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1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조민현 옮김 / 민음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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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낀 도시는 새로운 세상이다..안개는 사물들의 공간배치를 낯설게 한다.바로 앞에 있는 사람만 겨우 식별할 수 있다.저 멀리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린다.하지만 그의 모습은  한번에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처음엔 검은 그림자일뿐이다.점점 윤곽이 짙어진다.수채화를 그리는 붓터치처럼 시간과 공간이 중첩시켜놓은 막을 뚫고 대상은 선명해진다.얼굴,눈,코,입....안개가 만든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은 과거에 알던 사람이 아니다.주변을 지워버린 공간이 대상의 느낌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마치 흰색 도화지 속에 그와 내가 갇혀 있는 듯 하다.

아우구스토 페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심한 고통이나 큰 기쁨에는 굴하지 않습니다.그러한 고통과 기쁨은 사소한 사건들로 구성된 거대한 안개 속에 감추어진 채 닥치기 때문입니다.인생이란 이런 것이다.안개같은 것.인생은 구름같이 모호한 것이다."

.<안개>의 스토리는 가랑비가 오는 어느날,아우구스토가 거리에서 에우헤니아를 발견하고 쫓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그녀는 독립적이며 현실적인 피아노강사이다.한눈에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그녀의 고모를 통해 그녀를 쟁취하려한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마우리시오라는 게으른 애인이 있다.관념적인 사랑을 하고 있던 아우구스토는 세탁소 직원인 로사리오에게 자신의 좌절된 욕망을 해소한다.주인공은 관념속에서 에우헤니아에 대한 사랑의 불을 키운다.자신이 가지지 못한 열정과 선명함을 보상심리와도 같다.그의 관념속에서 커가는 에우헤니아에 대한 사랑은 모든 여성적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승화한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TV단막극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유치하다.물론 그 사이사이 아우구스토의 독백이라든가 친구 빅토르와의 대화등은 의미심장하다.책의 3분의 2가 넘을때까지 신파같은 스토리는 존재론적 질문과 어우러져 이어진다.그리고 25장 말미.갑자기 우나무노가 등장하여 이렇게 선언한다.

"아우구스토와 빅토르가 이러한 소셜적인 대화를 나누는 동안 독자 여러분이 손에 들고 읽고 있는 이 소셜의 작가인 나는, 나의 소셜적인 인물들이 나를 변호하고 나의 방법론을 정당화하는 것을 보면서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는 이 가련한 두 소셜적 존재에게는 악마의 신이다."

소설의 내러티브는 후반부에서 말러 음악의 '개파'(전복적 파괴)'처럼 흥미진지함의 가속페달을 밟는다.배신과 질투,존재에 대한 의미부여 실패로 아우구스토는 자살을 염두에 둔다.그는 저자 우나무노를 만나러 간다.피조물과 창조주의 대화,인간과 클론의 대화,원본과 이미지의 대화이다.이 직접적 만남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마치 어린 시절 보았던 디즈니 만화의 도널드 덕이 월트 디즈니를 찾아간 것같다.실사와 합성한 그 만화에서 도널드 덕은 디즈니에게 '자신이 왜 미키마우스에게 에이스자리를 뺏겨야 하는지..왜 미키는 선하고 자기는 주인공임에도 괴팍한지...' 등을 목소리 높이며 따진다. 주인공 아우구스토와 저자 우나무노의 토론은 아우구스토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다.그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자신은 시뮬라르크요 환영일 뿐임이 확인되었다. 우나무노는 친구 빅토르의 입을 통해,또 아우구스토의 독백을 통해 이미 그에게 그가 환영임을 알렸다.빅토르와의 대화에서 아우구스토는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 했었다.

"나를 삼킨다.나를 삼킨다.빅토르,나는 그림자로써 허구로써 시작했어......안개 속의 인형처럼 유령처럼 방황했어."

