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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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전에 시학(詩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詩)는 역사(歷史)보다 더 철학(哲學)적이다” 그것은 역사는 이미 지나간 다른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다면 시는 이제 시작될 개인의 역사를 다루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 말은 아직 당신에게 도달하지 않거나 혹은 이제 막 도달한 운명(運命)이란 장난에서 어떤 가혹한 일들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과연 그렇다. 그런 만큼 마이클 샌델 교수의 불후의 명저 “정의는 무엇인가”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한 시학의 명언과 가장 부합할 수 있는 범주를 나타냈다. 물론 책 안의 많은 이야기들은 이미 지나간 개인의 역사적인 순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언제라도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

그 일들은 당신에게 보이고 있는 이 지루한 후기를 적는 필자에게도 일어나는 개연성 내지 필연성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처음 들었을 때 무척이나 어렵고 충격적인 서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막상 책 내부를 보았을 때는 그렇게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것이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유도하도록 하는 것이 맞았다.

나는 철학이란 학문을 뭐라 딱하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인간 그 자체와 더불어 이 세상과 모든 존재를 모두 논할 수 있는 초인이 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물론 초인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관이겠으나, 적어도 그런 인간관을 도달하기란 만만치 않을 크나큰 모험이다.

전에 본인은 이런 책을 보았다. “철학 - 가장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가장 최근의 대답들”이라고 말이다. 나는 그 책에서 어느 정도 철학적인 안건과 주제에 대해 각종 윤리적·논리적·합리적인 사고로 통해 풀어가는 과정이라 생각했으나 이것이 무엇인가? 오히려 그런 생각을 기대한 내가 어리석게 되었다. 철학 관련 도서를 읽으면서 나는 오히려 내 자신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부분 즉 자기 존재적·윤리적·인식론 등의 내용을 보았다. 그 내용은 답을 주기보다는 답을 오히려 엉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는 무엇인가”란 서적을 보고 사람들이 충격적이다 말하는 것은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보다는 자신들이 그동안 사고의 한계점에 부딪혔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물론 본인이라고 하여 그런 벽에 부딪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오히려 늘 부딪히고 또 부딪힌다.

단지 그 부딪히는 것을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는지 아니면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는가의 차이다. 우선 이 책에서는 정답을 절대로 주지 않는다. 정답을 주기 보다는 정답의 원인부터 찾아 이럴 경우와 저럴 경우 그리고 다른 인자와 속성, 상황들을 보여준다. 단순히 획일화된 사고로 접근하는 자체를 거부한다. 게다가 2원화적인 대립구도에서 점차 사상적인 혹은 이념적인 부분으로 통해 그 이상의 대립관계도 등장한다.

사실 이 책에서는 마이클 샌델은 정답을 "콕“하고 찍어 주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담론들을 찾아 과거로 가고 다시 그 과거의 논제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한다. 일단 서구철학의 기본이 되었으면 윤리학과 정치학의 대가인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경우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으로 통해 인간의 가치를 적절히 실현할 수 있어 그 것이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합목적성이 이루어야 정의라 한다. 그러나 웃기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옹호하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반대했다.

지금 시대라면 분명 그의 사고는 틀렸으나, 그래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계속 읽히고 연구된다. 그 후에 데이비드 흄, 존 로크, 루소와 같은 사람에 거쳐 벤담의 공리주의에 이르고, 초반 공리주의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돌아가나 그 이익이 너무 수단화되었다는 점에서 인간 그 자체의 존엄적인 부분이 모자랐다. 물론 여기에 자유론을 저술한 존 스튜어트 밀의 윤리적인 부분을 추구한 공리주의가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라는지 혹은 더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는지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윤리형이상학정초(이 책에서는 윤리는 도덕으로 됨)”, “실천이성비판”에 대한 내용을 거론하면서 인간은 수단이 아닌 그 목적에 의의를 두어야 했다. 물론 이런 면은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하나인 존 롤즈의 “정의론”까지 이어온다.

