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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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발터 벤야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발터 베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이란 서적을 통해 그의 문장력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발터 베야민의 문예이론 중에서 각 소설가의 대한 문학비평은 매우 섬세하고 깊이가 보였으며, 그가 전개하는 영상문화가 꽃피우던 20세기 초반 유럽의 사진과 영화에 대해 글을 적을 때에 그의 관찰력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관찰하여 서술하였다는 사실이 실로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책의 페이지에 비하여 글자크기(도서출판사 민음사-이데아총서9)가 너무 작다는 것이 조금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당한 페이지에 글자크기와 자간까지 알맞은 책을 찾았다. 그 서적은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이다. 내가 이 책을 빌리려 했던 이유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첫 번째 장을 맡은 자신의 자서전 부분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의 일화를 하나의 수필처럼 풀어가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깊은 감수성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미 실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글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인간상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의 비평적이고 분석적인 글을 읽는다는 사실은 그의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대상이 되는 많은 서적까지 봐야하는 점에서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모스크바 일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의 필체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이 책에서의 발터 벤야민이란 인간적 냄새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그는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관찰력이 뛰어나고, 마음먹은 일을 위해 아주 끝까지 해내고 마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마음도 약하고 주변의 분위기에도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그의 일기 하나하나마다 적어 내려가는 모스크바에 있었던 일이란 매우 상세히 혹은 시적인 영감으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독일어판 서문처럼 발터 벤야민이 1926년 12월 6일부터 1927년 1월말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던 적어진 일기로서 이 일기를 본다면 단순한 일기라기 보기에는 너무 시적이고, 그런다고 에세이로 보기에는 너무 진솔하다. 여러 가지 상황과 사건 그리고 많은 인물들의 만남에서 발터 벤야민이 느낀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자신이 살고 있던 독일 베를린에서 느낀 감흥이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의 글에서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라고 하여도 뭔가 도시적인 색 다른 맛이 베여 있었다. 길가다 보면 많은 인파들이 거리로 나와 장사를 한다. 먹는 것, 장난감, 겉옷과 속옷, 각종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다양한 물건들 말이다. 여기는 영하가 25℃에 육박하는 추운 곳이다. 눈이 내려 거리를 수북하게 쌓일 정도로 추운 곳이다. 그러나 저 많은 거리의 상인들로 마치 여기가 추운 겨울보다는 살아 숨쉬는 봄과 같은 모습처럼 비추어졌다.

여기에 비해 러시아보다 덜 추운 독일 베를린은 거리에 사람이 없고 그저 빈 공간만 채울 뿐이다. 러시아에 오게 되면서 서유럽 세계가 다른 관점으로 보인다고 할까나?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모스크바가 그에게 주는 인상이란 매우 신기한 장소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기하다는 것은 낯설고 접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는 유태계 독일인이므로 독일어를 할 줄 알았을 것이고, 프랑스어도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안타깝게도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가 러시아어를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그의 일기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저녁마다 러시아의 문화를 즐기기 위해 찾아간 연극과 영화관에 들리는 목소리는 모두 러시아어다. 그의 눈으로만 통해서는 배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결국 벤야민의 옆에는 통역사가 붙어 있는 것을 종종 읽혀졌으나 그래도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는 금방 싫증이 나거나 지쳤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러시아의 공간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벤야민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 깊은 그가 인형을 매우 좋아하여 수집하려는 모습이다. 특히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인형을 쌓아둔 창고에서 그 옆의 동료와 함께 인형을 들고 가는데 각각 2박스를 품에 안고 가는 문구에서 벤야민의 독특한 수집가적 입장이 인상깊었다. 게다가 그는 일기 내내 인형을 사거나 관찰하거나 찾고 싶은 모습이 종종 나온다.

사소하고 작은 것에 치밀한 관찰을 보이는 만큼 그런 행동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벤야민의 행동과 함께 모스크바 일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어느 2인물에 대한 만남이다. 1명은 벤야민이 매우 사랑하였던 여성 아샤 라시스와 그리고 라이히의 관계였다. 아샤는 예전에 벤야민이 1924년 이탈리아 어느 마을에서 만났고, 그때 아샤의 파트너인 라이히를 같이 만났다. 벤야민은 아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와 대화를 위해 2주간이나 기다렸다는 일화에 벤야민의 집착이 과연 범상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벤야민이 모스크바로 갔을 때 그가 흠모한 여인 아샤는 벤야민과의 관계에서 좋은 친구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벤야민에게 다정하기도 화를 내기도 무심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벤야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은 것처럼 일기에 묘사했다. 심지어 그의 마음에서는 아샤와의 관계로 모스크바 생활 자체가 덫에 걸리는 듯하였다. 그런 와중에 아샤의 파트너로 만난 라이히와의 관계 역시 순탄치 않았다.

