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그림으로 이해하는 교양사전 2
김만권 지음 / 개마고원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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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라는 것은 정말 쉽게 생각하고도 어려운 분야이다. 그것은 인간이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과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이고, 게다가 그 존재들이 모인 단체, 조직, 사회, 국가, 연합 등 다양하고 크고 작은 그룹 조직이 있기에 인간의 정치적인 영역은 널리 뻗어 나간다. 그러나 그 정치적인 영역은 단순히 정치라는 것에 이끌려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인자에 의해 변화한다.

 

심지어 신대륙 발견, 천동설에서 지동설, 종의 기원, 무의식의 발견, 컴퓨터와 자동차, 컴퓨터와 핸드폰 이 많고 많은 것이 정치라는 영역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정치에 대해 막상 논하면 많은 문제와 벽에 걸린다. 그 정치라는 것은 언제나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로 보이는가 라는 다양한 의문들이 터져 나온다.

 

정치적으로 일단 우리나라 대한민국을 보자. 대한민국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민주자유주의 공화국이다. 즉 국민들이 주권을 가지고, 평화롭게 자신의 의지와 권리를 가지고 살 천부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화제 정치를 택하는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과 시민이다. 공화주의 국가에서 국민과 시민은 전쟁으로 인해 목숨과 재산에 위협 받으면 안된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막상 그것이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국가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 세계에 많은 국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란 단순히 나와 내 옆, 혹은 우리 지역과 다른 지역, 또는 국가와 국가라는 대등적인 존재만이 아니라 내라는 존재가 다른 지역과 다른 국가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개인의 존재가 사회구조적, 세계추세에 영향을 받으므로 정치라는 것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인 것이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인간이 죽음에 이르게 되어 그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있을 것이나, 이제는 개인이 죽더라도 정치적인 담론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고대 그리스 학자 소크라테스가 죽은지가 2,500년 가까이 되어도 그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계속 가속화되어 철학의 기원으로 살아간다. 인간에게 정치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인간의 정치적인 영향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내가 태어나는 위치와 공간, 부족과 토질, 국가적 상황과 지역적인 현황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지도 않고 내가 선택하지도 않은 사항에서 결정된다. 인간은 어떻게 보자면 결정적인 삶의 운명이 이미 정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 운명의 고리에 태어난 인간이 이미 태어난 그 순간부터 정치적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가? 불가능할 것이다. 오직 인간이 정치적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은 문명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찾아가지 못하거나 발견하지 못한 곳에 살아가는 원시부족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소수민족에 부족단위로 생활하며, 수렵과 채취로 통해 계급의식이나 신분도 만들지도 않은 채 그저 벌거숭이처럼 살아가는 자연 그 자체 말이다.

 

사실 정치는 문명과 사회가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정치의 시작으로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치는 삶의 곳곳에 살아 숨 쉰다. 심지어 국가적 의결사항이 아니라 지역자치단체, 회사, 동호회, 가족 단위의 소단위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가끔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경험으로서 아동기부터 배우는 것이고, 중고등학교에 올라가면 교과과목으로 사회, 윤리, 도덕 등의 수업을 듣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목들은 정치적인 부분이 분명 연결되어 있으나, 그 진실한 가치와 진리를 알려주지 않는다. 한국사회의 사회과학에 대한 전반은 모두 인간존재에 대한 인격형성이 아닌 수험과 성적으로 연계되기 때문이다. 오로지 누가 어느 철학과 사상을 논할 뿐이지 그것이 왜 어떻게 나오는지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없다. 물론 가르쳐도 중요하지 않은 분야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기 쉽다.

 

그런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 본인이 서평하고 있는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이란 도서는 상당히 좋은 책이다. 솔직히 정치학은 어렵다. 더구나 정치 뒷면에 가려진 철학과 사상을 알아가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정치의 뿌리가 되던 철학과 사상에 대한 기원들을 고대 그리스의 시민사회, 즉 폴리스의 민주주의부터 시작하자고 하자. 그리고 당시 탁월한 논쟁자여 인간 이상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예로 보자.

 

사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플라톤, 다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인 업적과 연구만 해도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갈 것이다. 게다가 매우 어렵고 난해한 철학적인 관념을 우리가 알아가야 할 것이다. 철학과 사상에 대하여 현대부터 들어가도 결국 그것에 대한 기본 과제는 고대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런다고 하여 정치사상에 대해 알고 싶어 조금 다가가려 해도 보통 사람들이 접하기 어렵다면 정치사상의 본래 취지인 인간에 대한 배려는 오히려 배려가 아닌 배타로 넘어갈 위험이 높다. 하지만 정치사상이 너무 쉽게 간결하고 지나가는 전봇대와 같다면 그것 또한 문제일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길가에 널린 전봇대 수보다 많다고 하여 그 인간 개인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인격체란 의미이다.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은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통용되던 정치사상과 철학, 게다가 학교수업에서 배우는 윤리, 도덕, 사회 등에서 나오는 많은 학자들에 대한 소개와 대표적인 사상을 알기 쉽게 알려준다. 알려주는 부분은 철학자 한 명당 적으면 3~4페이지에서 많으면 10페이지 가까이 되지만, 그 부분으로 통해 어느 누가 있었고 어느 누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그것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고, 또한 우리가 생각하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 방향키를 제시해준다.

