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다이스 가든 2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권기태 지음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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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스미스의 <파라다이스 가든>이다.
중학교 때인가 코팅해서 쓴 책받침 사진중에 하나이기도 했다.물론 곧 소피마르소에게 자리를 내주었지만 말이다.

<파라다이스가든>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먼저 유진 스미스의 아이들이 걷고 있는 숲이다.또한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이기도 한 강원도 영월의 도원 수목원이기도 하다.하나 더 콕 찍어 이야기하면 김산이 만들었던 모형 도원수목원을 주인공 김범오와 강세연이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파라다이스 가든>은 도연명이 말한 동양적 이상향이다.각 장이 시작할 때 마다 등장하는 도연명의 이야기는 도원수목원을 참된 이상향으로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염원과 궤를 같이 한다.작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출생의 빛과 연관 짓는다.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모두 죽음과 출생에서 만나는 동일한 하얀 빛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죽음을 맞은 사람은 자신의 몸과 의식이 가벼워짐을 느낀다.이제 고단한 현실의 끈에서 놓여 날 때가 된 것이다.임종을 앞둔 이는 긴 터널 끝에 환한 빛 한 줄기를 만난다고 한다.그리고 그 빛을 향해 너무도 가볍게 나아간다.이는 출생 과정에 비유되기도 한다.태아는 자궁의 어둠 속에서 컴컴한 산도 끝에 있는 하얀 빛을 본다.그리고 인력에 끌려 가듯 그 터널을 지나 밝은 빛과 하얗고 커다란 손을 만나게 된다.혹자는 밝은 빛은 산부인과의 전등일 테고 하얀 손은 의사의 손일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출생과 죽음이라는 두 세계를 통과하는 과정에 공통적으로 거대한 하얀 빛이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새로운 세상은 거대한 하얀 빛으로의 극적 전환을 통해 이루어진다.무게도 가치도 고통도 쾌락도 없는 고요의 상태...

소설 <파라다이스 가든>을 처음 집어 들었을 때 적지 않게 당혹스러웠다.너무 훌륭한 한국 소설을 만났다는 즐거움 때문이 아니었다.프롤로그에서 불러 일으켰던 호기심은 몇 장에 걸쳐 3류 기업소설로 바뀌어 갔다.성림건설의 후계 구도를 두고 벌어지는 권력 다툼이 그 내용이다...배다른 동생에게 경고하기 위해 애완견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그룹 회장인 아버지를 가택 연금하여 의결권을 찬탈한다.지분 확보를 위한 가신들의 음모가 이어진다.....이쯤 봤을 때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신문 연재만화에 자주 등장하는 기업만화 스토리와 그닥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래도 펼친 책 쉽게 접을 수는 없는 법...

소설은 근래 보기 드물 정도로 이분화된 구조를 갖고 있다.마치 80년대 민주 대 독재정권의 대결 구도를 자본 대 자율주의로 돌려 놓은 것 같았다.한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이러한 이분화된 구도는 '상상력의 부재'와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한국소설이 후일담에 이어 사소설화 하는 경향은 나름대로 역사적 맥락을 가진다.한국소설을 즐겨보진 않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무한한 문학의 나래를 펼치리라는 작은 희망은 가져본다.그래서 한해에 몇 권씩 의무감을 가지고 읽곤 한다.그런데 소설 <파라다이스 가든>의 구성과 스토리 전개는 적당한 통속성과 적당한 복고주의로의 회귀처럼 보였다.소설을 이루는 두 축은 원직수의 세계/김산의 세계로 양분화된다.원직수의 세계는 자본의 세계이며 집중화된 권력의 세계이다.원직수는 성림건설이라는 토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원직수의 세계에서 동생 원제현과의 권력 다툼은 또다른 모순 관계를 만들어 낸다.김산의 세계는 자연의 세계이며 자율의 세계이다.김산은 도원 수목원이라는 공동체 속에 미래를 만든다.이 공동체는 아나키즘에 바탕을 둔 자율적 마을이다.김산의 공동체에는 김산의 죽음 이후에 아들을 필두로한 개발 수용론이 또다른 내적 모순으로 갈등한다. 원직수의 세계와 김산의 세계가 공통되는 가치가 있다.그것은 이상향을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이다.물론 가치는 적대적이다.원직수가 바라는 이상향은 모든 것이 황금으로 이루어 졌다는 '엘도라도'이다.김산의 이상향은 사적 소유와 그로 인한 갈등이 없는 '무릉도원'이다.자본의 이상향과 자연의 이상향이 도원수목원이라는 현실적 공간 안에서 부딪히게 된다.원직수가 자신의 이상향을 '엘도라도'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세계에서 두가지 형태로 구현된다.하나는 자본의 무한확장이 행복을 가져다 줄거라는 자유방임형 시장론자들이다.또 한가지 '무릉도원'에 상대되는 가치로 서구의 물적 가치가 행복의 척도라고 보는 물신론들의 모습이다.이 둘을 한가지로 수렴할 수 있는 말은 '서구 근대화론'이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규정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저자가  '도원수목원'을 설정하는 것은 이러한 '서구 근대적 가치'에 대한 대안을 내비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상투성을 만나게 된다.자본과 개발논리에 대한 역으로 등장하는 '생태주의'.이것이 얼마나 상투적인지 알만한 사람은 알 것이다. '느리게 살기' '자연공동체' '생태주의' '아나키즘' 이러한 말들은 최근 유행어에 가깝다.사회에 어떠한 트렌드가 형성되는 것은 물론 그 원인이 있다.급속한 근대화가 가져온 부산물들이 그 첫번째 원인이 될 것이다.치열한 경쟁,탈출구 없는 사회,현저한 인간소외... 민주화를 위한 열정이 어느정도 이루어졌다는 믿음과 그 만큼의 실망은 시스템 전체를 다시 한번 성찰하게 한 계기도 될 것이다.결국 '생태주의적 아나키즘'은 현재를 뿌리부터 부정하는 저항의식과 미래의 이상적 삶에 대한 투신하는 도덕적 정당상을 부여해준다.거기에 아나키즘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부정은 전근대적 조직관계의 위계에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산소공급기 같은 역할을 해준다.자본주의적 근대에 저항하는 이미지로서 최고로 매력적이다.그러나 이러한 가치와 공동체가 문학작품 안에서 양분화된 사회의 한 축을 구성하니 왜 이렇게 상투적이고 진부해 보이는 것일까? 마치 미니시리즈 드라마의 알기 쉽게 풀어놓은 선/악구도를 바라보는 것 같다.

