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제2복음 1
주제 사라마구 지음 / 문학수첩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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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신을 믿지 않는다.과거에는 믿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님 믿음을 강요당했던 것 같기도 하다.어려서부터 부모님들은 교회에 다니셨다.그래서 난 유치원도 그 교회의 부설 유치원을 다녔다.유치원 간식 시간에는 먼저 주기도문을 외워야했다.7살 먹은 녀석이 그 뜻을 어떻게 알수 있겠는가.단지  남들도 다 따라하고  나 역시 간식의 유혹에 뿌리치기 어려우니 열심히 따라외웠다.

초등학교때는 만화영화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부모님들의 설득보다 만화의 유혹이 컷다.(아마 만화에 악마가 깃들여 있었나보다.) 하지만 어머니의 쑈(?)에 의해 난 교회에 나가기로 결심했다.우리 어머니의 쑈는 지금 생각하면 좀 귀여운데가 있다.어느 일요일 아침 단단히 작정한 어머니는 내 손목을 끌고 교회로 가셨다.난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진짜 그랬다.) 완강히 저항했다.결국 새로놓인 8차선 도로앞에서 어머니와 나의 전선이 형성되었다.그때 우리 어머니..."니가 교회에 가지 않으면 엄마는 확 찻길로 뛰어들거야" 라며  찻길로 들어가셨다. 초등학교 4학년인 내 눈에는 어머니가 진짜로 길로 뛰어드는 것 처럼 보였다.결국 어머니의 블러핑에 엉엉울면서 "알았어..교회가면 되잖아" 라고 말해버렸다.진짜 애들 데리고 무슨 블러핑을 그리 세게 하셨는지....사실 우리부모님도 날라리 교인이신데.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귀여운데가 있다.

어쨋든 나의 패배로 종교를 둘러싼 집안내의 갈등은 사라졌다.하지만 중학교 2학년때 난 교회에서 발을 끊었다.이유는 너무 단순하게 교회에 진짜 맘에 안드는 놈이 설치고 다니는 꼴이 보기 싫어서였다.여차여차하다 고등학교를 가게되었는데 또 거기가 미션스쿨이었다.교가보다 '실로암' 이란 가스펠이 더 자주 불려지던 곳이었고 반에서 절반정도는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매주 수요일 예배를 봤는데 그땐 그다지 크게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예배때 가서 영어 단어장보고 그런 친구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으니까.

야간 자율학습시간은 간간히 종교토론장으로 바뀌곤했다.열성 교인 친구들과 나같은 비기독교인들 사이의 말꼬리잡기 논쟁같은거다. 그때 많이 나왔던 말들이 대략 이런거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 있느냐? "천국이란거 가본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있다고 믿느냐?" "하느님을 믿는 거냐 교회를 믿는거냐?"  어차피 짧은 지식에 서로 사이비 논거를 들이대며 티격태격했다.하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아직도 유효한 듯하다.

