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Jimmy Fantasy 2
지미 지음, 백은영 옮김 / 샘터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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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1권>을 들으며 리뷰를 쓰고 있다.바흐의 음악과 왠지 지미의 <지하철>의 그림들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지하철의 계단처럼 오르막 내리막을 왔다갔다 하는 바흐건반 음악의 특징 때문일까?  아니면 이 책의 원제목인지 ( 혹은 부제인지 ?) "sound of colors" 라는 말때문일까? 책장을 넘기다 보니  바흐의 상승음계에 따라 한 여자 아이가 계단 위 상상의 나라로 들어간다.또 그 아이가 바흐의 하강음계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으로 따라 내려간다.   

전주곡과 푸가2번의 제 1 전주곡 -"나는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방향을 잃고 말았다"

  검은 굴 속 같은 지하철 안에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빽빽히 들어차 어디론가 간다.신문보는 아저씨,또 그걸 넘겨 보는 백발의 아저씨,첼로를 든 자매,곰 인형을 들어올린 사람,고민이 많은지 아님 치통을 앓는지 볼 한 쪽에 손을 대고 있는 젊은이.그런데 우리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어디갔지 ???  아 저기 뒤편에 그녀의 우산이 손잡이에 걸려 있네.사람들 속에 파묻혔구나.^^

전주곡과 푸가3번의 제2 푸가  -"어릴 때 말할 줄 아는 물고기를 키워 함께 바다밑을 잠수하고 낮은 목소리로 비밀을 속삭이는 꿈도 꾸었지"

소녀의 머리털이 한올 한올 떠올랐다.푸른 돌고래와 초록 돌고래가 동심원을 그리며 소녀와 원무를 추고 있다.주변의 눈이 동그란 물고기들로 줄을 맞추어 그들의 원무에 동참한다. 지하철 입구가 목욕탕 타일처럼 푸르다. 고대 등위에 누워서 썬탠을 하는 소녀.백사장 위의 썬탠보다는 고래등 모래사장이 훨씬 낭만적이다.소녀의 눈에 푸른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구름은 아직도 신비하게 여겨질까?"

전주곡과 푸가 5번 제1 전주곡- "어쩌면 우리도 작은 새처럼 훨훨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녀의 손이 6개가 되었나?아니 빨리 휘드르고 있구나.100개도 넘는 창문들을 배경으로 소녀가 날아간다.글렌굴드의 손가락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전주곡과 푸가 8번 제1전주곡- "이 도시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길을 잃고 헤맨다"

앙상한 가을 숲이다.계단이 뫼비우스 띠 처럼 이어진다.내려간 길은 결국 올라간 길이돼고 올라간 길은 종착엔 내려온 길이 된다.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소녀는 어디로 가고 있나. 전주곡이 흐느적 거린다.앞선 곡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이 방향을 잃은 음표들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푸가의 대답이 기다려진다.하지만 푸가는 더 무겁고 더 난망하다."계속 차를 잘못 타고 또 잘못 내린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의 지하철이 회색 승강장의 소녀에게 바람을 일으키며 제 갈길을 간다. "그래서 안개 자욱한 진흙밭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할 때도 많이 있다."

전주곡과 푸가 9번 제1전주곡 - "나는 비밀의 화원에서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꼬마병정을 찾았다."

소녀는 그네를 타고 글렌굴드와 바흐도 함께 건반위에서 가벼운 그네질을 한다. 잘 차려입은 병정인형이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내게도 어린 시절 커다란 인형이 있었는데.크기가 과장하면 1미터쯤은 된 소녀봉제인형이었다.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가져다 주신 인형.어린시절 그 인형과 함께 찍은 사진이 몇장 있다. 그런데 그 인형은 어디로 갔을까? 이미 세상을 떠난 건가?

전주곡과 푸가 10번 제1전주곡-"혹시 저를 위해 저녁 노을을 볼 수 있는 창가에서 시 한 수 읽어주실 분은 안계신가요?"

