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에게 인간이란 그저 탈것, 통로에 불과할 뿐이에요. 말이 지쳐 쓰러지면 바꿔 타듯이, 세대에서 세대로 우리를 타고 계속 가지요. 그리고 유전자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관심 없어요. 우리는 그저 수단에 불과하니까요. 유전자는 그저 무엇이 자기에게 효율적이냐만 생각할 뿐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 <1Q84>


의사이자 퓰리처상을 수상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의 저자인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의 도입부에 인용된 하루키는 그가 인간의 운명과 선택의 문제를 유전자와 유전체의 관점에서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이 경이로운 책의 서막을 울린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몸을 가로질러 세대로 전해지는 유전자의 관점에서 그것의 언어로 서술하는 것을 듣는 일은 얼음을 가르는 충격을 주는 경험이다. 무케르지는 후기에서 <암:만병의 황제의 역사>가 자신의 작가로서의 삶의 미래에 유치권을 행사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다시는 책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지 못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에너지를 쥐어짜다시피 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방대한 역사는 다시 그것의 제대로 된 모습을 고찰하기를 요구했다. 그 결실이 이 책이다. 그가 얘기했듯이 이 책은 오히려 암 이야기의 전편에 놓였어야 마땅하다. 


















방대한 생물학, 유전학의 역사는 1865년 브르노의 온화하고 성실했던 수도사 멘델로부터 출발한다. 그가 생전에 거의 생애를 바치다시피 한 어마어마한 규모의 완두 잡종 실험을 기반으로 한 논문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유전체 계획까지의 여정 자체를 가능케 한 업적이다. 그가 사랑한 완두 교배 실험은 원래 독립적인 유전 단위를 발견하려는 의도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지독한 성실성이 빚어낸 우연이 장대한 유전학의 역사의 견인 역할을 한 것이다. 무케르지는 다윈과 멘델에게서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서로 다른 관점에서 구현되었다고 봤다. 둘다 성직자이자 정원사였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각각 거시적이자 미시적인 관점에서 그 질문을 탐구했다. 멘델의 논문은 사후에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다시 유전학의 역사의 토대로 깨어나게 되고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명성을 은근히 질시했던 사촌 골턴에 의해 비틀어진 형태의 우생학으로 스며든다. 


무케르지는 시종일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찰자이자 서술자로서의 입장을 견지하지만 힘의 헤게모니에서 물러난 유전학의 역사의 기여자들을 사려깊게 불러와 그들의 잊혀진 이름을 명명한다. 왓슨과 크릭의 DNA의 이중나선 발견으로 인한 노벨상 수상의 뒤안길에는 그들에게 영감과 발견의 도화선을 제공한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이 있었다. 그녀는 생전에 그녀의 성과에 맞는 적절한 대우도 기여도에 맞는 인정도 받지 못했다. 남성들이 쓰는 유전자의 역사에 프랭클린의 자리는 없었다. 이것은 왓슨과 크릭이 후에 보여준 행보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다. 유머가 넘쳤던 천재 과학자 둘은 신우생학을 지지하고 심지어 노년에는 인종편견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아 인생의 전반기에 달성한 업적과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유전자에서 유전체 계획으로까지의 발견의 연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진화의 방편이자 결과인 돌연변이에 대한 시선과 유전자를 복제하고 변형하는 그 가능의 영역에서의 '자기강화'의 허약하고 위험한 지점의 개입의 문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서 결국 우리는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나치가 행사했던 그 끔찍한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과 폭력의 역사와 오버랩되는 기시감에서 헤어날 길이 없다. 더 우수하고 더 건강하고 완벽한 세대를 꿈꾸며 그렇지 않거나 부족한 유전체의 가능성을 사전에 처단하는 기로에 유전학의 역사는 당도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저자는 과감하게 등판한다. 그 자신의 내밀한 역사의 솔직한 고백을 덧붙이며 무케르지는 경고한다. 그것은 그의 가계를 가로지르는 정신질환의 역사다. 삼촌들과 사촌은 조현병을 비롯한 각종의 심각한 정신질환에 시달렸다. 유전자의 힘을 감안한다면 그 자신도 그러한 유전의 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딜레마가 어쩌면 이 장대한 유전자의 서사시를 추동한 힘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돌연변이의 가운데에 자아를 놓는다. 모든 것을 매끈하게 획일화하려는 욕망은 우리 자신을 죽인다. 


역사를 추진하는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인간 유전체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인류 역사는 그런 충동, 야심, 환상, 욕망을 지닌 유전체를 선택해왔다. 이 자족적인 논리 회로는 우리 종의 가장 장엄하고 상징적인 자질 중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가장 괘씸한 특징 중의 일부도 빚어낸다. 이 논리의 궤도를 탈출하라는 것은 너무 심한 요구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질적으로 순환적임을 인식하고, 지나칠 때 회의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강자의 의지로부터 약자를, "정상인"의 박멸 행위로부터 "돌연변이"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 싯다르타 무케르지>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고 싶다면, 내가 사는 이 세계에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힘의 한계와 나와 나의 삶을 흔들어 대는 외부의 힘에 지쳤다면 유전자의 세계로 들어오기를 권한다. 그 불가사의하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을 완고하게 감추고 있는 왕국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 우리와 우리가 죽고도 이어질 그 유전자들의 역사는 인간이 그럼에도 살아나가는 그 근원적인 힘에 대한 경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태어나 살고 죽는 과정이 무에서 무로 돌아가는 무의미함이 아니라 어떤 아름답고 복합적인 메시지의 일환으로서 자리매김한다는 앎은 함부로 폄하될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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