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보편성을 위해 삶의 구체성과 사물들의 개별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포스트모던 비판 철학자들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누가 전체주의를 말했나?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을 썼다. 이 책에서 지젝은 리오타르 등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 굴복했다고 비판한다."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103

지젝은 이런 탈근대성이 제시하는 문제들을 '제조된 위험', '자귀재귀적인 올가미', '재귀성'같은 단어로 표현한다. 또는 '우리는 우리가 짠 거미줄에 걸려 있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지젝은 탈근대적 시대 이전에는 대타자의 존재를 믿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믿지 않았지만, 믿는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지젝은 이 상황을 우화에서 벌거벗은 왕을 옷을 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백성들의 시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런 비교를 통해 지젝은, 우리가 모두 실재 너무의 상징적 세계를 위해, 날것의 실재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최소한의 이상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부인을 '마치 ~인 것처럼'이란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 마치 역겨운 냄새를 맡지 않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판사 앞에 섰을 때에 그 판사가 무식한 늙은이가 아닌 것처럼, 마치 그 판사가 법이 연명되는 통로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충실한 시민으로 남기 위해 실제로 새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게 아닌 것처럼 해동한다." (P 103-4)

"그래서 대타자는 우리가 모두 개별적으로 동의하는 일종의 사기 또는 거짓말이다. 우리는 모두 왕이 (실재계에서)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상징계에서) 새 옷을 입고 있다는 기만에 동의한다. 그래서 지젝이 '태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의 '재귀성'으로 특징지어진 새로운 탈근대란 시대 속에서, 우리가 더 이상 왕이 옷을 입었다고 믿지 않음을 뜻한다." (P 104)

지젝의 대타자에 대한 설명 중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 상징적 효력이라는 단어이다. 대타자가 상징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주체는 스스로의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타자와 대타자의 시선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력의 효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유명한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영하 작가의 '옥수수와 나'라는 작품에도 언급된 이야기이다)

"상징적 효력'이란, 어떤 사실이 진실이 되려면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사실이 대타자에게도 알려졌음을 알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지젝은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미친 사람에 관한 농담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치료가 끝나서 퇴원했다가 다시 병원을 찾은 사람은, 집에서 닭을 만났는데 그놈이 자기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의사가 화를 버럭 내며 당신은 인간이지 낟알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예,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 닭도 그것을 알까요?'라고 대답한다." (P 104)

탈근대화 시대에는 점점 이런 상징적 효력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지젝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가 오히려 인간을 스스로 억압하게 된다고 본다. 자유를 누리는 것을 반대하고 스스로를 피지배 아래에 놓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적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타자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형국이다. 지젝은 이것을 '탈근대성의 역설'이나 '타자의 귀환'또는 '규제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한다.

"탈근대성이 역설은, 대타자의 붕괴로 생겨난 자유가 실제로는 어떤 부정으로 다가와 규제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습관에 대한 헤겔의 논의와 유사하다. 헤겔에게 습관은 세계에 대한 기계적 반응의 하나로, 이 반응은 세부에 대한 관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더 심오한 문제에 참여하게 한다." (P 113)

또한 이러한 대타자에 대한 부정은 또 다른 타자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한다.

"이렇듯 작은 대타자의 구성 외에, 대타자의 붕괴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은 진짜 실재 속에 존재하는 대타자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실재 속에 타자'에게 라캉 정신분석학이 붙인 명칭은 '타자의 타자'이다. 타자에 타자에 대한 믿음, 즉 실제로 배후에서 사회를 조정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존재는 편집증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P 114)

지젝은 이런 탈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상황의 틀을 깨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현상황의 틀을 깬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젝에 따르면, 탈근대적 주체의 곤경을 해결하려면 탈근대의 가능 조건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이런 곤경들의 의미를 갖는 지평 혹은 상징계를 바꿔야만 한다. 그런 정치적 행위는 곧 혁명이다. 물론 행위의 속성상 혁명 이후에 어떤 세상이 나타날지는 말할 수 없다. 일부 비판가들이 지젝의 사유를 모호하다고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시점에서 지젝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오직 좀 더 나은 세계, 자신의 향락에 점령당하고 오직 노예 상태 속에서만 쾌락을 발견하는 편집증적 나르시시스트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열리리라는 희망 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자본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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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정원 나무 아래 모중석 스릴러 클럽 40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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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형사 아담베그르 시리즈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프레드 바르가스의 [당신의 정원 나무 아래]라는 소설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작가의 추리소설 중 아담베르그 시리즈와 함께 가장 인기가 많은 복음서 시리즈 중의 한 작품이다.