책이 사방에 가득 찼다.소녀가 창틀에 기대어 붉은 하늘을 본다.볼수 없다.글렌 굴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조그맣게 뭐라 하더니 소녀의 주문에 답한다. 음음음....알아들을 수 없는 그의 허밍은 자신을 위한 시이다. 그녀를 위해 시 한수 읽어줄 낭독 실력이 못되는 나는 그녀에게 바흐의  음악을 들려준다.붉은 노을을 닮은 전주곡과 푸가 12번. 한 음 한 음 노을 빛과 어우러져 붉은 빛이 짙어진다.종래에는 잦아드는 피아노 소리처럼 푸른 어둠이 내릴 것이다.

전주곡과 푸가 15번 제1전주곡."삶이란 이렇듯 예측하기 힘들어.우리 다같이 맘껏 노래나 부르자!"

모자쓴 코끼리가 춤을 춘다.펭귄은 일렬로 서서 쭉 미끄러져가고 곰돌이들이 탬버린으로 분위기를 맞춘다.돼지는 어느새 피겨스케이팅을 배운걸까.토기의 의상은 요즘 유행하는 줄무늬 스트라이프이다.

전주곡과 푸가 19번 제2 푸가 -" 나는 우울한 도시를 방황하며 열심히 찾아본다."

사람들이 길을 건넌다.비틀즈의 앨범 같은 표정이다. 모두 한 방향으로 걷는다.소녀만 다른 방향이다.저멀리 또 전철이 지나가도 그런 소녀을 바라보는  눈만 내민 소녀는 결국 나비가 찾는 꽃밭을 찾을까? 가끔 꽃집이 없는 도시를 생각해본다.난 퇴근길에 무었을 사 갈 수 있을까? 과일도 봉지에 담아 줄 때는 낭만적이었지만 지금은 검은 비닐이라 맘에 안들고...그나마 계절마다 마음이 동할 때 제철 꽃을 담아 가는 즐거움도 꽃집이 없다면 사라지겠지.꽃집 아저씨 아줌마 고맙습니다.좋은 꽃 좀 떼놓으세요.

전주곡과 푸가 24번 제2푸가-" 이제 나는 어떤 것에도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나는 애써 찾이 않아도 모두 볼 수 있으니까요."

소녀가 멀리 나가나보다.지하철이 도시 외곽형인거 같다.띠 하나 더 둘렀을 뿐인데.소녀가 미소를 띠운다.글렌굴드도 1집은 이제 다쳤다고 이제 밥먹고 또 하자고 마지막 곡에 힘이 들어갔다.열심히 딩동거린다. 하늘은 황금빛이고 길가에 가로수 잎이 깃발처럼 나부낀다.글렌굴드가 하도 힘있게 두드려서 나뭇잎이 다 떨어지겠다.

p.s)

연주는 끝이 났다.내가 원래 좋아하는 류의 책은 아니다.아포리즘에 대한 지겨움정도가 그 이유일게다.이 책에 나오는 글 역시 그런 종류중의 하나여서 그다지 인상적이진 않다.하지만 그림은 너무 예쁘다.처음 볼때 예쁘다 였는데 다시 한장 한장 넘기며 주변 사물에 까지 시선을 미치니 더욱 맘에 든다. 그림책 보는 재미는 그런 건가 보다.앞으로도 진짜루 좋은 그림책 있으면 추천좀 해주시라.(그림 책 너무 비싸서 함부로 살 건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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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9-12 10:45   좋아요 0 | URL
너무 잘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멋진 그림이 내걸린 듯한
리뷰네요.^^

비로그인 2004-09-12 16:58   좋아요 0 | URL
'지하철'을 사 볼 생각이었는데, 이제 이 음악도 함께 들어야겠어요!

