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귀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뭐 원채 세상이 겉으로 하는 말이랑 속의 내용이 다르기는 했지만, 지금의 교육과정 개정과 수능과목 축소 논란은 해도해도 너무한다. 내가 지리교사라서 내 밥그릇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책 입안자들의 xxx 속이 궁금하다. 상식적으로 사회탐구 선택과목을 1과목으로 줄인다고 할때, 선택지를 지리는 세계지리와 한국지리 두 권의 책을 봐야 시험을 볼 수 있고, 경제와 한국사는 각 각 한권의 책만 보면 된다면 누가 굳이 힘들게 두 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한 후 수능 지리 과목을 선택하겠는가? 이건 상식이다. 아니면 의도적이든가...프레시안에 실린 박선미 교수의 글을 스크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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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2010.8.22  "'통섭'의 시대, 과목 칸막이만 높이는 수능 개편안" 

[기고] <경제><한국사>에만 몰릴 것…"시대흐름 역행"

최근 몇 년 사이 고3 교실에서는 아랍어가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2005년학년도 모의수능에서 제2외국어·한문 영역 아랍어 응시생은 단 1명이었으나 2009년 수능 응시생 중 42.3%가 아랍어를 선택했다. 아랍어를 가르치는 고등학교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어가 열풍인 이유는 단 한 가지, 영어나 프랑스, 독일어처럼 능통한 학생이 적어 평균점수가 낮은 탓에 점수(표준점수)를 받기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비단 아랍어 뿐만이 아니다. 제2 인기 선택과목은 일어(21.2% 선택). 덕분에 십수년을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치던 전국의 수많은 선생님들이 손때 묻은 교과서를 버리고 일본어 학원에 다니며 일본어 선생님들로 변신해야만 했다. 이처럼 수능시험 선택과목을 바꿀 때마다 교육현장은 홍역을 앓는다.

2014학년도 수능 개편안이 발표됐다. '수능 부담을 줄인다'는 취지이지만 몇몇 개편 내용은 '교과목 간의 통합적 문제 출제'라는 당초 수능 도입 취지를 훼손해 사실상 학력고사 시대로 돌아가는 내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직 사범대 교수의 문제제기를 싣는다. <편집자>

중장기대입선진화연구회(연구회)가 지난 19일에 발표한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 시안의 핵심은 복수 시행, 수준별 시험 도입, 과목 대폭 축소의 세 가지다. 연구회는 이번 개편이 학생들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대한 부담을 줄인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실제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 주는 결정적 내용은 아마도 탐구영역에서 단 한과목만 선택하도록 한 항목일 것이다. 탐구영역은 유사 분야끼리 시험과목이 통합되고 응시과목수도 한 과목으로 줄어들게 되어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 입장에서는 참으로 친절하고 감사할 만한 배려다. 그런데 사회과 교육을 전공하는 내가 볼 때 이 개편안은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번 개편안은 사회탐구영역에서 학생들의 선택을 특정 과목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현행 수능은 사회탐구 영역에 해당하는 11개 과목에서 최대 4개 과목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데 개편안에서는 11개 과목을 경제, 한국사, 지리(한국지리ㆍ세계지리), 일반사회(법과 정치·사회문화), 세계사(세계사·동아시아사), 윤리(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등 6개 과목으로 통합한 후 그 중 한 과목만을 선택ㆍ응시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6개 과목의 구성을 살펴보면 「경제」와 「한국사」를 선택할 경우 학생들은 한 과목만 공부하면 되지만 지리를 선택한 경우 「한국지리」, 「세계지리」를, 일반사회를 선택한 경우 「법과 정치」,「사회ㆍ문화」를, 세계사를 선택할 경우 「세계사」, 「동아시아사」를, 윤리를 선택할 경우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등 모두 두 과목씩을 공부해야 한다.

누가 한 과목만 공부해도 되는 「경제」와 「한국사」를 놔두고 두 과목씩 공부해야 하는 과목을 선택할까? 공부 부담이 다른 과목의 절반에 불과한 「경제」와 「한국사」과목을 다른 과목과 동등하게 배치함으로써 연구회는 학생들의 선택을 특정 과목으로 유도하고 학교에서 배울 내용을 임의로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회 구성원들이 아무리 자유시장경제와 민족주의를 선호한다고 해도 원칙도 토론도 합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특정 과목에 가중치를 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교육은 최소한 그런 방식으로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을 유도하거나 결정해서는 안 된다.