복음서 시리즈라고 하면 기독교 서적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겠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복음서의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바르가스의 추리소설은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과 함께 그 사건 속에 등장하는 독특한 인물묘사로 인기가 높다. 형사 아다스베르그 시리즈에서는 빠른 수사보다는 항상 한발 늦는 것 같은 여유로움을 가졌지만, 놀라운 직관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아담베그르 형사와 그의 주변의 독특한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다. 이번 복음서 시리즈에도 독특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전직 형사 방두슬레와 세 명의 할 일없는 역사학자인 마르크, 뤼시앵, 마티아스가 등장한다.


이 소설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세 명의 역사학자가 한 집에 살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스스로 수렁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35살의 중세전문 역사학자인 마르크는 살 집을 구하다가 다 허물어져가는 5층집을 발견한다. 그리고 역시 수렁에 빠져서 할 일 없이 지내는 선사시대 전문 역사학자인 마티아스를 초청한다. 둘로도 집세가 부족하자, 1차세계대전 전문 학자인 뤼시앵까지 초청해 세 명이 함께 살기로 한다. 시대별로 마티아스가 2층에 살고, 마르크가 3층에 살고, 루시앵이 4층에 산다. 그리고 마르크의 외삼촌이자 대부인 전직 형사인 방두슬레를 모셔와 5층에 살게 한다. 방두슬레는 이들의 이름에 착안해서 각각을 마태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으로 부른다.


 

이들은 다 허물어져 가는 집을 수리함께 함께 티격태격하며 산다. 그때 이웃의 소피아라는 여성이 와서 일을 부탁한다. 자신의 집 정원에 어느 날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심겨졌다는 것이다. 남편에게 물어봐도 시큰둥하기만 하고, 도대체 누가 그 나무를 심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무언가 감추기 위해서 나무를 심었을지도 모르니, 두둑한 보수와 함께 나무 밑을 파달라고 부탁한다. 알고보니 이 소피아라는 여성은 한때 오페라에서 이름을 날렸던 전직 오페라 가수였다. 세 명이 나무 밑을 파보았지만, 특이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그 후 얼마 있지 않아 갑자기 소피아라는 여성이 사라진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다시 나무 밑을 파보지만 역시 아무 것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후 소피아의 조카라는 알렉상드리아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와 함께 소피아의 시체가 불탄채 발견된다. 결국 경찰은 알렉상드리아를 의심하고, 알렉상드리아를 마음에 들던 마르크는 그녀를 보호하기 삼촌이 방두슬레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진범을 찾아 나선다. 과연 소피아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프레드 바르가스의 소설들은 너무나 치밀하게 짜여져 있어서 거의 책의 끝부분을 읽을 때까지 범인을 찾지 못한다. [트라이던트]와 [죽은 자의 심판]이란 두 권을 읽었지만, 모두 끝까지 범임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비교적 단순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3분의 2를 읽었을 정도에 범인을 짐작했고, 끝까지 읽고서야 내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아담베르그 시리즈보다는 더 쉽게 읽히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더 재미있기까지 하다.


특히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보다. 세 복음서저자로 불리는 역사학자들의 묘사가 너무 재미있다. 주인공 격인 마가복음으로 불리는 마르크는 다혈질적인 성격이다. 그는 쉽게 화를 내고, 급히 행동을 한다. 비록 중세관련 학자이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도 중세촌락의 상거래 연구에 메달리지만 별 결과물은 없다. 다만 역사를 연구하는 냉철한 판단력은 가지고 있다. 반면 마태음으로 불리는 마티아스는 마르크와는 정반대 성격이다. 선사시대 수렵채집 연구를 하는 그는 한겨울에도 옷을 거의 벗고 있다. 말도 거의 하지 않고, 과묵하고 느긋한 성격이다. 가장 재미있는 인물은 누가복음으로 불리는 루시앵이다. 그는 현실과 1차세계대전을 구분을 하지 못한다. 열심히 사건을 쫓다가도 갑자기 1차 세계대전의 상상 속으로 들어가는 독특한 인물이다. 이들과 함께 사는 전직 형사였던 방두슬레 역시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소설은 이 네 명의 인물과 함께, 초반에 사라지기는 하지만 매력적인 오페라 가수인 소피아와, 소피아의 친구이자 마티아스 흠모를 받는 식당 주인 쥘리에트, 그리고 소피아의 조카인 알렉상드리아 같은 매력적인 여성도 등장한다.


갑자기 나무가 등장하고, 결국 시체는 나무 밑에 뭍여 있다는 끔찍한 스토리이지만, 복음서 저자로 불리는 세 명의 주인공과 방두슬레가 펼쳐가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재미있다. 프레드 바르가스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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