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44년의 비원 - 새로 읽는 고종시대사
장영숙 지음 / 너머북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이책은 총 12장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약 380쪽의 분량과 미주가 같이 책 뒷쪽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고종의 재위기간 44년을 망라해 그의 개화 근대화 정책에 대한 전개와 인재등용, 당시 일어났던 정치적 격변, 즉 운요호 사건, 강화도조약,임오군란,갑신정변, 갑오경장, 청일전쟁, 러일전쟁, 을미사변,아관파천,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그리고 고종 독살설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다룹니다.
각각 책 한권이상이 될 주제를 다루다보니 너무 겉핥기 식으로 지나가 실망스러운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조선을 ‘망국(亡國)으로 이끈 군주로 알려져 있고 따라서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조선의 임금입니다.
그가 이루려고 했던 조선의 부국 강병책이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재위기간동안 일제에 의한 조선병햡이 이루어져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조, 숙종과 더불어 가장 오랜기간 재위에 있었던 군주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고종재위기간 중 일제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맺어지고 을사늑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조차 ‘망국’에 가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고종 당시 중요한 정치가로 흥선대원군과 민비가 있지만 이 책애서는 그저 조연으로만 다루어집니다.

흔히 극렬한 수구 정치인으로 알려진 두 인물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이책에서 흥선대원군이 정권에 집착하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과연 그런 인물인지는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고종은 강고한 유교사회인 조선을 그래도 나름대로 근대화시키고 강한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한 군주이기도 합니다.

다만 충효를 기반으로 덕치를 강조하는 유교정치와 근대적 입헌정치 사이에서 방향을 잡지 못한체 자신이 생각했던 근대화와 부국강병책울 이루어보지 못한 체 생을 마친 비운의 군주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 다른 글에서도 여러번 언급했듯, 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조선이 대처를 못한 것은 정조 사후 만연한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악영향이 컸습니다. 안동김씨, 풍양조씨, 반남박씨 등 소수의 세도가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농단(壟斷)하며 부정축재를 일삼고 군사력을 기르는데 소홀히 한 영향이 큽니다.

사실 조선 유림 중 척화세력들은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전쟁의 패배와 국치를 당하도록 내버려 둔 댓가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이미 멸망한 명을 사대(事大)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이후 발생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본인들의 무지로 전란을 초래해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했으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기존의 철학을 무시하고 새로운 철학을 찿는 것이 일반적인데 조선의 사대부들은 일반적이라고 할텐데, 조선의 사대부는 그렇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명이 멸망하고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 왕조인 대청제국이 들어섰지만, 조선의 사대부 특히 보수 척화론자들은 화이론(華夷論)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체 유교적 의리만 강조하며 망해 없어진 명에 대한 사대만을 강조하고 조선에 굴욕을 안긴 청나라를 무시하는 국제정세상 일어날 수 없는 인식을 계속 고수했습니다.

군신의 도리가 의리를 저버리면 안된다고 하면서 백성들은 철저하게 저버렸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대청제국은 17세기 강희제 재위기간 동안 몽골의 서쪽 준가르제국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였고 러시아 제국과 국경선을 확정짓는 등 동아시아 맹주로서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나 조선은 이들이 오랑캐라는 이유로 무시하고 당시 북경에 들어왔던 서양의 문물에 대해 백안시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무시의 결과가 위기로써 고종재위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따로 군사를 키우지 않고 농민들을 차출해 병력으로 차출하던 조선이 재대로 된 군사력을 가지고 있을 수 없었고, 19세기 서구 제국 열강들과 일본은 근대화된 육상병력과 대양해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종은 유교적 전제군주로서 주권이 강화되기 위해 군주권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근대적 정치행정제도를 도입하는데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유교적 전제군주인 고종에게 독립협회에서 요구한 의회의 설립요구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요구였고, 이미 지식인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알고 이를 실현해 보려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어 정치적 불안정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 이유도 전제군주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지키려하는 고종 앞에서 ‘입헌군주제’를 요구했고 고종은 이런 요구를 왕권에 대한 쿠데타로 규정하고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 등을 참살하게 됩니다.

부국강병을 위한 근대화와 서구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자신의 전제군주권이 약화되는 건 볼 수가 없었던 고종은 따라서 개혁 자체가 흐지부지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서구적 근대화와 봉건적 전제군주제는 서로 맞지 않는 짝이니 말이죠.