 

정치가 철학과 붙어있었으나 그것을 최초로 분리하게 하여 정치가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게 한 군주론의 마키아 밸리부터 토대로, 독일 관념철학의 창시자 칸트, 변증법의 헤겔, 노동자의 대변자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유의 기초를 다진 존 스튜어트 밀, 인간 기존 윤리라는 착각을 비판한 니체, 군중심리와 대중문화를 비판한 프랑크푸르트학파 학자, 20C 새로운 철학자 중의 영미철학자 존 롤즈, 하버머스, 구조주의의 미셀 푸코 등 수 많은 학자들을 어떤 정치적인 테제로 통해 분리했고, 그들이 전개한 논리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 철학자들의 사상과 정치적 사유를 단 몇 페이지에 기록했다고 하여 우습게 생각하지 말 것이다. 실제 그들이 저술한 도서를 읽는 순간 그들이 사유하고 정리한 철학적, 사상적인 전개를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에 대한 얼마나 깊은 통찰과 사회에 대한 깊은 고찰로서 이루어진 인류의 보배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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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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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진치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았다. 그의 책을 읽어보면서 이 조르바라고 하는 특유하고 괴팍한 노인이 실제 인물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란 사실에 많은 당황함을 느꼈다. 그 조르바라는 인물은 너무 특이하고 낯설고 또는 너무 가깝게 여기게 만드는 남자였다.

 

아마 이 소설에서 나라는 인물은 니코스 카진치키스일 것이다. 그의 행로에 대해 잘은 모르겠으나, 그가 아마 이 소설로 보이는 내용으로 보아 조르바라는 남자가 그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 조르바라는 남자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기에 그가 여행을 떠나면서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끼고, 조르바가 죽어가는 순간 조르바의 죽음을 알았을까?

 

자신의 곁에 없는 조르바, 하지만 이 소설의 나라는 인물은 조르바의 죽음을 느끼고, 조르바의 영혼을 숨 쉬었다. 그는 조르바와 다른 사람이었으나 어느 사이에 조르바의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주 고생스러우며 마음 아팠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느끼는 내 감정은 아마 인간의 본연의 가치 내지 존재적인 희열일 것이다. 마치 조르바를 보는 순간 이 말이 생각난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조르바에겐 신이나 천사나 혹은 악마든지 뭐든지 관여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신이 되려는가? 아니면 악마가 되려는가?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나오는 싱클레어 모습처럼 그 자신의 존재의 여부가 선악으로 이원화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되었다.

 

그런 만큼 조르바의 깊은 상처와 슬픔, 고뇌도 너무 깊은 바다처럼 캄캄했으며, 그가 용솟아 오르는 춤과 흥처럼 모든 것을 초월했다. 이 작품 후기에서 나오듯이 작가인 니코스 카진치키스는 니체를 아주 좋아했다.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 송도 좋아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사시의 작가 호메로스도 좋아했다.

 

니체를 좋아한 만큼 그의 조르바를 볼 때면 마치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가 찬사하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가 생각난다. 포도주는 모두를 즐겁게 만들기도 하나 모두를 미치게 한다. 하지만 이 자애롭고 잔인한 디오니소스야 말로 신중의 신이요.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의 주인공 갈탄광의 사장이 술집에서 만난 조르바는 그저 직설적이고, 공격적이고, 아무런 생각 없이 말하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철학 이상이 있었다.

 

아니 그는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었을까? 조르바라는 끓는 피가 흐르는 노인이 말이다.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다. 그의 말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또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후회를 버렸다. 조르바는 모든 것을 비우고 모든 것을 채워 넣는 마법의 항아리였다.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이는 크레타 섬에서 조르바는 자신의 욕망을 갈구했다.

 

맛있는 고기와 생선을 게걸스럽게 먹고, 술을 있는 그대로 부어 마시고, 이야기가 전혀 통하지 않은 이방인과는 춤으로서 대화했다. 늙은 카바레 여가수인 오르탕스 부인을 유혹하여 그녀를 자신의 성적 욕망으로 갈구하다가 마치 아주 귀찮고 피곤한 여자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는 전형적인 바람둥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오히려 그녀를 유혹의 나락에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손으로 갔다.

 

억지로 만들어져 버린 약혼과 그 뒤에 결혼식, 그런 결혼식을 마치고 오르탕스 부인은 이때까지 살아온 자신의 험한 인생의 종지부를 마치고, 인간처럼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조르바와 더불어 탄광 사장이 보는 앞에서 결혼했지만 결국 병으로 죽는다. 조르바는 새로운 여자를 찾아 그냥 갈 것으로 보일 인간이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부인을 저주했고 부인을 탐욕했고 부인을 사랑했고 부인을 애도했다.

 

부인이 병으로 땀과 진으로 침대가 범벅되어 냄새가 코를 질러 죽어가는 순간, 동네 주민들은 그녀에게 장송곡이라 해두고 그녀의 집에 가서 있는 물건을 가져갔다. 그녀의 모든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말이다. 그녀가 마침내 마지막 숨소리마져 끊어지자 동네 노파들과 청년들은 성난 이리 떼처럼 몰려들어 오르탕스의 물건을 가져간다. 심지어 창문과 대문까지도 말이다. 남은 것은 오르탕스의 뚱뚱한 발바닥이 새겨진 낡은 신발이었다.

 

모두 오르탕스 부인이 죽기를 바랐고, 그 이상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르바만큼 눈물을 흘렀다. 매우 격정하고 고뇌했다. 그녀가 매우 불쌍하고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죽고 나서 모든 것을 정리하자 조르바는 거기에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죽어간 오르탕스 부인을 대신해 열심히 살아가려 했다. 그리고 엉덩이가 펑펑한 젊은 과부와 그 과부의 어린 두 아이와 살아가며 새로운 인생을 꾸린다.

