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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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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읽기 거북했던 소설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 중에는, 작품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과 독자 사이 혹은 둘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 있다. 텍스트의 해석 과정 모두가 독자의 계기를 포함한다는 해석학적인 맥락에서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 더 나아가서, 특정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서 독자가 평정을 잃게 되는 경우, 그 작품과 관련된 무언가에 끌려서 그 무언가가 보게 하는 것만을 볼 수밖에 없게 되는 경우, 다소 모호하지만 뭐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문학 작품이 주는 의미 효과가 아니라, 문학 작품과 관련된 의미 효과라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좀 더 확장하자면, 작품과 독자 외에 이 둘의 관계를 결정짓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제3의 항목이 개입되는 경우를 고려할 수 있다. 이러한 개입이 독서의 방향에 영향을 끼치고 그럼으로써 작품을 온전히 읽어내는 데 장애가 되는 경우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앞서 밝힌 갈래들을 염두에 두고 좀 더 명확히 말해 보자면, 이 작품에 대한 타인의 언급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몇 차례 겪었던 것이다. 이 작품이 어떻게 생겼는지 감을 잡으며 비로소 다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원제로 새롭게 번역된 것을 읽은 지금에 와서이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어낼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내 기억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독서 체험이 거북했다. <노르웨이의 숲>은 내가 군 복무했을 때 어느 내무반에 가면 한 권씩 꽂혀 있었다. 한번은 고참 하나가 내게 말했다. 이건 그저 여자 세 명하고 연애하고 섹스하는 얘기라고(사실 더 적나라한 군대 말투로 말했었다). 그러고 보니 아니랄 것도 없었다. <노르웨이의 숲>에는 세 가지 타입의 여자가 나온다. 순수한 나오코, 발칙하고 되바라진 미도리, 달뜬 청춘 시절을 지나온 연상의 레이코 여사. 이 땅의 많은 청춘들은 와타나베이기를, 미도리가 되기를 염원했을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와타나베 분위기를 내고 있어도 미도리 같은 여자아이의 눈길을 끌 수 없다는 데 있었지만.

 

책장을 펼치고 읽어가다가 어느 순간, 나는 내가 노르웨이의 숲 한가운데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디까지 읽었나 하는 궁금증에 책의 뒤쪽을 몇 차례 더듬어 보았다. 낭패감은 여기서 찾아왔다. 뒷부분을 펼쳐보면 어느 곳이든 기억에 없는 데, 거기까지 읽어가다 보면 읽은 것은 분명하게 되고, 또 그렇게 되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건망증적 고아가 된다는 것에 무척 기분을 상했고 나는 결국 책읽기를 그만두었다.

 

이런 정도면 그냥 안 읽어도 좋을 텐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나는 4년 만에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끝까지 읽어보겠다는 욕망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 <노르웨이의 숲>에 대해서 짤막한 감상을 세련되게 말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살짝 부러 우면서도 샘이 났던 건 사실이다.

 

 

 

 다양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무색의 숲

 

<노르웨이의 숲>은 열려 있는 작품이다. 세상에 나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 제 빛깔로 채색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색채가 없는 소설이다. , 이 소설은 해석을 달고 있지 않다 하겠다. 서사의 구조 자체가 실상은 회상 형식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술자에 의한 편집자적인 논평이나 요약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소설에서 서술자의 태도나 인생관, 의식 수준 등은 서술 자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숲>은 그렇지 않다. 서술 시점의 서술자가 함부르크 공항의 자신을 바라보며, 서른일곱 살이던 그때의 그가 다시 1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이중의 회상 구조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상의 주체에 의한 의미부여 등이 거의 없는 것이다.