두번째는 군사력 양성을 위해 끊임없이 외세에 의존한 점입니다.

고종은 대원군 섭정기를 지나 친정을 시작한 이후 유선 일본에 도움을 요청해 신식 군대를 만듭니다. 그리고 구식군대를 차별하고 냉대하는 바람에 군사반란이 일어납니다( 임오군란).

국가의 재정이 빈약한 가운데 아무 대책없이 신식군대 양성부터 하다보니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게 되고 이 두나라가 조선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고종은 임오군란을 통해 통치권의 위기를 경험한 이후 신식군대 양성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이후 명성황후의 외척인 여흥 민씨 세력과 오로지 왕권 강화에만 몰두 합니다.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난 이후에도 변변한 군대가 없던 조선은 청나라애게 군대를 요청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청의 노골적 내정 간섭이 시작되고 청과 일본간의 탠진조약에 따라 청순과 일본군이 조선땅에 주둔하게 됩니다.

수백년간 소중화를 자처하며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하던 사대부 양반들의 사대부의는 19세기 말 청의 노골적 내정간섭을 초래했습니다.

북양대신 이홍장과 원세개는 조선이 오랜기간 중국을 숭앙해오던 속국이라면서 완전한 속국으로 정치에 간섭하겠다고 하자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실제 개화파 양반인 김윤식, 어윤중 같은 이들은 청의 이런 요구를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500년 사대의 결과가 어처구니없이 나타난 겁니다.

저는 이 상황을 되짚어 보고, 조선 내내 중국에 사대를 했어도 ‘사실상(de facto)’ 조선이 독립국이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말장난인지 실감합니다.

고고한 유교 도덕정치 한다고 조선 내내 사대부와 조선 지배층은 군사력을 키우는데 소홀했습니다.

더구나 16세기 임진왜란, 17세기 병자호란을 당해 국토가 절단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도 사대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선후기로 갈수록 군대도 안가고 백성들애게 과도하게 세금을 물리고 재물을 빼돌려 부정축재를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앉아 ‘덕치’를 해야 한다면서 자신들이 저지르는 일과 정반대의 주장을 했습니다.

위선적입니다.


결국 국력의 근간인 군사력이 없는 조선은 청과 일본이 동학농민항쟁을 빌미로 조선에서 전쟁(청일전쟁)을 할때도 속수무책이었고, 러시아와 일본이 동해에서 해전을 벌이고 일본이 경의선과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요구해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100만명에 달하는 반면 고종이 겨우겨우 양성한 조선의 군대는 겨우 3만 뿐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사대부가 의사결정하던 전제군주제 국가이므로 19세기 말 조선의 이런 참혹한 국력의 상황은 전적으로 사대부와 국왕의 잘못입니다.

너무 명백해서 논란조차 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제대로 된 군대가 있었으면 청일전쟁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고 고종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러시아 영사관으로 파천할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19세기 조선사를 읽으면 유학이라는 학문체계가 서양의 물리적 힘을 당해낼 수 없는 허황된 체계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조선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던 주자의 유학은 사람의 내면은 보는지 몰라도 삶의 조건 따위는 너무나 무관심했습니다.

지금 이런 저의 평가는 21세기의 관점에서 보니 이런 단점이 보이는 것이지만 유교가 전부였고 어설프게 서양을 알던 19세기 말의 조선에서는 자신들이 구축한 세계가 무너지는 절망감과 황당함을 느꼈을 것으로 보입니다.

소수의 양반들이 책임을 방기한 체 의무만 짊어진 다수의 백성들의 생산력에 빌붙어 살던 시대가 조선시대라고 거칠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물질적인 것을 만들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우대하지 않고 착취하면서 고담준론만 이야기 하던 일하지 않던 양반들이 상층을 이룬 사회가 조선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19세기 조선이 왜 ‘민란의 시대’라고 불리는 지 그 원인을 고종시대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며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고종시대사 관련 저서 몇가지 소개합니다.

고종시대의 한러관계사 관계해서 감영수 교수의 책 2권을 주목합니다.