비로그인 2004-09-13 17:12   좋아요 0 | URL
제가 반성하는 사유님 서재에 한번 낙서를 했었군요... 기억력 빵점... 아일랜드의 식상한 부분이 뭔가 있는데, 했는데 벅벅 긁어주셨군요. 그래두 아일랜드만한 드라마가 없어서리... 저는 감지덕지...포기않고 기회닿는대로 보려구요...스타일은 스타일대로 가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 작가도 홍상수같이 같은 걸 반복해서 지루하게 하는 일만 없으면 좋겠어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4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우석균 옮김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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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 포스티노>를 너무 좋아했다.기억에 한 세번쯤은 본 것 같다. 이탈리아의 소박한 리얼리즘적 전통도 살아있었고 배우들의 순박한 연기와 위트,그리고 영화음악까지... '아름다운 영화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적절한 예가 될 법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에 대해서는 이번 출판 전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영화와 소설의 완성도가 늘 정비례하는 것이 아니기에 내심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일 포스티노>에 대한 멋진 추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원제목은 <불타는 인내>이다.소설 속에 등장하는 네루다의 노벨상 수상 연설의 한 대목이다.작품의 제목은 이 소설이 영국인 감독 마이클 레드포드에 의해 영화화되면서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로 바뀌었다고 한다.영화제목은 이를 더 줄여 <우편배달부>였지만... 영화는 아카데이 최우수 영화상 후보에도 오르고 전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나의 책읽기에서도 영화 <우편배달부>의 이미지가  결국 소설을 잠식해 버렸다.소설과 영화가 몇몇 다름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쪽 이미지로 소설을 읽어나갈 수 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다 결국 그 나름대로 즐기기로 했다. 거기에 더하여 영화 0.S.T를 들으며 읽어버렸다. 소설을 읽는 동안 영화속에 보여지던 푸른바다와 마리오(마시오 뜨로이지 분)의 선한 눈빛과 네루다(필립누아레 분)의 뚱뚱한 여유로움이 떠올랐다.

영화와 소설이 다른 부분은 먼저 배경이다. 영화의 배경은 네루다가 망명생활을 하는 이탈리아 나폴리 어느섬 으로 설정되어있다.하지만 소설 속의 배경은 칠레의 이슬라 네그라라는 섬으로 설정되어있다.주인공 마리오 역시 소설 속에서는 17살의 청년이지만 영화속에서는 30대 청년으로 나온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30대설정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어눌하면서도 시심이 가득한 마시오 뜨로이지라는 명배우의 공때문이 아닐까 한다.물론 결말 부분도 조금 다르다. 영화 속에서는 마리오의 죽음이 조금더 직접적으로 그려진 반면 소설속에서는 조금 상투적이지만 간접적인 암시를 띤다.소설이 영화에 비해 내용상 조금 더 강조했던 부분은 정치적인 주제들이다.그렇다고 심각한 접근을 의미하진 않는다.작가 스카르메타가 칠레 아엔데정권의 붕괴에 대한 아쉬움과 그 부당성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와 소설에서 공히 가장 멋진 장면은 마리오가 베아트리사를 꼬시기 위해 메타포를 배워가는 과정이다.또 영화를 이야기해서 그렇지만 그 설레임을 뜨로이지는 너무도 잘 연기해냈다.마리오가 베아트리스에게 한 첫번째 메타포 "당신의 미소가 얼굴에 나비처럼 번진다." 라는 구절을 읽는 동안 꼬질꼬질하면서도 순박했던 뜨로이지의 얼굴이 눈 앞에 선했다. (그런 배우가 안타깝게 그리도 일찍 세상을 떠나다니..) 또 하나의 멋진 장면은 네루다에게 섬의 소리를 녹음해 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을 읽을 때 사운드 트랙의 그 부분을 들었다. 영화의 장점은 그 부분을 소리로 표현해낼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갈돌을 굴리는 바다소리와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의 발길질소리..그리고 그것들을 채녹하기 위해 안간힘쓰는 마리오의 얼굴들. 소설이 가진 들려줄 수없는 한계를 영화는 영상화,음성화해 내었다.반면 소설의 장점은 멋진 표현으로 이 부분을 감당해낸 점이다. 마리오가 녹음한 소리는 이런 것이다.

  ' 불평이나 일삼는 무정부주의적인 펠리컨의 날개짓' ' 해변의 야생 들국화 꽃받침에 앉아 쫑끗거리는 주둥이로 태양의 오르가슴을 만끽하는 날렵한 벌 떼 소리.' '불꽃놀이처럼 쏟아져 내리는 별똥별을 보고 개들이 하릴없이 짖는 소리' 등등.....  이 정도면 활자들이 소리를 내는 듯 귀에서 울린다.