라이히는 심장이 좋지 않았는지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켰으며, 라이히의 발작 이전에 아샤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벤야민이 러시아에 건너간 시기는 매우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다니 건강이 좋지 못한 벤야민의 친구 2사람과의 만남은 그렇게 순탄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벤야민은 시간만 되면 2사람과 같이 모스크바를 돌아다녔다.

알 수 없는 러시아로 가득한 연극무대와 영화관, 술집, 찻집, 빵집 등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 2사람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박물관과 성당, 교회, 세관에도 같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많고 많은 사람들을 벤야민이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모두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과 관련 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중에서 트로츠키의 여동생을 만났다는 기록에서 나는 조금 놀랐다. 트로츠키는 추후 소비에트 연방이 어긋난 국가로 만들게 해버린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인물이다.

그는 레닌 사망 후에 러시아에서 유망한 사상가이었다. 때마침 오늘 동물농장이란 영화를 보아서인지 그런지 동물농장에 등장한 이상적인 사상가 돼지 스노즈 볼이 생각난다. 어째든 벤야민은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한 사람이란 점과 또한 이제는 그들이 당시 혁명시기의 그들처럼 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흐름에서 그들이 무너뜨린 공간에서 그들은 다시 나라를 세워 일으켜야 했다.

그런 혁명이 10년 후의 러시아는 많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던 공간이었다. 거리가 어쩌나 북적이는지 달리는 전차 안에 사람들이 얼마나 북적이는지 많은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벤야민의 글로서 충분히 느꼈다. 그런 공간에서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은 계속 활발하게 보여주었다. 예전에 문학비평 방법 중에서 러시아형식주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문학도가 아닌지라 그것에 대한 자세한 깊이와 의미는 잘 모른다. 하지만 러시아란 단어 뒤에 형식주의가 붙은 이상 러시아라는 공간이 얼마나 문학과 예술로 충만했는가는 벤야민의 일기에서도 충실하게 보여준다.

위에 적은 내용처럼 벤야민이 저녁마다 연극과 영화를 보고 박물관을 방문하듯이 그곳에는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게다가 당원은 1달 월급이 250루블만 고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수입원은 문학 활동으로 통해 추가하는 점에서 신기했다. 게다가 정부관료 대부분 사람들이 지식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도 무시하지 못할 점이다. 연극관인지 영화관인지 박물관인지 조금 기억이 묘연하나 벤야민이 그곳에 방문할 때 그곳의 관장이 예전에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 군인은 군인이 되기 전에 문학가란 점이 조금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벤야민이 찾아간 모스크바는 자신의 친구와 길가의 풍경, 자기가 찾으려 했던 즐거움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 그리고 당시 유럽사회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벤야민은 굳이 이런 내용을 사상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적지 않았다. 단지 개인적인 관점에서 풀어갈 뿐이다. 하지만 벤야민의 정치적인 관념이 여기서도 보인다. 그는 분명 고대 유대교적인 신비주의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를 넘나든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본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인물이라 모든 것을 프롤레타리아 쪽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부르주아적인 부분도 인정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보이는 특히 벤야민이 좋아하던 아샤에게 보이는 부분은 프롤레타리아적인 요소였다. 벤야민에겐 어느 쪽이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고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본다면 모스크바라는 곳이 사람이 활발하게 살아가나, 한편으로 외부 세계와 차단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이 모스크바의 아름다움이란 잊을 수 없듯이 지금 나의 눈으로 그가 보고 느낀 모스크바를 속삭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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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 지와 사랑 / 싯다르타 동서문화사 월드북 147
헤르만 헤세 지음, 송영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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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기 전에 나는 지성스러운 학자신부 나르치스와 끝없는 자기 안의 감정을 폭발하여 예술로서 승화하던 골드문트에 대해 적은 지와 사랑을 읽었다. 지와 사랑을 읽을 시에는 분명 작품 내의 서술하는 관점이 3인칭이었는데, 이번에 보인 데미안은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었다.

그리고 이런 데미안을 읽은 후에 잠시 뒤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보면서 데미안이란 작품이 마치 헤르만 헤세의 자기 안에 살아 있는 감정과 기억들을 하나의 문학으로 탄생한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데미안을 읽으면서 작품 내의 언급된 어느 철학자의 이름이 많이 생각났다.