미쩰의 시기(경인문화사,2012)- 을미사변을 일본 자료 뿐만 아니라 러시아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책입니다. 명성황후가 기존의 해석대로 과연 수구파만을 대변한 봉건세력이었는지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100년전의 세계일주(EBS Books,2020)- 친러파이자 근왕세력이었던 민영환이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참석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을 요청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마찬가지로 러시아 사료가 인용되었고 당시의 기록인 ‘해천주범(海天秋帆)’을 기반으로 재해석 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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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후예들 - 티무르제국부터 러시아까지, 몽골제국 이후의 중앙유라시아사
이주엽 지음 / 책과함께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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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8년 몽골의 수도, 대도(현재 북경)이 명에 함락된 이후 쇠퇴의 길을 걸은 몽골제국이 이후 근세와 근대 유라시아( 동유럽, 러시아에서부터 청나라까지) 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고찰한 전문서입니다.

몽골제국의 제도와 군사력 그리고 몽골제국 칭기스칸 칸의 후예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해 온 나라들이 카자흐 칸국이나 무굴제국, 그리고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의 유목민족들이 거의 600여년 이상 내려왔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된 것입니다.
한때 유라시아를 호령했던 몽골제국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테지만 우리는 홀연히 그들이 사라진 걸로 생각해 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상적인 것은 몽골인 후예라는 정체성은 몽골어와 직접 연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서아시아의 몽골인 후예들이 투르크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몽골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역사서에 자신들이 몽골인 혹은 징기스 칸의 후예라고 기록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국어를 모르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4세가 아직도 자신의 정체성을 한국인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서장을 제외하면 4부 총 11장으로 구성된 이책은 본문이 288쪽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입니다.

읽어보니 사실. 총 11권의 책이 되어야 하는 내용을 압축해 넣은 책입니다.

작은 책이지만 두가지 점에서 가독성은 좋지 않습니다:
첫째, 세계사를 서유럽사와 중국사 위주로 배운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에서 설명하는 각 국가들의 왕 이름이나 정치체제 등이 너무 낯섧니다. 내용을 읽기 어려울 정도로 말입니다.

한편으로 유목사회이자 이슬람 문화권에 대해 우리가 너무 아는게 없어서 이렇게 읽기 힘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 권에서 왕을 뜻하는 칸(Khan) 이나 군사령관을 뜻하는 아미르(Amir),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손을 가리키는 사이드(sayyid), 이슬람 성인을 말하는 호자 (khoja) 등 생소하지만 중요한 용어들을 몰라서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웠습니다.

서유럽에서 중동을 보는 시각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 우리의 무의식에도 여과없이 들어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유목민족들이 그리고 대부분 이슬람을 믿는 이들을 막연히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온 것이 사실이고 사실 중앙아시아 역사나 몽골제국사와 같은 분야에 대해 공부하는 분도 많지 않아 이해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번째로 이 책이 엄청나게 압축적으로 저술된데다가 전쟁사 위주로 세력권 다툼과 정복 복속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서 역시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입문서로 생각하고 집필하신 듯한데 각 장이 한권의 책으로 나왔으면 내용이 알차게 들어가게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이미 오스만제국과 대청제국에 대한 몇권의 책을 읽은 저로서는 이 제국을 약 10여 쪽 내외로 서술하는 것이 맞는 방법인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특히 20세기 초 제1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발칸반도는 수백년간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충돌과 민족갈등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오스만 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와 대항하며 유럽의 동부전선을 이루게 됩니다.

또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19세기 이후 계속 남하하다가 크림반도에서 오스만제국과 영국 프랑스와 부딪치게 되는 전쟁이 크림 전쟁이죠. 이후에도 러시아와 영국은 러시아의 동진으로 중앙아시아에서의 패권 쟁탈을 벌입니다.

그 와중에 러시아는 크림칸국 카자흐 칸국등을 합병하면서 시베리아로 동진합니다.

만주족은 몽골인과 공동으로 대청제국을 세우고 몽골 문자를 가져와 만주문자를 만들었으며 준가르 고원의 오이라트족을 토벌해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넓힙니다. 또한 국경을 맞닿은 러시아와도 17세기 이후 국경을 확정짓습니다.

잠시 생각나는 것만 적어보아도 내용이 복잡합니다.

