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리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사랑하기 때문에 푹푹 눈이 내린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구절 때문에 나는 백석의 이 시를 좋아한다. 분명히 문장구조의 인과관계를 무시하는 충돌이거나 모순이다. 연애의 달인답다. 여기에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해서 이 우주에 눈이 내린다니! 그리하여 나는 가난하고, 너는 아름답다는 단순한 형용조차 찬란해진다.

 

 

 

 

 

 

 

 

 

 

 

 

 

 

 

 

백석의 밤에도 눈이 푹푹 날리고, 강원도의 밤에도 눈이 오지게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밤에, 백석은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자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만 눈으로 덮인 도시에 갇혔다. 응앙응앙 우는 흰 당나귀 소리 대신 쓸어도 쌓이는 하얀 쓰레기 때문에 짜증나 미칠 것 같은 군인들의 비명 소리가 들린다.

 

학창시절, 백석의 시는 그가 늘 동경하고, 때로는 모방한 러시아 시인들보다 무게가 없고 감상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날 때 읽을수록 이 어린아이 같은 시인에게 뭔가 애틋한 것이 있음을 느낀다. 그건 세월이 지날수록 백석의 밤에서 멀어지기 때문일까.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雪夜)」 -

 

 

 

예전엔 눈이 오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어린애처럼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아무리 큰 고통도 하얀 눈이 어루만져 줄 것 같아서 눈 오는 날은 마음도 따뜻했다. 그래서 저런 시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좀 야한 은유. 지금도 이 구절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잠이 밀려올 정도로 지루한 국어시간에 이 시의 문제(?) 구절만 소리 내서 읽으면 모든 남학생들을 웃게 만드는 웃음 폭탄이 되기도 했다. 국어 선생님은 이상한 생각하지 말라고 핀잔을 줬지만, 아마도 김광균 시인은 이 구절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 킥킥거렸을 것이다.

 

 

 

 

 

 

 

 

 

 

「설야」는 화자가 왜 슬퍼하는지에 대한 뚜렷한 원인이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화자 즉 시인이 그리워하는 대상이 어떤 여인이라는 점만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이 시에서는 과거의 여인에 대한 막연한 애상만이 감돌뿐이다.

 

이젠 저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게 쌓인 눈 위에 슬픔이 서린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싸늘한 추회가 왜 시인을 애타게 했는지 알 것 같다. 먼 곳에 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만 늘 시인의 귀에 남는다. 두근거리며 한 사람으로 향한 소리의 길, 풀어 벗는다. 홀로 부끄러움 없이 뜨거워진 몸을 열어 흘러내리는 비단자락. 소리를 감추는 소리의 소리. 뉘우칠수록 사무쳐 소리를 묻는 소리. 길을 묻는 길. 기별도 가지 않는 먼 곳 지우는 소리. 다만 지우는 소리였을 뿐, 옷 벗는 그 여자 없었다. 아련하지만 이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누군가는 눈 소식이 썩 반갑지 않을 것이다. 눈이 푹푹 나리는 백석의 밤이 아니라 눈보라가 내리치는 백색의 계엄령일 것이다. 눈은 눈이 올 때면 심장이 콱 옥죄이는 것은 모두 그때 그 기억 탓이다. '대설주의보'가 문득 몸서리 쳐지도록 아프고 두려운 것은 그 때문이리라. 그것은 단순히 기억에서 온 게 아니라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에서 낮게 읊조린 곡조와 함께 돌출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온다 꺼칠한 굴뚝새가

서둘러 뒷간에 몸을 감춘다.

그 어디에 부리부리한 솔개라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일까,

 

길 잃고 굶주리는 산짐승들 있을 듯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 최승호 「대설주의보」 -

 

 

 

그러니까, 저 오래되고 유구한 기억 속에는 '백색의 계엄령'에 대한 공포가 깊게 새겨져 있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 터이다. 대설주의보가 걱정스러운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래서 짧게 흩날리는 눈을 보며 담배를 피울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를 하라고 했던 구절이 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것도 우연일 수 없다.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 놓고 마음 놓고

기침을 하자.