이런 과정을 거쳐 아우구스토는 자신을 삼키는 방법으로 자살을 주도적으로 선택한 것이다.하지만 우나무노는 주인공의 자살이 불가하다고 말한다.그의 언명은 아우구스토에게 마지막 남은 주체적 선택마저 앗아가고 스스로 피조물이자 이미지일 뿐임을 각인시킨다.우나무노는 아우구스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자살할 수가 없어.왜나하면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야.너는 살아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야.왜나하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아우구스토는 장자의 호접몽을 이야기하며 패러다임 바깥에서 공격을 시작한다.

"침대에 꼼짝 않고 잠들어 있는 사람이 꿈을 꿀때 무엇이 더 존재하는 겁니까?꿈을 꾸는 사람으로서의 그입니까?아니면 그의 꿈입니까?

보드리야르가 이야기한 이미지의 전복.시뮬라시옹의 시대를 아우구스토가  질문한다.결국 저자 우나무노는 흥분하고 아우구스토의 사망선고를 하고 만다.피조물과 이야기하다 화가난 창조주.이미지와 이야기하다 이성을 잃은 본체,또 다른 말로 하면 자기안의 또다른 자아와 이야기하다 벽에 부딪힌 우나무노.

아우구스토는 죽는다.자살인가 타살인가? 알 수 없다.하지만 아우구스토는 저자 우나무노에게 당신 역시 피조물이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저주를 남기고 죽는다.모든 인간과 이미지의 한계상황,절대상황.

이 책에는 '안개'로 대표되는 모호함,부정확성,혼동에 대한 고무적 서술이 여러차레 등장한다.데카르트적 존재론은 중언부언인 언표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근대적 자아론을 해체하고 나의 자아조차 타인의 자아와 혼동시키는 전략.이러한 안개같은 혼동을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질문하고 싶은 것은 무었이었을까? 결국 아무것도 선명하지 않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인가? 아니면 존재 이전의 본질인가? 신파극같은 내러티브와 중층적 구조,소설이란 장르에서 일탈하여 만든 소셜.언어의 파편성에 대한 비난...우나무노는 근대적 인간과 자아론의 틈새를 가로지르고 있다.인생은 안개고 안개 속에선 무엇도 선명해지지 않는다.전략은 혼동이다.꿈과 현실이 혼동되고 허구와 환영이 혼동된다.안개 속에서 모든 것이 혼동된다.그리고 나를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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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털 같은 나날
류진운 지음, 김영철 옮김 / 소나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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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한 친구가 있다.대학교때 고구마 팔아서 유럽여행 다녀올 정도로 생활력이 강한 친구다.몇달 전에 그 친구를 만났다.오랜만에 맥주 한잔 하며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대해 들었다.그 친구는 중국인들의 게으름과 비합리적 사고에 대해 맥주 거품보다 더 큰 거품을 뿜어댔다.워낙 말을 재미있게 하는 친구라 우리들은 깔깔 거리며 또 공감하며 들었다.그 친구가 작은 공장을 지을 때 일이다.

지난 해 초의 일이다.우선 공장을 수주하고 건설업체와 하청업체를 선정했다.최초에 공장은 5월까지 완성이 된다고 했다.그러나 4월이 다 가는 시점에서 공장의 완성도가 60%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그는 여러번 감독관을 채근하고 나무랐지만 중국인 공사담당자는 느긋했다고 한다.가끔은 그의 지나친 채근에 "이거 우리가 가난하다고 무시하는거냐?" 는 식으로 나왔단다.결국 목마른 놈이 우물판다고 친구는 담당자를 살살달래기로 했다.술도 먹이고 밥도 먹이고 하면서 분위기가 누그러들자.' 딱 까놓고 이야기하자'고 했단다.

친구:'진짜...늦어도 괜찮으니까...진짜로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언제까지 다 마칠 수 있나?"

중국공사담당관 :"글쎄...뭐 7월이나 8월쯤"

친구: "아니..그렇게 이야기 하지말고...니네들이 자신있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넉넉한 시간을 대라."

