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정체성,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7
이현재 지음 / 책세상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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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위의 반은 여성이다. 남성에 반대되는 개념의 성에 대한 구별이 아니라 예외적인 종족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여성이다. 보통 인간이라는 개념 속에 여성이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의 이야기다. 여성들이 투표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 유럽의 경우도 20세기 초, 중반 이후의 일이다. 인류가 문화를 발전시켜 오면서 성숙한 사회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 중의 하나가 여성의 문제일 것이다.

  학문으로서 ‘여성학’이 붐을 이루고 남녀 차별 철폐가 사회적 이슈가 되어 여성들의 권익이 신장되고 있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여성들의 위상은 달라졌다. 가시적인 변화들은 인식의 변화가 가져온 결과들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의 문제는 제대로 파악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어떤 방법으로 접근할 것인가? 숱한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 상태이거나 인식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 부분들에 대한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아니, 여성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이런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결국 철학에게 부탁한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여성’의 문제이다. 저자 이현재는 ‘인정이론’을 통해 여성의 문제에 접근한다. 지금까지 여성의 문제를 논의했던 기준과 방향을 점검하고 철학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확립해 줄 것인가에 대한 접근 방식이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이루어진다.

  주체로서의 여성은 다른 여성과의 동일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결국 ‘여성의 정체성은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에서 타자를 인정하는 논리로 나아갈 때 실현될 수 있다.’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 여성주의가 오해를 받았던 부분을 점검하고 어떤 여성이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인간화를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인간으로 인정받는 것조차 힘들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며 1세대의 출발로 본다. 이후 세 명의 걸출한 이론가를 차례차례 거론한다. 길리건의 ‘보살피는 여성’, 이리가레이의 ‘하나가 아닌 여성’, 버틀러의 ‘성적 이분법 허물기’가 그것이다. 세 사람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여성의 문제를 바라본다. 남성의 타자로서만 존재했던 여성의 문제가 철학 안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그 차이를 인정하는 장면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해결되기 위한 필요 조건은 여성들 간의 연대 가능성이다.

  백인 중산층 여성과 흑빈 빈곤층 여성은 과연 연대가 가능할까? 감성적이고 관습적인 연대는 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낯선 자들과 반성적으로 연대할 때 여성들의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며 현실은 분명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는 전언들에 공감한다. 여성이 여성 스스로를 배제하고 연대 가능성이 희박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공동체적 연대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게는 일종의 코뮌으로 읽혔다. 국가와 계층을 초월한 전지구적 여성들의 연대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다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조직과 실천의 문제는 그리 만만치 않아 보인다.

  타자를 협동적 행위자로 인정하고 여성들 스스로 그 가능성을 열어갈 때 사회적 인식과 또 다른 타자인 남성들의 인식도 변화할 것이다. 다만 여성으로서 역할과 사회적 주체로서 당당히 서야 하는 여성들의 혼란과 갈등은 몇몇 이론가들의 주장으로만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삶은 연습이 없고 정답을 알 수가 없다.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지만 잔다르크나 클로델의 경우처럼 분열된 여성의 모습은 과거를 대표하는 여성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현재 진행형으로 지속되는 수없이 많은 문제들을 생각해보면 여성의 문제가 남성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성주의는 철학과 만났다. 나는 이 만남을 통해 타자 배제의 논리, 희생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여성의 모습을 꿈꾸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주의에 새로운 이념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의미한다. 인정 이론을 통해 재구성된 여성철학은 다가올 여성의 세기에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공할 것이다. - P. 165

070618-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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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철학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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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철학자도 아닌 사람이 이야기하는 철학은 특별하다. 그 특별함은 철학을 바라보는 눈과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에서 온다.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되지 않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철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그것을 다루는 태도 또한 한 개인의 주관과 객관이 뒤섞이게 마련이다. 그것은 다양한 책들 속에서 나름의 빛깔과 향기를 지니며 그 책의 특징이 된다.

  남경태의 <철학>은 독특하다. 이 책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넓은 범주에서 살펴보면 서양 철학사를 다루고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시대 구분에 의해 통시적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의 기원과 출발에서부터 가지를 치고 잎을 피워나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알기 쉽게 설명하면서도 철학의 주변을 한 번씩 짚고 넘어간다. 그 과정이 번잡스럽거나 잡다하지 않고 필요한 부분에서 언급되는 사회 문화적 상황이나 정치 경제적 여건들이 철학에 미친 영향을 언급하는 정도다. 깊이가 없어 보이지만 큰 맥락과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방해가 되지 않는다.

