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랜시스 베이컨  「자화상」  1969년

 

 

20세기 최대의 중심 이슈는 인간이었다. 인류는 신과 자연에 대해 탐구하고 과학과 물질문명의 발전을 위해 마치 기차가 달리듯 역사의 레일 위를 열심히 달려왔으나 어느 날 갑자기 방향을 잃고 자기 혼돈에 빠졌다. 인간은 자기 외적 요소에서 해답을 구할 수 없고 끝내 문제는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베케트의 소설에서처럼 인간은 고도를 기다리며 “지금 어디인가? 지금 누구인가? 지금 언제인가?”라고 묻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미술에서 이런 전후의 절망을 대표적으로 표현한 인물이 프랜시스 베이컨이었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그는 경마훈련사인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제도권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성(性)에 대해서도 아주 부끄러운 기억의 성장배경을 갖고 있었다. 베이컨은 미술과 철학 그리고 법학에도 뛰어났던 그는 동성애자였기에 남자와의 관계를 혐오스럽게 여긴 부모님으로부터 쫓겨났으며, 프랑스, 영국, 유럽을 돌아다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후원자를 만나 명성을 얻게 된다.

 

16세에 집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를 방황하며 실내장식공으로 생계를 꾸려나간 그에게 파리에서 본 피카소 전시회는 생을 바꾸어 놓아 1929년 런던에서 스스로 배운 화가의 길을 걸어 나갔다.30세를 넘어서야 수줍음벽을 겨우 이겨낼 수 있었지만 도박과 음주벽은 그의 일생을 늘 따라 다녔다.

 

 

 

 

루시안 프로이트  「세폭화, 조지 다이어를 애도하며」  1971년

 

 

파리에서 전시회 전, 동성 연인인 조지 다이어의 자살로 인해 그의 모습과 죽음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그려나간다. 소리 없는 사물의 목소리를 느끼고 그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죽음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여 아름다운 즐거움과 쾌락을 포기한 억제된 욕망의 댓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자극하고 각성시키려 한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특히 영화가 시작되는 맨 앞에 베이컨의 그림 두 점이 등장한다. 그 두 점의 그림이 각각 한 번씩, 그리고 세 번째 쇼트에는 두 그림을 동시에 나란히 등장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이사벨 로손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  1964년

 

 

절규하는 듯한 노랑색 벽과 맑은 초록색 바닥, 그 위의 도발적인 오렌지색 매트리스에 길게 누워있는 남자와 등받이가 있는 어두운 녹색조의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또 한 남자. 두 사람 모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뭉개져 있다. 그것은 그와 각별한 우정을 나누던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과 「이사벨 로손의 초상화를 위한 연구」였는데 모두 1964년작이다.

 

그것들은 앞으로 전개될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에 더없이 적절한 그림이다. 이 영화는 1973년 개봉 때 정면누드와 왜곡된 섹스행위로 상영금지가 되어 15년 뒤에나 해금이 된, 한국에서는 24년 뒤에야 비로소 개봉되었다. 그러나 정작은 외설적이지도 그다지 에로틱하지도 않은 철학적이고 실존적인 고독이 압도한 영화였다. 쟌느의 총에 맞아 쓰러져가면서도 베란다 구석에 씹던 껌을 붙여두고 죽어가는 말론 브란도의 얼굴은 영락없는 베이컨의 초상을 연상하게 된다.

 

 

 

 

 

프랜시스 베이컨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  1966년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도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인간의 살아 있는 현실'을 다루는 화가이다. 그의 주제는 영국 예술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금기사항을 위반하고 있으며 인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직시하는 철학만 같다.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에는 그의 유년이 보인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성장배경이란 어떤 식으로든 작품에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의 부모는 정착하지 않고 영국과 아일랜드를 오가며 살았고 끊임없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각각의 나라 안에서도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외할머니의 집 같은 어떤 특정한 장소들에 늘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피리에 있는 그 집에서 살았다. 그 집은 정원을 마주보고 있는 모든 방들이 둥글게 구부러져 있었는데 꽤 큰 집이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여러 그림들에는 곡선 모양의 배경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유년의 그 방들을 떠올린 것이었다.

