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일본 크리넥스 광고를 쉬이 잊을 수가 없다. 꼬마 오니와 흰옷의 여인이 나오는 그 광고 말이다. 이 광고를 두세 번 봤는데도 으스스한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기묘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광고를 보면서 어떤 그림이 생각났다. 이 그림도 특이하다. 네덜란드의 역사가 하위징아는 이 그림에서 퇴폐적인 느낌을 받았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의 저자 나가노 교코는 이 그림을 ‘불온하고 기묘한 에로티시즘’을 자아낸다고 했다.  

 

 

 

 

 

 

장 푸케  「믈룅의 성모 마리아」 (1450년)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다. 그런데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습이 어색하다. 마리아는 하얀 피부를 가졌고 이마가 훤하다. 특이하게 동글동글한 가슴 한쪽만 드러냈다. 왕관과 옷이 없었으면 하얀 마네킹처럼 보였을 것이다. 아기 예수의 시선이 부자연스럽다. 아기 예수는 왼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킨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 주변을 에워싼 천사들이 더 기괴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사는 보통 흰색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 속 천사는 날개 달린 빨간색, 파란색 괴물처럼 그려졌다. 특히 빨간색 천사는 일본 크리넥스 광고에 나온 꼬마 오니를 보는 것 같다. 빨간색 천사가 파란색 천사보다 많다. 천사도 아기 예수처럼 표정이 없다. 강렬한 색깔 탓인지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는 것 같다. 빨간색 천사는 세라핌(Seraphim), 파란색 천사는 케루빔(Cherubim)이다. 세라핌은 천사 중 최고의 지위를 가졌다. 원래 날개가 세 쌍, 즉 여섯 개로 되어 있다고 한다. 붉은색 피부에 여섯 개의 날개를 지닌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기괴한 분위기가 한층 더 배가 되었을 것이다. 케루빔은 이름의 의미와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천사다. ‘cherub’은 ‘귀여운 아기 천사’라는 뜻이다. 케루빔은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불의 칼로 쫓아냈다. 세라핌 다음으로 지위가 높다.

 

이 그림은 장 푸케(1420?~1480?)가 제작한 두 폭의 제단화 오른쪽 날개 부분이다. ‘믈룅의 성모 마리아(The Melun Madonna)’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믈룅은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장 푸케는 프랑스 르네상스 회화를 대표하는 궁정 화가다. 그는 샤를 7세(1403~1461)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기존의 종교화와 달리 믈룅의 마리아는 고귀한 귀족 부인처럼 그려졌다. 푸케는 샤를 7세의 정부 아녜스 소렐(1421~1450)을 모델로 마리아를 그렸다. 이 그림을 아녜스 소렐의 초상화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소렐은 궁정의 패션 스타였다. 그녀는 가슴을 드러내는 복장을 하고 다녔다. 또한 처음으로 다이아몬드를 몸에 걸쳐서 등장했다. 오늘날에는 다이아몬드는 여성을 빛나게 해주는 보석이지만, 소렐이 다이아몬드를 달고 다니기 전에는 보석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소렐은 새하얀 피부색을 유지하기 위해서 백반을 넣은 물을 피부 곳곳에 발랐다. 백반을 넣은 물은 피부를 하얗게 해주는 화장품이다. 여기에 수은이 첨가되기도 했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지려고 몸의 잔털을 없앴다. 속눈썹, 이마 위의 잔털까지 모두 핀셋으로 뽑았다. 그래서 마리아의 이마가 넓은 것이다. 소렐뿐만 아니라 그 당시 귀족, 왕족의 여자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치장했다. 마리아가 한쪽 가슴만 드러낸 이유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마리아를 보통 사람들과 다른 존재로 보여주기 위해서 가슴을 일부러 완벽하면서도 현실감 없게 그렸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 마리아의 가슴은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젖줄이 나오는 신성한 대상이다. 하지만 가슴을 드러낸 마리아를 불경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교황이다. 그는 소렐이 유행시킨 가슴을 드러낸 복장에 불평했다고 한다.  

 

소렐은 네 번째 아이를 사산하면서 자신도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그녀의 죽음이 비소 중독에 의한 타살로 추정되었지만, 실제 소렐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사인이 수은 중독으로 밝혀졌다. 소렐은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바람에 너무 일찍 생을 마감했다. 수은이 들어간 백반은 피부병이나 천연두 흉터를 가리는 데 유용한 화장품으로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치명적인 질환을 유발하는 죽음의 물질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렇게 소렐은 너무 허무한 죽음을 맞았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돼서 제단화가 완성되었다. ‘믈룅의 성모 마리아’는 죽기 전 소렐의 모습이 완벽하게 남아있는 그림이 되었다. 그녀는 죽어서도 그림이 되어 아름다움을 발휘했다. 아마도 하위징아는 눈을 지그시 감은 마리아의 모습에서 생기가 사라지기 직전의 소렐이 떠올랐을 것이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푸케의 그림에 어울리는 말이다. 소렐의 죽음을 아쉬워한 귀족 남자들은 마리아에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를 간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16-01-12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서운 그림이 3탄까지 나왔군요. ^^

cyrus 2016-01-13 16:20   좋아요 0 | URL
`무서운`이 들어간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인기를 많이 받았습니다. ^^

초딩 2016-01-12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림 보고 우선 담아 봅니다.