 

소설은 극적이다. 극문학이 그러한 것처럼 현재 빚어지는 장면 장면들이 그 자체로만 제시될 뿐, 서술자에 의한 해석이나 규정 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서술자 자신이 작품의 표면에서 사라져 버린 까닭이다. 그 빈자리에서 독자들인 우리는, 저마다 제 기억을 되살리며 작품의 서사에 나름의 빛깔을 덧보탤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자유는, 시점 화자이자 주인공인 와타나베로 해서 한층 더 확장된다.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는 작품의 주 내용이 철저히 와타나베의 시선에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며, 둘째는 그 와타나베라는 인물 자체가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노르웨이의 숲>은 철두철미 와타나베가 보고 듣고 겪는 것, 그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이야기해 주는 것, 그가 보내고 받는 편지들의 내용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곧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겪지 않은 일들, 그가 알 수 없는 일들은 작품 속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나지 않을 때, 나오코, 미도리, 레이코도 이 작품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상념 속에서만 희미하게 존재할 뿐이다.

 

더 나아가서, 이 희미한 존재들은 정말로 희미하게 존재하는데, 이는, 그들과의 관계 맺음이 와타나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와타나베에게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성년식을 겪고 있다 할 열아홉 스무 살의 와타나베는 세상을 해석하려는 의지도 세상을 읽고서 의미를 추려 내거나 구축할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열아홉 스무 살의 나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할 테니 조금도 이상할 건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인물이 그런 면모만으로 작품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앞서 말했듯이, 작가로서의 서술자의 측면이 거의 부재한 것은 일반적인 소설 유형에서는 매우 드문 까닭이다. 특징적으로 요약하자면 '침묵하는 서술자의 설정'이라고 할 이러한 특징이 <노르웨이의 숲>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작품의 각 장면 장면에 나름대로의 의미를 덧칠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르웨이의 숲>이 자기 고유의 색채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11년 뒤에 다시 한 번 그곳을 순례할 수 있을까?

 

작품이 열려 있다 해도 그렇게 열어 놓은 하루키의 머릿속까지 모호하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작품의 평가에 소용될 만큼의 작가론 차원의 정보를 나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결국 작품의 평가를 시도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인데, 어찌 됐든 다행인 것은, 그럴 의도가 내게는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상실의 시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건 아니라는 태도로, 때론 조금 깎아내리는 말투로 이 책을 둘러싼 이런저런 수다에 열심히 끼어들어 왔다(가벼운 수다라기보다는 독설에 가까웠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좋든 싫든 나 역시 이 책으로부터 적잖은 세례를 받았던 게 틀림없다. 이번에 다시 읽게 되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문장에 주목했었다.

 

<상실의 시대>의 첫머리는 서른일곱이 된 와타나베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며 스무 살 무렵을 회상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서른일곱의 나이라... 지금으로부터 11년 뒤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삶을 실감으로 부딪쳐 느껴 보기도 전에 어쭙잖은 거리를 두고 멀뚱멀뚱 지내다 아까운 청춘 다 흘려보낸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시기. 그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면 나는 과연 이 책을 다시 한 번 펼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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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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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06] 주홍 글자

 

 

 

 

“그녀의 웃옷 가슴에는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꼼꼼하게 수를 놓아 환상적으로 멋을 부린 ‘A’ 자가 보였다. 그 글자는 아주 예술적으로 만든데다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공상을 마음껏 발휘한 것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었다.” (16쪽)

 

17세기의 미국 보스턴. 청교도정신으로 똘똘 뭉친 마을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사생아를 낳은 헤스터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주홍 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의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못 당당하게, 진정한 속죄와 참회로 이웃에 선행을 베풀면서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 ‘A’는 간통의 상징에서 점차 ‘Able’(능력)과 ‘Angel’(천사)의 의미로 승화되기까지 한다.

 

다른 쪽에는 그녀와 간통한 목사 딤스데일, 전 남편 칠링워스라는 인간형이 있다. 이들 역시 보이지 않는 ‘A’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딤스데일은 간통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죄책감에 의해 정신적인 고통(Agony)에 시달리며, 칠링워스는 그것을 알고 분노(Anger)에 찬 채 복수를 노린다.