그 철학자 이름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저자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였다. 니체의 이름이 언급되고, 마치 니체가 주장하고픈 이야기처럼 작품 내에서 주인공 싱클레어는 마치 헤르만 헤세가 니체에 심취한 부분을 살리지 않은가 했다.

작품 내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는 매우 착하고 순진한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열심히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아버지, 자신을 매우 사랑스럽게 다정하게 대해주는 어머니, 또한 자신을 정말 친한 친구처럼 귀여워해주는 누나가 있었다. 싱클레어라는 소년은 그 어떤 어린아이와 비교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잠시 뒤에 깨진다. 자신의 마을에 가난한 소년인 프란츠 크로머와 동네 꼬마들 사이에서 이른바 어른답게 보이려는 행동이 싱클레어에게 독으로 되었다. 우리는 흔히 어린 시절 특히 중고등학교 시절에 뭔가 튀어 보이거나 위협적이거나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려 하고 그것이 마치 동경의 대상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이른바 나쁘게 보이기가 어린 학생들에겐 하나의 권력으로 다가갔다. 그런 권력을 누빈 자가 바로 프란츠 크로머고, 그런 프란츠에게 동경과 공포를 가진 싱클레어가 거짓된 모험인 도둑질 이야기를 동네 아이들에게 말한다. 이때 프란츠는 싱클레어를 협박하게 2마르크를 내놓으라고 한다. 왜냐하면 싱클레어가 만든 거짓이야기가 실제 사건이 된 적이 있어서 그 도둑을 실제로 주인이 찾는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싱클레어는 그것이 거짓이 아닌 참이라고 맹세하는 바람에 프란츠에 의해 돈도 빼앗기고, 갖은 수모와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프란츠가 제시한 요구사항은 싱클레어의 누나를 데리고 와서 그 누나에게 못된 장난을 하려고 하는 뉘앙스까지 풍겼다. 이때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에 전학온 막스 데미안에 의해 싱클레어는 위기에서 모면했다. 그 위기뿐만 아니라 프란츠라는 불량소년이 더 이상 싱클레어에게 관여조차 하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이런 사건이 하나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동경과 공포의 대상이 허물어지고 그 대신 들어갈 사람이 데미안이란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각인했으나 이성적으로 납득하지 못한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과 같았다. 자신은 언제나 순진한 부모님의 양인 반면 데미안은 논리적이고 사색적이면서 현실에 있는 다른 사람과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는 정식적인 크리스천도 아니라 오히려 신과 악마 중간을 믿는 이교도 냄새가 강한 존재였을 것이다. 싱클레어는 그런 데미안에게 한편으로 대단하다는 것과 동시에 뭔가 자신에게 큰 부담감이었을 것이다. 현실과 어울리지 않은 남자, 그리고 그 현실 이상으로 독특한 향기를 지닌 남자, 데미안이란 싱클레어에게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 데미안을 어린 국민학교 졸업 후에 멀리 떠나보내게 되었는지 싱클레어는 다른 지역에 있는 중고등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싱클레어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그렇게 부모님 말도 잘 듣던 그가 오히려 진학하게 되면서 반항적이면서 혹은 남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는 아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각인하지 못한 채 방황했을 것이다.

그런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그는 다른 계기를 맞아들였다. 어느 길가에서 그는 자신만의 그녀를 본 것이다. 그녀는 단테의 신곡에 나온 베아트리체 같은 여성을 길에서 우연히 관찰한 것이다. 그는 이때까지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 베아트리체의 본명은 모르나 그는 자신만의 베아트리체라고 생각하며 흠모했다. 하지만 그 흠모는 이상하게도 다시 데미안의 기억으로 연결되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싱클레어는 그 베아트리체라고 생각한 어느 소녀보단 데미안의 모습이 생각나고, 이제는 데미안의 어머니가 싱클레어만의 베아트리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데미안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점차 알아간 것이다. 그런 그에게 학교생활과 여러 사람들과 만나면서 그런 자신의 존재적인 본류에 계속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교인이 되기를 포기한 어느 피아니스트와 같은 반의 어느 작은 몸집을 가진 청년과의 대화로 통해 그는 마치 정해진 틀과 남이 바라는 존재이기 보다는 자신만의 정체성에 큰 고민에 빠진다.

그런 고민에서 싱클레어는 전에 데미안에게 보낸 편지도 생각하고 왜 편지답장이 오지 않음에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 싱클레어는 방학을 이용하여 집에 갔을 때 데미안을 만나고 그와 만나면서 이제는 싱클레어의 베아트리체인 에바 부인도 만난다. 에바 부인! 그녀는 싱클레어가 생각하는 완벽한 여성이었다. 섬세하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 아름다우면서 품위가 넘치는 어머니 에바 부인!