주인공 김범오의 캐릭터도 너무나 상투적이다.물론 그가 현실의 족쇄에서 탈출하기 까지의 심리적 번민이 어느정도 잘 그려진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그가 '도원수목원'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독자는 처음부터 알 수 밖에 없다.온통 집안을 화초와 나무로 꾸며 놓은 남자,도시 한 복판의 옥상을 누구나 반할 만큼의정원으로 꾸며놓은 남자.그거 아무리 번민을 한다고 해도 소설 속에서 가는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그렇다면 그가 중간 중간 고민하는 과정들은 결과를 상정해 놓고 이루어지는 요식행위처럼 보여질 뿐이다.작가는 또한 대중소설의 통속성을 위해 김범오를 특공대 출신의 청년으로 상정한다.왜 특공대 출신이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성림건설의 도원수목원 접수과정에 발생하는 폭력에 맞서 몇 가지 액션을 선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김범오는 액션씬에서 불의의 기습을 받아 고전할 때도 있지만 대개 어느 정도 액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날쌘 모습을 보여준다.소설 속 주인공이 늘 문약할 필요는 없지만 액션씬을 염두에 놓은 캐릭터 설정은 역시 미니시리즈 드라마용이다....책 말미에 등장하는 김산이 공동체에 투신하게된 젏은 시절이야기는 어떤가?공동체 삶을 결심하게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아나볼 논쟁,아나키즘 폭력론을 얼핏 심어넣다니...의욕과잉의 상투성인가?

모든 사건이 종결된 에필로그마저 진부하다.새로운 생명이 엉클어진 세계에 새로운 희망을 안고 나온다는 이야기..  희망을 상징하는 메타포는 역시나 아기인가?

내용의 상투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꽤나 스피디하게 읽힌다.사건의 진행이 톱니바퀴 돌아 가듯 착착 이루어진다..또한 앞 장에서 이루어진 사건의 내막이나 그 이후 여파들을 다음 장에서 바로 바로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준다.같은 화자의 시선이 아니라 상대의 시선 또는 3자의 시선으로 사건들을 이어가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다.그러니 앞의 일이 왜 일어났지를 알아보기 위해 책을 앞 뒤로 넘길 필요가 없다.또한 수목원에서 만나는 새,나무,꽃 들에 대한 묘사는 아주 사실적이며 뛰어나다.작가의 자연에 대한 관심을 세세히 알아볼 수 있어서 즐거웠던 점이다.실제 도원수목원이 있다면 직접 가서 작가가 언급한 새소리와 물고기의 움직임을 천천히 음미하고 싶어진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김산의 죽음이었다.노오란 해바라기 숲에서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늙은 김산이 눕는다.스르르 의식은 흐려지며 몸은 가벼워진다.마치 고호의 해바라기 밭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고호의 그림을 패러디했던 구로자와 아카라 감독의 <꿈>이라는 영화도 생각났다.그리고 함형수 시인의 유일한 시...

<해바라기의 비명>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소설<파라다이스 가든>은 2006년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신예작가가 이정도의 분량을 아귀가 맞아떨어지게 이끌어간 것만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또한 그가 가진 많은 재주들을 언듯 언듯 볼 수 있어서 앞으로 기대하게된다.바람이 있다면 조금 더 아무것도 씌여 있지 않는 흰 원고지 위에서 그의 재주를 펼쳐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한국 소설은 새로운 공간의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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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튼의 사과 2006-09-20 01:32   좋아요 0 | URL

싸늘한 리뷰군요. 

이분법적이고, 상투적이고, 진부하고, 기업만화스토리고, 통속적이고, 상상력의 부재에다, 요식행위고, 의욕과잉에. 또 없나요? 후후. 


드팀전 2006-09-20 09:31   좋아요 0 | URL
^^ 실망하셨나요.제 취향은 아니란 뜻일 뿐입니다.수준높은 평론가분들이 뽑으신 소설인데 일정 수준을 갖추지 않았겠습니까.. 현재까지 올라온 리뷰들의 대세가 "올해 최고의 한국소설이니 한국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니.."이런 극찬이 이어져서 과연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썼습니다.그렇다보니 미덕보다는 눈에 걸리는 것들을 쓰게 되네요..이 책을 좋아하실 분들은 또 무척 좋아하실 수도 있다고 봐요.이 책에 대해 만족스러운 리뷰를 보시려면 1편에 달린 리뷰들을 보시면 될 듯합니다.그쪽에 더 공감하는 분들이 많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제가 죽는 날까지 즐겨 듣게될 어떤 음악들은 또 다른 어떤 분들에겐 지겨움이고 따분함이기도 하니까..^^
댓글 감사합니다.