저자가 강의록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했다고 했는데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고 그래서 책이 두꺼워진다면 감수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추정한 것인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사를 공부하려면 최소 러시아어, 몽골어, 아랍어, 이란어, 만주어, 중국어,투르크어, 우즈벡어, 터키어 등을 알아야 하지 않나 추정합니다. 거기에 예전 유럽인들이 기록한 글을 읽으려면 영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도 알아야 되니까 만만한 작업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먼나라 같은 이야기도 외부세계를 알기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극우 기독교에 경도되어 있는 일부의 생각과 시각 확장을 위해서라도 다른 사회, 특히 이슬람 사회에 대한 책은 지속적으로 나와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른 한편 화이론적 사고에 아직도 빠져서 잘 알지 못하는 유목사회애 대한 편견을 걷어내기 위해서라도 유목민족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책이 지속적으로 나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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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oners of Geography: Ten Maps That Explain Everything about the World (Paperback) - '지리의 힘' 원서
Tim Marshall / Scribner Book Company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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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분야에 정통한 영국 출신 언론인이 집필한 지정학(Geopolitics) 입문서입니다.

총 10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고, 마지막 결론이 이어서 나옵니다. 깊이는 없지만 지정학에 관심이 있는 일반독자들이 일독할만한 책입니다.

이 책의 번역본이 왜 베스트셀러에 올랐는지 이유는 알겠네요.

정치가 사회를 이끄는 리더들과 정치가들의 의사결정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결정은 지리적 환경에 결정적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물리적 환경( Physical Geography)의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이 책은 강조합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에 대해 관심이 있는 현재, 이책을 읽지 않기는 어려웠습니다.

이 책에 언급한 지역 중 러시아, 중국, 미국, 한국과 일본, 그리고 북극지역이 특히 흥미롭고 가치있는 분석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러시아의 역사는 얼지 않는 부동항을 얻기위해 노력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북유럽 평원지역에서 기원한 이 슬라브 민족의 나라는 북해에서 에게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진출하려 했지만 불발되었고 이 와중에 크림반도를 두고 서유럽 그리고 오스만투르크 세력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크림전쟁,1853-1856). 러시아는 이후 북해의 관할권을 두고 터키와도 전쟁을 벌였고, 제1차세계대전(1914-1918)에도 유럽의 동부전선에서 터키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우랄산맥 서쪽 지역에서 부동항 확보가 어렵게 되자 이후 러시아는 부동항을 얻기 위해 청나라와 조선에 접근합니다. 러시아가 연해주 지역을 장악하고 시베리아 철도를 완성한 것도 모두 부동항 확보의 일환입니다.

일본과도 연해주와 만주지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1904-1905)을 벌였지만 한반도를 통한 부동항 확보에 실패하고 그 결과로 러시아의 영향력을 밀어낸 후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하게 됩니다.

러시아는 동해와 쓰시마해협을 통해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교역루트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19세기 이 동남아시아 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영국이 거문도를 일시 점령하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습니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한국 근현대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열강입니다.

중국이 아프리카와 파키스탄 등 친미적이지 않은 국가들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세계의 초강대국 자리를 노리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경제발전에 매진하고 있는 중국은 이미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의 최대 교역 파트너이며 가장 큰 규모의 투자를 하고 있는 국가입니다.

미국과 대만문제로 긴장감을 높이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에 철도를 건설하고 나일강에 댐을 건설하는 등 영향력을 겅화하고 있습니다. 세계교역의 핵심 교통로인 말라카 해협과 파나마 운하가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자 경제발전에 중요한 자원 수입을 위해 아프리카 남미의 나라들과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파키스탄에 도로를 연결하고 항구를 조차해 말라카 해협을 우회할 구상을 하고 있고 파나마운하를 대신할 니카라과 대운하를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에게도 중요한 외교파트너로 이미 한국의 교역에서 중국은 최고의 위상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아시아 지역에서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받지 않을지 주시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전쟁 휴전을 위해 38도선을 긋고 한국을 분단시킨 것도 결국 당시 공산주의 세력이던 중국과 러시아를 한반도를 기점으로 봉쇄(containment)하기 위해서였고, 제2차세계대전의 전범국이던 일본에 재무장을 사실상 허용하는 것처럼 태도를 바꾼 것도 결국 일본을 방패삼아 태평양에서의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저지가 발칸반도, 중동지역에서 기자생활을 했고 런던에 거주하다보니 사실 한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전문성이 떨어지는 인상입니다.