둘째, 유사 과목끼리의 통합을 전제로 한 과목을 선택하도록 한 점도 문제다. 학생들은 사실상 한 영역으로 제시된 두 과목만을 공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학생이 지리영역을 선택했다면 「한국지리」와 「세계지리」를 공부해야지, 「세계지리」와 「세계사」를 선택할 수는 없다. 화학영역을 선택한 학생은 「화학(Ⅰ)」, 「화학(Ⅱ)」을 공부해야지 「화학(Ⅰ)」, 「물리(Ⅰ)」를 선택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자들은 단일화 된 지식의 관점으로 구성된 학문이 학생들의 사고를 제한하고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경험을 분리시키며 따라서 학습과 경험을 단절시킨다고 비판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연구회 안은 영역 간 의 넘나듦 자체를 차단함으로써 스스로 비판해 왔던 학습과 경험의 단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지난 20일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저자이자 하버드 대학의 교수인 마이클 샌델의 강의가 있었다. 그의 책은 지난 5월 출간 이후 한국에서 33만부 이상이 팔렸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였는데, 벤담, 존 스튜어트 밀, 롤즈,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난해한 논리를 쉬운 사례를 통하여 명쾌하게 다루면서 정치학, 철학, 경제학, 사회학, 지리학의 경계를 쉼 없이 넘나들고 있다. 우리는 '역시 하버드대학의 교수는 다르다'고 말한다. 몇 년 전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 출간된 이래 통섭이라는 용어는 우리 사회를 강타한 일종의 신드롬이 되었다. 우리가 샌델과 윌슨 같은 교수를 원한다면 여러 학문의 넘나듦을 경험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번 개편안을 보면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커녕 인문사회과학 내에서도 영역 간 칸막이를 더욱 높이고 촘촘히 하여 서로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하지 못하도록 차단시켜 놓았다.

나는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이는 것에는 백번 찬성한다. 하지만 학문 영역 간에 칸막이를 쳐서는 안된다. 연구회는 영역별로 한 과목을 선택하도록 한다는 주장을 통해 한 과목이 갖는 수치적 매력을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시간 축과 공간 축으로 인간과 사회를 보다 종합적으로 탐구하도록 하는 사회탐구 영역의 교육적 목적과 치환될 만큼의 가치를 지는 것은 아니다. 연구회가 주장하는 한 과목은 솔직히 두 과목이다(물론 경제와 한국사의 경우는 제외하고). 따라서 영역 간 경계 지움을 없애고 두 과목을 선택하도록 하면 현재 연구회에서 내놓은 안과 비교해도 학습 부담이 증가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의 과목선택권은 더 확대될 수 있다. 즉 사회탐구영역의 경우 경제, 한국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법과 정치, 사회문화, 세계사, 동아시아사,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 중에서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과목 두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다. 학생의 선택권을 보장한다면서 한국지리와 세계지리만을 선택하도록 강제할 것이 아니라 세계지리와 세계사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는가?
 
/박선미 인하대학교 사회교육과 부교수

ps : 논리적이고 정리가 잘된 글이다.(나도 언제 이런 글을 쓸 수 있으려나) 올 10월 즈음에 논란에 결정이 난다고 하는데, 부디 기도한다. 글 중간에 박선미 교수가 언급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이란 책은 나도 최근에 최재천 교수의 책들을 검색하다 알게 된 책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미국 하버드대의 교수를 지냈으며, 세계적인 개미 연구의 대가라고 한다. 퓰리처 상도 두번이나 받았다. 책소개는 이렇다. "책의 원제는 <Consilience>. "서로 다른 현상들로부터 도출되는 귀납들이 서로 일치하거나 정연한 일관성을 보이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옮긴이는 이를 '큰 줄기'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 <통섭>으로 옮겨 제목을 달았다. 제목이 단적으로 드러내듯 책은 '인간 인식/지식의 대통합'에 대해 논한다.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지식들을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이 주요 주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이지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며, 이해란 본래 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지식의 자유로운 소통을 막는, 분과 학문들 간의 벽을 넘어, 다른 학문에 대한 무지로 인한 오해, 한 용어를 다른 학문의 용어로 옮기는데 있어 비롯되는 혼란 없이 전체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얼핏 어려울 듯한 내용을 여러 학문들을 넘나들며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을 보면 그게 바로 지은이가 말하는 '통섭'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은 세계 이해를 인간 이해를 위해 필요한 학문간 '통섭'을 막고 오히려 시대흐름에 역행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오동진씨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화 평론가가 되기 위해 영화 책 100권을 읽는 사람은 바보이다. 영화에 대한 전문가가 되려면 영화 책 30권, 사회과학 책 20권, 철학 책 20권, 문학 책 20권, 과학 책 10권을 읽어야 정말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이 말에 100% 찬성한다. 내 자신도 지리 전문가가 되기 위한 독서 습관, 노력은 지리 책만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리 관력 서적보다는 철학, 사회과학, 소설, 시, 인문서적을 더 많이 읽는 편이다. 그럼으로 해서 지리에 관한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교육현실은 절망적이다. 아이들에게 '통섭'과 '이해'를 위한 교육이 아닌 '시대역행'적 교육을 하려 하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까?   

