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의 사고 한길그레이트북스 7
레비 스트로스 지음 / 한길사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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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사고”를 읽어보기 전에 나는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읽어보았다. 야생의 사고와 달리 슬픈 열대는 학문적인 관점에서 기술하기 보다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 남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면서 그리고 그 밖의 공간을 이동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하나의 기행문에 가깝다.

 

그래도 그런 기행문일지라도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인 영역에서 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적어 내려갔기에 거기에 살고 있는 원주민에 대한 현재와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살아온 과정을 서술한 점에서 인류학적인 가치가 있었다. 또한 인류학적인 관점에 떠나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원주민들은 기존에 서구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이 아닌 레비 스트로스의 새로운 관점으로 그들을 관찰하였다.

 

레비 스트로스가 인류학을 연구하기 전에 레비 브릴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연구한 내용은 분명 인류학적인 부분에서 당시 기준의 근현대 문화에 살고 있는 유럽사회의 관점을 그대로 반영했는지, 레비 브릴과 레비 브릴 같은 사람이 관찰하는 인류학이란 그저 오만과 편견에 가득한 입장에서 본 학문이었다.

 

이에 반해 레비 스트로스는 그런 서구사회의 이성을 중시하는 일방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마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 사회를 가지고 있던 이성중심사고 방식이 오히려 이성적인 영역만 치중한 것 자체가 이성적이지 못한 것을 알릴 계기라고 본다. 앞서 보았던 슬픈 열대의 경우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다수의 원주민들을 볼 때 레비 스트로스의 깊은 관찰력과 이해력이 돋보였다.

 

레비 스트로스 본인이 서구인으로서 원주민들을 관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고 했다. 아마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계속 발전해 오면서 문명사회를 이룩한 서구사회가 아닌 말 그대로 원주민들의 사회구조에서 보자는 것이다. 그것이 아마 레비 스트로스가 프랑스에서 만들었으나, 곧 세계적으로 크게 학문과 사상의 발전을 이룩한 구조주의가 시작됨을 알린 것이다.

 

구조주의에 대해 내가 설명하고자 하면 그렇게 쉽게 간단히 하지 못한다. 그러나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레비 스트로스의 글에서 모든 것을 1가지 기준으로 하여 2원화적인 대립구도로 나누어 차별하기 보다는 그 2원화 대립이 보이는 각각 영역에서 보자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런 레비 스트로스의 시점이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최근 서구사회의 문화가 세계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정치, 군사, 정치, 경제, 사회 등 다양한 인간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구사회는 이미 자기들의 역사적인 흐름에 따라 서구화가 되었다면, 이에 반면에 비서구사회에서는 그 자체적으로 역사적 흐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화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영역이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변모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것은 기존에 있던 것을 지키기 위해 변화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유한한 생존을 가진 동물로서 어느 한 개인이 그것을 유지하고 가꾸고 지키고 싶어도, 그의 수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 흐름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지키고 하려한 그 가치가 그대로 소멸할 수 없다는 점이다.

 

레비 스트로스에겐 인류학이란 현재의 모습에서 미개사회라고 하는 곳은 보고 서구사회의 입장으로 독단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서구사회에 있는 인간이 그 세계의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고 한 것이다. 단지 미개인들은 문명인과 달리 문자문화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식적인 영역의 축적이 되는 문자와 그 지식을 체계적으로 전파할 언어학적인 체계가 없다는 점이다.

 

그런 미개인이란 존재라도 문명사회가 가진 이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이성적이지 못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그들이 가진 하나의 과학이란 점이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문명사회의 인간보다 더 그들은 과학적인 면모를 가질 수도 있다. 그들이 생존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자연 있는 그대로를 따르고 적응하였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적으로 물리공식이나 화학반응에 대한 내용은 원주민들은 모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자연에 놓인 어느 현상을 유심히 관찰하여 그것을 하나의 생활화 시킨 점은 분명 과학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중 제일 인상 깊었던 점은 식물분류학적인 내용이었다. 일반 식물학자들도 발견하지 못한 식물들을 매우 상세하게 관찰하여 분류한 점과 그 식물의 잎, 씨앗, 뿌리 등의 식물체 특성을 보고도 어떤 식물인지 알 수 있는가이다.

 

당시 20세기 중반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생물학 영역의 식물학자들도 활발히 활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식물분류체계를 훨씬 자세히 아는 반면 식물학자들은 같은 식물을 다른 종으로 착각하여 중복되는 식물종이 8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주민들이 과연 비과학적이란 사실이 맞을까?

 

그런 점을 시작하여 레비 스트로스가 보는 원주민들의 생활은 단지 그들이 미개하였다고 생각하기엔 너무 큰 착각이란 것을 보여주었다. 단지 내가 아쉬운 부분은 야생의 사고를 읽기 전에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과 구조인류학을 읽지 않은 것이다. 또한 레비 스트로스가 원주민과 그들의 생활에서 신화에 대해 연구하면서 신화는 공시론적인 영역 즉 시간의 영원성을 강조한 점, 역사는 통시성으로 공시적이지 못한 점을 내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다.

 

일단 레비 스트로스의 학문적 영역은 구조주의라고 하여도 그의 구조주의 영역 아래 있는 학문은 마크르스의 사회과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또한 기호학을 만든 소쉬르의 언어학이다. 이전에 마르크스 자본, 공산당 선언을 읽어보았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도 읽어보았지만, 메를로 퐁티와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은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그런 학문적 체계의 연계성에서 각각 이어주는 고리가 없는 상태에서 읽다보니 야생의 사고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레비 스트로스의 인류학적인 고찰 역시 매우 깊이 들어가고, 그들의 신화를 풀이하고, 그들의 이름과 토템까지 풀이하면서 원주민들의 생존방식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나는 레비 스트로스가 해석하기 위한 전초과정에 대한 부분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야생의 사고를 읽는 내내 조금 힘들었다. 물론 다른 서적도 마찬가지이나, 야생의 사고는 어떤 이론과 그 이론에 대한 정립을 내세우기 보단 인류학적 고찰로 인해 탄생된 학술서적이기 때문에 못내 아쉬운 것이다.

