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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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을 처음 접할 때 나는 그의 존재에 대해 그렇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보았다. 사실 나는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을 본 것은 작년 진중권 씨의 “미학 오딧세이” 3번째 편과 그리고 같은 저자의 “숭고와 시뮬라크르”라는 도서였다. 전자의 책은 미학에 대해 전무한 상태에서 읽은 책이라 발터 벤야민이란 인물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에 나온 서적은 상당히 읽기에 어려운 도서였기 때문에 그 책 초반에 나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역부족였다.

나의 발터 벤야민이란 이름이 다가온 것은 작년이었다. 그런 직후 책을 이래저래 조금씩 읽기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도서를 통해 나의 사고력을 증가할 것이 필요하여 도서 추천을 기거저기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추천받은 것이다. 예전에 들어온 발터 벤야민이란 사람이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런 직후 도서를 찾아보고 구매하였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눈이 조금 아파왔다. 책에 읽혀지는 글씨 크기가 너무 작았다. 특히 각주에 달린 글자의 크기는 모니터에 보이는 글자를 읽는 것보다 더욱 난해(難解)했다. 게다가 책도 제법 페이지 수가 있었으므로 보통 양장본 서적을 보급판으로 내어 책의 크기도 글자의 크기도 미니멈하게 낸 도서같이 느꼈다. 그런 발터 벤야민 하면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사람들은 아우라(Aura)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이 발터 벤야민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에서 내가 아직 그렇게 깊은 통찰력을 가지지 못함에 유감(遺憾)스럽게 느끼지만, 그래도 발터 벤야민의 엄청난 업적은 이른바 기술복제시대(技術復除時代)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들은 엄청난 과학기술과 문명발달로 통해 많은 물질적 혜택(惠澤)을 받는다. 물론 그 혜택은 자본주의사회구조(資本主義社會構造)에서 재력(財力)에 의해 차이가 나는 것은 분명하나, 적어도 최소한으로 도로, 전기, 상수, 하수 등의 인프라 - 이것 역시 재력이 작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나 - 등으로 통해 그 편리함을 누린다.

그렇지만 당시 발터 벤야민의 사회상은 그렇지 못하다. 1920~30년대 주요 활동과 저술을 맡은 발터 벤야민의 시대에서는 이제 막 기술복제로 통해 특히 영상이미지가 복제되는 것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영상이란 것은 마치 신기한 도구와 같았다. 예전에 사람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오로지 미술가들의 그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상당히 많은 노력과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많은 시간을 고정된 자세로 유지해야만 했다.

또한 그림이라는 것은 화가의 관점에서 시작되므로 화가가 눈에 보이는 것이기 보다는 화가의 눈 이외의 내부의 관념적인 부분까지 더해지면 조금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가령 어느 인물화에서 그 인물에 대한 특징적인 부분을 강조하거나 의미를 둘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구의 등장은 기술복제시대에서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영상의 잔상이 그 때 그대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에서 그런 사진의 역할은 그림에서 보이지 못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보았으며, 또한 사진은 이때까지 우리가 보이지 않은 표상까지 잡음으로 그것이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사고까지 추가했다. 특히 나같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발터 벤야민의 사고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애니메이션이라 하여 실사영상이 영화(映畵)와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애니메이션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면 결국 영화의 세계와 조우(遭遇)하게 된다.

그런 영화세계에서 기술복제로 통한 이미지 재현에서 같은 작품을 토대로 영화와 영화 이전의 서사(敍事)를 보여준 연극(演劇)과의 사이를 밝힘은 참으로 놀라웠다. 사실 영화와 연극을 2가지를 놓고 실제 진행 시간은 2시간이라고 치자. 그런데 연극은 그 연극이란 공간 속에서 2시간을 그대로 Running Time으로 통해 다 보여준다면 영화는 2시간이란 시간 속에서 그 공간적인 영화관에서 보여주는 것은 2시간만의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2시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2시간의 백배 혹은 천배 이상의 들어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연극의 2시간은 무대감독, 연출, 소품담당자 등과 같은 스텝들이 2시간 동안 연속적인 행위로 이루어진다. 즉 일련의 시간과 공간이 인물에 의해 연속적인 모습이 연출되는 시퀀스는 무대 위의 연기자들이 연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연기자들의 모습에서 막과 극과 같은 시간, 공간, 상황적 배경 및 사건 등이 서로 나누어져 보인다면 무대 위에는 분명히 시퀀스가 이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밖의 세계는 시퀀스가 연속적이다. 영화는 이런 시퀀스를 모두 해체해 버렸다. 영화의 시퀀스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화관 안에서 계속 화면을 바라보는 영화관객과 영화 상영을 위해 기계를 조작하는 영화관 직원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모든 것을 분리하여 하나의 조각을 모아 거대한 틀로 만들 수 있는 재구성력을 소유한 것이다. 또한 영화는 필름을 복제할 수도 혹은 하나의 필름을 가지고 계속 상영할 수 있다.