소주나 한잔 먹어야 겠다.  

마저 에드워드 윌슨의 책들을 스크랩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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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들이 나에게는 어렵고 불편하다. 나 또한 원론적으로 미혼모도 임신의 이유로 학습권을 침해 받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반대급부도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현실적으로 학교입장에서는) 중고등학생들의 임신을 개인의 행실의 문제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왜곡된 성문화에 기인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구조적으로 미혼모에 대한 학습권이 침해되지 않으면서 나머지 학생, 학교와 어울릴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것이 전무한 상황에서 다분히 원론적인 차원에서 미혼모의 학습권을 강조하며 '학교에서 거둬야'한다는 것은 왠지 공허한 주장으로 들린다. 학교란 기존의 이데올리기를 옹호하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보수적인, 태생적으로 그러한 곳이다. 그리고 학교란 곳에 '교육적'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며 애기하면 안되는게 없는 곳이 또한 대한민국의 학교다. 그러면서도 온갖 '비교육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 또한 학교이기도 하다.  

미국과 캐나다는 미혼모도 떳떳히 학교를 다니고 아이도 데리고 온다고 한다. 근데 생각해보면 그럴 수 있는 큰 이유중의 하나는 그 나라들의 개방된 성생활과 태도, 제도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제도는 배워와야 할 지언정, 아직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성생활과 성적 자세까지 배워오자고 하지는 않을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는 하는데 왜 우리는 왜 없냐'식의 처방 및 근거는 자칫 공허해질 수 있을 것이다. 좀 엇나가는 애기겠지만, 대한민국 학문, 사회과학의 문제가 어찌보면 외국의 그것들을 단순히 차용한데서 온게 아닌가 한다. 뭐 많은 학자들이 이미 한 애기기는 하지만. 정말 그런거 같다. 그렇다 보니, '거기는 하는데 왜 우리는 왜 없냐'식의 말들이 범람하는 듯 하다. 나부터 반성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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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2010.8.5  미혼모 학교가 거둬야 한다.

학생 미혼모들의 대다수가 배울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교육과학기술부의 의뢰로 전국 미혼모 시설에 수용된 학생들을 조사한 정책연구팀은 조사 대상의 85%가 학업 중단 상태라고 그제 밝혔다. 14~18살 정도밖에 안 되는 학생들이 출산을 이유로 아예 배울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배움의 의지마저 상실한 것은 아니다. 60%에 가까운 응답자가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며 계속 공부할 방안을 마련해주기를 희망했다.  

이들이 학업을 중단한 데는 육아나 경제적 어려움 등의 이유가 클 것이다. 하지만 다니던 학교에서 학교 명예를 해친다거나 주변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자퇴나 전학을 요구해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에는 한 여학생이 이런 학교를 상대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해 미혼모의 학습권을 보장하라는 권고를 받아냈으나 현장에서 실질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우리 헌법과 교육기본법은 누구나 신체적 조건 등을 이유로 교육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임신을 이유로 자퇴를 종용하는 것은 학습권 침해라고 인권위는 판단했다.

굳이 인권위의 판단이 아니더라도 학교가 아이들을 학교 밖으로 내모는 것은 비교육적이다. 청소년의 임신을 당사자의 품행 문제로만 인식해선 안 되며 왜곡된 성문화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문제로 파악해야 한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폭력이 심각하다. 실제로 학생 미혼모 가운데는 성폭력을 당한 경우가 꽤 있다.