 

이 그림의 천정에 걸려 있는 전구의 움직이는 술 장식만 보아도 초상의 공간 배경이 나선형이다. 이것들이 극도로 단순, 간결화되어 있기 때문에 인물은 그와 반대로 더욱 거친 형상이 부각되어 보인다.

 

「말하고 있는 조지 다이어의 초상」은 마치 빌로드천 같은 자주색 바닥과 보랏빛 벽, 그리고 갈색 천정과 원근법에 따라 처리된 남보랏빛 문을 배경으로 무언가 말을 하며 앉아 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베이컨 자신의 말이 그 답변은 아닐까. 분명히 우리는 육신이다. 우리는 미래의 시체인 셈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고통과 외로움, 절망, 절규 그리고 공포의 감정들을 이성을 배제한 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해낸다. 그는 초상화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야만적이면서 격렬하고도 왜곡된 모습으로 진화시킴으로 고립된 형태를 나타낸다. 그는 비극적인 현실과 혐오스러운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나이프를 사용하고, 유리에 비치는 반사광을 이용, 실제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사진과 다양한 사진 수집을 이용하여 내면의 초상을 그리는 기법 등으로 인간에 대한 충격적이고 비관적인 내면의 이야기를 연출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누워있는 인물」  1959년

 

 

「누워 있는 인물」은 방에 갇혀 있는 절망의 한 인간을 뒤틀린 모습으로, 절규하듯, 쓰러지듯, 자포자기하듯, 아니면 튀어나가서 거역하려는 듯한 여러 이미지로 그려놓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절대적 상황아래 놓인 외로운 홀로의 존재라는 인간 실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그림 속의 인물은 공간에 의해 보호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갇혀져 있는 느낌이다. 그가 누워 있는 듯한 침대는 다만 윤곽만 드러내고 밑으로 길게 깔린 초록의 카펫만이 그곳이 공간으로 둘러싸인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나머지는 모두 검게 칠해져 있어 밤을 방불케 하고 있는데 우측의 수직과 하단의 대각선으로 난 가느다란 선만이 그곳이 막혀 있는 듯한 상황임을 시사한다.

 

 

 

 

프랜시스 베이컨  「십자가형」  1965년  

 

단순히 대상을 묘사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사실적이면서 대단히 암시적으로 감각의 이면을 들춰내고 싶었다. 모든 예술이 다 그런 게 아닌가? (프랜시스 베이컨)

 

베이컨이 그린 수많은 초상화들은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뜨린다. 신체를 구성하는 살도 뼈로부터 부드럽게 흘러내린다.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을 통해서 감각이 실제 신체의 뼈와 살에 달라붙은 표면의 형상을 말하고자 했다. 고통에서 고함으로! 얼굴에서 머리로! 이것이 들뢰즈가 베이컨의 그림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감각의 논리이다.

 

 

 

 

 

 

 

 

 

 

 

 

 

 

 

 

들뢰즈는 신체는 형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형상은 구상이나 추상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구상은 신체를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이며 추상은 신체의 흔적을 지워버린다. 대신 형상은 신체가 반응하는 감각을 그대로 표현한다. 고통의 감각은 고함에서 나오는 것이며, 얼굴의 감각은 머리와 고기라는 신체 표면에서 나오는 것이다.

 

베이컨의 입체적 회화는 경악에 가깝다. 육체와 영혼. 베이컨은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꺼이 그 가죽을 벗기는 연쇄살인마와 같다. 다만 그가 실제 살인마와 다른 것은 그는 예술을 통해 인간의 영혼과 육체의 상관관계를 다룬다는 것이다. 고깃덩어리는 그의 예술적 질료였다.

