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2 - 아리랑 김산에서 월남 김상사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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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史 그 2번째 이야기를 오늘 보았다. 1권과 같이 역시 이 책에서는 한국 근현대사에 많은 초점을 두었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단순히 현상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모습에서 일어난 일들을 다시금 찾아 가는 것이었다. 단지 이 책에서는 관점을 이렇게 본 듯하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역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 시절에 살았던 시절의 인간의 시선이라고 말이다. 즉 우리가 지금 일어난 일들이나 사고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입장과 상황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 적어가면서 우리가 몰랐던 사실이나, 실제로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가진 오류와 진실감추기를 배면으로 들어낸 것이다.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제일 많이 생각난 것이 오늘날 한국에서 보이는 현상들이 왜 그래 되었는가에서 가장 큰 공감을 느꼈다. 한국사회는 뭔가 억압으로 가득하고 뭔가 불합리한 것이 오히려 합리화되어 있으며, 게다가 맞는지 안 맞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해당되는가? 아니면 해당되지 않은가이다.

 

그런 점으로 출발노선이 계보학적으로 다룬 도서만큼 비판의 끝자리는 우리가 보는 이가 아니라 우리를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국에서 일본강점기에 대한 피해의식은 막대하다. 그리고 그 피해의식으로 하여금 한일관계가 삭막해지거나 또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대회에서는 총을 들지 않은 전쟁이란 하나의 파시즘적인 형태로 변모된다. 그런데 그 파시즘인 요소에서 원인제공자는 일본이나 한편으로 본다면 우리도 그런 조건들을 다른 나라에게 준 것도 사실이다.

 

예전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영화를 보았다. 전쟁에 참전한 국군용사들이 처음에는 화려하듯이 출군했으나, 막상 돌아오면 폐인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살하거나 살인하거나 술에 취하거나 미쳐버리거나, 그 모든 인간의 이성적인 세계에서 멀어진 것을 본다면 잔혹한 전쟁임은 분명하다. 눈앞에서 베트남 사람을 죽이고, 베트남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베트남 여자를 겁탈하고, 이제는 그녀들이 라이따이한이라는 반쪽자리 한국인들을 만들고, 이상한 악순환이 반복된다.

 

역사의 반성이란 가해자에게 필수적이나 그 가해자도 역시 피해자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아이러니하다. 가끔 친일 문제나 베트남전쟁으로 왈가불가하나 문제는 그 어긋난 일들은 모두 같은 한국인들이 저지른 점이다. 혹은 원시적인 신화를 벗어나게 한다는 계몽이라는 새로운 억압의 신화에서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가진 생각을 버리게 하여 자신의 사고를 주입하여 그것에 동조하는 것이 계몽이라 여긴다.

 

그러나 계몽은 자신의 이성에 대한 한계점에 대한 반성과 자신과 타자에 대한 관념적인 사고로 통해 진정한 자신의 무지를 깨우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순수철학인 형이상학이란 영역에 도달하여 존재와 인식에 대한 진실한 사유로서 계몽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몽이란 단순히 기존의 사고를 다른 사고로 전환할 뿐이지 사고 그 자체를 깨우치게 하는 것은 아닌듯 하다.

 

이 책에서 다루는 내용은 다 그렇다. 우리가 아는 것은 일방적인 정보로 통해 창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료와 상황, 실제의 일들은 모두 거짓말같이 사라지고, 그것을 대체하여 새로 만들어진 신화만 메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의 제거기능을 하는 계몽 자체가 억압이란 신화로 발 돋음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니 오히려 대체된 계몽이란 신화가 군중을 더더욱 우매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는 다카기 마사오라는 인물에 많은 초점을 둔다.

 

긴 칼을 차고 싶은 인물로 니체가 말한 정치란 권력에 향한 의지라는 말에 가장 부합한 인물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근대화의 선구자일지 모르나(실제 발전한 것은 있지만), 그 뒤로 보이는 엄청난 폐단들은 모두 감추었다. 세상에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다. 문제는 음지에서 나타난 눈에 가시 같은 현상들을 모두 감추고, 설사 나오더라도 밟더라도 그 문제 자체의 근본은 해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상처는 곪아가서 결국 곪은 부분이 터지게 된다. 터지는 순간 사회란 큰 혼란을 겪는다.

 

바로 한국 근대사가 그렇다. 이른바 완충지역이 없이 그대로 스트레이트로 몰고 온 것이다. 생각해보자. 목욕탕에 가서 욕실에 가니 매우 따뜻한 물이었는데, 갑자기 수온이 얼음이 얼을 정도로 내려가다가 갑자기 라면을 넣으면 먹을 수 정도로 뜨거워지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나? 평균 36.5℃의 혈관 온도를 지닌 인간에 몇 도의 차이는 사망으로 이르게 한다. 그러다 보니 얼마나 많은 일들이 터졌을까?

 

기회주의자의 한국 선진화 뒤에는 무궁무진한 희생이 있었고, 그 희생은 누구에겐 평생의 눈물이겠으나 누구에게는 평생의 훈장이다. 각 3군 참모총장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계급장에 스타도 아무 계급장도 없이 훈장을 달고 군복을 입으며 거리를 누빈다. 한편으로 보면 구시대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기도 하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자신이란 존재 즉 살아있다는 존재론적 가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징화함에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그런 갈등은 피해갈 수 없으나, 어떻게 본다면 암울한 과거에 대한 우리의 씻지 못한 아픔은 분명하다. 역사의 아픔은 쉽게 풀어갈 수 없다. 조선시대에도 역적이나 사문난적으로 몰린 선비들이 묘비도 적지 못하다가 몇 백 년이 지난 후에 다시 공직에 복귀되고 묘비마저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우리도 그런 역사적인 아픔을 달래기에는 너무 상처가 깊다.

