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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 Leafi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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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먼저 본인이 금회 영화관에서 상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이란 작품을 알게 된 동기는 내가 만화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으나 사실은 다른 이유로 알게 되었다. 그것은 김용석 교수님의 “서사철학”이란 도서에서 7가지 서사텍스트를 두고 설명하는 가운데, 이른바 “신화(神話)-대화(對話)-진화(進化)-동화(童話)-혼화(魂畵, Animations)-만화(漫畵)-영화(映畵)” 7가지 서사에서 동화 부분에서 알았다.
 

4번째 서사에서 동화라는 것은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이야기로서 겉으로 들리는 내용들은 매우 아름다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들이 숨겨져 있다. 가령 월트 디즈니의 세계명작 애니메이션에서 담론된 내용을 본다면 “백인남성우월주의” 내지 “여성종속화”적인 면이 많이 숨어 있다.

게다가 원작은 아주 잔혹하고 추잡스러운 “백설공주”와 “신데렐라”가 엄청나게 미화되어 마치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토리로서 정해져 있다. 사실 위 작품의 기초는 사실 신화이다. 신화란 인간의 표피적인 부분보다는 내면적인 욕망과 이상의 괴리에서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런 점으로 서사라는 부분에서 신화와 동화 기본적으로 비슷한 부분이 많이 깔려 있으며, 문학의 시초가 신화라는 점에서 후에 새롭게 영상서사로 이어질 만화, 영화, 혼화는 문학적인 텍스트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사실 서사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대화로 시작한 구술서사에서 글자를 기록물에 남기는 문자서사로 발전했다.

그런 부분들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 서사체로 다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단지 그것이 “말로 오는 구술서사인가? 글로 오는 문자서사인가? 녹음되어 귀로 들리는 음성서사인가? 이미지로 되어 있는 영상서사인가?” 라는 부분에서 우리는 다르게 받아들일 뿐이다. 모든 이야기 구조나 내용은 변동이 없으나 단지 보고 듣는 방법의 차이가 그렇게 느끼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본인이 감상한 <마당을 나온 암탉>의 경우는 원작이 동화라는 정지된 이미지를 가진 영상서사에서 애니메이션이란 움직임의 미학을 가진 영상서사로 대체된 것이다. 이런 특성을 이용하여 서사구조를 분석해보고 또한 여기서 의미하는 내용은 무엇일까? 라고 나는 생각하며 <마당을 나온 암탉>에 대한 비평을 적어 보려고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세계관의 경계점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기존 세계와 다른 세계의 분기점에서 갈등하는 모습이 나온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주인공인 잎싹은 자신이 살던 양계장을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잎싹이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바로 자신의 삶이 거기에 머무른 채 시간이 흘러도 자신의 시간은 멈추어 있던 것이다.

양계장에서 식사시간에 맞추어 먹이를 먹고 그저 수정되지 않은 달걀을 낳는 잎싹은 자신의 삶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양계장 문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 기존 자신이 살아온 삶과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잎싹은 죽은 사체처럼 연기하여 양계장을 벗어났으며, 결국 마당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그녀가 머물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모두들 이렇게 말한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저기 양계장이야!”라고 말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굳이 잎싹만이 아닌 우리 인간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자신의 틀과 공간 속에서 멈추어 나오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정체성을 잃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사회를 만들며 타인과의 소통으로 통해 정치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동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잎싹은 갇혀있는 양계장의 사회를 탈출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의 안락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관을 위해서였다.

잎싹은 암탉이었으나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오로지 병아리는 마당을 점령하고 있는 뚱뚱한 수탉만의 권위였다. 양계장의 의미는 그런 가부장적인 모습을 표현해낸 곳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줌은 추후 잎싹의 아들인 “초록이”가 양계장에서 탈출하자 수탉의 아이인 “도미솔”이 반란을 일으켜서 수탉의 벼슬이란 감투를 쓰게 된다.

이른바 아들이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하고 아버지를 하나의 속박당하는 존재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래도 역시 한국인이 만든 작품이라 아들은 아버지를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인 “오이디푸스왕”에서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를 죽임으로 하여 자신의 아버지의 권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근친상간과 친부살해라는 패륜적인 죄악으로 결국 자신의 눈을 찔러 죽을 때까지 맹인으로 살았으나 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째든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잎싹은 그런 일부다처제의 가부장적인 세계에 갇혀 자신의 삶을 표출하지 못한 심리적인 억압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런 부분은 자신이 열렬히 사랑했던 청둥오리인 “나그네”의 알을 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가부장적인 권위에서 뚱뚱한 수탉의 알을 품은 다른 암탉이 부러워하던 잎싹은 이른바 모성애라는 것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까?