 

 

- 김수영 「눈」중에서 -

 

 

‘두메마을 길 끊어 놓을’, 그러니까 아픔과 아픔이 만날 수 없도록 만드는, ‘눈 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해도 무관심한 사회적 풍경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드는 저 ‘백색의 계엄령’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를 하는 것이라도 필요한 계절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엄혹한 한기는 마치 진짜 계엄령이라도 선포된 듯, 어쩌면 삶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는’ 황홀경에 매혹되지만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과 같은 자본은 한 개인의 무릎을 닳게 만들 터이다.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고립되는 삶.

 

그러므로 '대설주의보'가 기후에 따른 경고발령이거나 1980년대 군부독재가 발령한 국민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계엄령일 수만은 없다. 그것은 우리 눈앞에, 발밑에, 바로 옆에 있는 존재나 자연과 손을 맞잡지 않는 데에 대한 처절한 내적 울림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형도가 지적했듯, ‘가누기 힘들어 제 목을 스스로 부러뜨리는 법’을 배우는 시절이니 말이다. 모두, 살아남으시라. 암울한 백색의 계엄령이 아닌 마음을 밝게 만드는 백석의 밤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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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2-10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산에도 눈이 내려요.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쌓인 눈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는 울산, 눈이 오면 사람들이 한꺼번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은 울산이기에 아아아.. 잠이 오질 않네요.

cyrus 2014-02-10 23:2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포핀스님. 잘 지내시죠? ^^ 올해는 대구가 눈구름이 피하는 곳인가봐요. 부산에도 눈이 왔다던데.. 이 곳은 조금 눈이 내리긴했는데 눈이라기보다는 금방 녹아서 비처럼 내렸어요. 그래도 눈 엄청 쌓여서 밖에 돌아다니지 못하면 정말 답답하게 느껴질거에요. 눈길 잘못 걷다가 넘어지면 다칠 수도 있고요...
 

 

 

 Scene #1   불운했지만, 유쾌했던 르네상스인

 

 

 

 

 

 

 

 

 

 

 

 

 

 

 

 

정치판을 둘러싼 음모와 야욕, 배신 따위를 말할 때 우리는 곧잘 마키아벨리를 들먹이곤 한다. 마치 ‘권모술수의 화신’ 이라도 되는 양 그는 주로 이렇게 비쳐져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국가 일개 서기관에 불과했던 그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남긴 그림자는 너무나 크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를 보는 것이 곧 르네상스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피렌체에서 평생을 보냈던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시기는 르네상스를 둘러싼 전후시기였다. 그만큼 역동적인 시대를 살다간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때였기에 그에 맞는 정치사상이 태어날 수 있었다. 도시국가 중심의 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출현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반도를 넘보는 프랑스, 에스파냐와 같은 외부세력간의 힘겨루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간의 갈등,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등 당시의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만약에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군주론』과 같은 작품은 아마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관직 생활을 너무나 즐겁게 수행했다. 『군주론』은 복직을 위해 피렌체의 명문가였던 메디치가에 바친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키아벨리는 일개 서기관 보다는 정치사상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인지도 모른다.

 

시오노 나나미를 통해 바라본 마키아벨리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음흉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엉뚱했고 불운했지만 늘 유쾌한 남자였다.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에게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너무 시대를 앞서갔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본 사람이었다. 서기관 이라는 자리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은 대단히 막강한 자리였다. 자리의 위치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하는 일은 매우 많아서 모든 정보는 자연히 그에게로 집중되는 자리였다.

 

그는 용병제가 판을 치던 당시에 국민개병제를 주창했다. 애국심을 가지지 않은 채 돈만 써서는 절대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에는 이상주의자로 비쳐졌던 그의 주장들은 오늘날엔 당연시 여기는 현실이 되어있다. 그는 시대를 앞서서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의 소유자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기독교의 위세가 아직 등등해서 정치를 윤리와 동일시하던 때였다. 권모술수가 가득한 정치현실을 꿰뚫어 본 정치사상을 내놓았으니 당시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는 권모술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단지 정리해놓은 사람에 불과했다.