  두 번째 특징은 철학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론의 관점을 1부에서 이야기한다. ‘대상’이 그것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고민에서 출발한 철학의 면면들을 살펴보고 2부에서는 인간론이라는 큰 주제로 철학의 역사를 더듬는다. ‘주체’에 해당되겠다. 인간과 종교의 관계와 철학의 역할을 집중적으로 점검하며 데카르트 이후 ‘인식론’을 중심으로 3부를 구성하고 있다. ‘주체-인식-대상’의 축을 세계론과 인간론 그리고 인식론의 발달 단계에 따라 철학자들의 주장과 핵심 개념을 엮어가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고 모호한 말장난에 속은 느낌도 없다. 4부에서는 세 단계의 결론이고 기존 인식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5부에서는 가타리와 들뢰즈 그리고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순간의 철학적 문제들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논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역사 시대별로 구분하여 백화점식으로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철학적 특징과 개념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나버릴 염려가 없다.

  세 번째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적인 조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개념들이 미끌어지고 가로지르면서 철학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통찰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개념들이 2,500년을 가로질러 철학사 곳곳에 그 흔적들을 묻어놓고 있지만 현대 철학으로 넘어오면서 그 영향력과 범주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전에 보지 못했던 현상이나 개념들이 전면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한 과정들을 저자는 종횡무진 철학사를 넘나들면서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깊이는 알 수 없으나 단순하고 피상적인 지식과 얄팍한 개념의 이해만 가지고서는 가당치도 않은 작업이다. 거기에 이 책의 장단점이 모두 녹아 있다.

  철학에 관한 입문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는 수박의 모양과 색깔만 보이고 맛을 본 적이 없다는 아쉬움을 깊게 남기는 책이기도 하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개념과 용어들이 난무하고 그들의 말이 짧은 구절로 인용되기 때문에 감질나서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하면서 부분적으로 옥의 티가 보이기도 한다.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 소크라테스를 그렇게 소개하는 부분 같은 대목이 그렇다.

2500여 년에 걸친 방대한 서양 철학사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이 세계에 관한 올바른 앎을 얻는 과정”이라고 요약된다. 여기 포함된 세 가지 계기, 즉 ‘인간-인식(앎)-세계’를 해명하는 것이 철학의 과제다. 더 근대적인 형태로 변환하면 ‘주체-언어(또는 감각, 경험)-대상’으로 표현할 수 있다. - P. 545

  저자의 에필로그 앞부분이다. 이 책은 ‘사람이 알아야할 모든 것’이라는 시리즈의 부제를 달고 있지만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철학’이야기다. 하지만 알고 모르고의 차이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이 가진 특별함에 손이 갈 것이다. 단편적인 것들을 섞고 뒤집어 하나로 통합하는 관점이나 ‘가로지르기’가 2% 부족했던 독자들에게 적합한 책이다. 두 번쯤 더 읽어야겠다.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말한 탈현대 그 후의 철학이 궁금하다. 예의주시하며 읽어나가는 재미도 남다를 것 같다.

철학의 비판적 기능 역시 앞으로도 불변일 것이다. 철학은 탄생할 때부터 눈에 보이는 것의 배후에 있는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진리를 확정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는 철학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한다. 언어의 모호함을 악용한 권력 행사를 비판하는 탈현대 사유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 P. 548

  개별적인 철학자들의 담론을 읽어나가면서 오래 기억될만한 문장이다. 철학이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현실을 주도하며 진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철학이 아니다. 새로운 세계의 변화를 수용하고 세계를 이끄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철학에 기댈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철학이 지닌 고유의 역할과 기능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이며 가능성이다. 그것이 진정한 철학은 아닐까 싶다.


070508-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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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 이제이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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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는 동안 왜 사느냐는 질문을 심장 박동수 만큼 하게 된다. 숨쉬는 모든 순간에 묻는다. 왜 사느냐고,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인류가 살아오는 동안 축적된 모든 지식으로도 아직까지 이 한 문제를 풀지 못했다. 우매한 인간들! 수 천 년 전에 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행복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아들 니코마코스에게 전해주고 싶은 아비의 심정을 헤아릴 필요는 없는 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을 통해 인간 윤리의 목적과 궁극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유하는 방식과 윤리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내가 읽은 것은 바로 그것이다. 누구에게나 가장 관심있는 ‘행복’의 문제로 이 책은 시작한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어질 수 있으며,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느낌이어야 하는가.