그렇지만 싱클레어에게 에바 부인이란 그저 흠모의 대상, 어머니 같은 존재이기 보다는 어머니 이상의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에바 부인에게 다가가 그녀를 만지고 안고 싶어 했다. 그녀가 바로 데미안을 낳은 존재고 그녀가 바로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살아 있는 데미안의 존재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과 같이 생각하면서 헤르만 헤세가 모든 생명과 죽음의 시작인 어머니와 대지를 생각하는 듯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잠재적인 의식세계를 지배하던 데미안에서 데미안의 어머니로 가는 듯했으나 마지막에서는 데미안이 그의 이상향이었던 것 같았다. 청년 데미안은 그 시절 러시아와 독일의 전쟁에서 장교로 출전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싱클레어도 전쟁에 참가한다. 그는 전쟁에서 왜 싸우고 죽이고 하는 의문을 느끼지도 못한 채 생과 사를 넘나든다. 우연히 싱클레어는 보초를 쓰는 와중에 적군의 총알이 자기의 육체를 스쳐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에 있었다. 그런 그에게 옆 침대에 누워있는 데미안이 찾아와 키스를 하고 싱클레어의 모습은 싱클레어가 아닌 데미안으로 변했다. 그러나 다음날 싱클레어가 눈을 뜰 때에 옆 침대에는 데미안이 아니라 이름과 얼굴 모를 병사였다.

그렇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그늘 아래 있다가 자신이 데미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녕 데미안과 똑같은 생각이 아니라 데미안 못지않은 자신만의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그런 머나먼 자아를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혹은 짧았다. 정말 신은 신으로만 존재하여야 신일까? 아니라면 신이 신과 악마의 중간에 있어도 좋지 아니한가? 모든 것은 정해진 안에서만 진리를 찾는 것일까? 그 진리가 꼭 맞다고 보는 것일까? 싱클레어는 이런 고민을 데미안에 의해 시작했다. 자신이 그것을 거부하다가 어느새 그 거부를 타인에게 받았다.

자신만의 진리와 존재감을 찾는 싱클레어에서 헤르만 헤세는 자기가 어린 시절 질풍노도의 시기와 니체로 시작한 철학적 사유를 펼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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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사랑.데미안 - 한권의명작 7
문화광장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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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와 사랑을 읽으면서 나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관계를 주시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 작품은 이 두 사람의 관계를 나타나기 보다는 골드문트의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모든 것은 골드문트로 돌아가고 있었으며, 모든 갈등과 환희, 슬픔, 기쁨, 그리고 초월 역시 골드문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나르치스는 그저 골드문트와 상반되는 개념의 인간이었다. 그는 매우 똑똑하고 냉정하였으며, 게다가 현명하였다. 그는 완벽한 이성주의자였고 그런 완벽함에 따라 수도원에서 아직 20살 정도의 나이였으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 그 완벽한 이상의 세계를 닮아가던 나르치스에게 골드문트가 수도원으로 온 것이다.

골드문트는 매우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하얀 얼굴에 금발의 머릿결 그리고 그런 인상을 가져서인지 골드문트의 감수성과 깊은 심연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오히려 그와 친분을 나누려 하면 할수록 골드문트는 주변 학생들과 멀어지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주변 학생들에게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완벽한 이성과 이성의 세계를 원하는 수도원의 원장, 신부님, 그리고 위대한 학자 나르치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골드문트는 사실 완벽할 정도로 감성적인 인간이었다. 왜? 수도원의 높은 이상을 가진 그들은 골드문트를 아끼고 있었을까? 그리고 나르치스라는 고고한 인품을 소유한 수도자는 이 골드문트에게 사랑을 베풀었을까? 그것은 아마 진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골드문트는 어느 여인과의 격렬한 육체적 사랑에 따라 수도원에 나가고 많고 많은 여행과 모험 속에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온다. 수도원에 귀향하면서 골드문트는 자신이 가진 모든 인생경험을 살려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킨다.

