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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원년의 풋볼 - 오에 겐자부로 소설문학전집 7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200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나름대로 책이나 CD를 사며 얻은 경험이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있을 때 구하자!" 이다. 음반매장에 가면 손에 몇장을 고른 후 하나씩 뺀다.마음속으로 이런 말을 한다. '다음에 1순위로 사야지' .그러나 그 다음이 되면 소량 수입된 수입CD들은 매장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에 아믈랭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 피아노협주곡 1,2번이 그런 예이다. 음반매장에 전화해보면 다음번 주문에 올릴게요 하는데 그게 언제가 될 런지 알 수 없다.
오에겐자부로의 <만년원년의 풋볼>은 내게 그런 책이었다. 몇 년 전 서점 일본 문학 코너에서 겐자부로의 전집을 보았다.서점 진열대 밑에 쪼로록 숨어있었다. <레인트리를 듣는 여인>과 이 책을 동시에 들고 고민하다가 한 작가의 책을 한번에 두 권사진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 도로 진열대에 꽂아 놓았다.몇 주 후 다시 가본 서점, 겐자부로의 전집은 종적을 감추었다.소문없이 실종되어 버린 것이다. 이 책은 알라딘에서도 오래도록 품절이었다.그러다 몇달 전, 알라딘에서 이 책을 얻었다.(지금 보니 다시 또 품절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츠카모토 신야의 영화<쌍생아>의 그로테스크함을 계속 떠올렸다.마치 일본 귀신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강한 색채를 담고 있는 글이었다.한문장 건너 계속 이어지는 겐자부로의 메타포는 소설 배경의 선명성을 더해주는 효과가 있다.또 그러한 강렬한 묘사는 소설 속 주인공들의 의식을 팔레트에 섞어 놓은 기괴한 물감처럼 펼쳐보여준다. 하지만 개별 장면의 묘사와 인물들의 감정에 대한 그로테스크함에 비해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정서는 낮게 깔린 어두운 먹구름을 연상시킨다.금새라도 천둥번개가 치고 광풍이 휘몰아쳐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위기감과 긴장감이 페이지 사이를 휘감아 돈다.첫장면 부터 시작되는 폐쇄적 느낌,그리고 이구아나의 껍질을 만지는 듯한 불쾌감에 대한 묘한 호기심, 이 두가지 요소는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이다.
소설에는 세가지 시대가 등장한다.민중봉기가 일어났던 1860년대,그리고 대동아전쟁 당시, 마지막으로 일본내 좌우대립으로 혼란스러웠던 1960년대이다.주인공과 그의 아내,그리고 동생 다카시는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며 현재 삶속에서 살아 있는 지난 과거의 암울함을 찾아간다.마치 추리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1860년대 봉기의 우두머리였던 증조부 동생의 삶과 조선인에게 맞아 죽은 S형의 행적이 현재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버랩된다. 그리고 이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유전되어 온 것을 찾아낸다.그것은 바로 '폭력'과 '공포' 이다. 전후 일본을 휘감고 있던 폐전국으로서의 우울함,단 한방으로 모든걸 끝장내는 핵 피폭의 공포, 폐쇄적이고 폭력적인 일본 사회에 대한 두려움. 전후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잔재해 있는 무의식적인 공포는 오에 겐자부로의 글을 따라 명치시대부터 다시 재구성된다. 물론 겐자부로도 결국에는 희망을 말하고 싶어한다.하지만 그 희망에 큰 기대는 없다.주인공 일행이 고향 마을로 향하게 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바로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때문이다.알코올 중독인 아내와 아이를 버린 죄책감과 친구의 엽기적인 죽음(머리에 붉은칠을 하고...겐자부로는 단 한번도 친구의 자살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며 죽음의 묘사로 친구의 죽음을 말한다.)으로 무기력증에 걸린린 주인공에게 동생이 건넨 유혹의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그리고 소설 말미 모든것이 파괴된 상황에서 다시금 아내가 남편에게 건내는 말 역시 그 <기대>이다.물론 주인공은 그것이 녹녹하지 않음을 알지만 수동적 순응을 한다.오에 겐자부로 자신이기도 한 주인공은 그러한 순응을 통해 불안감이 가득한 미래로 나아간다.
소설 속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은 동생 다카시이다.그의 삶의 편린 자체가 죄의식과 폭력,그리고 그에 대한 저항으로 가득차 있다.어떻게 보면 일탈적이고 매저키스트적 인간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러한 위악적 자기학대를 통해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자기 통일성이었다.타카시는 자기정체성을 얻기 위해 과거 민중봉기의 지도자 였던 증조부의 동생과 동일시 작업을 펼쳐나간다.마을의 청년단을 만들고 카리스마적인 행동으로 슈퍼마켓 천황의 권력에 도전한다.그러나 그의 작업은 퇴폐적인 낭만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자기 파괴적이다.그는 천황에게의 도전을 통해 마을에 만연한 패배주의의 그늘을 걷어내는데 일시적 성공을 거둔다.하지만 그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죽음을 통한 자기 통일성의 확립이었을 뿐이다.그의 죽음또한 책 서두에 나온 친구의 죽음처럼 그로테스크하다.그 둘은 죽음을 통해 <진실>을 완성한다.미성숙한 영웅의 비극적 죽음처럼 그들은 자기 희생이란 제의를 통해 자기완성을 이룬다.
그의 죽음에는 어떠한 면에서 순수한 영웅의 모습이 있다. 탈출구가 없는 암울한 세계 하에서 한 개인에게 더 가까운 것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통한 구출'이다. 애써 이것을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다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인생은 어차피 도덕 교과서가 아니고 '좋은 생각'류의 잡지가 아니기때문이다.평범한 일상속에서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억의 조작과 편의주의적 망각, 폭력에 대한 굴복과 음험한 상상을 하는가? 정체성 같은 것은 이미 난지도 쓰레기 위를 뒹근지 오래되었다. 자신의 순결한 내적 통일성을 위해 날카로운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추락의 끝자락까지 내려가 보길 두려워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이들의 이야기는 낯설고 기괴할 수 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근친상간,일탈,군중의 폭력성...이러한 요소들이 소설 전편에서 숨을 쉬겠다고 헐떡거린다.불편한 소설이다.하지만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소설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이런 말을 해야할 때가 올것이다.
...."진실을 알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