<마당을 나온 암탉>의 두 번째 극적 플롯인 “나그네의 배필의 죽음”에서(첫 번째 극적플롯은 잎싹이 양계장을 탈출하여 족제비에게 습격 받은 후에 나그네의 도움으로 구출된 것) 잎싹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초록이의 알을 처음 품을 때 자신의 얼굴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것은 자신이 모성애를 가지고 싶었던 것과 자신이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길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자녀로 통해서이다.

생물이 살아가면서 모두 유한한 수명이 있으나 그들이 죽지 않고 살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생물이 자기와 똑같은 분신을 재생산으로 통해 가능했다. 그러나 암탉인 잎싹이 청둥오리인 초록이를 키운다는 것은 자신의 생물적인 가치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상적인 가치를 남기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이질적인 방법이다. 그런 이질적인 잎싹의 가치를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는 공간의 경계에서 극히 들어낸다. 처음에 양계장을 탈출할 때와 수달과 만나 거처를 만들 때, 나그네가 죽고 나자 늪으로 갈 때도 공간적인 이동이 계속 일어난다. 잎싹은 자신이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분명히 양계장이나 오히려 양계장에서 멀어져서 더 새로운 세계로 간다.

그런 공간으로 옮기면서 잎싹은 모두의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대우만 받을 뿐이다.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사회를 가지게 되면 자신만의 공간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 이른바 문화세계는 비슷한 부류나 동일한 접점을 가진 존재들이 만나서 하나의 거대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잎싹은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고, 갈퀴가 있어도 수영할 수 없으며, 게다가 다른 동물처럼 강력한 힘이 없다.

오로지 잎싹은 자신의 의지로만 나그네의 아들인 초록이를 키울 뿐이다. 닫힌 세계에서 항상 자신에게 따뜻하지 못한 열린 세계로 가는 잎싹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초록이의 성장이다. 초록이의 성장은 아주 의미신장하다. 왜냐하면 초록이는 분명 청둥오리이나 잎싹이를 엄마로 본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질수록 엄마와 다른 자신의 모습에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는다.

잠수가 가능하고, 수영도 잘하며 나중에 하늘을 날아 청둥오리 파수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찾을수록 초록이는 엄마와의 시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고, 엄마의 열린 공간인 하늘이 이제는 초록이가 살아야 하나의 커뮤니티로 된다. 물론 처음에 청둥오리 사회에서 초록이는 외면을 받지만, 파수꾼 경연대회 성과로 통해 그 무리의 리더로 급상한다.

그것으로 통해 더 이상 초록이는 암탉의 아이가 아니라 청둥오리 무리의 일원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이다. 그런 세계의 구분은 바로 하늘이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청둥오리와 날지 못하는 암탉 사이에는 분명 이원화적인 공간적 대립이 성사된 것이다. 물론 잎싹은 청둥오리가 아니라 날지 못한다. 거기에 반해 초록이는 날 수 있기 때문에 잎싹이가 가고 싶은 세상을 대신 날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초록이의 성장을 위해 잎싹이는 모든 것을 희생했다.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초록이에게 사랑으로 감싸 주었다. 그리고 잎싹이는 천천히 야위어가고 결국 겨울이 다가오자 병에 걸린다. 청둥오리들은 겨울이 되기 전에 잠시 늪에 머물다가 겨울을 보내고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그런 사계절이란 자연의 순환 아래 초록이는 청둥오리의 일원으로써 떠나게 된다.

슬픈 사실은 초록이가 청둥오리의 무리로 가게 되어 엄마인 잎싹이와 모든 것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신이 그동안 청둥오리 무리 속에서만 살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초록이는 자신의 발에 묶인 붉은 끈을 계속 묶인 채로 살아간다. 그것이 바로 잎싹이와 보내던 유일한 추억이며 흔적이었다. 또한 그것은 잎싹이가 닫힌 양계장과 마당을 나와 넓은 세상에 나와 타인의 아이를 자신의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작품 마지막으로 오면서 <마당을 나온 암탉>은 기존에 보이던 디즈니 애니메이션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갈등의 존재와의 화해이다. 물론 그 화해는 잎싹이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이 존재한다. 잎싹이가 사랑하던 나그네와 나그네가 사랑했던 어느 암컷 청둥오리의 목숨을 앗아간 족제비가 사실은 잎싹이 못지 않은 모성애를 가진 것이다. 잎싹이가 어느 작은 동굴에 가니 어린 족제비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우연히 족제비와 굴앞에서 마주친 잎싹이는 초록이가 족제비 발에 잡힌 것을 보았다. 잎싹이는 족제비의 발톱에 초록이가 죽지 않기 위해 족제비의 어린 새끼를 발톱으로 잡아 초록이를 위기에서 구한다. 그러나 잎싹이는 그런 위기에서 모면한 것을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족제비는 자신의 새끼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사냥을 한 것이었다. 만약 사냥감을 놓쳐 자신이 굶게 되면 어미 족제비의 몸에서 젖이 나오지 않아 새끼 족제비 모두 굶어죽게 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잎싹이는 초록이를 청둥오리 세계로 돌려보내어 멀리 떠내 보내고, 자신은 족제비의 사냥감으로 자진한다. 족제비가 하얀 눈을 밟고 잎싹이의 뒤를 바라볼 때 잎싹이는 조용히 두 눈을 감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그런 잎싹이의 모습을 본 족제비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 간의 마음을 확인한다. 결국 자신보다 소중한 어린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잎싹이는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병아리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나그네의 만남과 나그네의 죽음으로 초록이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잎싹이는 그런 희생으로 통해 자신의 이상과 욕망을 이루었다. 다시 돌아와 우리 인간 세계에서 본다면 잎싹이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성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아닌 타자의 아이를 돌보며 모든 사랑을 주었다.