영화에 비해 소설이 확실히 우위를 점유하는 곳은 바로 재치넘치는 대화와 해학이다. 거의 모든 장면 장면 등장하는 인물간의 대화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게 한다. 우리 소설 춘향전에 월매의 대사처럼 마리오의 수작에 넘어간 딸과 과부엄마가 나누는 대사는 박장대소 수준이다.과부와 네루다의 통화 그리고 마음 졸여한는 마리오와의 대화에서도 한번씩 툭툭뱉어지는 대사들이 웃음을 자아낸다. 또 영화에서는 많이 삭제되었지만 순박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성적묘사의 해학성등도 소설 읽는 재미를 더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나온지 좀 되어서 비디어가게 구석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안보신분들은 한번 꼭 보시고 영화를 아끼셨던 분들 역시 추억을 되뇌이며 영화만큼 멋진  원작소설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음....그리고 오늘 계속 들었던 사운드트랙에 대해 한마디. 사운드 트랙에는 귀에 익은 주제곡도 있지만 네루다의 시를 유명 영화배우,가수들이 낭송하는 트랙이 전반부를 차지한다. 스팅,웨슬리 스나입스.사무엘 잭슨,랄프 파인즈,앤디가르시아,줄리아 로버츠,마돈나.....  궁금하신분은 한번 들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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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8-30 18:33   좋아요 0 | URL
훌륭한 리뷰입니다. 네루다를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로서 읽고 추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시는군요. 참말로 잘 읽었습니다. 저는 아직 영화도, 책도 읽지 않았습니다. 좋은 것일수록 천천히 즐기자는 뜻도 있지만 역시 게으른 탓이지요. 덕분에 저는 책을 먼저 읽고 나중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군요. 이럴 땐 게으른 것이 나쁜 것만 아닌 것 같습니다. 리뷰에도 별을 준다면 서슴없이 다섯 개 모두 드리고 싶습니다.

마녀물고기 2004-08-30 19:22   좋아요 0 | URL
마리오가 네루다를 위해 섬의 소리들을 녹음하는 모습을 보면서 코 찡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네루다를 향한 마리오의 존경과 사랑이 네루다에게 무참하게 꺾이는 것 같아 가슴 아팠던 일도요. 며칠 전 민음사세계문학전집 몇 권을 사면서 이것도 넣을까 하다가 영화의 이미지가 너무 아름다웠던 탓에 그만 두었었는데, 엄.

파란여우 2004-08-30 22:16   좋아요 0 | URL
불행(?)하게도 영화와 책 둘 다 접하질 못했습니다..떠도는 소문만 접했지요. 언제 시간이 되면 완파하리라 마음만 먹다가 님의 멋진 리뷰에 반합니다. 저는 님의 리뷰를 보면서 이제 책을 골라야 할까 봅니다.허락해 주실꺼죠?^^

stella.K 2004-08-31 00:31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 때문에 여길 다시 오게 되었네요. 님은 가끔 제 서재에 들려주셨는데요. 바람구두님이 어찌나 님 자랑을 하는지...^^
<일 포스티노>는 저도 본 영화죠. 참 좋은 영화예요. 다시 한번 보고 싶네요. 근데 정말 님의 글을 읽으니 저도 책으로 읽어 봐야겠네요. 오래 전 저도 이 책 보관함에만 남아 놓고 있었는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페르디두르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1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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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한다.내 의식은 지금 그대로 인 상태에서 과거의 내가 되는거다.

때는 80년대,내 친구들은 어리숙한 중학생.선생님은 그들을 상대로 진실을 가장한 허구를 전달한다.난 그때 손을 들고 말하는거지.

"그건 상황의 한면만을  부각한 지배 이데올로그의 전형적인 왜곡방식인데요." ㅋㅋㅋ

물론 먼지나게 두드려맞겠지.그럼 의식있는 젊은이로서 폭력의 부당성에 대해 끝까지 준법투쟁을 하는거다.ㅋㅋㅋ 상상만해도 통쾌하다.