주제 사라마구의 "예수의 제2복음" 은 많은 예수관련 창작물들 처럼 성서에 나온 예수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을 보여준다. 기본뼈대는 복음서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장면들이 훨씬 더 많이 자리한다. 1부의 전반부 주요인물인 요셉의 경우만 보더라도 작가의 인간적인 상상은 성서이야기를 무시한다.아이를 잉태하게 되는 장면도 그렇고 요셉이 어리버리하다 십자가에서 죽는 장면들로 그렇다.또 다른 아이들을 살릴수 있었음에도 아이 예수를 살리기 위해 허둥지둥거리다 수많은 아이들 죽음으로 몰고간 죄책감 같은 것도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작가의 상상이다. 주인공인 예수 역시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너는 나의 아들이라고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과연 그런지 의심하는 인물이다.또 하나님이 만든 역사에 대새 세속적 의문들을 줄기차게 재기한다. 결국엔 하나님은 귀찮은 듯 "거 참 질문 되게 많은 놈이네.말좀 자르지 마라" 라고 면박을 준다.두어차레 등장하는 하나님과 예수의 만남은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 가진 세속적인 질문을 예수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예수의 똑소리나는 질문에 하나님이 전전긍긍하며 빠져나가기 급급한 모습이다. 주제 사라마구가 기독교의 신 하나님을 파악하는 방식은 그리스 신화의 한 신들과 같다. 예수가 왜 하나님이 직접 하시지 않고 나를 내려보내느냐고 물었을때 하나님은 신들간의 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발언을 한다.예수를 내려보낸 다는 것은 유대지방의 신에서 전 세계의 신으로 인정받겠다는 하나님의 세계패권주의적 포석이있는 것이다. 주제 사라마구는 이미 알려진 기독교의 역사를 미래를 궁금해하는 예수에게 알려준다. 12제자는 어떻게 죽게되고 그 이후 하나님보다 더 많이 불리게 될 아들 예수의 이름으로 순교하게될 성인들의 이름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성서에서 가장 극적으로 보여지는 십자가판결과 형집행은 오히려 간단하게 처리된다. <패션오브 크라이스트>가 예수의 수난을 가학적으로 그리며 기독교인의 감정적인 단결을 불러일으켰던 것과는 정반대이다.부활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피에타>의 눈물떨어뜨리는 마리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오히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속았다.원래 이렇게 죽음으로 끝나게 운명지워진것을"  예수의 입에서 속았다라는 말이 나오다니. 단순히 하나님에서 속았다는 뜻만은 아닐 성 싶다.자신의 운명이란 것에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인간 예수의 정체성을 포고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번 크리스마스에서 교황의 메시지를 TV자막에서 봤다." 그리스도에게 고난받는 인류에게 평화를..." 사실 이건 좀 오타다.교황이 그리스도에게 고난받는 인류에게 평화를 기원했다.이런 내용인데 중간을 잘라버리니 다른 뜻 처럼 읽힌다. 근데 사실 이렇게 읽는 것도 재미있다.

개인적으로 개별 기독교인을 탓할 생각은 없다.(아니 사실 한국 기독교에 대해 할 말 많다만 여기선 아닐뿐이다.)  그리스도의 이름하에 쓰러진 영혼이 얼마나 많은가? 물론 예수는 또 뭔 잘못이 있겠는가? 자신들의 종교나 자신들의 종교해석이 유일하고 나머지는 다 이단(이것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서 지목된다) 이라는 인간들의 미력함일 뿐이지.

<사족>

교회 열심히 다니시는 분들은 읽지 마시길 바란다. 이분들은 대개 교회에서 배운것 외에 새로운 해석이나 소설적인 창작에 '신성모독'이란 단어를 내세워 거부하고 악마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으므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주제 사라마구에 대한 편견만 심어놓을 것 같다.대신 종교색이 없는 그의 <눈먼자들의 도시>를 권한다.

그나저나  동남아시아의 지진과 해일로 3만명이 죽었다. 다 기독교인들이 아니어서 그런 모진 고난을 겪게하신건가? 아니면 이유가 뭘까 ?  평소에는 성경에 따라 모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다 아는 선택받은 어린양처럼 행동하면서 막히면 "신의 뜻을 어찌 인간이 알겠냐?" 며 회피하는 그런 대답말고....다른것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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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과 황금별 - 세계문학 8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종문화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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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곡을 부친 "마왕"을 듣고 있다.



가수가 마왕,아버지,아들,그리고 해설까지 1인 4역을 맡아서 노래를 해야한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가수의 목소리 연출을 주의깊게 들어야  재미있는 곡이된다. 시의 내용과 연주는 음산하다.처음부터 시작되는 말발굽 소리.셋 잇단 음표의 연탄으로 추운겨울 벌판을 급하게 달려가는 아버지와 아이.말의 질주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마왕이 아이를 부른다. "귀여운 아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내가 너와 함께 놀아줄께. 수많은 꽃들이 가득하고 나의 어머니는 황금 가운을 많이 가지고 있단다."...    " 아버지, 아버지 마왕이 나에게 약속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