우리 인간들은 그렇게 잎싹이처럼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까? 솔직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잎싹이의 고귀한 사랑과 자신이 가진 모성애로 통해 진실한 자기 이상실현을 이루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른 구도에서 이 작품을 보면 초록이의 탄생과 나그네의 죽음이 절묘한 듯하다. 한국신화와 그리스신화의 차이점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는 게 아버지의 존재다. 그리스신화에서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제거당하는 존재인 반면 한국은 제거당하기 보다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로 나온다. 일단 내가 이것을 조금 의미를 두는 이유는 나그네가 청둥오리의 무리에서 최고의 파수꾼이란 사실과 초록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다시 최고의 파수꾼으로 자기 정체성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후레자식인 초록이는 그야말로 한국신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웅의 탄생과 일치한다. 아버지 나그네의 죽음이 있었기에 초록이는 청둥오리 세계의 영웅으로 등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초록이는 그 무리의 리더로써 엄마 잎싹과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듯이 초록이는 한쪽 발에 묶인 붉은 줄로 통해 엄마인 잎싹과의 과거를 공유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 기존 한국 무속신화에서 자주 보이는 어머니의 희생이라는 극적플롯과 의례가 존재하는 점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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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음모론 -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조작되었다!
제이미 킹 지음, 이미숙 옮김 / 시그마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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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음모론이란 서적을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예전에 내가 보아왔던 책들에 대해 약간 다시 상기 시켜준 듯하다. 특히 노암 촘스키 총서와 같이 근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각종 강대국들의 음모와 그 음모에 희생된 많은 국가와 그 국가의 사람들에 대한 부분이 생각났다. 그리고예전에 보았던 레바논전쟁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학살극을 다룬 "바시르와 왈츠를", 또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화씨 9/11"도 생각났다.

그 이유는 과연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전쟁, 테러, 우리가 셀 수 없이 부딪히는 비극들이 단순히 우연으로 이루어졌을까? 내지 이것이 과연 우연이 아니라도 그렇게 비극이 톱니바퀴에 이빨을 서로 맞물러 끼워넣듯이 맞을 수가 있는가이다. 물론 이 책에서는 그런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모두 틀렸다 이 책이 진실이다"라고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논리적으로 납득되기 어렵거나 납득되더라도 너무 앞뒤가 잘 맞아 마치 누군가의 손아래 놀아나는 기분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언론과 미디어에서 "이것은 이래서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믿어 버리기에는 뭔가 만족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한국에서 많이 일어났고, 한국이 아닌 곳에도 많이 일어난다. 멀쩡한 사람들이 어느날 죽어버리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멀쩡한 인간이 아주 어려운 상황을 무릎쓰고 유명인들을 살해한다는 것은 그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현실을 그대로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 책을 보는 내내 조금 다소 억측스러운 부분이 있었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너무 앞뒤 상황이 잘 맞아 떨어지는 점. 예전에 보았던 여러 서적, 또한 뉴 오더 월드라는 극단적인 파시스트 이야기들, 이 모두 배후에 뭔가 있을까? 솔직히 뭔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사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대사회에서 언론과 미디어에서 분명히 내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다르게 보여주거나 해석한다. 심지어는 아예 없는 일인양 말끔하게 사라져 버리는 일이 있다. 사실 언론과 미디어에서 여기에는 국가적인 혹은 권력이라는 대규모 세력이 뒤에서 배후조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미셀 푸코라는 학자는 현대사회 대중들은 국가 정치권력보다는 미디어에 의해 통제하는 것이 더 쉽고 효율적이라고 말한다. 아니라면 대중들을 미디어에 그대로 노출하여 더 이상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그저 정해진 틀에 맞추어서 스스로 사고하기 보다는 수동적인 존재로 만들어 마치 이 사회의 구경꾼으로 만들고 싶은 "스펙타클의 사회"로 꾸미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 한가지 중요하고 진실한 이야기가 있다면 분명 이런 사건에는 일련의 음모가 없다고 할 수 없고, 그 음모 속에는 끊임없이 자신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인간들의 추잡한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추악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추악하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노출되면 그들은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감추려 든다. 왜일까 그들도 양심이라는 엉성한 마음이라도 가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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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Ⅱ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3
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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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2권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과연 자본은 마르크스가 당시 어려운 환경에 처해진 대다수의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노동자만을 위해 적었는가 아니면 그 이상의 시야를 가지고 적었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인 듯하다.
 