cyrus 2016-01-13 16:21   좋아요 0 | URL
책을 읽어보면 그림이 무섭지 않게 느껴질겁니다. ^^

stella.K 2016-01-13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햐~ 거 그림 한 번 독특하다.
불경스럽다기 보다 정말 고전스럽다는 느낌이 확...!ㅋ

cyrus 2016-01-13 16:24   좋아요 0 | URL
이 그림이 많이 튀어 보여도 걸작에 속합니다. ^^

나비종 2016-01-15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정면을 바라보는 단 한 명의 세라핌이네요. 음, 또, 성모마리아의 얼굴과 오른손과 아기 예수의 왼쪽 팔꿈치로 이루어진 커다란 삼각형 안에 닮은 꼴로 들어가 있는 또 다른 삼각형이 인상적입니다. 아기 예수의 왼쪽 팔꿈치와 마리아의 배쪽으로 늘어뜨려진 장식용 띠와 마리아의 왼쪽 가슴이 꼭지점이 되네요. 왜 하필 왼쪽을 드러냈을까. 구도를 맞추기 위한 것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는 왼쪽에는 심장이 있으니까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얀 심장 같기도 해서 야하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네요.
그런데, 네크로필리아는 개인적으로 이해되지않는 감정입니다. 무섭기도 하구요ㅡㅡ;
 
그릇에 대하여

 

 

 

 

그릇은 인간 됨됨이에 대한 은유이다. 평생 대접받기를 원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그릇이 작은 사람이다. (곰곰생각하는발의 그릇에 대하여중에서)

 

나는 동시대 함께 살아있는 작가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가지고 싶습니다. 죽고 난 후 작가는 자기 작품에서 손이 떠납니다. 떠나버린 작가의 허울 같은 작품이야 남겠지만 작가의 살아있는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살아있는 작가의 작품에 귀를 열고 눈으로 듣는 그런 활동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yureka01동시대를 함께 사는 작가들중에서)

 

    

 

 

세상에 수많은 그릇이 있다. 재료에 따라 스테인리스 스틸·놋쇠·플라스틱·나무·자기로 나뉘고, 용도에 따라 밥그릇·접시 등으로 분류된다. 그것뿐이 아니다. 혼자의 힘으로 들 수 없을 만큼 큰 용기도 있고, 물 한 방울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은 그릇도 있다. 사람의 능력은 곧잘 그릇에 비유된다. 큰 그릇은 능력이 크고, 작은 그릇은 능력이 작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릇의 크기와 용도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듯이 사람의 인생도 그러하다. 아무리 값비싼 좋은 그릇이라도 개밥을 담으면 개밥그릇이 된다. 우리는 매일 음식을 담고 비운 그릇을 깨끗이 씻는다. 그래야 새로운 음식을 담을 수 있다. 그릇이란 자고로 뭔가를 담아두는 게 그 쓰임의 본 용도이건만, 요즘은 싸움판에 차출(?)됐다. 정치판의 밥그릇 싸움이 그 대표라 할 만하다. 정치인들은 국민이 맡긴 신성한 권력을 이용해 밥그릇이나 챙기고 팔자를 고치느라 바쁘다.

 

 

 

 

우리나라 전통식기 중에 탕기(湯器)’라는 것이 있다. , 찌개를 담는 그릇이다. 탕기는 밥그릇(주발)의 모양과 비슷하다. 그래서 탕기를 밥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탕기는 12역을 소화할 줄 아는 식탁 위의 주연배우다. 그러나 특별한 음식을 담는 그릇이 식탁 위에 등장하면, 탕기는 잠시 물러나 있다. 반병두리는 떡국이나 비빔밥을 담을 때 쓰는 그릇이며, 벙거짓골  전골 요리를 담는 그릇이다. 특별한 날이면 이 두 개의 그릇이 탕기를 대신하여 식탁 위의 주연배우로 발탁된다. 탕기는 가장 많이 식탁에 등장했고, 아주 많이 사용했음에도 다른 그릇에 비하면 너무 평범하다. 이름도 평범하다. 뜨거운 국을 담는 그릇이라고 해서 이름이 탕기로 남게 되었다. 조반기, 대접, 바리, 보시기, 양푼, 이런 그릇의 이름이나 용도는 사람들이 알아도, 탕기는 잘 모른다. 사람들에 눈에는 그저 국그릇일 뿐이다. 밥그릇을 닮아서 이걸 탕기라고 부르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식탁의 주연배우가 아니라 약방에 감초역할을 하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에 가깝다. 그래서 탕기는 소중하다. 밥과 국 아무나 담을 수 있는 편안한 그릇이니까.

 

 

 

 

 

 

 

 

 

 

 

 

 

 

 

 

 

 

 

그릇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사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외국에서 탕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탕기는 사람이다. 외국인 이름이 탕기라니, 특이하다. 쥘리앙 탕기(Tanguy)는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그림물감 가게를 운영했다. 탕기의 가게는 단순히 물감을 파는 그저 그런 곳이 아니었다. 파리 코뮌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들과 화가들이 탕기의 그림물감 가게를 자주 방문했다. 탕기는 싼값에 그림을 팔기도 했다. 그가 파는 그림은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무명 화가의 그림들이 많았다. 탕기는 가난한 젊은 화가들을 아낌없이 지원할 정도로 배려심이 많았다. 돈이 없는 화가들은 품질 좋은 그림물감을 사지 못한다. 탕기는 화가들에게 그림물감을 빌려주었다. 물감뿐만 아니라 미술 도구와 돈도 잘 빌려주었다. 탕기의 배려에 크게 감동한 화가들은 돈 걱정 없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들은 완성한 그림을 재력이 있는 그림 애호가에게 팔지 않고, 바로 탕기에 건네주었다. 화가들은 자신의 그림으로 탕기의 은혜에 보답했다. 그의 온정을 잊지 않은 화가들은 탕기를 페르(Père, 아버지, 영감, 아저씨)’라고 불렀다.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7)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1888)