 

현재까지 검찰, 경찰, 교육, 군대, 남자들의 사회에서 많은 일제잔재가 숨 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중학교 시절에 우리 학생들은 입학할 때부터 머리를 매우 짧게 자르고, 강제적인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녔다. 게다가 선생들의 폭력과 폭언이 엄청났는데, 당시 그것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당위성으로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당위성으로 인지되는 폭력의 미학들이 사실 옳은 것이 아님은 다시 인지되나, 그것에 대한 대처 역시 문제가 된다. 사회적인 구조에서 왜 그리도 되었을까?

 

이 책에서는 그런 점들을 설명하는 것에서 참 좋은 도서이다. 일제의 잔재, 625전쟁에 대한 슬픔들, 남자들의 이야기에서 언제나 단골메뉴인 군문제에서 말이다. 솔직히 예비군 이야기에서 많은 동감을 자아낸다. 예비군훈련으로 업무에 차질이 생기고, 때로는 모든 일정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가끔 예비군이 필요한가라는 의문 속에서 분단된 조국과 국제사회의 외교와 군사상황을 보면 조금 답답하다. 그런다고 군대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 남자이고, 그런다고 군대를 찬양할 수만은 없다.

 

저기 월남전에 한국군 장교월급이 다른 나라 사병월급보다 못한 것을 볼 때부터 한국에서 군복무를 한 남자로서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게 해버린 과거의 망령들, 또한 군대가 사회질서 유지라는 파시즘적인 요소에서 하나의 큰 역할을 차지한 점도 그렇다. 인간은 하나의 틀에 박히면 그것에 수동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것이 하나의 권력에 의한 헤게모니적인 현상으로도 보이고 말이다.

 

또한 이 책에서 기억나는 부분은 항일무장이다. 이 책은 지금의 우리 눈보다는 당시의 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보는 내내 도저히 초, 중, 고 과정에서 받은 교육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이 책에서 북한의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국 군인으로서 그는 역적의 수괴이다. 그런데 70년 전에는 독립군의 영웅이란 점이다. 이에 반해 한국군의 최고봉은 일본군에 충성했던 자이다.

 

아니 독립군들을 잡아 고문하고 죽이는데 도를 깨우친 사람이다. 오죽했으면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과 연동한 북한군만이 아니라 민족주의자 김구마저도 처단하려고 한 사회이니 오죽했을까? 사실 민족주의도 파시즘적인 요소가 과다하다. 그런 민족주의는 가끔 일본과 중국과의 외교마찰로 통해 국민들을 통합시키게 하나, 한편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기도 편하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얼마나 한국사회가 그런 언론 놀이에 잘 넘어가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다른 인상 깊은 점은 아직 읽어보지 않은 아리랑이란 소설이다. 아리랑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김산이란 열렬한 독립운동가면서도 혁명가의 죽음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마음에 들지 않고, 차라리 영화 아나키스트에 나오는 장동건 씨처럼 싸우기를 바란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제거된다. 이른바 트로츠키주의자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 배경 지식이 확실히 필요한 듯하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더불어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한 인물로서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 더불어 레닌-트로츠키로 이어지는 인물로 알고 있다. 이전에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발터 벤야민이 모스크바에서 머물 시절인 1920년대 러시아에서 발터 벤야민은 트로츠키의 여동생을 만나서 이야기했다고 적고 있다. 그에 비해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달리 반대 쪽에 있었다.

 

분명 스탈린이 집권했을 때 한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조선독립군도 희생된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 김산은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사실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도 아닌데, 스탈린의 집권과 더불어 숙청 당한듯 하다. 예전에 조지 오웰의 소설인 동물농장에서 스노볼이 나폴레옹이란 돼지에게 내쫓긴 당해서 동물농장이 자유와 평등의 공간이 아닌 공안정치의 소비에트연방을 풍자했다.

 

그런데 문제는 트로츠키적인 스노볼은 숙청되어도 그의 유령은 되살아있다. 모든 문제와 사건은 스노볼과 연계되고,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은 동물들은 모두 스노볼의 끄나풀로 몰아간다. 김산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소비에트연방과 그 뒤를 받은 김일성은 분명 북한의 불법적인 남침을 했지만, 그가 한편으로 독립군이란 사실도 변화 없다. 당시 웃기던 이야기는 만주국의 탄생과 일본군의 중국과 조선의 이간질로 통한 반일전선을 못하게 공작했다는 점이다. 거기에 좌절하는 한국인들에서 김일성이 펼친 전략은 군사전략보다는 희망이라는 전략을 내세운 점이다.

 

축지법이라든지 솔방울을 수류탄으로 만들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들은 분명 그가 엉뚱하게 신화의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것으로 통해 친일파에게 심각한 반감을 사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설자리를 위해 끝없이 투쟁을 했을 것이다. 친일이 친미로 들어서면서 우연한 625는 찬스를 주었다. 하지만 웃기는 점은 친일과 친미를 한 다카기 마사오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에선 핵을 만들어서 자주국방을 도모하다가 미국 기관의 암살요원에게 죽는다고 하는데, 그의 죽음은 친일과 친미의 웃기 넌센스를 보여준다. 아니라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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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 (무선 제작) - 무기.병균.금속은 인류의 운명을 어떻게 바꿨는가, 개정증보판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사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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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균, 쇠”라는 책을 읽어보면서 생각나는 것은 이전에 읽어보았던 인류학 관련 도서였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야생의 사고”럼 거의 현지답사를 통해 적어놓은 책보다는 마빈 해리스처럼 현장을 가본 것과 혹은 가지 않은 곳에 따라서 전반적인 인류의 문화와 생태구조 그리고 거기에 따른 인간의 생활조건에 맞추어 책의 내용을 전개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보다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인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더 재미있게 본 것 같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인간생활과 자연의 관계에서는 마빈 해리스의 관찰력이 더 좋았다는 뜻이다. 단지 이 책에 다루고 있는 내용 중에서 조금 특이할 만한 부분은 문명사회국가와 원시사회국가에서 기존 문화인류학 도서는 원시사회국가에 초점을 맞추어 인간을 연구하려 했다면 여기서는 오히려 문명사회국가 쪽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저자의 원주민 친구인 얄리의 질문처럼 왜 우리 종족들은 당신들 유럽인들처럼 강력하지 못했는가는 질문처럼 이 책에서는 다양한 관점으로서 적어간 것이다. 사실 인류학 관련 도서라고 하여도 다소 언어학 및 생물학, 진화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까지 참고하여 적어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역사적인 사실이나 지형변동, 기상이변, 기술의 발전까지 인류학 도서에서 많이 다룬다.