하지만 그렇게 많고 많은 철학자의 서적과 사상을 인용해도 여전히 난관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계속 흐르고 세상은 변하고 인간 역시 변했다. 인간이 변하고 변해 복잡 다양한 사회구조에서 정의를 찾는 것은 1가지 관점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무리고 위험한 일이었다. 얼마나 위험한지 그런 사례들을 이 책에서 수없이 풀어 놓았다.

개인의 권리, 타인의 권리, 사회구조와 정치적 상황, 그리고 많은 여파들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단순하게 여기는 자체가 어리석게 되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답을 주기 보다는 문제를 던져주고 답이 아닌 답을 내어주어 오히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은 부분에서 시작해서 자신이 지지하는 의견에 반박되는 내용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그런 이질적이고 상반되고, 자신과 타인의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이익이 오고가는 치열함에 정의는 무엇에 따라 움직일까? 사실 윤리적인 부분을 추구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모든 것의 평가로 이어질 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철학에서 제1의 철학이 윤리학이라고 한 레비나스의 말처럼 정의는 무엇일까? 나 자신만을 위해 타인을 못 본채 해야 할까? 아니면 내 자신을 포기하면서 타인을 희생해야 할까? 아니라면 이 모두를 못 본채 도망쳐야 할까?

어느 길이든 혹은 벽이든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던져진 채 끝없는 고민과 혼선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정의에서 중도적인 종착점을 찾기가 어렵다. 나는 오히려 자신이 중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위험한 듯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말 중립적인 가치를 소지한 게 아니라, 중간이라 애매한 부분에서 지탄과 고민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나의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한다. 분명 나도 내 자신의 인권과 재산이 소중하다. 그리고 그것만큼 타인의 인권과 재산도 소중하다. 또한 거기에 지나 인간이 인간다움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내가 얼마나 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보다는 어떻게 잘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고민이다. 나 역시 논리적으로 내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논리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미덕, 어느 것을 선택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나만이 아니라 타인도 돌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작고 미력한 존재는 국가와 지역사회에는 보잘 것도 없는 미미한 인간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인간들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존재하고 그 수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런 존재들이 단독적인 부분이 아니라 거대한 부류에 속한다. 단지 서로 볼 수 없음에 인지하지 못함이다. 사회구조는 이런 서로 볼 수 없는 사람들의 위기로 통해 사회문제를 보여준다. 그런 문제는 결국 언제가 큰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고, 정치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나는 이 책에서 이 말이 생각난다. 어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2부류의 사람들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전 부류를 이들의 고통을 보고 가엾다는 생각에 동정심이 유발하여 마음이 불편하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고통을 보고 - 대부분 그들은 가난하고 허약하고 외형적인 외모가 훨씬 부족하므로 - 시각적인 미에서 불쾌감을 느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런 불편한 마음을 덜기 위해 혹은 이런 일이 아닌 다른 문제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분명 말하지만 이 책에서 답을 찾지 마라! 답은 책을 읽고 있으면서 생각해야할 당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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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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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의 주인 여러분, 당신들에게 다스려야 할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겐 다스려야 할 하층 계급들이 있습니다”. 이 <명언>에 온 좌중이 함성을 질렀다. 필킹턴 씨는 다시 한번, 동물농장이 식량 분배는 줄이면서 노동시간을 늘린 것을 축하하고 그가 본 대로 이 농장에는 동물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축하했다.

위에 적힌 긴 문장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적힌 결론부의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흔히 반공사상(反共思想)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 과거 실패하고 돌아오면 안 될 소비에트 연방의 문제를 거론이란 점이다. 전에 다른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틀린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런 최후의 일격은 20C 말에 다가오는 쯤에 동독이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한 역사적인 기념일이다.

그런다고 이런 승리를 누린 자본주의(資本主義) 역시 승리자인가?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공산주의(共産主義)도 자본주의 모두 패배자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표방한 소비에트 독재자(獨裁者) 스탈린을 연상케 하는 돼지 나폴레옹의 폭력정치(暴力政治)와 또한 대표적인 자본주의국가인 영국을 상징하는 필킹턴 씨의 최후의 이야기들이다. 늙은 암말인 클로버는 앞 눈이 침침하나 동물농장의 주인인 나폴레옹과 필킹턴의 카드놀이에서 마치 비웃는 듯한 느낌이 살아있다.