드팀전 2006-09-20 17:59   좋아요 0 | URL
^^ 이건 참으로 재미있는 반응이군요.리뷰에 대해 이렇게 불만이 많으시다니....
리뷰는 선이라고 말한적 없는데요.그리구 형편없는 소설이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형편없었다면 별 2개나 별 1개 여야죠.별 3개는 대개 보통을 말하죠.님처럼 이 책에 별다섯을 주지 않은것 뿐입니다.분명 이 책을 좋게 보신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님 처럼 말이죠.그럼 그걸로 만족하세요.다른 사람까지 님과 똑같이 느끼게 하고 싶으신가요.이 책이 좋으니까 심사위원들도 오늘의 작가상으로 뽑았겠지요. 고명한 평론가들의 심미안과 님의 심미안이 같으니 별로 근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지만 모두 이 책을 좋게 평가하리라고 생각하는 건 ..글쎄요...

2006-09-21 15: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6-09-22 09:16   좋아요 0 | URL
숨은님께...) .^^ 안그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저두 그러 그러한 이유에 님처럼 좀 그런 마음이 들었나봅니다.(켕 이게 무슨 말이람) 님의 아이디는 신 이름 맞지요.제 기억이 맞다면.... 아닌가? 어쨋거나 자주 뵙길 바랍니다.
 
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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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외국에서 한 1년 정도 살아 본 적 있다.이미 10년도 넘은 일이다.내가 살던 곳은 바다의 푸른 끄트머리가 살짝 보이던 언덕 위의 낡은  하숙집이었다.그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버스에서 내려 언덕길을 10분 가까이 올라서 있었다.덕분에 집값은 동네에서 가장 샀다. 집 주인은 슬로바키아 이민자였다. 연금과 집세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이었다. 한달에 한번 월세를 주기 위해 2층에 있는 그의 방 문을 두드렸다.그  외엔 그를 만날 이유가 많지 않았다. 가끔 그는 1층에 내려와 불편한 건 없냐고 물어보는 정도였다.

 집 뒤편에 빨래를 널 수 있는 작은 잔디 마당이 있었다. 빨래를 널며 지붕들 사이로 바라보는 바다는 하얀 종이 위에 떨어진 파란 잉크같아 보였다. 내 방 창에선 내가 널어높은 빨래며 푸른 보자기자락 같은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중고 가게에서 산 CD플레이어는 김광석의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를 계속 노래하고 있었다. 난 지금도 김광석의 노래중에 <기대어 앉은 오후에는>을 가장 좋아한다. 그 창 밖 풍경때문이다.

비록 1년 정도의 타향살이 였지만 이방인의 고립감과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었다.  U2의 <STAY>란 곡을 이어폰에 꼽고 언덕길을 오늘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낯선 지붕들과 낯선 담장,다른 향기가 나는 공기,처음보는 나무들과 꽃들...보노의 무덤덤한 목소리와 흑백톤의 선율,소리를 많이 위축시킨 드럼.....내가 느낀 자유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밖에 없다.

고립감... 내가 느꼇던 고립감은 사회적 비존재로서 느끼는 감정이었을 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몇 명의 외국인과 한국사람들 외엔 나의 사회적 관계는 전무했다.학교와 집,도서관...그나마 사회적 관계를 갖는 다는 것이 버스나 전철을 타며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과 그 곳 사람들이었다. 공부삼아 그곳 신문을 사서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그곳이 나의 생활터전이었음에도 그곳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마치 한국 TV에서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외신 사건 처럼 느껴졌다. 사건 사고들에도 그렇게 무심했는데 그 곳의 정치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오히려 한국 사람들끼리 모이면 '불바다론','성수대교붕괴'등 열올리며 이야기 나눌게 많았고 나의 관심도 그쪽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이게 이민자들의 정서와는 다를 것이다.이민과 단기 체류는 분명히 정체성에 큰 차이가 있다.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에는 이민자들의 향기가 묻어 있다. 작가가 인도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정서가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투명하고 평이한 문장으로 이민자들의 이야기-그들의 정체성,그들이 느낀 고립감,그들의 고민,그들의 자긍심-를 풀어간다.이 단편집의 원제목은 <질병의 통역사>이다.한국판 표지에도 <축복받은 집>이라고 한글로 크게 써있지만 위에는 <Interpreter of maladies>라고 쓰고 있다.이 책에는 모두 9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각 단편은 짧지만 이민자들의 삶과 관련된 몇가지 단어들로 수렴된다.