 

 

 

탕기가 물감을 파는 가게 주인이지만, 나름 그림 보는 눈이 있었다. 탕기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 목판화(우키요에)에 관심이 많았다. 그의 가게에 오는 화가들 역시 자연스럽게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되었다. 파리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화가도 탕기가 수집한 목판화에 푹 빠졌다. 이 화가 또한 탕기에게 신세를 지면서 생활했다. 그리고 가게를 찾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하게 지냈다. 네덜란드 출신 화가는 마음씨 좋은 탕기를 위해서 초상화를 제작했다. 탕기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앉아 있다. 그의 태도에 인자한 품성이 느껴진다. 초상화 배경에 일본 목판화들이 가득하다. 이 그림에 관한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탕기의 초상화가 너무 성의 없게 그려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네덜란드 화가는 탕기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과 자신의 예술적 뿌리를 드러내려고 일본 목판화를 그려 넣었다. 부전자전(父傳子傳). 아버지의 모습이나 품행은 아들이 그대로 전해 받는다. 화가는 탕기를 만나게 되면서 일본 목판화의 매력에 빠졌고, 인상주의 회화에 주목했다. 탕기의 심미안을 화가가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화가의 친아버지는 예술에 자도 모르는 목사였다. 크게 낙심했던 화가는 파리에서 진짜 아버지를 찾았다. 파리의 이방인을 친절하게 대해주고, 자신의 그림을 알아주는 소중한 아버지. 탕기는 화가의 삶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아버지(Père)였다.

 

이 네덜란드 화가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젊은 나이에 자살하고 말았다. 화가의 장례식에 탕기가 와주었다. 화가의 생의 온기가 멈추는 순간, 그가 남긴 그림의 온기도 사라진다. 탕기는 자신이 보관해둔 화가의 그림이 허무한 운명을 맞이한 것에 안타까워했다. 탕기는 위대한 사람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무명 화가의 그림에 이토록 애정을 가졌으니.

    

 

 

 

 

빈센트 반 고흐 글라디올러스 화병(1886)

 

! 가여운 빈센트! 어떻게 그런 불행한 일이...... 미르보 씨! 얼마나 엄청나게 불행한 일입니까! 그처럼 천재적인 사람이! 그처럼 선량한 인간이! 잠깐, 그 사람의 중요한 작품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요? 그의 그림들은 걸작입니다!”

 

사람 좋은 탕기 영감은 자신의 상점에서 4, 5점의 캔버스를 가지고 돌아오더니 우리들 주위에 있는 의자의 발판 틀에다 기대어 놓았다. (중략)

 

인간이 그렇게 죽어야 합니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이렇게 슬플 수가! 내가 보기에 당신은 아직 빈센트가 그린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알지 못하는 것 같구려. 마지막 그린 그림 중의 하나올시다. 대단한 작품이지요! 그 사람처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글라디올러스 화병을 찾아보렵니다. 몇 분만 기다려 주세요.”

 

(옥타브 미르보의 <화가들> 중에서, 파스칼 보나푸 반 고흐, 태양의 화가146~147쪽 발췌 인용)

    

 

 

탕기(湯器)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서민적 체취가 짙게 느껴진다. 탕기(Tanguy)는 소탈하다. 화려하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그들을 자주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없어선 안 될 소중한 존재들이다. 탕기(湯器)는 밥그릇이 되어도 투정하지 않는다. 탕기(Tanguy)는 화가들이 돈이든 물감이든 빌려달라고 자신을 찾아오면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릇의 크기나 모양은 정신의 크기나 됨됨이와는 상관이 없다.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맥(漂麥) 2015-12-04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탕기(湯器)와 탕기(Tanguy)는 외형은 초라해 보여도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비운 자리가 깨끗하게 넓은 귀한 그릇이다... 마음에 듭니다.^^

cyrus 2015-12-07 09:44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yureka01 2015-12-04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시대의 예술가를 알아보는 안목..그 온기를 느끼는 공감력...결국 인품에서 나오나 봅니다.그래서 위대한 예술가들 뒤에는 후원자가 꼭 필요한 이유더라구요..

cyrus 2015-12-07 09:46   좋아요 1 | URL
유레카님의 글에 제 글을 먼댓글 설정할려고 시도했는데, 실패했어요. 유레카님의 블로그에 먼댓글 설정이 안 된 것 같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12-04 20: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그 보니 제가 탕기와 룰랭을 혼동했거든요. 탕기는 물감 파는 사람이었고, 룰랭은 우체부였죠... ㅎㅎㅎㅎㅎ 룰랭이 그렇게 자주 찾아갔다네요. 술 마시러... 갈 때는 고흐 형편을 알고 있어서 늘 술과 안주가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cyrus 2015-12-07 09:47   좋아요 0 | URL
저는 탕기가 그림 파는 화상인 줄 알았어요. 착각했어요. 그림물감 가게 사장이라는 사실을 이 글을 쓸 때 준비하면서 알았습니다. ^^

서니데이 2015-12-04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릇 사진을 보다보니, 뚜껑이 있는 그릇이 많이 있네요. 전에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뚜껑있는 국그릇을 집에서 쓰지 않아서 그런지, 아주 오래 전에 썼던 그릇처럼 느껴져요.
고흐는 동생이 먼저 생각나는 편인데, 앞으로는 탕기는 그림보다 그릇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cyrus 님, 편안한 밤 되세요.^^

cyrus 2015-12-07 09:53   좋아요 0 | URL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뚜껑 있는 그릇을 가정집에서 보는 것이 드물어졌어요. ^^

yureka01 2015-12-07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 .몰랐습니다..저도 이런 기능을 모르겠더라구요.트랙백 걸기..해본적이 없었거든요 ..ㅎㅎㅎ^^..인용.. 감사합니다~~~

cyrus 2015-12-07 14:49   좋아요 1 | URL
가끔 이웃이 쓴 글을 읽고, 영감을 얻으면 감사의 의미로 먼댓글 기능을 사용합니다. ^^
 