 

부풀리고 뒤틀린 인간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고 상처 입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반면 야수 같은 모습은 인간이 지닌 동물적 파괴성을 드러낸다. 베이컨의 그림은 또한 생명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면서도 동시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폭로한다. 베이컨은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겨진 육체와 정신의 부끄러운 본질을 빠끔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그 형태의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심연 깊숙이 파고들어 우리의 미적 쾌감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우리 주변에는 이미 그것의 원초적 적대감을 듬뿍 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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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self-portrait)은 ‘발견하다’라는 의미가 담긴 라틴어 protrahere 앞에 ‘자신’을 뜻하는 self를 붙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자화상을 보면 그들의 삶과 예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자화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인 셈이다.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에는 연인에게 버림받고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미셀이 확장 개보수 중인 루브르박물관에서 늙은 스탈렌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감독 레오 카락스는 시력을 잃어가는 미셀에게 왜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게 했을까?

 

렘브란트는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그렸다. 인기 작가였던 젊은 시절부터 고독했던 말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자신의 얼굴을 결코 감추려 하지 않았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면 시간 변화에 따른 느낌들이 아주 잘 표현되어있다. 그래서 자화상의 표정을 보면 그 당시 렘브란트의 재정 상황이나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옷도 화려하고 얼굴도 여유롭고 느긋하며 사람을 아래로 내려 보는 각도의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대중들로부터 인정받으며 한창 돈과 명예의 정점에 있을 때이다. 자신의 재주와 천재성에 열광한 사람들이 그림을 주문해와 거만과 선택으로 그림을 그릴 시기이다.

 

 

 

 

 

 

렘브란트  「자화상 」 1640년 / 「미소 짓는 자화상」  1665년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자화상에는 어두운 색과 그늘이 내리기 시작한다. 그림과 렘브란트의 일들을 맞추어 보면 그림 속 어둠이 이해가 간다. 렘브란트는 말년에 아주 비참한 생활을 했다. 과거 화려한 부귀영화를 뒤로 한 채 늘그막에 그림을 그리다가 세상을 떠났다. 꾸밈도 가식도 없는 자신의 모습. 어쩌면 미셀이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통해 보려고 한 것도 자신이 아니었을까?

 

편지에 "카라바조와 루벤스로부터 벗어나 나의 내면을 응시한다. 삶은 힘들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 성숙되고 깊어진다. 이제 제대로 그림을 그리게 된 것 같다"라고 적고 있다. 천재화가가 말년에 이르러 그림의 본원으로 회귀하는 그때의 심경을 「미소 짓는 자화상」이 담고 있다.

 

 

 

 

루벤스  「자화상 」  1623년 /   「자화상 」  1639년

 

 

 

렘브란트만큼은 아니지만 루벤스도 인생의 전환기에 맞춰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 예순두 살에 그린 자화상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완성한 그림으로 주름진 화가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자화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다. 강렬한 눈빛과 섬세한 수염, 정면을 당당하게 응시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세세함과 내면의 표출은 그림을 처음 대하는 사람도 그림 속 인물이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한다.

 

당시 윤두서는 참으로 힘든 시절이었다. 셋째형은 귀양 중에 죽고 큰형과 자신은 모함에 연루되어 죽을 정도의 고문을 당해 모든 것을 접고 낙향했을 시기다. 이 그림을 그릴 시기가 대략 46세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윤두서  「자화상 」  17세기 후반

 

 