최고의 동맹국으로 알려진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서진을 계속하면서 프랑스에게서 루이지애나를 포함한 미시시피강 유역을 구입하고, 멕시코와 전쟁을 해서 캘리포니아,아리조나, 뉴멕시코 지역을 빼앗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진을 계속해 하와이 왕국을 미국으로 통합시키고, 괌과 필리핀까지 식민화하면서 중국해안지역까지 영향력을 확장합니다. 19세기 초부터 산업화관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와 목화농장(cotton plantation)을 기반으로 면화를 영국 등지에 공급했으며 태평양으로 진출해 포경업을 시작해 러시아 연안인 오오츠크, 배링해 그리고 일본과 조선사이의 동해 근해까지 진출합니다. 그리고 중국에 모피를 교역하기 위해 수달과 바다표범 등을 남획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이들 상업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상의 조그만 군도들을 식민화하고 교역로 확보를 위해 필리핀을 식민화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전쟁 당시 미국은 자신들이 19세기 이후 100년 이상 누려온 태평양에서의 이익 보호를 위해 해양으로 진출하려던 중국과 러시아를 봉쇄할 수 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잘 알지 못하고 알아야 할 이유가 없던 조선의 사정에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한국은 1945년 해방 당시 일본에 속해 있었고 미국이 일본을 점령( occupation)하고 통치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남쪽을 점령하고 군정을 실시한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이런 점령통치를 하기 전 이미 하와이와 괌 쿠바 필리핀 등을 점령통치한 경험이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도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전에 이미 청일전쟁 이후 대만(1895)을 식민화했고, 현재 홋카이도 지역인 에조치의 경우 도쿠가와 막부시절부터 이미 식민화가 되었습니다.
이미 2번의 식민통치 경험을 가지고 조선을 식민화켰고, 이후 중국을 본격 공략하게 된 것입니다. 제1차세계대전의 승전국 중 하나였던 일본은 패전국이었던 산동의 청도지역을 지배하던 독일세력을 몰아내고 본격 대륙침략을 위해 만주국을 세웁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1917)이후 지속된 러시아 적군과 백군과의 내전에 참여해 시베리아 출병을 합니다. 러시아 백군을 지지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출병한 제1차대전동맹국은 일본 뿐 아니라 미국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역사적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북극지역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와 얼음이 녹아 생길 수 있는 저지대 침수와 기후변화 등 부정적 영향에만 집중하던 이전의 시각과 다르게 이 책은 북극에 얼음이 녹아 생기는 각국의 국익다툼과 경제적 효과에 집중합니다.

우선 얼음이 녹아 중국과 북미를 잇는 북극항로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점과 아직 극한의 환경으로 탐사를 못해 개발되지 못한 자원에 대해 이미 거대 에너지 기업들이 상업적 이용을 위한 탐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미 냉전시대부터 북극지역에 도시를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이지역의 이익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하고 있고 북극지역에 영토가 있는 캐나다와 덴마크(그린란드)가 이 지역의 주권과 이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주시해야 합니다. 특이하게도 미국은 북극지역의 이권에 대해서는 러시아만큼 적극적이지 않고 무관심합니다.

물론 이책이 2015년 저술되었으니 현재도 그와 같은 입장인지는 확인이 필요한 사안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자연지리적 환경요인 그리고 정치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 사실 어느정도 기반지식이 필요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를 읽으면 늘 대하는 것 중 하나가 지도이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원인과 과정을 추적하다보면 국가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 그에 대응해야만 하는 통치자를 비롯한 정치가들이 보입니다.

외교정책, 경제정책 등 국가 정책이 결국 정치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이 와중에 국가간 충돌이 일어나고 전쟁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공식적 의사결정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 정치를 알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와 지리환경을 동시에 고찰하는 지정학이란 새로운 학문영역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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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후 한국의 주거문화에 대한 책입니다. 360여 페이지의 적당한 두께의 책으로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실에서 일했던 서울시립대학교 박철수 교수가 입수한 주택공사 내부 자료의 인용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삶의 공간이 해방 이후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소위 ‘고도성장’또는 ‘압축성장’을 추구하면서 어떤 ‘무리’를 가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군인들이 얼마나 ‘무식하게’ 주거정책을 펴오고 그 결과 한국이 얼마나 천변일률적이고 무관심한 사회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이책에 나온 내용 중 강남개발과 강남의 도시성에 대한 내용은 전에 리뷰했던 책에 나온 내용이라 별도 언급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한종수 강희용님의 강남의 탄생(미지북스,2016)

박해천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자음과 모음,2011)

을 참조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내용은 오히려 만주국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던 소위 ‘근대화 작전’의 뿌리가 일제강점기와 만주국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점입니다.