 

조르바는 오늘 죽기를 살아가며, 살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오직 오늘만을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철학이 메마른 곳에 성직자조차도 성난 이리와 잔혹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르바가 소크라테스처럼 죽음과 경계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런 유쾌하면서 비극적인 조르바, 하지만 그것은 그의 깨달음이었다.

그리스와 크레타 섬에서는 터키와 불가리아와 많은 시련의 투쟁을 거친 것 같다. 조르바는 자신도 용사가 되어 불가리아의 병사들의 목을 베고 심장을 망가뜨렸다. 그러나 그것만이 최선의 가치라고 알았다. 어릴 적에 터키 사람에 의해 교수형 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조르바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발에다 키스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다가 죽은 것이라고.

 

그러나 조르바는 그것이 엉망임을 알았다. 국가, 종교, 민족, 사상 그 많고 많은 존재들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음을 알았다. 어디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해방한 그였다. 그가 그리스인을 위해 총을 들 때 불가리아 군인들에게 포위되어 어느 불가리아 집에 들어가서 어느 여성을 발견하고, 한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한손으로 그녀의 커다란 유방을 잡는다.

 

여자는 공포에 질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조르바에게 자신의 침대에 와서 같이 밤을 보내게 해주고, 게다가 불가리아 옷까지 빌려주어 그를 탈출시킨다. 조르바는 그 후에 귀대하여 파르핀으로 그 동네를 불사르면서 그녀가 그 슬픈 과부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슬픔은 불가리아의 유명한 신부의 암살이다. 그 신부는 매우 유명하고 잔인하기로 소문났다.

 

그래서 조르바는 그 신부가 마구간에 오기를 기다린 후에 잠복하여 그 신부의 목을 베어 그 목에서 귀를 잘라간다. 어느 날 무기를 숨기고 와서 동네장터에 오니 어느 꼬마들이 구걸한다. 그 꼬마들은 굶주리고 여의고 희망이 없이 눈물범벅되던 애들이다. 그런데 그 애들의 아버지가 신부였다. 오! 이런 자신에게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 죄를 얼마나 지었는지! 조르바는 모든 돈과 구매물품들을 그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조르바는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얻었다. 진정한 자유를 말이다. 오히려 자유라고 떠들어 대는 사람들이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파괴하고 부수고 말았다. 윤리라는 척도가 오히려 인간이 인간다움을 고민하는 윤리, 또한 철학까지 부수었다. 그리고 조르바는 그 인간들을 가두는 윤리 같지 않은 윤리, 철학 같지 않은 철학을 부수고 버리고 조롱했다. 그는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고 사랑한 것이다.

 

그런 조르바를 보는 젊은 사장의 눈에서는 많은 심정의 변화를 느낀다. 나는 이 사장의 이야기에서 슬프게 여긴 것은 오르탕스 부인과 더불어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오렌지나무의 과부이다. 그 과부는 몸매 라인이 매우 아름답고, 블라우스 밑으로 살짝 내려가자 그녀의 젖가슴 윗부분은 매우 하얗고 탐스러웠다. 조르바는 그녀가 사장을 좋아함을 알고 있었다. 조르바는 그녀에게 진정한 자비와 인간답게 대하는 방법은 사장의 딱딱한 껍질을 파괴하라고 했다.

 

그녀의 가슴을 붙잡고, 입술을 깊이 음미하고, 그녀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기를 바란 것이다. 음흉하고 야하고 짐승 같은 것이 그녀를 구원하리라고 말이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세상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간들은 혼자이고 싶지 않다. 여자들은 모두 집에서 기다리나, 남자들은 그녀들을 버리고 전쟁에 가서 죽이고 죽여 가엾은 과부와 고아들을 만들었다. 조르바의 정력은 과부들과 고아들을 그대로 두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그 과부는 아름다움이 죄인지 동네 청년 중에 그녀를 사랑했으나, 반대를 하여 자살을 하자, 그 청년의 가족이 그녀를 죽이려 한다. 아무 죄도 없는데, 단지 과부라는 이유로 말이다. 교회 안에 몰아넣고 도망치지 못하게 하여 그녀를 죽이려는 남자에게 조르바는 있는 힘을 다해 싸우나 자신의 귀가 찢어지고, 젊은 사장은 말리려다 저지당한다. 결국 그 오렌지나무를 키우는 아름다운 과부는 여자로서의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한 채 목이 베인다.

 

그리고 그 목은 더 비극적으로 교회 문턱에 버려진다. 그것이 사랑인가? 그것인 인간의 윤리인가? 신이 살아있는 교회라는 신성한 공간에서 그녀는 무참히 생을 마감한다. 축복받지 못한 운명에 농락에 당하며, 사랑조차 받지 못하며, 경멸 속에서 죽어간다. 과부를 보면서 조르바는 슬퍼한다. 그 누구도 슬퍼하지 않은 테인데 조르바만이 슬퍼한다. 사장도 슬퍼한다. 그렇지만 이 두 남자 외에 슬퍼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조르바는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오렌지나무의 과부가 보낸 향수 좋은 물을 젊은 사장에게 있는 것을 알자 조르바는 그 물을 몸에 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아주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는 그렇게 욕심 많고 격정적이고 음흉하고 직설적이나, 그 누구도 진실적이었다. 니체의 책에서 나의 주변 사람들이 아닌 나의 주변 외의 사람에게 친절하라고 한다. 자신 안의 인간을 사랑하면 그것은 단지 자신의 이기심에 불과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국가와 성직자는 그저 조르바에겐 나쁜 존재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람들을 얽매이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나로 있고 싶은 초인, 그 초인 조르바, 그의 죽음은 결코 죽었다 할 수 없다. 그가 아주 잘 타고 아끼던 산투리를 젊은 사장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듣던 사장은 그가 죽기 전에 크게 웃다가 울다가 생명의 촛불이 껴졌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기뻐하면서 슬퍼했을까? 아니면 자신의 영혼을 나누던 그 젊은 사장의 회유할 수 없는 슬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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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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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나는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인간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자신의 사회의 구성원이란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영역에 발을 들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참 말하기가 쉽고 간단하게 정리하려고 한다.

