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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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34]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

 

 

 

 

 

  Scene #1  자유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레비는 태어났다

 

 


소망 없는 부재(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이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

오, 자유여.

 

 

(폴 엘뤼아르, ‘자유’ 중에서)

 

 


1947년 1월 27일. 프리모 레비는 ‘자유’라는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다시 태어났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지 9년 뒤, 회복된 삶의 건강 위에 그리고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2년 동안 잊힌 자유의 빈자리를 회상한다. 그 책이 바로 『이것이 인간인가』였다. 레비의 글은 자유 그 자체만 소개하지 않는다. 자유를 억압받는 대상의 감정뿐만 아니라 이들을 억압하는 대상들까지 묘사함으로써 ‘자유’의 의미가 잃어버린 ‘소망 없는 부재’의 시대를 보여준다.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삶을 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자유가 제한된 삶이 어떤 것인지 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집단 수용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 바로 남자라면 가게 되는 군대라는 곳이다. 그러나 자유가 아예 없는 삶과 자유가 제한된 삶은 확연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내 책상 위에,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흰 종이 위에’(엘뤼아르의 ‘자유’) 등 그 아무 곳에나 자유의 이름을 쓸 수가 없다. 안식처라고 할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이 자취를 감출 때 자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유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고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용소 생활을 실감나게 다룬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같은 책을 볼 때면 왠지 기분이 묘해진다. 수용소의 생활은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간수 몰래 아리아를 틀어놓는 낭만적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곳도 아니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곳도 아니다. 

 

 


 Scene #2  고통과 욕구만 남은 텅 빈 인간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를 기억하기 위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

 

레비의 증언은 단순한 체험수기가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폭력적인 현대 역사를 가슴에 새겨 두길 바랐으며, 그래서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는 인간 내부의 집단적 광기를 온몸으로 체험했으며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악한 본능은 단순히 인간의 하나뿐인 삶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자유마저 강탈한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쪽)

 

 

자유는 산소와 같다. 산소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우리의 숨통을 죄여 오는 것과 비슷하다. 간수와 군인들은 이미 자유의 호흡이 가쁜 수용소 유대인들의 이름마저 빼앗으려고 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그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는 자유라는 이름을 쓸 수 없고, 부를 수도 없다. 레비의 표현대로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35쪽)이다.

 

자유가 없는 감정의 빈자리에는 끝이 없는 절망과 공포감이 채워진다.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 수용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는 점점 사그라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과 긍정의 힘은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좌절감만 깊어져 몸과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자유가 박탈된 숨이 턱턱 막히는 수용소를 탈출을 하려면 담대한 용기와 운이 따라줘야 한다. 소중한 자유의 공기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탈출을 감행하다간 영원히 공기의 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남으려면 숨이 가쁘고 답답하더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자유 그리고 삶의 희망이 자취를 감춰버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레비는 자유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그리고 고민한다. 자유가 박탈된 현실을 그대로 수긍해야 될까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원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할까. 결국 레비는 전자의 삶을 선택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수용소 간수와 군인들의 폭력을 참고 견뎌내고, 그 고통을 잠시라도 피할 수 없는 방법을 모색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옥의 형벌에 적응해나간다.

 

그러나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일수록 동등한 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대감 또한 잃어버리고 만다. 레비는 생애 마지막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의 모습을 목격한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과 정치범들은 자유가 상실된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 내에서도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수용소 생활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결투이기도 하다. 내 몸 온전히 지키는 것도 힘든 상황에 나보다 약하거나 병든 동료까지 지켜주는 것이 귀찮고 버거운 일이다. 내 옆에 있는 동료가 병이 들어 죽어간다거나 간부의 군화에 죽도록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눈을 감고 만다. 나보다 약한 동료는 지옥의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런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채 익사하고 만다. 간신히 구조된 자는 익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묵묵히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해야 한다.

 

 


 Scene #3  자유라는 이름을 써도 채울 수 없는 수용소의 기억 

 

끔찍했던 죽음의 수용소가 붕괴되어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진 1956년, 레비는 노트 위에 마음껏 ‘자유’라는 이름을 쓰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자유란 그토록 간절했던 소중한 삶의 반이였기에 이런 날을 무척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는 ‘자유’를 10번, 100번을 쓰더라도 수용소 10개월 생활에 잃어버린 그리운 자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살아도 허전함은 여전했다. 그 때 그 기억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자유가 박탈되어 절단된 그의 삶에 환상사지 같은 고통이 그를 괴롭힌다. 무엇이 레비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일까?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비록 수용소가 완전히 사라졌더라도 그 곳에서 탄생된 잘못된 인식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되어 유령처럼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수용소의 유령은 자신과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오늘날의 극우파로 옮겨 붙었다. 과거 수용소와 독일 나치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종차별적인 도그마는 지금도 평화와 화합의 건강을 위협하는 잠복성 전염병과 같다. 그러한 인식의 산물은 수용소에 살아남은 레비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자유의 빈자리에 생긴 상처를 쿡쿡 찔러대면서 고통을 안겨 줬다. 수용소를 극적으로 탈출하여 유대인 포로 174517이 아닌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로 다시 태어났지만 수용소 생활에 의한 끔찍한 기억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 결정적인 주범이 바로 수용소의 도그마였다.