먼저 <축복받은 집>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가족이다. 첫 단편 <잠시 동안의 일>에는 아이를 잃고 관계가 소원해진 인도인 부부가 등장한다. 부인에게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발생한 사산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남편의 부재를 이해한다.그러나 이해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불편함은 남았다. 부인은 별거를 준비한다. 그리고 마침 잠시 동안의 일처럼 정전이 된다. 며칠간의 공사로 그 빛이 없는 시간은 지속된다.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한다.그러나 모든 것은 순서대로.......며칠 간의 정전은 새로운 관계를 위한 카이오스다. 복중의 태아가 어둠 속에서 새 생명을 얻듯이 이 부부도 빛이 사라진 짧은 시간 속에 서로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간다. 최근에 인기 있었던 손예진,감우성이 나왔던 드라마. 제목은 생각이 안난다. 꾸준히 본게 아니어서. 그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파르자다 씨가 저녁식사에 왔을 때>는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 대한 안위를 걱정하는 모든 이민자들의 마음이 담겨있다. 파르자다씨의 가족은 파키스탄 분리전쟁의 전장에 놓여있었다. 파르자다씨의 가족들에 대한 마음은 어린 주인공의 눈을 통해 전해진다. 매일 찾아와 저녁을 함께 하던 파르자다씨는 전쟁 소식이 들리지 발걸음이 멀어진다. 주인공의 부모는 TV뉴스를 보지 못하게 한다. 주인공은 수 천킬로 미터 떨어진 파키스탄의 파르자다씨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곳에 살고 있어도 가족을 그리워하고 가족의 안전을 기원하는 마음음 누구에게나 똑같다. 아이는 나의 가족을 넘어서는 '위대한 가족'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가족'의 마음을 조금 더 사회적으로 확대시킨 이야기가 <비비 할다르의 치료기>이다. 비비 할다르는 아마 간질 환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여러 치료를 다해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결혼'을 해야 낳는다라는 말이 돌기 시작한다. 하지만 친오빠 내외는 이러한 말을 무시하고 동생을 귀찮게 여긴다. 그리고 결국엔 아픈 동생을 버리고 도망가버린다. 비비 할다르를 보살펴 주는 것은 함께 사는 마을 사람들이다. 가난한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은 작은 벽돌 한장이라도 그녀를 돕기 위해 나선다. 심심해할 그녀를 위해 아이들도 보내 놀게 한다. 나의 가족에게 한정되기 쉬운 사랑이 마을 공동체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줌파 라히리의 마지막 소설<세번째이자 마지막 대륙>은  자전적인 느낌이 많이 든다. 라히리는 런던에서 태어나서 지금 미국 보스톤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인도-유럽-미국이라는 세개의 대륙을 거쳐 자신의 삶을 꾸려나간다. 인도의 가치를 자신의 세계 속에서 지켜가면서 새로운 땅에서 뿌리를 내린다. 소설 마지막에는 이민자들의 자긍심이 가득한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 비행사는 영원한 영웅이기는 하지만 달에 몇 시간 밖에 머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신세계에 거의 30년을 머물렀다....내가 여행한 그 모든 거리, 내가 해온 그 모든 식사,내가 만난 그 모든 사람,내가 잠잤던 그 모든 방 등을 생각할 때 마나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평범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때로는 그것이 내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이 소설 외에도 <센 아주머니의 집><축복받은 집><섹시>의 단편에는 이민자들의 정체성과 갈등,내적 방황들이 비교적 담담하게 묘사되어 있다. 줌파 라히리는 남대천으로 돌아오는 은어들처럼 자심의 뿌리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소설로 표현해 냈다. 그녀의 애정은 담백하며 투명하다. 9편의 단편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며 각 단편이 하나의 짧은 단막극처럼 인상적이다.

그냥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이 책은 내가 샀는데 와이프가 먼저 읽었다. 와이프는 아이를 젖먹이며 줌파 라히리의 책을 읽었다.한쪽 품에는 아이를 ...방바닥에는 책을 놓고....하루 중 수유시간이 꽤 길기 때문에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요즘 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나에게도 가족이 생겨서 좋다.^^ 책읽는 엄마와  엄마 품에 있는 건강하고 예쁜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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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16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kleinsusun 2006-08-18 01:50   좋아요 0 | URL
빙고! 이민자와 단기 체류자의 정체성은 분명 다르죠. 저도 항상 느끼곤 해요.
전 항상 단기체류만 했기 때문에, 외국 생활에 대한 선망(?) 을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이 책 몇년 전에 샀는데 아직 안 읽었어요. 무슨 공항에선가 [Interpreter of maladies]를 샀는데,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이 <축복받은 집>이란걸 알고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암스테르담
이안 맥완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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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는 사람들>이란 그림이 생각난다. 에디워드 호퍼가 1942년에 그린 그의대표작이다.

 그림 안에는 4명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세명의 손님과 흰 색 가운을 입은 점원. 손님들은 같은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에 있다.같이 동석한 남녀 역시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다.... 아무도 서로에게 대화를 건네지 않는다.단지 깊은 밤 침묵의 시간이 어색한 점원만이  다른 고객들에게 수 천 번도 더 했을 뻔한 질문을 던질 뿐이다.그들은 단절되었다....밤은 병원복도의 빛을 닮아 냉랭하다.푸르스름한 실내등의 빛깔은 그들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닮았다...밤은 깊어간다.유리 병 속에 담겨 있는 듯한 그들의 침묵은 통유리밖의 세상과도 그리고 그림 밖의 세상과도 단절 되어 있다.....이중의 단절과 침묵.....

오랫동안 <암스테르담>을 기다렸다.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부터 품절 상태였다.지난 주였던가..우연히 보관함을 거슬러 오르다가 품절상태가 떨어진 <암스테르담>을 발견했다.잊고 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만난듯 반가왔다......도착한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손이 갔다.

<암스테르담>은 두 남자의 이야기이다.교향곡 작곡가인 클라이브와 신문사 편집국장인 버논이 그들이다.이둘은 몰리라는 여성과  사귄 인연이 있다.영화 <글루미썬데이>의 주인공들 처럼 클라이브와 버논은 몰리라는 꼭지점을 중심으로 삼각형을 이룬다.소설은 몰리의 장례식에서 부터 시작된다.몰리라는 매력적인 여성의 최후는 그녀의 역동적인 삶에 비해 초라했다.그녀는 모든 기억을 하나 둘 잃어가며 점점 식물인간처럼 변해갔다.그녀가 죽은 후 그녀와의 사랑을 기억하는 이들이 하나 둘 장례식에 모인다.클라이브와 버논,현 남편인 조지,젊은 시절 엄청난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몰리와 관계를 맺었던 시인,비열할 정도로 현실적인 현직 외무장관 가마니..등등.. 클라이브와 버논은 몰리를 사랑했으면 또한 그녀를 통해 지금은 서로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로 남아 있다.장례식에서 이들은 몰리를 추억하며 그들 앞에 있었던 또는 그들 뒤에 있었던 몰리의 연인들을 바라보며 묘한 질투와 내적 혼란을 겪는다.