 

 

즉 정치는 자신의 이념이나 관념에 대한 부분을 모든지 쉽게 판단하고 편을 가누어 힘겨루기 하는 방법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국내 정치여건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정치적인 언변과 의지를 표명하고 있으나, 문제는 그 정치라는 것에 대한 주변적인 부분이다. 정치라는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과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 대한 진행보다는 결과론적인 부분에 집착할 경우 정치는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를 가장한 싸움에 불과하다.

 

 

인간은 사실 투쟁을 좋아한다. 그 투쟁의 원인은 많은 원인이 있겠으나 그것은 결국 인간사회의 문명에서부터이다. 인간이 문화라는 공간이 시작하는 시기에 2가지 상황이 있었다. 1가지는 자연으로 그대로 살아가는 방식, 즉 야만인이라고 하는 문명인들의 야만스러운 사고로 지정한 부류가 있고, 뒤에는 인간의 물적 혜택과 국가적인 정치제도에 맞추어가는 방법이다.

 

 

본래 인간이 자연으로 살아가던 시절은 인간이 인간에 대한 투쟁은 없다. 어떻게 보면 원시인 내지 혹은 그 이후에 야만민족, 원시민족들에게 정치적인 부분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 하나? 그들은 정치적인 분쟁이 없었지, 정치 그 자체가 없었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혜택이 누군가에겐 불리한 부분을 가져갈 수 있다. 정치라는 것은 조율에 가깝고, 불리한 입장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중에 엘렉트라 신화가 있다. 닥치고 정치를 읽다보면 박근혜 대표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분은 이른바 아버지를 국가로 하는 분이고, 게다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 전형적인 아버지에 대한 딸의 사람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적용하기가 딱 좋은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엘렉트라라는 인물의 아버지는 아가멤논 왕으로 고대 그리스신화 전쟁인 트로이에서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가멤논왕은 전쟁을 위해 항해를 하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딸을 죽여 신의 제물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아가멤논의 아내인 클리타임네스트라는 그 충격과 분노에 휘말려 결국 자신의 간부인 아이기스토스와 함께 공모하여 아가멤논 왕을 죽이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엘렉트라를 가난과 추위에 헐벗게 하였다. 그리고 아가멤논의 왕의 복수를 꿈꾸던 엘렉트라는 자기 나라 멀리서 사는 동생 오레스테스와 공모하여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였다.

 

 

그 후에 오레스테스는 여신의 분노를 사게 되어 환청에 시달리게 되고, 결국 올리푸스 신 중의 1명인 아테나 주관 아래 재판을 벌여 50:50이라는 공판으로 통해 죄를 사면받았다. 따라서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신화처럼 인간의 죄를 가볍게 하고, 인간의 잘못을 인지하게 하여 앞으로 남은 인생을 다시 활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대사회의 정치는 그것이 다르게 되었다. 과거에 비해 너무 사람들도 많아지고, 교류해야할 사회적 구성원 내지 외교적인 영역이 남아있었다.

 

 

특히 정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부분은 바로 정치이데올로기라는 점이다. 닥치고 정치에서 가장 눈여겨 볼 점은 이 바로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도이다. 이른바 좌우 이념갈등이란 점에서 깊이 공감을 보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책을 보면 저자 딴지총수가 1980년대 자신의 이야기를 내세우며, 본인이 읽었던 책이야기를 거론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초고>, <공산당선언>, <자본>이란 도서이다.

 

 

사실 마르크스 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시초라고 하나, 이미 그 전에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이나 개념이 벌써 유럽에 있었다. 단지 마르크스는 그런 이념을 올바르게 비판하고 이론을 정립하고, 현실을 제대로 보아 사회구조를 분석하여 자본주의를 전도시키기 보다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보자고 한 것이다. 사회구조와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그것에 대항할 수 있는 기본 이론과 사상조차도 등장하기가 어려우며, 나온다고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은 정보와 관념으로 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좌파에서 좌파의 근본은 사실 마르크스부터 시작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와 같은 인물로 가는 것은 분명하나, 21세기가 와도 마르크스의 이론은 아직도 통용된다. 그러나 한국에서 좌우 이데올로기에서 좌파라는 존재에 대해 단순히 정치적인 지지도에 따른 좌우 분리로 이어진다. 닥치고 정치에서 딴지총수 김어준씨는 그런 점들을 간파했다. 김어준 총수는 마르크스가 어쩌고, 노암 촘스키, 하워드 진과 같은 학자나 사상가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현재 그대로의 정세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정치라는 것에 대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정치를 이해하기에는 많은 부분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이미 엘렉트라 콤플렉스와 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언급에서 김어준 총수는 이미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철학, 미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과 같은 학문이나 도서를 경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까지 이 책에서 말하지 않는다.