 

그가 바친 『군주론』을 메디치가에서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미 반 메디치가로 낙인찍힌 마키아벨리의 복직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남긴 책이 오늘날까지도 그를 권모술수의 달인쯤으로나 생각하게 만들어놨으니 그는 불행한 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Scene #2   현실주의적 단호함을 택한 마키아벨리

 

그를 향한 세상의 낙인은 죽은 뒤에서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주론』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더욱 거세졌다. 오늘날 상식이 된 ‘사악한 마키아벨리’라는 통념은 역사적으로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시기에 교황과 교회가 자신들과 대립했던 군주들이 저지른 잔악 행위들에 마키아벨리즘이라는 낙인을 찍으면서 시작되었다.

 

마키아벨리는 1495년 피렌체에서 반란이 일어나 전제정치를 하던 메디치가가 추방당하고 공화국이 복구되면서 자유를 보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을 보았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하기에 반란 지도자는 상당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공화정을 위한 강력한 단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반란 지도자 피에로 소데리니는 인내와 선량함만 있으면 적절한 보상을 통해 유혈 사태 없이 사악한 파벌들을 근절하고, 왕정으로 되돌아가려는 잔당들의 야망을 없앨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마키아벨리의 우려대로, 이러한 소데리니의 순진한 예상과 달리 1512년 피렌체가 카를5세 군대에 정복된 뒤 살아남은 왕정의 잔당들은 소데리니를 제거하고 다시 전제정을 복원하고 만다. 이에 대해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가 어리석기 짝이 없게도 도시의 자유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사소한 양심에 굴복했다고 보았다.

 

이처럼 마키아벨리가 잔혹한 조치를 옹호했다고 해서 그 점만이 부각되는 것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중대한 오해 중의 하나이다.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을 볼 때 그가 사태에 관한 뛰어난 현실주의적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음이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예를 살펴보자.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뛰어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거론하는 체사레 보르자는 피렌체 국경 지역에 새롭게 등장한 위협적인 군사적 강자였다.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사생아로 태어나 추기경이 되었으나, 성직자 신분을 버리고 칼을 잡아 속세의 군주가 된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1502년 12월 로마냐 통치를 담당하던 보르자의 부하 레미로 데 오르코의 강압적인 통치에 로마냐 시민들이 분노를 폭발시키자 보르자는 중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오르코의 잔인한 폭정 때문에 눈 덩이처럼 불어난 시민들의 증오심은 로마냐의 지속적인 안정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보르자는 놀라운 기민함으로 이에 대응했다. 그는 즉시 오크로를 소환했고, 나흘 후 그의 몸이 두 동강이 난 채로 광장에서 발견되었다. 또한 시체는 모든 시민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그곳에 계속 방치되었다.

 

이 사례에서 마키아벨리는 보르자가 오로지 공과에 따라 부하들을 완벽하게 통제했으며 전광석화와 같이 재빠르고 단호하게 일을 처리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여기서도 마키아벨리는 음모적이고 신속한 살해 명령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 한 사람을 희생시킴으로써 로마냐의 무질서를 효율적으로 방지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Scene #3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였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냐 아니면 전제군주를 옹호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래도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공화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악의적인 해석에 도전한 사람들은 프랑스 혁명기의 공화주의 사상가들인 몽테스키외와 루소, 디드로였다.

 

 

 

 

 

 

 

 

 

 

 

 

 

 

 

 

마키아벨리의 주요 저작 가운데 하나는 『로마사 논고』이다. 이 책에서 공화주의자로서의 마키아벨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대표작으로 너무나도 잘 알려진『군주론』만 읽은 독자라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에 『군주론』만 읽는다면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만약 로마가 성공을 거둔 비결을 발견할 수 있다면, 피렌체 역시 그런 성공을 또다시 맛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가 이룩한 업적의 비결을 단 한 줄로 요약한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일찍이 도시국가들이 자유롭지 않았다면 결코 지배와 부를 증진시킬 수 없었다.”

 

우선 고대 아테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폭정에서 해방된 뒤 100년이 지나는 동안 눈부시게 번영했다. 로마도 왕의 통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뒤 얼마나 위대해졌는가?

 

마키아벨리가 자유를 강조하면서 무엇보다 염두에 둔 것은 위대함을 추구하는 국가라면 반드시 정치적인 예속 상태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내적으로는 독재자로부터의 예속으로부터, 국외적으로는 제국의 힘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함을 뜻했다. 이것은 피렌체가 위대해지려면 국내에서 독재를 없애고 프랑스, 스페인, 독일 같은 강대국들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군주정을 완전히 배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그랬듯이 대중 지배의 지속이 군주제 형태의 정부와 얼마든지 병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명백히 군주정보다는 공화정 체제를 더 선호했다.