중국공사담당관: "음....8월 중순"

친구: '좋다.그럼.내가 8월 15일까지 기다린다.대신 계약서 하나쓰자.니네들이 여유있다고 정한 시점인 8월15일까지 다 못끝내면 그날 부터 나도 손해가 있으니까..하루 연기될때 마다 위약금은 00달러 씩 내라"

중국공사담당관: "..... ... . 좋아,그렇게 하지요.8월 15일,그런데 궁금한게 하나 있소이다.우리가 만약 8월 15일 보다 먼저끝내면 빨리 끝낸 날 마다 계산해서 00달러씩 주는거죠?"

친구: "(허걱)..야 그게 말이되냐.니네들 원래 5월까지 하기로 한건데.거기다가.....야 통역. 말도 안된다고 전해"

조선족 통역: "이사님....근데 저 사람 말이 맞는데요.늦으면 벌금내고 빨리하면 보너스주는게 당연한거아니에요. 난 이해가 안되네요 이사님이...."

우리의 기준으로는 답답하고 말이 안통하는 이야기다.하지만 중국에선 당연스러운 일인가보다.류진운의 <닭털같은 나날>에는 중국의 현재와 과거를 읽을 수 있는 세편의 이야기가 있다. 동명소설인 <닭털같은 나날>,그리고 <관리들 만세>는 자본주의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특히 급격한 자본주의화에 따른 소시민들의 의식과 일상의 변화에 작가의 시선은 고정된다.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이 단지 중국의 특수한 상황만이 아님에 공감한다.전통의 가치가 무너지고 '황금만능주의'라는 새로운 가치관이 자리잡는 사회가 가진 보편성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중국보다 자본주의 이행이 앞선던 우리의 옛 모습도 이 보편성의 틀 안에 있다.'압축 근대'라는 이름으로 설명되는 한국의 단기간 자본축적 과정은 우리들 일상의 모습도 소설의 그것처럼 바꾸어 놓았던게 사실이다;이 소설이 한국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소설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고민과 행동들이 우리 과거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한 현재의 모습이기도 하기때문이다.즉 독자와의 공감에 일단 성공하기 좋은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소설<닭털같은 나날들> 장점이다.또한 가지 큰 매력은 소설이 가진 유머이다.소설의 소재들은 충분히 어둡게 그릴 수 도 있고 신세한탄이 사회구조의 모순때문이라고 강력하게 외칠 수 도 있다.하지만 작가는 그 둘을 벗어나서 밝고 경쾌하게 이 문제의 여러가지 단면을 보여준다.문득 학교 다닐때 학과에서 기획하고 공연했던 몇몇 사실주의 연극이 떠오른다.나도 물론 관여했었다.이 소설과 비교해 보게 된다.학생들이 만든 극의 한계도 있었겟지만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만들었던 사실주의에 바탕을 둔 극들은 직선적이었다. 가난한 신문배달 청년이 힘겹게 울고 불고.... 어떤 계기로 불끈 일어나...각성하고.... 노동자로서 부활하고..... 이 소설의 유머스러운 접근과 비교하니 왜 그렇게 촌스러웠느지 알 수가 없다.