 

 

명랑시민 정치교본이란 말처럼 내가 지적하거나 딴지총수가 간파하듯이 시민들이라 사람들중에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의 뒷면인 사상과 철학에 대해 깊이 가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붙잡고 이야기하기보다는 정치란 자신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존재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투표라는 것처럼 민주주의에서 시민들이 정치적인 의결권을 표명 가능한 것은 오로지 투표이다.

 

 

고대 그리스처럼 직접적으로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같이 모든 시민에게 정치적 참여권으로 정치체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물론 고대 그리스는 성인남성만 가능했다. 노예, 어린이, 이방인, 여성 등에게 투표권을 선사하지 않았다. 참고로 미국과 같은 자유국가라는 곳에서도 여성에게 투표권이 20C 초반이란 점을 생각하면 정치참여권을 국민과 시민에게 제대로 부여함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민주주의 꽃이 선거의 투표권 역시 전체 투표행사권의 반조차도 권리를 제대로 표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감정기와 625전쟁이라는 국가와 민족의 아픔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오는 가이다. 혹은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만들어진 전체주의적 사고방식 즉 파시즘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닥치고 정치에서는 한국의 정치를 보수보다는 보수가 아닌 보수가 집권하고 있다고 한다.

 

 

맞다. 그 말은 맞다. 이른바 매카시즘(McCarthyism)이란 위험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다. 매카시즘은 미국의 상원의원 조지피 매카시라는 인물이 당시 1940~50년대 미국 정치계열에서 스탈린의 소비에트 연방과 대치하고 있어서 이른바 자신의 정치세력에 부합하지 않은 인물을 소비에트 연방의 첩자나 동조자로 보고 정치적인 숙청을 감행하던 정치적 테러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매카시즘이란 이데올로기가 한국과 일본에 수입되고, 특히 한국에서 빛을 발한다. 한국의 보수는 이른바 매카시즘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닥치고 정치에서 그것을 언급한다. 항상 북한과 문제는 어느 특정 정치세력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간다. 그리고 매카시즘이란 방법으로 자신들의 적을 제거하고, 국민들에게 폭력의 미학을 상기하는 파시즘으로 몰고 간다. 결국 전체주의적인 영역에 언론과 미디어까지 부합되면 국민들은 이미 자신들의 손에서 놀아난다.

 

 

그것에 대항하던 세력이 지난 세월은 민주화 운동 선봉자들이고, 이제는 매카시즘을 이용한 국민통제와 민주화 운동을 군사적 폭력에서 금전적 혹은 언론적인 폭력으로 강행한다. 그런 공간에서 김어준 총수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의 폐단은 독점 기업의 상술을 지나 그룹 총수들의 불법 자금 횡령과 세금 포탈, 그리고 그것을 무마해주는 부패한 관료체계와 언론들을 말이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소지조차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반사회적인 존재로 낙인을 찍으려 하는 사람이나 세력으로 몰고 간다. 그래도 계속 투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김어준 총수는 투쟁의 중심지에 있는 사람들도 이야기했다.

 

 

투쟁을 하는 것은 좋으나 과연 투쟁의 공간에서 뭐가 맞고 그른 것인가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야기할 때 김어준 총수의 이야기가 인상 깊다. 자신은 노제에 갔다가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버스 뒤편에 혼자 눈물을 흘리다가 이런 세계를 다시 만들어가겠다고 말이다. 그는 봉하마을조차 가지 않으려 한다. 가면 마음이 매우 약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그의 정치적인 맥락은 단순히 과거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나 새로운 면을 보자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책에서 진보세력이 너무 딱딱하고 자신에게 갇혀있다고 했다. 일단 서구의 사상에 의한 좌파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들이 많았다. 우리가 학교수업이나 대학강의실에서 듣는 철학, 윤리학, 사회학 등은 거의 좌파적인 인물로부터이다. 그러나 막상 그것을 배운다고 해도 그 원리나 체계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가는 것은 좋으나 투표권이 있는 시민과 국민들에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란 도서는 국내에서 총 5권이 넘는 도서로 페이지가 시리지를 합하면 3000페이지가 넘는다. 그 책에서는 당시 프롤레타리아가 읽기에 벅찬 글이다. 그의 글은 오히려 지식을 알고 있는 부르주아 내지 귀족들이 보고 납득할 수 있는 도서였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나 글을 귀족적이란 사실이다. 그래도 현재 노동운동이나 좌파운동에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건재하다. 다만 그것이 정말 우리 같은 서민이나 약자에게 좋을망정 어떤 내용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렵다.

 

 

대중정치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어준 총수의 큰 대안점이다. 물론 정치인들은 정치적인 어려운 단어보다는 쉽게 국민과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쉬운 말이 지지도에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작년에 큰 히트를 쳤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이 전 국민인가? 그것을 십만명 이상 읽어도 치더라도 그것을 완독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것인가?

 

 

정치적인 활동에서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이다. 정치에 대해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누가 좋네 마네. 이게 좋아 싫어. 하지만 그 뒤에 넘어가면 수많은 담론이 존재하고 있어서 그것을 제대로 알고 가기 전에 기차와 버스는 떠나가는 것이다. 닥치고 정치는 바로 그런 준비되지 않은 국민과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보기 쉽고 재밌게 가려고 하는 정치서적이다. 정치란 사실 재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재미는 오로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찾아오는 온갖 이권과 혜택이다.

 

 

그저 멀리 외부서 관람하는 국민과 시민은 구경꾼이다. 즉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행동들은 진정한 정치가 아니라 쇼에 불과하고, 우리 국민과 시민들은 그 쇼에 열광하고 환호하는 방관자에 불과하다. 그 쇼는 계속 이어지고 끝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쇼를 계속 관람할 것인가? 아니면 쇼를 바꾸어 볼 것인가? 닥치고 정치는 그런 스펙타클의 사회에서의 정치를 새롭게 변화하려고 한다.