그 이유는 자본 1-1권과 1-2권을 읽을 때에는 분명히 마르크스는 부도덕한 부르주아의 태도와 거기에 따른 프롤레타리아의 착취현상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또는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고찰하였다.

그 부도덕한 비인간적인 형태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아동 및 청소년에 대한 착취도에서는 부르주아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아동 및 청소년들의 부모들까지 책임이 있었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아이를 헐값에 공장에 보내고, 아이가 힘들게 벌은 돈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비윤리적인 행동들도 결국 그 부모 역시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살아옴에 따른 일련의 피해의식 내지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 이런 구슬픈 인간의 비애와 사슬들은 결국 풀어내지 못한 채 수 백년을 이어간 것이 역사의 상처이다.

그런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한 당시 사회관을 본 후에 자본2권을 내 오른손바닥에 들고 읽으니 분명히 전에 읽은 자본 1-1권과 1-2권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자본의 생산은 곧 노동수단에 노동력을 투입하여 잉여생산물을 많이 만들어 자본을 투자한 자본가가 다시 원래의 자본과 잉여이익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본2권에서는 그 자본의 유통과 흐름 그리고 산업에 따른 자본의 변화능력, 그 외로 자본의 이동경로까지를 상세히 서술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중고등학교 사회시간이나 혹은 상업과목을 배울 때에 등장한 내용과 거의 유사한 내용들이 나왔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2권에서는 그런 내용이 상당히 어려웠다. 불변자본, 유동자본, 유통자본, 고정자본 등등의 여러 가지 자본을 각 특성별로 나누었고, 거기에 따른 자본 소요형태와 다시 자본의 이동에서 보이는 그 형태를 추적하니 솔직히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분석능력에 입을 다물기 어려운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기 전에 그의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 자본2권 보면서 느낀 것은 경제학철학 초고를 읽었던 당시가 생각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마르크스는 분명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을 생각하여 한평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의 입장만 생각한 게 아니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의 고용주인 부르주아의 입장도 같이 본 것이다. 그 이유는 자본의 자유는 곧 국가적 통제 및 관리의 부실을 틈을 타서 이른바 독과점이 이루어지어 결국 일부 기업만이 살아남아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사라져 가는 점이다. 이런 부분은 대규모 자본가에 의해 소규모 자본가들이 자본능력을 상실하여 그들 역시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되는 것이다.

만약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현대사회의 한국, 미국 등의 다양한 국가에서 대기업 독과점 및 과다경쟁으로 통해 중소기업이 망하거나 합병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만약 기업들이 합병될 경우 자본이 한곳에만 몰려가고 결국 다른 기업들의 성장을 방해함으로 올바른 경제구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부분을 이미 마르크스는 문제를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도 그러하거니와 기업주들 즉 부르주아의 경제활동 방식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유입, 유출 그리고 이동에 대해 상세히 고찰했다는 점은 “자본”이란 도서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의 “성경”이 아니라 부르주아 역시 참고할 만한 교과도서 같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고정자본 즉 불변자본인 공장의 기계운영에서 기계의 구입비용, 운영비, 수리비, 내구도에 게다가 기술발전에 따른 기계의 신종 발생으로 통한 고정자본인 기계가 그만큼 자본적 가치가 하락한다는 점이다. 또한 유통과정에서 창고의 적재 및 보관, 운송에 따른 비용까지도 고려했다. 특히 당시 철도의 발전에 따라 철도운송에서 철도의 내구능력과 철도 위를 지지하는 버팀목까지 고찰한 마르크스의 시야에서 그가 얼마나 합리적으로 이 책을 저술했냐는 점이다.

또한 마르크스의 매우 예리학고 논리적인 부분은 고장에서 고용된 노동자가 한편으로 소비자로서 시장의 중요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우리 인간들이 생활하기 위해서는 옷도 입고, 신발도 신어야 하며, 집에 살기 위해서는 건축자재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각기 다른 공장에서 노동을 하는 프롤레타리아는 결국 다른 프롤레타리아가 생산한 노동가치물 즉 상품을 구입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프롤레타리아들은 생활수단을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란 점에서 프롤레타리아의 노동력은 결국 자신들의 생존과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존문제에 대해 필사적인 그들을 속임수로 속여 이익을 가로채는 악덕 자본가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자기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을 고용자들에게 사게 하여 그 생산품의 현재 가격만큼 고용자들의 봉급에서 공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노동자의 노동 가치를 현금화폐가 아닌 상품으로 대체하여 상품생산에 따른 잉여가치물 처분 및 노동력에 대한 유동자본 절약, 그리고 상품을 시장에 내놓을 때 파는 것보다 더 높은 이윤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상품이 시장에 팔리기 위해서는 창고의 이동, 상품의 유통을 위한 운송수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에 내놓아도 당장 팔리지 않으면 상품의 질적 가치가 저하되어 본래의 가격으로 이윤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최근 현대사회에서는 이렇게까지 고용자들에게 상품의 처분을 강요하지 않으나 분명 상품을 급여 대신으로 적용한다면 고용주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본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투입한 금액이 상품의 재료비와 생산에 필요한 기타 에너지와 잔잔한 부차적인 자본이라는 점이다.