정부는 대안위탁교육기관으로 지정된 미혼모자 시설 입소 기간을 재학기간에 포함시키는 방안이나 미혼모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안교육기관 설립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는 임시방편은 될지 몰라도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다. 미혼모만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는 낙인 효과가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임신을 이유로 전학이나 자퇴를 강요하지 못하게 하고 원하면 기존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 많은 나라에선 미혼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등교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10대에 미혼모가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학교나 가정에서 남녀 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성교육을 철저히 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퇴폐적인 성문화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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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도 흉흉하다보니 교직사회에 대한 긍정적 글들을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뭐 그렇다고 다 이해하고 좋게 봐달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 교사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하지만 밤에 오늘 신문(어찌하다 보니 항상 밤에 오늘 신문을 보게된다)을 보니 한겨레신문 권태선 논설위원의 글이 마음을 짜안하게 적신다. 힘을 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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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2010.8.2 ‘더 큰 엄마’ 선생님 힘내세

지난 주말 공주 갑사골에는 다른 이들을 돌보느라 고단했던 여성들이 돌봄의 대상이 돼 고단함을 달래고 기쁨을 누려보는 프로그램이 열렸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되는 날 아침,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프로그램을 주선한 쪽의 일원으로 갑사골로 향하면서 이런 폭우 속에 사람들이 과연 모일까 걱정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걱정은 기우로 판명됐습니다. 참가 신청자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빠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최쪽으로선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만큼 우리 여성들의 고단한 삶의 무게가 느껴져 가슴이 짠해 왔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26명의 참가자는 3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나이만큼이나 다양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은 정말 열심히 살았고, 그러느라 조금씩은 지쳐 재충전이 필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선생님들이 유난히 많다는 점이었습니다. 방학이 시작되는 시점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우리 선생님들의 삶이 고단하다는 방증이기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들로부터 교사로서의 삶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가 이어졌습니다. 10년차 초등학교 교사인 한 선생님은 ‘축제’였던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숙제’가 돼버렸다고 한탄했습니다. 초임교사 시절 환한 웃음으로 ‘방글이’로 불렸던 그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답니다. 다른 선생님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작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치지 못하고 아이들을 시험기계로 만드는 일에 동원되고 있다는 자괴감”을 호소했습니다.

그렇다면 축제였던 교사생활이 삶을 짓누르는 숙제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 교육 현실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선생님들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 탓이라고 손쉽게 말하진 못하겠지요. 지금 교사들은 사방의 적들에 둘러싸인 형국입니다. 그들은 사교육 집단에 비해서 무능하면서도, 교원평가 등 이른바 개혁정책에 대해서는 반대를 일삼는 고루한 집단이란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아이들과 학부모들은 교사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학교 당국은 학생 성적이 교육의 알파와 오메가인 양 선생님들을 몰아칩니다. 그렇다고 교사 상호간의 소통이 잘되는 것도 아니어서 고립된 섬이 된 선생님들은 혼자 발버둥치다가 지쳐가거나, 현실에 눈감은 채 이른바 ‘웰빙교사’로 자족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이런 사정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더욱 악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제고사를 비롯해 온갖 경쟁기제를 동원해 몰아치다 보니 학교는 갈수록 살벌한 전장으로 변해가고 그 속에서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병은 깊어만 갑니다. 20년 경력의 윤리 선생님은 주변에서 학교를 그만두거나 그만둘까 고민하는 선생님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램에 참가한 선생님들은 현실에 대한 한탄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지 않았습니다. 40대 중반의 한 교사는 “이 땅에서 살아왔고 살아가는, 나만큼 아팠을, 나만큼 허덕이면서 살아왔을 내 곁의 여성들로부터 내 상처의 더께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프로그램 후기에서 명상과 수다와 산책 따위로 이뤄진 이 소박한 프로그램에는 참가자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온 맘으로 귀기울이고 깊은 공감의 포옹을 할 수 있게 하는 돌봄 이상의 섬김이 있었다며 거기서 충전한 힘으로 ‘더 큰 엄마가 되려는 꿈을 안고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고 밝혔습니다.

바로 이런 선생님들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 한국 교육에 절망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현실이 고통스러워도 공감과 연대만 있으면 선생님들은 내 아이를 넘어 이 땅의 상처받고 고통받는 아이들의 ‘더 큰 엄마’가 될 태세가 돼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선생님들이 우리 아이들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키워내는 ‘더 큰 엄마’가 될 수 있도록 응원의 손길을 내밀 때입니다. ‘더 큰 엄마, 선생님’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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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헤르_문명의 교차로 

p.72-78 

p.72 탕헤르의 도로표지판에는 아랍어와 프랑스어가 위아래로 적혀있었다. 이 도싱서 프랑스어가 두루 쓰인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랬다. 선착장에 늘어서서 호객 행위를 하는 자칭 '공식' 가이드들은 프랑스어로 말을 건네왔다. 