<마왕과 황금별>은 미셀 투르니에게게 1970년 공쿠르 상을 안겨준 소설이다. 투르니에의 이 소설은 문명과 원시,신성과 세속, 소유와 희생, 역사와 신화라는 대립각의 상관 관계를 2차세계 대전이라는 장을 통해 신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나간다. 주인공 아벨 티포주는 어려서부터 소위 '왕따'를 당한다.하지만 그의 내적인 침잠은 운명적 예지 능력으로 발전하게 된다.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중학교 시절 친구 네스트로이다. 이 둘의 관계와 대화는 소설 전반에 걸쳐 큰 틀로 작용한다. 네스트로는 주술적 마력을 가진 친구이다. 네스트로가 티포주에게 알려준 '성 크리스토프의 생애'는 이 소설에게 전이와 변용을 거치게 되지만 중심축으로서 기능한다. 성 크리스포트는 쉽게 말하자면 악당짓을 하다가 예수를 알게되고 자신을 희생하여 의를 이룬 사람이다.친구 네스트로는 왕따인 티포주를 무등태우며 성 크리스포트식 '짊어지기'의 의미를 인식한다.티포주는 네스트로가 학교에서 불타죽은 이후 십여년이 지나 그의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짊어진다' 의 의미를 육화한다.



"짊어진다" 는 것은 결국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 존재에 대한 무게감을 온전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투르니에는 이 "짊어진다"는 행위를 단순한 순교적 희생으로만 파악하고 있진 않은 듯 하다. "짊어진다"는 행위에 선행되는 것은 사실 육체에 대한 소유권이다. 타인의 육체에 장악력을 바탕으로 희생은 이루어진다. 티포주가 정비공장 시절 어린아이들을 응시하거나 사진을 찍는 행위 등은 관음증적인 소유욕을 의미한다. 그의 순수한 존재에 대한 과도한 애착은 후에 인간사냥꾼이란 변용된 형태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 소설 사건의 진행과 공간의 변화가 역사적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사형이 예상되는 티포주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거나  비둘기 사육병에서 포로수용소로 옮겨진다거나 포로신분에 칼테보른의 모집담당관이 된다거나 하는..... 이 일련의 사건들은 우연에 가깝다. 하지만 티포주는 이것이 전부 상징적인 작용에 의한 운명의 전이라고 생각한다. 티포주가 가진 성향중에 하나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건들이나 현상을 계시나 상징,기호로 읽는 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의 한글판 제목인 <마왕과 황금별>의 직접적인 의미는 이탄지에서 발굴된 미라이다. 티포주는 진흙속에서 수천년을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으며 시간과 함께 존재해온 미라의 존재에 존경을 품는다.이 마왕의 모습은 결국 소설 끝부문에서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상징으로 이해된다. 로민텐 숲속의 아지트 '캐나다'가 아우슈비츠의 보물창고 '캐나다'로 의미가 전복되는 것등등 이 소설에 나오는 사건들은  이중적 상징으로 볼 수 있다.하나는 그 사건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성이 신화에 영향을 받은 상징이다. 두번째는 소설 속에서 모든 사건들이 다음에 올 사건들에 대한 계시이며 또 다른 상징적 복선이 된다. 티포주의 날것에 대한 애착은 변용된 상징으로 오발사고로 죽은 어린아이의 사체에 대한 애정으로 전이된다.또 정비공장 시절 어린아이에 대한 애착은 나폴라의 집단 숙소에 널부러져 자고 있는 소년대원들에 대한 응시나 아이들과의 목욕을 통한 정화과정으로 바뀐다.



티포주가 식인귀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은  독일 사령관 괴링과의 사냥에서 이다. 이 소설 속에서 사슴은 존엄성을 가진 인간일 수 도 있고 또 문명일 수도 있다. 나치스의 마왕은 집단 학살과 도륙을 통해 이 문명파괴에 쾌락을 느낀다.티포주는 자신보다 더한 식인귀가 있음을 알고 놀란다. 티포주가 뒤에 본인도 모르는 사이 조력하게 되는 나치즘의 폭력성은 티포주를 정화시키기 위한 시련의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수의 순교에 있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고통이 그런 역할을 하듯이 말이다. 티포주의 경우는 그 결과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운명의 힘이란 불가역성에 의존한다.그는 자신이 칼테보른의 식인귀로 불리운다는 것을 소문을 통해 듣는다.괴테의 시에 나오는 영상이 그대로 인용된다.티포주는 아이들을 사냥하여 나치의 국가주의에 희생양을 만드는 제사장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이 단지 신화의 재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쟁소설의 양상을 띠는 것은 신화와 상징을 통한 파시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로민테른의 숲속에서 칼테보른 나폴라의 소년교육대까지 나치즘이 사회에 갖는 식인귀적인 속성이 상징적인 은유를 통해 드러난다.