인간이나 돼지나 모두 똑같았다. 그들은 서로 스페이스 카드만 내밀고 있었다. 사실 소련은 공산주의라고 하나 그것은 허구적인 공산주의이고, 국가자본주의였다. 해설에도 나오지만, 이제 막 죽기 일보직전이 늙은 돼지인 메이저는 영락할 것도 보이지 않은 듯 칼 마르크스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과 공산주의 선언으로 통해 노동자의 인권(人權)을 보장해 보려 했다. 물론 그의 진정한 의도는 훌륭했으나, 문제는 그의 생각은 어느 순간 변질되어 버린 사상이 되었다. 바로 스탈린 같은 폭력적인 독재자 돼지 나폴레옹 때문이었다.

또한 동물농장의 배경이 아일랜드의 점도 중요하다. 아일랜드 사실 영국에 의해 압박받던 곳이다. 게다가 아일랜드 역시 영국에 의해 각종 잘못된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공간적으로 영국과 밀접한 장소, 그리고 영국은 마르크스가 최후의 임종을 지킨 곳이다. 단지 분명한 사실은 영국에서나 혹은 기존 유럽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착취가 상당했다는 점이다. 갖은 고역, 비위생적인 음식과 생활, 비인간적 대우 등 그래서 이 소설에서 혁명은 당연한 역사적인 과정을 인증한다.

그러나 혁명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이루고 나면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서사가 흐른다. 메이저의 죽음과 맞바꿈 정신은 결국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갈등으로 인해 파탄난다. 스탈린이 스노빌같은 트로츠키를 몰아낸 것처럼 여기서 스노블은 나폴레옹의 충실한 견공들의 위력에 쫓겨난다. 그리고 평생을 동물농장에 나타나지 않으나, 무슨 일인지도 몰라도 스노빌의 유령은 다시 나타난다. 또한 거기에 메이저의 유령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 유령은 결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돼지의 군주인 나폴레옹을 그들의 유령을 계속 생산하고 또 생산하여 하나의 거대한 악으로 구축했다. 이것은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희생양을 내듯이 말이다.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숨기려 해도 그 문제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농장은 갖은 가난과 추위 그리고 빈곤과 차별에 시달린다.

평등을 중시한 동물농장이 어느 특정대상을 평등을 중시했다. 어긋난 소비에트를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웃기게도 조지 오웰은 그들의 공산주의를 비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도 비웃었다. 영국이란 국가는 과거 식민지 활동과 더불어 제국주의(帝國主義)적인 면을 나두고도 민주주의 틀에서 과거의 수탈범죄를 감추려 했다. 그렇다면 동물농장에서 비웃고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크게 세계적으로 2원화된 정치·군사·외교적인 대립이었다. 그 대립에서는 서로들은 자국민들, 즉 많은 대다수의 약자 편이라 외치나 그 실상은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순수한 영혼을 악령(惡靈)으로 변모하고, 악령 그 자체는 성령(聖靈)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런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세상이어도 그 체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순진하다고 소문난 동물인 양은 처음에 “네발은 좋고, 두발은 나쁘다”라고 하여 정치적인 선전에 아무런 비판 없이 흘러간다. 그런데 나중에 “두발은 좋고, 네발은 나쁘다”고 한다. 그 네발에서 두발로 된 존재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돼지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가식적이다. 두발로 서는 인간을 혐오하다 결국 자신들이 두발을 가지고, 옆 동네 농장주와 맥주를 마신다.