경제개발계획과 한국의 압축근대화에 관련된 역사를 읽으면 1960-1970년대 당시 일제에 의해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얼마나 별고민 없이 일제가 시행했던 정책을 가져다 썼는지 보여줍니다.
일제가 당시 경성에 시행하려 했던 ‘조선시가지 계획령 ‘을 해방이후 그대로 가져와 서울의 도심 정비에 사용하고 일제가 경성의 하층민인 토막민들을 ‘미관’을 이유로 경성 밖으로 몰아낸 것처럼 군사정부도 청계천의 하층 빈민들을 광주대단지로 강제로 몰아냈습니다.


얼마전 일제 강점기에 교육받은 학자들이 일본 자료만을 인용하는 지극히 ‘나태한’학문태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1960년대 5.16 군사정변의 주역들은 군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1960년대 초 근대화를 위해 ‘국토 개발’을 한다며 국토개발단을 모집하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군인’취급하고 예비역 군인들을 고용해 ‘어용군대’처럼 운영하는 황당한 일을 저지릅니다. 군사정권이 사실상 합법적으로 ‘강제노동’을 시킨 이 헤프닝은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아 1년이 지나 중단됩니다. 이는 사실상 일본제국주의가 1930년대 말 총력전 시기 국민을 강제동원한 ‘근로보국단’의 판박이로 일본군 출신 쿠데타 세력은 결국 자신이 아는 걸 다시 써먹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제의 영향이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대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두번째로 언급하고 싶은 건 한국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과 ‘비민주적 ‘통치 스타일입니다.

미군정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지나 서울을 재건할 때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들에게 서울의 치부가 보이는 걸 싫어했고 이를 가리기 위해 고층 상가주택을 서울의 관문에 짓기를 원했고, 또 (쓸데없이) 빨리 짓기를 원해 외국의 설계를 의뢰했고 육군 공병대에게 공사를 맡겼습니다. 본인을 왕으로 알고 영구집권를 꿈꾸던 구한말 이래의 노 정치인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이 대통령은 정작 그 상가주택에 살 국민들의 의사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이상하죠.
그리고 그 프로젝트가 본인의 입맛에 맞는지만 고려하니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이 아니라 전제적 왕권국가의 독재자 노릇을 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독재자인데 서양 열강에 ‘콤플렉스’를 가진 독재자입니다.

그 후대의 박정희 대통령도 이승만 대통령과 거의 차이를 보이지 못합니다.

그는 경제개발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계획을 새운 것이 아니고 군사정변을 통해 무너뜨린 장면 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장면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장준하로 대표되는 ‘사상계’ 계통의 지식인들이 입안한 것으로 이들은 거의 대부분 서울 다음으로 경제가 발달했고 조선시대 이래 중국과의 무역을 독점해왔던 평안도 출신들이 주축이었습니다.
1950년대 활약한 서북지역 (평안도 지역) 출신 지식인들에 관해서는
김건우 교수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 느티나무 책방,2017)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반공을 기치로 내건 한국 우익의 본류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리고 극우로 치달리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 본류가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1945년 이후 마지막 학병세대의 관점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세운 계획의 실행은 박정희 군사정부에서 하게되고 전쟁에서 전투하듯 어주 급하게 진행됩니다. 도시와 농촌과의 균형발전보다 도시 중심의 불균등 발전 전략을 택해 개발 초기부터 농촌인구의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나고 서울로의 인구집중으로 주택난이 심화됩니다.

군사정권은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단지 ‘빠르다’는 이유로 일률적인 아파트 공급에 올인을 하게 되고 체제 경쟁중인 북한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한강 이남의 경기도 광주 지역을 개발하게 됩니다.

한국의 부동산 불패의 시작이 군사정권과 건설업자의 결탁으로 이루어집니다.

놀라운 사실은 한국의 주택정책이 전제적 왕권주의자인 이승만 대통령 당시만 해도 국민들의 복지와 후생을 증진시키는 한방법으로 고려되어 ‘사회정책’으로 다루어지고 자금의 보건복지부가 담당이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1950년 당시만 해도 한국정부는 국민들에게 ‘공공주택’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일제 당시의 조선주택영단을 계승한 대한주택영단이 실제 주택 건설의 일선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국가의 기반이 불안정한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현재 싱가포르나 유럽의 주택 정책과 유사한 정책방향을 가졌었다는 점을 보면서 건국 초기 지식인들이 그래도 나라의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정책이던 주택정책이 사적 경제의 영역으로 넘어와 주택이 건설회사의 돈벌이 수단이 된 때는 1960년대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 때입니다.