나치즘에 간접적인 조응자로써 티포주의 정화과정은 에프라임이라는 한 소년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소년은  유대인으로  성경에 의한 예언적 힘을 믿는다.티포주는 이탄지의 마왕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자신의 '짊어지는'행위의 종착역이 거의 다 이르렀음을 안다. 소련군의 공격이 이어지고 티포주는 소년의 순진함이 피로 얼룩진 세상에 대한 유일한 희망이라 믿으며 갈대숲의 마왕처럼 아이를 짊어진다.소설 속 티포주의 삶은 이 정화과정을 통해  예언이 현실화되는 자기충족성을 얻게된다. 



<마왕과 황금별> 책 뒷표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20세기 전쟁문학 가운데 부동의 위치에 선 최고 걸작. 보통 우리나라에서 '전쟁문학' 하면 리얼리즘 작품을 떠올린다.하지만 신화와 종교,현실과 환상이 이렇게 잘 직조된 작품을 만나고 보면 생각이 바뀐다. 이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아벨 티포주를 생각하면 이미 고인이 된 안소니 퀸이 그 역에 어울렷을 것 같다. 안소니 퀸이 또 다른 전쟁문학의 대표작 게오르규의 <25시>에서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일까?  안소니 퀸을 스크린에 불러올 방법은 이젠 없겠지만 머릿속에서 <마왕과 황금별>의 아벨 티포주와 <25시>의 주인공 모리츠의 마지막 웃음 장면이 오버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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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1-28 19:22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뮐러의 겨울나그네를 보며 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으며 혼자 감동했었는데, '마왕'은 고등학교때 음악시간에 테이프 틀어주던 기억과 몇년전인지, 그 커다란 흑인 소프라노 이름이;;; 제시 노먼이던가. 왔을때 들었던 것이 굉장히 인상깊게 남아 있네요.

분홍달 2004-11-30 15:35   좋아요 0 | URL
'짊어지다' 후우~~ 보따리를 짊어지는 건 순간을 견디는 것이지만 생명있는 존재에 대한, 역사에 대한 짊어짐은..... 신화와 종교, 현실과 환상의 직조! 저도 한번 만나봐야 겠네요

비로그인 2005-02-26 03:19   좋아요 0 | URL
마왕과 황금별.. 두번 읽게 만드는 책입니다. 식인귀가 성스러움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짊어지다'의 행위는 끊임없이 언근되고 변화하고 대두되죠. 이 책은 비단 문학이자 역사서일 뿐만 아니라, 저로 하여금 이면성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서이기도 합니다.. 전 지금 다시 한번 책의 첫장을 넘기렵니다.

ckshgnl 2008-03-15 09:28   좋아요 0 | URL
투르니에의'마왕과 황금별'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몇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책을 읽은 뒤 소장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작가의 독특하고 넓은 세계와 2차대전과 그리고 인간심리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박상륭의'죽음의 한연구'다음으로 인상적인 책이었다. 투르니에의'마왕과 황금별'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몇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 책을 읽은 뒤 소장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작가의 독특하고 넓은 세계와 2차대전과 그리고 인간심리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박상륭의'죽음의 한연구'다음으로 인상적인 책이었다.
 
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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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 겨울이었다.함께 일하던 젊은 친구가 그만 둔다고 술 한 잔 사달라고 했다.독립영화 공부하는 친구였다. 나름대로 생각도 깊고 성실함도 좋아보였다.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결국 12시가 넘어서 회사 앞 포장마차로 차가운 손을 부비며 들어갔다.둘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들어가자 마자 안개천국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홍합탕을 하나 시켜 놓고 그 친구 이야길 들었다. 결론은 이제는 영화일을 하러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겠다는 것이다. 난 술 잔을 권하며 '좋은 영화 만들어서 나중에 영화관 스크롤에 네 이름 보자...' 뭐 이랬던 것 같다. 한 참 주거나 받거니 하던 중 그 친구가 코트 주머니에서 얇은 책 한권을 꺼냈다. 오징어만한 크기에 오징어 보다 조금 더 두꺼운 책이었다. 책 표지에도 요란한 수식어 하나 없이 그냥 <선방일기>였다. 