 

비록 레비는 완전한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비록 갑작스러운 선택이었지만, 이미 사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용소의 기억을 상기시켜 그 위에 ‘자유’라는 건강하고 신성한 이름으로 지우려고 노력했다. 레비의 기록문학은 화생방 건물과 같다. 우리는 그가 남긴 기록을 읽음으로써 자유가 없는 숨 막히는 세상을 이해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독서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 입과 코에 드나드는 산소처럼 자유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참으로 안락하게 살면서도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자유.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언어로 말하고, 눈으로 세상을 보고, 푹 쉴 수 있는 안식처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자유의 대상을 너무 광범위하게 잡은 것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지금 레비가 살았던 시대, 아니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마저 박탈된 일제 강점기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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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비웃었지 돌아온 사람 없었다고
이미 끝났다고 무모한 짓일 뿐이라고
하지만 난 알아 달빛 위에 날 그리는 너

 

(조규찬, ‘마지막 돈키호테’ 중에서)

 

 

 

 

 Scene #1  라만차의 늙은 기사, 돈키호테

 

 

 

 

 

 

 

 

 

 

 

 

 

 

 

 

 

 

 

 

 

 

 

 

 

 

 

 

흔히 우리는 돈키호테를 미치광이라고 부른다. 혹은 현실을 망각한 이상주의자라고 한다. 생각은 하지 않고 행동만 앞서는 사람을 가리켜 ‘돈키호테형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무모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스스로 대견해하고 행복해한다.

 

그는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 곳곳을 모험하고, 불의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둘시네아 공주도, 거대한 거인 풍차와의 대결도 사실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키득키득 웃음을 참으며 정신이 돈 남자의 행동을 재미있는 구경거리인양 즐기기까지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행동을 ‘광기’와 연결시킨다. 사실 그 때문에 돈키호테가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광기는 다른 면에서 보면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고독한 노력이다. 남들과 똑같이 일생에 매여, 일상의 무료한 삶을 살던 돈키호테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만이 인생은 결코 아닐 것이야!” 그 각성은 그로 하여금 불멸의 명예,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위한 위대한 모험을 떠나게 만든다. 세상의 중력을 뛰어넘어 출정을 감행한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

 

 

그러나 돈키호테는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안쓰럽다. 돈키호테는 길을 지나가는 상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다가 로시난테가 넘어지는 바람에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불행한 사고로 무방비상태가 된 그는 상인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만신창이가 된 기사는 골병이 든 몸을 일으켜보려고 하지만, 노쇠한 체력은 기사의 몸을 둘러싼 갑옷을 이겨내지 못한다. 땅에 드러누운 돈키호테는 상처 입어 죽어가는 기사의 모습을 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달래본다.

 

 

 

 Scene #2  거울 나라의 하얀 기사

 

 

 

 

 

 

 

 

 

 

 

 

 

 

 

 

 

말하는 토끼를 쫓아 땅속으로 뛰어들어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고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초겨울 날, 앨리스는 방 안에 걸린 거울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거울 나라를 모험하게 된다. 그곳은 거울 나라답게 모든 것이 반대다. 글자도 거꾸로 보이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면 반대로 달려야 한다. 벌을 받은 뒤에 잘못을 저지르는 식이다.

 

이상한 곤충들, 트위들덤과 트위들디, 험프티 덤프티 등 우스꽝스럽지만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을 만나 기상천외한 소동을 겪는다.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 앨리스는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붉은 여왕, 하얀 여왕과 함께 즐기던 파티가 엉망이 되면서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존 테니얼의 삽화 #1

 

 

『거울 나라의 앨리스』(줄여서 '거울 나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이다. 전작이 따뜻한 봄날 땅속 이상한 나라로 뛰어들어 트럼프 카드들을 상대한 내용이었다면, 『거울 나라』는 추운 겨울날 거울 나라에서 체스 말이 돼 경기를 벌이는 이야기다.

 

 

 

 

 

존 테니얼의 삽화 #2

 

 

여기서도 돈키호테 못지않은 늙은 기사가 등장한다. 체스 판의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앨리스를 붉은 기사로부터 구출하고 보호해준다. 이 작품에서 하얀 기사도 특이한 인물이다.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통해 붉은 기사를 무찌르지만, 행동은 어설프게 짝이 없다. 말이 출발할 때마다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앨리스는 기사에게 말 타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돌직구를 던져본다. 기사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충분히 연습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기사는 자신이 발명에도 소질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발명품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 앨리스 앞에서 자랑하지만,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에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거꾸로 메고 다니지만, 안에 있는 물건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자 기사는 자신이 만든 상자는 더 이상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기사의 발명품은 쥐덫. 이것 또한 쓸모없는 물건일 뿐이다. 말등 위에 쥐가 있을 리가 없다. 앨리스는 그런 기사의 발명품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발명품이 지금 당장은 쓸모없더라도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앨리스는 정말 인내심이 강하고 예의가 바른 소녀인 것 같다. 정상적이지 않은 하얀 기사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한다. 체스 게임 규칙상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하는 앨리스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기사는 오랜만에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설명을 들어준 앨리스와의 작별이 아쉽게 느껴진다.