게다가 많은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수하 돼지 스퀄러의 말을 모두 믿었다. 거짓된 통계와 홍보 그리고 음모까지, 이 모든 것을 본다면 조지 오웰은 무비판적인 대중들에 향한 비판의식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대중들만큼 지식인에 대한 비판도 개의치 않은 듯하다. 돼지들은 모두 이렇게 명분을 댄다. 모두 여러분들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이런 문구는 당시 조지 오웰이나 현재 세계 어디에서의 거짓된 정치가(政治家)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어떻게 본다면 정치체제는 단순히 겉모습일 뿐인지 모른다. 단지 그 체제 속에서 어떻게 해가는 것인가이다. 아니라면 단순히 흑백논리(黑白論理) 이원화(二元化)적인 사고로 통해 이념적(理念的) 대립(對立)을 외치며 정작 중요한 숙제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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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록 고려대학교 청소년문학 시리즈 6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김재혁 옮김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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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感性)적이고 따뜻한 영혼(靈魂)을 가진 하인리히 하이네를 생각하면 조금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든다. 나는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시인(詩人)을 다른 경로로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맑스·엥겔스 평전에서 맨 뒤에 나오는 아주 불같이 일으키는 분노와 매우 슬픈 우울(憂鬱)함과 비참(悲慘)한, 그리고 절망(絶望)의 시로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직조공의 노래, 정말 이 시는 정말 그 분노가 하늘을 뚫고 슬픔을 바다보다 깊고 깊었다. 그들의 비극(悲劇)과 절망은 우주(宇宙)의 암흑(暗黑)과 같이 넓게 팽창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런 우울함과 비참함을 해결할 수 없었다. 단지 저주스러운 베를 짜는 기계에 음율(音律)에 맞추어 이 세상을 저주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 “회상”이란 서적을 들었을 때 바로 그런 19C 독일과 유럽의 이야기를 적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내용을 열어 보았을 때는 그의 인간적인 면과 그리고 그가 살아온 인생에서 옆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 적은 글이다. 그렇다, 이것은 하인리히 하이네가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로 통해 비추어지는 회고록인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회고록은 아닌 듯하다. 약간 감성적이고, 유머로운 느낌이 드는 문체 속에는 그가 어떻게 오늘날 살아왔는지, 혹은 독일이란 역사에서 어떻게 변모되는지, 또한 그가 마르크스를 만나기 전후로 독일에서 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또한 차별받던 인간백정의 손녀 이야기를 다루었다.

내가 인상 깊은 것은 하인리히 하이네의 부모였다. 어머니는 전형적으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으나, 현대사회에 보이는 어머니와 비슷한 점이 보였다. 아들의 출세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어머니라는 점이서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그에게 매우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 같다.

외모는 아주 부드러우나 말이 없고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하이네가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닐 때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할머니에게 친절했다. 특히 주변에 사는 말썽꾸러기의 할머니에게는 의자를 직접 건넬 만큼의 친절함이 보였다. 그리고 때로는 호탕함도 있었다. 동네 경비대장을 맡으면 자신의 몸을 감싸는 제복에 흡족함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하이네의 어머니에게 강력한 얼굴로서 거수경례를 날리는 아버지, 또한 장사에 큰 수단능력은 없으나 자신의 장사로 통해 자신의 가치를 찾는 아버지, 아버지는 분명 좋은 마음을 가진 분이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20년이 지난 후인데도 하이네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기시키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컸을까?

이 책에서 인상 깊은 것은 하이네의 모험담이다. 그는 자신의 첫키스를 자신의 첫사랑보다는 자신이 느낀 세상의 부당함에 날렸다. 자기 집에 자주 찾아오는 어느 노파가 있었다. 그 노파는 사형집행인 즉 도부수의 아내였다. 그녀에겐 조카딸 제프헨이었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마치 석상에 그대로 옷을 입은 듯한 소녀, 그 소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마음을 가져도 단지 사형집행인의 혈통이란 이유로 당시 배척받은 듯했다.

난 그 소녀의 무용담을 아주 흥미롭게 보았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어느 노인들과 같이 있었다. 그런데 그 노인들이 어디 숲에서 몰래 모여 서럽게 울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떤 천에 감추어진 물건을 땅에 묻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도부수들이 사형에 집행할 때 사용한 큰 칼이었다. 사람 머리 100명을 자르면 그 칼에 악령이 깃들기 때문이란다. 사람 머리 100개를 자른 칼을 묻어서 슬퍼하기 보다는 나는 100명이나 죽이야 하며 살아야 한 그들의 눈물이 인상 깊었다.