 우연히 책장을 돌아보다 이 작은 책을 발견하고 다시금 뒤적였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저자인 지허스님이 몸을 맡기신 곳이 상원사 선방이었다. 올 여름 휴가를 다녀오면서 "추운 겨울의 이곳은 또 얼마나 고적하고 아름다울까?" 혼자 떠올렸던 말이 생각났다. 이 책과의 인연이 그렇고 상원사와의 인연이 그렇고 세상사의 많은 일들이 결국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느낀다.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그 젊은 친구의 이름도 책 앞에 써있다. 여자이름 처럼 보이지만 "해원"이었다. 별로 의심없이 썼었는데 이렇게 바라보니 불교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이름이다. 그 친구는 좋은 인연을 많나서 또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그렇게 되길 바란다.

이 책은 이미 30여년전에 쓰여진 책이다.73년 신동아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라고 한다.지허스님은 서울대를 다니다 출가한 분이라고 하는데 그 외 기록은 없다. 책은 스님이 상원사 선방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상원사 선방에서 신출나기로써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이야기들과 동안거 동안의 이야기,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맹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그리고 해제날 모였던 스님들이 자신의 길을 따라 떠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요즘은 <인간극장>이라든가 <vj특공대> 하는 식으로 휴먼 다큐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스님들의 동안거도 많이 소개되었다.수행하는 장면 뿐만아니라 동안거동안의 일상적인 모습도 화면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하지만 화면으로 느낄 수 없는 삶의 속닥함들이 있지 않은가. 지허스님의 일기 형식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결제일에 들어가며 스님은 선방생활과 병영생활을 비교한다.그만큼 규율이 엄격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선방의 규율에 따라 스님들은 자신의 업무를 담당한다. <선방일기>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큰 두 축은 바로 수도승으로써 진리를 따라가는 일과 또 인간으로써 깊은 산속에서의 생활이다.지허스님은 땔감준비하는 부목이었단다. 이 책에 보면 스님들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많이 나온다.선승이 일년에 사용하는 생활비라든지 선방에서의 자리를 둔 위계, 다양한 군상의 스님들의 모습. 예를 들자면 늦게 출가한 스님 '늦깨기'와 어린 나이에 출가한 '올깨기'스님의 작은 갈등같은 것들이다. 세상사의 고통을 겪을 만큼 겪은 '늦깨기'스님과 어려서부터 절밥을 먹은 '올깨기'스님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다를 것이다.처음에는 출가후배인 스님들이 어려워하다가 좀 지나면 '올깨기'들에게 대든다. '절밥만 축낸 올깨기'라고 놀리는 것이다.스님들의 세계에서뿐 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지허스님은 서로 견성하자고 독려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냐며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외에도 스님들의 일상은 아주 재미있다. 원주스님 몰래 뒷방에서 감자구이 동호회를 연다거나 좌선으로 인해 신경통을 앓는 스님이 많다거나 하는 것이다.또 연륜이 있는 상방쪽 스님들의 좌선과 하방쪽 스님들의 좌선 풍경도 재미있다.당연히 후자들은 비비꼬고 졸고 하다가 죽비세례를 받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또 재미있는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승의 수행에서 오는 자기와의 싸움의 치열함,그리고 고독감같은 것들도 담담하게 쓰여있다. 단식스님의 위선을 통해 머리만 커버린 스님들이 가져오는 한계도 보여준다. 지허스님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듯 균형감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자신과 스님들의 생활과 고민을 하나씩 적어나갔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눈 앞에 강원도 깊은 산속의 설경이 그득해진다. 스님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가 우리 일상에서도 그대로 현현되길 바란다. 부처가 예수가 마호메트가 ...또 기타 선지자들이 그렇게 외쳤건만 강원도 산속의 평화가 세상에는 없다. 언제나 깊은 평화를 인류가 맛볼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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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07 09:36   좋아요 0 | URL
처음 보는 책인데 읽어볼랍니다.

옛 한지책을 제본한 것 같은 장정도 마음에 듭니다.

물론 무늬만 그렇겠죠?

