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죽었는가? - 새로운 논쟁을 위하여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김상운 외 옮김 / 난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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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죽었는가? 라는 도서는 현대사회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것에 대한 정치, 사회, 철학, 심리학 등 다양한 관점과 다양한 학자의 논제에 대해 기술한 도서이다. 이 책을 보자면 현대사회에서 세계에서 내놓으라고 하는 유명 대석학들의 의견과 사고에서 과연 민주주의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책을 읽어보면 8명의 세계 유명 석학들이 길지 않은 페이지에 자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흐름과 현황을 적어 놓았다. 그들의 의견은 모두 조금씩 다르게 나왔으나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에 민주주의가 과연 민주주의로서 가치를 발현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진정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면 그것이 오히려 아니라는 것일까?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세계에서 소비에트 연방 해체는 공산주의국가와 민주주의국가의 2원화적인 대립을 피할 수 없게 된 운명을 바꾸어 버렸다. 이른바 탈(脫)이데올로기. 탈(脫)냉전 등의 단어들이 줄기차게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탈이데올로기적인 면이 강조되면 될수록 오히려 이데올로기로 인한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완성되기 보다는 오히려 비뚤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다수의 국민이 가진 투표권을 토대로 선출되나, 그 투표권에 의해 추대된 정치대표자가 과연 정치적인 행보가 옳은지?

혹은 다시 투표함에 있어서 국민들 즉 주권을 가진 투표권자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한 활동을 하는지 말이다. 이들을 움직이는데 뭔가 강력한 미끼가 필요할 것이다.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민주주의적인 방법보다는 전체주의적인 부분이 강하다.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민주주의를 부정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본다면 독일의 나치즘이 아닌가 싶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민족 그리고 독일이란 국가를 위해 타인을 희생시켜야 했다. 자신들이 정당함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를 자신들의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혹은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라던 그리스 아테네의 폴리스도 그렇다. 폴리스에서 정말 정치적으로 민주적으로 잘 운영하더라도 단 10%의 남자성인이었다.

이방인, 노예, 여자, 아이들, 그 밖의 소외계층은 무시되었다. 민주주의는 이때까지 누군가의 기반과 혹은 누군가를 국가의 적이나 사회 내부의 악적인 존재가 존재할 때 정말 민주주의가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이 책에서 아직도 고발하고 있다. 가령 기독교와 반기독교 사이의 문명대립은 과거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가령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문화권 국가에 대한 이질적인 존재감은 과연 세계 평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평화가 정당한 것인가 의심하게 한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정당성을 내세우고, 그것을 하나의 교조적인 잣대로 삼아 마치 신의 영역까지 올려, 더 이상 거기에 의문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여 그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망치는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자라고 외치는 자들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망가뜨린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목 높여 외치는 하나의 진리이기도 하나 그 진리가 의도되지 않거나 혹은 조작되어 타인들의 지배를 합리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국가적 정치에서 자유로운 국민 스스로의 권리를 찾을 때 민주주의라면 우린 어떤 역사를 보았는가? 예전에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었는데, 187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는 독일군에 대항한 프랑스 파리의 시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른바 파리코뮈니스트라고 불렀다. 그들이 독일군에 저항한 이유는 당시 독일이 프랑스 정부와 짜고 프랑스 국민들을 국가권력 안에 가두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의 시민들은 무력으로 진압하는 독일군과 독재로 억압하는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하지만 그 역사는 차마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무참히 파리의 시민들은 무장된 총칼에 무너지고, 점령된 파리의 거리는 총살된 시민들의 주검만이 무성했다. 맑스·엥겔스 평전에 본 당시 기록에는 10대 후반의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는 몸이 아주 불편했고, 게다가 10대 중반의 여자아이도 있었다.

왜 이들은 이기는 것이 힘든 싸움에 총탄이 쏟아지는 그 거리에서 목숨을 던져 투쟁할까? 민주주의라는 것은 과연 이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행동해야 과연 납득하게 될까? 아니면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단순히 국민들을 속이고 만든 하나의 상징에 불과할까? 그렇다면 그 상징이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최고의 적이 아닐까?