 

넓게 보았을 때 딤스데일의 죄는 숨겨진 죄를 상징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묘사되는 병약한 모습과 죄를 숨기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죄가 헤스터의 죄보다 더욱 악한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호손은 죄를 저지른 행위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숨기는 은폐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딤스데일의 죄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칠링워드의 죄는 헤스터처럼 공개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드러난 죄는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상징한다. 작품 전반에 계속적으로 나타난 인간애를 상실한 그의 차가운 모습과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자의 비참한 결말은 칠링워드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 죄인가를 한층 더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홍글자 A를 평생 달고 다녀야 하는 헤스터는 공개적으로 ‘왕따’를 당한 채 변두리 오두막에 살며 바느질로 생계를 잇는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간통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당당하게 견디면서 융통성 없는 청교도의 권위에 도전하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산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딤스데일의 무덤 곁에 묻힌 그녀를 ‘청교도적 파우스트’라고 부르는 해석도 있다. 종교적 계율과 사회적 규범의 쇠사슬을 박차고 인간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며 개인의 참다운 자유를 구하려 한다. 물론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도둑맞은 칠링워스의 사유재산, 한낱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녀는 이러한 현실에 저항한 페미니스트였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 헤스터는 딤스데일이 사망한 뒤 청교도 사회를 떠나 유럽에 머물다 뒷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와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남녀 간의 모든 관계가 상호 행복이라는 좀 더 굳건한 토대 위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으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식을 기른 최초의 편친모(偏親母)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 상담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설은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주제의 천착을 통해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는 헤스터와 달리 딤스데일이 끝까지 자신의 죄를 숨기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두 사람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도 관련이 있다. 청교도 사회에서 간통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이지만 평범한 시민이 아닌 목사의 직분을 지닌 딤스데일에게는 더욱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7년 동안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헤스터와 딤스데일, 두 사람의 개인적 성품 차이일 수도 있지만 사회 구성원의 정직성은 사회적 관용 수준과도 관계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보는 타인 또는 사회 전체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리고 원치 않던 낙인에 대해 좌절하고, 숨기고, 때로는 평생의 상처로 안고 간다. 그러나 그 낙인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헤스터가 ‘간음의 A’를 ‘유능함의 A’와 ‘천사의 A’로 바꿨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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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
이솝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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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심 파괴, 이솝 우화

 

 

어떤 사람이 자기를 해코지했다는 이유로 여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는 실컷 앙갚음하려고 여우를 붙잡아 기름에 담갔던 밧줄을 꼬리에 매달고 거기에 불을 붙인 다음 풀어놓았다. 그러나 어떤 신이 그 여우를 풀어놓은 사람의 밭으로 인도했다. 때는 마침 수확기라 그는 울면서 뒤쫓아갔건만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우화 58 사람과 여우79)

 

 

무슨 잔인한 이야기일까. 생소하게 여기겠지만 실은 이솝 우화 중 한 꼭지다. 혹자는 어린이들이 즐겨 보는 이솝 우화에 이런 잔인한 장면이 있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수백 편의 이솝 우화에는 이보다 더 심한 장면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동심 파괴에 가깝다.

 

 

독수리와 여우는 친구가 되어 서로 가까운 곳에서 살기로 했다. 가까이 살면 우정도 두터워지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독수리는 높다란 나뭇가지 위로 날아올라가 그곳에 둥지를 쳤다. 여우는 나무 아래 있는 덤불 속으로 슬그머니 들어가 그곳에서 새끼를 낳았다. 하루는 여우가 먹을거리를 구하러 집을 비운 사이 역시 먹을거리가 떨어진 독수리가 덤불 위를 덮쳐 새끼 여우들을 채어가서는 제 새끼들과 함께 먹어치웠다. 집에 돌아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된 여우는 제 새끼들이 죽음보다도 복수할 수 없다는 것이 더 괴로웠다. (중략) 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독수리는 우정을 모독한 죗값을 치르게 된다. 사람들이 시골에서 염소를 제물로 바치고 있을 때 독수리가 내기 덮쳐 제단 위에서 불타고 있는 내장을 채어갔는데, 독수리가 그것을 제 둥지로 날라갔을 때 강풍이 불어와 내장의 불이 둥지 안의 마른 지푸라기에 옮겨 붙었던 것이다. 불이 불자 새끼 독수리들이 (아직은 날 수 없었기 때문에) 땅에 떨어졌다. 그러자 여우가 달려가 독수리가 보는 앞에서 새끼 독수리들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21~22)

