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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평점 :
소설이란 무엇일까. 강화길의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에는 소설가인 '나'가 등장한다. '나'는 자신의 유치원 시절 기억을 토대로 <니꼴라 유치원>이라는 소설을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례가 없는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작품을 완성하겠다는 야심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소설은 나아갔고, 그마저도 잘 써지지가 않아서 결국 '나'는 슬럼프에 빠지고 만다.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나'는 자신을 질책하고 힐난하는 목소리에 사로잡힌다. '네가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감히 네까짓 게? 착각하지 마. 너는 그 무엇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20쪽)
대체 '나'는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 걸까. 소설가라고는 해도, 아직 내 이름으로 책 한 권 낸 적 없고 단편소설 서너 편을 발표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지 않으면 세상에 남지 않을 이야기를 굳이 쓰기로 마음먹는 것은 어떤 '악의(惡意)' 때문이 아닐까. 정확히는 사전적 정의대로 '나쁜 마음 또는 좋지 않은 뜻'이 아니라 악(惡)에 대한 뜻(意) 혹은 마음. 나를 괴롭히고 상처 준 사람을 상상으로라도 해코지하고 싶은 마음. 나를 힘들게 하고 혼란스럽게 만든 어떤 사건을 뒤늦게라도 해결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정확히 누구를, 무엇에 대해 고발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계속해서 쓸 거리를 찾는다.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상태를 극복하게 해줄 단 하나의 이야기를 찾는다.
이야기란 무엇일까. 엄마와 엄마 친구 '보애 이모'에 관해 생각하던 '나'는 두 사람이 25년 만에 재회한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나'는 그날 보애 이모의 아들 '진'과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다. 종종 만나서 자신들을 제외한 온갖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진과 '나'. 어느 날 진은 무심코 '나'가 쓰려고 하는 니꼴라 유치원이 대불호텔과 비슷하다는 말을 꺼낸다. 1888년 인천 제물포항 근처에 세워진 붉은 벽돌의 삼 층짜리 서양식 건물로 1987년 철거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는 대불호텔. 그곳에서 여자 한 명이 죽은 적이 있다는 말에 '나'는 당장 그 말을 해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진을 조른다. 그리하여 '나'는 진의 외할머니이자 보애 이모의 어머니인 박지운과 만나게 되는데, 이 박지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나'가 쓰는 소설보다도 진실과 허구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박지운에 따르면 대불호텔은 '악으로 가득한 건물'로,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한 사람이나 잠시 머물다 떠난 사람이나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우했던 인물이 지영현이다. 좌익 청년단을 도왔다는 이유로 부모를 여의고 월미도 폭격 사건으로 나머지 가족마저 잃은 지영현은 당숙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내다 고연주의 주선으로 대불호텔에서 일하게 된다. 지영현과 고연주가 셜리 잭슨이라는 미국에서 온 여성 작가의 집필을 도우면서 벌어지는 일이 2부의 주된 내용인데, 마지막에 이 모든 이야기는 진실이 아니라 박지운이 만들어낸 허구임이 드러난다. 오랜 시간 집중해서 들은 이야기가 꾸며낸 이야기임을 알았을 때, 소설가인 '나'는 배신감이나 허탈함이 아닌 "그 이야기에 박힌 어떤 감정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대체 박지운은 왜 이 모든 이야기를 지어낸 걸까. 이 질문은 '나'의 의문 - "대체 '나'는 왜 소설을 쓰려고 하는 걸까"와 통한다. 그리고 이는 박지운의 이야기 속 셜리 잭슨의 말 - "나는 이야기를 왜 하는 걸까. 이야기라는 걸 굳이 왜 하고 싶어 하는 걸까." (207쪽) - 과도 통한다. 여기서 셜리 잭슨의 말은 셜리 잭슨이 직접 한 말인지 아니면 지영현이 멋대로 추측한 말인지 불분명하다. 후자로 본다면 셜리 잭슨의 말은 사실상 지영현의 말로도 볼 수 있다. 이(여자)들의 입가와 손끝을 거치며 가공되고 확장된 이야기의 중심에 여전히 원한과 증오라는 감정이 폭풍의 눈처럼 남아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만약 이 세상에 악이 없다면, 그로 인해 파생되는 고통이나 비애, 분노나 좌절 같은 감정이 없다면 소설을 쓰는 사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도 없어질까.
악이란 무엇일까. 박지운도 '나'도 - 그리고 셜리 잭슨도 지영현도 - 자신이 경험한 악에 대해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상상이나 거짓으로라도 보충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로 완성해야 만족하는 사람이다. 박지운의 이야기 속에서 박지운의 남편 뢰이한은 결코 좋은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박지운의 이야기를 곱씹으면서 박지운이 뢰이한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깊이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너무나 사랑했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홀로 남은 시간을 견딜 수가 없어서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만들어낸 것이다. 잔혹한 현실 대신 만족할 만한 거짓을 이야기로 지어낸 것이다.
만족하지 못한 사랑에 대한 보충으로서 만들어낸 만족할 만한 거짓. '나'는 그제서야 자신도 그런 식으로 소설을 쓰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중요한 것은 악의 실체가 아니라 악으로 인한 자신의 경험이며, 그 경험에 대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임을 이해한다. 악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박지운도, 지영현도, 셜리 잭슨도, 에밀리 브론테도, <장화홍련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린 사람들도 그렇게 '내 배의 선장'이 되고 이야기의 주인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복수를 했다. 실제로는 죽은 자들을 대신해 죽지도 죽이지도 못한 자신을 처벌하고 위로했다.
죽을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는 마음이 소설을 쓰고 이야기를 짓게 한다면, 그런 마음이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중 어느 쪽이 더 나을까. 악이 없으면 소설도 없고 이야기도 없을진대, 소설도 없고 이야기도 없는 세상에는 살고 싶지 않은 나는 악을 바라는 존재일까. 한 사람이라도 덜 고통받는 세상을 원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유령이 나오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호텔 이야기에 매혹된 나 자신의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면 죽을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는 - 소설 혹은 이야기라는 - 유령에게 이미 단단히 홀려 있는 상태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