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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아프가 본 세상 1
존 어빙 지음, 안정효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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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그렇게 유명한 책인줄 몰랐다.사실 맨먼저 눈에 띤 건 책 표지의 에곤 쉴레의 그림-김기덕의 영화'파란대문'에서 주인공이 하숙집 벽에 걸어놓은 그림 역시 그의 것이었다.그리고 또 '은마는 오지 않는다''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로 알려진 번역가 안정효의 이름.존 어빙....그는 낯선 작가였다. 하지만 현대문학에 취약한 우리에게만 낯설었을뿐 이미 그의 소설은 무슨무슨 클래시커 50 시리즈에 <메피스토><마의산><백년동안의 고독>등과 함께 이름을 올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었다.

가아프가 본 세상은 엽기 천국이다.모순과 부조리로 가득하면서도 뻔뻔하게 흘러가는 커다란 강물이다.그 강물에 저항하고 비웃어보고 눈흘겨보아도 거대한 흐름은 콧방귀조차 끼지 않을 만큼 뻔뻔하다. 가아프의 어머니 제니는 간호사로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가아프를 생산(?)한다.새로운 생명을 위한 아름다운 성이란 개념은 제니에겐 무의미했다.

출생자체부터 신비로운(?) 가아프의 삶은 그가 택한 욕정과 타고난 감수성과 통찰력으로 인해 수많은 굴곡을 거치게된다.각 장마다 나타난 가아프와 그를 둘러싼 관계,그리고 그들에 대한 가아프의 시선....작가 존어빙은 해학적인 시니컬함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펼쳐나간다.이야기를 만드는 목수 존어빙은 사실이기에는 너무 황당한 이야기들을 사실보다 더 사실답게 풀어나간다.

가아프를 미치게 했던 것 중 하나는 다수의 대중들이 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이었다.어머니 제니필즈의 수기가 대중의 신화만들기에 의해 베스트셀러가 되고 여권운동의 고전이 되어버리는 상황,강간에 의해 혀가 잘린 아이에 대한 공분으로 혀를 짤라버리고 무언으로 여권을 주장하는 집단,자신의 가족사로 둔갑되어버린 가아프의 소설 그리고 열광하는 군중. 그것 뿐이었을까?

그리고 소설 속에서만 그런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 우리국가에 이익이 되니까 어서 어서 파병하자고 외치던 나라에서... 행여 우리에게 전쟁이 나면 피해가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북한을 끝장 낼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이 나라에서..

가아프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허접함을 끝까지 비웃는다.그가 생을 마감하는 장면 역시 그렇게 허망하고 가아프답다. 가아프는 또 자기 생에 불현듯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운명에 공포를 느껴왔다.가아프는 우리 일상이 우리의 운명이 얼마나 안전하지 못한지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본능적으로 알았다. 물밑 두꺼비가 우리는 노려보고 있음에도 그를 인식하지 못하고 유유낙낙한 인생은 또 얼마나 우습겠는가?

다수가 가진 폭력성에 대한 공포와 또 운명의 불가항력성에 대한 공포는 단지 가아프만의 것이 아니다.매일같이 신문사회면을 장식하는 각종 살인 강도 폭력 사고들 그리고 그에대해 내 일아니니까 하며 눈길 한번 주고 무관심해져 가는 우리들... 내일 나에게도 다가올 지 모른 물밑 두꺼비. 존 어빙은 엽기적인 방식으로 현대인이 가진 공포와 무지를 조소하고 있다.가아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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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
장 지오노 지음, 박인철 옮김 / 민음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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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풍차를 읽으며 마르께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을 생각했다.아마 한 가문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일것이다.마르께스가 아마존 강가의 습기와 어둠을 가지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꾸려나갔다면 지오노는 세기말적 유럽의 침울함으로 폴란드의 풍차를 이끌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백년동안의 고독이 가지는 스케일과 상상력과 마술적 리얼리즘의 분위기가 더욱 좋았다.물론 이는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장지오노의 <폴란드의 풍차>는 한 영지를 둘러싼 운명과 그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전반부에 화자는 마을 어른때부터 전해내려온 소문을 통해 폴란드의 풍차에 다가간다. 몇 대에 걸친 불운을 통해 지오노는 인간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과 그 운명에 두려워하는 사람들,거역하는 사람들,실패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그러나 두려움도 거역도 실패도 운명의 거대한 힘앞에는 동일하게 무의미할 뿐이다.

사마천이 사기의 여는 글에서 물었던 '하늘의 도리란 것'은 그렇게 무정한 운명이란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 거역하고 싶다는 그 운명의 힘은 그 무의미함에서 오는 힘일것이다.그 하늘의 뜻이란 것,그 운명의 힘이란 것은 세상사의 영욕과 노력과는 무관하게 우리를 감싸안고 축대가 무너져내리듯 삶에 굵은 틈새를 만들어낸다.기껏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틈새를 웃으며 메우냐 울며 메우냐의 차이일뿐이다.

폴란드의 풍차를 거쳐간 사람들도 모든 낙인 찍힌 가문들이 그렇듯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좌절하고 저항한다.그들의 좌절을 보며 또 저항을 보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미미함에 대한 연민을 가질수 밖에 없다.장 지오노의 범신론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상상을 벗어나는 거대한 우주속..그 앞에서 달팽이 뿔 위에서의 싸움과도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것이 우리들이다. 폴란드의 풍차는 한 가문의 비극을 통해 단지 운명의 두려움만을 보여주고 자 한 것은 아닐것이다.