이야기는 클라이브와 버논이 둘 다 싫어하던 현직 외무장관의 사적 사진이 발견되면서 급격하게 빠른 템포의 진행 수순을 밟는다.사진은 몰리가 찍은 것이며 사진을 제공한 사람은 현 남편인 조지이다.가마니의 사진은 공인으로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성적 취향을 보여주는 사진이다.이 사진의 게재를 두고 클라이브와 버논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 정도에서 멈추자. 스포일러가 될 필요는 없다.

저자인 이완 맥완에게 98년 부커문학상을 안겨 준 <암스테르담>은 딱 맞아 떨어지는 톱니 바퀴 같다.너무 꽉 끼어서 삐걱 거리는 소리를 내지도 않는다.또 톱니 사이에 구멍이 보일 정도로 헐거워서 겉돌지도 않는다.사건의 전개는 스피디하다. 사건의 진행을 서술하는 각 장의 주인공은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주로 주인공인 클라이브와 버논이 그 역할을 맡는다.가마니의 사진 공개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클라이브와 버논의 심리변화가 교차편집된다.이들의 내면 독백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의 변화들을 독자는 시시각각으로 따라갈 수 있다.클라이브와 버논은 외무장관 가마니의 비밀스런 사진 공개를 두고 갈등하게 된다.처음에는 단순한 시각차이로 비쳐졌다.하지만 사안이 커져가면서 이들의 갈등의 폭도 커져간다.그러다 보니 이제는 서로 마음 속에 있었던 상대에 대한 단점과 흠집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결국 가장 친한 친구였던 이들이 가장 큰 적의를 품는 사이가 되어 버린다.물론 서로에게 잠시나마 화해의 제스처를 취해볼 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클라이브는 흐린 날씨 속에 산길을 걸으며 버논에 대한 생각을 하고 분개해 한다.그러나 어느 언덕을 넘어서는 순간 태양이 환하게 빛나고 물기를 머금은 숲 길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다.그리고 갑자기 그 따뜻한 햇빛이 주는 평온함에 버논과 화해를 해 볼까 하는 마음을 굳힌다.별거 아닌 일 같지만 이완 맥완의 장점은 이런데 있다.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지속력이 항구적일 수도 있고 또 어느 한 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는 수도 있다.오늘 아침까지 냉냉하던 연인 사이가 함께 마신 레모네이드 한 잔의 상큼함에 그만 녹아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그저 서로 멋적은 웃음 한번에 넘어가기도 한다.클라이브 역시 버논에 대한 분노의 생각을 바꾸는데 맑은 햇빛 한 줄기면 충분했다.하지만 그들은 화해하게 되는가?  인간의 감정은 그렇다.그 또한 아무런 지속력이 없다.클라이브와 버논의 심리변화는 일상에서 우리가 한 번쯤 겪고 -또 지금도 겪고 있을- 내밀한 것이며 통속적인 것이다.우리 내면은 시장 바닥이다.의심,질투,시기,성공욕,자괴감,열등감,우월감,실패에 대한 두려움등등..수없이 많은 종류의 감정들이 그 안에서 주인을 기다린다.우리는  매일 매일 이러한 감정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되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흥정을 벌인다.이완 맥완은 현대인들이 일상 속에서 갖는 다양한 심리적 갈등을 <암스테르담>이라는 소설 속에서 블랙 코미디화 해버린다.소설 전체의 구조도 그렇고 매 장이 끝날 때마다 무언가 헛웃음 비슷한 것이 나오게 된다.특히 소설의 마지막, 몰리의 남편 조지의 독백은 리하르트 치글러의 <젊은 미망인>이라는 그림을 보는 듯 하다.묘한 성적 예감과  싸늘한 현실의 냉기때문에 비애감 마저 들게 한다.

클라이브와 버논의 갈등 축 외에 시선이 가는 곳은 버논이 속한 신문사 <더 저지>직원들의 모습이다.이들은 조직 사회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군상들의 미니어처이다.타인의 권위에 편승하려는 자,구습은 구습대로 유지하려는 자,결과에 따라 자신의 주장 조차 가변적으로 해석하는 자,남들 보다 반 발 앞서는 잔머리로 타인의 실패를 이용하는 자 등등...소설 속에서 조금 극화되었다 뿐이지 사회적 인간 관계 속에 수없이 발견되는 사례들이다. 이완 맥완은 <더 저지>직원들의 모습을 통해 조직 관계 속의 인간들과 그 관계성이 얼마나 편벽한 것이며 왜소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소설 <암스테르담>의 사건은 단순하고 구성은 치밀하며 심리 변화의 묘사는 탁월하다.인물 내면의 작은 변화에 쉽게 공감할 수 있게끔 한다.인간의 심오함과 가벼움이라는 가치에 리트머스를 들이댄다. 끝까지 쓴 입맛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하지만 감초 조각을 동시에 몇 개 입에 물었을 때 처럼 씁쓸하지만  뱉지 못하게 한다.훌륭한 블랙 코미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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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7-16 21:39   좋아요 0 | URL
저도 봐야 하는데 밀리고 밀리네요 ㅠ.ㅠ
 