<닭털같은 나날들>들은 일상의 욕망과 치졸함이 빠른속도로 연쇄충돌한다.주인공은 아내의 직장문제로 촌지도 주고 또 공무원이란 이유로 촌지도 받는다.촌지가 거절 당했을 때의 황망함.또한 촌지란걸 처음 받고 처음엔 어색해하다.하지만 이네 그 달콤함에 즐거워하는 모습들.물고 물리는 얄팍한 일상의 고단함이 그 안에 있다.그 고단함이 삶의 치열함이라고 애써 위로해본다.소설의 끝장면 선생님의 죽음에 대해 주인공의 미안함을 느낀다.그렇게 잘해주신 선생님이었는데......하지만 여기서 또 일상....... 주인공은 잠시 미안함을 느끼다가 다시 즐겁고 지겹기도한 일상으로 금방 복귀한다.나는 이 대목이 가장 마음에들고 또 안쓰럽고 썸뜩하다. 마음의 가책도 서글픔도 오래 간직 하게 하지 못하는 일상의 무거움이 나를 짓누르는 대목이다.너무나도 거대한 힘이지만  무섭고 위험한 모습은 아니다.일상은 평화롭고 또 달콤한 형상을 하고 있다.규칙적인 항상상이 존재하며 나락으로는 떨어지지 않을 안전핀이다.이 보이지 않고 모순적인 존재,일상이란 녀석은 주인공의 삶에 지속적으로 관여하며 '주체'를 잠식해 간다.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주체를 상실해야하는 주객전도.이러한 모순이 무서운 것은 이것이 소설 속에서만 살아있는 모순이 아니라는 것이다.옆집 똘이 엄마네가 판교옆에 땅사서 부자가 되고 있다는데 .... 앞집 순이가 외가쪽 친척덕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강남 00유치원에 들어갔다는데..... 뒷집 철이네는 최근에 큰 차로 업그레이드 해서 뻐기고 다니는데.......너는 뭐냐? 그게 다 좋은거 아니냐? 세상 사는게 뭐 별일 있냐? 적당히 비비고 적당히 뻐기면서 사는게 인생인거 아니냐? 아닌척 해봐라...너만 손해지.약게 살아라 그게 성공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이 수많은 언어들이 담고 있는 담론이 원하는 것은 무었일까?  행복한 일상이라는 환영이 무섭기까지하다.니체식으로 말하자면 '중력의 영'이다.잡아 끌고 평준화시키고....작은 것에만 분노케하는 힘이다.하지만 누가 일상이라는 거대한 자석이 내뿜는 자기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까.지금도 자기장이 우리의 발을 당긴다.

<관리들 만세>는 복지부동 소심증 공무원들의 권력투쟁을 보여준다.회사 생활하면 가끔씩 만나게 되는 인사철의 복잡한 관계와 이야기들이 이 소설 속에서 쟁쟁거린다.평소 대범함을 자랑하던 사람들도 어디 어디서 들은 소식에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해진다.여기저기 몇몇씩 모여서 자신들이 마치 무슨 정치평론가나 제갈공명이 된 듯 판세를 펼쳤다 접었다 한다.그래봐야 공고붙고 며칠지나면 공고에 붙은 대로 줄을 쫙서서 적응하게 될꺼면서 말이다.이 소설에서는 보여지는 관리들의 모습은 자신의 이익에만 머리를 굴리는 소시민들의 얄팍함을 묘사한다.또한 권력의 행배에 따라 정상적 업무까지 영향을 받는 중국시스템의 부재까지 작가는 비웃고 있다.그러한 면에서 우리 사회는 어떨지 모르겠다.소설로 극화된 중국 공직사회처럼 시스템부재상황은 아닐것이다.하지만 작은 부분 부분에서 끝없 권력투쟁이 있고 이의 행배에 좌지우지 되는 불합리한 체계가 상상외로 많을 것이다.마지막 소설<1942년을 돌아보다>는 42년 대기근에 대한 르포타주형식의 소설이다.앞으 두소설과는 형식과 내용면에서 좀 차이가 난다. 300만의 아사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정치에 얽매여 이를 구제하지 못한 위정자의 모습을 비판한다. 이번에는 작가가 조금더 직접적이고 계몽적인 방법을 사용한다.장개석과 국민당이 정당성을 가질 수 없음에 대한 다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촌로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형태로 쓰여져서 영화화한다면 오히려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앞의 두 소설이 보여준 블랙유머가 훨씬 매력적이다.

이 소설에서 특별한 상상력이나 구조의 뒤틀림을 기대해서는 안된다.전통적 소설 구조에 혁식을 가하는 소설에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다지 큰 만족을 주긴 어렵다.구조는 단순하며 서술도 평이하다.신사실주의가 가진 현실의 과육과 블랙 유머의 향신료가 편안하고 즐거운 소설읽기를 도와준다.만만하지만 일상의 무게를 돌아보게 하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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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향기
송기원 지음 / 창비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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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동네에 바보 한명씩은 꼭 있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한다.푸코의 예리한 지적처럼 '비정상'이 관리되었기 때문이다.이제 그들은 무슨 무슨 재활원,말썽많은 기도원 등등에서 산다. 정부에서는 '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회'라는 프로파간다로 질러대지만 실제 상황은 유리벽을 만들고 그들이 그 안에서만 있기를 바란다.'아무 죄도 없다'는 대명사로 불리워지는 '평범한 보통사람'들 역시 공범자이다.행여 장애인을 위한 건물이 자신의 주거공간 인근으로 온다고 하면 데모에 데짜도 싫어하던 이들도 빨간 두건둘러 맨다. "사람사는 동네에 혐오시설 왠말이냐" "혐오시설 결사반대 생존권을 보장하라"  ...결국 집값떨어진다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사람은 이런 말로 TV인터뷰도 하더라. " 아이들이 오고가면서 그런걸 보면 교육적으로 좋겠어요.당신 자식이라면 그렇게 내두겠어요." 