 

그런데 그 기술과 문명을 가진 인간이 어째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있게 되었는가? 그리고 어느 나라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면서 수 백 내지 수 천㎞에 떨어진 다른 국가에 갈 수 있는데도, 어느 사람들은 하루 1~2㎞ 반경에서 오고간다. 왜 그렇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문명의 혜택과 자연의 영향에서 큰 차이를 보이게 될까?

 

거기에는 기본적으로 식량이란 큰 전제가 보인 듯 했다. 특히나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단백질과 탄수화물의 관계는 인간에게 공동체로 넘어 제국주의라는 국가정치체계까지 넘어가도록 한다. 여기에 국가정치체계가 발달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일하는 부류가 자신이 일한 잉여물이 획득하여 그것의 비축으로 통한 비노동력자의 발생이다.

 

농업에 대한 기술을 연구하거나 혹은 그 지역의 안전까지 경비하는 부류까지 책임지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체계를 가지려면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거기에 따른 노동력을 위한 대규모 인원, 또한 이 인원을 운용하기 위한 하나의 제도와 체계가 필요하다. 그럼에 따른 국가정치적인 요소를 가진 사회에서는 계급사회가 일어나고, 계급사회는 다시 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이 발생한다.

 

문제는 이런 권력의 발달과 더불어 국가들이 여기저기 생기게 되면 서로 대립하게 되는 점이다. 그 대립은 단순히 국가끼리의 대립만이 아니었다. 국가조직 내지 거대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부족들이 이제는 그렇지 않은 부족과 사회를 공격해야 했다. 특히 인구증가와 더불어 식량의 부족, 게다가 높은 인구밀집을 가진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량과 더불어 터전을 구하기 위해 기존 세계에 머물던 부족과 국가에 침범하기도 했다.

 

그것이 대표적인 것인 남미대륙에 거대한 제국주의적인 영역을 넓힌 유럽국가 이야기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재화와 식량 그리고 그것을 나오게 할 수 있는 토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럽국가에서 방문하는 곳에 사람들이 살지 않으면 모르나, 대부분 모두 살고 있다. 그들과 마찰에서 전쟁이라는 것은 필요한 도구로 되었고, 그 전쟁의 방법에서 중요한 수단은 총, 균, 쇠이다.

 

총이야 과학기술과 문명의 발달로 통해 강력한 무기이고, 균은 인간과 분리할 수 없는 미생물이며, 쇠는 인간의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물건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이런 무기의 토대가 되거나 무기 그 자체인 존재들이 문명사회국가에서 문명화되지 않은 국가를 정복하는 전략에 많이 사용한 방법이다. 더구나 일부러 천연두 내지 병원성 미생물이 감염된 물건을 고의로 원주민들에게 주게 하여 원주민 부족을 멸하게 하는 잔인한 방법도 동원했다.

 

세균전에 의한 이야기에서 2차 세계 대전에서 직접적인 공격에 의한 방법보다는 세균감염에 의해 군인들이 더 많이 죽었다는 이 책처럼 인간의 정복에서 세균은 무시하지 못하는 공격방법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지 않은 곳에서 새로 들어오는 미생물에 대한 저항력을 인간은 소유하지 못한다. 게다가 그것을 들고 온 존재라도 새로운 영역에 들어가도 미생물에게 봉변을 당한다.

 

무더운 지역의 말라리아모기에 대해서 원주민들은 대처가 가능하나 그 외의 지역 사람들은 대처불가능하다. 그런다고 하여 인간이 미지의 영역을 놓치고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식량이 극빈하고 기상도 암울한 북극과 남극에 손을 미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식량공급이 되는 식물도 많이 없고 동물들도 많이 없다. 그래도 인간은 계속 정복해 간다. 어디라도 인간은 살아갈 준비가 된 문명이란 과학기술적 무기가 있으니 말이다.

 

총균쇠에서 그런 인간의 문명사회적인 부분에서 국가체계와 그것에 따른 정복되어가는 원시부족, 심지어 원시부족 내의 대립과 멸망관계까지 적어나간다. 또한 대륙의 넓이와 길이 운행수단에 따라 기술발전 내지 그 문명의 생존까지 귀결된다. 다른 종족이나 국가와 인접성, 식량이 농업중심의 중앙집권화, 자연적인 요건에 따라 오지세계가 되어 격리된 부족들, 이 모든 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하나의 인자로 작용한다.

 

총균쇠의 발전과 성장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자연적인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나는가? 그리고 거기에 따른 다른 인간들과 대립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 고립된 환경과 지나친 마찰에 따라 기술과 정치적 제도까지 상이하게 변모한다. 또한 지구상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언어와 문자의 힘으로 문명과 정치, 그리고 그것을 이용한 정복까지 새롭게 진화한다. 총균쇠에서 인간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주변 환경에 의해 변화하는 환경론적인 부분이 매우 강하게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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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Unbowe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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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란 실제가 아닌 가상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서사매체가 가상이라고 할지어도 그것은 현실적인 요소를 배제한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時, 서사)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란 말이 있듯이 역사는 개인의 기록이나 시라는 어느 이야기 거리들은 개인의 기록보다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이야기란 점이다.