펭귄뉴스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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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 들어갔을 때는 손으로 쓰는 레포트가 대세였다.학교 문구점에서는 학교 로고가 박힌 푸른 표지의 레포트 용지를 팔았다.일부 잔머리 학생들은 선배들이 예전에 썻?것을 베끼던가 아니면 표지만 달랑 바꾸어서 냈다.표지만 바꾸어 제출해도 표지 이름은 볼펜으로 싸인펜으로 직접 서명했다.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워드프로세서 라는 걸로 작업해 오는 친구들이 있었다.부러움과 찬탄의 대상이었다.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대세는 호떡 뒤집 듯이 바뀐다.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생의 신분이 되었다.레포트 제출을 하는데 90%가 면서기처럼 하얀 워드 프로세서 작업을 한 것들이었다.그 때는 그래도 아직 인터넷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라서 손으로 자판 때려 넣기라는 수고는 했을 것이다.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으니 인터넷으로 레포트 대신 만들어 주는 사이트까지 생겼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가 문화적 변이의 중심에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아침과 저녘이 다른 기술문명의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세대여서 늘 힘들다는 것이 그들의 하소연이다.나 역시 그 속성에 빗대어 본다면 내가 거쳐온 세대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화 중심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날로그적 삶이 인생의 절반을 차지 했다면 디지털화된 삶이 나머지 인생을 차지할 것이다.조금 더 지나면 디지털의 총화라고 불리는 '유비쿼터스'의 시대도 경험하게 될 듯 하다.

저자 김중혁과 나는 비슷한 세대이다.그 역시 아날로그적 소년기와 디지털적 청년기 속에 있었을 것이다.그의 소설은 자연스러운 변화처럼 느껴지는 이 두가지 삶의 방식 사이의 차이에 대해 말한다.그는 아날로그적 삶의 상징물들을 몇 개 제시한다.라디오,자전거,에스키모의 조각지도,타자기,연필 등이 그것이다.이 상징물들은 디지털 시대에 왕년에 홈런왕이었지만 지금은 벤치나 지키고 있는 4번타자 처럼 배치되어 있다.작가는 이 상징물들에 대한 애정을 통해 삶의 방식과 스피드에 문제를 제기한다.<무용지물 박물관>에 등장하는 라디오를 생각해 보자.(그 외 다른 단편에도 라디오는 가끔 등장한다) 주인공은 '압축하지 않는 건 죄악'이라는 믿음을 가진 디자이너다.압축은 지금은 일상에서도 흔한 단어지만 예전만해도 그렇게 자주 쓰이는 단어는 아니었다.'압축파일'........ 음악 하나 뜨는데 예전에는 실시간이 필요했다.하지만 지금 환경에서는 10분의 1의 시간으로 압축된다.하지만 주인공은 라디오라는 올드 미디어를 접하며 새로운 묘사의 세계를 깨닫는다.장황하지만 상상력이 넘치는 세계.즉 아날로그적 세계에 대해 다시금 돌아볼 기회를 갖게되는 것이다.<회색괴물>의 주인공들은 타자기라는 상징에 집착한다.타자기를 두드릴 때 나는 톡톡톡하는 소리와 줄바꿈을 위해 넘기는 경쾌한 소리들.... 주인공은 아날로그 세계를 사랑니로 치환한다.강하고 목표가 명확한 충치먹은 어금니를 뽑아내고  쓸모없다고 여겨졌던 사랑니를 그자리로 대치하는 것이다.

김중혁이 소설에서 건드리고 싶어하는 주제는 박민규 소설의 주제의식과 일견 겹친다.일종의 트렌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그 트렌드는 몇 단어들로 정리된다. '탈관습적인 삶'.'느린 삶의 속도' .....박민규가 김중혁에 비해 조금은 더 일탈적이며 해학적인 특징이 있을 뿐이다.<사 백 미터 마라톤>에서 주인공들은 스스로 삶의 스피드를 찾아가길 원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보여준다.400미터 선수인 친구와 몸의 역동성에 대한 무의식상태에서 무미건조한 삶을 꾸려가는 친구. 400미터는 전속력으로 뛰어야하는 경기이다.마라톤 같이 페이스 조절같은게 있을 수 없다.그저 출발 신호와 함께 100미터 달리기하는 속도로 결승테이프를 끊을 때까지 뛰어야한다.김중혁이 바라보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의 삶도 이러한 전력 질주하는 400미터 선수와 유사할 것이다.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처럼 400미터 이상은 뛸 수가 없다.그 이상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려서 뛸 수가 없는 것이다.또 한 친구는 달리기를 바라만 보았지 결코 트랙에 내려선 적이 없다.막상 달리고 싶은 충동에 땅으로 내려서지만 차마 발끝을 땔 수가 없다.이 둘은 천천히 자신들의 문제점을 들여다 본다.그리고 결론을 내린다.마라톤을 본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선생님에 의해 자신의 발이 400미터로 개조되었다는 것을 알게된다.또 한 친구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서 생애 최초로 바람을 가르는 스피드를 육화한다.그들은 곧 결론에 도달한다.... "내 스피드를 찾으면 된다는 것...그냥 존나 달려본면 된다는 것.."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에서 이눅씨 역시 자신만의 발명을 한다.일종의 '개념발명가',주인공인 사진기자는 처음에는 그 사실을 의아해한다.하지만 점차 이눅이 자신의 공간 전체를 '하늘을 나는 배'로 전환시켰다는 것을 알고 흥분하게 된다.발명가 이눅은 기존의 관념으로 보면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는 사람과 같다.하지만 그는 관습과 타인의 시선을 넘어서는 세계를 스스로 꾸려나가는 발명가였다.