 

 

 

오늘 오랜만에 MBC에서 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를 봤다. 본방송을 챙겨보지는 않지만, 가끔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 된다. 오늘 방송된 내용 중 하나가 영국의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의 사랑 이야기다. 화가의 연애담은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존 에버렛 밀레이  「성 아그네스의 전야」 (1863년)

 

에피와 결혼한 이후에 그려진 그림이다. 밀레이는 에피를 그림 속 여인의 모델로 썼다. 그러나 작품이 공개되었을 때 비평가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여인의 모델이 ‘러스킨의 전처’라는 사실에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거부감이 느꼈던 것일까. 비평가들은 그림 속 여인이 ‘앙상하다’, ‘역겹다’라는 식으로 심한 표현을 써가면서 비난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모습을 그릴 화가가 내정된 소식을 듣자마자 화를 낸다. 그 화가는 존 에버렛 밀레이. 무엇이 여왕을 분노하게 하였을까. 밀레이의 사생활이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원인이었다. 밀레이가 유부녀와 결혼한 것이 문제였다.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빅토리아 여왕 시대는 엄격한 도덕성의 사회였다. 근면, 성실, 종교적이고 도덕적 가치가 강화되는 가운데 여성들은 성적 충동을 가져서는 안 되고, 재혼을 부도덕한 죄를 범한 것으로 여겼다. 밀레이는 실력이 출중한 화가임에도 불구하고, 이혼 경력이 있는 여자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세간의 비난을 받아야 했다.

 

밀레이와 결혼한 여자는 에피 밀레이. 화가를 만나기 전의 이름은 에피 러스킨이었다. 그녀의 전남편은 빅토리아 시대 최고의 미술평론가인 존 러스킨이다. 밀레이, 에피 그리고 러스킨. 이 세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밀레이에게 러스킨은 자신의 재능을 널리 알려주게 한 은인이었다. 밀레이는 러스킨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에피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밀레이와 에피는 ‘화가-모델’의 관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사회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랑을 더욱 간절한 원했던 사람은 에피였다. 그녀는 남편 러스킨과 6년 동안 성관계를 하지 못했다. 러스킨은 그녀와의 성관계를 거부했다. 아이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임신으로 에피의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식으로 궁색한 변명을 했다. 공허한 부부 생활이 지겨운 에피는 밀레이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일단 여기까지가 TV에 방송된 내용이다.

 

 

 

 

 

 

 

 

 

 

 

 

 

 

 

사실 러스킨이 성관계를 거부한 이유는 따로 있다. 미술평론가답게 그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 심취했고, 옛것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미술을 강조했다. 그런 미술양을 공유한 화파가 바로 빅토리아 시대에 유행했던 ‘라파엘 전파’다. 밀레이는 이 화파에 속했다. 러스킨은 자신의 미적 취향과 실생활을 혼동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벌거벗은 여신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빠진 나머지, 자신의 아내도 여신상처럼 아름다울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다. 러스킨은 아내의 체모를 처음으로 본 순간부터 성관계를 피하기 시작했다. 털이 있는 아내의 몸에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에피는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마음은 점점 밀레이로 향한다.

 

에피의 말 못한 결혼 생활을 알게 된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친정으로 호출했다. 하필 그 날은 러스킨과 결혼한 지 6주년이었다. 그녀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교회 법정에 결혼 무효 소송을 신청한다. 말 그대로 러스킨에게 이혼을 요구한 셈이다. 교회 법정은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다. 이로써 러스킨은 결혼 생활 6년 만에 이혼한다. 러스킨은 전처와 친구와의 결혼을 막으려고 ‘우정’을 강조해보지만, 에피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세 사람의 삼각관계는 전쟁 소식보다 더 회자에 올랐다. 대중은 유부녀가 결혼 관계를 거부하는 시도를 충격적으로 받아들었고, 특히 화가의 친구가 그의 아내를 빼앗는 과정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왕 또한 이 사실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존 에버렛 밀레이  「나의 첫 설교」(1863년), 「나의 두 번째 설교」(1864년)

 

 

 

밀레이는 우정과 자신의 명예를 과감히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했다. ‘부도덕한 만남’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반대로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사람은 보란 듯이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고, 에피는 밀레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켜줬다. 밀레이는 설교에 참석하는 자신의 딸을 그린 그림으로 명성을 얻는 데 성공한다. 비록 늦은 감은 있지만, 밀레이는 준 남작의 자리에 오르고, 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896년에 왕립 아카데미 회장으로 선출된다.

 

 

밀레이와 에피의 사랑 이야기는 이렇게 행복하게 끝이 난다....고 말할 줄 알았지.

 

글이 조금만 더 길어져도 끝까지 참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밀레이의 성공에 가려져야만 했던 억울하고도 슬픈 사연이 있으니까.