 

 

이 이야기와 함께 전해 내려오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우정을 모독한 자는 피해자가 허약할 때는 복수를 피할 수 있어도 하늘의 벌은 피하지 못한다.”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내고 마는 복수의 연속성을 주제로 잔인하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초기 비극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의 동물 우화 버전을 보는 듯하다. 죄의 대가는 결국 천벌에 의해서 받게 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어린이용 우화로 각색한다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의 근간이 되는 복수의 필연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순수한 동심으로 가득한 어린이들에게 썩 권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 된다.

 

믿기지 않겠지만 앞에서 소개한 엽기적인 이야기들은 진짜 이솝 우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즐겨 읽던 그 내용과 전혀 다른 정본이다. 그리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중에는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장면이 더러 있다. 어떤 이야기는 육식동물인 여우와 초식동물인 당나귀가 함께 사냥하기도 한다.

 

사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솝 우화은 독일의 그림형제 동화집처럼 불행한(?) 운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내용이 잔혹했기 때문이었다. 그림형제 동화집은 독일에서 전해내려 오는 민담을 묶어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초판을 펴냈을 때 독일 부모들은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아이에게 어떻게 읽힐 수 있나라는 반응을 보였다. 잔인한 폭력성뿐만 아니라 과도한 성적 표현도 들어 있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그림형제의 작품은 대부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내용을 풀어내고 표현을 순화해 만든 동화. 이솝 우화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인간 세상의 권력구조를 표현했다는 인식 때문에 기독교 윤리가 지배하던 시기 때 외면 받았다. 우리에게 친숙한 어린이용 우화로 살아남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윤리적인 교훈을 강조하는 착한 이야기로 탈바꿈한 것이다.

 

 

 

 베짱이는 쇠똥구리로, 산신령은 헤르메스로

 

정본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원형을 알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원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솝 이후 수많은 세월동안 후대의 수많은 이야기꾼들은 정본에 손을 댔다.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용 이솝 우화를 비교하면 내용상 많은 차이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이솝 우화 한 꼭지로 개미와 베짱이가 있다. 베짱이는 일하지 않고 놀다가 겨울이 되어서 굶게 되어 후회한다. 베짱이는 여름철에 짝을 찾기 위해 양 날개를 비벼 울음소리를 낸다. 어린이용 우화에서는 베짱이를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로 등장한다. 반면 제대로 먹이를 저장한 개미는 삶의 여유가 있다. 정본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베짱이 대신 매미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이야기에는 쇠똥구리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쇠똥구리 역시 개미 못지않게 부지런한 생활을 하는 곤충이다. 쇠똥을 동그랗게 뭉쳐서 집으로 운반해 저장한다. 그런 쇠똥구리는 왜 겨울이 되자 개미에게 구걸을 했던 것일까? 이유가 너무나도 허무하다. 겨울에 내리는 비 때문에 모아 놓은 쇠똥이 녹아버려서.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유형은 간단하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강자와 약자. 강자는 약자에게 냉정하다. 먹이를 비축한 개미는 한순간에 빈털터리가 된 쇠똥구리를 꾸짖고 있다. 쇠똥구리에게는 조금 억울하게 느낄 수 있는 이야기다.

 

이 우화 한 꼭지로 인해 개미는 일약 근면’, ‘부지런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종의 비틀어 보기식으로 이솝 우화를 재해석하는 입장이 나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우화 속 개미를 현대인으로 비유하면 일개미. 쉬지도 못한 채 그저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다. 근면, 성실한 면모는 본받을 수 있겠지만 휴식 없는 노동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본 우화에 등장하는 개미가 선량한 이미지로만 나오는 건 아니다. 어떤 이야기는 개미의 특성을 비꼬기도 한다.