 

 

 

 Scene #4   우리 안에 있는 마키아벨리즘

 

마키아벨리가 “정치란 비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무도덕, 즉 도덕과는 무관한 것이며 윤리적인 행위나 선악이 가치 기준일 수 없으며, 국가를 존속시키는 수단이라면 그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했을 때 마키아벨리가 정치가들이 행하는 모든 잔혹한 조치를 옹호한 것이 아니라 정치 행위란 본질적으로 도덕적 판단에서 벗어나 그 행위의 효율성과 유용성이 최고의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보았을 때 정당화될 수 있는 정치 행위의 목적은 공화정의 건설 및 존속이나 시민 자유의 수호와 같은 가치들이었다. 게다가 마키아벨리가 옹호했던 군주의 테러 조치는 그러한 조치가 더 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였다.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란 원칙적으로 잔인하다는 평판을 받아서는 안 되지만, 지나친 자비심을 베풀어 혼란을 초래하고 약탈과 유혈 사태를 빚게 하기보다는 잔인함을 보여 주어 무질서를 진압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더 자비로운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살아있다면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폭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군주론’의 구절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 씁쓸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제시한 일견 반도덕적이고 악명 높은 조언들은 마키아벨리가 외교관으로서 목격했던 당대 군주나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의 획득, 유지, 행사를 둘러싸고 벌였던 투쟁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사악함과 기만성이 드러났다면 이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 현실이 그러한 원리에 따라 전개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여전히 남는 문제는 마키아벨리가 통치자들이 내세우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테러적 방법을 ‘미덕’의 위치로까지 격상시켰다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두려움을 심어주되 민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법가와 잔혹한 독재정치가 동의어가 아니듯, 마키아벨리의 현실적인 정치론과 권모술수의 정치는 동일하게 볼 수 없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대상은 마키아벨리가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는 ‘마키아벨리즘’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책을 현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보다도 더 ‘마키아벨리적’인 우리들 자신이다.『군주론』을 읽으며 독재자가 왜 실패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들은 마키아벨리의 말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마키아벨리의 충고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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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 이해인 기도시집
이해인 지음 / 열림원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우리가 늘 기도의 명수, 사랑의 명수이길 바란다. 아무에게나 함부로 털어 놓기 힘든 어둡고 아프고 슬픈 이야기도 우리에겐 마음 놓고 쏟아놓으며 거듭거듭 기도를 부탁할 때가 많다. 많은 경우에 수녀는 늘 심부름 잘하는 세상의 천사이길 바라는 것 같다.”

 

시인이 이 책의 서문에서 고백하는 이야기이다. 수녀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흔히 ‘수녀’하면 떠오르는 고결하고 성스러운 이미지가 짐스럽고 무거울 때도 있겠지만, 그들이 바치는 신에 대한 사랑만큼 인간에 대한 사랑도 넘쳐나길 바라는 것이 바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이 시집은 수도자로 자신을 봉사와 헌신 속에 던진 시인이 세상에서 느끼는 많은 감정과 생각들을 아름다운 시어들로 표현하였다. 이 시집에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내적 고민과 번뇌,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수도자적 태도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세상에 대한 여러 가지 단상들도 아름다운 시어 속에 담겨 드러난다.

 

 

풀잎처럼 내 안에 흔들리는

조그만 생각들을 쓰다듬으며

욕심과 마음을 모르는

작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행복한 나라를 꿈꾸어본다

 

작은 것을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게 심어주신

나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내게 처음으로 작은 미소를 건네며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가장 겸허한 친구의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 「작은 노래」중에서 -

 

 

이처럼 자신을 낮추어 ‘풀잎처럼 자신 안에서 흔들리는 조그만 생각들’을 쓰다듬는 것은 단지 수녀에게만 부여되는 짐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지녀야 할 바람직한 삶의 태도가 바로 겸손이고, 욕심과 미움을 버리는 것이다. 이 시집이 가톨릭 신자만을 위한 기도 시집이 아닌 대중적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의 자세 때문이다.

 

 

내일은

나에게 없다고 생각하며

오늘이 마지막인 듯이

모든 것을 정리해야지.