근대프로젝트의 구획화가 완성되기 전에는 소위 말하는 정상과 비정상은 함께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도 마을에 바보 형이 하나 살고 있었다. 이름은 국이었다.아마 이름의 마지막 자일게다.나이는 나보도 10살정도 많았을 것이다.사실 바보는 나이가 중요치 않다.그 바보 국이는 내 친구의 형이었는데 어린시절 항상 데리고 놀았다. 늘 같은 츄리닝에 빡빡머리,그리고 코밑을 지저분하게 흘러내리는 콧물,머리에 가끔씩 땜방자국이 있었다.수술 자국이라고도 했던 것 같구 어리버리 하다 어디 부딪혀서 그런거라고도 했다.어찌되었거나 내 어린시절 기억엔 그 국이 형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바보 국이 형이 살아있다면 아마 40대 중반이 되었을테데.....

송기원의 소설<사람의 향기>는 내게 잊혀졌던 바보 국이를 떠오르게 했다.그의 단편 바보 유생이는 거의 직접적으로 바보 국이를 연상시켰다. 송기원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내 추측에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거의 전부 논픽션인거 같다.픽션부분은 성장한 후 우연히 고향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 쪽에 몰려있을 성 싶다.실제로 만났을 수도 있지만 대개는 작가의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이 창작력의 구름을 만나 형상화된 듯 하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작가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 또는 그의 동네 지인들이 주연과 조연을 맡고 있다.소설의 배치상 맨 마지막에 놓인 <양순이 누님>은이 소설의 중심축이다. 작가의 가족사가 중심이 된 이 이야기들이 가지를 치면서 연작 소설<사람의 향기>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작가의 누님의 다난한 삶과 그의 화해를 다룬 <양순이누님>에서 양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따로 작가의 시각에서 본 양부 이야기는 <사촌아버지>라는 단편에서 다루어진다. 맨처음 나온 소설 <끝순이 누님>에서 양순이 누님의 시집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소설 마지막 <양순이누님>에서는 양순이누님의 어처구니 없어보이는 결혼이야기도 여러장면에 걸쳐 나온다. 소설 속 사람들의 수많은 숨겨진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뿌리가 되었던 유년시절과 고향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 소설 속에 송기원은 대운이란 이름의 작가로 나온다. 그의 삶의 다사다난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참 복잡하고 어려운 가족사다.이런 삶을 살아온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가 싶다. 작가는 고인이된 이문구선생과 친했다고 한다.둘 다 요즘에는 보기 힘든 어려운 유년기를 보낸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문구 선생이 뼈대있는 양반집 출신인 반면 송기원 선생은 저자거리 장돌뱅이의 사생아였다. 이문구 선생의 가족이 역사적 비극에 의해 참담한 가족를 겪게 되는 반면 송기원 선생은 조금더 가족사 내부의 문제에 기인하다.아마 이 두분의 글 속에서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겪었던 유년기의 기억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분은 아픈 그 기억들을 속으로 화해하고 승화하는 방법을 깨치셨기 때문일 것이다. 난 이런 분들의 글에 대해서 뭐라 논평할 자격이 없다. 내가 문학평론가라면 학문적 척도에서 뭐라 비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런 만한 위치도 아니고 그럴 학식도 내겐 없다.그냥 한 사람의 삶의 한 부분을 읽었다. 그것에 어떤 평을 달 수 있을까?  좋은 작품 많이 써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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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5-04-05 00:27   좋아요 0 | URL
아....국민학교 때, 같은 학년에 바보라 불리는 여자애가 있었어요.
한 학년 아래인 그애 동생은 참 공부도 잘하고 똑 소리났었는데,
그 동생이 바보라 불리던 아이를 무시하고 창피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게 어린 마음에...참 보기 안 좋았었거든요.
드팀전님의 글을 읽으니 그 친구가 생각나네요. 지금쯤 어데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드팀전 2005-04-05 14:57   좋아요 0 | URL
제가 어린 시절 생각하다 또 떠올랐던 사람이 "독침 할아버지"입니다. 매일 담벼락에서 해바라기 하신 할아버지셨는데 마고자를 입고 말이죠.아이들 사이에서 그 할아버지가 독침을 놓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그래서 그 앞을 지나갈 때면 늘 조심조심 두려움에 떨었지요.어떨때는 해바라기 하는 할아버지를 놀리고 돌아오는 내기를 하기도 했었습니다.뭐 서로의 용기를 자랑하기 위한 동네아이들의 장난이죠.할아버지 근처에 뭐 하나 던져놓고 누가 가서 주워오나...뭐 이런 거였어요.앞으로 나아가다가도 할아버지가 꿈틀하면 걸음아 날살려가 도망갔었는데...
제가 어려서 처음 본 꽃상여길이 그 독침 할아버지의 상여길 이었습니다.영화에서 본 상여길과 거의 똑같습니다.바로 상여꾼들 바로 밑에서 논길을 따라 동네 아이들과 따라 갔던 기억이 납니다.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신기했어요....
참 오래전 일인데 ....