 

 

지금의 개미는 옛날에는 사람이었다. 개미는 농사꾼이었는데 제 노력의 결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소출에 눈독을 들이다가 이웃이 수확한 것을 훔쳤다. 제우스는 그의 욕심이 못마땅하여 그를 개미라 불리는 동물로 바꿔놓았다. 그는 몸이 바뀌었어도 마음씨는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그는 들판을 돌아다니며 남의 밀과 보리를 모아 저를 위해 저장하니 말이다. (우화 240 개미264)

 

 

본성이 나쁜 자는 벌을 받아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성악설(性惡說)을 강조하고 있다. 순자는 외부의 가르침에 의한 수양을 통해 선한 본성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이솝의 성악설은 다르다. 외부로부터 벌을 받아도 나쁜 본성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개미가 등장하는 우화들 중에서 진짜 개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개미는 다른 집단의 개미집을 침략하여 먹이를 약탈하는 습성이 있다.

 

한국 전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바로 금도끼와 은도끼이야기다. 정직한 나무꾼은 금도끼를 얻고 욕심쟁이 나무꾼은 쇠도끼마저 잃게 되었다는 내용의 설화로 알려져 있다. 이솝 우화에서는 산신령이 아닌 전령(傳令)의 신 헤르메스가 등장한다. 그러나 정본으로 전해져 내린다고 해서 이 이야기가 이솝이 지었다거나 고대 그리스에서 맨 처음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금도끼 은도끼이야기의 분포는 매우 광범하다. 유럽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일본에서도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다 건너 유럽으로 전달되어 이솝이 활동한 시대 이후에 이솝 우화의 한 꼭지로 편입될 가능성도 있다.

 

 

 

 현상의 양면성을 집약한 세상의 알레고리

 

모든 우화의 이야기 전개는 너무나도 단순하면서도 뻔하다. 권선징악형 결론도 많다. 상대방에게 해를 가한 자는 똑같이 그대로 벌을 받는다. 겉모습은 변하더라도 나쁘고 사악한 본성은 달라질 수 없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자는 스스로 화를 자초한다. 등장인물과 상황만 다를 뿐 주제와 이야기 구조가 비슷한 것들이 많다.

 

그렇다고 이솝 우화는 문학성이 떨어지며 일독할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이래봬도 성서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다. 300여 편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 인간의 특성과 현상의 이치가 집약되어 있다. 선악, 강한 자와 약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삶과 죽음으로 구분되는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본성을 유지한 인물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이중적인 동물 혹은 인간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세상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한 권의 알레고리다.

 

우화 3 독수리와 여우처럼 우정을 어긴 자는 복수에 의해서 무너지기도 하지만 적선을 하거나 은혜를 베푼 자는 상대방에게 보은을 받기도 한다. 홍수에 떠내려가는 개미에게 나뭇잎을 떨구어 구해준 비둘기가 훗날 포수의 총에 맞을 뻔했을 때 개미가 포수의 다리를 깨물어 비둘기를 구해 주는 훈훈한 결론도 있다 (우화 242 개미와 비둘기)

 

 

 

 

 

 

야콥 요르단스  『사튀로스와 농부들』1620년경

 

 

반인반수(伴人伴獸) 사튀로스는 이중적인 성격의 사람과의 우정을 경계하고 있다. (우화 60 사람과 사튀로스) 사튀로스가 어느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식사 때 농부는 뜨거운 수프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사튀로스는 추울 때 손에 입김을 불던 사람의 모습이 생각나 의아해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은 수프를 식히기 위해, 손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튀로스는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의 이중적 행동을 비난했다. 자연에 길들여지지 않은 호색한 사튀로스가 인간의 이중성을 지적하니 역설적이다.