 

단지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은 역자후기에서 나온 것처럼 레비 스트로스가 얼마나 원주민들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점이다. 당시 서구사회에서 장 폴 사르트르와 같은 마르크스주의자와 그리고 마르크스에 의해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 시초자인 레비 스트로스 사이에 벌어진 학문적 논쟁이었다. 야생의 사고 9장에 레비 스트로스는 장 폴 사르트르와 그동안 벌어온 논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레비 스트로스에게 학문적으로 패배한 것은 프랑스 학문과 사상이 구조주의로 변화한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본다면 미개인들이나 혹은 미개인까지 아니지만 비서구사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적인 서구지식인들에게 큰 여파를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단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 서적 앞부분에 흑백과 컬러 사진이 있는데, 거기에 언제나 원주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1980년대 레비 스트로스가 안동 하회마을에 찾아와서 우리나라 전통문화를 관찰한 것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분명 어느 국가와 민족, 하물며 국가와 민족으로 규정하기도 어려운 소수 부족들까지 계속 생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원주민들의 신화이야기에 서구사회의 야만성이 엿보인다. 사실 기존에는 원주민과 같은 미개족속들이 야만적이라 하지만, 그들은 야만적이라 생각하면 안될 존재였다.

 

그들은 그저 자신만의 영역, 즉 인간 역시 자연이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원주민 신화와 그리고 토템에서 초반엔 동물, 식물, 돌, 생체 일부부분, 생활도구 등에서 칼, 총, 비행기와 같은 무기나 기계문명이 올라가 있었다. 이들의 생활영역에 새로운 변화가 생긴 것이다. 물론 인간은 통시성과 공시성을 둘 다 가지고 있으나, 이들의 통시성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역에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슬픈 열대나 야생의 사고를 읽으면 원주민들이 무참히 자신의 서식처를 잃고, 희생되는 장면이 머리 안에서 그려진다. 또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 등을 비롯한 그의 서적 내용도 생각난다. 욕망으로 가득한 문명사회보다 자연의 순리에 따르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미개사회가 문명사회보다 행복하지 말란 법은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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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지음 / 개마고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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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글을 본 것 같다. 국가에서 국민들을 통제하는 방법에서 국가 자체의 정치권력보다는 미디어로 통한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이다. 미디어 즉 매체라는 의미이다. 매체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느끼거나 혹은 판단할 수 있을 있게 해주는 정보적인 수용방법 경로이다.

그런 정보경로에서 미디어라는 이름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이전에 봤던 섹스와 돈이라는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도서에서 미디어로 통한 언론의 활약은 국민들의 인식과 행동 자체를 변환시키고 또한 그것에 알맞도록 맞춤식까지 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 말은 사실이다. 현재 독재국가 중의 하나인 북한에서는 언론을 오로지 (마르크스-레닌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독재정당이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언론이 나라 그 자체를 북한과 같은 괴뢰정부가 아닌 이른바 자유주의국가에서 한다면 어떻게 될까나? 물론 언론으로 통한 미디어의 전파는 경제적인 위력과 동시에 정치적인 압박도 들어간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의 독재가 아니지만 독재 내지 혹은 은폐, 조작, 공작의 방법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최근 내가 읽고 있는 도서 중에서 정치사상에 대한 안내 도서를 읽고 있다. 거기서 그 동안 내가 알고만 있었던 철학자 이름 한 명이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마키아밸리이다. 마키아밸리는 이른바 군주론(君主論)이란 정치에 필요한 하나의 교본을 저술한다. 그의 저술명저인 군주론에선 군주가 어떻게 대처해야만 정치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가이다.

따라서 과거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정치는 철학적인 영역에서 분리시킨 철학자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군주독재의 방법설을 알려준 마키아밸리 역시 알고 보니 그도 인권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군주가 집정하는 집정관, 우수한 엘리트 관료의 원로원, 그리고 국민들이 하는 호민관에서 3가지 정치적인 구도로 통해 독재정치를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사회에서는 군사·외교적으로 불안하여 다소 군주에게 강한 권력이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라는 것은 한 곳에 독재되어서는 안되고, 권력의 이동이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안되면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변모하여 모든 정치적인 간섭과 견제를 제외하고,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국가적인 권력기관 문제가 내내 한국사회의 신문과 방송에서 탑을 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이런 정치적인 권력과 올바른 정보를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국민 대부분은 일일이 정치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을망정, 하나하나 정치적 안건에 대해 참관할 수가 없다. 따라서 국가에서 뽑는 공무원도 있는 반면, 국민들이 선택하여 투표권으로 지정하는 선거도 있다. 문제는 이 선거로 통해 창출되는 정치가들은 상당히 높은 권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움직임에 많은 국가적인 대사가 좌우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이 좋은 정치가로서 활약하기보단, 역으로 그것을 이용하여 사익을 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을 견제하는 방법으로 국가공무원이라고 모두 그들을 제어할 수 없다. 오로지 그들을 손으로 뽑은 국민들만 가능하다. 그들에게 주어진 그러니깐 그 개인 자신들은 작고 외소하나, 그 개인들이 모이면 아주 크고 웅장한 심판관이 되어 자신들이 선발한  권력들을 심판할 수 있다.

문제는 그 권력을 심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얼마나 제대로 하고 있는가? 혹은 하지 않은가를 알아야 필요성이 있다. 이때 그 충실한 국민의 눈과 귀를 해야 할 존재가 바로 언론이다. 언론들이 타락하면 국민들이 거짓말에 넘어가고, 진실은 어두운 저 황혼 아래 사라질 것이다. 따라서 언론인들의 양심과 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선 제일 중요한 부분이다.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 자유가 없다면 그것인 민주주의국가가 아닌 그저 독재정치 세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언론의 자유를 방해하고, 오히려 매도한 언론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 책을 보는 나는 내내 많은 생각을 한다. 이전에 그토록 이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나, 최근 가질 수 없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했다. 그것은 조선일보에 대한 진실한 언론의 진실성이다.