김중혁의 소설은 트렌드처럼 되어 버린 주제를 생활 속 상징들을 가지고 직조해낸다.그가 책 후기에서 자신을 레고에 비유한다.이것은 그의 소설 속 소재들이 그 문화의 실타래 속에서 풀려나온 것임을 말한다.그래서 인지 그의 소설에는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코드들이 수시로 등장한다.이 소품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친근함과 재기발랄함을 느끼게 해 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이름일 뿐이다.<펭귄뉴스>에 나오는 펭귄뉴스 창단멤버들 엘비스 코스텔로(그래도 이사람은 좀 낫다..SHE라는 곡이 영화에 쓰여 인기있었으니)조이 라몬,시드 비셔스등에 대해 아시는가?( 라몬스의 조이라몬과 섹스피스톨스의 시드비셔스....펑크를 들으면 알고 아님 모른다) .<회색 괴물>에 나오는 1초에 13연타를 쳤다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에서 이눅씨의 공룡뱃속 같은 연구실에서 흘러나오던 사계의 연주자 앤드류 맨츠는...

 다양한 레고조각(저자가 말한 자신을 구성한다고 한..)들이 소설 속에 과시적으로 배치된 것이 과욕이라고 생각한다.또한 이러한 과욕은 시대적 배경까지 헛갈리게 한다.저자가 듣는 음악들이 주인공들의 삶 속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어색하게 만든다.예를 들어 <사 백 미터 마라톤>을 보면 소설 속 배경을 짐작하게 하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요즘은 아무도 정비 같은 건 받지 않는다.자동차의 동력원이 전기로 바뀌고 나서 자동차는 가전제품 같은 형편없는 골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생겼다' .추론컨대 소설의 배경은 가까운 미래이다.10년 -20년 뒤의 시대가 분명하다.작가의 상상력은 여기서 다시 90년대로 돌아온다.이 시대에 사는  오토바이 스피드 클럽 친구들이 '레이지 어게인스트 머신'을 듣는다.그리고 DVD방에 가서 그들의 라이브 실황을 본다.물론 작가의 상상력이 시대를 혼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상상력과 작가가 경험한 문화적 세계의 충돌은 어색하게만 느껴진다.마치 요즘 고등학교 폭주족 아이들이 듀런 듀런,신디로퍼 등의 음악을 듣는 꼴이다.하지만 어쩌겠는가.주인공들은 불쌍하게도 작가의 음악적 취향에 따라 시대 배경 쯤은 무시하고 옛날 음악을 들어주어야하니 말이다.<펭귄뉴스>의 주인공은 77년 생이다.그런데 대화 도중 이런 말이 나온다. "난 동시 상영관이 좋아.왼쪽 화면에선 텔레비전 크기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오른쪽에선 대형화면으로 <영웅본색>을 상영하는거야" ...푸하하. 77년생이면 <영웅본색>이 나왔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 찌질이들이었다.그들의 대화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나? 있다면 딱 한가지 경우다.작가가 스스로의 경험을 캐릭터에게 뒤집어 씌운 경우이다.작가 세대에 <영웅본색>은 강력한 문화코드였다.그게 갑자기 여기서 불쑥 튀어나온다.그외에도 작가가 불쑥 불쑥 들이대는 경우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펭귄뉴스>에서는 보드리야르에 대한 대중적 이해의 예를 그대로 인용한다.주인공은 TV 속 전쟁을 보며 삶이 따분하다고 느낀다.'모니터 속 전쟁' 개념은 언론이 시뮬라르크의 세계를 설명할 때 가장 빈번이 등장하는 예이다.'지난  걸프전 때 CNN은...어쩌구 저쩌구..'하면서 말이다.

또한 작가는 너무 직접적인 방법으로 '탈관습화된 삶'을 계몽한다.그 방향은 두고온 아날로그화된 삶이다.<바나나 주식회사><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등 여러 작품에서 작가의 주제에 대한 강박은 너무 직접적으로 소설 속에 반영된다.마치 이러저러한 우화를 들려주고 이렇게 되야되는거 아닙니까...라고 호소하는 듯 하다.이런 스타일이 꼭 나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그러나 작가를 구성하는 수많은 문화코드와 오버랩되면서 이 역시 작가의 과잉의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저자의 세대는 문화적 축복 속에 살았던 세대이다.집집마다 라디오가 있었고 초등학교 때 컬러 TV라는 것도 나왔다.또한 음반,영화 직배,해외 스포츠중계,PC,인터넷 등등을 통해 어느 세대보다 풍족한 문화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얻었다. 이것이 소설 속 한 요소로 표현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하지만 소설을 보면서 불쑥 불쑥 소설 속으로 치고들어오고 싶은 작가가 보여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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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7 14: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06-08-09 19:07   좋아요 0 | URL
조금 전에 읽기를 마쳤는데 조금 낯설고 황망하여(?) 다른 분들의 견해는 어떠한지 읽어보다가...추천 꾸욱 누르고 갑니다. 리뷰 좋네요. 저도 아날로그 세대가 가진 소재주의 소설로 읽었습니다. 결국은 그렇고 그런 소설은 쓰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또한 그렇고 그런 소설에 지친 독자를 위한 노력이지 않을까 비교적 너그러운(?) 생각을 해봅니다.

열걸음 2007-05-16 16:50   좋아요 0 | URL
펭귄 뉴스 마이 리뷰를 전부 읽어봤는데, 진심으로 공정한 유일한 리뷰인 것 같습니다. 추천 누르고 갑니다.
 