 

앨리스 연구가들은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관계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둘시네아 공주를 암시하기도 하며, 작가 루이스 캐럴과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했고 작품 속 앨리스의 모델이기도 한 앨리스 리델이라고 해석한다. 돈키호테, 하얀 기사 그리고 루이스 캐럴. 세 명 다 공통적으로 현실 감각이 부족한 고독한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돈키호테는 가상의 인물 둘시네아를 사랑하고, (비록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지만)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떠나보내는 모습을 씁쓸하게 생각한다. 체스 게임 규칙만 아니었다면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는 앨리스를 끝까지 보호하고, 여왕의 든든한 친위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위대한 기사로서 명예를 드높여주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체스 판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

 

루이스 캐럴은 11살의 앨리스 리델와 특별한 우정을 쌓지만, '사랑'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캐럴은 앨리스 리델을 위해 불멸의 작품 『이상한 나라』를 완성시키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점점 삐걱거렸다. 앨리스에 대한 그의 집착에 불안감을 느낀 리델 부인은 그를 학교에서 내쫓았고 그가 앨리스에게 보낸 편지도 모두 파기했다. 앨리스를 잊지 못한 그는 속편인 『거울 나라』에서도 소녀를 등장시키면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작별은 나이 차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캐럴과 앨리스 리델과의 우정의 슬픈 결말인 셈이다. 

 

 

 

 Scene #3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

 

 

 

 

 

 

 

 

 

 

 

 

 

 

 

 

 

 

페터 빅셀의 단편집 『책상은 책상이다』에 수록된 '발명가'의 주인공은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로 나온다. 1890년에 태어난 발명가는 평생 발명에 몰두하면서 생활한다. 그의 삶은 오직 도면을 그리는 일뿐이다. 남들이 자신의 발명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무시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10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발명에 성공한 발명가는 오랜만에 집 밖으로 외출한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발명가는 21세기의 신식 발명품이 가득 찬 도시의 모습에 감탄한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의 발명품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이다. 발명가 스스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발명가의 모습을 비웃을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지고 상용화된 발명품은 자기가 만들었다고 우겨대니 사람들은 그의 말이 헛소리로 들린다.

 

자신의 발명 능력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에 실망한 발명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고독한 발명은 이어진다. 이미 세상에 나온 발명품이라도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 발명가라고 생각한다. 발명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발명으로 달래보려는 발명가의 모습이 처량하다.

 

고독한 발명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이상주의자를 상징한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현실에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외면을 받는다. 발명가는 발명에 몰두한 고독한 삶 때문에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좌절감이 만들어 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발명'이라는 이상을 선택하지만, 백년의 고독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의 운명은 항상 고독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명에 미쳐버린 마지막 발명가를 비난할 수 없다. '발명'이라는 신념만으로 우직하게 사는 그의 모습을 박수쳐줄 만하다. 그가 현실주의자였더라면 그동안 수없이 시도했던 발명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발명가로서의 명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발명을 통해 명예와 부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인 발명가의 모습이다. 비록 자신을 외롭게 만들고 아무도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발명가 본인에게는 발명하는 창작의 과정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Scene #4  현실이 그들을 무시할지라도 

 

어릴 적에는 이상의 힘이 컸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녹녹치 않은 삶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마음에 품었던 이상, 어릴 적 꾸었던 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보다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을 때도 있다. 이상에 대한 무모한 도전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세상은 그들을 기억한다.

 

돈키호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상주의자에서 도전을 두렵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하얀 기사가 없었다면 앨리스는 여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앓이'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탄생시켰고, 평범한 소녀 앨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린 문학의 뮤즈가 되었다. 고독한 발명가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하면서도 적극적인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발명'에 살고 '발명'에 죽으려는 제대로 된 발명가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하나씩 자신만의 현실로 실천해나가는 이상주의자들은 돈키호테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그 어떤 현실주의자들보다 대단하며 박수를 받을만하다. 현실과 불화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려는 자세가 늘 문제가 되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은 진실하고,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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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미국의 실업가 프레더릭 테일러는 철판을 만드는 제철소를 대상으로 혁명적인 실험을 했다. 그는 제철소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철소 노동자들이 42㎏짜리 선철 봉을 화차에 실어 나르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일한 노동자 10명은 하루에 75t의 선철을 짊어졌다. 이는 이전 작업 수치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틀간의 면밀한 관찰 끝에 테일러는 일일 공정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한 명당 하루 45t을 들어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전 작업량의 세 배였다. 이를 토대로 '테일러리즘'이라고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이 만들어졌다.