내가 최초로 조선일보에 대해 의심하던 것은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임과 더불어 터진 김해 봉하마을의 사택이다. 참고로 본인이 사는 집은 경남 김해 옆의 부산이다. 부산 옆에 김해라면 당연히 어느 정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야기는 길가거나 혹은 가게에 물건 사러가거나 심지어 친구와 가족들 사이에도 듣는다.

이때 뉴스에 뜬 김해 봉하마을 아방궁 소식, 국가예산을 막대한 손해를 주면서 만든 그 개인 사택에 대한 기사가 조선일보에서 내내 터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김해 봉하마을 다녀온 주변 사람이나 그밖에 동네 소식으론 순 거짓말이었다. 아니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봉하마을을 가서 확인했다. 그런 헛소문과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는 것에서 말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를 보면 안정되어 가기보다는 서민경제가 어려워지고, 중소기업들은 모두 힘들어하고, 엔지니어업체들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물론 그런 올가미와 같은 불황들은 나의 목도 조르고 있다. 어느 사람들은 아마 조금 더 노력하면 좋은 곳에 가라고 하나, 내가 그런 곳에 가도 한국사회에는 반 이상의 사람들이 그런 생활에 처해지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언론의 역할이라면 국가정책의 문제점과 부정부패나 개선사항을 알리는 것이 우선할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권력에 대한 욕망에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노무현이 조선일보와 싸운 이유이다. 조선일보에 대한 내용은 과거 “부자 신문, 가난한 독자”에서 읽어봐서 어느 정도 짐작했다. 일제치하 고종을 폐위한 송병준이 운영하다가 훗날 독립군인 이상재에게 양도되다, 이상재가 독립적인 행태에 조선일보가 방응모에게 넘어가면서 친일의 역사는 조선일보에서 떼어낼 수 없는 과거이나 그들은 부정했다.

과거 신문기사에 대한 스크랩이 있는데 말이다. 어째든 그들은 친일세력으로 일제에 봉사하고, 해방 후에는 군사정권에 봉사했다. 한국 정치계에서 이른바 반공정치가 하나의 큰 과제일 때 그들은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정치적인 공세로 통해 민주주의를 억압했다. 당시 한일해방과 625전쟁에 막 휘말린 이후라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이란 미명을 수긍할 수 있으나, 문제는 그것이 계속되는 점이다.

뭔가를 좋은 것을 가져가는 부분이 있다면 뭔가 나쁜 것을 가져가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에 대한 사람들에 대해 인권적인 보장이 없을 때, 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선량한 시민이고, 이들이 항의하면 나라에 대항하는 이적행위로 간주했다. 부림사건이나 노동자탄압에서 많은 노동자나 서민들이 희생당했다. 그때 노무현이 등장하여 이들의 변호해주고 조선일보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5공 청문회에서 스타와 각종 정치적인 대립에서 노무현과 조선일보는 적으로 맞붙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는 그런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전쟁을 2002년 노무현이 제16대 대통령 선거후보로 출마하기 전에 나온 도서이다. 이 책에서도 밝히듯이 지금 나는 꼼수다로 한참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가 이때 재미있는 어록을 남겼다.

“‘우리는 대단히 편파적이다.’ 그러나 편파적이 되는 과정은 대단히 공정하다.” 공정함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주변에서 보는 환경적인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교육수준, 경제적 조건, 사회적인 위치, 그리고 주변 사람들 등 그 많은 것들이 인간의 판단력을 좌우할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의 판단력은 언제나 자기에게 편하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이끌리게 한다. 따라서 한 가지 이데올로기만 집중하여 초점을 맞춘다면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보일 것이다. 특히 이런 2원화적인 대립구도는 참 무섭고도 위험하다. 혹은 칸트가 제시한 3원화적인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는 할 수 없을까? 물론 해도 두 갈래 길 중에 선택해야할 순간은 없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살아가는 동물이고, 선택의 순간은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변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야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 사고에 대한 판단기준을 어떻게 제대로 보고 듣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 쪽에 치우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내 개인적으로 절대적인 중립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절대적 중립이라 외치는 자들이 더 심각한 이원화적인 대립구도를 가진 사람이라 본다.

그렇다면 노무현과 조선일보라는 여기의 이원화된 구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사람은 노무현을 어느 사람은 조선일보에게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래도 일단 여기서 이 글을 적고 있는 본인으로서는 노무현의 편이다. 내가 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내가 살아온 공간에서 자라온 환경이다. 노무현의 고향은 김해이고, 그의 운동지역은 부산이다.

내가 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은 여기 공간적인 상황에서이다. 아니라면 그의 어록처럼 “조선일보 사장님 회장님처럼 그렇게 고상한 말만 쓰고 살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분들처럼 천왕폐하를 모시고 일제에 아부하고, 군사독재 정권에 결탁해서 알랑거리고, 특혜 받아 가지고 뒷돈 챙겨서 부자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회주의자적인 인생을 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땅에 가난하고 힘없고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말을 고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시대 기회주의와 편의주의에 절은 그들의 사고방식은 결코 고칠 수 없습니다.”

이 말에 어느 사람은 공감 내지 부정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정치인들은 이런 말을 이구동성을 외친다. 서민을 위해서 가난하고 힘없는 시민들을 위하여 라는 미사어구를 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그런 현실에 놓여있거나 관찰하는 입장과 그것을 직접 보지도 않고 먼발치에 방관하는 자들에겐 이 말에 대하여 과연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도 노무현을 싫어하기도 한다. 그래도 서민들은 누구를 더 좋아할까?