그 예술은 매우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가치관을 지닌 나르치스를 감동시킨다. 아니 나르치스만이 아닌 다른 수도원 사람들에게 크나큰 마음의 파동을 전달한다. 그러나 분명 나르치스는 오로지 수도원이란 세계에 머물던 인간이었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와 달리 그 사회에서 모든 공간을 누빈 외로운 나그네와 같았다. 그런데도 왜 이들의 관계에서 진리의 길을 같이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남성적인 이성세계가 중시되던 그 공간에서도 이성에 의해 배제되던 감성과 자연, 그리고 자연과 동일하게 보이는 그 어머니라는 이름에서도 진리라는 거대한 장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골드문트가 왜 그토록 이성의 세계에 들어서지 못했을까? 나르치스와 달리 골드문트는 매우 섬세한 성격을 가진 사나이였다. 그는 언제나 작은 것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미친 광기가 속한 세계를 보면서 분노하고 울기도 하고 심지어 거기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골드문트를 잡아두지 않았다. 골드문트는 그 어느 곳에서도 환영을 받을망정 머물지 못하였다. 그의 매력은 너무 거대하여 많은 여성들의 육체적 사랑과 감성적 사랑을 만족시켜줄 뿐이지 그의 안정된 공간에 다가가지 않았다. 그런 외로움을 깊이 슬퍼하던 골드문트이었으나 이제는 오히려 외로움을 알고 그것을 털어버린다. 페스트로 인해 죽음이 가득한 마을에서 어느 아름다운 처녀를 구해 옆에 있던 겁쟁이 방랑자와 자연의 세계로 간다. 거기서 골드문트는 그 처녀에게 자신의 옆에 머물기보다는 페스트가 가라앉으면 다시 원래의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녀는 싫다고 했지만, 골드문트는 설득시킨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아름다운 처녀는 매우 수척한 모습으로 죽어간다. 어느 부랑자가 그녀를 능욕하다가 그 부랑자의 음산한 치아가 그녀의 젖가슴 주변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골드문트는 부랑자의 목을 비틀어 버려 이 세상과 하직하게 하였으며, 그 시체 역시 그냥 자연으로 보냈다. 그렇게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버리게 한 것이다. 그런 노력에도 골드문트는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부랑자의 이빨자국에 페스트가 감염된 것이다. 골드문트는 부랑자의 능욕에서 구출해주었으나 결국 페스트로 죽어간 그녀를 위해 그녀가 숨결을 듣지 못할 그 마지막까지 지켜주었다,

최후의 숨소리마저 멈추자 골드문트는 매우 슬퍼하며 그녀가 누운 오두막에 붉은 불씨를 던져 붉은 장미와 같은 불꽃이 춤추도록 하였다. 골드문트는 정말 많은 여행을 했다. 여자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 죽음의 위기에 빠지고,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또한 불쌍한 유태인 여성을 만나 그녀에게 미움도 받았다. 사랑만을 원한 것은 아니다. 길가면서 페스트로 죽은 가족과 페스트로 인해 땅에 매장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들을 위해 삽으로 그들의 얼굴에 한줌의 흙을 계속 뿌려 주었다.

골드문트는 생명이 살아가는 대지위에 누비고 또한 생명이 꺼져 사라지는 순간 그들을 대지로 보내주었다. 그런 골드문트이었기에 어느 산부의 해산에서 위대한 생명의 탄생을 보았고 한편으로 자신의 생명을 노리고 아름다운 처녀의 순정을 노린 두 명의 사나이를 죽임으로 생명의 허무함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골드문트 이 모든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새겨 그가 위대한 예술가로 변모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계속된 여행에서 어느 수도원에 세워진 마리아상을 보며 예술가의 길에 접어든 골드문트는 그 예술의 경지에 올라가면서 자신의 감정을 채우고 있던 그 모든 기억, 숨결, 눈물, 기쁨, 우울을 폭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많은 경험과 인생의 모험 속에 골드문트는 자신이 그토록 동경의 대상이었던 나르치스를 만난다. 사실 예술가로 들어서면서 그가 만든 예술작품은 요한의 상인데, 요한은 사실 나르치스를 생각하면서 만든 것이다.