 

 

물론 그 정치적인 최종목적은 노무현의 신화를 뒤에 찾아오는 문재인 변호사라는 것은 분명하다. 김어준의 목표는 문재인 변호사의 대선에 집중된다. 스펙타클의 전복해도 다시 새로운 스펙타클은 찾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대중들을 소외하는 것인지 그 소외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차이는 분명한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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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산업의 멸망
김인성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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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 산업의 멸망은 겉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런 세계를 밝혀낸다. 사실 기술적으로 정치적으로 들어다보기 쉬우면서도 어려운 것이 바로 미디어의 세계이다. 미디어란 항상 인간이 접촉하고 다루고 느끼고 표현하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그 미디어에 대한 제작이나 전달, 유통과정은 일반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가령 미디어의 세계에서 현대사회의 필수품이 컴퓨터와 핸드폰을 보자고 하자.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컴퓨터를 항상 업무에 사용하고, 전화기는 언제나 우리 인간의 손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소유하고 있다. 문제는 컴퓨터와 핸드폰의 제작은 어느 특수한 기업이나 조직에서 독점하여 제작하기 때문에 일반 사람에 보이지 않은 블랙박스이다.


사실 미디어의 독점이나 규제는 다른 어떤 수단보다 효율적이고 체계적이다. 가령 현대인의 통제는 국가권력에 의한 방법보다는 미디어로 통한 방법이 좋다고 한다. 미디어에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이익이나 사적인 영역까지 포함하여 제작하고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미디어의 중심세계에서 들어나지 않거나 혹은 들어나 보이는 일들을 여기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내가 예전에 알고 있던 부분으로 기업의 심각한 독점과 반칙플레이였다. 미국 최고의 기업이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이크로소프트사 즉 MS사의 경우 뉴스나 보도에서 인터넷 사용에 대한 독점으로 고소를 당하거나 또는 대표적인 컴퓨터 CPU 제작사인 인텔과 같은 경우에는 자신의 상대회사 부품을 사용하는 다른 업체에 대해 심각한 자금압박을 넣어 다른 회사의 물건을 이용할 경우 파산까지 이르게 하는 불공정 플레이를 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는 인텔이 불법적으로 어떻게 AMD를 비롯한 CPU 제작업체를 비겁하게 방해했는지 그 후에 얼마나 많은 금액을 보상했는지도 나온다. 하지만 그동안 인텔이 벌어들인 금액이나 그 금액만큼의 사회인지도를 생각하면 AMD 입장에서는 부당한 대우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도서 서평을 적는 본인만 하더라도 인텔에 대한 메이커 선호도를 가지고 있지 AMD사에 대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MS사의 인터넷 익스플로어에서 상대되는 네츠케이프 사에 대한 불공정 플레이, IBM 컴퓨터 제작사가 벌인 경쟁회사나 신생업체 죽이기에 대한 적나라함을 여기에서 고발한다.


정보는 홍수처럼 발생되고 있는 그 홍수를 만들어내는 하드웨어는 이미 가뭄처럼 말라버린 점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거기에 대항마가 없는 것은 아니나 여전히 부당거래는 건재하다. 그리고 보니 최근에 스티브 잡스의 죽음이 생각난다. 컴퓨터를 인간의 실용도구라고 하나 그 도구를 예술적으로 만들어 철학적인 관념까지 함유한 애플사의 경영자 말이다.


그의 내용에서 최근 스마트폰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할 때 아이폰의 위력이 새삼스럽게 위대하게 느껴졌다. 내손만의 컴퓨터, 그리고 많은 정보와 소통의 위력들까지 말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진절머리를 날 정도로 MS사, IBM, 인텔 등과 같은 업체와 싸워야 했다. 게다가 한국시장 판로개척에서는 조립품 컴퓨터라는 덫에 걸렸다. 그런데도 스티브 잡스는 컴퓨터 정보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와 철학으로 지금의 스티브 잡스로 되었다.


그렇게 되는 과정도 대단하겠지만, 그 뒤에 숨겨진 폭력적인 상거래 역시 대단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가고 있다. 다양한 콘텐츠로서 사람들은 자신의 즐거움과 이해력을 만족한다. 하지만 거기에 따른 서비스나 혜택은 점점 줄어가는 것이다. 외국에서 검색엔진하면 구글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구글은 그렇게 유명세를 떨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한국사회의 정보사회는 독점과 규제, 제약, 횡포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전과 더불어 통신의 기술 역시 발전하고, 얼마든 좋은 질의 미디어를 즐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비싸지거나 기존을 고수하였으며, 데이터 전송량을 늘일 수 있어도 줄이는 방법으로 고객의 이익보다는 고객의 이익을 합법적으로 횡령한 것이다.


어떤 일이든 자신들만의 툴을 넣게 하여 고객들이나 일반인들에게 정보유출과 같은 피해를 일으키고, 사건이 벌여져도 개선하기 보다는 임시적으로 입막음 방식을 선택하여 변화의 의지는 없다. 겉으로는 좋은 이미지를 부여하나, 그 이미지에 사람들이 매료되었거나 혹은 세뇌되어 그것이 제대로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심지어는 제품의 문제나 서비스의 질을 따지는 게시물조차도 검열을 받게 되어 강제로 삭제 및 조회불가라는 우스꽝스러운 일가지 벌여진다. 소비자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인터넷의 세계와 통신세계의 이런 독단적인 반칙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해진 것만 찾게 해야 하고, 그 이익은 어느 특정 기업과 그 기업을 봐주는 관료체제에게 돌아간다.