이미 죽어 온 몸을 불살라 뼈만 남아 가루로 되어 어느 단지에 모셔진 노무현이나, 그의 죽음은 조선일보와 전쟁을 끝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일보의 전쟁을 하게 된 사람은 노무현이 아니라 노무현이 아닌 존재로 되었다. 노무현은 아직도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에 등장하는 유령처럼 혹은 칸트나 마르크스처럼 유령이 되어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 망령이 되어버린 진짜 유령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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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 The King of Pig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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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을 보면 3명의 친구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은 돼지들 무리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 돼지들이 군림하는 공간에서 돼지의 왕이라는 것은 곧 돼지들이 우글거리는 그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지겠다는 의미이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돼지란 우리가 알다시피 우리 인간의 단백질과 지방 등을 공급하는 식량원 중에 가장 중요한 가축이다.

그런 돼지를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열심히 먹이를 먹고 먹어 언제나 살을 찌우기 바쁜 욕심이 많은 동물이다. 동물에겐 본능만 존재하고 있기에 언제나 그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그런 돼지가 그것도 식탐이란 욕구에 충실한 돼지를 언급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는 존재가 과연 식탐에 빠져 허우적대는 돼지들의 천국이 아닌가 싶은가 라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이란 함은 정말 하늘나라 선녀님이나 천사들이 있는 천국이 아니라 온통 더럽고 추악하며 차마 옆에서 보는 것조차도 숨이 막히는 공간이 아닌가 싶다. 그런 숨 막히는 공간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이다. 그런 더럽고 추악한 현실을 우리는 돼지의 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작은 어느 한 여인의 죽음부터이다. 그 여인은 주인공 중에 하나인 황경민의 아내였다. 작품 내의 대사를 들어보면 경민이가 대학을 다닐 시적에 만난 후배로 경민을 잘 따르던 여자인 모양이다. 그녀가 죽기 전의 정황으로 식탁위에는 음식이 차려진 것으로 보아 경민이 사업이 망해도 그녀는 경민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경민은 자신이 사랑하던 아내를 목을 졸라 교사시켰다. 그리고 집안 주변을 보니 가득하게 붙여진 붉은 딱지였다. 경민은 사업에 실패하여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여 이제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주 예전의 친구였던 정종석에게 전화를 한다. 15년 전에 중학교 다닐 때의 친구인 그에게 전화한 것이다. 왜 경민은 종석에게 전화를 하여 그를 불러내었을까?

모든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되고, 그런 의문을 뒤로한 채 경민은 샤워를 한 후에 자신의 몸을 검은 하늘이 보이는 창밖에 비추어본다. 거기에는 경민의 모습에서 어느덧 괴물처럼 보이는 돼지 한 마리가 보였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한 마리의 추악하고 험상궂게 생긴 존재라고, 하지만 그것은 정말 추악한 것인가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내내 상영되면서 반전을 이룬다.
주인공 경민은 중학교를 다니면서 이른바 왕따 혹은 학급 내의 불량하지 않은 불량아들에게 폭력과 횡포를 당하는 학생이다. 어느 중학교에서 흔히 보일 것 같은 아주 소심하고 약하고 비열하기도 한 인간이다. 그에겐 친구 한 명이 있다. 그의 이름은 종석이다. 종속은 경민과 달리 집안이 무척 가난하나 평소 학급 내의 통치자에게 그다지 눈에 걸리지 않은 존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학급 내의 분위기가 싫었다. 반에 반장이란 녀석은 겉으로는 학급을 잘 조절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는 사실 폭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게다가 덩치도 좋았고 싸움도 조금 하는 편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반 전체 아이들은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 반장에게 늘 경민은 수치스러운 장난을 당한다.

반장이 경민에게 다가와 경민의 바지에 손을 올린 후에 경민의 성기를 만지면서 조롱하듯이 약을 올린다. 그런 부당한 횡포에도 경민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당한다. 다른 날이었다. 3학년 중에 자신이 총학생회장 대표라고 하는 사람이 경민이 있는 반에 찾아와 자신을 뽑아달라며 후배들에게 이야기한다. 그때 경민은 숙제를 다시 정리한다고 연설을 듣지 않고 그냥 자기 숙제만 정리하고 있었다.

갈등의 발단을 지나 위기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이다. 경민은 연설을 제대로 듣지 않은 이유로 학급 내의 반장에게 모지게 폭행당한다. 이때 보고 있기 거북한 철이가 나와 반장을 엄청나게 때린다. 물론 이번 일만이 아니었다. 경민만 아니라 종석이까지 괴롭힘을 당해도 철이는 폭력으로 대처해주었다.

그러나 이것이 불행의 시작과 종말을 동시에 알리는 비극이었다. 철이는 사실 인생에 대해 상당히 불만을 가진 비관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집을 버리고 나간 아버지를 증오하며,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집을 나간 바람에 철이의 어머니는 경민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성인용)노래방에서 일을 한다. 철이에게 보이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이며, 그가 바라는 것은 그런 부조리한 현실 안에서도 자신들을 억압하는 학교의 권력자들이었다. 


 


학교가 비록 어린 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이 교육을 받고 있는 기관이라고 하나, 사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런 축소판 사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암흑적인 면도 불합리적인 면이 많이 나온다. 철이는 자신이 겪은 사회적인 억압과 횡포에 직접 대항할 수 없으나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에서는 가능했다. 그는 돈도 많고, 권력을 가진 녀석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철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혜택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런 혜택이 없어서 무시당하는 것에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 가난하다는 게 죄라는 부분이 여실히 나타난다. 우선 철이는 아버지가 나간 것이 집안 가정경제가 엉망이 된 것이 원인이고, 어머니가 윤락녀가 되어 경민의 아버지에게 맞는 이유도 다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종석이의 누나가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는 이유도 다 가난해서이다.

왜 가난한 것이 죄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영화 중간을 보면 가난하다는 것은 죄가 되고, 그것은 하나의 권력이 되어 가난한 자가 억압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그 대표적인 모습은 종석이가 학급의 반장 일행에게 폭력을 당할 때이다. 그의 얼굴이 무참하게 신발에 밟히는 클로즈업된 모습에서 우리는 그 폭력의 당사자의 신발을 잘 봐야 한다. 