 

그러나 최근에 시라는 서사(敍事, narrative)는 가상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것도 많으나 이제는 실화를 배경으로 각색하는 픽션(fiction)이 아닌 팩션(Faction)이란 장르가 최근 많은 영화에서 보인다. 이번에 내가 감상한 부러진 화살은 바로 픽션의 세계인 영화에서 팩션이란 하나의 진실을 담은 가상적인 스토리가 펼쳐지는 영화인 것이다.

 

보통 영화라는 매체 즉 서사구조를 가진 매체에서는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진행되는 내용들은 어떤 갈등을 소재로 하여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느 누군가를 희생 내지 자신들의 정의로서 통해 적에 응징으로 이어진다. 갈등의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어 그것에 대한 해결로 통해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라는 매체에서는 반드시 갈등의 존재와 더불어 그 갈등의 해결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번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란 없다. 오로지 갈등의 진행형을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서사라는 narrative는 어떤 사회나 조직에 대해 특정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인 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이루어지는 하나의 제의와 같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에서는 갈등의 해소 대신 계속 이어짐은 이 영화에서 의미하는 주제가 지배계급과 그 사회의 종속의 당연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 당연성에 대해 반항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권력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의 갈등은 대학 입시문제에서 틀린 답을 출제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부당함을 내세운 김경호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김경호 교수는 시험문제가 틀렸으니 이 시험 문제에 대해 정정과 더불어 진실을 알려 올바른 교육가치관을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학교 측은 자신들의 실수로 인해 교수진과 학교명예에 큰 금이 간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김교수의 진실공방은 무산된다. 문제는 김교수의 의견이 묵살이 아니라 김교수의 교수직까지 박탈당한 것이다.

 

그는 이번 사건으로 교수직에서 임용되지 못한 채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올바른 가치관과 진실을 풀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임용이 다시 허락되는 것으로 당시 잘못된 교육현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공방은 오히려 역으로 몰리게 된다. 그의 진실성은 어디에도 밝힐 수가 없으며, 단지 그가 정치적인 약자라는 이유로 또는 같은 편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재임용은 무산된다.

 

그런데 그 재판의 과정에서 과연 제대로 된 재판이었는가 혹은 아니었는가 라는 중대한 문제가 걸렸다. 당시 김교수의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김교수가 의문을 제기한 대학교 출신의 판사였다. 그 판사에게 모교에 대한 권력의 결탁은 학벌사회가 만연한 엘리트들의 권력 유지의 방법이었다. 물론 김교수 역시 대단한 엘리트이었으며, 상당한 수학학자였다. 그러나 김교수는 엘리트에 머물기 보다는 지식인으로 전환되어갔다.

 

자신이 지식인으로 넘어간 동기는 바로 부당한 권력 앞에서 진실이 왜곡되고, 그것마저 바로 잡으려 했지만, 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자신의 정당한 입지마저 사라진다. 김교수는 그 재판에 대한 문제와 더불어 대한민국 법치국가에 대한 불합리성과 부패함에 분노하여 자신의 소송을 기각한 판사에게 석궁을 들이댄다. 문제는 그 석궁이 발사되었느냐? 아니면 발사되지 않았느냐이다.

 

법이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강제적 제도이다. 그러나 사실 법이란 제도는 인간에게 정당한 가치관을 적용하기 보다는 인간을 감시하고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권력의 도구로 되어버렸다. 법이란 상당히 강력한 공권력과 더불어 막강한 권력을 부여한다. 정치라는 것은 권력에 대한 의지라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처럼 법의 집행에서는 그 법의 집행자라는 법관에게 큰 위력을 안겨주는 것이다.

 

법은 하나의 거대한 지식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세력에게 집중된다.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곧 언어의 권력자이고, 그 권력은 특정 세력들에게 다른 세력들에 대한 정치적인 지배행위 즉 헤게모니적인 행위로서 이어진다. 부러진 화살에서는 그런 헤게모니적인 요소가 상당히 잘 보인다. 김교수가 석궁을 쐈다고 한다면 그 감추어진 진실과 더불어 그 진실에 대한 증거, 법정에서 열리는 법적인 행위절차가 과연 올바르게 진행 되었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특히나 처음 재판 이후, 두 번째 재판에서 그런 모습들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박변호사가 김교수의 변화를 맡으면서 재판과정에 보이던 법적행위 절차들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과학적으로 판단해 보아도 법적인 절차를 둘러보아도 이성적인 논리로서 설명이 가지 않는다. 혈흔이 뭍은 옷이 있는데, 안쪽 옷과 겉옷은 혈흔이 묻어 있는데, 왜 중간 옷에는 혈흔이 없는가? 혈흔이 있다면 과연 그것이 피고인과 같은 혈액인지 검사해야 하지 않은가 라는 합리적인 재판과정을 모두 무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무시하는 이유는 바로 피해자 즉 김교수에게 형사소송을 제기한 사람이 김교수에게 부당함 재판을 내린 같은 판사라는 이유다. 같은 권력을 가진 존재에게 법적인 행위로서 처벌하게 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들의 권력적인 존재인 사법부의 위엄이 흔들리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의 정치적인 자유와 법적인 평등은 보장받는다. 그리고 그런 제도에서 반드시 이행하는 것이 정부이며, 그것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법부의 임무이다.