이런 상상을 해보는 건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20대 후반의 어린 선생님들의 개인적 가치관이 마치 진실인양 강요되던 교실이 억울해서이다.그때야 뭐도 잘 모르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그게 억울하다.지금 성인의 의식으로 몸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내 논리로 선생님들의 논리를 무찌를 수 있을 텐데.^^

소설<페르디두르케>의 주인공 유조,그는 어느 날 뜬금없이 미성숙한 소년으로 둔갑한다.어떻게 그럴수 있냐구.모른다.작가가 그렇게 그냥 만들어버렸다.그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니까.... 소년이 된 유조가 처음 겪게 되는 것은 "순진"과 "타락"의 갈등이다.시폰과 미엔투스로 대변 되는 두 친구가 이 이분법적 갈등의 전사들이다.결국 폭력에 의존한 미엔투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지만 승자 미엔투스 역시 피투성이의 낯짝을 갖기는 마찬가지이다.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된 것이다.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원시적 삶에 대한 강박증을 보인다.이름하여 "머슴"에 대한 동경이다.여기까지 읽었을 때 상황이 좀 개연성이 없긴 하지만 두 관념의 갈등과 대결 양상은 흥미진진했다.

그러나...이게 왠 말인가.갑자기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도르의 서문>이라니...이건 정말 당혹 그 자체였다.드라마 보고 있는데 갑자기 M뉴스의 엄기영 앵커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는 격이다.4장과 5장에 해당하는 <필리도르>이야기,중간에 끼어든 내용이 왠 서문이람? 어쨋거나 서문에선 갑자기 작가 곰브리치의 비평가들에 대한 불만과 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편박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그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이야기에는 총합과 분해의 대가인 필리도르와 안티 필리도르의 피튀기는 대결이 시작된다.그로테스크한 우화인데 결국 총합과 분해의 갈등은 어처구니 없는 마무리를 빚고 "뭐든 뒤집어 보면 다 어린애랍니다."라는 말로 결론 짓는다.총합은 결국 근대적 가치의 전형 아니던가....그리고 분해와 다양성이란건 탈근대적 가치가 지향하는 바이다.너무 이분법적이라고? 맞다.내가 그런게 아니라 작가 곰브로비치가 그렇게 만들었다.그는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제시한다.하지만 그가 과연 이분법의 신봉자였을까? 그의 이분법은 위악적일 뿐이다.

 소설은 유조의 첫번째 변신과 감금을 한 장으로 하고 그 다음 유조가 탈출하여 미엔투스와의 여정이 또 한 부분으로 나뉘는 듯 하다.물론 내 개인적인 구분일 뿐이다.첫장의 마지막은 현대적 여고생으로 대표되는 므워드지아코프 일가의 근엄함,세련됨,현대적 감성에 대한 처절한 조롱과 복수로 일관된다.유조는 관음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지탱하지만 결국 현대성에 대한 위악적인 보복을 가한다.그 보복의 방법은 삼각관계의 더러운 욕망을 폭로하는 방식이다.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욕망이 타인에게 폭로될 때 이는 붕괴로 이어진다.마치 더운 여름날 땅바닥에 떨어져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처럼.....

