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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Unbow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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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실제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서사매체가 가상이라고 할지어도 그것은 현실적인 요소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時, 서사)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듯이 역사는 개인의 기록이나 시라는 어느 이야기 거리들은 개인의 기록보다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이야기란 점이다.
그러나 최근에 시라는 서사(敍事, narrative)는 가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것도 많으나 이제는 실화를 배경으로 각색하는 픽션(fiction)이 아닌 팩션(Faction)이란 장르가 최근 많은 영화에서 보인다. 이번에 내가 감상한 부러진 화살은 바로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 팩션이란 하나의 진실을 담은 가상적인 스토리가 펼쳐지는 영화인 것이다.
보통 영화라는 매체 즉 서사구조를 가진 매체에서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진행되는 내용들은 어떤 갈등을 소재로 하여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누군가를 희생 내지 자신들의 정의로서 통해 적에 응징으로 이어진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해결로 통해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반드시 갈등의 존재와 더불어 그 갈등의 해결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번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란 없다. 오로지 갈등의 진행형을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서사라는 narrative는 어떤 사회나 조직에 대해 특정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제의와 같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 대신 계속 이어짐은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주제가 지배계급과 그 사회의 종속의 당연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당연성에 대해 반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권력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의 갈등은 대학 입시문제에서 틀린 답을 출제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부당함을 내세운 김경호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김경호 교수는 시험문제가 틀렸으니 이 시험 문제에 대해 정정과 더불어 진실을 알려 올바른 교육가치관을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교 측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교수진과 학교명예에 큰 금이 간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김교수의 진실공방은 무산된다. 문제는 김교수의 의견이 묵살이 아니라 김교수의 교수직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교수직에서 임용되지 못한 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올바른 가치관과 진실을 풀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임용이 다시 허락되는 것으로 당시 잘못된 교육현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오히려 역으로 몰리게 된다. 그의 진실성은 어디에도 밝힐 수가 없으며, 단지 그가 정치적인 약자라는 이유로 또는 같은 편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재임용은 무산된다.
그런데 그 재판의 과정에서 과연 제대로 된 재판이었는가 혹은 아니었는가 라는 중대한 문제가 걸렸다. 당시 김교수의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김교수가 의문을 제기한 대학교 출신의 판사였다. 그 판사에게 모교에 대한 권력의 결탁은 학벌사회가 만연한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의 방법이었다. 물론 김교수 역시 대단한 엘리트이었으며, 상당한 수학학자였다. 그러나 김교수는 엘리트에 머물기 보다는 지식인으로 전환되어갔다.
자신이 지식인으로 넘어간 동기는 바로 부당한 권력 앞에서 진실이 왜곡되고, 그것마저 바로 잡으려 했지만, 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자신의 정당한 입지마저 사라진다. 김교수는 그 재판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대한민국 법치국가에 대한 불합리성과 부패함에 분노하여 자신의 소송을 기각한 판사에게 석궁을 들이댄다. 문제는 그 석궁이 발사되었느냐? 아니면 발사되지 않았느냐이다.
법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강제적 제도이다. 그러나 사실 법이란 제도는 인간에게 정당한 가치관을 적용하기 보다는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권력의 도구로 되어버렸다. 법이란 상당히 강력한 공권력과 더불어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법의 집행에서는 그 법의 집행자라는 법관에게 큰 위력을 안겨주는 것이다.