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악보 위 쪽에 뭐라고 씌어 있는지 읽어볼래? " 피아노 선생이 물었다.

창 밖에서 비명 소리가 두 차례 들렸다.석양이 엷어지고 있었다.나의 소나티네 소리는 짧고 강한 비명 소리에 흩어졌다.

안 데바레드-나의 어머니-를 그 곳으로 이끈 것은 손톱이 부서질 듯 칠판을 긁는 강렬한 절규였다.그 비명은 천년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를 깨웠다.엉켜버린 핏덩어리 상태로 가슴 속에서 가라앉아 있던 욕망이 깊고 으슥한 숨을 쉬었다. 엉컹퀴처럼 붉은 태양과 느릿 느릿 건너온 바닷바람도 그녀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바닷가로 향한 카페에서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나의 어머니 안 데바레드를 본다. 심각함과 호기심에 달뜬 그녀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다.카페 여주인이 돌로 구획된 도로 위에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바라본다.그녀의 시선은 지갑을 주운 사람을 목격하고도 귀찮은 일에 엃히기 싫어 모른 척하는 행인을 닮았다.나는 도로로 난 창을 흘깃 거리며 저녁 놀을 벗삼는다.하지만 내 마음은 카페 안을 행하고 있다. 안 데바레드는 포도주로 점점 얼굴이 저녁 놀을 닮아간다.앞으로도 자주 그럴 것이다.

그녀는 나의 피아노레슨이 끝나면 카페로 향했다.그리고 그를 만났다.그녀는 내가 새로운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하지만  모래언덕 끝에 있는 거대한 집안에 있을 때처럼 황량한 도시 속에서도 나의 어울림은 겉돌았다. 머릿속은 그녀를 기다리는  남자와 나의 어머니 안 데바레드로 가득했다.그녀의 삶ㄹ은 중대한 변화를 앞에 두고 있다.사실 그녀의 삶은 포름알데히드 속의 토끼 배아 같았다.부족함은 없지만 또한 열정도 없다.숨을 쉬고 있지만 무의식적 움직임에 다름아니다.마치 잘라 놓은 생선 머리가 잘려진 몸뚱이를 바라보며 아가미를 펄떡거리듯..

 충격적인 살인사건! 살인사건보다 더 날카로운 외침.목련꽃의 알싸함을 모두 앗아가버렸다.그녀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이 바뀐 것이다. 

그녀가 그를 만나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녀 속에 내재된 어떤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을까? 바다를 건너온 태양이 불은 열매가 되어 나의 얼굴을 덮고 있는 동안 내 머릿속은 그 생각뿐이었다.

때는 여름을 향하고 있었다.맑은 하늘이 도시의 배경이 되고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삶이 한번 돌아가서 다시 오지 않는 무엇이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사랑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그녀의 삶은 지나친 부러움과 자기 만족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 처럼 지루했을 것이다.화창한 햇살과 향기로운 바람도 그녀의 마음 속에서는 안개처럼 모호했을 뿐이다.그녀는 그를 만난 것이다.그는 처음부터 시간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보아 왔으며 그녀를 기다려왔다.아주 우연한 기회에 그녀가 그를 찾아낸 것 뿐이다.그 남자 쇼뱅은 철강노동자치고는 섬세한 사람이며 예의를 갖춘 사람이었다.나와 시선이 부딪치는 것을 어색해하긴 했지만...

그녀는 그 충격적인 살인 사건의 내막을 알고 싶어한다.그는 그 사건에 대해 조금 알고 있다.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알고 싶은 것은 자신의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변화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하루 하루 가까와 오는 결말에 대해서.그 둘에게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강렬한 자극은 떠나버린 버스의 뒷모습을 하고 있다.그녀는 어느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 약속을 무시했다.모래언덕을 넘어오는 길에 그녀의 눈가는 젖어있었다.쇼뱅과 그녀는 서로를 확인했던 것 같다.살인 사건의 남자가 여자의 목을 조르듯이 그녀의 목선에 머물던 그의 시선만으로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는 두려워하고 있었다.누구나 자신의 안에 있는 욕망을 만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모데라코 칸타빌레'의 삶은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다.그 부드러운 노래가락이 언제 끊길지 모른다는 불안같은 것이다.결국 강렬한 자극 역시 노래가락 처럼 흩어져 버린 것이다. 그녀와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결말을 예고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쇼뱅은 그녀에게 1분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순간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영원의 또다른 이름이다.그녀의 두려움은 그녀의 욕망을 다시 붙들어 맨다.그들은 서로를 죽임으로써 짧았지만 강렬했던 기억을 영원으로 돌린다.마치 살인 사건의 주인공들이 실제 죽음으로 사랑을 이루었듯이.

그녀는 더 이상 카페로 발길을 옮기지 않을 것이다.나 역시 피아노 선생에게 가기 위해 그녀와 함께 하지못할 것이다.맑은 날씨가 아무리 이어진다해도..아무리 붉은 태양이 바닷바람을 산호빛에서 아마빛으로 바꾸어 놓더라도... 카페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여주인이 문득 문득 바다 건너를 그리워 할 지라도...

삶의 배경은 또 다시 모데라토 칸타빌레...그 평온한 불안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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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6-04 20:29   좋아요 0 | URL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은, 늘 이상한 무력감을 안겨주곤 했는데...
이 책도 마찬가지였죠...

드팀전 2006-06-05 09:10   좋아요 0 | URL
다른 소설은 안봐서 모르겠어요.ㅜㅜ 무력감도 삶의 일부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