작가는 이 책에서 수시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들을 들먹인다.자신의 욕망이나 자아라는 것 역시 타아를 매개로 한 것임을 주장한다.또 우리의 삶이 내적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것을 부정하고 형식의 승리를 주장한다.또 총합에 대한 부정,완성된 의식에 대한 부정,미성숙에 대한 동경등이 수시로 등장한다.툭하면 등장하는 궁뎅이,낯짝,장딴지등은 관념성 속에서 무지되어 온 에로스와 육체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라고 볼 수 있다.대체 하늘에 궁뎅이가 걸려 있다는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책의 후반에 해당하는 미엔투스와의 동행은 유조의 이모 집에서 시작된다.미엔투스가 그리도 찾던 머슴이 등장하는 것이다.미엔투스와 머슴의 형...제되기는 결국 기존 체제에 대한 붕괴를 보여준다.하지만 이것을 계급투쟁의 상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80년대 같으면 이를 계급투쟁의 한 상징적인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이는 좀 더 광범위한 가치의 붕괴와 생성으로 바라봄이 옳을 듯 싶다.미엔투스와 머슴의 관계는 동성애적 성향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정상과 비정상의 구분,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성숙과 미성숙의 구분....작가는 이 모든 이분법적 구분에 위악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독설을 퍼붓는다. 소설은 주인공 유조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사랑의 도피로 미성숙에서 발을 빼고자한다.하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결코 미성숙과 불완전성의 미덕을 포기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작가는 늘 "인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미성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성숙된 문화,성숙된 인간,성숙된....무었을 존재의 끝으로 짐작해왔다.가벼운 예로 책을 보는 행위에도 성숙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라는 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다분히 완성이란 덕목을 위한목적론적이다. 곰브로비치는 미성숙과 불완전함이 성숙과 완성의 폐쇄와 답답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미덕으로 본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꼬인 세상 역시 지나치게 많은 성숙한 무었때문에 이렇게 막혀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추신) 그나저나....이 책을 보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다음 보는 책은 좀 쉽게 읽을 수 있는 녀석으로 골라야지....휘휘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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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인 (구) 문지 스펙트럼 4
로베르트 무질 지음, 강명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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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얇다.그래서 금방 보려니 생각했다.하지만 왠걸.... 마지막 장을 덮는데 열흘도 넘게 걸렸다.책이 어려워서 그랬나? 사실 그건 아닌 듯하다.가끔 이 핑계 저 핑계가 책장 넘기는 속도를 줄일때가 있다.그럴땐 갑갑증이 발동한다.갑갑증이 발동한다고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일상의 번잡한 대소사를 처리하다 보니 잠시도 혼자 있을수 있는 절대시간이 부족했다.오로지 화장실에 갔을때만 자유로왔으니 화장실은 나의 도량이다.그나마 변비도 없는 건강한 상태로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로베르트 무질에겐 무지하게 미안한 일이지만 책을 너무 쪼개서 본 듯하다.안그래도 나이가 들며 단기기억 장애의 증상이 나오려는 즈음 '쪼개어 읽기'는 책의 감동을 느끼는데 치명적이다.볼때 마다 앞 페이지를 넘겨야만 하기 때문이다.물론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귀찮아지기 마련.알듯 말듯한 상황에서도 그냥 접혀있는 장부터 보고 말았다.그래서 책을 본 느낌은 책의 배경 만큼이나 희끄무리하다.마치 습기 가득한 자동차 앞유리창 같다.^^

로베르트 무질이란 작가가 유명한 사람이라는 걸 안건 남진우의 평론때문이다.남진우가 김영하의 <검은꽃> 서평에 인용한 무질의 <통카> 한 구절때문에 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프루스트에 비견될 만한 작가라고 한다.푸....웃. 프루스트 안다.이름만.<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다.그것 말고 내가 프루스트에 대해 무얼안다는 말인가.그 소설이 유명한 무었이라하여 서점에서 찾아보았다.방대한 량에 질려서 1권도 꺼내보지 못했다.언젠가는 읽기되려나.....  프루스트 만큼 유명하다는데 비교대상도 잘 모르니 그의 진가를 알기는 아직 어려운 듯 하다.거기에 로베르트 무질의 책이 번역된 것도 그다지 많지 않다.독한 마음 먹고 오기로 달려들지 않는 한 무질과 얼마나 가까와 질 수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책<세 여인>은 초기 무질의 단편 세편이 수록되어있다. 소설의 배경은 전부 다 몽환적이다.그렇다고 반지의 제왕 시절은 아니다.과거나 현재에 있는 듯 하면서도 언제인지 알수 없는 시절이다.이 몽환적 배경은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좌우한다.무미건조하게 서술되는 사건의 진행조차 비오느 듯 뿌연 환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등장인물들 역시 구체성을 갖는 개인들이라 보긴 힘들다.전통적인 내러티브 측면에서 보자면 지루하기 짝이없다.앙겔로풀로스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 같다.그렇게 연관 지어가다보니 소설의 배경 역시 그 감독들이 만들었던 미장센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든다.철학적이라고 ...물론 철학적이고 지루하다.