그가 신고 있던 신발은 나이키 운동화이다. 나이키는 유명메이커 상품이다. 이것은 곧 상품이 기호이고, 기호가 곧 상품이라는 의미이다.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기호를 소비하는 것이다. 곧 종석의 얼굴을 무참하게 밟는 신발 가격이 10만원이라면 실제 그 신발의 기능할 수 있는 상품가격은 3만원이다. 나머지 7만원은 나이키의 상표가격이다. 그것은 곧 신발을 신는 것이 아니라 나이키를 신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런 기호의 소비가 작용하고, 그런 점은 하나의 계급을 형성한다. 또한 현대사회는 소비의 문화이기 때문에 결국 소비로 통하여 자신의 계급이나 위치를 나타낸다. 문화자본에서 소비경제능력은 문화의 지표를 나타나게 해준다. 그런 점은 무참히 얼굴을 밟히던 종석의 누나에서 알 수 있다. 종석의 누나는 집에 와서 청바지를 사달라고 졸라댄다.

친구들은 모두 그 청바지를 사서 입는데, 자기는 그 청바지가 없어서 애들이 무시당한다고 한다. 흔히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누구는 소유하고 있는 반면 누구는 소유하지 못한다. 소유하지 않음은 곧 도태로 치부되게 되고, 문화적 공유의식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덕분에 단칸방에 살아가는 종석의 가족은 누나의 응석에 결국 그 청바지인 guess 블랙진을 사게 된다. 단칸방에 식구 4명이나 자는데, 그 청바지를 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누나는 이 시대의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누군가를 뒤쫓아 가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란 강박관념이 말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의 욕망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으로서 사회적인 존재로 부각 받는 것이다. 문제는 욕망은 욕구와 다른 점이다. 진짜 돼지는 먹기만 하면 배부르기만 하면 그 욕구는 다 한다. 인간의 욕구는 돼지와 처음에 같을지는 모르나 욕망은 다르다. 욕망은 욕구를 지나 인간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

종석은 그런 누나의 모습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도 역시 소비사회의 인간으로서 욕망은 있었다. 학교에 갈 때 누나의 청바지를 입고 갔으나 문제는 여자청바지는 삼각형이 붉은색이라는 점이다. 그가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고 들어오니 학급반장과 그 일행들이 종석의 바지를 찢어 버려 칠판에 붙였다. 그것도 모자라 종석이 입고 온 청바지가 여자용이니 그것을 여자가 마치 남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하여 하는 모욕적인 그림을 그린다.

가난하지만 어떻게든 몸부림을 쳐도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은 오히려 묵살하고 놀리는 것이다. 그래서 종석은 돼지들의 세계인 자신의 학급과 학교를 저주한다. 그런 곳에 종석의 친구인 경민 역시 저주한다. 자신을 때리고 놀리고 조롱하는 학급을 말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모든 것을 우선시 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시골에서 전학 온 안경잡이 녀석을 특히나 그랬다.

안경잡이 우등생 천영이는 공부도 잘하였으며, 처음에 그를 달갑지 않은 반장과 일행에게 대항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연히 함정에 걸려 그들에게 대항하려 했을 때 옆 반에 있던 학생회장 졸개 하나가 천영이를 무참하게 때린다. 그 후 천영이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며, 반장 친구녀석이 그의 바지 위에 손을 올려 성기를 만져도 오히려 웃어댄다. 폭력이란 이름 아래 모든 것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 세계에서 유일하게 대항할 수 있었던 존재는 바로 철이였다. 철이는 경민과 준석이에게 모두 희망의 존재였다. 그는 패싸움을 하여도 절대 물러서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유명한 싸움꾼이 와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 모조리 이겨주었다. 학교 선생이 우연히 소식을 듣고 와서 철이를 때려도 철이는 학급반장과 옆 반 싸움꾼을 모조리 잡아 패버렸다.

철이는 유일한 돼지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돼지의 왕, 아니 돼지의 왕을 능가하는 괴물이었다. 철이의 존재는 자신들만의 세계, 즉 안정화된 세계를 원하는 학급반장과 학생회장에겐 눈의 가시거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누구일까? 학생회장과 반장은 겉으론 학교 분위기를 위해서라고 하나 폭력과 협박으로 통치한다. 어떻게 본다면 정치란 인간들 사회에서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라는 철학적인 질문보단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잘 눌려 자신들이 이익을 보는가이다.

정치라는 것에 철학보다는 사익이라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 폭력은 거기에 동원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폭력 뒤에는 또 권력을 이용했다. 그것은 처벌이란 제도였다. 분명 잘못은 반장무리가 잘못하였으나, 모든 상황적인 최종 죄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철이었다. 정학을 당한 것도 심지어 퇴학을 당한 것도 말이다.

퇴학은 학생회장과 그 일당들이 단체로 경민과 종석을 붙잡아 가혹하게 폭력을 휘두르고, 자신의 방해물인 철이를 불러내어 굴복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철이는 굴복하기 보다는 떼로 덤벼드는 학생회장 일원들을 때려 눕혔으며, 최후에 자신의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될 때에는 나이프를 꺼내어 자신을 붙잡고 있던 녀석의 손등을 베었다. 



철이의 폭력은 권력을 잡기보다는 권력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것은 파시즘으로 얼룩진 학교의 전체주의에 대항하던 철이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악은 죄가 되어버렸다. 중학교 1학년인 이제 퇴학을 당하고, 집안은 엉망이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객지에서 자살하여 죽었다. 더는 철이에게 삶의 의미는 없었다.

그런 철이에게 한 가지 다른 희망이 생겼다. 철이의 어머니는 언제나 죽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희망이 잃은 채 살아간다. 그런 철이의 어머니가 좌절할 때 철이는 모든 분노와 좌절에 이성을 상실한다. 철이는 식칼을 들고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때마침 어머니는 노래방 사장인 경민의 아버지에게 모질게 혼나 그것이 서러워서 혼자서 울고 있었다.