법은 하나의 거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세력에게 집중된다.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언어의 권력자이고, 그 권력은 특정 세력들에게 다른 세력들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행위 즉 헤게모니적인 행위로서 이어진다. 부러진 화살에서는 그런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상당히 잘 보인다. 김교수가 석궁을 쐈다고 한다면 그 감추어진 진실과 더불어 그 진실에 대한 증거, 법정에서 열리는 법적인 행위절차가 과연 올바르게 진행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처음 재판 이후, 두 번째 재판에서 그런 모습들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박변호사가 김교수의 변화를 맡으면서 재판과정에 보이던 법적행위 절차들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법적인 절차를 둘러보아도 이성적인 논리로서 설명이 가지 않는다. 혈흔이 뭍은 옷이 있는데, 안쪽 옷과 겉옷은 혈흔이 묻어 있는데, 왜 중간 옷에는 혈흔이 없는가? 혈흔이 있다면 과연 그것이 피고인과 같은 혈액인지 검사해야 하지 않은가 라는 합리적인 재판과정을 모두 무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무시하는 이유는 바로 피해자 즉 김교수에게 형사소송을 제기한 사람이 김교수에게 부당함 재판을 내린 같은 판사라는 이유다. 같은 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법적인 행위로서 처벌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적인 존재인 사법부의 위엄이 흔들리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정치적인 자유와 법적인 평등은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런 제도에서 반드시 이행하는 것이 정부이며, 그것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법부의 임무이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에서는 판사라는 공정해야한 존재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공정했다. 거기에 검사들의 대표로 나오는 심검사는 법적인 문제를 옳게 진행하기 보다는 오히려 판사와 검사의 권력유지라는 체계로 이어진다. 권력을 가진 두 존재가 권력을 위해 김교수를 피고인으로 몰아넣고 그를 사회적 정치적 매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무소불위적인 법에 대한 권력에서 대항마는 법을 아는 다른 법조인들은 즉 변호사들이다.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박변호사는 상당히 법에 대한 의무감과 진실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신념이 강한 마음이야 말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뭐든지 될 때로 되라고 하는 최악의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가 최악의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학하고 책임을 물게 하는 피해의식이었다.
2001년 부평에서 공장노동자를 위해 그는 인권노동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위해 온 몸으로 경찰이란 권력 앞에서 대항했다. 하지만 그가 벌인 투쟁에서 같이 참여한 노동자들은 모두 심한 폭행으로 부상을 당했으나, 그는 당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도 같이 맞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경찰들은 변호사란 직책이란 권력에서 다른 노동자를 습격했다.
그는 그것이 분했던 것이다. 그 후에 인권노동변호사 운동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되었다. 아무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은 김교수의 변호사, 그가 드디어 맡은 것이다. 그가 맡은 이유는 단순히 김교수를 위해서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맡을지 모르나, 그가 선택한 변호사의 의무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깡패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김교수와 만날 적에 카메라의 모습을 보면 미디엄 샷 내지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통해 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처음 두 사람은 카메라 화면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다. 미디엄 샷으로 둘의 관계는 극과 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재판과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그들은 매우 가까워진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그들은 재판에서 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패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만족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억울한 누명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권력에 대항한 것이다. 특히 오른쪽으로 카메라를 계속 돌아가는 워킹-인사이드(walking-inside) 기법으로 통해 처음에는 어긋난 두 사람이 결국은 화합을 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화합을 했을망정 서사의 중요한 갈등인 이 사회구조라는 세계와 화합하지 못한다.
단지 두 사람은 투쟁만 진행할 뿐이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어떻게든 김교수에게 유죄를 내리려 했던 이판사는 김교수의 가진 확고한 의지와 그 의지 속에서 찾아낸 법적인 근거와 진실의 증거와 증인으로 자신의 최소한의 법적 양심에게 무릎을 꿇는다. 비록 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김교수에게 불리한 처우를 내리려 했으나,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합리적인 변론과 더불어 주변에서 진실을 보는 대중들 앞에서 그는 부장판사직을 버린다.
이판사가 나와 재판을 벌일 과정에서 수많은 카메라 앵글이 그를 클로즈업 하나, 그의 얼굴은 정면보다는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이앵글에서 그의 입장이 여실히 보인다. 법을 집행하는 법관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봐야할 존재이다. 즉 재판을 여는 법정에서 재판관이 머무는 자리가 가장 위치적으로 높은 자리이다. 따라서 원고, 피고, 증인 심지어는 관람하는 방청객까지 재판관을 우러러 봐야 한다.
재판관이 앉아있는 자리야 말로 권력의 최고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상징을 가진 재판관이 정당한 법적 절차와 양심적인 행위를 어길 때마다, 그리고 거기에 대처하기가 어려워지는 이판사의 곤란함을 보여줄 때마다 카메라는 계속 재판관은 얼굴 위로 클로즈업한다. 그것은 곧 보통 사람이 우러러 봐야할 재판관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내려다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용된 것이다.
