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잔고 없는 자의 독서
내가 그렇게 힘들게 구했던 책이 개정판이 되어 새로 나왔네? orz 나는 왜 며칠 더 참지 못하고 그 날 그렇게 애를 써서 이 책을 구하려고 했던가. 통장에 잔고도 없었으면서. 흑.
개정판에는 내가 가진 책의 단 편보다 세 편이 더 실려있어서 어쨌든 나는 이 개정판도 읽을것이다. 두근두근- 그렇다면 구판을 어쩔것인가, 라고 잠깐 생각했는데, 내가 거기에 열정적으로 밑줄을 그어놨기 때문에 도저히 팔기가 힘들다. 나는 그것도 그냥 가져야겠다. 그리고 「당신이 날 만졌잖아요」는 당연히 구판에서 자주 들추어볼 것이다. 그 분홍색 형광펜으로 정신 집중해서 밑줄 그었던 걸 대체 어떻게 잊겠는가.
그러고보면 책과 내가 만나는 순간도 다 운명인것 같다.
토요일에 전주엘 갔다. 금요일밤에 가방을 싸면서 어떤 책을 가져갈까 고민했다. 나는 항상 장시간 기차를 탈 때는 혹시 모른다며 책을 두세권씩 챙겼었는데, 번번이 기차에서 잠자기에 바빠 그중에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니 한권이 무슨 말인가 몇 페이지 넘기지도 못하고 그저 잠만 쳐잤....대체 왜이렇게 책을 읽겠다는 욕심이 똥구멍까지 차가지고 번번이 육체를 힘들게 하는가 스스로에게 늘 미안했다. 한심하기도 했고. 가방 들고다니기 정말 무겁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그래, 딱 한권만 가져가자 결심을 하고 책장 앞에 섰다. 그리고 골라낸 책은 얇지도 두껍지도 않고 심각하지도 가볍지도 않아보이는 바로 이 책이었다.
한 권이라 불안했지만, 그동안의 경험에 의하면 나는 한 권의 몇 페이지도 제대로 읽지 못했으니, 걱정을 물리치고 이 한 권만 들고가자, 라고 새삼 결의를 다지며 기차를 탔다. 그리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그런데.............너무 재미없어..................진짜 재미없어...............나는 70페이지쯤 읽다가 잤다. 자다가 일어나서는 다시 책을 펼치고 읽다가 96페이지까지 읽다가 잤다. 자고 일어나 다시 96페이지를 펼쳤다가 너무 신경질이 나서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말했다. 아, 진짜 드럽게 재미없네. 그러자 책을 읽고 있던 옆자리의 나의 동행이 웃었다. 어휴, 난 이 책 한권 밖에 안가져왔는데 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지....전주에 내리자마자 눈에 띄는 서점에 들어가 다른 책을 한 권 사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돌아다녔던 전주에서는 서점이 보이질 않았고, 결국 다음날 돌아오는 전주역의 편의점에 들어가서 책을 골라보려고 했는데 어쩜 그래, 읽고 싶은 책이 한 권도 없는거다. 우석훈의 『모피아』를 살까, 망설이다가 그냥 나왔다. 어쩌면 아담과 에블린은 나와 만날 운명인건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돌아오는 기차안에서도 이 책을 펴들었다. 달리 할 게 없었다. 이 책을 읽는것 말고는. 나는 이 책을 다 읽을 운명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결국은 이 책을 다 읽었다.
하아- 다 읽었다. 다 읽고야 말았다. 만쉐이~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인생 최고의 가치가 사랑일 순 있지만, 사랑이 모든걸 다 감당할만한 건지는 확신할 수 없는거라고. 아담은 재통일전의 동독에서 나름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자신의 재능으로 돈을 벌었고 그 삶이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여자친구인 에블린은 달랐다. 에블린은 서독에서의 삶을 꿈꾸었다. 동독에서는 에블린에게 학업의 기회마저 없었다. 에블린은 자유로운 서독으로 가서 좋은 집에서 살며 대학을 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건너간 서독에서 에블린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좋은 친구도 사귀었다. 그러나 아담이 그곳에서 할 일은 없었다. 에블린으르 사랑한다는 이유로 서독으로 건너왔지만, 서독에서 그의 재능은 도무지 써먹을 데가 없었다. 그는 우울했고 불행했다. 그리고 에블린은 그에게 계속 다른 살 길을 모색하게 해주려 했지만, 이미 모든것에 의욕상실이 되어버린 아담이 다른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다.
표면적으로 타인이 보기에 '더 좋은' 환경은 분명히 있다. 여기서 살 수 있는데 대체 왜 그곳에서의 삶을 고집하느냐고 말할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현재에 만족하고 다른 삶을 꿈꾸지 않을 수 있다. 다른이들이 더 낫다고 말하는 곳이, 그에게도 천국이 될 수는 없다. 모두의 파라다이스가 나의 파라다이스가 되란 법은 없다. 사랑하는 한 쌍이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 같은 방향으로 가려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비극이다. 그 상태에서도 계속 '함께 '살기를 원한다면, 어느 한쪽은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해야한다. 억지로 살아나가는 삶이 과연 상대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까?
음, 써놓고 나니까 재미있게 느껴지네? 내가 글을 재미있게 잘 쓴것 같다. 킁킁.
전주의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전동성당엘 갔다. 마침 미사중이라 우리는 성당의 내부를 볼 수는 없었다. 저녁으로 떡갈비와 비빔밥을 시켜두고 소주를 마시는데 육체가 너무 힘들어 술이 꿀렁꿀렁 잘 넘어가질 않았다. 우린 전주역에서 숙소까지 얼음길을 40분간 걸었고, 숙소에서 한옥마을까지 또 1시간 40분을 걸었으며, 그 후에도 한옥마을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지쳤고 피곤했다. 그래도 샤워하고 술판을 벌이자고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실컷 샀다. 숙소로 돌아가는 택시안에서도 동행과 나는 꾸벅꾸벅 졸았고 샤워를 한 후에도 우리는 좀처럼 피곤함을 없애지 못했다. 결국 사온 맥주의 절반도 채 마시지 못한채로 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그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웃긴건 한옥마을에 다녀와 숙소에 돌아온 직후의 나였다. 동행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텔레비젼을 켰다. 무한도전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뉴욕에 가서 엠씨해머를 만나고 공연을 하는 내용이었다. 아, 나를 어쩌면 좋으니. 한옥마을에 다녀왔는데 거기에 대한 감흥은 없고 뉴욕을 보는 지금이 더 쿵쾅거려. 난 뉴욕에 가고 싶어, 뉴욕이 내 심장을 뛰게 해.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까지 내가 생각하는 건 한옥마을이 아니라 전동성당이 아니라 뉴욕이었다. 젠장, 나란 인간..어쩔수 없구나.
한옥마을에서 동행과 나는 차례로 사주를 보았다. 한 스님이 손금과 사주를 봐주고 계셨다. 나와 동행의 사주를 다 봐주신 스님은 나를 보며 절세미인이라 칭하셨다. 꼬시고 싶다고(정말로 이렇게 말했다) 말했다. 그러더니 이내 이렇게 물으셨다.
아가씨, 스님하고 술 한잔 할래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싫다는 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센스있는 답변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일어나 인사할 때까지 웃기만 했다. 예쁜건 꽤 피곤한 일이라는걸 새삼 느끼면서.
덧. 제가 읽었던 『아담과 에블린』읽고 싶으신 분 댓글 달아주시면 보내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