 

밀레이는 자신의 실력으로 ‘은인의 아내를 빼앗은 자’라는 오명을 벗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에피는 ‘전 남편을 버린 이혼녀’라는 낙인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에피는 여왕이 주관한 공식 행사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밀레이의 명성이 더욱 높아질수록 그녀의 사회적 위치는 더욱 좁아진다. 명사들의 사교장이라 할 수 있는 무도회장을 출입할 수 없었다. 에피는 자신에게 ‘러스킨의 전 부인’, ‘이혼녀’라고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밀레이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여왕은 그의 집에 시종을 보내 도와줄 일이 있는지 묻는다. 밀레이는 석판에 “여왕 폐하께서 에피를 한 번만이라도 만나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적는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 때문에 정신적으로 고생하는 에피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향한 에피의 사랑은 진실하다는 점을 세상에 알리는 것. 여왕에게 전해준 부탁은 유언이 된다. 여왕은 그의 유언을 들어준다. 하지만 에피가 명예를 회복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늙었고, 시력마저 떨어진 상태였다. 밀레이와 재혼한 지 40년 만이다. 에피 밀레이. 그녀는 사랑과 성을 억압했던 빅토리아 시대에 정말 고통스럽게 46년 간 부부 생활을 감내했다. 가부장적 사회는 그녀의 성적 욕망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에피가 밀레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죽을 때까지 섹스리스 부부 생활을 했을 것이다. 단지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과감하게 재혼을 선택해보지만, 도덕성을 강조하는 엄격한 사회는 그녀의 자유를 옮아 매려고 했다. 에피 밀레이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을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실천한 선구자적 여성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이 2015-09-15 0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런 멋진 언니 너무 좋아_ 에피 밀레이는 운이 좋았지만 불행하게 침묵을 강요당하는 여인들이 너무 많아_ 아직까지도.

cyrus 2015-09-15 11: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금도 돌싱녀에 대한 편견이 많아요.

인디언밥 2015-09-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맨 위에 그림 좋아요.. 사연을 들어서그런가 확 와닿는 감정

cyrus 2015-09-16 13:21   좋아요 1 | URL
‘존 에버렛 밀레이’로 검색하면 좋은 그림이 많이 나옵니다. 햄릿의 미친 연인 오필리아를 그린 사람도 밀레이입니다.

에이바 2015-09-16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피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밀레이도 멋지고요. 빅토리아 시대나 백년이 지난 지금이나 돌싱에 대한 눈치는 여전한 것 같다는. 지금은 그래도 쬐금 더 낫지만요. 이 책 출간된 후 읽었는데 기억나지 않아 찾아보니 2003년이군요! 십이년이 지났어요. 다시 한번 읽어볼까 싶어요.

cyrus 2015-09-16 13:41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내용의 책인데 품절되어서 아쉬워요. 유명 화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한 권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사실 이 책에 나온 이야기 중 몇 개는 서프라이즈에 방송되었을 거예요. 오래전에 모딜리아니, 달리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요.
 

 

 

 

 

 

 

 

 

 

 

 

 

 

 

 

 

 

 

 

 

 

 

 

 

 

 

 

 

 

 

 

 

 

 

 

 

 

 

 

반 고흐 「신발」 (1887년)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 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반 고흐라는 이름에서 가장 많이 따라붙는 단어는 광기. 정신병에 시달린 끝에 권총 자살을 선택한 충격적 최후 때문이다. 정신병 환자의 광기가 위대한 예술가의 열정으로 포장되는 것이 못마땅하다. 대중은 반 고흐를 미친 화가로만 기억하는 탓에 그의 강렬한 색과 상징적 표현이 불타는 정신세계에서 번쩍 태어났을 거라고 오해한다. 반 고흐는 정신이 미쳐버려서 갑자기 그림을 잘 그려진 것이 아니다. 여러 화가와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만족스러울 때까지 데생을 열심히 그렸다. 그를 미친 천재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노력을 잊히게 하는 하나의 오해일 뿐이다.

 

반 고흐는 절대로 미치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을 유난히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애정 결핍에 울부짖고, 몸부림쳤을 뿐이다. 늘 자신의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고독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살았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매춘부가 있는 방을 찾았고, 괴롭지 않기 위해서 빈속에 압생트를 마셨다. 마지막으로 총구를 심장의 스위치에 겨눌 때까지 반 고흐에게 그림 작업은 고독과의 싸움을 멈추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반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데생을 열심히 그리는 이유를 설명한다. 첫 번째 이유는 정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두 번째 이유로는 비용이 많이 드는 유화보다 데생을 그리는 것이 수월하다. 고흐가 편지에서 언급하지 않은 세 번째 이유도 있다.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반 고흐 「타라스콩으로 향하는 길을 걷는 화가」 (1888년)

 

 

 

반 고흐는 그림으로 그릴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서 산책도 즐겼다. 1888년 아를에 머물렀을 시기에 산책하는 고흐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어느 프랑스 사람이 간직하고 있다가 2005년에 열린 경매에 내놓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고흐는 아를에 정착한 후,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의 풍경에 반해 아침마다 산책했다. 반 고흐는 아를의 따사로운 햇살과 전원 풍경을 사랑했다. 반 고흐는 유난히 걷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네덜란드에 살았던 시절에 쥘 브르통이라는 화가를 존경한 나머지, 직접 그를 만나려고 했다. 반 고흐는 10프랑을 챙기고, 프랑스 국경 너머의 지역까지 70km를 혼자서 걸었다. 이때의 경험을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자랑스럽게 밝혔다.

