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의 <끌림>이라는 책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어딘가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가 너무나도 소중하게 생각한 걸 그만, 두고 온 거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건데 과연 나는 찾으로 갈 성격인가, 아닌가 하는 생각.

그것이 물건이라면 포기하겠지만 사람이라면 아주 많이 다를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100% 동감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따라오지 않겠다면 어떡해야 할까. 아니, 그렇게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 있긴 한걸까.

사람을 믿지 않으면 끝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끝이고 더 이상 아름다워질 것도 이 땅 위에는 없다.

위의 말은 또 어떤가. 맨처음 했던 가정에 대입해보자. 이번엔 반대로 내가 남겨진 대상이라고 해보자. 홀로 낯선 곳에 떨어져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 믿는 그 사람이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끝끝내 나를 찾으러 올 것인가. 그 믿음이 흔들린다면 세상이 흔들린 거다. 그러나 믿는다. 누군가 흔들리는 나의 손을 잡아줄 것임을. 나또한 흔들리는 누군가의 손을 잡을 것임을. 기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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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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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서적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ㅇㅇㅇ 100배 즐기기 류의 정보로 가득찬 책이 있는가 하면, <나를 부르는 숲>이나 <와일드>같이 트레킹을 통해 삶을 배우는 성장기같은 책도 있다. 실크로드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같은 순례길 등 길을 통한 과거와 현재와의 만남을 소개하는 것들도 있다. 또는 한 나라나 도시, 지역을 소개하거나 여행 중 느낀 감상을 소회하는 에세이류의 책들도 많다. 이병률의 <끌림>이라는 책도 이렇게 많고 많은 여행서적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많고 많은 책 중의 하나가 아니라 독특한 하나의 책임을 실감한다. 마치 여행시처럼 느껴지는 구절구절들은 다시 앞에 읽었던 페이지를 들쳐보게끔 만들 정도로 매혹적이다. 어떻게 보면 여행의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주제도 일정하지 않은듯 보여 불친절해 보이지만, 감정의 흐름을 따라 마음으로 읽혀진다는 점에서 두번 세번 곱씹게 만드는 책이다.

 

 

 

 

 

 

 

 

 

 

특히 여행 중에 만난 배려심 넘치고 친절한 사람은 물론 자신을 등쳐먹는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 사는 희노애락을 꾸밈없이 접할 수 있다는 게 좋다. 더군다나 90도로 꺽인 벽이 ㄱ자와 ㄴ자처럼 두가지가 있듯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안에서만 살던 사람들은 90도로 꺾인 벽을 ㄴ처럼 안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밖으로 나가면 꺾인 벽이란 ㄱ처럼 밖으로 향해 있는 것이다. 여행이란 바로 ㄴ에서 ㄱ으로 또다른 90도를 보게 만드는 것임을 책은 말하고 있는듯하다. 내부의 시선과 외부의 시선의 차이점을 실감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넓힐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감정의 폭도 커짐을 의미하는 것이요, 타인을 이해하는 공감의 능력도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이병률의 <끌림>은 바로 이런 점에서 여행의 끌림을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글과 함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드는 사진들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스윽 훑고 지나가는 관광이 아니라 그곳에서 머물며 감정이 진동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여행을 체험하고프도록 만드는 이 책은 정말 읽는 즐거움을 전해주며 마음을 끌리게 만드는 책이다. 내 마음의 감성들 위로 켜켜이 쌓인 먼지를 황사 뒤의 빗줄기처럼 깨끗하게 씻어내려줘 바람에 흩날리는 눈조각들에 마저도 울컥하는 기분을 만들어주는 한편의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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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자리엔 흔적이 남습니다.

폭풍우로 인해 나무가 쓰러지기도 하고, 거센 파도에 휩쓸려 해안도로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지나간 것들이 너무나 거대하기에 남겨진 흔적도 큰 상처를 남기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봄바람에 꽃망울이 터지기도 하고, 잔잔한 파도가 지나간 모래사장 위엔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지기도 하지요. 따듯한 어루만짐 뒤에는 아름다우면서도 새로운 무엇인가가 탄생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까요. 

폭풍우같은 정열적인 사랑이 끝난 자리엔 가슴을 후벼파는 생채기만 남아있을까요. 사람의 체온처럼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도 따스했던 사랑이 아련하게 떠나가면 아름다운 추억만이 고스란히 빈자리를 차지할까요.