그의 완벽한 감성이 최고의 이성을 지닌 나르치스 신부를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만남을 아주 극적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마을의 무서운 권력가의 집에 들어가 그의 애첩과 사랑을 나눈 골드문트, 그는 권력가의 감시에 걸려 결국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져갈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때 나르치스가 때마침 머물러 있어 그의 목숨을 자유와 예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둘은 예전의 스승과 제자보다는 친구로서 대등한 사이로 머문다. 그리고 오랫동안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있는 수도원에서 예술가의 혼을 불태운다. 그의 예술혼은 어머니의 그리움과 나르치스에 대한 동경심이 어우러져 위대한 예술작품이 나온다. 이런 예술가의 혼으로 이루어진 감성의 예술품이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한 이성을 지닌 나르치스를 감동시킨다. 아니 이제는 나르치스가 골드문트가 없으면 못 견딜 외로움과 허무함에 빠진 것이다. 골드문트는 오랫동안 수도원에 머물었지만, 그가 혼을 담은 작품을 만들면 다시 수도원을 나와 여행을 하려했다. 그의 작품은 그의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부상을 당하고 병에 걸렸으며, 오래 연명할 수 없었다. 그 마지막 여행은 결국 그에겐 죽음이라는 어머니라는 자연의 품으로 갈 수 있게 한 여행이었다. 골드문트의 여행을 기다리던 나르치스에겐 아마 그때만큼 괴롭고 외로운 시간이 없을 것이다.

결국 나르치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골드문트이나, 그의 가슴에 새겨진 것은 기쁨보다는 슬픔이었다. 골드문트의 귀향은 결국 골드문트의 유언을 들은 셈이었다. 평생 신을 위해 이성을 위해 학자적으로 살아온 나르치스가 어떻게 감성과 경험에 살아온 골드문트와 이토록 깊은 교감과 유대감을 나눌 수 있을까? 진리라는 세계에서 이성과 감성은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어도 본질은 진리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세계가 만나는 접점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오랜 여정처럼 기나긴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 소설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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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
김윤아 지음 / 일지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내가 보고 있던 어느 도서 한 부분에 이런 단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언캐니 밸리 이펙트(uncanny valley effect)"이다. 예전에 내가 은근히 생각해보고 영상관련 학문 도서 및 애니메이션 관련자료에서 조금 연계된 내용이 있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언캐니 밸리 이펙트’는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이론이다. 인형이나 만화 캐릭터, 로봇과 같은 인공체들이 인간을 닮아 갈수록 호감이 상승하지만 인간과 유사한 정도가 특정 시점을 넘어서면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플라 익스프레스>를 보고 어린이 관객들이 공포를 느낀다거나 <파이널 판타지>의 너무나 인간 같은 캐릭터들이 무섭고 징그럽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감정이입이 안되는 상황 등이 그 예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픽사의 <인크레더블>이나 <슈렉>같은 애니메이션들은 오히려 2차원의 평면적 캐릭터를 만들거나 완전히 인간과 다른 초록 괴물을 창조한다. 애니메이션에 있어 인간 형상 언캐니 효과에 대한 논의는 서울시립박물관 연국논문집 <현대미술과 미술관>의 수록 논문, 김윤아, 「그것은 영화인가 애니메이션인가: 인간의 형상을 중심으로」, 서울시립미술관, 2009년 참조] 

평소에 애니메이션 관련 글을 적는 입장에서는 이 말은 상당히 인상이 깊다. 이른바 애니메이션 캐릭터라는 존재들은 현실에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현실에 없는 허구의 존재이다. 문제는 실제 존재들은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담고 있으므로 그들이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문제로 인해 삶의 에로스와 죽음의 타나토스가 교차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라는 것은 실사영상으로 통해 삶의 모습과 더불어 죽어있을 그들을 불려오는 하나의 환영소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실사 안에 찍혀 있는 피사체에서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들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허무의 공간이란 것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죽어있는 자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은 자들을 만드는 것으로 이른바 죽음의 각인을 새겨주는 영화와 달리 영원성을 부여한다. 

원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원래 없어질 수가 있다는 소멸의 현상을 변증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영상에서는 빈 공간조차도 하나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존재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런가?
 

죽음이 원래 없던 이들을 탄생하는 것에서 우리는 애니메이션으로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고 말할 수 있는가? 그냥 TV나 영화관에서 보이는 유치하고 저속한 수준의 미디어로 비추어 볼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편견과 오류와 자만에 불과할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말하려면 우리가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관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오락과 재미로 부여하기 보다는 그 이상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내가 살펴본 도서에서 애니메이션에 얼마나 높은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지 기술한 도서가 있었다. 
 