 

그러나 부러진 화살에서는 판사라는 공정해야한 존재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공정했다. 거기에 검사들의 대표로 나오는 심검사는 법적인 문제를 옳게 진행하기 보다는 오히려 판사와 검사의 권력유지라는 체계로 이어진다. 권력을 가진 두 존재가 권력을 위해 김교수를 피고인으로 몰아넣고 그를 사회적 정치적 매장으로 인해 자신들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무소불위적인 법에 대한 권력에서 대항마는 법을 아는 다른 법조인들은 즉 변호사들이다.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박변호사는 상당히 법에 대한 의무감과 진실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신념이 강한 마음이야 말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는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뭐든지 될 때로 되라고 하는 최악의 변호사였다. 하지만 그가 최악의 변호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자학하고 책임을 물게 하는 피해의식이었다.

 

2001년 부평에서 공장노동자를 위해 그는 인권노동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위해 온 몸으로 경찰이란 권력 앞에서 대항했다. 하지만 그가 벌인 투쟁에서 같이 참여한 노동자들은 모두 심한 폭행으로 부상을 당했으나, 그는 당하지 않은 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자신도 같이 맞아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경찰들은 변호사란 직책이란 권력에서 다른 노동자를 습격했다.

 

그는 그것이 분했던 것이다. 그 후에 인권노동변호사 운동에 그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날의 기억이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게 되었다. 아무도 변호를 맡으려 하지 않은 김교수의 변호사, 그가 드디어 맡은 것이다. 그가 맡은 이유는 단순히 김교수를 위해서만 아니었다. 처음에는 억지로 맡을지 모르나, 그가 선택한 변호사의 의무는 막강한 권력을 지닌 깡패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김교수와 만날 적에 카메라의 모습을 보면 미디엄 샷 내지 미디엄 클로즈업으로 통해 둘 사이의 갈등을 보여준다. 처음 두 사람은 카메라 화면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다. 미디엄 샷으로 둘의 관계는 극과 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번째 재판과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그들은 매우 가까워진다. 마지막에 다다르면 그들은 재판에서 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패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만족했다.

 

현대사회에서도 억울한 누명과 부당한 대우에 대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권력에 대항한 것이다. 특히 오른쪽으로 카메라를 계속 돌아가는 워킹-인사이드(walking-inside) 기법으로 통해 처음에는 어긋난 두 사람이 결국은 화합을 한다. 문제는 두 사람이 화합을 했을망정 서사의 중요한 갈등인 이 사회구조라는 세계와 화합하지 못한다.

 

단지 두 사람은 투쟁만 진행할 뿐이었다. 두 번째 재판에서 어떻게든 김교수에게 유죄를 내리려 했던 이판사는 김교수의 가진 확고한 의지와 그 의지 속에서 찾아낸 법적인 근거와 진실의 증거와 증인으로 자신의 최소한의 법적 양심에게 무릎을 꿇는다. 비록 그는 권력유지를 위해 김교수에게 불리한 처우를 내리려 했으나,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합리적인 변론과 더불어 주변에서 진실을 보는 대중들 앞에서 그는 부장판사직을 버린다.

 

이판사가 나와 재판을 벌일 과정에서 수많은 카메라 앵글이 그를 클로즈업 하나, 그의 얼굴은 정면보다는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이앵글에서 그의 입장이 여실히 보인다. 법을 집행하는 법관은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봐야할 존재이다. 즉 재판을 여는 법정에서 재판관이 머무는 자리가 가장 위치적으로 높은 자리이다. 따라서 원고, 피고, 증인 심지어는 관람하는 방청객까지 재판관을 우러러 봐야 한다.

 

재판관이 앉아있는 자리야 말로 권력의 최고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상징을 가진 재판관이 정당한 법적 절차와 양심적인 행위를 어길 때마다, 그리고 거기에 대처하기가 어려워지는 이판사의 곤란함을 보여줄 때마다 카메라는 계속 재판관은 얼굴 위로 클로즈업한다. 그것은 곧 보통 사람이 우러러 봐야할 재판관이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내려다보게 하는 하나의 장치로 이용된 것이다.

 

그런다고 재판관의 권력을 무시하지 못한 것도 나온다. 두 번째 재판과정도 그렇지만 세 번째 과정에서 나온 신판사의 경우 그의 모습은 머리 위로 비추는 클로즈업보다는 살짝 눈을 올려보는 클로즈업으로 나타난다. 중간에 하이앵글로 신판사를 내려보지만 이내 곧 다시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가다가 다시 올려다보게 된다. 김교수와 박변호사의 변론이 그에게 도저히 닿질 않음을 카메라로서 보여준다.

 

오히려 신판사의 눈으로 밑을 내려 보는 것이 더 권력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어깨 너머 샷으로 보는 관점에서 주로 재판관의 뒷모습에서 정면을 보는 것을 연출한다. 어깨 너머 샷은 카메라가 관찰자라기보다는 카메라의 메인이 되는 사람 즉 카메라에서 뒷모습이 나오는 사람이 보는 세상이다. 신판사라는 인물이 얼마나 권력지향적인 인물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 부러진 화살에서는 상당한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이 재판에서 패배한 김교수이었고, 그는 안산교도소로 이감되나 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새로운 전쟁을 예고했다. 아직까지 한국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교정세계에서는 일재의 잔재가 깔려 있고, 일제 잔재 뒤로 독재의 잔재로 이어졌다. 폭력과 권위로서 모든 죄수를 다루는 공간에서 김교수는 재소자에게 부당한 행위를 강조하는 두 교도관의 이름  세 글자를 메모한다.

 

그리고 영상화면이 끝난 후에 검은 글씨 뒤로 그는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지금도 법정공방으로 투쟁한다고 한다. 이 영화의 결말은 김교수의 안산교도소의 수감으로 통한 것이나, 그것은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부합되지 않은 결말이며, 다시 결말을 보기 위해서는 그에게 주어진 갈등과 고민을 해결할 수밖에 없다.