세상에 정보가 발전하고 교류도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국가인 국가가 과연 민주주의를 제대로 지키는가? 민주주의라고 외치는 국가가 식민지를 건설하고 식민지 국민들을 억압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자신만의 이익에 충실한 현실 속에서도 민주주의라고 외친다. 이런 모순된 현실에서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은 가장 잔혹하고 비겁한 상징이다.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을 절실하게 유용하게 합리적으로 말하는 것이 이제는 민주주의를 망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들은 그것을 파악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이른바 소비의 사회와 스펙터클의 사회라는 거대한 인간의 욕망과 수동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본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는 주인 없는 노예, 노예 없는 주인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주인도 노예도 없다.

하지만 현재 사회는 민주주의는 주인과 노예를 만들어도 그것이 아닌 것처럼 합리적으로 눈을 속인다. 그래서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닌가? 그 스펙터클은 이미지가 매개가 되고, 이미지의 매개에서 이미지는 우리의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한 존재이니, 그 욕망이 소비로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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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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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라는 소설의 제목과 표지 주인공들을 보았을 때 이 소설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은 소설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증명하는 듯 3명의 청소년과 노인 그리고 검은 개 한 마리는 코끼리 위에 앉아 뭔가 낯선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입고 입는 의상도 모두 노란색 우의라는 점, 옆에 말없이 등을 보이며 앉아있는 노인이 어깨에 큰 가방과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분명 모험을 하고 있구나 하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제목의 스프링캠프, 스프링은 분명 봄이고 캠프는 야외에서 숙영하는 것을 말한다. 봄날의 야영이란 말은 제목 그 자체로 직역하면 자기가 어린 시절 봄날 어느 곳에 야영을 한 추억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내용은 아니었다. 그 배경은 봄날이 아니라 여름방학에 일어난 그것도 태풍이 오가는 기상악천후에서 일어난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나는 이 소설을 보면서 먼저 작가의 약력을 자세히 보았다. 왜냐하면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작가되는 사람 아니 정확히 정유정이란 사람에 대한 프로필을 보았다.

그것을 확인 후에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의문이 드는 한 가지 작가는 분명 여성인데, 나라는 주인공 준호는 중학교 2학년 남자아이였다. 몹시 몸이 마르고 다소 내성적이며, 어느 날 산으로 간다고 말한 국어교사 아버지의 실종에 괴로워한 아이였다. 그런 그가 왜 그렇게 마음을 아프게 지내야 할까? 어머니는 4살 연하인 사진작가와 결혼하고 이미 결혼 당시에도 임신 중이었다.

준호는 아버지의 실종, 어머니의 재혼 속에 큰 실망과 낙담에 빠졌다. 특히 아버지의 부재는 그에게 정신적 이질감을 준 모양이다. 그에겐 친구가 없다. 있는 친구라곤 부모님이 식당을 운영하는 규환이란 녀석이다. 그의 아버지는 준호의 아버지와 형님아우하고 지낸 사이다. 그래서 규환이에 대해 준호는 마음을 터놓고 지냈다. 그래도 규환이가 준호에게 편할지 몰라도 규환이도 준호만큼 큰 아픔이 있었다.

때는 1986년 규환이가 15살 되던 해에 규환이의 형인 수환이는 당시 군사정권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대학생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규환이네는 경찰의 감시가 붙고, 가게는 손님인지 형사인지 모를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그런 규환이에게 수환이의 연락이 닿았다. 자기가 일본으로 밀입국한다고 말이다. 문제는 규환이나 승주네 트럭을 타고 몰래 가야하나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다. 같은 학년 여학생 중에 정아라는 아이를 도와준 이유로 규환이는 정아의 아버지에게 크게 맞은 듯하다.

그런 사고로 인해 규환이가 형이 있는 곳에 가는 게 아니라 준호가 가게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의 가는 여정을 우연히도 개장수 딸 정아, 부잣집 아들 승주, 그리고 정신병원에 억지로 갇힌 노인 1명, 정아를 무섭게 공격하던 정아네 개 루스벨트 이렇게 뭔가 어색한 관계를 보인 4명과 1마리가 3년 같은 3일을 보내게 되었다.