 

언젠가는 우리 숨결을 스쳐 갈 죽음의 신 하데스의 손길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죽음 앞에서 이중적인 인간의 모습이다. 너무나 쉽게 죽음을 당하고 마는 보잘 것 없는 목숨을 우리는 파리 목숨이라고 말한다. 파리는 인간보다 수명이 짧지만 인간도 마찬가지. 누군가는 갑작스레 찾아 온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만 잘못된 탐욕에 의해서 죽음을 스스로 재촉하는 사람은 뒤늦은 후회를 한다. 우리 인생 또한 보잘 거 없을 정도로 허무하며 죽음이 가까이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Vanitas, 바니타스) 우화 속 두 마리의 파리가 처한 운명을 보라. 과연 나는 죽음 앞에서 어떤 감정을 표출할까?

 

고기가 가득 든 냄비에 파리가 빠졌다. 파리는 국물에 빠져 죽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먹고 마시고 목욕까지 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우화 238 파리262)

 

광에서 꿀이 쏟아지자 파리들이 날아와 먹기 시작했다. 먹어보니 하도 맛있어서 파리들은 먹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발이 꿀에 달라붙어 날아오를 수 없게 되자 파리들은 숨을 거두며 말했다. “우리야말로 가련하구나! 순간의 쾌락 때문에 죽어가고 있으니!” (우화 239 파리들263)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의 클래스는 영원하다

 

어렸을 때 본 우화 속 개미는 착하고 부지런했다. 반면에 게으른 베짱이처럼 살기 싫었다. 여우는 꾀가 많았고 당나귀는 세상 물정 모를 정도로 무식했다. 그 때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화의 교훈을 뼛속 깊이 새겨 들었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 우화 속 교훈은 한낱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아니 편법이 판을 치고 정이 사라진 지금 교훈처럼 그대로 도덕주의자로 살아간다는 건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요즘 시대적 분위기가 맞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우화는 읽어야 한다. 교훈의 가치는 퇴색되었지만 인생의 이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교훈은 일시적이지만 우화가 지금까지 빛을 발하고 있는 클래스는 영원하다. 우화가 표현한 세상과 동물(혹은 사람)은 양면적이다. 고지식하게 세상을 한 쪽만 편협하게 본다면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우화를 받아들이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교훈에 있는 문자 그대로 믿을 시기는 현실적으로 지났다. 어렸을 때 우화를 읽으면서 느꼈던 교화적 감정은 이제는 재현할 수 없다. 이솝 우화에는 그 착했던 이솝은 없다. 외부에 의해 정념에 쉽게 사로잡히고 상황에 따라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고 마는 우리들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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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7-1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숍우화, 를 번역한 천병희 선생님은 의외여서 한참 들여다본 적 있던 책이에요. 숲출판사 이벤트도 있길래.하하. 두꺼울 것 같은데 cyrus님 읽기 속도는 못 따라갈 것 같아요 @.@ 그림형제랑 같이 꼭 한 번 제대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다 컸다고 생각해서 또 그 교훈이 맘에 안 들 것 같기도 하고, 여튼 이 책은 cyrus님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뜨거운 여름 보내요!
 
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001-16] 돈키호테

 

 

 

 

 

 

 

 

 

“운명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인도하는구나. 저기를 보아라. 산초 판사야. 서른 명이 넘는 거인들이 있지 않느냐. 나는 저놈들과 싸워 모두 없앨 생각이다. 전리품으로 슬슬 재물도 얻을 것 같구나. 이것은 선한 싸움이다. 이 땅에서 악의 씰르 뽑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99쪽)

 

 

이 말을 마친 돈키호테는 창을 곧추들고 애마 로시난테와 함께 적진을 향하다 거대한 풍차에 부딪혀 나가떨어진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대표적 장면이다.

 

때로 요란한 장광사설부터 행간 곳곳에 숨어 접전을 벌이는 유머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기사 무용담을 변주하며 예술과 사회, 꿈 혹은 광기에 대한 속설과 날선 통찰을 쏟아내는 세르반테스의 입담이 워낙 풍부하고 맛깔스럽다. 특히 그 걸출한 입담을, 크고 작은 대결과 선택의 경험이 좀 쌓인 이후에 다시 만나는 감회는 더욱 남다르다. 어려서 처음 접했던 돈키호테, 다수는 이해 못할 꿈을 노자 삼아 좌충우돌하며 심지어 풍차와도 대결하던 중년 사내는 아무래도 좀 우스꽝스럽지 않았던가 말이다.