그 책은 바로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란 도서이다. 이 도서의 큰 특징은 이른바 장인-작가주의적인 작품을 다룬다는 점과 상업적인 요소를 지닌 대규모 자본집약적인 제작방식보다는 1인 내지 소주정예로 이루어진 개인 중심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제작방식이 대규모 노동보다는 감독이 직접 모든 것을 구상하고 그리고 제작하므로 애니메이션이 모두 만들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하지만 그런 점이 오히려 작품에서 보이는 가치관과 예술성은 매우 뛰어나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한편의 미학강의를 받는 것과 같다. 미학은 미(美)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그 미라는 것이 단순히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게 보이는 모습보다는 그 내적인 가치와 담론을 어떻게 보여주고 표현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예술이라는 인간 내부에 있는 하나의 억압 내지 표현욕구가 타인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을 때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게 하는가에서 미학의 가치를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미학은 예술에 대해 철학이란 칼로서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처럼 애니메이션 내에서도 예술적인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가를 안다는 것은 애니메이션 미적 가치를 올리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려면 단순히 우리의 인식 속에 있는 고정된 관념보다는 그 이상의 이상과 사유로서 보여줄 필요가 있다. 특히나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이라면 그런 고정된 관념과 인식에 대해 확실하게 해체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이 있어야 한다. 책의 본문에서 이런 문구가 나온다.  

<아도르노는 “타락한 세계를 고발하기 위해서, 능욕당한 미의 명예를 위해서 예술은 추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는 예술은 잔혹해야 하고 혼돈을 가져다 주어야 하며, 고통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데올로기의 공범자가 되어 화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만하는 것은 진정한 예술이 아닌 것이다. 예술은 삶에 대한 부정성을 일깨우는 것이어야 하며 그 방식은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일 때만, 자신의 타자성을 내세우고 모순과 불협화음, 비동일성, 분열 속에서 스스로를 지킨다고 역설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애니메이션 및 영화 각종 이야기를 가진 서사구조에서는 평화로운 세계 내지 혹은 원만한 공간에서 하나의 침입자 및 원인제공자가 그 세계와 공간을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그 세계와 공간이 위태롭게 됨에 따라 불안정한 구조로 빠지고, 이에 대해 영웅이나 대항조직이 생기며 이들은 다시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이것이 보통 narrative의 정해진 간단한 패턴공식이다.
 

보통 이런 공식들은 자기반성보다는 외부의 인자를 찾아오기 때문에 그 갈등의 시발점이 정말 외부의 존재들이 의도적으로 했는지 아니라면 자신들이 그렇게 만들게 했는지가 알 수 없다. 가령 우리가 자주 보는 영화 중에서 베트남전쟁 영화가 있다. 거기서 베트남은 미국과 전쟁을 하면서 갖은 음모와 위협을 제공하고, 미국군은 여기에 대해 매우 어렵고 아슬아슬한 장면이 오고가면서 관객의 긴장감을 도모한다. 그리고 최종적인 승리에 맞이함에서 영화는 안정된 공간을 찾고 세상은 평화가 다시 찾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세상 베트남전쟁은 통킹만 사건으로 통한 첩보자작극이란 폭로로 통해 베트남전쟁은 정말 세계 평화의 - 악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 위협을 저지함에서 모든 것이 마친다. 이것이 보통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식, 혹은 영화관에 보러 가면서 미리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관객의 틀이다. 그렇지만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은 이런 고정된 인식이나 일반 대중들의 사고를 가진 관객의 생각들을 오히려 전복시킨다.
 

영화로 통한 장치가 아니라 영화로 통한 정치적인 강조로 변모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들이 기용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보기가 참 좋다는 것보다는 보기가 그다지 좋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준다. 정해진 방식과 모습 그리고 연출로는 기존 사고의식에 빠져 있는 인간의 한계성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허나 무조건적으로 이런 과격하고 전도적인 방식으로만 관객들을 자극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프리데릭 벡이란 감독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제작기간이 5년이란 시간을 소요되었는데, 막상 상영시간은 단 30분 내외이다. 그는 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혼자 작화작업을 하였으며, 작품 내의 마치 몽상의 세계를 꾸미기 위해 화학약품으로 펜이 묶은 셀을 닦음으로서 한쪽 눈을 잃어야 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어려움을 겪은 만큼 그의 작품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게 되었고, “나무를 심은 사람”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 나무를 심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 감독이 주지하고자 하는 의도나 가치가 그대로 실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작품들에 우리는 과연 예술적 가치를 배제하고 그대로 넘기야 하는 것일까?
 