정말 그들이 슬퍼하던 것은 칼 그 자체를 묻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들의 설움을 칼이란 매체에 통한 것이었을까? 제프헨은 이 칼을 자기집에 보관되어 있음을 하이네에게 말하고, 하이네는 그녀에게 그칼을 보여달라 하였고, 제프헨이 그 칼을 하늘높이 치세울 때 하이네는 제프헨의 입술을 맞춘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갇힌 현실적인 모순에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렇지만 하이네와 아름다운 붉은 머리 제프헨이 서로 읊어주는 시는 아름답고도 슬프다.

<사랑하는 오틸리에, 나의 오틸리에예,
내가 마지막 여인을 아니겠지-
말해줘, 넌 높은 나무에 매달릴 거니?
아니면 푸른 호수에서 헤엄칠 거니?
아니면 사랑하는 신이 내려주는
반짝이는 칼에 입 맞출 거니?>

이에 대해 오틸리에가 대답한다.

<난 높은 나무에 매달리고 싶지 않아,
푸른 호수에서 헤엄치고 싶지도 않아,
나는 사랑하는 신이 내려주신
반짝이는 칼에 입맞추고 싶어!>

아마 이 시는 사형집행인이 사형당하는 어느 여자를 두고 하는 시인듯 하다. 높은 나무에 목을 거는 교수형, 물에 빠져 죽이는 익사형, 그리고 입에 칼을 입맞춤 하게 하는 참수형. 아마 이 시는 사형집행인이 사랑하던 여인을 자기 손으로 베야 하는 어느 청년을 슬픈 연가(戀歌)이리라. 그것은 독일 전통 민요 중에 하나라고 했다. 어찌나 슬픈 제프헨과 하이네의 포옹을 눈물로서 1시간 이상 거대한 비가를 불렀다.

그리고 하이네는 붉은 머리 제프헨에게 입맞추고 나서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에 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을 탐닉한 이야기에서 왠지 모를 여운이 느꼈다. 독일의 격변기에서 직조공의 노래로 당시 국민들의 분노를 토한 하인리히 하이네의 모습에서 조금 슬프기도 조금 재밌기도 조금 섭섭하게 들리는 이 회고록에서 정말 그가 시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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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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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처음 접할 때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보았다. 사실 나는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을 본 것은 작년 진중권 씨의 “미학 오딧세이” 3번째 편과 그리고 같은 저자의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도서였다. 전자의 책은 미학에 대해 전무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라 발터 벤야민이란 인물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나온 서적은 상당히 읽기에 어려운 도서였기 때문에 그 책 초반에 나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역부족였다.

나의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이 다가온 것은 작년이었다. 그런 직후 책을 이래저래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도서를 통해 나의 사고력을 증가할 것이 필요하여 도서 추천을 기거저기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추천받은 것이다. 예전에 들어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이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직후 도서를 찾아보고 구매하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눈이 조금 아파왔다. 책에 읽혀지는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다. 특히 각주에 달린 글자의 크기는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를 읽는 것보다 더욱 난해(難解)했다. 게다가 책도 제법 페이지 수가 있었으므로 보통 양장본 서적을 보급판으로 내어 책의 크기도 글자의 크기도 미니멈하게 낸 도서같이 느꼈다. 그런 발터 벤야민 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아우라(Aur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서 내가 아직 그렇게 깊은 통찰력을 가지지 못함에 유감(遺憾)스럽게 느끼지만, 그래도 발터 벤야민의 엄청난 업적은 이른바 기술복제시대(技術復除時代)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과학기술과 문명발달로 통해 많은 물질적 혜택(惠澤)을 받는다. 물론 그 혜택은 자본주의사회구조(資本主義社會構造)에서 재력(財力)에 의해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최소한으로 도로, 전기, 상수, 하수 등의 인프라 - 이것 역시 재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나 - 등으로 통해 그 편리함을 누린다.

그렇지만 당시 발터 벤야민의 사회상은 그렇지 못하다. 1920~30년대 주요 활동과 저술을 맡은 발터 벤야민의 시대에서는 이제 막 기술복제로 통해 특히 영상이미지가 복제되는 것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영상이란 것은 마치 신기한 도구와 같았다. 예전에 사람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오로지 미술가들의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상당히 많은 노력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많은 시간을 고정된 자세로 유지해야만 했다.