 

반 고흐는 울적할 때마다 집 밖으로 나가 지칠 때까지 걸었을 것이다. 걷기는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려 준다. 머릿속에 가득한 고뇌 찌꺼기를 깨끗이 비우는 과정이다. 소요학파가 느릿느릿 걸으면서 진리를 발견하려 했다면, 반 고흐는 걸으면서 자신의 몸을 자연 속으로 던졌다. 그는 산책하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고, 때로는 넘쳐나는 고독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 자연과 대화한다. 정원은 클로드 모네만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비록 모네처럼 멋진 정원이 딸린 집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반 고흐도 정원을 무척 사랑했고, 그림으로 남겼다. 걷는 것이 몸에 밴 반 고흐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 얼마나 갑갑했을까. 1889년 아를 병원에 입원한 그해 9월에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6주간 한 발자국도 밖에 나가지 못했어. 정원에도 못 나갔지. 하지만 다음 주에는 시도해 볼 거야라고 썼다.

 

반 고흐는 평생 아홉 점의 구두 그림을 남겼다. 하이데거는 그림 속 신발 주인은 고단한 노동의 삶을 살았던 농부 혹은 아낙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미술사학자 샤피로는 하이데거의 해석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제작 연대를 근거로 내세워 반 고흐의 신발이라고 주장했다. 샤피로의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신발 그림은 반 고흐의 자의식을 표현한 자화상이다. 필자는 샤피로의 해석에 전적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다. 사실 하이데거의 해석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하이데거는 반 고흐가 밀레처럼 일하는 농부의 모습을 그렸던 경험을 근거로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반 고흐는 밀레를 존경하던 습작 시절을 한참 지난 뒤에 신발 그림을 그렸다. 신발은 반 고흐가 죽을 때까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생필품이다. 무겁기만 한 고독을 양쪽 어깨에 짊어진 화가가 걸을 수 있도록 지탱해준 든든한 연장(延長)이다. 너덜너덜해진 신발에는 반 고흐의 외로움이 보이고, 거기에 고독한 인생의 체취가 남아있다. 이제 신발의 주인은 죽고 없어졌다. 틈만 나면 산책하는 신발 주인이 없어지면서 신발은 자유롭다. 그러나 그림 속 신발은 주인의 부재를 슬퍼하며 울고 있다. 소금기로 남아야 할 신발의 땀 자국은 외롭게 계속 길을 걸은 자의 눈물이 된다. 신발은 진실을 알고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07-18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7-19 15:05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틀린 글자를 알려줄 땐 비밀 댓글로 설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stella.K 2015-07-18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 맞아. 고흐는 외로움의 화가지 광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두 그림을 보면 뭔가 짠해. 그지?
저 구두 그림과 시가 참 절묘하다.ㅠ

cyrus 2015-07-19 15:08   좋아요 0 | URL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다가 문득 반 고흐의 신발 그림이 생각났어요. 묘하더라고요. 외로운 반 고흐의 신발을 소재로 쓴 시 같았어요.

초딩 2015-07-18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 자연이나 사람을 (또는 사랑) 을 아름답게 표현한 한국 시인과 시집 좀 추천해주실 수 있으세요? 표현 아름다운.
시대는 상관 없구요 :)
좋아하시는 시인의 시집을 말씀해주셔도 감사하겠습니다. :)
일방통행처럼 요청 드려 죄송합니다. 인용하신 시가 너무 좋고 또 요즘 한글말이 아름다운 시를 읽어 보고 싶어서 찾고 있던 중이어서요.

cyrus 2015-07-19 15:12   좋아요 0 | URL
제가 상대방에게 책을 추천해본 일이 잘 없는데다가 최근에 시집을 즐겨 읽기 시작한 터라 아로님이 좋아할만한 시집을 추천하기가 어렵네요. ㅎㅎㅎ 제가 선호하는 시인은 문인수, 황동규, 정호승, 안도현입니다. 이 분들이 쓴 시가 어렵지도 않아서 좋아해요. ^^

북다이제스터 2015-07-18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넘 좋아요. 이러다 국내 고흐 전문 일인자 되실 것 같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

cyrus 2015-07-19 15:1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요즘 고흐 관련 책만 읽다가 글의 소재가 나오면 바로 쓰는 편입니다. 그런데 북플은 ‘고흐’ 마니아를 만들어주지 않네요. ㅎㅎㅎ

라스콜린 2015-07-18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때 마다 감탄^^..) 이제야 비로소 저 신발에서 고흐의 외로움이 느껴지네요

cyrus 2015-07-19 15:15   좋아요 0 | URL
소설이나 영화에 비춰진 고흐가 아닌 정말 고흐의 실제 삶을 알고 난 뒤에 그의 그림을 보면, 진짜 그림에 대한 느낌이 확 옵니다. 사실 예전에 고흐의 신발 그림을 눈여겨보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고흐 책을 읽다보니까 저 신발 그림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yamoo 2015-07-19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새 그림 관련 페이퍼가 많네요. 좋습니다. 단지, 개인적으로 고흐는 좀 지겨워지는 감이 있어서요. 요즘은 미술책보단 건축쪽 책을 사재기를 하고 있어 미술 관련 책을 읽지 못해 이런 페이퍼가 참 유익합니다~ㅎㅎ

cyrus 2015-07-19 15:17   좋아요 0 | URL
저도 고흐 책을 3주 동안 읽으니까 지겹습니다. ㅎㅎㅎ 그래서 고갱에 관한 책도 읽고 있습니다. 저도 건축 책도 읽어봐야 하는데, 야무님께서 건축 분야 책을 추천해주실 수 있습니까? 기본 지식이 없다보니까 저 같은 초보 독자는 뭐부터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


