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지금이 가장 좋을 때'라는 것이다. 육아 선배들은 항상  '조금만 더 커봐라, 이러이러해서 더 힘들다'며 충고의 말을 아끼지 않는다. 기어다닐 때, 걷기 시작할 때,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등등 커가는 과정 속에서 주변으로부터 계속 듣게 된다. 기어다닐 땐 걷기 시작하면 더 힘들어진다고 하더니만, 걷기 시작하면 말 배우기 시작할 때 장난이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가 제일 힘들고 언제가 제일 좋은 시절이란 말인가?

 

법륜 스님은 수행이란 지금의 처지가 바로 좋을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옛 시절이 좋았다고 과거 속에서 살거나 미래의 좋은 처지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순간이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을 아는 것이 수행의 목표점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수행하는 것과 똑같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며 살기엔, 또는 좀 더 크면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 속에서 살기엔, 현실은 너무나 쏜살 같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 아이가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과 행동들을 뒤로 하고 힘든 기억과 마음만을 간직한다면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난 아이를 웃으면서 쳐다보려 한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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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돌도 안된 아이에게 고함을 쳤다. 아니 고함이라기 보다는 분풀이를 위한 절규였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이는 처음 듣는 고함소리에 놀라는 눈치다. 갑자기 울음을 뚝 그치고 눈치를 살핀다. 물론 잠깐이지만. 이내 다시 떼를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번 더 아이에게 고함을 칠 순 없었다. 아이가 깜짝 놀라는 모습에서 왠지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대단히 잘못했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고함은 그저 나의 분을 삭이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지독한 감기 몸살이었다. 몇년 만에 이렇게 앓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로부터 시작된 감기가 온 가족에게 다 옮겨간 것이다. 그러니 아기도 얼마나 컨디션이 나쁘겠는가. 안겨있으면서도 계속 칭얼댄다. 한두시간은 어떻게 참아보았지만 세시간을 넘어서니 그 울음소리가 내 신경을 자꾸만 갉아먹는것 같다. 더구나 몸살에 걸린 몸뚱아리가 제발 쉬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았다. 한계를 넘어섰다고 느끼는 순간 고함은 거리낌없이 튀어나왔다.

 

법륜 스님은 짜증과 성냄은 모두 다 자기만을 생각했을 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타인의 입장에서 취하면 성낼 일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가깝지만 타인은 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짜증과 성냄 속에서 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돌아봤다. 아이에게 고함을 친 일은 분명 내 몸과 마음이 지쳐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즉 오직 나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어떤가. 몸에 열이나고 콧물이 흐르고 눈꼽이 끼는 불편함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이었겠는가. 이런 불편함을 단시간에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저 칭얼대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의 해결을 개인이나 마음가짐으로 푸는 건 제도나 환경의 개선을 가져올 기회를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할 부분이긴 하지만, 때론 꿈쩍도 않는 벽 앞에서 통곡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 일단 짜증나고 화가 난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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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개정증보판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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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무부 장관인 힐러리 클린턴은 대학시절 공화당을 지지했었다. 하지만 대학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민주당으로 입장을 바꾼다. 반면 자신의 룸메이트는 민주당을 지지했지만 공화당으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한다. 이런 인식의 뒤바뀜은 미국 대학의 철저한 토론식 수업 과정 때문이었다.

 

우리는 어떤가. 대학시절 운동권을 대표하던 사람이 보수당원이 되었다고 실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마땅한 곳이다. 반대로 보수적이었던 사람이 진보적 입장을 취하면 죽일듯이 욕을 해댄다. 입장 선회는 다름아닌 변절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변화를 변절로 바라보는 색안경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토론 문화의 부재가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본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거쳐 6.25와 독재 정권을 지나면서 지조와 절개를 중시해 왔다. 물론 이런 경향은 유교적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강화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상적으로 지조나 절개를 중시하면서도 실제론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였지만 말이다. 어쨌든 자신이 한번 정한 입장은 죽음 앞에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나와 적이라는 분명한 구분이 가능할 때의 일이다.