 

사람들에겐

해지기 전에

한 톨 마음도

남겨두지 말아야지.

 

찾아오는 이들에겐

항상 처음인 듯

지극한 사랑으로 대해야지.

 

잠은 줄이고

기도 시간을 늘려야지.

 

늘 결심만 하다

끝나는 게,

벌써 몇 년째인지.

 

하루가 가고

한숨 쉬는 어리석음.

 

- 「후회」-

 

 

그녀가 하는 삶의 고민들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같이 결심은 많이 하고 이루지 못하여 후회하는 마음, 행복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찾아 헤매면서 정작 가까이에 있는 행복은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는 어리석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후회와 미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녀의 고민 속에는 그 고민과 성찰을 통한 발전이 담겨 있다. 그녀는 자신의 내적 고뇌를 사랑의 정신으로 승화시켜 표현할 줄 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정신적 성숙과 순수성을 느끼게 하고 그녀를 닮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너무 작게 숨어 있다고

불완전한 것은 아니야

내게도 고운 이름이 있음을

사람들은 모르지만

서운하지 않아

 

기다리는 법을

노래하는 법을

바람에게 배웠기에

기쁘게 살 뿐이야

 

푸름에 물든 삶이기에

잊혀지는 것은 두렵지 않아

 

나는 늘

떠나면서 살지

 

- 「풀꽃의 노래」중에서 -

 

 

자그마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기쁨을 찾는 소박한 삶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우리들에게 전하고 싶은 삶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풀꽃처럼, 조개처럼, 바람처럼, 노래처럼 작은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얼마나 많이 잊고 바쁘게만 달려 왔는지...

 

이 시집을 읽다 보면 이러한 반성의 마음과 함께 자신을 최대한 낮추었을 때에 발견할 수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름다운 시 한 편과 함께 자연 앞에서 겸손할 수 있는 소박한 마음 한 자락을 얻는다면, 도시의 복잡하고 답답한 일상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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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땅, 죽음의 땅, 유령마을. 어느덧 3년째가 된 일본 원전 사고 지역을 표현한 말이다. 도저히 불과 얼마 전까지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어져 버린 곳,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부에서 일어난 지진은 예상치 못한 비극을 불러왔다. 지진에 이은 쓰나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방사능이 대량 유출된 것이다.

 

아비규환이던 당시에 대한 기억도 어느새 제3자들은 잊어가고 있다. 인간이 '망각의 동물'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잊혀져가는 기억 속에서 3자인 우리는 스스로를 자위한다. '자연이 입힌 상처는 치유되기 마련이다'라면서.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상처도 있다. 바로 인간의 오만이 남긴 상처다. 후쿠시마 원전 폭발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함을 자랑하던 일본 원자력 발전의 몰락과 함께 이 지역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만들었다. 앞으로 몇십 년이 걸릴 지 모르는 자연의 재생을 그저 바라만 보게 만들었다. 이미 후쿠시마 원전 반경 20㎞는 인간이 정한 '죽음의 땅'이 돼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점차 흐릿해져 가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남의 나라 일, 남의 지역 일이라며 우리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달랜다. 아프지 않게 달랠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죽음'이 속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년이란 시간 동안 간간이 들려 온 백혈병 환자 발생 소식도 더 이상 충격적이지는 않다. 인간이 살아 있음에 우리는 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망각의 귀퉁이에 버려진 동물들에게 현세의 지옥과도 같은 그 곳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있으면 풀리겠지 싶던 긴급 대피령에 남겨 두고 온 반려동물과 가축들은 하릴없이 주인을 기다리며 죽음과 대면해 왔다. 그들의 소외, 굶주림은 오만한 인간이 만든 자화상이다.

 

쓰나미가 뭔지, 방사능 수치가 뭔지도 모르는 동물들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다.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20km 내에 거주하는 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려 사람들은 마을을 모두 떠났다. 동물을 돌볼 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지진과 쓰나미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동물들이 굶어죽거나 먹이를 찾아 떠돌며 야생화되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죽거나 떠도는 동물들. 죄 없는 생명들의 이 비참함을 누가 책임질 것인가?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떠도는 동물 중에 살아남은 수가 몇이나 될까? 아마도 죽음의 땅에서 오지도 않는 가족을 기다리다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쓰나미에 온 가족이 쓸려나간 가운데 개 한마리가 살아남았다.