또한 미디어 하드웨어 관련하여 기능도 떨어지고 성능도 인정받지 못하는 제품들을 국민들의 애국심리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한다. 예전에도 한국 자동차는 수출용과 내수용은 서로 다르다고 들었는데, 내수용의 기능이나 성능이 매우 저하된 것도 모자라서 가격까지 비싸게 팔아넘김으로 국민들에게 폭리를 거두어들인 것이다.


그런 보이는 부분에서 들어나지 않은 부분들을 우리가 감지하지 못함은 항상 매체와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항상 우리가 접하고 있어서이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생존을 위해 호흡을 하면 공기에 대한 존재성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물론 앞에 아주 많은 덤프트럭이 과속으로 달려 매연이 나오는 도로가의 공기라면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에서의 미디어세계에선 당연지사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국·내외 대기업들의 부당한 거래와 반칙플레이, 기업을 봐주는 부패한 관료체제, 애국심리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는 기업들, 기술발전으로 요금이 저렴하게 할 수 있어도 그것을 거부한 채 계속 이익만 챙기는 공기업, 한국 IT 산업은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것을 두고도 숨어 있는 폭리추구주의자에 의해 병들어가 가고 있다. 결국 그것은 소비자의 권리와 재산을 침하하고, 더 나아가 자유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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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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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홀든, 그 녀석은 매우 어리고 어린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래서인지 홀든이란 친구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랄 수가 없다. 언제나 자기 기분이 가는대로 행동하는 홀든이다. 그러나 홀든이란 친구에 대해 나는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가 왜 그렇게 우울한 기분으로 살아가느냐 말이다.

 

이 소설은 홀든이 퇴학처분을 받아 자신이 다니고 있는 팬시 고등학교에서 나와 자기 집까지 가는 귀로라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적은 것이다. 홀든은 펜싱부 부장인 주제에 펜싱부 일에 집중하지 않고, 지하철을 타는 도중에 실수하여 펜싱도구까지 분실한다. 그런 와중에도 붉은 가죽모자를 1달러를 지불하고 사는 기막힌 행동도 보인다.

 

그는 도대체가 앞뒤와 좌우를 구분하고 판단하여 정상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그는 아예 지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지각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어른도 되지 않았는데, 어른인 척하는 청소년의 방황하는 모습이다. 아마 그의 비행적인 요소나 반항적인 요소들은 분명 많은 억압들이 있었을 것이다.

 

못된 장난이나 담배와 술에 빠지고, 이기지 못할 녀석들에게 싸움을 걸어 맞는 홀든이 왜 그렇게도 허무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의 가정사를 보니 그의 마음이 공감이 간다. 자신이 매우 좋아하던 남동생 앨리, 앨리는 매우 머리가 붉은 남자아이였다. 자신보다 어린 동생이나 홀든은 자신의 남동생 앨리가 똑똑하고 친절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동생이었다.

 

그런데 그렇게도 착하고 좋은 동생이 3년 전에 백혈병으로 죽고 만다. 앨리의 죽음에 대해 홀든은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동생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동생이 죽었다는 그 분노와 우울이 폭발하여 미친 듯이 자신의 오른손으로 주차되어 있던 자동차들의 유리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쳐댔기 때문이다.

 

결국 어린 소년이 저 단단하면서도 날카로운 차량유리를 그대로 돌진했으니 어떻게 되었을까? 홀든은 지금도 오른손을 꽉 쥐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쳤다. 오른손이 피로 범벅이 되었다. 그런데도 아프다는 자각이나 제대로 했을까나? 아마 못했을 것이다. 홀든의 동생이 죽은 것 자체가 자신의 모든 오감을 잡아먹었으니 말이다.

 

그의 오감을 잡아먹어버린 동생의 죽음에서 홀든은 동생이 죽은 것은 알았으나, 죽었다고 가슴깊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묘에 참배할 때 홀든은 다른 식구들은 모두 거기에 다가가도 자신은 다가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동생이 저 차갑고 딱딱한 땅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이유에서 말이다. 그는 동신이 육체와 달리 영혼이 어디론가 있을 것이라 했다. 그는 종교를 제대로 믿지 않았다. 거의 무신론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도 동생의 유령이 다시 그를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집에 와서 거의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추운 거리를 해매고 있을 때 그는 환각에 반 쯤 빠진다. 그의 환각에서 죽은 동생과 대화하는 홀든을 볼 수 있다. 그리운 동생, 자신의 슬픔과 좌절에서 홀든은 오로지 동생만이 자신의 인생을 구원했다. 다행히도 홀든에게 동생은 사랑스럽고 똑똑한 앨리만 아니었다. 아주 귀엽고 똑똑하고 고집스러운 여동생 피비가 있었다.

 

홀든은 집에 오기까지 기숙사에서 기숙사 동료인 스트라드레이터와 싸우고, 택시기사와 대화하면서 이상한 녀석으로 취급당하고,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학교 녀석의 어머니를 만나 거짓말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주 예쁜 아가씨인 샐리를 만나 그녀를 오히려 화를 내게 만들고, 호텔에서는 호텔 벨보이가 부른 창녀에게 성적행위 대신 이상한 말만 골라서 하다가 바보 취급당한다.