 

부차적으로 이 작품에서는 많은 사회적인 문제와 더불어 교도소의 암울한 현실을 말해준다. 그가 처음 수감될 때 옆에 있던 수감자들이 와서 김교수에게 법적자문을 받는 것을 보여준다. 범죄를 저질러도 부당하게 법적처벌을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김교수는 자신이 스스로 배운 법적 지식을 이용하여 다른 수감자의 억울함을 해소한다. 이에 반면에 김교수는 상당한 감옥소의 폭행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판사가 그만두고 신판사가 교체될 쯤에 판사들은 김교수를 법적인 제도에서 그를 잡으려 한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조건에서 잡으려 한다. 교도소에서 독방으로 혼자 공부하던 김교수를 다른 수감자와 같이 생활하도록 하는데, 문제는 그 수감자 한 명이 상당히 비정상적인 사고를 지진 인물이란 점이다. 그는 김교수가 오자말자 폭력과 협박으로 김교수를 괴롭히고, 남자밖에 없는 교도소에서 남자가 남자를 성폭행하는 변태행위까지 저지른다.

 

물론 변호사와 가족들의 면회로 통해 그 문제는 해결되나, 은근히 그런 수감자 옆에 붙이게 하여 김교수를 지치게 하는 법의 치사한 방법들은 권력의 압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도 김교수는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한다. 그는 자기 자신이 지식인이란 사실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자신의 의지였다. 세 번째 재판과정에서 김교수는 멀리서 유학 가서 귀국한 아들을 만나 수갑이 채워진 채로 아들의 두 손을 마주 잡는다.

 

그의 수갑은 범죄자가 찬 수갑은 분명하나, 그 수갑은 억압받은 자신의 현실에서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세계에서는 공정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부여받은 하나의 시련으로 보여준다. 김교수는 미래를 위해 굴복하지 않았으나, 그는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그것은 원칙과 공평함을 중시한 인물이었다. 수학학자에게 논리라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 즉 정답이 아닌 이상 모든 것이 오답이란 확고한 흑백논리를 가진다.

 

그러나 김교수가 가진 흑백논리가 오히려 더 우리가 가져야할 논리로서 다가온다. 그 흑백논리는 정말 공정하고 과학적인 논리로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논한 논리는 윤리 없이는 논리가 성립되면 안되는 것처럼 김교수 역시 그의 논리는 양심을 지키기 위한 윤리로부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을 준 세상은 윤리를 가진 논리가 아니라 이익을 가진 논리였다.

 

즉 기회주의적이고, 집단이기주의적인 사회모습에서 그는 싸운 것이다. 어쩌면 부러진 화살은 화살이 부러지고, 그 화살이 발견되지 않아 증거인멸로 인해 김교수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살이 부러진 것은 화살 그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양심이 부러진 것이라는 것을 런닝타임 100분 동안 계속 관객에게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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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오늘 출근합니다! - 사회로 나간 장애 아이들의 기적 같은 이야기
황윤의 지음 / 학지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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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다양한 존재적인 형태로서 살아간다. 그런 인간의 존재에서 인간은 완벽함을 가지고 나올 수는 없다. 누구는 태어나면서 좋은 집안과 환경,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며 어느 누구는 좋지 못한 집안과 환경 그리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런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으로 인해 서로 간의 벽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나면서 모두 다르고 차이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인간의 탄생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한 피선택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큼은 알아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그를 존재하게 한 그 존재형성자 역시 자신의 의지로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우연의 존재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거기서 태어나면서 우연이 아닌 귀납적인 법칙은 오로지 부모가 누구이고, 자신이 살아가는 곳이 어디이며, 자신이 어디서 무엇을 할 수 있도록 주변이 형성되어 있는가이다. 인간이란 결국 환경적인 요인에 벗어날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하여 그런 사회적인 존재에서 모두 피선택한 존재라고 하여 자기 인생을 피선택적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겐 이성이란 것에 의하여 판단을 내리기 하며, 또한 감정이란 것이 있어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이성과 감정, 그것을 나타낼 수 있는 육체적인 존재는 결국 인간을 사회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필수적인 사항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부터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이 완벽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소유할 수 없는 존재도 있으며, 게다가 자신의 신체마저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장애우라는 몸과 마음이 약간 불편한 존재이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불편할 뿐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다. 정작 그들을 불편하면 할수록 우리들의 양심과 가치관이 더 불편하게 될 것이다.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라고 주장한 서구철학자 레비나스는 사회의 건강도를 알아보기 위해서 사회적인 약자의 얼굴로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장애인, 고아, 이방인과 같은 사회적으로 매우 열악한 위치에 놓인 존재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어하나, 자신의 처한 사회적 환경과 경제적인 상황에 의해 많은 인권적인 소외에서 힘든 삶을 영위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처우와 개선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중에서 장애우의 경우는 매우 심각하다. 이들은 대부분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경우가 다반하다. 선천적인 장애는 결국 자신의 인생과 더불어 자신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런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보다는 그런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살아가는 것에서 장애우라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으로부터 배척을 받으면 이들에게 내일이란 아름다운 말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지만 할 수 있다는 사회참여권을 줘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점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이라고 하였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듯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노력으로 통한 가치의 생산이다. 인간이 가치를 생산하면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노동할 수 있다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또한 경제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 장애인들의 문제에서 가장 심각한 점은 이들의 삶의 질이다.