바람향 2015-07-1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고흐를 좋아해서 이런 글을 만나니 반갑네요^^ 예전에 서울 미술 전시회에서 고흐의 유명하지 않은 그림 한 점을 봤습니다. 제목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그냥 풍경화의 작은 그림이었는데요. 그래도 고흐의 실제 그림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벅찬 기분을 느꼈습니다. 고흐의 유명하고 좋아하는 작품을 실제로 본다면 대체 어떤 기분을 받을지 상상도 안되었는데요. 언젠가는 고흐의 실제 작품을 꼭 봐야지,,, 다짐만 하고 있답니다^^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ㅎ

cyrus 2015-07-20 18:56   좋아요 0 | URL
바람향님이 가본 전시회를 저도 봤습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혼자서 서울까지 갔어요. 생각보다 고흐의 그림들이 대체로 크기가 작았어요. 자화상도 그렇고요. 지금 대구에서 고흐 미디어 아트 전이 열리고 있는데 역시 실물로 보는 것과 느낌이 확 차이가 났어요. ^^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자화상이라고 해서, 거울에 비추듯 자신의 모습을 사실적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외부에 비치고 싶은 이미지, 오래 남기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거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명성을 얻었던 렘브란트 역시, 자화상 속의 자신이 좀 더 거장답게 보이길 원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는 어두운색과 그늘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제 젊은 날의 모습은 없고 늙고 볼품없는 노인이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에 주목하면서 평생 자신을, 아니 영혼까지를 화폭에 담아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철저하게 살펴봤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점점 늙어가는 삶에 대한 초탈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반 고흐의 자화상은 극도의 불안감에 대한 적극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자화상에는 일관되게 심각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시선이 있다. 절망하는 한편에 도전의식이 자리 잡고, 불완전하고 불안해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갈구한다.

 

이름난 화가 중에는 유독 자화상을 그린 화가가 많다. 반 고흐와의 악연으로 알려진 고갱 또한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고갱의 인기는 반 고흐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반 고흐의 그림은 꾸준히 복제되고, 그의 이름이 들어간 노래는 지금도 라디오에 흘러나온다. 반면, 고갱의 이름은 반 고흐가 일으켰던 귀 절단 사건을 소개할 때에만 언급될 뿐이다. 이 이야기에서 고갱은 반 고흐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 최악의 파트너가 된다. 고흐의 자해 소동이 신문에 보도되어 동네 전체에 퍼지게 되자, 고갱은 아무 말 없이 노란 집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반 고흐의 귀는 그 자신이 자른 것이 아니라 펜싱을 했던 고갱이 잘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도 있었다. 올드한 세대라면 반 고흐의 치열한 삶을 그린 영화 ‘열정의 랩소디’에서 고갱 역으로 분한 앤서니 퀸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반 고흐의 엄청난 인기에 밀리는 바람에 우리나라에서 고갱은 과소평가를 받고 있다. 고갱의 자화상이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자화상 못지않게 흥미로운 그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된다. 알고 보면 고갱도 반 고흐처럼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다. 반 고흐와 렘브란트처럼 고갱도 기쁨과 슬픔이 느껴지는 자화상으로 자신이 처한 주변 상황을 이야기했다. 

 

 

 

 

 

폴 고갱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 (1885년)

 

 

 

고갱이 1885년에 그린 자화상을 보라.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초창기 때 제작한 것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그냥 평범한 느낌을 주는 자화상이다. 그렇지만, 자화상에 묘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그림 속 고갱은 뭔가 쫓기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고갱이 앉은 공간이 비좁아 보인다. 고갱의 한쪽 손은 이젤로 향해 있지만, 붓을 확실하게 쥐어지지 않고 있다.

 

이 자화상의 제작 시기는 고갱이 화가가 되려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3년 차로 접어든 해이다. 원래 고갱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는 먹고 살기에 충분했던 주식중개인이었다. 이때 당시만 해도 고갱에게 미술은 취미였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분을 맺었지만, 모네와 르누아르는 고갱을 독창성이 부족한 아마추어 화가로 여겼다. 1882년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고갱은 실직자 신세로 전락했다. 고갱 가족들에게는 실직자가 된 가장의 모습에 절망했으나 고갱 본인은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중대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섯 아이를 키우는 덴마크 사람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에 전념하기로 했다. 곧 마흔을 앞두는 남편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아내는 탐탁지 않았다. 아내의 냉정한 태도는 외로이 그림을 그리는 고갱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대중과 평론가들은 고갱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이 있는 보금자리와 화가들의 세계, 둘 중 한 곳에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고갱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불만족스럽고, 그림에 대한 내적 고민이 많았다.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은 그림에 열중하는 화가의 모습이 아니라 불투명한 미래 앞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가장의 모습이다. 좁게 느껴지는 공간은 고갱의 열악한 삶을 보여준다.

 

 

 

 

 

 

폴 고갱 「레 미제라블」 (1888년)

 

 

 

「이젤을 앞에 둔 자화상」을 그리고 난 뒤, 3년이 지나서야 동료 화가들은 고갱의 능력을 인정했다. 고갱은 브르타뉴 지방의 퐁타방이라는 시골 마을에 머물면서 친분이 있는 화가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토론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퐁타방 파’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화가 모임이 만들어지면서 고갱은 퐁타방 파를 이끄는 대표 화가로 인정받았다. 이때가 고갱의 첫 번째 전성기였다. 1888년에 제작된 「레 미제라블」은 성공대로를 걸으면서 한결 여유로워진 ‘화가’ 고갱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일단 1885년에 그린 자화상에 비하면 색채가 상당히 밝아졌다. 고갱은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으로 묘사했다. 그림 오른쪽 하단에 ‘레 미제라블, 빈센트, 그리고 고갱’이라는 사인이 있다. 고갱은 이 자화상을 반 고흐에게 선물로 주었다. 친분이 있는 화가들은 자신의 모습이 있는 자화상을 서로 주고받았다. 반 고흐가 먼저 자신의 자화상을 고갱에게 주었고, 이에 대한 답례로 고갱은 「레 미제라블」 자화상을 제작한 것이다. 서명 위에 있는 사내의 옆모습이 그려진 그림은 퐁타방 파 소속 화가였던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이다. 베르나르는 고갱과 반 고흐와 친했다.