 

이제 상황은 바뀌었다. 우리는 이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물론 절대 퇴보할 것 같지 않은 민주주의의 발길이 때론 뒷걸음 치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군과 적군의 개념은 사라져야 할 시기라고 본다. 대화와 토론은 통해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면서 서로 설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다. 이책 <헌법의 풍경>이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연법과 함께 일방적으로 기준을 정해줄 사제가 사라진 시대에는 정의를 찾기 위한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대화 또는 절차라고 하는 기준이 작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하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임으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 이런 대화의 장에서 법이 해야 하는 일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대화의 규칙 또는 절차를 보장해주는 것이며 이와 같은 절차의 핵심이 되는 것은 개방성과 민주성입니다. 101쪽

 

그러나 이런 개방성과 민주성이라는 소양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나만 해도 그렇다. 한번 주장한 내용은 중간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거나 틀렸다는 생각이 들어도 쉽사리 고치지 못한다. 아니, 틀렸다는 생각을 애시당초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은 나 개인만의 성향은 아닐듯 싶다. TV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패널들이 자신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경우는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 주장만 있을뿐 토론은 없다. 개방성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있을 뿐이다. 이번 임수경씨의 '변절자'란 논란도 이런 개방성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아무튼 변화가 인정되지 못하고 변절로 낙인찍는 사회는 위험하다. 당신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다름의 각을 서로 좁히기 위한 대화가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헌법은 바로 그 길을 닦는 불도저다. 이 책은 그 불도저가 고장나지 않도록 우리가 항상 닦고 조이고 기름칠 해야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또한 불도저가 엉뚱한 방향으로 운전되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랬을 때 우리는 더불어 평온한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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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SBS TV 스페셜 '나는 산다 김성근, 9회말까지 인생이다' 에서 고양 원더스 감독을 맡고 있는 김성근 감독을 다루었다. 만년 꼴찌팀을 우승팀으로 바꾸어 놓았던 그의 리더십이 주된 내용이다. 1%의 희망이라도 찾아내고, 절대 선수들을 버리지 않는 마음. 앞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보는 잠자리의 눈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야구에 미친 사람이다. 그의 별명 야신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승리 야구가 재미없다고 비판한다. 벌떼 같이 투수들을 바꾸고 희생번트가 많은 경기는 지루해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선 승리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하일성씨가 "김성근식 야구가 싫다면 그의 야구를 이기면 돼요. 간단한 거죠."라고 표현한 것은 그야말로 한국야구가 김성근의 색깔을 닮아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김성근 감독의 어떤 점이 그의 야구를 강하게 만들었을까. 김성근 감독은 "살기위해 일하면 안되요. 일하기 위해 살아야죠"라고 말한다. 아뿔싸. 그가 야구에 미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깜빡했다. 그의 열정은 선수들에게도 그대로 전염된다.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방망이를 휘둘러대다 보면 어느새 그것에 중독되어 버린다. 50이 한계였던 사람이 100으로 그 한계치를 늘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 과정에 중독되어 버리지 않을까. 김성근 감독은 "사람은 천성적으로 게을러요. 그래서 자기 한계를 만들죠. 그 한계 안에 있으면 편하니까"라고 말한다. 게으름을 거부하고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찌보면 희열을 맛볼 수도 있을 법하다. 그래서 김성근 감독은 선수들에게 존경받는 멘토로 우뚝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정과 끈근함이 그의 팀을 강팀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속한 팀이 꼭 강팀이 되어서 우승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더라도 재미있는 야구를 해선 안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은 아마추어에겐 어떨지 몰라도 프로의 세계에선 절대 통할 수 없는 일일까. 만약 팬들이 팀의 우승보다도 야구의 재미-물론 승리가 주는 재미도 크지만, 경기 자체가 주는 재미도 있지 않겠는가-에 손을 들어준다면 꼴찌라도 박수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그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마치 박민규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상은 <미쳐야 미친다>를 모토로 삼고 한 분야에서 정상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겐 얼토당토 않은 일일 것이다. 그정도 까진 아니더라도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죽어라 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겐 오히려 시간낭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의 리더론이 나의 온몸의 세포를 자극하면서도 섬뜩하도록 경계가 되는 것은 최근 읽은 <피로 사회>라는 책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 속에서는 성취를 위한 끊임없는 발걸음보다는 잠깐의 멈춤, 그리고 돌아봄, 명상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기에 김성근 감독처럼 살아가는 일은 정말로 피곤한 인생이지 않을까 라는 의문이 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인생이 멋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실은 자본주의의 생산력 증대라는 시스템에 기름칠을 해준 것은 아닐까. 모두가 김성근 감독처럼 살아가려고 한다면 말이다.