이력을 비추면서 그림을 대하면 먼 곳에서 돌아와 한 부분을 접은 듯 고뇌와 초탈의 정서가 느껴진다.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모든 것을 잃고 꿈도 야망도 포기한 채 낙향한 선비, 26세때 진사에 합격에 남다른 야망을 품었던 선비가 고향에 돌아와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의 심정이 배어있다. 자화상은 이런 것이다. 성격과 심성도 표현하지만 살아온 그 사람의 굴곡과 명암이 녹아있어야 비로소 훌륭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외형의 섬세함과 내면의 흐름이 형태와 조화를 이루면서 표현되어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그릴 때는 무엇보다 솔직함이 우선해야 한다. 자화상은 자서전과 같은 자신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서전은 변명과 자랑으로 되어 있다. 표현주의 대가인 코코슈카는 렘브란트의 「미소 짓는 자화상」을 가장 나약하고 추하고 힘없을 때 그 모습을 그대로 옮기는 것,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그린 것을 렘브란트의 기적, 자화상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깊은 심중의 뜻이 배어나오는 듯, 성찰과 결단 선비로서의 자존감과 의기가 담겨 있다. 동양이 선으로 뜻을 살려 담아냈다면 서양은 색으로 그 느낌을 담았다. 선의 섬세함이 의기와 성찰을 표현하고, 색의 다채로움이 희로애락의 풍상을 담아 낸 것이다.

 

“명화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화가의 모습이 담긴 자화상부터 감상하라”는 말이 있다. 때로 예술은 자유로운 생의 찬미이면서 부자유스러운 생에 대한 찬악(讚惡)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그리는 그림’, 자화상의 미학은 자신을 조형적으로 표현하고자하는 인간 욕구의 발현일 것이다.

 

흔히 자화상을 많이 그리는 화가는 불안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한다.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존재를 되물어 자신의 정체를 확인해야 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발견과 자기성찰이 동시에 요구되는 시대이다. 지금 우리들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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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가오리」 1725~1726년경

 

 

“샤르댕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 나는 우리 집의 식사를 끝낸 후의 식탁, 걷어 오른 식탁보의 한쪽 끝, 굴 껍데기에 기대어 있는 나이프 같은 정물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한 번도 깨닫지 못했다네” 소설가 프루스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젊은 날 샤르댕의 그림을 마주한 체험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미가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그런 곳에서 미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의 고백을 깊이 공감하는 것은 샤르댕의 그림들을 통해 사소한 사물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여 일상의 나날을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하는 따뜻한 시선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1699년 가구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화가 시메옹 샤르댕이 활약하던 당시의 프랑스는 역사화를 가장 고귀한 화화장르라 생각하여 종교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순으로 자리매김한 후 평범한 사물을 묘사한 정물화를 천대했으니 식기, 과일, 악기, 책등 사실적인 소재들을 그려낸 그는 소재의 선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당시 미술을 주도하던 아카데미 취향과 많이 달랐다.

 

플랑드르에서 유행하던 정물화를 능가하는 섬세함과 프랑스미술의 세련미를 두루 갖춘 그의 작품들은 하찮은 사물들과 그 주변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부각시켜 부엌살림도구들도 역사화나 인물화처럼 빛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는데 무엇보다 내가 샤르댕에게 감동하는 것은 모든 사물을 미를 간직하고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그의 사물에 대한 외경심 때문이다.

 

우리들은 아름다운을 경험하려고 미술관을 찾고, 음악회를 가고 먼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지만. 우리 곁에 있으나 무심하게 지나치는 사물들, 그것이 그릇이든, 과일이든 시들어버린 꽃이든, 모든 사물은 미의 평등함을 지니고 있음을 잊은 채 아름다움을 일상이 아닌 특별한 공간속에서 찾으려 한다.

 

사실 샤르댕은 자칫하면 무명화가로 생을 마칠 뻔한 거리의 화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당시 삼류화가들이나 손대던 정물화와 풍속화를 부여잡고 살았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출세하려면 역사화나 초상화를 그려야 했다. 그러나 장롱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일자무식이었으니 인문학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역사화 같은 걸 그릴 수도 없었다.