카메라에 잡혔다.

조용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고, 그 눈은 말한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좌로 다시 우로 돌린다.

 

누구일까, 개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그는.

또 사람한테 개의 말을 들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 그는.

 

- 신경림 「누구일까」-

 

 

죽음의 땅을 목격한 시인은 말한다. 이런 끔찍한 지옥을 만들어낸 그들은 누구일까. 시인의 질문 속에는 참혹하게 죽어가는 작은 생명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배어 있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 고개를 돌리기만 하는 개의 모습은 스페인 화가 고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 「개」 1820~1823년 

 

고야가 그린 ‘검은 그림’ 연작의 한 작품인 「개」는 천진한 무방비함의 초상이다. 화가는 광대한 배경에 몹시 조그만 개 한 마리를 떨어뜨려놓았다. 창백한 황색 허공과 암갈색 바닥은, 형체와 스케일을 헤아릴 수 없어 더욱 위압적이다. 개의 네 다리를 집어삼킨 어둠은 쓰나미에 불어난 진흙 같기도 하다.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보인다. 개가 그토록 기다리던 주인일까. 아니면 가엾은 생명에 차가운 손길을 내밀려는 죽음의 신일까. 희미한 음영의 정체가 누구인지 중요하지 않다. 개의 눈빛을 보라.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면서.

 

죽을 때까지 죽음을 들여다보며 붓질했던 고야는 쓰나미처럼 덮쳐오는 거대한 멸망의 공포 앞에서 텅 빈 눈동자를 힐끔거리는 개의 대가리를 그렸다. 200여 년 전 그린 그 개의 모습은 인간이 만든 재앙이 덮친 후쿠시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고야는 개의 가엾은 눈망울을 그린 것이 아니다. 죽음의 땅을 만들게 한 장본인, 바로 오만한 인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개의 눈망울을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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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관집 이층 창비시선 370
신경림 지음 / 창비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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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서점에 시집을 사러 갔더니 매대에 신경림 시인의 신작 시집이 없었다. 지방도시라서 아직 시집이 오지 않았나 해서 서점 주인장에게 여쭈어봤다. 보내온 시집이 다 팔려 재고가 없다고 한다. 질박한 서정과 꾸밈없는 언어로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다독이는 시를 써온 그를 지역의 독자들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다른 서점으로 가서 시집을 샀다.

 

올해 여든, 내년이면 환갑을 맞는 원로 시인의 문장은 여전히 따뜻했다. 언 손을 녹일 수 있는 것이 작은 핫팩이라면, 시인의 시집은 겨울바람 같은 냉소에 얼얼해진 심장을 녹이는 따뜻한 문장들로 채운 핫팩이다. 하룻저녁 내내 아껴가며 읽은 시집에는 사실 새로울 것도, 유별난 것도 없었다. 현란한 비유도 없고, 어려운 축약도 없다.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를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손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 (32쪽) -

 

 

이 시는 시인이 1993년 펴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에 실으려다 마음에 차지 않아 빼 놓았다가 다시 써 낸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는 시인 신경림이 아직 살아 있음을 독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보여 준다. 그의 삶은 중국 시성(詩聖) 두보를 닮았다. 인간의 고통를 늘 가슴에 품어 연민의 시어로 위로하고, 평탄치 않은 삶의 불우에 매몰되지 않아 '우리시대의 두보'라 불린다.

 

 

나는 깨지 않으리 이 꿈에서,

비록 이 꿈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일지라도.

 

- 「몽유도원」 마지막 부분 (39쪽) -

 

 

시인은 이미 인생의 먼 길을 와서 ‘사불휴(死不休,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는 두보의 말)’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다. “아름다운 시는 오만과 독선을 버린 시”라는 팔순 시인의 시집을 읽어 보면 오히려 그의 눈이 맑아지고 귀는 순해졌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광산 뙤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할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 「찔레꽃은 피고」 (22~23쪽) -

 

 

한국인의 정서에 각인된 찔레꽃의 이미지는 순박, 소박, 고향, 슬픔이다. 때로는 그 옛날 어린 시절 가난한 고향의 산야에서 만났던 순한 첫사랑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찔레꽃을 소재로 만들어진 노래도 많다. 향기가 진해서 오히려 서러운 찔레꽃! 그래서 장사익은 목이 터지도록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라고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장사익의 찔레꽃은 노래를 듣고 있는 당신이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야말로 순박한 찔레꽃이라고 자꾸 최면을 걸어쌓니 거기에 안 넘어가고 배기겠는가. 신경림의 찔레꽃은 순박했던 첫사랑을 가슴 속에 품은 당신이다.