 

테일러리즘의 핵심적인 관념은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되는 하루의 공정한 작업을 뜻한다. 우선, 테일러는 작업도구의 형태와 사용방법을 개량하고 도구를 규격화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도구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로 단위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테일러는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 작업도구와 작업방법에 관한 시간연구를 통해 과업을 설정하였고, 노동자에게 과업 실행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차별적 성과급제를 개발했다. 노동자들에게 하루 작업량을 제시하고 이를 초과한 사람에게는 성과급을 주고, 채우지 못한 사람은 해고한다.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술적, 조직적 측면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인간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다보면 기계와 조직의 노예로 전락한다. 더욱이 사람은 강철로봇이 아닌 이상 정해진 시간 내에 작업량을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초과되어 하루 작업량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실직자가 되고 만다. 시간 준수를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결과이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일을 해야만 하는 테일러리즘의 영향은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테일러리즘은 우리 일상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어린이용 테일러리즘,

이미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여름, 겨울방학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방학 시간표를 만들었다. 컴퍼스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안에 피자 조각을 나누듯이 정성껏 방학 때 해야 할 일을 채워 넣었다. 학원 다니기, 친구랑 놀기, 방학 과제물 하기, 책 읽기 등 평소 방학 기간에 할 수 있는 일정을 모조리 써넣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일정과 전혀 상관없는데도 잠자는 시간을 의미하는 ‘꿈나라’라는 큼지막하게 배치한다. 방학에는 늦잠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제일 기다리던 시간이 ‘꿈나라’로 갈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방학 시간표 일정 중에서 그나마 지킬 수 있는 시간 또한 ‘꿈나라’로 갈 때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길고 짧은 꿈나라를 떠나기가 무척 힘들다.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원형 시간표를 손수 만들고, 예쁘게 정성껏 꾸미는 동안 시간을 절약하고, 정해진 일정대로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방학 시간표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는 스케줄러인 셈이다. 하지만 멋진 그림과 정성껏 공들여서 만든 방학 시간표는 벽을 장식하는 멋진 그림으로 남을 뿐이다. 방학 내내 책 읽고, 친구랑 놀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다. 책 읽는 시간에 친구 만나러 다닐 수 있고, 친구랑 놀아야하는 시간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스케줄러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루 안에 실행하면 시간도 절약하는 동시에 알차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에 없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반복되고 익숙한 것을 싫어하는 우리 뇌의 방해 때문에 게을러질 수도 있다. 스케줄러대로 완벽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스케줄러만 믿고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엄격한 자기관리에 대단하게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도 든다.

 

만약에 테일러리즘 또는 방학 시간표처럼 죽을 때까지 반복되고 고정된 시간과 일상을 지키면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여기서 시간과 일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만든 시간표대로 사는 것이다.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삶을 기쁘게 팔을 벌려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 내 일상을 마음대로 재단할 이유가 없다. 그것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남이 만든 시간표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것은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다.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브게니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의 배경인 기원후 29세기의 세상은 시간과 계획에 철저히 종속당한 인간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완벽함 그 자체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 율법표’에 따라 움직인다. 시간 율법표. 벌써부터 느낌이 올 것이다. 기원후 29세기에 사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밥 씹는 횟수까지도 ‘한 숟가락당 50번’으로 정해져 있다. 심지어 섹스마저도 시간 율법표에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다. (이런 쉣더퍽!)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하나인 듯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일을 끝낸다. 생활은 질서로 꽉 짜여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가슴에 황금색 번호가 적힌 푸른 제복을 입고 있다. 자먀찐의 소설 속 기원후 29세기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을 ‘번호’라고 부른다. 자신을 ‘개인’이 아닌 ‘단일제국’이라는 이름의 국가 전체를 이루는 벽돌 한 조각으로 여길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생활은 과거 구닥다리 시대의 낡은 언어에 불과하다. 시간 율법표를 어기면 ‘단일제국’을 통치하는 ‘은혜로운 분’의 벌이 기다린다. 시간을 지키는 특이한 취향이 테일러와 비슷하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테일러는 시간을 못 지키는 노동자에게 ‘You're Fired!(너는 해고야!)’라고 화끈하게 외치지만, 단일제국의 지배자이신 은혜로운 분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반하는 국민에게 ‘You're Dead!(너는 뒈졌어!)’라고 단호하게 처벌한다.

 

쟈먀찐의 『우리들』은 완성된 지 4년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고국인 소련 내에서 출간 금지 처분을 당했다. 『우리들』이 1920년대 소비에트의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 섞인 풍자라는 이유로 자먀찐은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혔다. 자먀진의 궁극적인 비판 대상이 자유를 억압하는 소비에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체제의 대척점인 자본주의 또한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노동의 표준화를 강조한 테일러리즘의 발전은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 형태를 낳게 되었다.

