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졸업식 행사가 다 취소되었다. 대학생들 입학식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까지 취소된 마당에 이 정도는 불만거리도 안 될 것이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컨테이젼(Contagion, 2011)에 이와 흡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의 십 대 딸은 신종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거의 집에서만 갇혀 지낸다. 아름다운 추억을 쌓을 기회도 남자 친구와 만날 시간도 신종 전염병 때문에 다 빼앗기고 만다. 딸을 위해 아버지는 집에서 졸업식 파티를 열어 준다. 아이들도 이 시간 동안 많은 기회를 추억을 박탈당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질적으로 충족되어도 내가 어린 시절 열린 공간에서 겪은 많은 체험과 그로 인해 남은 추억의 공간을 아이들은 가지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인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들은 이따금씩 미소짓게 되는 추억으로 남았다. 
















사실 이 책의 제목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동생이 안락사를 택했습니다'라니. 그런데 한편 이 제목을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가장 먼저 법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한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저자 마르셀의 동생은 말기암도 아니었고 희귀병에 걸려 육체적인 고통을 겪은 이도 아니었다. 마흔한 살의 성공한 사업가였다. 술을 자주 마시긴 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헤어져야 할 때까지 가족들은 그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눈부신 하루였다. 우리는 아무 문제도 없는 척, 마치 이 순간이 절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듯, 이 순간을 붙잡으려 애쓰면서 행복해했다. 그러나 하루의 시간을 다 써버렸다. 우리가 바랐던 것보다 더 빨리 써버렸다. 시간은 나쁜 놈이다. 또 다른 하루가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절대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눈에서 그것을 보았다.


동생 마르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술을 마셨다. 여러번의 금주 및 재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는 삶을 놓아버리고 싶어했다. 가족들도 지쳤다. 이미 합법적으로 안락사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던 네덜란드에서는 마르크의 죽음의 욕망을 합법적이고 절차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일은 진행되기 시작했다. 삶을 스스로 도움을 받아 끝내고 싶어하는 동생의 소망을 가족들은 끝내 이해하고 그 날들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 책은 마르크의 형인 마르셀이 그러한 동생과의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풀어낸 이야기다. 


마르크는 울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작았지만 그 안에서 가늠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애썼어도 질병을 극복할 수 없었던 한 남자의 눈빛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마르크를 꼭 끌어안고 빰에 입을 맞추었다. 


마르크에게는 우울증 등 중복된 정신장애가 있었다. 알코올 중독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일상 생활을 파괴했다. 희망을 가지고 여러 번 시도했던 치료는 모두 불발로 끝났다. 노부모와 형의 일상생활까지 덩달아 흔들렸다. 그는 진심으로 이제 그만 이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고 싶어했다. 합법적인 장치가 그의 이러한 욕구를 실행에 옮기는데 일조를 담당했을지는 모르겠다. 너무나 어렵고 민감한 이야기라 한 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가 느꼈을 절망의 깊이와 고통의 시간을 차마 짐작하고 단언할 수 없다. 가족들이 그러한 그의 선택에 어떻게 대응해야 했을지 섣불리 단정하고 말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삶의 매 순간은 축복일 수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분일초가 고통 그 자체일 수 있다. 그 어떠한 삶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죽음에 앞선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인생은 너무나 복합적이고 복잡하기에 어느 한 단면을 보고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단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하루를 어떻게 버텨야 할지 진심으로 더 이상 알지 못한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논쟁적인 이야기다.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대목은 쉬운 얘기지만 어렵다. 2002년부터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안락사의 취지에 부합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합법적인 종결을 인간이 선택에 의하여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는 그러한 가치 판단과 더불어 그 과정에 개입하는 노동자들까지 포함하는 이야기다. 심리 상담가, 의사, 화장터 직원 등이 개입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도 고려되어야 할 점이 많다. 내가 그 일에 종사함으로써 그 일에 일조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살면 살수록 어렵다. 삶을 넘어서는 고통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러한 당면하기 싫은 문제들까지 넘어가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부모님이 했던 고민을 이윽고 내가 하게 된다. 그들이 겪었던 고통의 서사 또한 다른 형태로 변형되어 경험하게 된다. 죽음의 이야기 또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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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2-12 1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코올 중독도 심각한 문제지만 우울증은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라고 하잖아요. 그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거죠.
밥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고 어떤 이는 숨쉬기조차 되지 않아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지기도 한다고 해요.
저는 가장 큰 벌이,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것, 이 아닌가 생각하는 쪽이에요. 하루하루 사는 게 고통스러워서 그만 끝내고 싶은데 죽을 자유조차 없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의 편견일 수 있겠지만요.

생각할 기회를 주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20-02-13 11:11   좋아요 0 | URL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힘든 상황, 육체의 고통의 십분지 일이나마 짐작이 가요. 행복하게 무병 장수하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삶이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요. 나이듦, 죽음 생각을 계속하다 보면 자꾸 두려워져요. 어른이 된다는 건 삶의 축복과 즐거움 뒤에 있는 어두움, 고통의 측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 같아요. 참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