2005-04-19 1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남극일기 - 남극의 비극적 영웅, 로버트 팔콘 스콧
로버트 팔콘 스콧 지음, 박미경 편역 / 세상을여는창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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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국내 S그룹에서 1등주의를 내세운 캠페인을 한 적이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그 광고의 부당성을 말했다.요즘처럼 인터넷 패러디가 유행했다면 당연히 패러디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이 보편화 되지 않았나 보다.스콧의 일대기는 국내 굴지의 그 잘난 그룹의 1등주의에 딴지를 거는 가장 좋은 예가 되었을 것이다.그때 광고가 뭐 그랫다 '아무도 2등은 기억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스콧은 <남극일기>를 통해 최초의 남극점 정복자 아문센보다 유명세를 탔다.

스콧과 아문센에 대한  평가는 세상을 보는 두가지 가치의 압축판이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두 가치는 다른 이름의 옷을 입을 수 있다.그래도 가장 보편적인 시각은 '결과중심주의'와 '과정중심주의'라는 것이다.본인이 원한바는 아니지만 아문센은 결과중심자로 전락하고 말았다.저자가 간략한 브리핑을 통해 밝혔 듯이 <남극일기>가 발견된 후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는 아문센보다는 스콧에게 œP아졌다.극한 상황에서 보여준 인간정신의 강인함은 남극점에 깃발 하나 꽂고 돌아온것 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법이다.아문센 입장에서는 진짜 억울한 일이다.스콧에게 무슨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정당한 방법으로 남극점 최초의 정복자가 되었음에도 폄하되었으니 말이다. 스콧이 일단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그와 그의 팀이 보여준 초인적인 인간의 모습때문이다.동료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릴 줄 아는 대의정신,죽음앞에서도 책임을 잊지 않던 의연함,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활발한 활동들...

20세기 초반,인간의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의 시대,단순한 자연의 정복을 넘어서는 강인한 이성의 대표적 아이콘이 스콧이었을 것이다.거기에 정치적인 힘이 작용되었음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제국주의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영국이 한낫 바이킹의 후예에 밀린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콧 대원들의 장렬한 최후는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최고의 명약이 된 셈이다.