행복은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것일 게다. 탁월성을 획득하는 데 아주 불구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종류의 배움과 노력을 통해 행복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 36

 배움과 노력을 통해 배움을 성취할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가져 본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는 결론. 그것은 탁월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한다. 이전에 덕(德)이라고 번역되었던 모호한 개념을 탁월성이라고 말한다. 흔히 윤리의 문제를 선과 악의 개념을 나누는 것으로 생각한다.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 절대적인 선과 악은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면 그 굴레와 속박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저자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행복과 탁월성의 문제를 ‘좋음’을 기준으로 이야기한다. 

 악덕과 중용에 대해 말하는 기준은 모호하고 상대적이다. 동양 고전에서 말하는 중용과 거리가 먼 이 중용의 개념은 인간 윤리의 중간값을 말한다. 선과 악에 중간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 행동의 규범을 정의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절제와 용기는 지나침과 모자람에 의해 파괴되고 중용(mesotes)에 의해 보존된다. - P. 55

라고 말한다. 절제와 용기가 완벽하게 통제되는 인간은 없다. 지나침과 모자람도 상대적이다. 그렇다면 결국 윤리라는 것은 사회적 합의와 개인의 판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인가.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특별한 가치나 지향점을 윤리의 기본으로 볼 수 없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가치가 있듯이 그것은 타인에게 상대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물론 모두가 합의할 만한, 혹은 의미심장한 지적도 눈에 띤다.

무절제한 사람에게 문제가 되는 촉각은 신체 전체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들에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115

 행복과 즐거움의 문제를 신체에 한정시킬 때 전체와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은 기준과 방법이 간명하며 동의할 만하다. 시대적 가치와 분리될 수 없는 윤리가 있을 수 없다.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도 아니고 철학적 깨달음도 아니다. 진정한 행복과 즐거움에 이르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과 접근 방법이다.

 공감적 이해와 실천적 지혜로부터 비롯되는 행복을 꿈꾸어 볼 뿐이다. 사람 생김새만큼 다양하게,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에서 ‘행복’은 시작된다. 그곳에서 사랑이 생긴다.

‘사랑을 구하는 사람’은 즐거움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고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은 유익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는데, 이런 일[불평]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된 것들을 갖지 못할 때 생겨난다. - P. 315

그 사람이 없으면 그리워하고 그의 현전을 열망할 때 에로스적 사랑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선의를 가진 사람이 되지 않고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선의를 가진 것만으로 친애적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 P. 327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요소와 상식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듣는 사람에게 호소력이 있게 전달되는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이야기는 두고두고 새겨둘 만한다. 우리가 고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과 가치가 현재적 유용성에 있다면 먼지 묻은 책갈피를 들춰 고전의 향기를 음미하는 자세는 분명해진다. 그것은 실제 적용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용기는 산을 옮기는 것보다 어렵다고 믿는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깨어있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두고 두고 한 문장 한 문장을 새겨둘 만한 부분과 전체적인 논리망에 갇힐 수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는 것은 풀어야할 숙제이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이 행복에 있다는 데 일정부분 동의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천천히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070207-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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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7-02-07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식의 힘님 리뷰를 읽으니 이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철학에 관한 초심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인가요?

sceptic 2007-02-07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가 친절하지 못했나보네요...일기처럼 그냥 쭉 생각나는대로 써버려서...용어의 개념과 새로운 번역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테면 '덕'을 '탁월성'으로 번역한다든지 하는...새롭고 정밀한 느낌이 든다고 하는데 다른 판본을 꼼꼼하게 읽어본 적이 없어 비교는 불가능합니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흐름이 만만치 않습니다. 오프라인 서점에서 몇 페이지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초심잡니다.

짱꿀라 2007-02-08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광사에서 나온 책과는 느낌이 어떤가요.

sceptic 2007-02-08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본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부록으로 실린 해석들과 용어 설명으로 미뤄 짐작하고, 다른 책에서 인용됐던 개념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이 신선하다는 정도입니다.
 