 

그런 그가 출세한 것은 천운이었다. 1720년 성체축일 때 샤르댕이 퐁뇌프 근처의 거리에서 그림을 전시했는데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궁정 아카데미의 실력자 장 바티스트 방 루가 그의 그림의 진가를 발견한 것이다. 방 루는 그를 궁정에 소개, 출세의 뒷배가 돼줬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비눗방울」 1734년

 

 

방 루가 샤르댕의 그림에서 주목한 것은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수 없는 감성의 힘이었다. 그의 또다른 그림 ‘비눗방울’을 보라. 소년은 자신의 놀이에 완전히 몰입돼 있다. 하찮아 보이는 일상적 행위지만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다. 그 천진난만한 진지함은 뜻밖에도 감상자에게 뭉클한 감동을 전해준다. 감성의 언저리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예술의 감상이라는 것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단지 객관적 대상으로 감상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통해 교감하고, 인습적인 것으로 부터 벗어나 확장된 상상력을 갖고 사물을 깊이 응시하는 총체적 행위일 터이니 눈을 돌려 우리 곁에 무심히 놓인 흐트러진 식탁, 빛에 반짝이는 반쯤 비운 포도주잔, 비스듬히 놓인 쿠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벽처럼 늘 우리 주위에서 침묵하고 있는 것들을 진심으로 바라본다면. 하찮게 여긴 사물들이 조용한 명상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해방된 감각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니 그것이 사물에 대한 참된 인상이며 미의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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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05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06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4-0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오리나 홍어의 얼굴은 사람과 똑같아서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샤르댕이 그린 가오리 그림은 정말 실감나죠.

cyrus 2014-04-06 22:44   좋아요 0 | URL
의외로 샤르댕의 가오리 그림이 미대생들이 모사할 때 즐겨 그리는 그림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만큼 정물화의 모범인것이죠. 평범하고 투박해보이지만 그래도 샤르댕의 그림 무시 못합니다. 노자님 말씀대로 사물을 실감나게 표현한 붓의 터치감은 훗날 마네에게 영향을 주었거든요.
 

 

반 고흐 「해바라기」 1888년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은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오늘 중앙일보의 ‘나를 흔든 시 한 줄’이라는 코너에 유종호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이 함형수의 ‘해라바기의 비명’을 소개했다. 아침에 만난 반가운 시였다. 그러나 옥에 티가 있었다. 시에 오자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의 부제가 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 함형수의 '해바라기의 비명'이 수록된 시집은 1989년 문학과 비평사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됐으나 현재 절판이다. 지금은 그의 시집은 eBook로 볼 수 있다.

 

 

이 시의 부제는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다. 신경림 시인은 자신이 매우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가 쓴 책『시인을 찾아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의 분량이 적다해서 별 볼일 없는 시인이 아니다. 시는 질로 따져야지 양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그가 남긴 시는 ‘해바라기의 비명’ 단 한 편뿐이지만, 수천, 수만의 시인들 가운데 단 한 편의 ‘해바라기의 비명’이 없는 시인이 허다하다”고 썼다.

 

여름의 뙤약볕에도 굴하지 않고 태양을 마주하던 해바라기는 가을이 되면 절로 고개를 숙인다. 마치 사람의 한 생애를 닮았다. 피 끓는 청춘의 시절 당당하게 고개 들고 운명과 대결하던 이들도 나이가 들면 운명과 맞서려 하지 않는다. 그 부질없음을 알게 된 까닭이리라. 대신 불멸을 꿈꾼다. 누구든 죽고 나서 흔적 하나쯤 남기고 싶어 한다. 훗날 ‘참 잘 살다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노란 해바라기와 보리밭, 무덤, 태양, 꿈, 그리고 부제를 보면 이 시는 화가 반 고흐의 꿈과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 거의 틀림없다.

 

반 고흐가 자살한 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 시의 모티브로 등장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 함형수가 반 고흐처럼 정신착란증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사실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반 고흐는 정신질환 속에 권총 자살했으며, 그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 테오 역시 형이 세상을 뜬 지 6개월 만에 정신착란으로 숨졌다.

 

두 형제는 밀밭과 해바라기가 있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나란히 묻혔다. 생전에 작품이 팔리지 않았던 반 고흐의 쓸쓸함, 이와 대비되는 열정적이고 눈부신 예술세계, 형제의 죽음 등이 함형수의 시에 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 숙연한 느낌을 준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 고갱과 함께 쓸 작업실을 장식할 목적으로 해바라기를 그린다고 하였다. 프랑스 남부의 8월에 고흐는 생의 의지를 가지고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었다.