따라서 연극은 한 번의 쇼로 마무리 짓는 것이라면 영화는 한 번의 쇼로 보여줄 뿐이다. 여기에 연기자들의 반응도 달라진다. 가령 연극무대 위의 연기자들은 관객을 직접적으로 의식해야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연기에서 일순간의 실수조차 수정할 수 없다. 그들의 연기 자체가 완벽은 때와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반복되는 행동이나 실수를 편집하여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로 구성한다. 따라서 연기자는 연극무대의 긴장감을 놓치기가 쉬울 것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관객이 아닌 단지 카메라맨이 들고 있는 카메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카메라를 통해 비추어지는 모습을 관객이 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가 연기하는 그 짧은 순간에는 관객들은 그를 보지 않는다. 단지 그 카메라의 영상이 복제되어 하나의 영화라는 예술 혹은 상업적 매체로 탄생할 때만 가능해진다. 지금의 이런 글들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과 현대 사회에 살아가는 나의 지식으로 적은 글이다.

물론 내가 적은 지식은 일반 대중들이 지닌 상식보다 더 깊이 있게 논의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것이 특별히 누군가에게 통제된 지식이 아니다. 단지 통제되지 않은 것을 대중들이 스스로 통제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당시 발터 벤야민은 적으려고 했다. 이제 그 시대의 영상문화는 막 태동했다. 그러나 영상문화는 하나의 대중예술로서 자유로운 담론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이용당하는 객체적인 존재였다. 정치도구로서의 영화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상 안의 텍스트는 일반 서적 안의 텍스트와 비교하여 우리가 책을 읽을 것들을 더 이해하기 쉽고도 혹은 더 작은 시간으로 통해 어떤 사람 내지 단체가 의도하는 바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비판에서 영화 즉 영상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기술복제시대에는 정보의 전달력을 알리기에 좋은 도구들이 많았다. 혹은 “태초에 말이 있었다”처럼 우리 인간들은 정보의 수용능력을 오랫동안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정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대한 접근성과 언문능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서구사회에서 근대화 이전에는 거의 제한된 존재인 듯하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을 구사하는 사고력이 있어야 하고, 사고력을 뒤받쳐주기 위해서는 언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대하 교육이 필요하다. 교육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존재들은 일반 프롤레타리아에게 열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기술복제시대에는 다양한 매체에 따라 정보가 복제되었다. 이전의 정보는 한정적이라면 근대시대에는 그 정보가 인쇄술의 발달, 녹음기술 발달, 영상기술 발달로 통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정보력을 누군가가 통제하여 일반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정보를 가져다 준 만큼 오히려 대중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점이다. 그런 점을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발터 벤야민은 이미 스펙타클이란 단어를 여기서 사용했다.

조금 문예이론에서 면에서 이런 사회구조와 역사적 흐름을 잡는 것이 아닐까 하나 사실 문학과 예술 역시 사회적 현상과 역사적 흐름을 무시할 수 없다. 예술에서 역사적인 가치에서 그것이 진정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음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가령 우리는 문화제 중에서 1,000년 전에 귀족이 사용하는 칼이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문학과 예술은 어떻게 본다면 그 때 당시의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상황을 전달하는 매체일 수 있다.

그런 매체를 후대의 인간들이 보는 것은 지금의 상황으로 본다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지금은 내가 뭐라고 할 그런 입장은 아니나 발터 벤야민의 경우 그는 유대교적인 종교적 관념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을 동시에 무장되어 있다고 이 책 어느 부분에 적혀 있다. 물론 그런 문예의 대한 부분에서 이 책 후반부에 가면 발터 벤야민의 언어철학과 역사철학에 대한 담론이 적혀 있다.

어째든 이 책을 보면서 느낀 것이나 발터 벤야민이 가진 철학적, 문학적, 역사적, 종교적인 학문적 그릇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발터 벤야민이 살아가던 시절은 파시즘과 1차 세계대전, 그리고 많은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 발터 벤야민은 유럽인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발터 벤야민에 대한 소개에서 발터 벤야민은 파리가 베를린처럼 베를린이 파리처럼 여겼다고 한다. 파리는 자유와 혁명이 숨쉬고, 코뮈나르의 영혼이 불탄 채 잠을 자는 영토였다.

그런 영혼을 가진 땅을 사랑한 발터 벤야민이듯이 이 서적 초반의 자전적 프로필에서는 발터 벤야민의 어리고 젊은 시절의 글은 상당히 시적이면서도 아름다우면서도 섬세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문학적인 정보와 접근성이 없는 본인에게 많은 작가를 소개해주었다. 카프카, 프루스트, 보들레르, 그 외의 작가들, 또한 다양한 이야기 소재로 통한 비평적인 글들을 말이다. 서사라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이나, 그 이야기 내부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 이야기를 보고 그것을 외적으로 읊어주는 해설가인가? 아니면 그 이야기를 통해 안에 들어가 무엇이 있는지 끄집어내려는 비평가인가? 아직 많은 학문적 도전이 필요한 본인이나, 발터 벤야민이 비평에 대한 비평적인 문구는 매우 인상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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