게다가 가게 전화기로 자신의 언니에게 전화하여 사는 것이 어렵지만, 남편이 죽었지만 그래도 철이가 있어서 힘내서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철이는 그 말을 듣자 어머니를 죽일 수가 없었다. 대신 어머니를 괴롭히는 경민의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포기하게 되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친 경민이 때문에 노래방 사장이 경민이 아버지란 사실을 안 것이다.

철이에겐 더 이상 돼지의 왕으로 군림할 수 없었다. 그는 퇴학은 당했지만 그가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아버지가 객지에서 죽어 자신의 복수의 대상이 없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려 모든 것을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까지 철이가 있어서 살아간다는 말에 죽을 이유도 없어졌다. 또한 학교에서 잘만 하면 퇴학에서 재입학이 가능하다고 한다.

문제는 철이가 퇴학을 하고 나서이다. 철이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퇴학을 당하여 미친 듯이 본드를 마시고, 세상을 저주할 때 그는 자살할 것이라 한다. 자살을 하여 자신과 자신의 친구를 괴롭히던 부와 권력을 지닌 반장과 학생회장, 그리고 안일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교장과 선생에게 복수하기로 한다. 그런 최고의 방법은 자신의 생명을 던져 모두를 절망으로 만드는 것이다.

거기서 인상 깊은 말은 철이가 만약 이들이 어린 시절 이후 어른이 되어도 이들은 과연 변하는가라는 것이다. 계속 이대로 계속 커서 어른이 되어도 그들은 같을 것이다. 왜냐하면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축소판에 있던 자들이 사회로 가는 것은 확장되어 팽창되어 나갈 뿐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폭력과 압박이 강해질 뿐이다.

아무리 가난하고 힘이 약한 자들은 발버둥 쳐도 그 자리에서 헤맬 뿐이다. 그 말은 남동생 종석에게 뺨을 맞은 종성의 누나가 한 이야기처럼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고등학교만 나오고, 결혼하여 자식을 놓아도 계속 가난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상에 열심히 할 필요 없이 그저 원하는 것을 억지로 손을 넣으려 한다. 그것이 비록 법적으로 틀려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뭔가 고칠 수 없을망정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분노와 울분 정도는 보여주어 파장을 줄 수 있다. 3친구의 대화에서 그 녀석들이 어른이 되어 중학교 시절이 과연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좋은 추억으로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가이다. 반장과 학생회장과 싸우고 대들어서 퇴학당한 철이로서는 그것이 최고의 복수였다. 만약 그 복수가 통한다면 반장과 학생회장은 더 이상 자신들의 부당한 폭력정치로 이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한 월요일 조례시간 철이는 학교건물 옥상에 나타나고, 그대로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즉사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굳이 영화관의 스크린에 나오지 않아도 말이다. 그 뒤의 일로 종석과 경민은 평생 말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실 철이는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사랑을 보고 다시 제대로 살아가기로 한다. 게다가 학교에 다시 오면 반장과 학생회장에게 더 이상 눈에 가시가 되지 않고, 적당히 살아가려 한다. 그것을 위해 철이는 경민에게 자신이 옥상에 올라가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면 비명을 질러달라고 한다. 만약 지르면 퇴학은 무효가 되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권력자들은 그렇게까지 괴롭히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그날 철이는 떨어져서 죽는다. 그 죽음의 원인은 경민은 알고 있었다. 바로 뒤에서 종석이 밀었기 때문이다. 종석은 철이가 죽어야지 자신이 비로소 지긋지긋한 학급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비밀을 풀기 전에 분명 경민의 행동들이 비겁하고 줏대가 없었다. 철이에게 붙다가 전학생에게 붙다가 이제 다시 철이에게 가다가, 옥상에서 학생회장 일당에게 맞을 때에는 철이를 불러 친구를 팔아먹은 것이다.

그런데 그런 비겁한 경민보다 더 비겁한 것은 종석이었다. 종석은 마치 옆에서 관찰하고 지켜보는 입장에 가깝다. 그는 물론 철이의 광기에 동의하여 고양이의 배에 나이프를 찔러 죽인다. 반장과 싸움꾼이 철이에게 맞을 때 반장 친구녀석이 교무실 가는 것마저 길을 막는다. 그런 그가 철이를 죽게 한 것이다. 그가 철이를 죽이게 한 것은 돼지의 왕이 필요해서이다. 왕은 모든 것을 통치하나 모든 희생을 감수하는 희생양이었다.

왕은 곧 지배자이며, 하나의 제물인 것이다. 철이는 돼지의 왕으로 되기를 종석이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기 때문에 종석은 억지로 철이를 돼지의 왕으로 만들었다. 그런 종석의 비밀을 알고 있던 경민은 15년 지난 후에 종석 앞에 그 비밀을 폭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경민이 진정 자신이 돼지의 왕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15년 전에 이루지 못한 철이의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 



종석이 학교건물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이때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돌아보니 차가운 콘크리트 위에 15년 전의 바로 그 자리에 철이가 죽었던 자리에 경민이가 자살하여 차가운 시체로 변한 것이다. 그때 종석에게 걸려온 종석의 여자 친구 목소리에 종석은 아주 무서웠다고 눈물을 흘리면 절규한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로 지금 어디냐는 말에 그는 자신이 나온 초등학교가 아니라 바로 이 현실이라고 한다. 그렇다. 돼지의 왕에서 돼지들은 이 현실에 살아가는 추악하고 비겁하고 치사한 인간들인 것이다. 마치 그것은 종석이 교실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주변 학급학우들이 무관심하게 외면하는 모습에서 말이다. 돼지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는 약자는 그저 밟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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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서진 2020-05-04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돼지의왕
 
정치체에 대한 권리
에티엔 발리바르 지음, 진태원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인간들이 누리는 권리라는 것이 무엇일까? 혹은 그 권리를 당연한 것이고, 만약 당연하다면 과연 그것이 나만 우리만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을 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지은 저자는 “에티엔 발리바르”로 프랑스 파리10(낭테르)대학의 교수로 재직한 사람이다. 번역자는 이전에 자크 데리다가 저술한 마르크스의 유령을 번역한 진태원 교수이다. 진태원 교수가 주로 프랑스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도서를 번역하는 것으로 아는데, 여기서 진태원 교수의 연구목적을 이 책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아니 애초부터 진태원 교수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참고로 역자후기를 유심히 보면 2011년 9월에 번역을 완료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갈등과 원인들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체에 대한 권리라는 책으로 통해 과거 프랑스에 있었던 일들과 그리고 그 일들을 서술하는 발리바르의 연구에서 과연 무엇이 문제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일까? 생각을 할 수 있다.