 

고흐는 맹렬한 속도로 그린다. 자세히 보면 그림물감이 미묘하게 서로 섞이고 있고 마르지 않은 상태의 물감을 덧칠하는 것으로 독특한 생명감을 자아내고 있다. 고흐는 꽃 그 자체의 볼륨감을 내기 위해서 물감을 충분히 발라 거듭하고 있다. 거기에 따라, 마치 조각과 같은 입체감이 그림으로 태어난다.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1888년

 

 

그러나 고갱은 기억을 바탕으로 창조력을 구사하는 반면 고흐는 눈앞에 모델이 없으면 그릴 수 없었다. 정반대의 화가였던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두 명은 대립해 우정 관계는 무너져 갔다. 그렇게 위험한 공동생활 속에서 그려졌던 것이 바로 ‘해바라기’ 그림이다. 고갱의 도착을 손꼽아 기다려 그린 해바라기.

 

 

 

 

폴 고갱 「의자 위의 해바라기」 1901년

 

 

 

 

 

반 고흐 「폴 고갱의 의자」 1888년

 

 

두 명의 우정의 표시이기도 한 이 꽃을 한 번 더 그리는 것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관계를 수복하려고 했지만 오래지 않아 결국 두 사람의 공동생활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고갱이 떠난 아틀리에에서, 고흐는 다시 해바라기를 두 매 그린다. 이별의 해바라기를.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 뒤, 남태평양 이국 땅에서 병마로 인해 피폐해진 예술혼을 끝까지 불태우고 있던 고갱은 해바라기 그림 한 점을 제작한다. 저 먼저 세상을 떠난 고흐가 그리워서였을까. 의자 위에 놓인 해바라기는 생전 고흐가 의자 위 물건을 정물화의 소재로 그렸던 그림이 연상된다. 고갱은 고흐가 정신적 충격으로 한 쪽 귀를 자른 사건과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큰 충격을 받았고, 진심으로 애도했다고 한다.  

 

아니면 이제 곧 병으로 지친 자신의 영혼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신의 숨결을 느꼈을까. 고흐의 해바라기가 태양빛처럼 이글거리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면 고갱의 해바라기는 거의 말라 죽을 듯하다. 노란 꽃잎이 듬성듬성 떨어져 나간 상태다.

 

배경과 화병조차 노란색인 이 그림은 고갱이 초록색 눈동자라고 묘사한 해바라기의 중심만 제외하고는 거의 노란색 일색이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른 것이긴 하지만, 고흐가 생의 희망을 가지고 그린 이 해바라기조차 그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 열네 송이가 담긴 화병은 희망과 정열의 노란색을 띠고 있지만 화병에 담긴 해바라기들은 고흐 그 자신처럼 병들어가면서도 생의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는 듯하다.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처럼 고갱은 고흐를 떠나려했고, 고갱과 다투고 난 뒤 자신의 귀를 자르면서부터 고흐의 정신병적 발작은 시작되었다. 그는 정신병원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제 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던 사람. 그 사람이 빈센트 반 고흐였다.

 

고흐의 해바라기는 예술혼의 결정체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고 격정적인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는 영혼의 꽃이다. 지독한 신경강박증이 없었더라면 누가 청년 화가의 해바라기 은유에 대해 그토록 오래토록 기억해줄 것인가. 오늘밤도 몇 번씩 제 귀를 면도날로 오리는 악몽에 시달리는 당신, 당신이야말로 해바라기 품는 예술가임을 잊지 않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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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와이어스  「핀란드 인」 1969년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텅 빈 공간에 외로이 앉거나 서서 저 멀리 아득한 곳에 시선을 보내고 있는 부동의 인물이 앤드루 와이어스(1917~2009)의 그림이 지닌 공통된 표상이다. 「핀란드 인」도 그러한 작품 중의 하나에 속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포착한 듯한 세세한 인물의 표정과 자태, 잠시 일손을 멈추고 있는 순간의 꾸미지 않은 차림새와 용모, 자연스러움이 눈에 잡힐 만큼 선연히 그려진 극세필의 필치에서 인물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듯하다.