마녀물고기 2004-11-07 15:58   좋아요 0 | URL
꼭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떠오르는 말들, 생각들은 그저 가슴에나 묻고 갈게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

내가없는 이 안 2004-11-08 03:06   좋아요 0 | URL
전 지허스님의 이 글을 책으로 만들어지기 전에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책도 너무 아담하고 고풍스러우니 소유하고 싶게 만든 듯 보이네요. 세상에 없다는 강원도 산골의 평화... 여운 있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파란여우 2004-11-08 16:02   좋아요 0 | URL
책의 심플함이 좋습니다. 나이들면서 단순함이 제일 아름답게 보여 집니다. 이 책 님 덕분에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리뷰는 언제봐도 멋지십니다.^^

드팀전 2004-11-08 16:47   좋아요 0 | URL
로드무비님>한지책 제본한것 같은 표지.아...그 단어를 쓰고 싶었는데..그렇게 짧은 단어가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저의 무심함에도 매번 댓글을 달아주시는 마음에 세번 꾸벅 ..꾸벅...꾸벅...인사드립니다.

마녀물고기님> 요즘 ...안보이시더니...전화기 그림으로 돌아오셨군요.그림 좋아요.

이안님>처음 인사드립니다.님 서재를 둘러 봤는데...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열하일기><검은꽃>은 저도 리뷰를 써서 그랬는지 더 눈에 들어오더군요.자주 뵈요.

파란여우님>책들이 돌고 돌아 누군가에게 가는 것도 또 좋은 연이 닿아그런거겠지요.전공노 때문에 시끄러운데 ...(님의 생각은 모르겠으나) ....역사가 발전하는 방향으로 유연히 결론지어졌으면 합니다.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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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올라가 본 것이 언제인가? 가장 가까운 기억은 군대시절이다. 사단장 공관 뒤편 아카시아 나무에 전선 걸치러 올라갔다. 다리가 후들 후들 거렸다.혹시 내 발이 제대로 된 곳에 놓여있는지 계속 발위치를 확인 했던 기억이 난다. 밑에서 고참은 빨리 하라고 재촉하고 인사계는 "거기 말고 그 위에 가지 쪽으로.." 뭐 이러면서 염장을 질렀다. 조금 더 낭만적인 나무 탄 기억은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초등학교 시절 우리반이 담당했던 청소구역이 교문 옆 수목원이었다.10미터는 족히 넘어보이는 호도나무에 친구들과 함께 올라 갔다. 이유는 지금은 마트에서도 판다는 집게 벌레나 뭐 그런....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뿔달린 벌레를 잡으로 올라갔었다.나는 앞서 올라가는 아이의 호기어림도 나몰라 하고 무서워했었던 기억이 난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 코지모는 나무 위에서 산다. 그가 나무 위로 주소지를 이동한 것은 귀족적인 구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귀족적 세계관의 관습과 허식에 대한 불만은 '거리두기'라는 반항의 양식을 만들어낸다. 그가 몸을 의탁한 곳은 '나무 위의 세상'이다. 나무라는 공간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 나무의 존재양식에 기인하는 이중성이다. 나무는 땅이라는 곳에 존재의 근원을 두고 있다.반면 나무가 아름드리 성장을 하게 되면 나무는 땅에 있으면서도 땅을 떠난 공간을 만들어낸다.대기와 땅의 점이지대가 나무와 숲이 할당받고 있는 공간이다. 땅에 바탕을 두면서도 객관적인 여유로 세상을 바라보는 공간으로 나무 위만큼 근사한 곳은 없을 성싶다.칼비노가 주인공 코지모를 옴브로사 숲속의 나무위로 올려보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둔다" 는 코지모의 철학이 탄생하는 곳이다.주인공 코지모는 나무위에서도 땅의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여한다.귀족임에도 그 특권을 주저없이 버린 관계로 농민들이나 숯장이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희대의 도둑과도 스스럼 없이 독서교류회를 만든다. 태어난 근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무처럼 코지모 역시 가상의 공간인 옴브로사에 붙막이 하며 땅의 사람들과 함께 시대적 흐름을 함께  한다. 

