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게 "내거야"다. 아이는 마치 이 세상 전부가 자기 것인양 당당하게 "내거야"를 외친다. 다른 아이들 손에 들린 것이 마음에 든다면 주저없이 빼앗아 "내거야"라고 한다. 그렇기에 내거야 뒤에는 "아앙"이 따른다. 싸움이 일고, 실제적으로 자기 것이 아니기에 돌려주어야만 하는 상황에 눈물을 흘리고야 마는 것이다. 

 

아이들은 다 이런 시기를 겪는다고 한다. 어떤 아이들은 겪는듯 마는듯 지나가기도 하겠지만 열병처럼 지독하게 앓고(?) 가는 아이들도 있다. 하지만 점차 남의 것도 인정하고, 나의 것도 나눌 수 있는 마음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고 해서 "내거야"의 시기를 다 지나보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승자독식사회에선 경쟁에서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것이 내것이 되니 그 욕망을 놓아버리는 것이 쉽지않다. 여기에서도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내거야" 뒤엔 "아앙"이 따랐다는 것을.   

 

정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내 것을 줄여나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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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은 슬픔은 죽음에 이를만큼 고통스럽고, 사랑을 얻은 기쁨은 온 천하를 얻는듯 즐거워보인다. 영화나 드라마, 노래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런 사랑 앞에선 어느 누구라도 수퍼맨이 되는듯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선 하늘의 별이라도 딸 수 있고, 사랑하는 이가 곁에 있다면 세상에 못할 일은 없을 것만 같기에.

 

하지만 사랑에도 유효기간이 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호르몬이라는 관점에서. 기껏해야 2년 반 정도의 시간, 우리는 콩깍지에 씌여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호르몬이라는 묘약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우리는 소위 정이라는 가짜약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가짜약을 제조하는 이때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사랑 대신 믿음이 자리를 잡고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갈등도 함께 자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소위 가짜약의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랑할 때는 기대라는 것을 접고 산다. 하염없이 퍼주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해주었으니, 응당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받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건 유효기간이 지난 사랑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마음 속에서 갈등은 시작된다. 힘들때 기대고 싶다는 마음, 나의 고통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이런 류의 마음은 모든 것을 퍼줄 때의 마음이 아니다. 이젠 받고 싶은 마음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몹시도 모질어 조금이라도 충족시킬 수 없다면 분노가 솟아오른다. 사랑에서 분노로 그 행로가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래서 사랑으로 인한, 아니 사랑이 끝나고 시작되는 갈등을 슬기롭게 넘기려면 기대를 내던져야 한다. 그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즉,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상대방이라는 시선으로 관계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대를 버린다는 것은 욕망을 버린다는 것이다. 상대가 이래줬으면 하는 바로 그 욕망말이다. 그것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다. 비록 그 길이 순탄치 않더라도 그랬을 때만이 사랑이 사라지고 난 자리, 서로 나 몰라라 남남으로 살아가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는 것이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비로소 한 인간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수퍼맨은 이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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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를 찍었던 크리스터퍼 놀란 감독에 대한 믿음으로 영화를 봤다. 하지만 대 실망이다. 아주 평범한 블로버스터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전작이 주던 감동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기껏 준비한 것이 소설 <바람의 화원>같은 반전과 풍뎅이를 닮은 더 배트라는 전투기 뿐이었다. 도덕적, 윤리적 딜레마를 안겨주며 인간의 어두운 측면을 여과없이 드러내보였던 조커라는 캐릭터를 대신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영화는 악당을 쳐부수고 말겠다는 영웅과 아버지의 뜻을 받들겠다는 악당,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악당2라는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들의 치고받기다. 조커같은 입체적인 캐릭터는 없다. 이것이 밋밋해서인지 감독은 희망의 두 가지 성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 고리타분한 이야기이지 않는가. 판도라의 상자 속에서 나온 절망과 희망을 대하는 두가지 태도라고나 할까. 희망은 절망의 친구이기도 하고, 절망의 그물을 뚫고 나오는 꽃이기도 하다는.

또한 악당이 말하는 혁명이라는 것도 너무 유치하다. 상위 1%는 무조건 악이고, 그렇기에 그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은 무조건 처분해야 한다는 것. 그것도 즉석 재판으로 말이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곳에서 혼돈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그저 분노의 발산만 있을 뿐이다. 물론 이 분노는 주인공들을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분노의 격돌로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만이 영화가 돈을 쏟아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 뭐 이런 볼거리라도 있어야지...

새로운 배트맨의 탄생을 예고하는 마지막 장면은 놀란 감독의 배트맨은 끝났을지 모르나 이어지는 속편은 계속될 것이라는 암시같다. 하기야 놀란 감독도 교체될 때가 됐긴 됐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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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한다.