때로는 이런 작품적 가치를 이해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게다가 예술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여 다른 애니메이션에도 예술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애니메이션인지 혹은 애니메이션을 위한 예술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것을 위한다고 하여도 애니메이션에 예술적인 가치가 있고, 그것이 미학적으로 풀어가서 철학적인 사유로 논한다면 애니메이션 과연 그저 가볍게 여길 수 있을까? 
 

ps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이 책을 저술한 김윤아 교수님에게 직접 서명을 받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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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증의 탄생 - 글쓰기의 새로운 전략
조셉 윌리엄스.그레고리 콜럼 지음, 윤영삼 옮김, 라성일 감수 / 홍문관(크레피스)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논증이 탄생은 논리적인 증명만을 원하는 도서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논증으로 탄생하는 것은 언어로 통하여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이 그 말로 통해 활자라는 매체로 상대방에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단순한 자기가 하고 싶은 주장만 제기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의 주장과 거기에 동반되는 의견, 그리고 여러 가지 부분에 대해 서로 토의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것은 단순히 자신만의 논리만 내세운 것이 아니라 그 논리로 통해 어떻게 상대방과 관계와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것이냐는 것이다. 진정한 논증은 자신과 우리만이 아니라 상대편과 타인의 발전을 같이 고민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자신 이외의 모든 상황을 지혜롭게 넘길 수 있는 하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 무기는 총과 칼처럼 남을 다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자신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핸디캡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상대방에게 자신의 뜻을 알릴 수 있는지 혹은 그 뜻을 어떻게 상대방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지는 대화로 풀어가는 현대인들의 큰 과제이다. 그런 점에서 논리정연하게 글을 적어서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도록 유도해야 하며, 거기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입장 역시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그런 글의 대화로서 풀어가는 그 과정을 3가지 단어로서 전제를 세운다. 그것은 로고스, 에토스, 파토스이다. 즉 논리, 입장, 감정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에토스다. 분명 책 제목이 논증의 탄생이나 논증이 탄생하는 것에서 로고스보다는 에토스를 중시한 점에서 나는 조금 놀랬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가 말하고픈 내용을 글로 적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를 남에게 전달한다는 전제 아래서 시작일 것이다.

내 생각을 전달함에서 상대방이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혹은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의 글을 적는다면 그것은 상대방이 잘못된 것보다 글을 적은 본인들의 잘못이 크다는 점이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 라는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하지만 단순히 어떻게 글을 잘 적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만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고민이 될 것이다.

문건을 작성할 때 어떤 명확한 주장과 전제를 정했는지, 그 주장과 전제를 상대방에게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이유와 근거를 찾아내는지? 정확한 이유와 근거도 있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문장을 꾸며서 간단명료하면서 상대방이 납득하기 쉽게 적을 수 있을까 등 다양한 언어기술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을 처음 읽은 나는 겉으로 읽기만 해서는 분명히 어려운 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 않더라도 이 책에 적혀 있는 안내들을 따라 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서는 글을 적어가는 방법과 기술 그리고 많은 사례를 통해 추후 글을 적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그 글을 적는 것은 기술과 방법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논리적인 사고로 통해 상대방과 대화로서 풀어갈 수 있지만, 그 논리자체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입장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이끌 수 있는 감정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글의 요소라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지나치게 논리적인 글을 상대방에게 차가운 칼날을 들이대는 것과 같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글은 너무 뜨꺼워서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글을 적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단지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과 자신이 내세우고 싶은 전제가 자신에게 모두 합당할지 모르나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상대방을 이해하고 납득시키어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할까? 단어 위치나 문장구조나 어휘구사 하나하나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하는 언어라는 마술에서 이 책에서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이 책에 적혀있는 부분만 매달리면 안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에토스는 이 책을 읽어서 얻어지는 보물이 아니라 평소 글을 적기 위해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 그 자체에서 생기는 보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의 탄생이란 이 책에서는 그것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충분히 그런 부분을 숙지하고 있다면 언제가 글을 제대로 적고 싶어 하는 미숙한 나에게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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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7-01-21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놀람 ㅋ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인 강원국 샘이 이 책이 추천을 하셨어요 그래서 리뷰를 보니 만화애니비평님의 리뷰가 퐉!감탄하고 있어요 법학 답안지를 쓰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거기서 젤 중요한 점이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부분을 논증하는 법이에요 ㅎ 이 책이 도움이 될까 고민은 하지만ㅋ 함 읽어볼라구요 ㅋ 제가 질문을 좀 못 알아듣고 글을 잘 못 쓰는 경향이 있어서요 ㅠ 눈이 많이 옵니다 길 조심해서 다니세요!!!

만화애니비평 2017-01-23 13:41   좋아요 0 | URL
추운데 잘 지내고 있나요?
이 책을 국문학도에게 소개받아 읽어보았습니다.
아직 비문이나 문맥오류가 많으나, 그래도 이 책 덕분에 많은 교정과 실력을 늘리게 되었지요. 전 남부권이라 눈발을 봐도 눈쌓인 것은 보기 힘드네요. 감기 조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