어째든 자본2권에서는 다양한 경로로 통한 자본의 이동과 자본의 종류를 예시를 들었다. 농민에겐 밀은 파종을 위한 고정자본이겠으나 빵집가게에서는 빵을 만들기 위한 재료라는 유동자본이란 점은 산업의 형태와 규모,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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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
황금가지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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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빈 해리스의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는 정말 현대사회에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정말 제대로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든다. 그것은 계속 과학기술의 발전과 정보매체의 확산으로 통해 인간이 거기에 대한 물질적 혜택을 받아야 하는 만큼 정신적인 여유나 안락함이 증가하기 보다는 오히려 감소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도서가 목표로 하는 것은 1980년대 미국이라는 점과 그 미국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회적 문제, 정치적인 현황,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과연 이런 문제, 현황, 현실을 어떻게 제대로 보고 판단해야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일종의 지침서에 가깝다고 본다.

마빈 해리스는 분명히 자신은 이런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줄 수 없다고 하나, 이런 일들에 대해 원인부터 찾아감으로써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알아서 그것에 대한 처방이나 강구들은 독자들에게 알아서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전체적으로 보는 사회를 일련의 각개의 문제로 해설해 나가는 방식은 마빈 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의 독특한 집필방법이다.

주제는 따로 제시하나 그 주제 하나하나 읽고 난 뒤에는 그것이 하나의 큰 원으로 그려지게 되어 어느 거대한 사회적 문화적인 구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마빈 해리스의 서적이다. 이런 방법으로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는 미국이란 국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한 서적이다.

어떻게 본다면 1980년대 미국의 문제들이 오늘 날의 2000년대로 들어선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까지 포함되어 있다. 가령 인플레이션 문제, 게이와 레즈비언과 같은 동성애자들, 나날이 심각해지는 폭력행위와 범죄들, 비정형적인 문화와 종교들의 행태들, 여성들의 직업참여로 통한 가정문제 등등 말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하나하나가 분리되기 보다는 일련의 과정으로 통해 서서히 그렇게 되어버리는 역사적인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라는 전제에서 본다면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끝이 없는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무관심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기계 산업의 발전과 정보통신 매체의 발달은 어느새 인간이 주체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을 하나의 수동적인 존재로 소외시켜 버렸다. 자본주의 발달함은 인간의 물적 욕구와 사회적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막상 인간 그 자신에 대한 정신적인 안락함은 사라져 간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본국 영토에 큰 여파가 없었다. 공장에서는 여전히 기계가 돌아가고 게다가 기술의 발달로 다수의 인원보다는 소수의 인원으로 작업이 가능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가속화로 통해 기업들의 자유경쟁이 과열화 되면서 일부 소수 대기업이 독과점을 점령했다.

게다가 인구도 늘어나고 전쟁 이후 전쟁참전자를 위해 각종 복지혜택 거기에 따른 제반 행정기구의 확대들은 국가예산을 소비시키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기업들의 병합과 부도, 정부기관의 몸집 부풀리기는 이른바 빚 덩어리에 앉게 되버린 공룡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런 문제들은 기존 공장기업들이 폐쇄로 대규모 기업에서 독점적으로 생산하게 되자 적은 인원으로 일을 하게 되니 근로자들의 수가 감소하고, 여기에 남성노동력의 가치가 저하된다. 그리고 저하된 남성노동자 대신 서비스를 제공하고 인간을 상대하는 새로운 업종이 들어나자 집에서 가정을 돌보던 여자들이 사회에 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자들이 집이 아닌 일을 한다는 것은 여자 스스로의 사회참정권을 얻어가기 보다는 집에서 가족을 부양하는 남편의 월급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남편의 월급으로 자신들의 생활도 문제지만, 아이들의 부양도 만만치 않았다. 아이 1명당 들어가는 돈이 수십만 달러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방편으로 가사하던 여자들이 일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기존 남성노동자에 비해 여자들은 본래 임금의 50~60%라는 저조한 화폐만 받고, 업무환경도 개선되지 않아 결국 폭발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사회적 권리를 보장함은 맞으나 단순히 그 권리로 인해 남성들의 일자리의 축소와 또 일자리에 넘치는 덕분에 화폐유통이 증가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중시켰다. 인플레이션 문제에서 기업의 장인정신 대신 한몫 잡으려는 상술은 소비자로 하여금 좋은 제품을 오래 사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제품을 계속 사게 하는 방법으로 변경되었다.