 

영화 <토탈 리콜>-23년 만에 리메이크 되어 8월중 개봉한다-중에 한 박사가 주인공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에게 건넨 말이다. 주인공이 평범한 노동자인지 첩보원인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기억에만 의존하지 말라는 '사탕발림'이었다.

가끔씩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곤 한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지만 지금은 관심을 받게 되는 장면을 만나게 되는 기쁨 때문이다. 또는 예전의 그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거나.

어쨋든 20여년 만에 다시 보게된 <토탈 리콜>에선 위의 대사가 가슴에 와 닿았다. 정체성이란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기억의 집합체일지 모른다. 과거의 수많은 내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됐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들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는가. 스필버그 감독의 <A.I>에서는 로봇에게 기억을 심어주자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이니 기억이란 바로 자기 자신인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부터 시작해 재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 등등 수많은 SF영화 속에선 이렇게 기억과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그 기억이 조작된 것이라면 진짜 나란 누구일까. 이런 고민은 공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홍상수의 영화들을 보면 우리의 기억이란 것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일어난 사건은 똑같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사람들마다 다 다르다. 마치 일본영화 <라쇼몬>처럼 말이다. 즉 기억의 조작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진화한 방식이기도 하다. 기억은 정확한 재생이 아니라 특정 정보를 얻고자 할 때 제공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변형되어 저장된 것이 바로 우리의 기억인 것이다. 어렸을 적의 소중한 추억 중 실제로 일어난 일은 별로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남에게서 들었거나 영화, TV, 책을 통해 간접 경험한 것을 섞어서 자신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추억을 스스로 조작하는 것은 현재와 관련이 있다. 자신의 어떤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자신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행동인 것이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영화 <토탈 리콜>에선 그렇게 말한 박사가 죽게 된다. 주인공을 속이려한 긴장 탓에 땀방울을 흘렸기 때문이다.

어쨋든 기억이란 정확한 재생이 아니라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유동적이라는 점에서 매트릭스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가상공간 속에서 살아가다 현실과 맞닿은 곳에서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기억은 영화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가 선택한 알약에 따라 다른 세상이 펼쳐지듯 우리에게 나타난다. 즉 우리는 선택이라는 행동을 통해 나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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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월화드라마 '추적자'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등장인물들의 원초적 욕망이 여과없이 드러나면서 생겨나는 갈등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그 욕망의 싸움은 돈과 권력의 싸움으로 집약된다. 즉 한오그룹 서회장으로 대변되는 돈의 힘과 강동윤이 대변하는 권력의 힘이 맞짱을 뜨면서 불꽃이 튀는게 흥미진진한 것이다. 실상 주인공인 백홍석은 어찌보면 이 싸움의 들러리 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물론 드라마의 결론은 돈도 권력도 없는 평범(?)한 시민인 백홍석의 반란이 성공으로 끝날 가능성이 무척 높겠지만 말이다.

 

한국의 자본주의가 지금처럼 발전하기 전까지는 권력의 힘에 의해 기업의 운명이 좌지우지됐었다. 즉 권력이 무소불위의 힘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돈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흔히들 말하지 않던가. 한 대기업의 정보력이 국가 정보기관의 정보력보다도 더 막강하다고... 그래서 서회장은 강동윤을 두려워하면서도 그를 적토마 또는 황소처럼 부려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또한 드라마 속에서 그는 국가 권력을 지닌 세력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한다. 돈이 권력의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강동윤의 목표 또한 대통령이 아니다. 대통령은 그저 거쳐가는 단계일뿐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은 한오그룹의 총수 자리인 것이다.

 

'추적자'가 보여주는 돈의 막강함은 이승기와 하지원이 주연을 맡았던 '더 킹 투 하츠'로부터 발전된 모습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서도 한 나라의 왕인 이재하와 다국적 기업의 총수인 김봉구의 싸움이 큰 줄기였다. 김봉구 또한 돈의 힘으로 세계 각국의 정부들을 움직였다. 하지만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국가는 기업의 뜻을 거부했다. 물론 김봉구의 좌절로 끝나는 싸움은 아니었다. 김봉구는 또다른 김봉구를 계속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돈은 권력을 쉽게 꺽을 수 있는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추적자'에선 어느덧 돈이 최상의 힘을 갖추고 있다.

 

'추적자'의 명목상 주인공인 백홍석은 돈도 권력도 없는 시민을 대변한다. 그가 권력을 얻을 수 없는 것은 그 권력을 위임한 대의민주주의때문이기도 하며, 그가 돈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닫는 신자유주의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즉 그는 한낱 하수인에 불과한 것이다. 드라마가 극적으로 흐른다면 그건 하수인이 반란에 성공할 때일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반란의 성공보다는 돈이 갖는 힘에 대한 공포를. 그래서 우리는 동경할지 모른다. 돈을 마음껏 갖을 수 있는 자리를. 바로 강동윤처럼. '추적자'가 매력적인 것은 바로 그런 욕망들을 숨김없이 까발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진정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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