3일의 모험 속에 트럭 속에 벌어진 사건, 승주와 준호의 갈등, 준호와 정아의 어색함과 풋풋하게 오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잃어버린 아이에 대한 절망, 그리고 무인도에서 바라본 고개 한 마리, 이 모든 것은 분명 자신의 마을에서 소외되거나 혹은 내버려진 4명과 1마리의 자기를 다시 찾아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분명 준호는 아버지를 여의고 그 충격으로 우울증 증세에 빠졌고, 정아는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불구자가 되고, 승주는 어머니의 지나친 자식방어정신에 절에 가서 매일 이상한 땡중에게 침을 맞는다. 그것도 남자의 소중한 고환 인근에 말이다. 노인은 양녀 월규가 병이 들어 광주에 갔는데, 그 양녀는 치료는 고사하고, 길가에 노인을 기다리다 계엄군의 총에 맞아 죽는다.

그것이 1980년 5월 21일, 아마 광주 518민주화운동에서 벌어진 큰 비극들이 이 소설에는 하나의 큰 공간적, 시간적, 상황적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상한 마음으로 다시 이 소설의 작가의 프로필을 보았다. 작가의 고향은 전남 함평, 게다가 소설에서 함평은 임자도를 가기 위한 어항이 있던 곳이다. 그녀의 출신년도는 1966년이었다. 그리고 1980년 광주에 일어난 비극이 터질 때 정유정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우연일까 아니면 설정일까? 작품 내에서 준호의 나이는 15살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1980년 5월경이었다. 작가 정유정은 자기가 15살 소녀인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여기 작품세계에 투영시킨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아픈 기억과 두려움을 작품 내의 준호에게 첫사랑이란 추억으로 만든 것이다. 사실 이야기의 시작에 목적이 올라가 있다면 그 목적의 달성은 분명 결말에서 이루어지든 이루어지 못하든 등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작품 내의 인물들이 공간적, 시간적, 상황적인 요소에 따라 뭔가 작품 내에 담고 있는 숨은 주제가 보인다. 그것은 2가지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처럼 더운 여름 준호의 설렌 첫사랑의 이야기다. 물론 그 첫사랑은 준호만이 아니라 예쁘고 성격도 독하고 온 몸이 멍과 상처로 가득한 소녀 정아도 마찬가지다. 준호는 아버지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할 때 정아와의 모험 속에서 정아를 난생 처음으로 여자로 보았다.

농장에서 정아의 얼굴을 보고 눈에 마주치자 키스하려고 했으나 승주의 눈치 없는 등장에 실패했고, 학교에서 잠을 청할 때 그의 꿈속에서 정아의 나체를 만지고 젖가슴을 애무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놀라 잠에서 일어날 때 그의 바지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올라왔다. 그는 정아 때문에 꿈속에서 성적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몽정을 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몹시 부끄러워 마음 속 깊이 우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나름대로 계속 이어지면 좋으려만, 모험이 끝난 후에 돌아오니 정아네 집은 정아의 아버지의 방화로 모두 불타고, 정아는 결국 다른 곳에 이사해버렸다.

준호에게 돌아온 것은 정아의 정성담긴 편지 1장, 그 편지 이후 정아와 20년 넘게 준호가 소설가가 되어 35살의 어른이 되어도 못 보았다. 서문과 결말을 보면 준호가 그 때의 추억을 떠오르면 이야기가 시작된다. 정아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이다. 하지만 정아만을 그리워한 게 아닌 모양이다. 규환이의 형의 수환이, 그리고 월규를 잃어버리고 그것도 모자라 삼청교육대로 갔다. 어떻게 본다면 이 소설은 그 당시의 아픔과 슬픔을 태풍이라는 시련 속에 바다에서 높게 뛰어오른 고래 1마리처럼 승화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애절하고 슬픈 기억을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라는 제목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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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에서 기적으로 - 김태원 네버엔딩 스토리
김태원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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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TV를 잘 보지 않는다. 게다가 인기방송이나 유명인들에 대해 그렇게 관심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활에서 기타와 리더를 맡고 있던 김태원씨가 한참 신드롬이 되어 있었다. 김태원씨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국내 기타리스트 중에 한 명이다. 부활과 더불어 시나위, 블랙홀 등과 같이 전통락과 메탈을 좋아한 입장에선 그가 뮤지션보다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인물로 유명세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건 상당히 충격이었다.