광기의 역사 나남신서 72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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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쳤다는 표현 속에 이렇게 많은 함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미심쩍은 눈초리와 의심스런 생각을 갖긴 했다. 질병으로서 미쳤다는 표현과 흔히 일반적인 용어로 미쳤다는 말은 차이가 많다. 정상에서 벗어난 것을 일상에서는 미쳤다고 표현한다. 현대 의학에서 미쳤다는 표현은 쓰지 않지만 뇌의 이상이나 다양한 정신질환자를 우리는 흔히 미쳤다고 표현한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면 미친 것이다. 그럼 나는 정상일까? 우리는 모두 정상의 범주 안에 놓여있나?

흔히 의미있는 작업들이라고 하면 인간 사회에 충격을 주거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분야에 대해 언급하는 책들이 야간 산행에서 만난 등불처럼 반갑다. 누가 처음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들은 선명한 자국을 남긴다. 그런 의미에서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는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고전시대의 광기의 역사’라는 원제를 줄여서 번역했지만 특정 시대의 ‘광기’에 집착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광기의 역사>로 읽어도 무난하다. 이 책은 책 자체가 갖는 의미와 저자의 명성을 무시하고 읽을 수 없어서 책을 읽는 내내 빛의 간섭현상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감시와 처벌>로 번역된 ‘감옥의 역사’로 이 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푸코의 사유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다.

고전주의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광기’가 어떻게 다루어졌으며 어떤 방법으로 처리되었는지 왜 중요한가?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들여다보는 또다른 프리즘의 역할을 한다. 17세기와 18세기의 광기가 19세기와 어떻게 다른가?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는 광기는 무엇인가? 책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밑줄을 치며 잠깐씩 반복해서 읽어보았지만 쉽게 정리할 수는 없었다.

일반적으로 광기는 종교적 관점과 도덕적 관점에서 접근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면 이성이 아닌 비이성의 관점이냐 도덕의 관점이냐가 중요하다.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광기에 대한 태도와 대응 방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가지 관점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도 처리 방법이 전혀 다른 것도 아니지만 그 사회가 지닌 ‘광기’에 대한 태도는 인간 이성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구빈원에서 출발해서 현재의 정신병원에 이르기까지 푸코가 추적하고 싶었던 광기의 역사는 ‘인간 이성의 역사’의 다른 이름이다.

지혜에 비하면 인간의 이성은 광기일 뿐이었고, 사람들의 얄팍한 지혜에 비하면 신의 이성은 광기의 본질적 움직임 안에 놓여 있다. 큰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광기일 따름이고, 작은 차원에서는 전체가 그대로 광기이다. - P. 92

이 책을 읽는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다. 나는 미쳤나, 정상인가.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을 중심으로 광기에 대해 설명하고 분석하고 있지만 현재의 관점에서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적 의미와 태도가 달라졌을 뿐 광기는 여전히 우리 주변에 다양한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을 뿐이다.

숱한 역사적 자료와 텍스트를 넘나드는 푸코의 사유를 통해 ‘광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소설을 읽는 것처럼 단숨에 읽어야 한다. 호흡이 끊기거나 단절되고 나면 하나로 집중하기 어렵다. 니체와 고흐, 아르토를 예를 들며 책의 ‘인간학의 악순환’으로 책을 끝내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예술에서 나타나는 광기가 사회적인 부분과 어떻게 다르게 수용되는지 묻고 있는 듯하다.

사회가 수용할 것인가 배제할 것인가에 따라 광기의 운명은 갈라진다. 광기를 어쩌자는 것도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역사를 통해 인류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조건인 ‘이성’에 반해 ‘비이성’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광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실재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푸코가 고민했던 생각의 끄트머리를 짐작할 수 있다. 제 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 같았던 역사를 돌아보면 정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미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미친게 미친게 아니라 정상이 비정상인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고민은 어떤 것인지,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용어와 개념이 낯선 부분들과 심각한 번역투의 문장(우리말 구조와 어순이 망가져버린)들이 문맥을 흐려놓고 이해를 방해하는 부분들은 어쩔 수 없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어렵지 않은 부분들도 어렵게 느껴지게 하는 방해 요소가 되었다.