현역 육군 장교 출신이던 장동운이 대한주택공사 총재로 취임하면서 서민주택 공급애서 중산층 주택 공급으로 방향을 바꾸고 단지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주택을 아파트로만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이 군인 출신인사는 최초의 중산층 타겟 아파트인 동부이촌동 한강매션 아파트를 분양하면서 한국 최초로 ‘선분양제 ’를 도입해 상품을 보지도 못하고 상품을 구매하는 주택건설업계의 희안한 거래관행을 만들었고 주택에 민간자본이 들어가게 되는 길을 열어놓아 결국 부자와 빈자가 결정적으로 다른 삶을 살게되는 길을 열었습니다.

양극화의 씨앗이 군인에 의해 뿌려진 것입니다.

이후 건설회사는 한강을 매립한 부지에 선분양 대금으로 저금부담없이 아파트를 지어 팔고 국민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아파트에서만 살게 됩니다. 군인들처럼 똑같은 공간에서 살게 된 겁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남의 돈으로 장사를 해오던 주택건설업계는 자신들이 망한다는 이유로 당시까지 강제되었던 분양가 상한제 폐지를 요구하게 되고 이는 관철됩니다 . 이후 2000년대 초반 서울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을 경험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한국의 주택정책은 건국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퇴행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고 초기 강남으로 이주했던 중산층은 이후 군사정권의 지지자가 되고 이들이 지금 상당수 한국 보수 극우 진영의 거대한 기반이 됩니다.


생소할지 모르겠지만 2021년 현재 부동산 폭등의 기원은 결국 1960년대부터 시작된 주택공사의 공적 책임 방기와 직접 관련이 있습니다.
최근 논란이 된 LH 직원의 농지투기도 LH의 전신인 주택공사가 공적인 역할을 오랫동안 해오지 못했고, 건설부 관료들이 대단히 건설회사에 우호적인 현 상황을 감안하면 오랫동안 물밑에서 이루어졌던 잘못된 관행이 수면 위에 떠오른 것으로 추정합니다.

주거나 공간에 대한 다른 논의를 찿기가 무척 어렵고 주택에 대한 논의가 모두 부동산 시장과 시세로만 연결되는 현 세태가 결국 성급한 군인들의 ‘서양 따라잡기’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무척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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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중국의 마지막 왕조국가로 여진족(女眞族)출신의 누르하치(努爾哈赤)가 17세기 초 만주지역에서 세운 국가입니다.

한국사람들에게는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조선을 침략했던 1637년의 병자호란과 남한산성에서의 공성전( 攻城戰)그리고 삼전도에서의 항복이 우선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근래 청나라에 대한 인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매체는 영화입니다. 횡동혁 감독의 2017년 작 ‘남한산성’은 추위에 한강을 넘어 남한산성에 도착한 조선조정이 어떻게 청에 대항하고 싸우다가 항복하게 되었는지 산성 속 주화파 최명길과 척화파 감상헌의 대립을 통해 보여줍니다.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임금이 만주출신 오랑캐인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후대에서는 사대부의 나라 조선이 오랑캐에게 패한 치욕 (恥辱) 만 강조할 뿐 선조이래 발생한 조선의 붕당정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에 대한 치열한 반성을 보기는어렵습니다.

아마 전문적 영역이라 일반대중이 꺼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지만 정조이후 19세기 조선사를 돌이켜보면 양반들의 안이하고 무신경한 국토방비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명나라가 망했는데도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고 명나라에 사대하는 노론사대부들의 정신세계는 이해불가입니다. 책이나 읽으면서 마음따위나 논쟁하면서 삶의 기반인 경제와 군사를 무시하다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도 양반들이 정신을 못차린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런 몰상식하고 구태의연한 생각이 결국 조선의 멸망에 이르는 한 요인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이들의 주장 자체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구한말 조선이 어려움에 처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제대로된 신식군대가 없었다는 것이고 실학파와 후의 개화세력 모두 이를 보완하려고 했고 남은 수단은 결국결국 러시아와 일본에 군대를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사대부들이 고고한지 몰라도 조선 멸망의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튼 21세기가 시작된지 한참 지난 지금도 별로 유익하지 않은 소중화사상에서 아직 별로 벗어난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역사적 관계를 되짚어 볼 때 중국이 한국을 속방(屬邦) 으로 생각하여왔고,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의 동이(東夷)라는 명칭으로 불러왔다는 사실은 사실 언급하기 새삼스럽습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여러민족 중 명나라를 세웠던 한족(漢族)들의 생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만큼은 이제 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안 사실로 철저히 만주족( 여진족)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대청제국의 정치구조가 한족의 영향으로 중국화되기 시작된 것은 19세기 들어서 청나라 내부의 여러 민족들의 반란과 태평천국의 난, 그리고 의화단 전쟁같은 우환을 겪고 19세기 중반 영국과 아편전쟁을 하고 불평등조약을 맺기 시작하고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으로 연해주 땅을 잃는 등 외부로부터 위험이 가중되며 기존의 정치체제가 변화하고 한인들을 중용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종시기 조선에 주재하며 한국을 중국의 종속국으로 생각하고 실효적 지배를 밀어부쳤던 북양대신 이홍장 (李鴻章)은 19세기 혼란기가 아니었으면 중용되지 못할 한족(漢族 ) 출신 고위관료였습이다. 그는 철저한 화이사상 (華夷思想)을 가지고 조선을 하대하였습니다.