p.75 이 지역을 유럽인들은 흔히 마그레브(또는 마그리브)라 부른다.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같은 나라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진짜' 아프리카가 아니라 마그레브에 발을 들어놓은 것 뿐이다. 그러나 고대 유럽인들이 아시아라고 부른 지역이 지금의 서남아시아였듯, 그들이 아프리카라고 부른 지역도 지금의 북아프리카, 곧 마그레브였다. 마그레브는 아랍어로 '해가 지는 땅' 곧 서쪽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그 동서를 나누는 기준은 나일강이다. 나일강 서쪽, 사하라 이북을 마그레브라 부르는 것이다. 반면에 그 동쪽 지역은 마슈리크(또는 마슈레크)라 부른다. '해 뜨는 땅' 곧 동쪽이라는 뜻이다.  

p.76 탕헤르는 19세기 국제 스파이들이 암약하는 도시로도 이름을 얻었다. 영국인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주인고으로 한 007시리즈의 몇몇 영화가 탕헤르를 부분적으로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의 예로는, 멧데이먼이 주연한 <본 얼티메이텀>이 탕헤르 시가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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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의 체벌 전면 금지와 관련되어 말들이 많다. 교육적인 문제에 또다시 좌와 우가 나오고 이데올로기적인 공격들을 해대고 있다. 한심하다. 내 하는 일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보니, 참 쓸쓸하다. 솔직히 난 체벌 반대도 찬성도 아니다. 애매모호하지만 애매모호하지 않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원론적인 의견(체벌을 하지 않고 교육을 하지 못한다고 하는 교사들은 사표를 내야한다는 의견), 체벌이 필요하다는 현실적 의견(체벌이 없으면 아이들을 통제할 수 없고 요즘 아이들 말을 듣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교실당 20명 정도의 아이들과 수업을 한다면 체벌 없이도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할 수 있지만 40명이나 되는 교실에서 솔직히 난 원론적인 교육적 방법과 마음만 가지고 수업을 진행할 수 없다. 솔직히 그렇다)도 다 동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이견과 충돌은 필요하다고 본다. 언젠가는 실현돼야 할 일이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야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정규교육과정 초중고 12년동안 학교에서의 체벌로 인한 아주 좋지 않은 기억(추억ㅋ)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도 초등학교 2학년인가 담임(내 기억으로는 4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다)선생님에에 아침 운동장 조회시간에 떠든다고 구둣발로 쪼인트(ㅋ) 까인 기억이 아직도 선선하다. 그때 어찌나 아팠던지. 물론 내가 초,중학교까지는 좀 많이 까불긴 했다. 하여튼 잊혀지지 않는다. 나하고 비슷한 기억을 가진 이들 많을 것이다. ㅋㅋ 

하지만 내가 학교에 와서 교사란 직업을 가지고 길지 않은 6년 동안 학교에 있어본 현재 나름의 생각은 체벌뿐만 아닌 대한민국 학교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체벌 금지로도 논술교육 강화로도 허울좋은 공교육 정상화로도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난 사람들이 조금더 고민하고 어떻게 보면 중립적인 생각과 균형적인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최대한 그런 자세는 버릴려고 한다. 학교에서도 주위에서 동료 교사분들이 체벌 금지에 대한 성토아닌 성토를 날릴때 난 대꾸하지 않는다. 왜 대꾸할 정도의 대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체벌 금지에 대해 "그럼 니네가 와서 수업해봐", "체벌 금지되면 교사의 교권은 어떻게"라는 식의 말에 난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감 한명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이 올바른 생각과 균형적인 감각을 가졌다고 기대는 해볼란다. 기대는...뭐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기사를 몇개 스크랩해본다.(개인적으로 김규항씨의 글을 좋아하는 편이다. 근데 이 글은 불편한 글이다. 뭐 틀린 내용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틀린 글이 또 많을 수도 있는 글이다. 두번째 서울신문의 칼럼도 김규항씨의 글과 비슷한 맥락의 글이다. ㅋㅋ 세번째 매일경제의 글이 중립적이면서 현실적인 글 같다. 마지막 네번째 글은 나 개인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글이다)

  

경향신문 2010.7.26  김규항 시론  체벌이라는 야만

사회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고 그 의견들이 오가다보면 가끔은 사회적 논란이 일기도 한다. 민주주의란 그런 소란스러움을 기꺼이 함께 겪는 사회원리다. 그러나 그런 논란이 있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경우도 있다. 근래 서울시 교육청의 체벌 금지 조처로 인한 논란이 바로 그런 경우다. 지구상에서 나라꼴을 갖춘 사회에선 이미 다 금지하고, 나라 안에서도 군대나 교도소에서조차 엄격히 금지하는 체벌을, 학교에서 그것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허용하는 야만을, 이제라도 끝내자는 이야기가 어떻게 논란거리일 수 있는가.