소설은 여성성에 대한 좀 진부한 담론을 답습한다. 첫 소설에 나오는 그라지아나 포르투갈에서온 그 여인그리고 백치미가 넘치는 통카까지 신비화된 여성의 이미지가 존재한다.그나마 상대적으로 외지인들에게 눈길을 흘리는 <그라지아>의 여인들이 좀 덜할 뿐이다.그래도 그들의 감정은 배제되어있고 관음만이 존재할 뿐이다.소설의 대상이자 소설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여인들은 감성과 자연이라는 상대적 이분법에 의해 묘사되어진다.남자들이 합리와 정복,보수적 합리성을 나타내는데 비해 여성은 창조와 상생을 상징한다.그런데 이러한 도식은 사실 지나치게 전통적이다. 언제부터 이러한 도식이 존재했을까? 근대학문은 원시공동체에서 여성이 갖는 다산과 생성의 이미지를 자연의 순화과 병치시켰다. 그러면서 사적인 축적이 이루어지는 투쟁과정에서 여성은 그러한 이미지로 배제되고 이상향의 근원으로 높은 곳에 자리잡는다.하지만 실제 생활 영역에서 여성의 이미지는 이와는 정 반대였을것이다. 굳이 여성이란 말로 정치사회화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여성성'이란 말로 대체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페르시아의 여인은 존재론적 불안과 타인에 대한 안정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이의 욕망추구역시 흐르는 물이 땅으로 사라지듯 세상의 안정을 위해 녹아 없어진다. 목적론적인 세상에 대한 완충으로 여성성의 유연함에 기대는 것.이건 또 얼마나 진부한가.통카는 이를 더 극단적으로 형상화한다.여기 보이는 신비한 여인 통카는 이성과 합리의 이름으로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지극히 순응적이고 탈이성적이다.북치고 장구치고 도랑치고 가재잡는 일은 남자의 몫일 뿐이다.통카에 대한 불신으로 그녀을 보낸 주인공은 통카의 진정성과 인간의 범주를 뛰어넘는 선의지에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듯 눈이 번쩍뜨이는 계기를 갖게된다. 나는 이러한 지독히 관음적인 여성성에 대한 응시가 과연 항구적 변화의 길이 될는지 의문이다.신비주의적 관점이 주는 현실성에 대한 깨우침은 결국 순간의 감동내지는 작심삼일형의 해탈 아닐까 싶다.

로베르트 무질이 대단한 사람이라 내가 그의 속내를 다 읽어내기엔 내공이 부족하다.그의 단편집 하나만으로는 더욱 그렇다.그의 서술방식과 설정이 기존 형식과 차별성을 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한다.하지만 내게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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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양윤옥 옮김, 박철민 그림 / 좋은생각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라쇼몽'을 처음 읽었던 건 대학4학년 때일이다.이문열씨가 묶은 해외 단편집 중에 수록되어 있었다.책을 넘기다 '라쇼몽'을 발견했을 때 아쿠타가와의 이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보다 먼저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생각났다.

 당시는 일본 문화개방 전이라 일본 영화를 본다는건 또 하나의 문화적 특권의 상징이었다.대학 영화동아리들 마다 무슨 무슨 영화제 하며 일본영화를 상영했다.나름대로 금지된 문화에 대한 엿보기를 기존 보수세력에 대한 저항으로 또는 대학이란 상아탑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적 우월성으로 여기는 분위기 였다. 당시 대중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세계 영화계에서 인정을 받은 구로자와 아키라를 모를 수 없었다. 허름한 강당에서 상영하는 조악한 구로자와 감독전은 요즘말로 '한 영화 한다'고 자부하고자 하는 이들의 놀이터였다.나 역시 자막도 없는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 두어편 (<꿈>과 <7인의 사무라이> )을 그들과 함께 보았다.

<나생문>이라고 한문으로 쓰는 <라쇼몽> 역시 구로자와 감독의 영화로 세상이 널리 알려졌다.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던 작품으로 기억한다.하지만 영화 <라쇼몽>과 소설 <라쇼몽>은 다른 작품이다.이 단편집에 수록된 <덤불 속으로>를 구로자와 감독이 새롭게 각색한 것이 영화<라쇼몽>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접고 소설 <라쇼몽>을 처음 봤을 때 이야기로 돌아가야 겠다.