칼비노가 환상동화 <나무위의 남작>에서 주인공 코지모에게 부여하는 캐릭터는 독특하다.우선 체제 반항적인 지사의 모습이 있다.평생을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한 강인한 모습도 존재한다.또 좀 무모한 신념에 대해 신봉하는 사람들이 갖는 희극적인 자기강박의 모습도 코지모는 가지고 있다.코지모의 캐릭터는 자유로우면서도 민중지향적이다. 또 한편으로 계몽주의의 지식인의 모습을 지향한다. 끊이없는 독서와 편지를 통한 교류를 통해 그의 지적능력과 활동이 유럽인들 사이에 각인된다. 지성적이고 유머러스한 반면 연애문제에 있어서는 나이브한 모습을 보인다. 구세대 유럽의 퇴폐적 낭만주의에 대한 동경이 남아있다. 어린시절 헤어진 비올라에 대한 그의 맹목적인 애정은 촌스러울 정도이다. 시간이 흐른 후 여후작으로 돌아온 비올라의 독선적 사랑에 대한 코지모의 대응 역시 그 선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인류의 지성이 발전해도 사랑문제만큼은 그 궤를 같이 하지 못하나 보다. 오히려 약간은 어설프고 맹목적인 사랑의 양식을 더 순수한 무엇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코지모의 시대에도 칼비노의 시대에도 유효했나보다.  

코지모가 살던 시기는 유럽 역사의 대변혁기였다. 코지모는 그 시간들을 '거리두기'방식으로 이해하고 그가 속한 공간에서 그 땅의 사람들과 대응해간다.코지모처럼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세상은 달리보인다.조금 떨어지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권력이나 돈을 통해 더 높이 올라가서 그 목적을 이루려고 한다.그들이 올라간 곳에서 아래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전부 딛고 올라온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무언가 한다는 것은 악어의 눈물일 뿐이다. 그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기에 눈물 흘리지 않는 악어로 남고자 한다.일관성이란 측면에서는 정합적이다. 조금 떨어져서 본다는 것은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방하착' -아래로 내려놓는 것이다.코지모가 그의 귀족적 특권이나 엘리트의식을 내려놓고 세상과 존재를 대면하기 위해 나무위로 올라간 것 처럼. 분명 '내려놓기' 또는 '거리두기' 가 결코 쉬운일은 아니다. 조금만 더 위에서 보면 세상사의 많은 일들이 좀더 대범해 질 것임에도.....  

날씨가 차다. 나보다 서너배는 오래도록 세상을 지켜봐 온 감나무 위 올라가보고 싶다. 감이 주렁 주렁 달려있어도 좋을 것이다. 아래 세상에 대한 두려움없이 그 위에서 '오래도록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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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원년의 풋볼 - 오에 겐자부로 소설문학전집 7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름대로 책이나 CD를 사며 얻은 경험이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있을 때 구하자!" 이다. 음반매장에 가면 손에 몇장을 고른 후 하나씩 뺀다.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한다. '다음에 1순위로 사야지' .그러나 그 다음이 되면  소량 수입된 수입CD들은 매장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 아믈랭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협주곡 1,2번이 그런 예이다. 음반매장에 전화해보면 다음번 주문에 올릴게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 런지 알 수 없다.

오에겐자부로의 <만년원년의 풋볼>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몇 년 전 서점 일본 문학 코너에서 겐자부로의 전집을 보았다.서점 진열대 밑에 쪼로록 숨어있었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과 이 책을 동시에 들고 고민하다가 한 작가의 책을  한번에 두 권사진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 도로 진열대에 꽂아 놓았다.몇 주 후 다시 가본 서점, 겐자부로의 전집은 종적을 감추었다.소문없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이 책은 알라딘에서도 오래도록 품절이었다.그러다 몇달 전, 알라딘에서 이 책을  얻었다.(지금 보니 다시 또 품절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쌍생아>의 그로테스크함을 계속 떠올렸다.마치 일본 귀신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강한 색채를 담고 있는 글이었다.한문장 건너 계속 이어지는 겐자부로의 메타포는 소설 배경의 선명성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다.또 그러한 강렬한 묘사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의식을 팔레트에 섞어 놓은 기괴한 물감처럼 펼쳐보여준다. 하지만 개별 장면의 묘사와 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그로테스크함에 비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낮게 깔린 어두운 먹구름을 연상시킨다.금새라도 천둥번개가 치고 광풍이 휘몰아쳐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위기감과 긴장감이 페이지 사이를 휘감아 돈다.첫장면 부터 시작되는 폐쇄적 느낌,그리고 이구아나의 껍질을 만지는 듯한 불쾌감에 대한 묘한 호기심, 이 두가지 요소는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이다.