새로 산 토스트 제조기계가 벌써 고장이 나는지 혹은 청소기가 금방 망가지는 일들은 고객에 대한 배려감 따위는 관심 없었다. 게다가 고객들의 항의를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방관하는 태도로 소비자를 지치게 하여 물건을 계속 구매하도록 유도한다. 또한 물건이 계속 디자인과 사용방법이 조금씩 바꾸면서 질적인 부분은 유지되고, 판매가는 예전보다 약간 올랐으나, 인플레이션으로 통해 기계에 화폐가치적인 부분은 저하되었다.

이런 불량품 공화국에 이것을 파는 점원들은 고객을 동네상인처럼 행동하기 보다는 지나가는 행인 다루듯이 한다. 그들은 고객이 단골손님이 아닌 지나가는 행위이라는 생각아래 고객이 무엇을 필요하든 말든 그저 수동적으로 다가갈 뿐이다. 기계제조업 자리가 부족하게 되자 많은 일자리가 서비스 직종으로 전환되면서 이런 폐해는 심하게 된 듯하다.

서비스 직종은 평균에 해당되는 임금보다 낮은 가격으로 종사자들에게 지불되고, 종사자들은 대부분 학력이 낮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와서 일하기까지 자신의 고용업체에서 제대로 된 관리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그냥 투입된다. 이런 무분별한 상업은 소비자로 하여금 불만을 높이게 되었다.

여러 가지 독과점과 정부의 중앙관리로 인해 국민들 대부분이 제대로 된 서비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뭉개져 가는 서비스에 자신의 돈을 소비할 정도로 악화된 것이다. 가령 아스팔트가 망가짐에 따라 자동차를 몰고 가다가 고장이 날 수 있고, 자동차 이외에 별도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하며, 특히 장거리 이동자에겐 버스나 기차보다는 비행기라는 고가의 운송체계를 이용하도록 만든다. 게다가 항공기 이용하는데 있어 갖은 불친절, 체증, 지연 등은 소비자 즉 미국사람 하여금 지치게 만든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하려 했으나, 그 욕망이 국민이 아닌 일부 큰 단체의 편리함으로 이용당하게 되어 갖은 사회적 자본이 무효화되고, 그 부분에 대해 다시 국민들의 비용이 들어가서 가계 부담 증대와 인플레이션이란 괴물을 만들어낸다. 최근에는 월급은 오르지 않고 물가가 오르는 스태크플레이션이란 변종괴물까지 탄생했다. 지나치게 과열된 사회적 문제가 결국 인간들을 소외시키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인간을 편하고자 한 각종 기술들은 일자리에서 남성노동자를 물러나게 하고 여성노동자를 불러 모우고, 흑인들에게 여전히 직업과 사회적인 기회를 놓치게 함으로써 불만을 올리게 했다. 가령 범죄에서 흑인과 백인의 비율은 엄청나고 거기에 희생되는 흑인의 수는 상당하다. 또한 흑인들의 대부분 남자아이들은 제대로 된 교육 대신 사회범죄로서 직업수단을 찾는 경우가 발생된다.

범죄가 발생하니 미국에서는 낮이 아닌 밤에는 길거리를 다니기가 불편하고, 밤늦은 시간에 집에 있더라도 각종 강도나 미치광이들이 살인, 절도, 성폭행까지 이어진다. 노인들과 여자, 아이들은 길거리를 돌아 다니기가 무섭고, 이들은 언제나 범죄의 타켓으로 이어진다. 이들이 불행하게 만드는 범죄자들은 처음부터 범죄자로 태어났었을까? 각가지 사회적 문제와 현상들은 오히려 그 문제를 다시 재생산 및 재가열로서 사람들을 위협한다.

그런 모습은 미국이라는 다양한 민족과 대기업의 독과점, 국가정부의 거대화 및 비능률화로 오히려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런 문제는 인간들에게 각가지 정신적 질환이나 스트레스를 주게 되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신념이나 철학보다는 어긋난 가치관에 따르게 된다. 가령 사이비종교에 빠져 거기에서 정신적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 구원이 아닌 그저 자신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하나의 탈출구였으나 사실 알고 보면 깊은 늪이었던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위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물가는 오르고 남자들은 자신의 임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고, 여자들도 일을 하고 있다 보니, 그들은 2세를 낳는 것을 꺼리게 되고, 이에 따라 2명 이상의 아이들을 가진 가정은 계속 줄어들고 혼자 낳아 키우거나 어느 때에는 아예 놓지를 않을 경우도 있다.