아문센과 스콧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스콧 일행이 보여준 드라마는 인간정신의 구현이란 점에서는 최고의 드라마상을 받을 만하다. 내가 특히 관심이 갖던 것은 스콧 팀의 공동체 구현이다. 스콧은 자율성을 인정하는 열린 리더로 비춰진다.그는 각 대원들의 특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들의 능력을 공동체 안에서 공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각 대원들은 자신의 해외경험이나 전공분야에 대해 동료들에게 강의를 한다.이 강의와 토론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아나키즘에서 말하는 자발적 공동체의 전형이 되는 것이다.아문센의 기록은 아직 살펴보지 못해서 무어라 말할 수 없으나 스콧처럼 인간적인 공동체를 구현해 내지는 못했을 듯 싶다.

이만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통나무집 하나에 모든나라와 모든 지방의 경험이 다 들어있다. 잡다한 지식의 집합소가 따로 없을 정도다.

겨울의 정점을 자축하던 밤 내가 선물로 받은 것은 체리그래드의 <남극타임즈 1호>였다.그것은 데이가 제본한 조그만 책자였는데 표지가 매력적이었다.

스콧의 일대기를 무시하려는 처사는 아니다.그의 이야기는 일단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 책 <남극일기>에서 이를 찾으려는 사람은 한번쯤 고민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이 책은 스콧이 직접쓴 보고서 형식의 일기이기 때문이다. 그가 직접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며 쓴 생생한 경험의 글이라는 측면에서는 감동적이다.하지만 드라마적 구성은 결코 기대해서는 안된다. 이 책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내용이라고 할 만한 오츠의 죽음 역시 간략하게 그려질 뿐이다.그렇다면 책의 대부분 내용은 무었일까? '하루 몇킬로를 갔다. 식량이 얼마나 남았다.'가 주를 이룬다. 스콧이  이 글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쓴게 아니니 당연하다. 하루 하루의 일과를 간략한게 보고하다 보니 좀 무미건조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번역은 진짜 맘에 안든다.주술관계가 안맞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이 여러게 발견된다.안그래도 이 책에 등장하는 남극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데 한 술 더 떠주는 셈이다.

결과는 원래의 쟁점을 정당화 시켰지만 나는 판단의 착오가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 충분한 증거없이 추정되는 안전감에 의존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불신감이 남극의 종잡을 수 없는 기후가 제법 오래 떨어져 있던 동료들에게 여러가지 형태의 재난으로 타격을 입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스콧의 이야기에 지나치게 기대해서였을까. 그가 사선에서  쓴 <남극일기>는 기대에 미치치 못했다.좀더 신중한 번역이 필요했다.또 남극의 상황과 용어들에 낯선 일반독자들을 위해 좀 더 자세한 자료가 제공되었어야한다. 그래야만 스콧이 처했던 상황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감동이 커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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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5-03-15 12:46   좋아요 0 | URL
아문센과 스콧, 다른 책에서 둘의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성공해서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아문센이 준비 면에서 더 완벽했다고 들었는데, 남극일기 발견 후 역전이 되었다더군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남극일기도 남극일기지만 대영제국의 힘과 매스컴 플레이가 더 주효한 게 아닌가 싶네요.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미시마 유키오의 죽음을 본 적이 있다.물론 TV 다큐멘터리 속 한 장면에서 이다.내게 남은 흑백화면의 잔상은 그가 무언가 소리높여 외치고 있는 장면이다.그는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삶을 마감했다. 민족문제가 žg혀있는 우리에게 그의 죽음은 공포의 감정으로 먼저 다가온다. 학습되어온 우리의 과거 경험은 그의 극우적 주장이 현실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준다. 그런 개인의 단호한 비장미가 특정사건과 결합될 때 발생하게 될 전체주의라는 망령에 대한 경계심이다.

 미시마 유키오. 한 시대를 대표한 일본의 소설가이자  거부받아 마땅한 망상적 극우민족주의 신봉자. 그의 소설은 그래서 한국인에게 선뜻 다가서지 않는다. 비교하자면 지금보다 어렸을 시절 열심히 읽었지만 지금은 손도 대지 않는  국내 모 소설가의 경우와 같다.나는 예술 작품의 독자성을 인정하고 자기목적성에 대해서도 동의하는 편이다.하지만 인간에게 이성과 다르게 작동하는 정서라는 것이 있다.그런 입장에서 보면,예술과 사회의식을 사과 자르듯 반으로 나우어 한쪽씩 핥아먹을 수는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읽었다.늦은 감이 있지만 어찌할 것인가.책과 사람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인연의 끈이 맞아야 서로 조우하는 것이다. 