다소 철학적인 범주라기보다는 정치학 범주에 가까운 이 책은 정치라는 것 역시 철학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들을 나에게 부각시켜 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발리바르는 프랑스란 국가에 대한 문제점을 소개했다. 그 문제점이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는 자유와 평화 등 같은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를 잘 지키고 보전한 국가로 알고 있다.

게다가 루이16세 국왕과 마리 앙투와네트 여왕을 날카로운 단두대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만든 국가이다. 그 후에 자코뱅파, 왕당파, 나폴레옹, 독일과의 전쟁, 세계 제1차 및 2차 대전 등등 그 만큼 많고 많은 전쟁과 혁명, 사건들이 늘 존재했던 나라이다.

또한 위대한 철학자 장 자크 루소가 프랑스 혁명 전에 있다가, 20C에 도달해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문학자 롤랑 바르트, 실천하는 철학자 미셀 푸코, 프로이트를 이은 정신분석학의 권위자 자크 라캉 등 이른바 프랑스에서 등장한 구조주의와 그 뒤를 이은 후기 구조주의는 21C에 살아가는 지금 현실에서도 그들의 철학과 사상들은 위대한 업적으로 남겨져 있다. 또한 프랑스는 철학과 더불어 피카소를 배출한 예술의 명국이 아닌가?

그런데도 이런 자유와 평화, 철학과 예술이 발전한 나라에도 멍은 있었다. 아니 확실히 정말 이런 문제는 잘못되었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것은 오래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고,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알제리에 가한 행동들 역시 과연 자유와 평화를 외친 국가라는 슬로건에 부합되는가이다.

이전에 다른 도서에서 paris-match 즉 파리의 마치라는 사진을 보았다. 이 사진에는 어느 흑인 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며 경례를 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 의미는 과거 프랑스에서 알제리 독립전쟁에 참여하면서 자신들의 전쟁이 합당하고 정의롭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광고인 것이다.

흑인소년이 프랑스 국기를 보고 경례한다는 의미는 결국 흑인소년은 알제리 국가국민이고 그들은 프랑스에 충성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흑인의 선택 범주에서 어른이 아닌 소년의 의미는 아직 그들은 어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 어리고 미숙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지배하여 올바르게 그들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서양이 동양, 아프리카, 혹은 문화적 수준이 자신들보다 미개한 나라와 민족들은 문화적으로 우수한 국가와 민족에게 통치를 받는 것이 합당한 파시즘이 이르게 된다. 그런 파시즘을 이 책 정치체에 대한 권리에서 다루고 있다. 파시즘은 상당히 무섭다. 과거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파시즘적인 정치노선으로 통해 다른 민족을 억압하고 자국민들을 전체주의로 만들어버렸다.

특히 히틀러의 나치즘은 유대인에 대한 학살과 더불어 잔인한 반인륜적 행위를 저질렀다. 문제는 이런 파시즘에 대항하는 여러 연합국 노선이 당시 그들의 투쟁은 옳으나 그 후가 문제다. 그들 역시 파시즘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파시즘을 척결한 순간부터 자신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하는 안일한 의식구조다.

혹은 그런 의식구조가 자기들에겐 자유와 평등이라는 보편적인 진리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고, 그런 자유와 평등이 없는 국가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최근 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이른바 자본주의국가와 대립되던 (스탈린주의적인) 공산주의의 몰락은 탈이데올로기와 탈냉전으로 이어지겠지만, 그런다고 하여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는 해결된 것이 아니다.

이 책에서 프랑스는 아주 잔인한 법을 시행한다. 어떤 정치인 법을 발효한다. 문제는 그 법에서 프랑스의 외국인들을 강제로 비행기로 태워 추방하는 것이다. 그들의 인권과 의식에 대한 눈곱만큼의 인정도 없이 보냈다. 게다가 비행기 안에는 산통으로 괴로워하던 임부도 있었다. 임산부가 그 긴 시간동안 비행기 안에서 산통으로 괴로워하면 임산부와 태아의 생명이 위험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강제출국을 시켰다. 이게 과연 인권적이란 말인가? 그러나 프랑스에선 오히려 이것이 인권적이라 말한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이 프랑스어로 프랑스 안의 모든 것을 누려야 한다. 이른바 국민사회국가라는 것으로 자기 자신들이 파시스트로 변모한 것도 모른채 파시즘에 빠진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극단적인 극우들은 유대인들의 묘지를 훼손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을 네오-나치즘이라고 했다.

이미 죽은 자들의 무덤인 묘지를 훼손할 필요가 없으나 그들은 자신들이 애국주의를 외친다. 타자와의 경계선을 정하여 자신들의 가치가 옳다고 폭력적인 행동이 결국 애국이란 단어로 연계되는 게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태이다. 최근 얼마 전에는 어느 극우인물이 기관총을 난사하여 사람 100명 정도가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과연 이런 행동들이 왜 일어나는가?

이른바 국민을 위해서라는 슬로건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혹은 그 국민이 구성하는 국가를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불안함과 불편함을 자기 스스로 개선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아닌 타자들에게 전가하여 자기비판에서 도피한다. 이런 방법은 프랑스에서 우파나 좌파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국가경제를 위해서라든지 혹은 노동자를 위해서라든지 어느 쪽이든 파시즘으로 빠진다.