그 무정함과 가혹함속에서도 싸워나가야하는 시지프스들의 고뇌를 그리고 그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화자가 그저 면벽한 관찰자에서 폴란드의 풍차와 운명에 깊이 관여하게 되고 그 영지와 그들의 운명에 대해 안타까와 하는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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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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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은 우리에게 낯섬, 그 자체이다.내 주변에 포루투갈로 이민간 사람이나 유학 간 사람이나 행여 포르투갈 대사관 근처에 사는 사람조차 하나 없다.내가 기껏 안다는 포르투갈에 대한 정보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피구.새 대표팀 감독 코욜라.... 그런데 우연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주제 사라마구를 만났다.

물론 그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그래 봤자 퀴즈용 상식이다.)
----사회자: 포르쿠갈의 대표적 문호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이 사람은?
---- 나:(남보다 빠르게) 정답 !!! 주제 사라마구..

본다는 행위 자체는 의식 이전에 선행되는 행위이다.우리는 사물을 봄으로써 그 사물을 인식하고 또 그 사물에 이름을 짓는다. 그런데 작가는 선의식적인 봄이란 행위 자체가 가지는 우월성(?)에 제동을 건다. 그리고 '본다'라는 행위 자체가 거세된 사회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통해 우리 안에 잠제해 있는 하이드씨의 존재를 '보게하는' 것이다.

물론 제한된 사회적 공간을 통해 보편적인 인류의 폭력성에 대한 은유를 보여주었던 작품들은 한 둘이 아니다.그러나 이 작품이 더 섬뜩한 이유는 그 끝이 없을것같은 종말론적 분위기때문이다.마치 예전에 보았던 핵전쟁이후의 사회를 그린 '그날 이후'를 보고 났을때처럼 음습한 느낌.

특히 의사의 아내가 가졌던 불안감은 내게 근원적 질문이 가져오는 불쾌감을 던지고야 말았다.그녀의 불안감은 단지 눈이 먼다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그녀 역시 눈이 멀게 되면 점점 생존만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 달려가는 몰의식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치를 떨었다.

질문을 던져본다.모두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회에서 인간으로 남는 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연 의미가 있기나 한 걸까? 혹자는 쉽게 너무나 쉽게 당연하지 인간이라면 그래야지..라고 답할 것이다.또 아닌 사람도 있을것이다.(너무 쉽게 대답하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지만..)

그런데 이미 세상은 점점 인간이 인간이기를 멀리하도록 돌아가고 있진 않은가? 그 행렬에 포함되어 하나라도 나의 몫을 빨리 챙기는 것이 현실적이고 현명한 길임을 세상은 가르친다.그럼 나는 먹이를 찾아 유령처럼 헤메이는 눈먼자들의 도시 사람들과 무었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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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르 클레지오 지음, 홍상희 옮김 / 책세상 / 199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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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텍쥐베리는 말했다. '사막이 아름다운건 그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2. 사막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다.설령 사막이 갓끓인 커피포트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다할지라도.혹은 어린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보았던 모래바람보다 훨씬 강한 모래폭풍을 숨기고 있다 할지라도.

3. '사구 꼭대기에 그들이 나타났다.'르클레지오의 <사막>은 그렇게 시작한다. 모래능선 폭염의 아지랑이 사이로 하얀 베두윈을 두른 까무잡잡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꿈처럼 나타난다.작가는 바람에 날리는 모래 하나라도 놓치기 아쉬워 하듯 세밀하고 서정적으로 사막을 그리고 사막의 사람들을 그려나간다.(르클레지오의 이러한 표현적 특징을 '카메라 펜 기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타났던 사막인들은 책말미에 사라진다.'마치 꿈속에서 처럼 그들은 사라진것이다'

4.사막이 아름답다는 것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는 욕망.사막은 아름답다.죽음의 땅에 비견되는 모래바다에 그 무언가 있기때문이다... 원시의 생명력...바로 그것이다.기계문명에 도시화의 광풍에 잃어버린 것들.이미 우리 도시인들에게 퇴화해버린 꼬리뼈와 같은 것.하지만 우리를 생명의 무한한 영역으로 인도해줄수 있는 그 퇴화한것.바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지 못하고 새들의 날개짓이 의미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건 우리 원시적 생명력이 물질문명과 근친상간해버림으로 생긴 인간의 것이 아닌 돼지꼬리이다.

5.<사막>이 아름다운건 모래능선같은 깊이를 알수 없는 역사가 있기때문이다.표면상 르클레지오는 과거와 현재의 세계를 단층적으로 구분해버렸다.그러나 그 역사의 단층이 동일한 공간 속에서 환유의 알레고리로 만나고 있으니.단층이 결코 끊어짐이 아님은 말할 나위 없다.시대의 광풍앞에 명멸하는 청색인간들.마 엘 아이닌과 누르..고단한 이동과 학살 속에서 사막 속으로 사라진 청색 인간들의 후예.그들은 랄라의 몸 속에 있고 사막의 여명 속에 있었다. 그들의 생명력은 도시의 광폭함도 상업주의의 호사스러움도 침범할 수 없었다.

6.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답답함이 느껴진다면.잠시 떠나보자. 멀리 모래바람이 날리는 진짜 사막이면 더욱 좋겠지만..마음 속에 작은 사막 하나 넓혀서 낙타의 등잔위 뜬 사막의 별 하나 바라본들 어떻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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