 

자먀찐의 소설에 ‘테일러’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 율법표’는 테일러리즘의 원리를 그대로 일상생활에 적용시킨 실사판이다. 테일러리즘이 만들어 낸 암울한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 단일제국 사람들에게 고대인(지금의 21세기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와 동떨어진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이 ‘은혜로운 분’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테일러다. 오랫동안 테일러리즘의 원리가 몸에 밴 단일제국 사람들은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테일러를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혹시 ‘은혜로운 분’이 20세기에 살다간 위대한 경영자로 평가받는 테일러의 후손이 아닐까?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 동일한 시간에 우리는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시작하고,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끝낸다. 그리고 하나로 합쳐져서, 수백만의 손을 가진 단일한 몸체처럼, 우리는 시간 율법표에 의해 지정된 동일한 순간에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고, 그리고 동일한 시간에 산보를 나가고, <테일러의 연습> 강당에 가고, 취침한다. (18쪽)

 

테일러란 인물은 고대인들 중 가장 우수한 천재였음이 틀림없다. 물론 그는 자신의 방법을 삶 전체로, 매 걸음걸음마다로, 24의 체계를 1시부터 24시까지 통합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39쪽)

 

테일러리즘과 더불어서 현대식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로 문을 열게 만든 것이 바로 포디즘이다. 세계 최초의 자동화 대중화 시대를 시작한 헨리 포드에서 유래된 관리방식과 경영시스템은 자본주의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드가 착안한 것은 노동자가 작업대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물이 이동하여 정해진 위치에 있는 작업자들에게 흘러가는 컨베이어벨트였다. 이전까지 자동차는 장인들, 즉 노동자들의 수공 조립품이었다. 포드는 이동 조립라인을 통해 단기간의 훈련을 거쳐 생산현장에 투입되는 미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낮은 비용으로 높은 생산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생산시스템을 구축했다. 컨베이어벨트가 활용되려면 작업자 한 사람마다 과업이 구분되도록 분업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복잡한 공정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테일러식 노동분업과 포드의 기계식 생산시스템의 절묘한 만남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촉진시키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일구어낸 중심축이 되었다.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은 포드 전후로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포디즘 역시 테일러리즘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분업과 기술적 합리성에만 의존하여 노동의 인간화 요구를 무시했기에 노동자들의 불만과 집단적 저항의 표적이 되었다.

 

 

 

 

 

 

 

 

 

 

 

 

 

 

 

과학과 산업발전에 초점을 맞춘 세상에서 인간성의 가치는 상실된다. 그런 세상은 더 잘 사는 세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가 된다. 쟈먀찐은 테일러리즘이 자유와 인간 고유의 가치(사랑)마저 잊히고 낡은 유물로 치부해버리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했다면,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포디즘이 등장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디스토피아를 반어적으로 묘사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영문판에는 ‘A.F’란 표현이 나온다. ‘After Ford’를 줄인 것으로 (문예출판사 번역본에서는) ‘기원’이라고 번역했다. 포디즘이 등장한 이후를 의미하는 기원 632년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A.F’라는 용어 자체는 포드가 예수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인물임을 웅변한다.

 

“포드 님의 은혜로 세상은 태평천하로소이다.” (57쪽)

 

‘A.D'를 ’A.F'로 알파벳 철자 하나를 바꾸어 포디즘이 지배한 섬뜩한 현실을 강조하고, 그런 현실에 적응, 아니 철저하게 순응하고 마는 알파 플러스 계급의 견습생 헨리 포스터는 헨리 포드를 연상케 한다. 결국 포스터가 멋지게 생각하는 ‘신세계’는 자동화된 기계를 이용해 인간의 노동을 합리화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며, 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낳은 사회구조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쟈먀찐의 디스토피아는 권력이 개인의 시간에 침투하여 전체주의의 틀로 옳아 매어 자유를 억압했다면,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는 쟈먀찐보다 지독한 철저한 계급사회다. 태아가 유리병 속의 기계적 환경에서 자라나고 날 때부터 적성과 지능, 유전자에 따라 계급이 정해진다. 정해진 계급에 맞게 삶을 살아야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두 작가의 디스토피아가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하고 나보다 계급 높은 사람한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밖에 나가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노예사회다.

 

테일러와 포드의 유령은 지금도 배회하고 있다. 기업은 ‘포스트 테일러리즘’ 또는 ‘포스트 포디즘’이라는 괜찮은 이름으로 생산성을 확보하고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70~80년대에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가져왔지만, 노동자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는 이상 경제상정 모델로서 적합한 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에 길들여져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오늘날에 시간 관리는 효율적인 업무 향상과 성공적인 자기계발을 위한 역량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항상 스케줄러를 들고 다니고 확인하는 사람은 정말 잘 사는 사람일까. 그리고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년에 시청자의 고민을 소개하는 ‘안녕하세요’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직접 딸의 스케줄러를 만들고 강요(?)하는 사연을 본다면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이 무조건 훌륭한 인재상에 적합한 모범 사례라고 볼 수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시간 관리를 철저히 지키는 완벽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은 꼭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 삶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산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우리나라는 70년대부터 경제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근면의 역량을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 중 하나가 ‘근면’이었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도 제대로 관리할 줄 아는 능력과 연관되기도 한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우리가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처럼 겨울을 대비해 여름에 일하는 부지런한 개미가 되기를 원했고, 베짱이는 시간 개념도 없이 놀고, 먹기 만하는 게으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과연 『우리들』의 단일제국과 『멋진 신세계』는 상상의 영역에 머물고 있을까. 글쎄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직접 미래를 결정하는 풍토와 두 개의 디스토피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가 좋은 명문고를 가기 위해서 하루에 학원 세, 네 개 정도 다닐 수 있도록 유명 학원가를 알아보는 부모. 아이는 부모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다. 학교 다음에 가야하는 곳이 학원 또는 독서실이다.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에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학원에 가기 싫어도 안 가면 안 된다. 기특하게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준 부모를 생각해주는 것도 있지만, 학원 한 군데라도 가지 않았다가는 부모에게 꾸짖음을 듣기 때문이다. 지금도 방학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간표를 만들 것이다. 다만 그 시간표 안에는 ‘친구들과 놀기’, ‘TV 보기’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유희의 시간이 적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공간 대신에 ‘학원 가기’,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만 가득하고, ‘꿈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테일러는 규정된 일을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 해고의 칼바람을 휘둘렀고, ‘은혜로운 자’는 시간을 지키지 못한 ‘번호’에게 죽음의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부모는 시간과 공부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 아닌 사랑의 매를 들고 있다. 자식이 잘 살아야 부모도 잘 살 수 있다는 유토피아는 없다. 알고 보면 디스토피아는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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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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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을 다시 찾아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김소연 ‘장난감의 세계’ 중에서, 『수학자의 아침』)