 

하지만 고갱은 여전히 자신이 대중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사실 그가 주도한 ‘퐁바방 파’는 새로운 기법을 추구하는 진보적인 화파였으나 인상주의파의 영향력만큼으로 대중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외면 받은 장발장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반 고흐와 베르나르에 비하면 고갱은 이들보다 좀 더 앞선 화가임은 분명했다. 고갱이 아무리 장발장 코스프레를 했어도 고갱 특유의 매서우면서도 생기 있는 눈빛은 그대로다. 고갱은 눈빛으로 자신이 반 고흐와 베르나르보다 한 수 더 위라는 점을 은근히 과시한다.

 

 

 

 

 

 

폴 고갱 「황색 그리스도 있는 자화상」 (1890년)

 

 

「황색 그리스도 있는 자화상」은 고갱의 자화상 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왼쪽에는 1889년에 완성된 「황색 그리스도」가, 오른쪽에는 자신의 얼굴을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한 도자기 병이 놓여 있다.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상을 그리는 장르라서 예수의 얼굴이 오른쪽 아래로 향해 있다. 이 자화상에서 예수는 예술가의 고뇌를 상징한다. 고갱은 예술에 대한 외로운 투쟁을 경건하게 묘사하기 위해 예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그림 왼쪽에 배치했다. 항아리 병은 고갱이 그토록 동경했던 '야만', '원시'를 상징하는 페르소나다. 그는 문명의 때에 묻지 않은 고귀한 야만인이 되고 싶은 문명인'이었다. 파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타히티로 가서 '야만'의 가면을 써서 타히티 사람이 되었고, 다시 파리로 돌아올 때는 '야만'의 가면을 벗고 문명인이 되었다. 고갱의 세 가지 얼굴을 그린 작품으로, 화면 안에서 화가는 자신의 다양한 인격적 측면을 보여 준다.

 

 

 

 

 

 

폴 고갱 「골고다 근처의 자화상」 (1896년)

 

 

 

「골고다 근처의 자화상」에서 고갱은 예수로 변신했다. 그러나 고갱의 표정은 침울하다. 검은색으로 가득한 골고다 언덕은 고갱을 집어삼킬 듯하다. 예수라기보다는 늙고 지친 병자처럼 보인다. 말년의 고갱은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 못해 다시 열대의 섬으로 돌아가서 초라한 여생을 보낸다. 파리는 고갱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했고, 가족과 동료 화가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매독과 피부병은 노쇠한 고갱을 더 지치게 하였다. 이제 고갱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죽음. 어두컴컴한 배경 속에 저승사자가 고갱을 노려본다. 고갱은 목덜미에 스치는 저승사자의 눈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생기 잃은 고갱의 눈빛에는 삶에 대한 미련을 찾아볼 수 없다.

 

이제 예술가의 자화상은 더 이상 단순한 인물화에 머물지 않는다. 화가의 얼굴은 저마다의 경험과 세상의 풍파에 의해 음영이 달라진다. 자화상은 한 사람의 일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그림이다. 우리는 저만치 떨어진 거리에서 캔버스 안에 남아있는 한 사람의 인생 드라마를 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이바 2015-07-14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과 6펜스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죠. 자유로운 영혼이여.. 첫번째, 세번째 자화상만 봤었는데요.. 렘브란트 자화상을 보면 당시 그가 앓았던 질병도 짐작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cyrus 2015-07-15 18: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최근에 고흐의 자화상을 통해서 고흐의 병명을 추정하는 연구 결과도 나왔어요. 몸의 소설은 아직 안 읽어봤습니다. 고갱 책을 더 찾아봐서 읽은 뒤에 소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

yamoo 2015-07-14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고갱이군요!! 고갱에 관계된 미술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그의 자서전 격이 책도 봤습니다. 근데, 아직달과 6펜스는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관심있는 화가를 보니 반갑네요...데이비드 호크니도 함 다뤄주세요. 저 완전 좋아하는 화가입니당~ㅎ

cyrus 2015-07-15 18:16   좋아요 0 | URL
저도 몸의 소설은 안 읽어봤습니다. 그래도 고갱의 실제 삶 자체가 드라마틱합니다. 그가 처한 상황에 연민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족을 외면하고 타히티 소녀들을 자신의 성적 욕구를 푸는 대상으로 여기는 고갱의 모습이 불편했습니다. 나중에 호크니의 책을 다시 잃어봐야겠어요. ^^

바람향 2015-07-16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갱보다는 <달과 6펜스>를 먼저 읽었는데요. 주인공이 이제 자신만의 삶을 살겠다며 가족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는데, 그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주인공이 실제 화가인 고갱이었다는 것을 알고 고갱의 삶이나 작품들을 찾아보기도 해서 제게는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책과 화가네요^^ㅎㅎ cyrus님~ 미술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ㅎㅎ

cyrus 2015-07-16 20:05   좋아요 0 | URL
어렸을 적에 위인전으로 반 고흐와 고갱이 누군지 처음 알았어요. 두 사람의 삶에 관한 책을 읽으니까 위인전에서 봤던 것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어요. 특히 고갱이 아내와 자식이 있는데도 원주민 소녀들을 정부로 삼은 사실은 충격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