 

이들 대부분은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사회상으로 인해 평생 그냥 그 자리에서 있어야할 문제점을 남긴다. 만약 이들이 일을 한다면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또한 경제활동으로 통해 가난함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 장애아동이 태어난 곳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계층보다는 가난한 계층이 더욱 많다. 게다가 소외계층 내지 편부모 또는 부모에게 버려진 고아들처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게 사회적인 참여권 내지 노동으로 통한 자신의 가치를 현실화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평생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누가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삶을 포기해야 하거나 혹은 옆에 있는 것이라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피하지 못할 짐이 될 것이다. 또한 국가 예산적으로 이들을 그냥 그대로 지원하는 것은 큰 부담이 아닐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부분을 조금이라도 개선한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예산절감과 동시에 이들에게 직업을 주어서 사회실직률을 감소하고, 특히 장애인들의 구조적인 결함을 오히려 이점으로 삼아 그것을 활용한다면 사업장에서는 부족한 인재의 충원이 될 것이고, 장애인들에게 삶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장애인이라고 일을 하지 마란 법도 없고, 사회생활을 하지 마란 법도 없고, 심지어 사랑을 하여 결혼하지 마란 법도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독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는 난쟁이에게는 보통사람처럼 대하기보다는 보통사람이 난쟁이처럼 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일반적인 획일화된 관념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사회상과 일반사회적인 부분을 이해하기 보다는 역으로 그들을 이해하여 그들 스스로가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필요한 방법이다.

 

그것은 결국 그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여 그들 스스로 인간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장 큰 기쁨은 많은 금전과 권력보다는 자신에게 합목적성이 일치하는 일을 하여 그것이 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장애인들이라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할 법은 없다. 그들에게 하나의 기회공간을 열어줌으로 그들 스스로 사회적으로 기쁨을 얻어가는 것이다.

 

장애인이라는 최악의 조건이라도 우리가 최소수혜자로서 그들을 생계와 교육기회를 보장하여 그들에게 사회적인 참여를 위한 직업의 기회를 줄 수 있을 때, 그들은 세상이 자기를 외면하기보다는 자신 스스로 사회로 들어가서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하나의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오늘도 나는 출근합니다에서 출근하는 것은 곧 노동을 하는 것이고, 노동으로 통해 이들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자기존재적인 가치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통하고 있는 고정관념 내지 차별의식을 조금씩 정리하고 그들을 따뜻한 눈빛으로 대하여 마치 그들이 우리의 이웃이라는 생각하는 것이 바른 사회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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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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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역사를 보자고 한다면 분명 고조선 단군시대부터 시작하려 할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문명 이전의 미개사회인 구석기 내지 신석기가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시작점인 단군시대인가? 아니면 신화도 없는 미개사회인가이다. 문명화된 사회에는 신화라는 미개적인 이야기가 사라질 것이라 보이나, 오히려 신화는 문명화되면 될수록 가속화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다양함과 시대의 복잡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양한 욕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한국역사를 고조선 시대가 아닌 최근 몇 년 내지 몇 십 년으로 잡으면 어떨까나? 참으로 역사공부를 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계를 돌려서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제일 최근의 일들을 기억하는 존재이지 몇 십 년 전이나 혹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나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들을 찾는 것은 오직 죽은 인간들이 남긴 자료에 의해 분석한다.

 

그래서인가? 역사라는 학문에는 만약이란 단어가 없다. 그것도 아니 만약조차도 나갈 수 없는 것이 역사다. 하지만 최근에 대체역사라는 드라마 내지 소설, 영화까지 존재하므로 인간의 욕망은 역사조차도 바꾸고 싶어 한다. 단지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나 그 자체에서 발생한 이야기들은 수많은 신화로 남을 것이다. 역사와 신화는 다른 존재이나 신화 속에서도 역사가 보이고, 역사 속에서도 신화가 보인다.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기원은 서기 전 2,333년이고, 그곳의 군주는 단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신화 속의 인물인데도 우리에겐 역사의 시초다. 그러면 그는 역사적인 인물인가? 신화 속의 인물인가? 그래도 그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역사라는 것이나 혹은 신화라는 것은 몇 년이 지나도 계속 돌고 돌아가는 하나의 공전과 같은 공식이다.

 

인간은 천동설적 존재가 아니라 지동설적인 존재이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역사라는 것을 찾아가면 그 이전을 찾아가고, 이전의 이야기를 다시 잡으면 다시 그 이전과 이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지금 우리나라 모습에서 조선 후기와 관계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당연한 논리다. 왜냐하면 조선 최초 불평등 조약 강화도조약이 일어난 배경은 천주교탄압과 서구배척, 일본의 대륙진출이란 야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이런 모든 인자들 속에서 이루어져 흘러갈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사학자 내지 고고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에는 역사란 인간이 적어갈 흔적이다. 단지 그 흔적은 아쉬운 기분이 들지만 정치적인 상황의 정리본이란 점이다. 우리 역사책에 어느 동네 할아버지가 가다가 수박밭을 보고 수박이 너무 탐스러워 수박 하나를 잘라 먹는 일들은 역사에 올라가지 않는다.

 

역사에서 주로 크고 굵직하고 인간사회에 큰 영향 내지 전환을 일으킨 일들이 대부분 실린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 이상의 사회 내지 국가단위의 큰 정치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현 시점에 설아 가는 인간에게 정치적인 해석을 키워줄 수 있다. 혹은 정치사상 도서를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그리스 철학자, 그리고 그들이 살아간 폴리스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역사는 특별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영향력이 지금도 현대사회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일반 소시민들이 역사의 주인공에서 소외될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에서 소외되기 보다는 우리가 역사를 알고 그 역사를 적어가는 주체로는 성장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는 지금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일 최근의 역사를 적어놓았기 때이다. 그것도 중간이 아니라 머리 처음부터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잘못된 역사 관념과 독단에 빠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권력의 주체는 국가와 사회이다. 사회의 많은 조직인 학교, 직장, 군대, 공장, 법률 등 다양한 제도와 사회적인 여파로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 움직인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는 필수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은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사고에 머물 수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한홍구 교수는 이 책을 적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유일하게 분단국가이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과 만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백화점에 가서 상품을 사고, 성적인 욕망을 채운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소비욕구와 더불어 인간의 억압에는 성적 억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본주의국가이면서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자기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위에서 말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정말 제대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어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칸트가 인간의 이성에 대해 깊이 통찰한 순수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자기의 절대적인 진리 즉 Dogmatism이란 교조주의에 매달려 있다. 오히려 이런 교조주의적인 요소가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 근현대역사의 필수본이다.