소설<금각사>는  미시마 유키오가 그의 극우적 정치색을 드러내기 전에 씌여진 작품이다. 실제로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그렇다면 몇년전 교토여행에서 본 금각사는 복원된 것이란 말인가? 잘은 모르겠으나 전소되었다면 그럴 확률이 높다.내가 금각사에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에 대한 답이 은근 슬쩍 흘러 나오는 것 같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에게 금각사는 절대미의 상징이다.그의 행동규범과 의식의 세계는 외면적으로 자율성을 얻고 있으나 내면적으로 절대미에 철저히 억압되고 있다.그가 위악적인 성적 일탈을 감행할 때도 그의 눈앞에 나타나 그를 절망케 하는 것은 금각사이다.내가 이 소설에서 눈여겨 보아지는 부분은 바로 '억압'과 '파괴' 라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 내내 자의식과 환경사이의 투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물론 이 둘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주인공을 둘러싸며 자의식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이란 것은 철저히 억압적이다. 먼저 주인공을 금각사로 보내는 아버지는 주인공에게 권력과 권위를 쟁취하라는 손짓으로 이해된다.어머니는 부정한 관계와 이에 대한 천연덕스런 위선의 연출로 모성에 대한 부정적 의식을 공고히 한다.금각사의 주지 역시 온화함으로 가장한 세상의 위선의 세계를 보여준다.거기에 어린 시절 보았던 우이코의 죽음은 억압된 자아의 해결책으로 벚꽃처럼 일회적 파괴의 미학을 꿈꾸게 한다.그가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 가시와기 역시 주인공을 혼란으로 억압하는 존재일 뿐이다.가시와기의 미에 대한 인식과 세계 인식은 허무주의적이다.미와 삶에 대한 허무의식은 주인공의 내면에 또 하나의 억압으로 남을 뿐이다.소설의 주인공은 자신의 파괴에 앞서 이 모든 억압의 꼭지점에 서있는 금각사를 대상으로 삼는다. 죽음과 파괴에 대한 강렬한 욕망은 사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과잉집착에서 출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실제 방화사건의 주인공과 달리 소설속 주인공은 생에 대한 강한 의지로 이를 표현한다. 소설의 주인공와 자신을 여러방식으로 병치시켜왔던 미시마 유키오 역시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 ,즉 강한 일본에대한 의지를 점차 표나간다.

이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의 정점으로 읽힌다.소설의 주제 역시 미에 대한 탐닉과 집착이 주를 이루고 소설의 화려한 문장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렇다면 유키오가 보여주고 싶었던 미란 것은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이든다.추후 그의 개인적 역사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나는 이작품에서 타나토노스의 증후를 맡는다. 자기혐오와 세상의 위선에 대해 가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학 예술은 대상의 완벽한 소멸을 상정한 순간적이고 과격한 파괴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우이코의 모습,어두운 새벽 속에서 물처럼 빛을 발하며 내 입을 잠자코 주시하던 그녀의 눈 뒤에서,타인의 세계-즉,우리들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자진하여 우리들의 공범이 되며 증인이 되는 타인의 세계-를 본 것이다.타인이 모두 멸망하여야 한다.내가 정말로 태양을 향하여 얼굴을 들기 위하여는,세계가 멸망하여야 한다.......  <금각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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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달 2005-03-08 15:01   좋아요 0 | URL
참 부지런하시네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비로그인 2007-05-09 12:08   좋아요 0 | URL
소설의 거시적 맥락을 조망케하는 좋은 리뷰네요. 파편적 감상을 긁어모은 감상문들을 읽어봤지만 주변부만 어루만지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 소설을 이해하는 좋은 힌트 많이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