그런다고 재판관의 권력을 무시하지 못한 것도 나온다. 두 번째 재판과정도 그렇지만 세 번째 과정에서 나온 신판사의 경우 그의 모습은 머리 위로 비추는 클로즈업보다는 살짝 눈을 올려보는 클로즈업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하이앵글로 신판사를 내려보지만 이내 곧 다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다가 다시 올려다보게 된다.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변론이 그에게 도저히 닿질 않음을 카메라로서 보여준다.
오히려 신판사의 눈으로 밑을 내려 보는 것이 더 권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어깨 너머 샷으로 보는 관점에서 주로 재판관의 뒷모습에서 정면을 보는 것을 연출한다. 어깨 너머 샷은 카메라가 관찰자라기보다는 카메라의 메인이 되는 사람 즉 카메라에서 뒷모습이 나오는 사람이 보는 세상이다. 신판사라는 인물이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부러진 화살에서는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 재판에서 패배한 김교수이었고, 그는 안산교도소로 이감되나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전쟁을 예고했다. 아직까지 한국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교정세계에서는 일재의 잔재가 깔려 있고, 일제 잔재 뒤로 독재의 잔재로 이어졌다. 폭력과 권위로서 모든 죄수를 다루는 공간에서 김교수는 재소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조하는 두 교도관의 이름 세 글자를 메모한다.
그리고 영상화면이 끝난 후에 검은 글씨 뒤로 그는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도 법정공방으로 투쟁한다고 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김교수의 안산교도소의 수감으로 통한 것이나, 그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부합되지 않은 결말이며, 다시 결말을 보기 위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갈등과 고민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부차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와 더불어 교도소의 암울한 현실을 말해준다. 그가 처음 수감될 때 옆에 있던 수감자들이 와서 김교수에게 법적자문을 받는 것을 보여준다. 범죄를 저질러도 부당하게 법적처벌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김교수는 자신이 스스로 배운 법적 지식을 이용하여 다른 수감자의 억울함을 해소한다. 이에 반면에 김교수는 상당한 감옥소의 폭행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판사가 그만두고 신판사가 교체될 쯤에 판사들은 김교수를 법적인 제도에서 그를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조건에서 잡으려 한다. 교도소에서 독방으로 혼자 공부하던 김교수를 다른 수감자와 같이 생활하도록 하는데, 문제는 그 수감자 한 명이 상당히 비정상적인 사고를 지진 인물이란 점이다. 그는 김교수가 오자말자 폭력과 협박으로 김교수를 괴롭히고, 남자밖에 없는 교도소에서 남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는 변태행위까지 저지른다.
물론 변호사와 가족들의 면회로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되나, 은근히 그런 수감자 옆에 붙이게 하여 김교수를 지치게 하는 법의 치사한 방법들은 권력의 압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도 김교수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란 사실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의지였다.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김교수는 멀리서 유학 가서 귀국한 아들을 만나 수갑이 채워진 채로 아들의 두 손을 마주 잡는다.
그의 수갑은 범죄자가 찬 수갑은 분명하나, 그 수갑은 억압받은 자신의 현실에서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세계에서는 공정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부여받은 하나의 시련으로 보여준다. 김교수는 미래를 위해 굴복하지 않았으나, 그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것은 원칙과 공평함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수학학자에게 논리라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 즉 정답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이 오답이란 확고한 흑백논리를 가진다.
그러나 김교수가 가진 흑백논리가 오히려 더 우리가 가져야할 논리로서 다가온다. 그 흑백논리는 정말 공정하고 과학적인 논리로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논한 논리는 윤리 없이는 논리가 성립되면 안되는 것처럼 김교수 역시 그의 논리는 양심을 지키기 위한 윤리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을 준 세상은 윤리를 가진 논리가 아니라 이익을 가진 논리였다.
즉 기회주의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인 사회모습에서 그는 싸운 것이다. 어쩌면 부러진 화살은 화살이 부러지고, 그 화살이 발견되지 않아 증거인멸로 인해 김교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살이 부러진 것은 화살 그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양심이 부러진 것이라는 것을 런닝타임 100분 동안 계속 관객에게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