 

게다가 5달러만 그칠 줄 알았는데, 결국 15달러까지 주게 되었다. 복부에 강한 펀치까지 맞고서 말이다. 집에 오는 여로가 아주 괴롭고 재미없고 짜증나던 홀든에게 훨씬 더 비참한 기분을 들게 만든 것이다. 그런 주제에 나이가 어려 보일까봐 일부러 술을 시키고 담배도 피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서있기도 하였다. 하다못해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머리를 들이댄다. 자기 머리색이 하얀 색이라 나는 좀 나이를 먹었소, 그러니 내 말을 똑똑히 들어주시오란 말이다.

 

홀든의 행동들은 아직 철이 덜 든 중고등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인생에 큰 결핍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남동생 앨리의 죽음, 그 와중에 세상 모든 사람은 자기를 지배할 수 없어도 유일한 지배자인 피비가 말이다. 아마도 그의 우울은 동생의 죽음과 연계가 깊은 듯하다.

 

그는 교장선생이나 주변 어른들의 행동에 못마땅했다. 아니 교장이나 주변 어른들의 행동과 비슷해지는 학생들도 싫어했다. 그는 가난하고 구색이 좋지 못한 학부모에게 변기에 물을 흘러 보내듯이 지나가는 교장이 혐오스러웠고, 그런 교장에게 아부를 맞추는 선생 역시 구역질 날 정도로 보기 싫어했다.

 

홀든의 눈에는 세상 모든 것이 머리가 빈 놈들의 세상이고, 그런 빈 놈들 사이에 멍청한 여자들과 같이 어울리는 지겨운 세상이었다. 게다가 멍청한 인간들은 모두 허풍과 가식으로 물들여져 있어서 홀든은 매일 구역질이 나서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을 쉬지 않고 한 것이다. 수요일에 집에 가는 것을 왜 퇴학처분 받는 당일부터 했겠냐는 말이다.

 

그가 유일하게 제대로 된 인간에 대해 말할 때도 당황스러웠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사람 중에는 대하기 편하고 좋은 선생인 앤톨리니(홀든은 그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 즉 변태로 여겼다)와 그 앤톨리니 선생이 자비를 베풀어주었던 학생이었다. 그 학생은 제임스 캐슬, 평소에 말도 하지 않고 조용하고, 게다가 학교에서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 제임스가 학교에서 홀든도 마음에 들지 않은 녀석에 대해 험담하다가 그 녀석과 그 녀석의 친구에게 집단 구타당하는 도중 창밖으로 뛰어내려 낙사하였다. 아마 홀든이 이 작품 초반에 스트라드레이터와 싸울 때, 그는 분명 그 거구의 덩치에게 이길 수 없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홀든은 덤벼들었고, 얼굴에는 피범벅이 되었다. 자기 역시 왜소하고 못났지만 자신에 대해 끝까지 지키려한 제임스에게 큰 인상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홀든은 죽은 제임스가 아니다. 단지 학교가 싫었고, 학교와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싫었다. 특히 어른들이 매우 싫어했다. 어린 시절 친구 제인의 양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그가 어른사회에 대한 극단적인 반항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순수함을 좋아했다. 자신의 행동들은 순수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을 붙들어 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인지 홀든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동생 피비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한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나다면”라는 로버트 번스가 쓴 시에서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이란 노래를 피비에게 말하면서 자신을 그렇게 되고 싶다고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말이다. 그는 호밀밭에서 그저 지키고 있으면서 주변에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처럼 그는 아이들을 지키는 그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결국 죽은 동생인 앨리, 덩치 매우 좋고 여자를 제대로 밝히는 스트라드레이터부터 제인을 보호하고 싶다는 것이다. 제인이 예전에 양아버지에게 그렇게 학대당하는데, 이제 그 돼지 같은 녀석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홀든은 억제할 수 없었고, 결국 낙사한 제임스처럼 무차별 공격하고 무차별로 얻어맞은 것이다. 그런 우울함이 더했는지, 홀든은 자신이 동부에서 살기를 거부했다.

 

아주 따뜻하고 아는 자들도 없는 서부에서 그저 벙어리처럼 살며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이별의 편지를 적고, 멀리 떠나려 했다. 그런데 동생이 큰 짐을 들고 나왔다. 만약 홀든이 떠나면 사랑스런 여동생 피비도 같이 갈 것이라고 말이다. 홀든은 순간 앞이 깜깜했다. 자신은 자신만이 절벽으로 떨어지려고 했는데, 자신은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어린 영혼을 보호하려 했는데, 그 어린 영혼이 자신과 같이 절벽에 동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홀든은 어린 동생이 그렇게 강하게 나오자 동생의 마음을 달래고, 동생을 위해 회전목마를 타는 것까지 지켜본다. 홀든이 바라보는 회전목마 위의 피비는 세상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천사와 같음이라. 그리고 홀든은 회전목마 타기 전에 피비와 약속한 것처럼 집을 떠나지 않고, 단지 자기 재활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독백한다. “내가 알고 있는 건, 이 이야기에서 언급했던 사람들이 보고 싶다는 것뿐, 이를테면, 스트라드레이터나 애클리 같은 녀석들까지도, 모리스 자식도 그립다. 정말 웃긴 일이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말을 하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그는 자기가 정말 싫어하는 녀석들의 이름을 거론했다. 그들이 싫은데도 그들의 이름을 들으면 그리워지다니, 홀든은 자기의 질풍노도와 같은 시간들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토록 혐오스럽게 한 그들을 생각하고 있으니깐? 아마 홀든은 그런 혐오스럽지만 세상이란 큰 세계에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으로서 역할은 단단히 소화했다. 피비를 바라보는 한 다정한 오빠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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