그러나 본인들은 파시즘이 아니라고 한다. 파시즘은 계속 가속화되어가고 있으나, 그 주범들은 각성하지 못한 채 계속 자신들의 파시즘을 정당화할 희생양을 찾는다. 특히 그것이 외국인이란 존재에 가장 부합된다. 초기 그들이 유입될 때에는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노예일수고 있고, 혹은 아메리카 드림처럼 해외이주로 통한 성공을 꿈꾸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낯선 타국에 와서 제대로 기반을 갖출 리가 만무하다.

그들은 최하의 조건에서 시작하여 갖은 허드렛일이나 위험한 일들을 수행한다. 하지만 그들도 점차 교육을 받고, 주변 현지인과 교류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사회에서 새로운 존재로 등장한다. 문제는 그들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내치는가?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즉 인종차별적인 행위들은 여지없이 터진다.

그런 행위를 저지르는 국민들은 자신들이 과연 자유와 평등에 의거한 인민주권을 외치는 것에서 과연 옳은가?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만의 자유와 평등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들을 몰락시키려 한다. 방법은 많다. 법적으로 강제퇴거와 출국시키거나 또는 사회구조적으로 견디기가 어렵게 하던가?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주 쉽게도 혹은 당연하게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고 실행하는 이들은 자유와 평화를 외치고 있다. 프랑스에서 바로 그 무섭고도 잔인한 파시즘이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도구로 되어가고 있는 셈인 것이다.

아마 그런 내용을 진태원 교수가 이 책을 번역하여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한 것이라면 우리 역시 그런 파시즘에 빠져있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는 파시즘에 대항하여 생긴 대항세력 역시 파시즘화되어 간다면 결국 파시즘끼리 싸움이다. 그래도 문제는 먼저 파시즘으로 무장하여 파시즘을 만들게 한 원인부터 찾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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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주요 본문에 대한 해설.번역.주석
조대호 역해 / 문예출판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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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形而上學)의 시작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로 알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은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여전히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형이상학이란 철학, 미학, 신학, 자연과학 등 많고 많은 분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 형이상학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사유하고 인식하는 모든 것들의 출발을 찾아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읽어보며 생각한 것은 형이상학이란 정말 어려운 학문이나, 그 학문적 영역이 내가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이나 또는 일상적으로 접하는 분야에서나 흔히 겪을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일단 meta-physics라는 것은 physics의 물리학적인 범주에서 그 너머에 있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장 인가의 눈에 보이는 것이든 혹은 보이지 않은 것에도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었다. 지금은 자연과학이란 분야는 형이상학적보다는 형이하학적에 가깝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갖가지 풀리지 않은 분야나 또는 새롭게 정립되는 분야 때문에 자연과학이 고대그리스에선 철학자의 영역인 반면 지금은 과학자 또는 그 과학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는 공학자의 영역가지 올라갔기 때문에 자연과학은 철학에서 가장 멀어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현미경의 발달이 아주 크지 않았나 싶다. 현미경의 발달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는 형이상학 영역에서 인간 그 존재에 대해 연구했다. 그런데 인간에 대해 연구하면서 인간 신체와 관련된 의학이나 또는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기상학, 천체학, 생물학에서 당시 인간들에게 볼 수 있는 대상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인간의 세포가 보이고, 인간 주변에 있는 미생물들이 보이며, 지구 멀리 존재하는 태양계 행성까지 보게 되었다. 게다가 인간 신체구조와 작동원리, 해부학적인 학문발달은 인간 그 자체가 당시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진 사고와 다른 것을 증명했다. 물론 과학기술 발달은 인간의 인식을 변화할 수 있으며, 그 인식의 변화에서 인간 사고영역까지 변모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그런 인간의 존재론, 인식론, 마지막으로 신학 영역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란 학문으로 심리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지구과학, 철학 등의 영역으로 다룬 것이다. 단지 조금 내가 생각을 달리하게 된 부분은 형이상학에서는 물리, 논리, 윤리 3가지로 알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윤리학을 다루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란 윤리학 교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간간히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자료언급과 주석이 달리기도 하였다. 일단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그 서적 원본은 번역하기 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형이상학을 연구한 철학교수가 연구한 내용으로 적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이 들어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형이상학이란 학문영역은 인간의 그 자체에 대해 다루는 존재론적 인식론적, 영혼적인 부분이 많기에 쉬운 도서는 아니다.

단지 그 다루는 내용들이 너무 우리 인간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많이 접한다는 사실에 놀랄 뿐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지나가는 생활 속을 다루는 형이상학에서 인간의 사유라는 것에 대해 단지 사유할 것인가? 아니라면 그 사유에 대하여 다시 더 사유를 하여 그 사유의 존재 근본존재에 대해 탐구하는 점에서 어떻게 본다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단순히 일정한 틀에서 생각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다고 하여 이 도서를 읽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100% 옳다고 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와 현대사회는 당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신학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아테네의 민주사회라는 것을 자신의 스승의 스승 소크라테스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예와 동물에게 사고할 능력도 없거니와 그들은 어떻게 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 시대엔 노예사회가 존재했고, 지금은 존재하지 - 일부는 존재하겠지만 - 않는 것이 당연하다. 노예라는 존재도 결국 인간이고, 노예 역시 인간으로서 가지는 감정과 이성을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러면 노예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 아닌 동물이라면 그가 세운 형이상학에서 아무리 논외로 설정해도 그가 세운 학문적 뿌리에서 명백한 오류를 저지른 점은 분명하다.

그래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비교하면 재미는 장면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이 있는 그림을 본다. 플라톤을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며 손가락을 위로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보면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다. 진리는 플라톤에게 이데아 세계에 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에 있다. 어떻게 보면 형이상학이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일 수 있겠지만, 결국 눈에 보이는 존재에 대한 존재에 다가가니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현실에서의 존재들에 대한 사유적인 사고에 대해 분명 사유의 대상은 눈에 보이나 사유 그 자체는 눈에 보일 리가 없다. 그런다고 하여 그것을 그저 있다고 하여 거기서 끝나기만 한다면 존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왜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라는 질문처럼 있음에 대해 탐구하고 사유하는 형이상학은 여전히 인간의 인식론과 존재론 그리고 영혼에 대해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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