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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스님 지음 / 여시아문 / 200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4년전 겨울이었다.함께 일하던 젊은 친구가 그만 둔다고 술 한 잔 사달라고 했다.독립영화 공부하는 친구였다. 나름대로 생각도 깊고 성실함도 좋아보였다.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결국 12시가 넘어서 회사 앞 포장마차로 차가운 손을 부비며 들어갔다.둘다 안경을 쓰고 있어서 들어가자 마자 안개천국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홍합탕을 하나 시켜 놓고 그 친구 이야길 들었다. 결론은 이제는 영화일을 하러 본격적으로 뛰어들어야 겠다는 것이다. 난 술 잔을 권하며 '좋은 영화 만들어서 나중에 영화관 스크롤에 네 이름 보자...' 뭐 이랬던 것 같다. 한 참 주거나 받거니 하던 중 그 친구가 코트 주머니에서 얇은 책 한권을 꺼냈다. 오징어만한 크기에 오징어 보다 조금 더 두꺼운 책이었다. 책 표지에도 요란한 수식어 하나 없이 그냥 <선방일기>였다.
우연히 책장을 돌아보다 이 작은 책을 발견하고 다시금 뒤적였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저자인 지허스님이 몸을 맡기신 곳이 상원사 선방이었다. 올 여름 휴가를 다녀오면서 "추운 겨울의 이곳은 또 얼마나 고적하고 아름다울까?" 혼자 떠올렸던 말이 생각났다. 이 책과의 인연이 그렇고 상원사와의 인연이 그렇고 세상사의 많은 일들이 결국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느낀다.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던 그 젊은 친구의 이름도 책 앞에 써있다. 여자이름 처럼 보이지만 "해원"이었다. 별로 의심없이 썼었는데 이렇게 바라보니 불교적인 냄새가 많이 나는 이름이다. 그 친구는 좋은 인연을 많나서 또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지..그렇게 되길 바란다.
이 책은 이미 30여년전에 쓰여진 책이다.73년 신동아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라고 한다.지허스님은 서울대를 다니다 출가한 분이라고 하는데 그 외 기록은 없다. 책은 스님이 상원사 선방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상원사 선방에서 신출나기로써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이야기들과 동안거 동안의 이야기,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맹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그리고 해제날 모였던 스님들이 자신의 길을 따라 떠나면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요즘은 <인간극장>이라든가 <vj특공대> 하는 식으로 휴먼 다큐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많아서 스님들의 동안거도 많이 소개되었다.수행하는 장면 뿐만아니라 동안거동안의 일상적인 모습도 화면을 통해 많이 알려졌다.하지만 화면으로 느낄 수 없는 삶의 속닥함들이 있지 않은가. 지허스님의 일기 형식으로 그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결제일에 들어가며 스님은 선방생활과 병영생활을 비교한다.그만큼 규율이 엄격하다는 이야기일 것이다.선방의 규율에 따라 스님들은 자신의 업무를 담당한다. <선방일기>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큰 두 축은 바로 수도승으로써 진리를 따라가는 일과 또 인간으로써 깊은 산속에서의 생활이다.지허스님은 땔감준비하는 부목이었단다. 이 책에 보면 스님들의 인간적인 모습들이 많이 나온다.선승이 일년에 사용하는 생활비라든지 선방에서의 자리를 둔 위계, 다양한 군상의 스님들의 모습. 예를 들자면 늦게 출가한 스님 '늦깨기'와 어린 나이에 출가한 '올깨기'스님의 작은 갈등같은 것들이다. 세상사의 고통을 겪을 만큼 겪은 '늦깨기'스님과 어려서부터 절밥을 먹은 '올깨기'스님은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다를 것이다.처음에는 출가후배인 스님들이 어려워하다가 좀 지나면 '올깨기'들에게 대든다. '절밥만 축낸 올깨기'라고 놀리는 것이다.스님들의 세계에서뿐 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지허스님은 서로 견성하자고 독려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냐며 흐뭇하게 바라본다. 그외에도 스님들의 일상은 아주 재미있다. 원주스님 몰래 뒷방에서 감자구이 동호회를 연다거나 좌선으로 인해 신경통을 앓는 스님이 많다거나 하는 것이다.또 연륜이 있는 상방쪽 스님들의 좌선과 하방쪽 스님들의 좌선 풍경도 재미있다.당연히 후자들은 비비꼬고 졸고 하다가 죽비세례를 받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또 재미있는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승의 수행에서 오는 자기와의 싸움의 치열함,그리고 고독감같은 것들도 담담하게 쓰여있다. 단식스님의 위선을 통해 머리만 커버린 스님들이 가져오는 한계도 보여준다. 지허스님의 가장 큰 장점은 이렇듯 균형감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자신과 스님들의 생활과 고민을 하나씩 적어나갔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눈 앞에 강원도 깊은 산속의 설경이 그득해진다. 스님들이 찾고자 하는 진리가 우리 일상에서도 그대로 현현되길 바란다. 부처가 예수가 마호메트가 ...또 기타 선지자들이 그렇게 외쳤건만 강원도 산속의 평화가 세상에는 없다. 언제나 깊은 평화를 인류가 맛볼 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