광기는 다만 이성의 날카롭고 비밀스러운 힘일 따름이다. - P. 96

광기는 ''착각''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이다. - P. 105

광기는 이성의 완전한 부재인데, 사람들은 광기를 ''이성적인 것의 구조''라는 바탕 위에서 그러한 것으로 곧장 인식한다. - P. 317

광기는 진실과 인간의 관계가 혼란되고 흐려지는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광기가 일반적 의미와 특별한 형태들을 띠는 것은 바로 이 관계의 파괴와 동시에 이 관계로부터이다. - P. 400

광기는 설령 보호시설 밖에서 결백을 선고받는다 해도 어김없이 보호시설에서 처벌받게 된다. 광기는 오랫동안, 적어도 오늘날까지는 도덕의 세계에 유폐되어 있다. - P. 767


광기에 대한 무수한 정의들과 분석들을 통해 푸코가 생각하는 광기가 아니라 우리가 인식해 왔던 광기의 역사를 재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광기도 결국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0701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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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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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학이 무척 바쁘다. 철학이 바빠진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들 삶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철학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을 때 철학에 기대기도 한다. 철학이 바쁠 만도 하다.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나다>는 제목이 너무 뻔해서 식상할 정도다. 철학이 영화도 만나고 예술도 만나고 바쁜 생활 속에 이번에는 당연히 만나야 할 ‘삶’을 만났다. 철학의 역할과 기능을 따져 볼 필요는 없다. 학문적 대상으로 아카데미즘에 매몰되어버린 철학이 세상 밖으로 걸어나온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철학자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라 생활인이다. 우리들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새로움과 낯선 생각을 나누어 주고 고정관념을 하나 둘 쯤 깨뜨려주면 그만이다.

모든 사람이 다 철학자다. 철학이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생활 속에서 당연히 마주치는 일들이 많다. 그 마주침과 부딪힘 속에서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던 문제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다르게 바라보고 거기서 작은 깨달음을 얻고 우리들의 행동이 달라진다면 가장 훌륭한 철학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하다.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아니 어떤 관점에서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가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점이나 시점은 세상을 보는 전제 조건에 해당한다. 전제가 잘못될 경우 전체가 틀려버린다. 물론 다양하지 못한 하나의 관점은 가장 경계해야할 시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다양한 논의들도 재미없다. 뚜렷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그런 책을 만나는 건 독자에겐 축복이다.

이 책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철학적 사유와 인문학적 경험들을 통해 철학의 흐름을 짚어주고 2부에서는 사랑과 가족 이데올로기 그리고 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일상에 매몰되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한 거시적 조망이다. 늘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매일 가족과 부딪히면서 그것들 자체에 대해 깊이 고민하거나 생각해 보지는 않는다. 그래서 관계가 어긋나거나 부자연스러울 때는 이유를 모른채 불만에 가득 차거나 화가 난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사유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철학은 우리에게 많은 얘기들을 건넨다. 그 말들이 어렵지도 딱딱하지도 않다면 금상첨화다. 저자는 쉬운 말로 독자와 대화를 시도한다.

쉽다는 것이 가볍거나 얇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방법의 문제일 뿐이다. 숨많은 철학자와 고전을 쉽게 풀어 인용하고 씨줄과 날줄로 묶어 절적하게 배치하는 것은 당연히 저자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거기에 자신의 철학적 성찰까지 담아내야 한다. 가벼운 내공으로 만만하게 시작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철학, 삶은 만나다>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마지막 3부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과 즐거운 주체로 살아가기 그리고 타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한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철학사를 안다고 해서 철학책을 읽었다고 해도 삶과 유리되어 있다면 쓸데없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국밥이라면 무의미하지 않은가. ‘타자’라는 놀음판의 ‘따짜’와 다르다. 철학에서 사용하는 타자의 개념을 몰라도 좋다. 다만 ‘타자는 나의 미래!’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크리스마스가 되면 사람들은 많은 선물을 주고받는다. 데리다는 선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떤 상호 관계, 반환, 교환, 대응 선물, 부채 의식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기대하거나 대가를 바라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다. 진정한 선물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행복하다. 내와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것은 살아 숨쉬는 동안 끊임없이 해야하는 삶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또 한 해를 맞이하면서 산다는 것은 쉽게 규정되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방법을 찾고 고민하는 시간들이 조금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생각들이 가슴과 다리로 이어진다면 좋겠다. 생활 속에서 주어진 상황 속에서 참여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다.


06122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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