 

스페인 시골 마을 라 만차에 살고 있는 알론소 키하노라는 노신사. 그는 밤낮 기사도 이야기에 몰두하다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스스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자기 이름을 ‘돈키호테’라고 고친 뒤 이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자들을 돕기 위한 편력에 나선다. 중세 기사도에 매료된 돈키호테는 세상의 부정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그는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고, 양떼를 교전 중인 군대로 생각하며,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이기도 한다. 가는 곳마다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지만 그의 용기와 고귀한 꿈은 꺾이지 않는다. 산초 판사라는 농민을 종자로 거느린 돈키호테는 모든 것을 기사도 이야기로 해석하고 그 이상에 따라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산초는 주인과는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현실과의 타협을 잊지 않으며, 게으르지만 주인에게 충실한 종자다. 돈키호테는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며 비통한 실패와 패배를 맛본다. 이러한 가혹한 패배를 겪어도 그의 용기와 고귀한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좌충우돌식 인간형을 두고 ‘돈키호테‘라고 한다. 물불을 못 가리고 나서지 않아야 할 자리에 나서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모험적인 방랑 기사’를 다룬 이전의 ‘기사 소설’과는 달리 ‘돈키호테’는 우선 귀족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을 위한 기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에 의해 그려지는 평행선은 바로 우리 인간이 삶 속에서 겪는 끊임없는 투쟁을 상징하고 있다. 돈키호테는 ‘내일’을 신뢰하는 인물이다. 독자들에게는 우리가 패배하면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돈키호테는 억울하게 ‘현실감각이 없는 정신 나간 기사’로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돈키호테가 너무 희화화되어 왔다. 정직한 사람들이 ‘돈키호테적 몽상가’로 취급되는가 하면, 아집과 독선, 한탕주의가 ‘돈키호테적 용기’로 정당화되기 일쑤다.

 

그의 모험 길에 동행할수록 호감보다 연민이 앞설 만큼 엉뚱하다 여겼던 그 모습이, 갈수록 마음 깊이 파고든다. 그 자신의 시대에도 시효 지난 가치 취급을 받는 기사도로 대변되는 정의와 자유, 사랑을 외치는 방랑기사. 무엇이 옳다 그르다 제 기준에 따라 돌진하고, 미친 괴짜 취급을 받아도 자신만의 꿈을 좇는 돈키호테의 여정은, 눈앞의 현실과 다른 이상으로 앓아본 적이 있는 한 그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돈키호테는 이상에 따른 의무를 다한다. 성패는 중요치 않다. 최선을 다해 앞으로 갈 뿐이다. 그에게 가장 슬픈 것은 실패가 아니라 꿈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돈과 사회적 성공 등 소위 보편적인 행복이라 설파되는 삶의 궤도나 정치적, 문화적 대세와 다른 선택으로 소심해질 때, 돈키호테는 살가운 동지적 위안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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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와 돈키호테는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인물이죠.그만큼 <군주론>과 <돈키호테>를 실제로 읽은 사람이 없다는 거구요.

cyrus 2013-05-17 22:04   좋아요 0 | URL
제가 읽는 책은 1부였어요. 돈키호테가 1, 2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거에요.
 