 

벗겨진 이마와 민머리, 귀밑의 짧은 흰 머리칼 몇 올과 하얀 눈썹, 세월의 풍상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굴곡을 이룬 주름살, 그을린 피부 빛과 반점, 저 멀리 아득한 곳을 향해 주시하고 있는 시선,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과 외로움에 젖어 있는 눈빛. 화폭 속의 '고독'이 가슴으로 밀려온다. 주시하고 있는 저 시선의 아득함, 건조한 공기와 투명한 빛, 텅 빈 공간의 고요, 꾸밈없는 황량한 분위기 속의 인물은 미국의 풍광과 땅의 표정에 다름없는 이미지이다.

 

 

 

 

앤드루 와이어스  「Field Hand」 1985년

 

 

와이어스는 펜실베이니아 주 채즈퍼드에서 출생한 후 평생 동안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자기 고향마을의 하찮은 정경과 인물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며 낱낱이 그려 왔다. 그는 미국의 정경과 일상생활을 사실적인 화법으로 묘사하여 땅을 터하고 사는 삶의 가치를 주장하고 지킨 ‘미국 정경주의’ 화가답게, 특히 지방주의 그룹의 대표 작가로서의 삶을 실천하였다. 지방의 작은 도시나 마을을 찬미하여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향수어린 욕구에서, 미국 중서부와 서남부지방의 삶과 풍경을 주로 그렸다. 

 

건조한 공기, 따가운 햇살,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의 아득하고 아득한 인적 없는 땅. 그 주체할 수 없는 광막함을 바라보면서 이 지상에 보잘 것 없이 존재하는 한 외로운 나그네로서의 '고독'이 가슴 저리게 느껴진다. ‘아득함’과 ‘덧없음’. 이 교차되는 가운데 피어오르는 명징한 ‘고독함’이야말로 와이어스가 그림으로 말하고자 한 메시지라고 보고 싶다.

 

 

 

 

 

앤드루 와이어스  「Wind from the Sea」 1947년

 

 

그 한없이 투명한 명징함으로 하여 마침내 작가는 허공과 같은 무아(無我)가 되고 무화(無化)된 나머지 온통 전체를 포용하여 그 자체로 될 수밖에 없는, 둘이 아닌 경지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만나는 이웃사람들의 평소의 모습들, 허물어진 농막, 버려진 하찮은 물건, 빈 들녘, 바람결에 일렁이는 창문의 커튼 등 그야말로 존재하는 주변의 모든 것이 그의 분신으로, 작품의 소재가 된다.

 

그는 자신이 전통적인 의미의 사실주의자임을 부정하고 평소에 ‘나는 내 생각대로 그리는 순수한 추상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림 속의 인물은 그의 마을에 있는 이웃사람으로 핀란드에서 온 이민자인 조지 에릭숀이다. 한 때는 필라델피아의 조선소에서 일을 한 적이 있고 채석장에서 석공으로 오래 일했으며 지붕에서 떨어져 등을 다친 뒤부터 일을 못하고 있지만 대단히 강건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늦게 결혼하여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열다섯 살의 예쁜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은 와이어스 작품의 모델이 되어 인물과 누드화까지 그리게 해주었다.

 

 

               

 

 

우연하게도 이 핀란드 인의 얼굴 위로 영화 <가을의 전설>에 나오는 인디언 원스텝이 떠올랐다. 그가 지켜보고 회상한 미국 서부 몬타나 주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진 러드로우 일가의 파란만장한 가족사. 가슴 아픈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장대한 스케일의 드라마. 특히 슬프고도 장엄한 영화 OST인 James Horner의 'Off to War'가 와이어스의 그림과 묘하게 어울린다. 그 음악의 흐름 속에서 아득함과 덧없음과 고독함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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