사랑이 지나간 자리의 흔적은 사랑의 크기와 별 상관이 없어보입니다. 아주 작은 생채기도 마음을 도려낸 듯한 큰 상처도 아프긴 매 한가지이니까요. 더 큰 아픔이란 그저 산수일 뿐입니다. 아픔에는 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어보입니다. 다만 언제쯤 상처가 아물지 그 시간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러나 절대 비례관계는 아니라는 것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만듭니다. 흔적은 끝끝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 흔적이 아름답게 남아있기만을 빌 뿐입니다. 저주의 말을 내뱉지 않는, 미워하지 않는, 서러워 않는, 그래서 비온 뒤 해가 뜨면 무지개라는 흔적을 남겨주듯. 그렇게 사라져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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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빗 뜻밖의 여정>은 <반지의 제왕>시리즈 이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긴스와 골룸의 만남, 그리고 절대반지를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출발은 고향집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던 빌보 배긴스를 간달프가 찾아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난쟁이족들의 잃어버린 에레보르 왕국을 되찾는 원정대에 합류할 것을 제안받은 것이다. 하지만 배긴스는 망설인다. 땀내나고 더럽고 춥고 배고픈, 그리고 목숨까지 위협받는 모험을 나선다는 게 내키지 않은 것이다. 누구나 모험을 꿈꿀것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집을 떠나기를 결정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모험이 아니라 여행조차도-물론 관광이 아니라- 선뜻 마음을 굳히고 실행하기엔 엉덩이가 무거운 법이니까. 일단 슬리퍼를 신고 집안에 들어와 누워있으면 다시 운동화를 갈아신는다는 건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지 않던가. 온기와 편안함, 평온함 등등을 모두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긴스도 그랬다. 결코 떠나지 않을것 같았다. 그러나 배긴스는 모험을 선택했다. 슬리퍼를 벗어던지고 운동화로 갈아신은 것이다.

모험이 주는 불편함을 알면서도 어째서 배긴스는 길을 나선 것일까. 모험은 바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 그것은 모험을 통해 탄생한다. 그것은 새로운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다. 낯섬과 만남, 그리고 이야기란 바로 젊음이다. 길을 나서야 비로소 변할 수 있다. 나이든 이들에겐 부담인 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나이란 물리적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슬리퍼를 신고자 하는 마음이 나이듦이요, 운동화를 신고 길을 나서는 마음이 바로 젊음인 것이다. 배긴스는 젊어지고자 한 것이다. 이야기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여정은 뜻밖의 여정이 됐다.

한편 에레보르 왕국을 되찾고자 하는 난쟁이들도 피난으로부터 겨우 구축한 안정된 삶을 버리고 모험을 떠났다. 그런데 이들의 모험은 고향집-잃어버린 왕국-을 찾기 위한 것이다. 즉 슬리퍼를 신기 위해 운동화를 신은 것이다. 운동화를 신고 평생을 걸어갈 순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달콤한 꿈나라로 인도할 침대와 방안을 돌아다닐 슬리퍼도 필요한 것이다. 운동화와 슬리퍼. 그것은 어느 하나가 내 발에 항상 신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갈아신을 수 있어야만 한다. 문제는 그것을 갈아신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일뿐.

 

2. <호빗>의 이야기 진행은 다소 느린 편이다. 초반엔 마치 엿가락 늘인 것처럼 축축 처지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중간 중간 보여주는 액션장면은 정신을 바짝 들게 만든다. <반지의 제왕>시리즈가 주었던 충격만큼은 아니지만 3D로 무장함으로써 새로운 볼거리를 선사한다. 특히 48프레임의 화질은 마치 LED TV로 HD급 화질을 보는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런 고화질은 때론 너무 사실적이어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듯하다. 특히 풀샷으로 찍힌 질주 장면들-평원에서의 토끼 썰매- 은  이것이 그래픽장면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으로 다가오는 입체감과 눈앞에서 멀어져 가는 입체감을 동시에 선사함으로써 3D의 깊이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에 감탄한다. 앞으로 또 얼마나 발전된 촬영기법을 다음 시리즈에 담아낼지 자뭇 기대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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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는 불교의 나라다. 이곳의 스님들은 이 마을과 저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놓기를 가장 큰 보시로 여긴다. 여기서 다리놓기란 서로간의 소통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다는 의미라 여겨진다. 이러한 다리놓기는 비단 마을과 마을 뿐만의 일은 아니다. 내 마음과 당신의 마음에도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것은 나를 위한 가장 큰 보시일 것이다.

 

하지만 다리를 놓으려면 항상 저편에 닿아야 한다. 저 편에 닿지 못하면 다리는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우리는 타인과 다리 놓기를 힘들어한다. 특히 가까운 사람일수록 다리를 놓기보다 도랑을 파기 일쑤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 영혼이 건강한지 자꾸 물어본다. 인간은 자신과 상대방 사이에 다리를 놓기보다 깊은 도랑을 파는 일이 허다하다. 날선 흉기로 돌변하는 말을 내려놓고 자연 속에서 침묵을 배운다. 침묵하는 동안 많은 생각들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말, 누군가의 밤잠을 설치게 한 말, 허투루 내뱉은 말이 그들의 하루를 망치지 않았나 더듬어본다. 명상은 어쩌면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책 <지리산에서 보낸 산야초 차 이야기 1> 165쪽)

 

섬으로 존재하는 우리. 그리고 그 섬을 잇는 다리들. 그러나 온전한 다리는 드물다. 언제나 허물어지고 부서지고 쪼개진다. 다시 보수하고 잇고 조여매지만 다리는 흔들리고 뒤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저편에 닿고 싶은 섬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오늘도 이렇게 다리를 놓고자 침묵의 소리로나마 다가설 수 있음을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부디 저편에 생채기를 내지않고 무사히 닿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나와 너 사이에 언제 휩쓸려갈지 모를 섶다리라도 놓여지기를 소망한다. 그건 당신의 마음에 한번이라도 내가 들어갔음을 의미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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