또한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관점에서 시작되므로 화가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보다는 화가의 눈 이외의 내부의 관념적인 부분까지 더해지면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가령 어느 인물화에서 그 인물에 대한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거나 의미를 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구의 등장은 기술복제시대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영상의 잔상이 그 때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에서 그런 사진의 역할은 그림에서 보이지 못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보았으며, 또한 사진은 이때까지 우리가 보이지 않은 표상까지 잡음으로 그것이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사고까지 추가했다. 특히 나같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발터 벤야민의 사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라 하여 실사영상이 영화(映畵)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영화의 세계와 조우(遭遇)하게 된다.

그런 영화세계에서 기술복제로 통한 이미지 재현에서 같은 작품을 토대로 영화와 영화 이전의 서사(敍事)를 보여준 연극(演劇)과의 사이를 밝힘은 참으로 놀라웠다. 사실 영화와 연극을 2가지를 놓고 실제 진행 시간은 2시간이라고 치자. 그런데 연극은 그 연극이란 공간 속에서 2시간을 그대로 Running Time으로 통해 다 보여준다면 영화는 2시간이란 시간 속에서 그 공간적인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것은 2시간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2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2시간의 백배 혹은 천배 이상의 들어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연극의 2시간은 무대감독, 연출, 소품담당자 등과 같은 스텝들이 2시간 동안 연속적인 행위로 이루어진다. 즉 일련의 시간과 공간이 인물에 의해 연속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시퀀스는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연기자들의 모습에서 막과 극과 같은 시간, 공간, 상황적 배경 및 사건 등이 서로 나누어져 보인다면 무대 위에는 분명히 시퀀스가 이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의 세계는 시퀀스가 연속적이다. 영화는 이런 시퀀스를 모두 해체해 버렸다. 영화의 시퀀스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화관 안에서 계속 화면을 바라보는 영화관객과 영화 상영을 위해 기계를 조작하는 영화관 직원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모든 것을 분리하여 하나의 조각을 모아 거대한 틀로 만들 수 있는 재구성력을 소유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필름을 복제할 수도 혹은 하나의 필름을 가지고 계속 상영할 수 있다.

따라서 연극은 한 번의 쇼로 마무리 짓는 것이라면 영화는 한 번의 쇼로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연기자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가령 연극무대 위의 연기자들은 관객을 직접적으로 의식해야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연기에서 일순간의 실수조차 수정할 수 없다. 그들의 연기 자체가 완벽은 때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반복되는 행동이나 실수를 편집하여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로 구성한다. 따라서 연기자는 연극무대의 긴장감을 놓치기가 쉬울 것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관객이 아닌 단지 카메라맨이 들고 있는 카메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지는 모습을 관객이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연기하는 그 짧은 순간에는 관객들은 그를 보지 않는다. 단지 그 카메라의 영상이 복제되어 하나의 영화라는 예술 혹은 상업적 매체로 탄생할 때만 가능해진다. 지금의 이런 글들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나의 지식으로 적은 글이다.

물론 내가 적은 지식은 일반 대중들이 지닌 상식보다 더 깊이 있게 논의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특별히 누군가에게 통제된 지식이 아니다. 단지 통제되지 않은 것을 대중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당시 발터 벤야민은 적으려고 했다. 이제 그 시대의 영상문화는 막 태동했다. 그러나 영상문화는 하나의 대중예술로서 자유로운 담론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이용당하는 객체적인 존재였다. 정치도구로서의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상 안의 텍스트는 일반 서적 안의 텍스트와 비교하여 우리가 책을 읽을 것들을 더 이해하기 쉽고도 혹은 더 작은 시간으로 통해 어떤 사람 내지 단체가 의도하는 바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에서 영화 즉 영상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기술복제시대에는 정보의 전달력을 알리기에 좋은 도구들이 많았다. 혹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처럼 우리 인간들은 정보의 수용능력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정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대한 접근성과 언문능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서구사회에서 근대화 이전에는 거의 제한된 존재인 듯하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을 구사하는 사고력이 있어야 하고, 사고력을 뒤받쳐주기 위해서는 언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하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은 일반 프롤레타리아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기술복제시대에는 다양한 매체에 따라 정보가 복제되었다. 이전의 정보는 한정적이라면 근대시대에는 그 정보가 인쇄술의 발달, 녹음기술 발달, 영상기술 발달로 통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정보력을 누군가가 통제하여 일반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가져다 준 만큼 오히려 대중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을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발터 벤야민은 이미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여기서 사용했다.