그런 충격을 건네준 김태원씨가 책을 냈다. 우연에서 기적으로 말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처음 바라본 순간 눈이 김태원씨가 들고 있는 기타에 쏠렸다. 기타를 보니 분명 플로이드 로즈형 브릿지에 픽업이 험버킹-싱글-험버킹이란 것이고, 자판이 21프렛보다는 24프렛. 게다가 자판은 로즈우드가 되어 있어서 분명 메탈음악에 좋은 전자기타라는 생각부터 하였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내가 예전에 전자기타를 잠시 2개월간 배우다가 그 뒤에 홀로 독학했는데, 처음 기타를 잡게 된 동기가 바로 김태원씨가 부활에서 기타를 쳤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정선 기타교본을 구매하거나 빌려서 부활3집에 수록된 사랑할수록을 치기 위해 기타를 만진 것이다. 예전에는 반주와 곡 첫 부분과 중간 기타 애드립을 다 쳤는데, 요새 일하고 책보고 공부한다고 얼마나 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에게 처음 기타라는 것과 메탈이란 것을 알게 된 계기는 바로 김태원씨와 부활이었다. 나는 이 김태원씨의 우연에서 기적으로라는 책표지에서 왜 김태원씨가 들고 있는 기타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이유다. 사실 책을 읽어보면서 fender라는 유명한 기타메이커가 기억나는데, 사실 김태원씨가 부활1집 앨범표지에서 기타를 들고 있을 때 나는 아마 김태원씨가 연주하고 있던 기타바디 위와 뒤면에 붉은색으로 도장된 기타가 아마 펜더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 락키드로 동경의 대상인 그런 김태원씨가 지금 유명한 연예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내겐 상당한 충격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그는 내가 존경하던 기타리스트이며 뮤지션이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는 계속 12집을 내고 13집을 내고 있어도 나에겐 부활은 9집까지 멈추어 버렸다. 아마 나는 단순히 음악이라는 이름에 집착하여 김태원씨를 받아들이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인지 그 오래 예전의 김태원씨와 지금의 김태원씨의 이야기가 실린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의 그가 예전의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전해준다. 단지 아주 오래 전의 그는 질풍노도의 청춘을 보냈고,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고는 좌절과 슬픔이 남았고, 그 뒤에 남은 것은 모든 것을 좀 더 새롭게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남았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열정적으로 인생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지나간 청춘에서 그는 너무 솔직하였으며, 때로는 너무 허세가 강했다. 자신이 매우 좋아하던 첫사랑 그녀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그녀가 떠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래서인지 김태원씨에게 인생의 구원자로 나타난 이현주씨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일까 싶었다. 부활3집 앨범에서 그가 남긴 thanks에서 많은 이름이 나온다. 그 마지막에서 자신의 아내인 이현주씨를 사랑한다고 적었다.

게다가 이현주씨와 만난 날과 이현주씨를 마음 아프게 한 날과 그리고 이현주씨가 김태원씨가 부활앨범을 제작할 때 곡의 모티브가 되고, 스튜디오에서 보컬링을 녹음하고 말이다. 너무 많은 바람과 상처를 받은 김태원씨가 오늘 날에는 큰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의 책을 읽으면 그는 원래 큰 인물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나온 시간에서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게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김태원씨가 크게 된 것은 자신이 크게 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작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진솔하게 넣었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슬프고, 화가 나고, 우울하고, 마약에 손댈 정도로 타락했을 때까지 말이다. 이 책에서 마약중독자보고 시인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 더 이상의 순수를 찾지 않을 정도로 맑은 영혼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영혼의 세계에 접근한 김태원씨는 절망에 빠졌다. 성격이 워낙 예민하고 열정적인 그의 성향이 결국 그를 힘들게 했다. 단지 어둠과 절망 속에 감옥살이를 하고, 그런 그를 위해 그의 아내는 매일 찾아왔으며, 하루 면회가 1회만 허용되어 3시간동안 밖에 기다리며 울다 지쳐 귀가한 그녀의 모습에서 김태원씨는 얼마나 더 깊은 상처를 받았을까? 아마 이 모든 슬픔과 그리고 그 슬픔 뒤에 오는 기쁨, 또 다시 오는 시련과 고통들이 김태원에게 우연같이 다가와 그것을 기적처럼 바꾸었을 것이다.