게다가 남자와 여자의 이성애적인 사랑에서 이제는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라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성애적 사랑까지 등장했다. 남자들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부담을 가질 수 없고, 여자들도 자신이 경제적인 권리를 갖자 결혼하여 아이를 가기를 거부했다. 게다가 sex라는 것은 결혼하고 나서 2세를 위한 신성한 행위라기보다는 이제는 서로 즐거움을 향응하기 위한 하나의 오락으로 되었다. 그런 정신적인 압박일까? 미국에서 게이의 증가는 상당히 놀라웠다. 게이마을이 생겨 각가지 게이를 위한 미디어, 인프라가 구축되어 쉽게 그들이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인간이 평소 가지고 살아온 기존 생활방식과 규칙으로는 도저히 살아가기 어려운 시대에 오게 되면서 인간 생활, 문화 전반에 왜곡된 이야기만 넘쳐나고 있다. 이런 무섭고 낯선 이야기들은 더 이상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가 새롭게 대두되는 문제가 없으라 법은 없다. 
 

우리 한국도 물가 상승, 화폐가치 하락이 오더라도 임금수준은 여전히 차이나고 차이나면 날수록 저임금자에겐 힘겨워진다. 게다가 남성들이 산업 전반에 투입되다가 남성 혼자 벌기 어려워 여성들도 투입되고, 이런 문제로 결혼이 늦어지고 아이가 적어지는 사화 고령화 현상까지 일어난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서비스업종이 육체적으로 덜 피곤하더라도 오히려 정신적 심리적 피로는 증가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계를 다루고 있는 사람은 결국 기계에 의해 수동화 되지만, 그래도 기계가 아닌 사람을 만나면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여지라도 있으나, 인간을 인간 그자체로 기계적인 일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과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여지까지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복잡하면서 다양한 인간사회에서 우리는 오늘날을 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답은 없다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여 내가 지금 단백질로 구성된 지능을 소유한 동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를 잃지 않고 다시 상기 시켜 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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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날의 꿈 - Green Day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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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의 꿈을 보았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생각한 것은 단순히 소중한 날의 꿈이 주인공인 오이랑으로 통해 이야기하는 고교시절의 추억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본다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과연 날아갈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해 준 작품입니다.


작품 전반적으로 볼 때는 상당히 만족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 애니메이션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바로 “아동용” 위주라는 점에서 많은 시나리오 구성이 부족하다는 점인데, 그런 문제를 상당히 많이 개선했습니다. 게다가 장면의 전환과 전환이 상당히 부드럽고 내용의 전개가 매우 자연스러운 느낌이었습니다.


기존 작품에서는 스토리 중간 중간 이어지는 부분이 매우 부자연스럽거나 혹은 작품 내의 캐릭터가 스토리진행에서 너무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본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흐름을 상당히 개선했다는 점과 캐릭터에 부여된 개성과 성향을 끝까지 잘 이어나갔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모두 만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비교적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서 극장용으로 나온 작품으로 상당히 좋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관람기준은 초등학생 이상 볼 수 있는 전체 관람이지만, 사실 막상 제가 볼 때는 고등학생이나 어른들도 편하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시나리오 구성에서 상영할 때 보러 오는 사람들이 아동보다는 아동 이상도 같이 봤다는 것은 좋은 듯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에서 느끼지 못한 부분은 확실한 재미와 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작품 자체가 천천히 배경화면이 움직이며 캐릭터의 심적 변화를 잘 보이려고 했기 때문에 다소 작화 부분에서 배경적인 부분은 매우 좋았습니다.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에서 햇빛이나 그림자의 구도, 그리고 인물이 움직일 때마다 얼굴에서 흐르는 땀, 또한 철수가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이랑이를 위해 우산을 건네 줄 때 이랑이는 기분 좋은 얼굴로 우산손잡이 잡고 우산을 돌립니다. 이때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과 이랑이의 우산에서 팅기는 빗물의 연출은 절묘했습니다.


소중한 날의 꿈에서 제가 가장 놀란 부분은 이런 장면에서 작은 하나하나까지 다 잡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작품 초반에 어느 시골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침 운동장 조례에서 어느 학생이 더위를 이기지 못해 쓰러진 장면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스쳐가는 자동차의 매연, 지나가는 행인들의 의상이나 걸음걸이까지 잘 연출했습니다.