 

 

 

 Scene #1  누군가에게 추천하기가 애매한 책

 

독서가 은밀한 관음의 쾌감을 선사할 때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한사코 흐트러뜨리는 책이 그렇다. 윤곽을 잃어버린 피사체 위에 더 또렷하게 맺히는 상, 혹은 더 적극적으로 초점을 풀어 마치 매직아이의 숨은 그림을 탐색하듯 유쾌한 방황에 나설 때 그 쾌감은 시작된다. 그럴 때 텍스트는 단숨에 따라 읽을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아니라 동행하며 대화하는 상대 주체가 된다. 그런 책은 어쩔 수 없이 아껴 읽게 되고, 그런 독서는 느리다 못해 산만해지곤 한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숨은 그림, 또 방황의 울렁거림, 그 느낌을 만끽할 때의 내가 머물던 어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쉽사리 놓지 못한다. 물론 그 느낌의 기억들이 내가 읽은 텍스트의 주제나 내용, 혹은 어떤 구절과 인과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훗날 다시 읽더라도 복기할 수도 없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그 모호한 연관성을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떠올리며 매번 느끼던 당혹감도 그런 꺼칠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책의 내용과 개인적 감상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내가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전달할 수 없고,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설명하자니 나 아닌 누군가의 공감을 얻을 자신이 없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면 여기저기서 뽑아놓은 양서나 고전 추천도서 목록을 소개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몇 권 꽂혀있지 않은 책장 앞을 이리저리 바장이다가 ‘뭐 이 정도면 좋아하겠지’라는 식으로 책을 골랐던 것 같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에게 소개해서 공감을 얻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아마도 거기에 부합되는 책 한 권을 꼽으라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 것이다.

 

 

 

 Scene #2  마들렌 과자 하나로 ‘나’를 발견하다  

 

소설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만 작가들은 바로 이야기 때문에 구속을 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포기하면 소설이 재미가 없어지고 이야기에 매달리다 보면 사물을 정밀하게 표현할 수 없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새로운 소설로 각광받았던 것은 바로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프루스트는 사건의 전개가 강조되는 이야기보다 사물 그 자체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찍부터 글쓰기란 자신이 느낀 감동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첫째이며, 소설도 글쓰기의 연장일 뿐이라는 신념 위에 철저히 묘사의 수련을 쌓아 오던 프루스트였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15쪽)

 

소설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머니가 재워주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던 화자인 ‘나’(마르셀)의 어린 시절. 여름에 레오니 고모집이 있는 콩브레에서 보냈던 일. 성당의 엄숙한 아름다움. 그런 속에서 예술 종교 철학 사랑에 점차 눈 떠간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내용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과거를 찾아가는 계기의 특별함에 의해 이 평범함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성인이 된 화자가 어느 날 침울해 있는데 어머니가 홍차와 과자를 준다. 홍차를 마시다가 그는 느닷없이 몸속에 솟구치는 이상한 기쁨을 느낀다. 1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극적인 장면이다. 아마도 극적인 감각의 전환 장면이 없었다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일상 속 이야기를 장황하게 써내려간 지루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으로 기계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중략)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86, 88쪽)

 

화자가 마들렌을 혀로 맛보는 이 장면만 여러 번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맛이 어린 시절에 맛 본 차 맛과 겹치면서 생생한 과거를 떠 올린 게다. 홍차 적신 마들렌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그렇게 만나는 과거는 경험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참신하다. 화자, 즉 프루스트는 말한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하나가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을 내 안에서 찾도록 일깨워주었다고.