처음 그 짧은 글을 읽었을때 '어..뭐 벌써 끝이야.'하는 말을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영화와 소설의 차이를 모르고 있었던 시절이므로 도대체 이런 간단한 시나리오로 어떻게 장편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소설 <라쇼몽>은 각색하지 않고 장편으로 만들기에는 분명히 구성이나 소재가 짧을 듯 하다. 영화의 근간이 된 <덤불 속>은 수많은 논란을 야기 시킨 작품이다.어찌나 그 논란이 컸던지 100년이 지난 최근에도 한국 정치인들 입에서도 그 말이 나왔다. 열린 우리당의 정동영과 김근태 의원이 입각하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아전 인수식 해석을 하며 '라쇼몽'을 언급했다.(정확히는 덤불 속으로겠지만) 이 소설은 늘 진리는 없다라는 식의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 인용된 듯 하다.세상에 절대의 진리는 없으며 단지 해석만이 있을 뿐이라는 주장들 말이다. 대개 반역사적인 행위나 야합적인 정치적 선택에 있어서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이런 주장들을 펼쳤다.그러면서 말한다. '역사가 판단해 줄 것이다' 자신들의 행위는 구국의 결단이었다.뭐 이런식으로 말이다. <덤불 속>을 상대적인 가치관의 해석으로만 판단하면 결국 그들의 행위도 다 나름대로 인정하고 수용해주어야 하는 것이다.과연 세상은 순수한 상대성과 해석만이 존재하는가?

이 단편집에서 재미있게 본 작품은 <투도> <갓파>이다.먼저 <투도>는 이기적인 인물들의 묘사와 설정이 재미를 준다. 샤킹이란 여자를 중심으로 타로와 지로형제,그리고 샤킹과 부적절한 관계를 이루고 있는 양아버지와 할멈.이들은 샤킹의 음모에 따라 성을 털러 간다.샤킹의 음모는 타로와 지로에게 형제를 죽음으로 몰고가야할 당위를 만들어낸다.서로의 죽음을 내심 기대하며 갈등하는 두 형제의 심리묘사가 아주 뛰어나다. 아쿠타카와가 소설인물들에게 부여한 캐릭터는 인간의 이기적인 양면성이다.샤킹과 타로형제들 역시 작가의 조종(?)에 의해 선악의 문제를 쉽게 넘겨버린다.작가가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에서 언급한 '선악은 없으며 쾌불쾌'만 있다는 가치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구한 할멈을 적의 무리속에 홀로 남겨두고 도망친 양아버지,그는 소설의 마지막 반전을 위해 중요한 인물이 된다.백치인 아코기가 낳은 아이(아코키는 지로의 아들이라 믿는다.) 가 그의 자식일 줄 이야...^^

<갓파>의 경우는 소설<점귀부>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 가족의 정신병력에 기댄 작품이다.<갓파>를 쓸 당시 아쿠타카와 역시 심각한 신경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작가는 <갓파>라는 일본 민담에 나오는 특이한 존재를 현재에 복각시킨다.작가는 갓파들의 세계를 인간 세계의 대응점으로 두면서 후자의 세계에 대한 신랄한 조소와 비판을 날린다.인간들의 가식과 차별,예술에 대한 검열등이 갓파세계에서 비꼬아진다.자본가에 대한 풍자는 거의 컬트수준이다.실직된 직장인은 직공 도살법에 의해 잡아먹는다는 것이다.자본이 인간을 대상화 시킨 것에 대한 아쿠타카와식 상상력이다.당시 맑시즘에 관심이 많았던 탓이 아닐까한다.그외에도 작가는 니체와 스트린드베리 등의 종교에 대한 관점등을 갓파세계에 비추어 말한다. 처음 주인공은 자신의 세계와 다른 갓파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 시선으로 대한다.하지만 점점 갓파의 세계에 동화되어간다. 하지만 친구인 토크의 죽음이후 원래 살던 인간세계로 돌아오지만 결국 정신병원 행이다.그래도 주인공은 갓파들과 현실세계에서 즐거운 교류를 갖는다.그들이 찾아와 주니까...

아쿠타카와는 지금으로 부터 한 세기전 사람이다.당시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고 후발제국주의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때였다.아마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이었더 우리의 근대문인들도 아쿠타카와의 글을 일본어로 읽었을 것이다.그때 그 사람들은 이 글을 어떤 느낌으로 읽었을까 궁금하다.아쿠타카와가 정치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아포리즘을 읽다보면 그가 한 세기는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요즘 일본에서 뛰는 작가들은 과연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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