조금 문예이론에서 면에서 이런 사회구조와 역사적 흐름을 잡는 것이 아닐까 하나 사실 문학과 예술 역시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예술에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는 문화제 중에서 1,000년 전에 귀족이 사용하는 칼이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본다면 그 때 당시의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상황을 전달하는 매체일 수 있다.

그런 매체를 후대의 인간들이 보는 것은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할 그런 입장은 아니나 발터 벤야민의 경우 그는 유대교적인 종교적 관념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을 동시에 무장되어 있다고 이 책 어느 부분에 적혀 있다. 물론 그런 문예의 대한 부분에서 이 책 후반부에 가면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에 대한 담론이 적혀 있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이나 발터 벤야민이 가진 철학적, 문학적, 역사적, 종교적인 학문적 그릇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발터 벤야민이 살아가던 시절은 파시즘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많은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발터 벤야민은 유럽인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발터 벤야민에 대한 소개에서 발터 벤야민은 파리가 베를린처럼 베를린이 파리처럼 여겼다고 한다. 파리는 자유와 혁명이 숨쉬고, 코뮈나르의 영혼이 불탄 채 잠을 자는 영토였다.

그런 영혼을 가진 땅을 사랑한 발터 벤야민이듯이 이 서적 초반의 자전적 프로필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어리고 젊은 시절의 글은 상당히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문학적인 정보와 접근성이 없는 본인에게 많은 작가를 소개해주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그 외의 작가들, 또한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통한 비평적인 글들을 말이다. 서사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이나, 그 이야기 내부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야기를 보고 그것을 외적으로 읊어주는 해설가인가? 아니면 그 이야기를 통해 안에 들어가 무엇이 있는지 끄집어내려는 비평가인가? 아직 많은 학문적 도전이 필요한 본인이나, 발터 벤야민이 비평에 대한 비평적인 문구는 매우 인상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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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엥겔스 평전
하인리히 겜코브 지음, 김대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나던 사람들이 여러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는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솔직히 젊은 대학시절 그렇게 철이 없었다. 생각이 얇고, 기분 내키는 성격이고, 침묵과 변덕으로 가득했다. 정말 어리고 어린 철부지였다. 지금도 철부지 어른이지만, 가끔 내 주변에 겪은 가족, 군대, 사회생활하면서 사회적으로 보는 내 눈으로 조금씩 변했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니 우선 나는 내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다. 그리고 배를 타고 멀리 외국으로 가는 외항선원이다. 현재 당시 다니던 회사에 정년 후에 이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비정규직으로 되어 국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제는 나는 피부로서 경험한다. 물론 나는 취업해서 일을 하고 있으나 아버지는 계속 일을 하신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달래기도 하겠지만, 가정 내의 살림을 보태기도 위해서다. 맑스·엥겔스 평전을 보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생계의 문제이다. 그건 모든 노동자 내지 비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노동자들이 제대로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입장인가이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나, 우리 아버지가 처음 노동을 할 때는 지금보다 열악하고, 맑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당대 유럽은 훨씬 열악했다.

예전에 맑스의 자본(강신준 교수 번역본)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과도한 노동으로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신체적인 기능이 월등하게 하락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임금이 턱없이 못 미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과연 인간의 생활 영위에서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참고로 내 아버지는 산업재해도 당하고, 근로환경 문제로 화상도 입으시고, 게다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도 했다.

물론 환경적인 부분도 술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가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떤 특이한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생활 그리고 일상에 귀를 기울이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본래 노동시간은 1일 8시간(식사시간 제외)이나 가끔 그 이상으로 해야 하고, 때로는 밤을 새서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도 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선박 위에서라는 부분이 있지만, 거기는 육상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가 크게 보장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은연히 나오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가난하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멸시받거나 또는 무시당한 적이 있다는 부분이 나온다. 가난은 죄가 아니나 죄가 되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근로조건으로 인해 재해나 질병이 걸리게 될 경우 직장에서 심각한 패널티를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아직도 현대에도 전해온다. 솔직히 말하여 국가가 운영하고 사회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어떤 힘든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어떤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몰아넣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면 문제다. 전에 어떤 문화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의 80%는 프롤레타리아이라고 말이다. 그 80%들 사이 중에서 위로 가려고 누군가는 그런 일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일을 맡는 사람들을 단순히 낙오자 내지 종으로 보면서 대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지만 그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날리며 자기 과시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이 옳은 일인가?