 

반면 화자의 오감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범속한 일상을 생생한 감동의 그것으로 바꿔 놓기 위해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점 이동과 중문 복문으로 구성된 문장은 중첩된 이미지끼리 어울리면서 사물을 한층 의미심장한 것으로 확충한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치 숲 속에서 우는 새의 노래마냥 거리감을 드러내면서, 나그네가 다음 역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 황량한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았다.” (16쪽)

 

사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이런 태도가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Scene #3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

 

한편 프루스트의 소설은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중적 의미도 담고 있다. 1부 ‘스완네 집 쪽으로’가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Scene #4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

 

끝없이 붙잡고 미끄러지는 과거를 쫓는 욕망, 지금의 현재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성취를 위한 달음박질. 이 두 가지 삶의 반응은 주체와 대상이 달라진 줄도 모른 채 환상 같은 맹목의 힘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다 한 순간 어떤 계기에 멈춰 서서 돌이켜본 뒤 그 잃어버린 시간의 덧없음을 발견하게 된 자의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움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만은 아니다. 사물도 사람도 책도, 한 순간의 기억도 될 수 있을 것이다.

 

1부부터 기억의 장황하고 중층적인 서사, 집요하고 밀도 높은 묘사와 사념의 문장들로 이어지는 소설은 질로나 양으로나 단숨에 읽기는 어렵다. 나는 두어 차례 이 책에게서 거절당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만 해도 총 5번이나 거절당했다. 1부 1권에서 반 정도 화자의 기억을 따라가는데 간신히 성공했을 뿐이다. 얼른 1권 2부로 넘어가야하는데 이놈의 마음은 자꾸 딴 데만 보려고 하다니. 요즘처럼 삶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점점 빨라지는 속도의 세상 속에 의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수많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을 프루스트는 모두 잡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수많은 문자가 촘촘하게 구성된 문장의 그물망을 한 땀 한 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프루스트는 소설을 써내러 갔다.

 

눈앞의 시간을 잡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회상하고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껴본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일생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모든 시간과 공간 거기에 그 속에 배치된 사소한 사물마저도 기억을 살려내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힘든 일일까.

 

그렇게 본다면 프루스트는 정말 겸손하다. 그는 과거를 복원하고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과거를 복원하고 특별한 데자부를 경험하는 것은 우연히 맛본 마들렌 덕분이다. 마들렌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다시 한 번 느끼기 위해서 화자는 다시 마들렌 조각을 맛보지만, 그 때 그 순수하고도 온 몸에 전율이 돋는 그 감동의 순간을 재현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을 글 중간에 살짝 토로하기도 한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으로 다시 가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85쪽)

 

 

 

 Scene #5  황량한 삶 속에서의 경험한 축복의 시간 

 

철학자 베르그송은 순차적 시간이 아닌 주관적인 시간, 즉 의식의 흐름을 통해 잠재된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마주친 과거와 현재가 동시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프루스트는 시공간을 넘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했는데 여기서 ‘비의도적 기억’과 동시간성을 통한 의미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즉 과거를 기억으로 이어가고 싶어 한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기억을 이을 사람 또는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어떤 매개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비의도적 기억이 현재에 소환되어 현재와 동시성을 갖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기억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피어나고 있으니까요. 기억을 이어가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도 다른 시작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억’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한 번 가면 지나가버리고 마는 유한적인 삶을 소중히 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프루스트는 자신의 인생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한 부분이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기 쉬운 과거의 영상을 기억을 통해 떠올림으로써 불가시(不可視)의 실재(實在) 시간을 찾아낼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의미 있거나 절실 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며 현재와 과거의 동시간성을 갖는다는 것. 이를 통해 프루스트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했다. 잃어버린 시간이 가망 없고 부질없는 욕망일지라도 때때로 그런 우연의 회상이 그립기도 하다. 

 

이러한 절심함 때문에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창작생활을 했다. 14년 동안 코르크로 방음된 밀폐된 방에 갇혀 천식과 싸우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등지고 죽음에 쫓기며 문장을 다듬어가는 한 예술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를 불행했다고만 할 것인가? 그는 코르크 밀실에서 서서히 기억 한가운데로 걸어갔을 뿐이다. 잠시 과거를 살았던 것이다. 과거에서 잃어버린 마르셀, 즉 ‘나’라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 황량한 삶 가운데에서도 신생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한 축복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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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변화 없는 삶에 지친 한 남자가 책상을 왜 항상 책상이라고 불러야하는지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책상은 양탄자로, 양탄자는 옷장으로, 옷장은 신문으로 부르기로 했다. 방에 틀어박혀 모든 것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물과 언어의 짝짓기에 변화를 준 것이다. 그는 공책에 자신이 바꾼 새로운 단어들을 적어놓고 모든 사물의 이름을 바꾸어 부르며 차츰 원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아는 새로운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옛날에 쓰던 원래의 언어를 대부분 잊어버리게 되어 자기 공책에서 원래의 단어를 찾아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그 남자는 다른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하고만 이야기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남자는 누구와도 소통되지 않는 외국어를 만든 셈이다. 노인은 외계인이 됐다.