특히 제가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주인공 이랑이가 자신이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랑이가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특별활동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데, 이때 여고생들이 서로 쪽지를 접어 서로에게 던져 보냅니다. 이랑이에게 쪽지가 가다가 다른 친구들에게 갑니다. 그리고 그 쪽지가 오고가는 사이에 영상의 대상이 교실 내부가 아닌 창문 너머의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푸른 하늘은 내일이나 미래 그리고 희망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미래와 희망을 암시하던 푸른 하늘에서 쪽지 싸움은 시커먼 콘크리트 교실천장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곧 이랑이의 꿈이 아직도 막혀 있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철수를 만나 뒤에 같이 돌아다니며 이랑이의 시선에 보인 푸른 하늘은 시커먼 교실 천장이 아니라 모든 것이 탁 트인 푸른 하늘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랑이가 철수를 만나 자신이 가진 희망과 미래를 찾아내었다는 의미입니다. 언제나 이랑이는 자신의 의지보다는 남의 눈치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 부분은 처음 장면의 달리기 시합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랑이는 평소 달리기를 잘하지만 달리기시합에서 자신보다 더 빨리 달리는 동기 때문에 달리기를 포기합니다. 그런 이랑이의 승부가 패배로 정해졌는지 이랑이의 라이벌은 영상에서 관객 쪽으로 가깝고, 이랑이는 그 라이벌의 어깨 너머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어깨너머 샷으로 화면에서 어깨 너머로 보이는 피사체가 화면상 가까이 보이는 캐릭터에 비해 열등하다는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바로 이랑이의 고민은 달리기의 패배로 통해 자신이 자신 있었던 달리기마저 의미가 없어지자 즉 교실의 막혀버린 푸른 하늘로 되었던 겁니다. 그런 이랑이에게 자신의 슬럼프를 도피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서울에서 전학온 수민입니다. 수민이는 자기는 나이 33살까지 살다 죽을 것이라고 하며, 언제나 도도하고 남들과 다른 사람인양 행동합니다.


동요된 상태에서 수민이의 전학은 이랑이에게는 새로운 바람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랑이 수민이의 뒤를 쫓아가려 했으나 결국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수민이가 따라가려 했던 수민이도 결국 자기의 허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이 수민이의 가치를 몰랐고, 수민이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예술은 삶을 광학적으로 본다는 말이 있듯이 수민이가 짝사랑한 남자는 수민이에게 오히려 현실에 있는 친구들과 일상에서 즐기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랑이에게 달리기시합에서 꿈을 접게 만들고, 새로운 우상처럼 보이던 수민이도 결국 의미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랑이에게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것은 철수였습니다. 철수라는 인물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실패를 하나의 경험 내지 받아들이는 것으로 인지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철수에게는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삼촌이 있습니다. 그 삼촌이 이랑이와의 대화에서 작은 돌덩어리를 보여주며 여기에 수많은 흔적과 세월 그리고 모습이 있다고 합니다. 실패나 성공이나 모두 그 돌덩어리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철수는 그런 돌덩어리처럼 자신의 꿈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한국 최초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던 철수는 그저 기계에 빠져있는 순박한 남자 고등학생입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꿈에 대한 열망은 강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이랑이는 처음에 철수가 엉뚱하게 보였으나, 철수의 비밀기지인 언덕으로 갈 때 철수의 진지한 마음을 알게 되자 자신도 솔직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마음 아래 깊숙이 두고 있던 고민과 자기 양심을 철수에게 털어 놓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압박을 벗어 던집니다. 작품 마지막에 공룡발자국을 찾아 가기 위해 철수와 여행을 떠난 이랑이는 아주 아름다운 꿈속에서 철수 삼촌이 이야기해준 우주로 사라진 공룡을 만납니다. 꿈이 없다고 믿은 이랑이가 철수와의 여행에서 단잠에 빠져 꿈을 꾸고 다시 자신의 꿈을 찾기를 시작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리는데, 이때 이랑이는 자신에게 하나의 억압으로 보이던 라이벌과 벅찬 승부를 펼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승부결과는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이랑이는 1등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꿈과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한 겁니다. 공룡은 모두 사라져도 공룡발자국은 아직도 살아남아 자신의 형태는 없어질 망정 자신들이 살았다는 흔적을 남긴 것처럼 이랑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을 남기려고 합니다.


작품 마지막에서 하얀 눈이 오는데, 늘 남의 뒤만 보던 이랑이는 조금 다른 행동을 취합니다. 영화 러브스토리에서 주인공 남녀의 모습을 처음 떠오려 보기 보다는 그저 자신의 생각을 수민이에게 이야기합니다. 수민이도 처음에 도도하고 가식적인 모습에서 다소 솔직한 자신의 모습으로 가려 합니다. 과연 소중한 날의 꿈에서는 이런 꿈을 어떻게 보이려고 했던 것일까요?


이랑이처럼 쉽게 포기하고 남의 눈치 보면서 늘 뒤만 바라보려 한 사람인가? 아니면 그저 도도하고 가식적으로 남과 다르다는 식으로 살아가려 하던 수민인가? 혹은 너무 자신의 세계에만 집착하여 조금 엉뚱한 모습만 보이던 철수인가? 어떻게 본다면 철수는 이랑이에게 이랑이는 철수에게 수민이는 이랑이에게 조금 다른 모습을 보며 꿈을 키워간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젊은 날의 꿈을 꾸면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간절하게 바라는 소중한 날의 꿈은 우리에게 그런 꿈이란 단순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가지고 살아가며 보이지 않는 골이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골문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소중한 날의 꿈으로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꿈을 다시 이어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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