 

물론 쉬엄쉬엄 살아간다는 것은 먹고 살만했을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반대로 김성근 감독처럼 어떤 경지에 이르렀을 때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고, 그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처럼 야구를 못해도 그냥 즐길 수는 없는 것일까. 메이저가 되려고 내 온몸을 불사르며 살아가는 길과 반대로 마이너로 살면서도 유쾌하게 살 수 있다면(물론 마이너가 유쾌하게 살아가는 일은 현실에서 더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처럼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지 또한 누가 알겠는가), 당신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우리는 정상-리더에 너무 목말라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김성근 감독의 말씀을 들으며 생각해본다. 목표를 향해 정찰하듯 똑바로 나아가기 보단 때론 해찰을 하며 비틀비틀 걷는 것도 행복한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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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다. 갑자기 총에 맞아 죽다니. SBS월화드라마 <패션왕>의 결말 얘기다. 강영걸이 죽는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누가 죽인건지 가늠할 수도 없으니 이유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봤다. 단순히 비극을 위해 치닫은 결말이 아니라면 무슨 의도라도 있을텐데.

 

그때 문득 떠올랐다. 1960년 알랑 드롱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가. 혹시 강영걸은 리플리 증후군-상류 사회를 꿈꾸다 현실과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 상태. 영화 태양은 가득히의 주인공 톰 리플리의 이름에서 따왔다-에 걸린 불나방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정재혁을 꿈꾸다 그를 흉내내고 결국 파멸로 끝을 맺은 것은 아닐까.

 

패션왕이 초반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던건 개인적으로 자수성가라는 주제 때문이었다. 홍대 앞 노점상에서 시작해 동대문을 거쳐 세계 4대 패션쇼에 이름을 올린 최범석 디자이너라는 '기적같은' 이야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런데 중반 드라마는 대기업을 상징하는 정재혁과 강영걸의 싸움으로 진로를 바꾼듯 싶었다. 그래, 뭐 이런 이야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대기업 프렌들리 대한민국에서 중소기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보여주는 것도 말이다. 그런데 잠깐의 성공이라는 달콤함을 맛본 강영걸이 갑자기 바뀐다. 욕망과 복수에만 사로잡힌 것이다. 그래서 드라마 후반 강영걸을 연기한 유아인의 얼굴은 내내 찡그리는 표정 뿐이다. 알 수 없는 사이 리플리가 된 것이다.

 

10%가 아니라 단 1%로 치닫는 상류층과 대다수의 하류층으로 나뉘어 버린 현재의 대한민국. 그 1%에 대한 욕망이 대한민국을 굴러가게 만드는 힘일지도 모른다. '대박'이라는 단어가 일상에서 뒤틀린 언어가 되어버린 것도 혹시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욕망은 끝내 불발이 되고 만다. 강영걸의 죽음처럼. 난데없는 드라마의 결말은 혹시 이런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허망한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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