이런저런 궤변들을 늘어놓지만 체벌금지에 반발하는 사람들의 진짜 이유는 하나다. 체벌을 통해 아이들을 지도하던 교사가 체벌 없이 지도하려면 불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부당한 불편함’이 아니라 ‘교사의 임무’다. 교사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지도할 임무가 있다. (---'교사의 임무'를 방기하겠다는 애기는 그 누구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학교 현실의 문제, 학생수, 잡무, 적합한 처우 등 왜 '임무'는 그렇게 쉽게 애기하면서 '현실'은 '합당한 처우'는 왜 애기하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까지 꽤 많은 교사들이 그 임무를 방기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해 온 것이다. 봉급을 주는 국민들 앞에 엎드려 사과하고 반성할 일이다.

“교사의 교육 포기라든지 교수권 침해, 여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가 우려된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 대변인의 말이다. 성찰하지 않는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짓도 자꾸 하면 익숙해지고, 심지어 그걸 못하는 걸 정당한 권리를 빼앗기는 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교총 대변인의 말은 체벌을 찬성하는 사람들이 그런 상태에 있음을 ‘생태 다큐’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말은 상식의 이름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는 교육도 교수권도 수행할 수 없는 교사는 교사직을 포기해야 한다.’

체벌 금지가 ‘진보 교육감’을 위시한 빨갱이들의 도발이라며 보수·진보의 문제로 몰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런 ‘망막에 빨간 매직을 칠한 지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만 물어보자. ‘당신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는 폭력으로 해결한다는 명제가 들어 있는가?’ 체벌 금지는 애당초 보수·진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자유민주주의 원리에 반하는 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이다.

우리 사회는 엊그제만 해도 가정과 군대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부끄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야만이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고 금지되는 과정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마땅치 않아 했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지금 ‘여자는 사흘에 한번은 패야 해!’라든가 ‘군대는 빠따를 쳐야 돌아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 순간 체벌 금지에 대해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도 머지않아 지금 제 모습이 기억될까 노심초사하게 될 것이다. 야만은 ‘인간의 사회’에서 늘 그렇게 하나씩 사라져가는 법이니.

덧붙이는 말: 체벌 금지는 오늘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이나 인권의식에 비추어 이상하리만치 늦게 제기되었고, 이상하리만치 손쉬운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것은 체벌이 그것을 대놓고 찬성하는 사람들 외에 어떤 광범위한 암묵적 지지를 가진다는 걸 뜻한다. 지지의 정체는 바로 아이들의 성적, 즉 시장에서 경쟁력을 둘러싼 부모들의 욕망이다. 체벌을 반대하는 사람이 교사가 ‘좀 강하게’ 지도하는 게 아이의 성적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체벌이라는 야만은 그런 욕망에 힘입어 존속되고 있다.
 


서울신문 2010.7.30 [데스크 시각] 체벌의 변증법

당신은 학교 체벌과 관련해 어떤 기억을 갖고 있습니까? 그 기억 속의 체벌이 자신의 과실에 대한 징계였든, 아니면 단체 규율 차원이었든 다 좋습니다. 그 체벌은 당신에게 아름다움입니까, 아니면 모욕스럽거나 혐오스럽도록 잔혹하고 일방적인 그 무엇입니까.  

효율만 따지자면 체벌은 여전히 효과적인 리더십의 비밀병기일 수 있습니다. 또 학교라는 갇힌 공간에서 작위적으로 권위를 급조해 내는 요술방망이일 수도 있지요. 여러분이 체험했던 군대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까요. 사실, 절차적 정당성을 무시하거나, 현실 너머의 이상에 눈길을 주지 못하는, 그래서 하찮은 절차적 문제 때문에 효율성을 포기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체벌은 여전히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전가의 보도’입니다. 단시간에, 군더더기 없이 지시나 명령을 수행하게 하는 마력, 그런 가학의 관습이 만든 무한한 권능의 단맛은 마약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는 대부분 이런 폭력과 체벌을 체화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학교에서는 체벌로 집체적응력을 키웠고, 사회에서는 음험한 폭력의 위협 때문에 일사불란한 복종과 순응의 미덕을 자기 내면에 이식해야 했습니다. 그런 기성세대에서 체벌옹호론이 불거집니다. ‘교권의 위기’라는 그럴 듯한 수사로 포장된 체벌옹호론은 본질적으로 목표에 집착하는 성과주의의 부산물이자 본질을 배제한 효율지상주의적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런 정체된 가치로는 세상의 변화에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정체되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재교육이 강화되야 할 것이고 변화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실도 콩나물 교실이 아닌 학급당 정적 학생수와 법정 교사수를 확보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이런 말 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은 안하는지....)