이런 문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온 문제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런 사회에서 너무 정당화되어 있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된 이 어긋난 사회를 변화하고 싶었다. 그것은 공상세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 의미나 계획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로 통해서이다. 나는 자본과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이 생각을 했다. 자본은 1~3권까지 나오나, 자본 4권부터는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맑스가 자본의 집필 지연사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정문제, 개인 건강문제, 국제노동자연합 관련과 많은 사건들, 그러나 자본은 사회적인 문제와 기존 역사적인 부분에서 서술하자니 맑스가 집필할 시기부터 계속 변화가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수정하고 고치고 변경하니 기간이 지연되었다. 그리고 당시 맑스가 제기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역시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시대에 떨어질 수 있다.

당연히 맑스가 제기한 문제인 당시 사회는 봉건사회에서 시민혁명 이후 소외된 프롤레타리아를 배제한 사회이었고, 자본주의 국가체계도 시작에서 얼마 멀지 않았던 시기다. 그러다 보니 맑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당시로는 합리적이나 지금은 비합리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부정은 아니다. 가령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에 인간이 지구를 날거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생각했겠는가?

시대적인 흐름과 변화에는 어느 정도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변화 없이 오는 것은 이 책의 케이스 안쪽에 적혀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 문구가 인상적으로 알려준다. “맑스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상황들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사실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적 요소에서 서민계층이나 소외계층을 가끔 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공사현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옆에서 보는 기회도 많다.

그러나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 많은 보장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그런 보장을 받지 못함으로 다소 천박한 말과 행동들 역시 계속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이제는 짜증내거나 눈살만 찌푸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 것이다. 현장마다 다르겠지만 고단한 노동, 덥고 추운 날씨, 위험한 안전 그 많고 많은 환경들이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그렇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사실은 맑스와 엥겔스는 이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고 당시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 즉 노동자들도 스스로 인권을 찾기를 바랐다. 지금 잘못된 생각으로 보면 이해가지 않으나 당시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없었고, 여자들에게 투표권이나 정치참여권이 없었으며, 10대 아이들도 공장과 광산에 끌려가 12시간 넘는 가혹한 노동을 했다. 게다가 사고를 당해도 제대로 보상 내지 보장을 받지 못했으니 그들의 분노를 이미 충만했다. 하지만 그런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분노가 과연 대단했는지 1871년 코뮈나르의 사건은 충격이었다. 독일 전 정부인 프로이쎈군대가 프랑스 국민들을 향해 공격하고, 게다가 그 원인은 부정한 정부였는데, 그 부정한 정부는 자국민들을 총으로 쏘았다. 그때 투쟁하던 국민들 중에서 어린 소년과 여자들도 있었다. 이 어린 영혼들이 왜 총을 맞아가면서 그렇게도 미친 듯이 군대에 저항하였을까? 참으로 비극이었다. 유럽사회가 지금은 엄청난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발달되어 있지만, 그 후면의 역사에선 엄청난 피와 눈물을 흘린 기억이었다.

그 당시 엄청난 피를 흘린 유럽에서 근대를 지나오며 전쟁의 휘몰이에 또 다시 피를 흘렸지만, 지금 유럽을 본다면 그 당시의 피와 눈물이 헛되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계속 억압당하고 핍박당하고 있다. 지금으로 본다면 맑스와 엥겔스의 정신은 낡은 과거의 유령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유령들은 정말 다시 찾아온다. 찾아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유령을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비극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순히 맑스와 엥겔스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 고통 받고 착취당하고 배고픔과 추위에 분노의 눈물과 저주의 피를 쏟았던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이 책으로 전하므로 그 진한 여운과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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