소설에는 세가지 시대가 등장한다.민중봉기가 일어났던 1860년대,그리고 대동아전쟁 당시, 마지막으로 일본내 좌우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이다.주인공과 그의 아내,그리고 동생 다카시는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며 현재 삶속에서 살아 있는 지난 과거의 암울함을 찾아간다.마치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1860년대 봉기의 우두머리였던 증조부 동생의 삶과 조선인에게 맞아 죽은 S형의 행적이 현재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그리고 이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유전되어 온  것을 찾아낸다.그것은 바로  '폭력'과 '공포' 이다. 전후 일본을 휘감고 있던 폐전국으로서의 우울함,단 한방으로 모든걸 끝장내는 핵 피폭의 공포,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일본 사회에 대한 두려움. 전후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잔재해 있는 무의식적인 공포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을 따라 명치시대부터 다시 재구성된다. 물론 겐자부로도 결국에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한다.하지만 그 희망에 큰 기대는 없다.주인공 일행이 고향 마을로 향하게 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때문이다.알코올 중독인 아내와 아이를 버린 죄책감과 친구의 엽기적인 죽음(머리에 붉은칠을 하고...겐자부로는 단 한번도 친구의 자살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죽음의 묘사로 친구의 죽음을 말한다.)으로 무기력증에 걸린린 주인공에게 동생이 건넨 유혹의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그리고 소설 말미 모든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다시금 아내가 남편에게 건내는 말 역시 그 <기대>이다.물론 주인공은 그것이 녹녹하지 않음을 알지만 수동적 순응을 한다.오에 겐자부로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은 그러한 순응을 통해 불안감이 가득한 미래로 나아간다.

소설 속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동생 다카시이다.그의 삶의 편린 자체가 죄의식과 폭력,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가득차 있다.어떻게 보면 일탈적이고 매저키스트적 인간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러한 위악적 자기학대를 통해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자기 통일성이었다.타카시는 자기정체성을 얻기 위해 과거 민중봉기의 지도자 였던 증조부의 동생과 동일시 작업을 펼쳐나간다.마을의 청년단을 만들고 카리스마적인 행동으로 슈퍼마켓 천황의 권력에 도전한다.그러나 그의 작업은 퇴폐적인 낭만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 파괴적이다.그는 천황에게의 도전을 통해 마을에 만연한 패배주의의 그늘을 걷어내는데 일시적 성공을 거둔다.하지만 그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죽음을 통한 자기 통일성의 확립이었을 뿐이다.그의 죽음또한 책 서두에 나온 친구의 죽음처럼 그로테스크하다.그 둘은 죽음을 통해 <진실>을 완성한다.미성숙한 영웅의 비극적 죽음처럼 그들은  자기 희생이란 제의를 통해 자기완성을 이룬다.

그의 죽음에는 어떠한 면에서 순수한 영웅의 모습이 있다. 탈출구가 없는 암울한 세계 하에서 한 개인에게 더 가까운 것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통한 구출'이다. 애써 이것을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다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인생은 어차피 도덕 교과서가 아니고 '좋은 생각'류의 잡지가 아니기때문이다.평범한 일상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억의 조작과 편의주의적 망각, 폭력에 대한 굴복과 음험한 상상을 하는가?  정체성 같은 것은 이미 난지도 쓰레기 위를 뒹근지 오래되었다. 자신의 순결한 내적 통일성을 위해 날카로운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추락의 끝자락까지 내려가 보길 두려워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낯설고 기괴할 수 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근친상간,일탈,군중의 폭력성...이러한 요소들이 소설 전편에서  숨을 쉬겠다고 헐떡거린다.불편한 소설이다.하지만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이런 말을 해야할 때가 올것이다.

         ...."진실을 알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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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dcat 2004-09-14 16:07   좋아요 0 | URL
쌍생아를 뜻하지 않게 두 번 봤는데, 그때마다 드는 느낌이란 게 어릴 적 <전설의 고향> 볼 때의 똑 그것이더군요. 비록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손가락 사이로 다음 장면을 기다리고 있는 온 몸이 곤두선 느낌...추천하고 갑니다.

마녀물고기 2004-09-14 16:21   좋아요 0 | URL
세 번째 단락, 소설 전반에 대한 사유님의 느낌 묘사가 꽤나 매력적인 리뷰네요. 그런데 오후, 품절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