이런 논란에 대해 변증법은 아주 간명한 이해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변증법적 진보의 핵심 개념인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상이나 가치는 결국 모순을 노정하게 되고, 이 모순에 대한 반동이 새로운 진보의 촉매가 됩니다. 이를 변증법론자들은 ‘정·반·합’으로 정리합니다. 그런 점에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의 전격적인 체벌금지 선언은 일부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변증법적 진보의 과정인 셈이지요. 

지금도 전국의 각급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습관화된 폭력’에 노출돼 있으며, 그들이 학교라는 닫힌 공간에서 구호나 변론의 여지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체벌은 ‘아주 오래, 그리고 공공연히 지속돼 온 응급상황’이며, 이런 사실을 인정한다면 절차적 문제는 오히려 하찮습니다. 때리면 얼마나 때리겠느냐고 말하는 건 무책임하고 방종한 상황인식입니다. 국내 중·고교생의 70%가 교사 체벌을 경험했으며, 이 중에 매주 3회 이상 체벌을 받는 학생도 7.4%나 된답니다. 스웨덴의 중·고교생 98.6%가 체벌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과 견줘보면 참혹하고 부끄럽습니다.

혹자들은 체벌 금지가 교사의 교육권을 위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체벌을 통한 통솔이 오히려 교육의 가치를 전복시키는 문제를 갖습니다. 교육권의 훼손이 비본질적이라면 교육의 가치 훼손은 본질의 문제입니다. 교육의 가치는 지식의 습득이나 군대식 규율 주입이 아니라 인간의 완성에 있습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이 사회에 기여하게 하고, 윤택한 삶을 꾸리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체벌 옹호론자들은 체벌을 통해 완성하는 집체화가 바로 사회생활의 기본이고, 우수한 시민의 조건이라고 우깁니다.

프랑스에서 이런 인지행동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 마리의 개에게는 체벌 없이 음식을 제공했고, 다른 개에게는 매질을 한 뒤 음식을 먹도록 했습니다. 4주 후 매를 맞지 않은 개는 매우 창의적으로 감춰진 음식을 찾아내는 반면 매에 길들여진 개는 음식을 찾아내지 못할 뿐 아니라 음식을 앞에 두고도 먹기를 망설였으며, 누군가 매질을 하자 그제야 편하게 음식을 먹더랍니다.

자, 다시 묻습니다. 당신의 자녀가 매질에 길들여진 타율의 객체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모든 체벌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의 주체로 자라기를 바라십니까. 

 
  

매일경제 2010.7.26 [데스크 칼럼] 체벌금지보다 교실정상화가 더 급하다 
 
"체벌은 비인간적 금지에 공감하지만 궤도 이탈한 교사, 통제 안되는 학생에 대한 대책이 우선돼야"

학생들이 대들었다.
"선생님! 새 교육감이 금지한다는데 왜 체벌하세요!"
선생님도 만만찮다.
"2학기부터 못하니까 미리 (체벌)한다. 이놈들아."

최근 한 중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에 오간 대화다. 신임 서울시교육감의 체벌금지 방침이 전해진 이후 교육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체벌은 비인간적이다. 그런데 체벌금지를 일률적으로 시행한다고 상정해 보니 상황이 복잡해진다. 교사들은 90% 이상이 반대한다고 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 학부모들은 헷갈린다.

최근 공개수업에 다녀온 한 학부모는 체벌금지가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 회의하게 됐다고 한다.