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소설은 635킬로그램의 의학적으로 치명적인 뚱보가 된 마흔 다섯 살의 사내가 20년 만에 침대 바깥으로 나오기까지 그와 그의 가족, 연인이 겪는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은 주인공 맬컴이 침대로 들어가 영원히 나오지 않겠다는 자신의 선언을 무력하면서도 집요하게 실천하는 과정을, 질투와 분노와 연민이 뒤범벅된 시선으로 지켜보는 동생 ‘나’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635kg의 몸을 묘사하는 화자의 서술은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읽는 이를 압도한다. 인간에서 거대한 식물로 변해버린 맬컴의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각종 의료장치와 마치 참전 간호사처럼 형의 몸 구석구석을 닦고 치료하고 보살피는 어머니의 모습이 읽고 있으면 후각마저 자극될 정도로 생생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침울하고 무기력하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을 선택한 맬컴. 사랑에 실패하고 죽을 때까지 형과 한 방에서 살 운명이라고 자포자기한 ‘나’, 탄광사고의 생존자로 그 기억에 짓눌려 있는 아버지.

 

특히 소설 속 맬컴의 모습은 흡사 피터맨을 연상시킨다. 침대에만 살다가 비대해진 피터팬. 피터팬은 자라지 않는 아이의 대명사다. 그는 어른들의 세계를 거부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어른 세계로 편입되지 못하는 어른아이들을 가리켜 ‘피터팬 증후군’이라 하는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어린아이 시절을 그리워하는 모습은 없지만 몸은 어른이지 그의 행동은 어린아이와 같다. 집에 있으면 벌거벗은 채 돌아다니며 그가 누운 침대 자리 주변에는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자신이 침대에서만 생활하는 이유를 묻는 사람에게 답변 대신 머리가 가발이 아닌지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순진무구한 점이 있긴 하다. 그리고 엄마 없이는 일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책임감,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의무감, 이런 부담감에서 벗어나 영원히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싶은 심리가 맬컴의 물컹물컹한 살덩어리에 압축되어 있다. 맬컴에게 '네버랜드'는 침대다.

 

무엇이 그를 ‘살찐 피터팬’이 되게 만들었을까? 아들에 대한 엄마의 맹목적인 사랑만이 원인이 아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그의 순순하고 연약한 성격에 큰 상처를 줬을 것이다. ‘나’의 은사이기도 한 케이 선생님은 맬컴에게 나중에 어른이 돼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맬컴은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을 듣고 선생님이 한 말.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도 마!’(142쪽)

 

세상 심지어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는 루마저도 담을 쌓고 자신을 폐쇄적인 침대에 가둔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맬컴은 유년시절에 생긴 상처 때문에 고통을 성장하는 내내 자각했을 것이다. 맬컴의 몸에 생긴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엄마의 약손마저도 미치지 못하는 마음의 상처 말이다. 자신에 대한 무가치함과 그에 따른 무력감이 뚱뚱한 사내를 지배하고 있었다. 밥을 먹는 것도 중요하지 않고 직업을 가지는 것을 귀찮게 여기며 루의 사랑을 포기할 정도로 삶의 의욕은 상실되어 있다. 맬컴의 삶은 게으르고 나태한 존재라기보다는 자신을 세워 나갈 수 있는 의지와 정신적 힘의 ‘배터리’가 방전된 상태인 것이다.

 

“기분이 우울할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인간의 본능은 어딘가에 숨어서 혼자만의 안락함을 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 침대로 가는 겁니다. 그야말로 악순환이죠. 어차피 당신도 이런 이야기는 모두 알고 있겠지만요.” (117쪽)

 

마음속에 내재된 상처가 곪을수록 인간의 본능은 세상과 단절된 채 혼자만의 세계 속에 갇혀 지내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맬컴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도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현실은 외면하려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안락함을 누릴 수 있는 대상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맬컴, 아버지는 ‘자기만의 방’이라고 할 수 있는 연장이 가득한 다락방. 아이러니하게도 맬컴에 밀려 어머니와 짝사랑했던 루로부터의 애정과 인정을 받지 못한 애정결핍자 ‘나’ 역시 잠시 형처럼 생활하기도 한다. 소설 속 가족 이야기는 단순히 ‘이상한’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의 이야기를 쭉 따라 가다보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지만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 채 숨기기기에 급급했던 우울 속의 나태함. 우리 마음 속에는 맬컴처럼 ‘살찐 피터팬’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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