 

찔레꽃을 담은 장사익은 찔레꽃 가시로 우리들의 가슴을 찔렀다면, 시인은 찔레꽃 향기로 세월의 모진 풍상에 찌든 우리들의 가슴을 살짝 건드린다. 몇 달 뒤에 피게 될, 세월에 잊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찔레꽃 향기의 감각을 살린다.  

 

찔레꽃이 슬픔의 이미지로 한국인들에게 각인된 것은 전쟁이 갈라놓은 생이별, 그리고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저 홀로 고고하게 하얗게 얼굴을 내밀고 있는 찔레꽃. 세월의 바람에 첫사랑의 기억과 함께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프다. 한국인의 감성 유전자에 그렇게 새겨놓은 것일 게다.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

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

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간혹 스치는 것은 모멸과 미혹의 눈길뿐

마침내 그는 대합실에서도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게 한다.

 

찬 바람이 불고 눈밭이 치는 날 그의 영혼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올라가 못 박히는 대신

그의 육신은 멀리 내쫓겨 광야에서 눈사람이 되겠지만.

 

그 언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도 않고도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시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그들을 대신해서 누워 있으리라는 걸.

 

그들의 아픔, 그들의 슬픔을 모두 끌어안고서.

 

- 「나의 예수」 (85쪽) -

 

 

석가모니도, 예수도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생을 마감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보여 주었던 그 삶은 역시 그들이 가려는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이다. 시인은 서울에 예수가 있다고 믿는다. 한 달 전에 이성의 지식인이라는 사람은 집 없는 사람들을 '좀비'라고 돌직구 같은 말을 했다면, 감성의 지식인은 이 세상의 고통을 떠안고 아파하는 '예수'라고 표현했다.

 

비탄과 절망의 현실을 뻔히 눈뜨고 보면서도 도리어 선을 긋고 침묵하고 고개 돌리고 저 멀리 비켜간다면, 자기 말과 행위의 진정성과 인간애를 진실하게 살피며 새롭게 살기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과연 이 시대에 소통을 갈구하는 것은 잘한 일일까? 상처 입고 고통 받는 모든 존재들을 외면하는 것은 소통이라고 할 수 없다. 마음으로 통하는 소통이 아니라 냉소적인 외면일 뿐이다. ‘나의 예수’는 이 땅의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해 연민의 손길마저 내밀지 못하는 이 시대, 이 땅에서 ‘가난과 추위’와 동거하는 그들의 아픔, 슬픔을 끌어안을 수 있는지 독자들에게 자문하게 만든다.

 

시인은 언어를 잃어도 맨 몸뚱어리로 세상에 부딪히는 사람들이다. ‘늙은 시인’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우리 나이로 팔순을 맞이한 시인의 나이를 감안하면 새로운 시집 출간을 향한 축복보다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이 앞서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시인이 말미에 남긴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는 고백은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추억과 따뜻함 그리고 인간애를 동반한 애틋함이다.

 

짧은 인생 동안 정들었던 수많은 거리와 인연을 다 음미하고 또 가슴에다 남겨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말 소중한 것은 적어도 가슴 한 켠에 남아서 가끔 슬퍼지거나 외로워질 때 순간순간 떠오르게 된다. 흑백사진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루하지는 않고, 조금은 코끝이 찡해지는 그런 순간들이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 시절이기에 시인은 시로 그 시절 그 사람들을 다시 불러내 살려낸다. 망각의 강 속에서 시인은 추억의 시어(詩語)를 건진다. 추억의 시어는 어느새 냉소로 트다 못해 갈라진 우리들의 마음에 바르는 ‘희망’이라는 연고가 된다. 이 ‘희망’의 연고가 세상과 세월의 풍파 앞에 ‘쓰러진 자들’의 아픔, 슬픔 모두 끌어안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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