학부모들이 참관하는 공개수업에서 아이들 몇 명이 수업 중에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나 다른 학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게임을 하더니 마침내 벌칙까지 주고받는다. 선생님은 이 `문제아`들을 교실 뒤에 가서 서 있으라고 했다. 정상적인 아이들이라면 창피해서 고개를 못들 만한 벌칙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물론이고 수업을 참관하는 학부모도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 이 애기는 난 직접 들었다. 몇몇 부모님들이 그리고 수업하는 교사분들이 애기하더라 도리어 내가 창피하다고. 어쩜 그렇게 뻔뻔한지, 창피해할 줄 알고 뒤에 가서 서있으라고 했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뒤에 가서도 떠들더라고...)

이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학급에서 체벌금지는 옳은가, 옳지 않은가, 헷갈린다.

입장을 바꿔서 학생이나 학부모의 눈으로 보면 극히 일부의 교사에게 해당되지만, 교사 쪽에도 문제가 많다. 과도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이유로 체벌에 나서는 교사에 관한 뉴스가 줄지어 나오고 있다. 체벌금지론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최근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가 된 `오장풍` 선생 동영상은 체벌의 비인간성을 보여준다. 학생의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등 뒷골목에서나 일어날 일이 신성한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실 어떤 집단이건 구성원은 정규분포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우수한 사람으로 구성된 집단이라도 모든 점에서 우수한 소수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소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된 또 다른 소수가 있다. (--- 난 이렇기 때문에 제3자적 입장에서 쉽게 말을 하는 또는 요즘 젊은 교사들이 애기하는 교원평가제 찬성입장에 대해선 상당히 회의적이다.)
교사들 가운데서도 교직생활을 하면서 임용 때의 초심을 잃은 교사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은 사생활에 기인하건, 성격적 결함 때문이건 간에 적어도 그 시기에서만큼은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교단에 오를 자격을 잃은 사람들이다. 극히 일부 교사에 해당되지만 이들을 사전에 걸러내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하는 시스템은 그래서 중요하다. 체벌을 받는 학생들은 정확하게 체감한다. 애정을 갖고 훈육 목적으로 때리는지, 자기 감정을 발산하고 있는지 말이다.

교실에서 암암리에 문제를 일으키다가 결국 사회문제가 된 다음에야 걸러지는 시스템 아래서 시달려야 하는 불쌍한 아이들을 생각하면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상태에서 일탈한 교사들을 교육현장에서 사전에 떼어내 자질을 재정립하게 만드는 제도 마련은 시급하다.

마찬가지로 교권에 도전하고 교실의 질서를 파괴하는 학생들을 제대로 훈육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교실에서 배제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도 나와야 한다.

지난달 수원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서는 평소 행실이 불량하다며 꾸짖던 담임교사가 학생들이 보고 있는 자리에서 해당 여학생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 학생은 선생님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까지 때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비정상적인 아이들을 바로잡을 시스템을 갖추지 않은 채 체벌금지를 일률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이상의 불빛에 눈이 부셔 현실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꼴이다.

체벌금지에 관한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교실 정상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페스탈로치도 매를 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받은 모욕적 체벌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내가 고려대 김정환 교수(현재 정년퇴임)의 ‘전인교육론’이라는 강의를 듣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그 분의 ‘체벌 교육론’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많은 교육학자들의 체벌 찬반론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음미해 보아야할 사람으로 페스탈로찌가 있다. 사랑의 교사로 알려져 있는 페스탈로찌는 매를 들지 못하는 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을 가꾸는 어버이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교사라고 했다. 체벌이 좋은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는 ①학생이 교사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을 때 ②학생이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응분의 벌을 받음으로써 마음의 짐을 벗을 수 있는 경우 ③아이를 고무해 주는 경우이다. 페스탈로찌의 체벌론은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으로 어버이는 매를 들 수 있으며 어버이를 대신하는 교사도 매를 들 수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논리의 확인이다. 체벌은 경우에 따라 매우 교육적인데, 문제는 어떤 방법과 종류의 체벌을 가하느냐에 있다. 체벌은 어떤 경우에나 충동적인 감정이나 보복적인 인상을 풍겨서는 안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①그 방법과 종류를 사전에 정하여 알리고 ②체벌을 공개적, 이성적으로 집행하고 ③그 사실을 학부모나 교장에게 알리는 방식이다.  

정의를 가르치는 매와 아이를 감싸는 자애는 교육이라는 수레의 두 바퀴다. 정의와 자애가 동시에 발동되어야만 교육이 산다는 귀한 진리를 체벌론의 결론으로 삼고 싶다.
이 강의 내용처럼 체벌은 극약과 같으니, 학생의 인격을 파괴하는 독약이 아니라 영혼을 각성케 하는 귀한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도록 각별히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욱경/경기도 광주종합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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