 

중학생 시절 이 슬픈 이야기를 읽으면서 혹시 공책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이 불쌍한 남자는 어떻게 될지 너무 걱정스러웠다. 모든 낱말을 바꾼 것이 그 남자 자신이며, 그이가 많은 것을 기억하려 노력할 것이지만, 기억이란 기록보다 불완전하고 미심쩍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페터 빅셀의 단편집 속에는 사물의 이름을 바꾸는 남자 이외에도 정말 이상한 사내들로 가득하다.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확인한답시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사내, 세상을 등지고 수십 년 발명에 전념해서 완성한 발명품이 이미 발명된 텔레비전이라는 것을 알게 된 발명가, 요도크 아저씨 이야기만 되풀이하다가 모든 단어를 ‘요도크’로 바꿔 부르게 된 할아버지. 정말 읽다 보면 내 정신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이 든다.

 

이 소설은 현대인의 소외와 상실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 속의 남자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를 연상시키는 점도 있다.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군중 속에 섞여 있을 때의 한없는 자유로움과 한없는 무의미함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낯선 세계로의 여행에서 평소 감히 꿈꿔보지도 못했던 일탈을 실행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낯익은 이들 틈에 있어도 한없이 무의미하다. 그러면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한 때 우리의 대화를 끈끈하고 이끌어주던 종교적 믿음과 사상적 명분 등의 거대한 신념체계들은 허공으로 흩어진지 이미 오래되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나를 지탱하는 것은 내가 속한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나 자신이 되었다. 나는 나를 광고하고 나의 상품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나의 능력 있음과 나의 무한 잠재력을 끊임없이 그리고 꾸준히 자본의 세계에 설득해서 그 세계에 받아들여져야 한다.

 

내가 도태되는 것, 내가 선택받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력 때문이라는 잘 포장된 진실 속에서 이제 나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못한다. 알 수 없는 밤의 불안을 각종 자기개발서로 덮어가면서 이렇게 서서히 ‘나’라는 인간은 소모되어 간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이 모든 대화는 실없는 농담이거나 가벼운 잡담이다. 겉도는 대화, 체면치레인 몇 마디 말, 외로움을 고립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들 끼리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음 같은 말. 그렇게 되지 않기를 꿈꾸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정도 ‘히키코모리’의 특성을 갖게 되지 않을까?

 

간결한 글이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함축적이다. 이야기의 소재를 언어로 택했을 뿐 언어의 굴레만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없다. 변화의 어려움을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개혁의 어려움이다. 개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다. 주변의 동참, 뚜렷한 방향제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개혁을 꿈꾼 사람은 외톨이로 전락하고 만다는 이야기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진다.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는 사람의 자유의지다.

 

기존의 이름으로 딱딱하게 굳어진 사물들에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이 명명식은 남자에게 크나큰 즐거움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마치 옹알이를 하던 아이들이 한순간 말문을 트고 하나하나 단어를 익혀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개는 짖어도 개라는 낱말을 짖지 않는다. 이처럼 책상이 반드시 '책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소통을 위한 사회적인 약속일 뿐이다.

 

사람들의 말을 그는 그 식대로 바꿔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소통조차도 불가능해지고 아무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는 침묵했고 그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으며 자기 자신과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할 뿐이다. 둘째의 말 배우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옹알이하던 때의 갇히지 않았던 그 말들이 이제 딱딱한 형식과 약속 속에 갇히고 있다. 책상은 역시 책상일까.

 

낱말을 자기식대로 바꾸어버려 소통이 불가능해져버린 한 남자는 실은 오래전부터 이미 소통불가능의 상태였다. 자족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자적 형태의 이웃들 틈으로 난 균열을, 꾸역꾸역 올라오는 단절의 감정을 밀봉하려고 서로를 향해 배시시 웃는 가짜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 터였다. 그래서 비록 그가 선택한 방법이 어리석기 그지없더라도 달라지기를 바랐고 이를 직접 행동으로 옮긴 이 회색빛 주인공에게 나는 아낌없는 갈채를 보내고 싶다. 나만의 낱말을 만듦으로써 거짓 소통에서 멀어져보려 한 이 남자에게 어리석은 그 결과와는 상관없이 무한한 경외의 마음을 품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낱말을 자기 식으로 바꿔 부른 남자는 낱말이 가진 강제성을 알고 있었을까? 낱말은 나의 사유를 돕는 매개이면서 동시에 나의 사유의 확장을 억압한다. 유교가 사회의 지배논리였던 시대에는 권력자에 의해 유교를 합리화하는 언어가 형성되고 널리 유포되었다. 일부종사니 상명하복이니 입신양명 등의 낱말이 그렇다. 물건을 만드는 기업인은 인간 욕망의 구조를 연구해 상품이 많이 팔릴만한 이름을 짓는다. 표심을 얻으려는 정치가는 인간의 욕망을 연구해 한 마디 슬로건을 만든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언어의 연구는 끝이 없다. 그리고 그렇게 포장되어 출시된 언어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정신 차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정신없이 살아간다.

 

방금 했던 생각을 1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금 곱씹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자기 생각과 느낌을 끊임없이 반추하는 성찰지능을 가졌다. 생각에 대해 생각하기, 느낌에 대해 느끼기. 인간의 생각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다. 그런데 생각이 100% 타인에게 전달된다면 우리의 대화는 번복과 부정으로 가득한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인간은 무릇 정리와 숙고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을 살짝 포장하여 완곡하게 표현하는 세련된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간 의사소통의 불완전성에 축복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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