 

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김근태 고문후유증, 부천 성고문이 일어나고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는가? 결국 인간의 폭력과 상스러움을 그대로 미화시키는 파시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끊이지 않은 지난날의 악몽과 영광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영광이나 그들에겐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억압된 대중일수록 권세가들에겐 부와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과정을 낱낱이 파고들어가려 한다.

 

다소 내용은 진보적이기도 하나, 때로는 진보의 뒤통수를 날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른바 민족주의적인 한국사회의 일면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독립군 노선의 정신이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친일파들이 군부독재 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증하기 위한 묘안이었고, 최근에는 국민단결과 화합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런 사고에 젖는 것에 대해 당시 본인들은 알지 못한다.

 

당연히 그들은 옳은 일이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런 점들이 지금 우리에게 난항을 주고 있다. 특히나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많은 과오도 있지만, 그에 비해 우리 역시 베트남 사람에 저지른 범죄는 감추고 있다. 물론 그런 짓을 하게 한 존재는 극우주의자들의 방법이나 이제는 범죄를 저지른 공모자는 뒤로 빠지고 허울 좋은 명분이 남아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마치 잘못은 정치가들이 하는데 그 분노의 시위를 죄 없는 의경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광기는 결국 하나의 종교적인 주술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막대하다. 그 에너지의 분출구에서는 항상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제나 희생자란 존재가 필요하다. 자신의 의견을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짓눌러야 하나의 정치적인 헤게모니라는 정당성을 발휘한다. 특히 그것이 대규모적이고 폭력적이고 과격해질수록 더욱 가속화된다.

 

이 책에서는 과거 일본군들이 독립군에게 저지른 일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가?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가 이제는 좌우이데올로기까지 전환되어 결국 중요한 원점을 놓친 채 그저 조종석이 없는 배 한척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표류하는 배일수록 광기와 집착을 강대하고, 거기에 메이는 인간들은 더욱 날뛰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많은 학살과 억압, 탄압들 그리고 그것을 뒤로 하여 몰래 이익을 챙기던 엘리트들, 적으로 봐야할 존재가 알고 보니 독립군이고, 국가적인 인물이 알고 보니 최악의 존재였다. 물론 그것은 누구의 눈인가? 누구의 입장에 따라 다르다. 단지 아쉬운 점은 당시 희생당하고 사라진 존재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은 유령이 되어 버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승자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에서 그토록 조선민중을 수탈한 중국장수가 당시 조선정부에는 최고의 영웅이었다. 밟히고 밟힌 조선민중은 결국 약자이었고, 게다가 글도 읽지도 보지도 못하니 영락없이 강자의 승리다.

 

권력의 구조에서 지식은 하나의 도구였고, 언어의 힘으로 권력을 명하기 때문에 지식의 존재 근원에서 언어와 문자는 결국 지배세력이 피지배세력을 잡는 것에 필요한 존재였다. 피비지배자 민중들은 문자와 언어의 이해가 없기에 사고와 사유의 힘은 무척이나 작았다. 단순한 이데올로기 하나만이 절대적 진리다. 지금도 운운되는 매카시즘은 625전쟁이 종결 된지 60년이 되어가는 이 마당에도 꽃피운다.

 

어느 특정세력 내지 의견에 조율하지 않으면 마녀사냥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 만큼 지식에 대한 부재와 그 부재 속에서 맞은 해방, 그 후 반자발적인 정부조직이란 어두운 기억만이 우리의 그늘에서 살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나간 일들을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지만, 이런 식의 일들은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지나간 것을 붙잡고 물어지는 것보다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준비성이다.

 

이전에 왜 이런 일이 생기고, 누가 관여하였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당시 일이 끝나도 그것에 의해 피해보는 사람들은 계속 고통에 사무치고, 그 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여전히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솔직히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일이 가끔 터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은 당시 침묵하고 외면하던 이들이 막상 일이 생기면 크게 분노한다.

 

분노하는 것은 좋고 잘못된 점을 개선하는 것을 고치면 좋다. 단지 아쉬운 일들은 그것을 넘어서고 나서의 후다. 이 책에선 임금의 목을 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라 한다. 인류학자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라는 서적을 보면 아버지와 같은 군왕, 부족장을 신으로 여긴다. 신은 자연과 같은 존재로 반드시 신은 늙으면 죽고 다시 태어난다. 이때 이 신의 부활을 위해 기존 부족장이나 왕의 목을 누가 친다. 그 치는 사람은 그 왕과 대결로 통해 승리로 통하여 모든 것을 바꾼다.

 

하지만 한국은 그 그늘 속에 있는 왕의 목을 치지 못했다. 치기도 전에 해방과 북한의 남침이 발생한 것이다. 지나간 일들을 청산하지 못한 것은 왕의 목을 치지 못한 황금가지 소유희망자이다. 앞으로 가지게 될 미래와 권리에서 과거를 빼지 못함은 결국 계속되는 왜곡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史에서는 이런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몰랐던 사실이나 알았던 사실이나, 그것을 제대로 판단했는지 혹은 판단하지 못했는지, 그래도 이 책 전부가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단지 일어난 일 자체만은 사실이었고, 거기에 대한 비극은 현실이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되어 우리가 보기엔 부당하고 어긋나 있어도 당시 사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잘못된 일들을 묻어가는 것이 모든 해결방안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판단해야만 역사라는 거대한 정치적 상황들이 정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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