18세기까지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 중심의 나라로 한족은 철저히 권력중심애서 배제된 나라였습니다.
또한 청나라는 다민족 다언어 국가로 모든 공문서에 만주어와 몽골어와 한문이 병기되었고 한족출신 관료들은 철저히 과거 명나라의 통치지역에서의 권한행사만이 허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조선과의 외교를 위한 칙사파견도 철저히 만주족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이 규칙이 깨져 한족출신 칙사가 조선에 온것도 19세기 이후입니다.

청나라는 자신들이 기마유목민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나라였고 또한 몽골제국의 후예로 그들의 뒤를 잇는다는 자긍심이 대단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사실은 청나라가 사실상 옛 몽골제국 황실의 공인을 받아 나라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기마민족의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무예와 말타기는 따라서 학문보다 더 큰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었습니다.

당나라와 함께 중국대륙을 200년 이상 통치한 청나라는 제국으로서 만주뿐만 아니라 내몽골과 외몽골, 위구르 이슬람, 티벳지역까지 그 영토가 확장된 대제국이었습니다.

특히 티벳과 신장지역의 위구르 이슬람 지역은 직할통치보다 자신들의 지역에 맞는 통치를 하기 위해 자치권을 주었습니다. 이슬람 문화도 티벳 불교 문화도 모두 편견없이 받아들인 겁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청나라의 준가르 초원 정복은 청나라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상징하는 것으로 너무 간략하게 서술된 것이 아쉽습니다.

미국의 중국학자 퍼듀라는 분이 이 청나라의 준가르 원정에 대한 연구서 (China Marches West,Harvard,2005) 를 썼습니다. 기회가 되면 읽어볼 생각인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서구의 지역연구의 폭과 깊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청나라의 전성기인 옹정제, 강희제 연간에 이루어진 정복으로 이를 위해 청나라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카흐타 조약을 채결해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을 마무리 지어야 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청의 대 러시아 외교는 ‘몽골문제’의 일부로 파악해 한족 출신 관료들이 철저하게 배제되었고 이 두 조약의 언어도 만주어 몽골어 러시아어 라틴어에 한정되었으며 이 조약의 중재를 위해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참여하였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청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러시아의 동진이 자명한 가운데 여러 분쟁이 있었겠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한국독자들애게 거의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언어의 장벽이 크게 다가옵니다.

저자께서 서두에서 언급했다시피 이 책은 청나라의 정치에 관련된 책이고 청나라의 이원적 통치구조에 대해 서술해 개론서를 기대한 독자에게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론서 수준의 책만 여러권 나오는 것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고도 생각합니다.

300쪽 내외의 책에서 상당히 밀도있게 청나라의 정치 작동방식을 설명했고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쓴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청나라를 연구하면서 만주어로 된 사료를 인용한 책을 만나게 되어 반갑다고 느껴졌습니다.

최근 나온 중앙아시아나 유목민족 관련 서술들에 이들의 문자로 이루어진 사료를 직접 해독해서 연구한 책들이 나오고 있는 건 고무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뿐 아니라 기타 언어라고 취급받았던 언어들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일제시대 교육을 받아 일본어가 능통한 학자분들이 일본어 자료에만 의존하는 관행은 그 자체로 매우 나태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에 관한 예전에 읽었던 책을 소개합니다.

누르하치( 돌베게2015)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산수야,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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