나는 김태원씨를 보면 일본애니메이션 중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생각난다. 그 작품의 주인공 신지는 밖과 소통하기를 무서워하며 두려워한다. 게다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사회에 대한 낯선 느낌을 그를 더욱 절망으로 몰고 갔다. 그런데 그런 주인공 신지에게 카지라는 남자어른이 와서 조언을 해준다.

카지 “뭔가를 만들고 기른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러면서 많은 걸 보고 배우거든, 즐겁기도 하고”, 신지 “괴롭기도 하지요.”, 카지 “괴로운 것은 싫어?”, 신지 “좋아하진 않아요.” 카지  “즐거운 것들을 찾아내었니?”, 신지 “.....”, 카지 “그것도 뭐 괜찮아! 하지만, 괴로운 일을 많이 겪은 사람들이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냥해질 수 있는 것이지. 그게 나약함과의 차이이기도 하지.”

김태원씨와 그리고 우연에서 기적으로라는 책을 볼 때마다 저 대사가 생각난다. 이전에 김태원씨가 음악방송 프로그램에서 조언을 해주는 모습에 대해 뉴스로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응시자에 대해 차가운 말을 내뱉는 대신 그는 따뜻한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러나 김태원씨가 상냥하게 남을 대할 수 있을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는 남에게 상처를 주고받은 것이다. 많고 많은 사건들 그리고 기쁨과 슬픔, 결국 기적은 기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기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 책을 보면서 항상 부활에서 생각나던 사람이 있다. 겨우 단 2곡만 제대로 부르고 세상을 등진 김재기씨, 그의 죽음을 추모하여 만든 곡 8.11, 그리고 김태원씨가 김재기씨의 죽음 듣고 “아! 재기가 바람으로 떠났다”가 생각났다. 김재기씨의 죽음은 김태원에게 절망과 부활3집 사랑할수록의 폭발적인 인기를 주었다. 그래서인지 김재기씨가 부른 테이프 B면 1번째 곡 사랑할수록와 그리고 A면 1번째 곡 소나기가 너무 떠오른다. 시작하듯이 끝이나버린, 정말 김재기씨의 죽음은 시작하는듯 끝이 났다. 그래서인지 김태원씨는 과거를 후회하지 말자고 한다. 시작하는 듯 끝이 나버렸다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리기 보다는 그것을 안고 가는 것처럼 말이다.

ps 부활5집 멤버에게 받은 싸인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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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 블랙 캣(Black Cat) 17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지음, 이기원 옮김 / 영림카디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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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소설은 이번에 나는 처음 읽어 보았다. 본래 나는 소설을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이 아닌데, 게다가 그 소설의 작가가 현대문학작가라면 더더욱 알 수 없는 인물이다. 작품을 읽기 전에 전반적으로 책을 훑어보았을 때 알 수 있는 것은 북유럽에도 이런 유명한 추리소설작가가 활동하고 있었구나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보면서 생각하는 점은 이 소설은 시나리오가 매우 탄탄하고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상황이 매우 다채롭게 느꼈다. 그것은 어느 주인공을 시점으로 하여 진행되는 대부분의 서사 속의 인물처럼 적어내려 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나 범죄나 추리물들을 살펴보면 주인공들은 언제나 타인들에게 비해 꽤 좋은 매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항상 강한 의지와 넓은 마음 그리고 준수한 외모 등을 말이다. 사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인 에를렌두르는 보통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에 등장할 만한 베테랑 형사는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의 베테랑을 인정하는 부분에 비해 그가 작가의 눈에 혹은 작품 내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의 눈에는 그렇게 좋은 인상을 볼 수 없다.

오히려 고집이 세고, 억센 성격에 상대방을 매우 몰아 붙여 넣고 의심하기 좋아하는 전형적인 형사라고 할까나? 게다가 가정환경도 매우 불량하다. 아내와의 결혼은 파경을 맞아 이혼하여 그 아내라는 사람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연애를 계속 즐기고 있었고, 그런 아내와 사랑 아닌 사랑으로 나온 자식들은 모두 폐인처럼 변했다.

특히 그의 딸은 마약에 손을 댈 뿐만 아니라 매춘부라는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였다. 그런 밑바닥 인생을 살아 왔어도 생명에 대한 그리움이 있는지 에를렌두르의 딸 에바는 임신 도중 7개월 되는 때에 유산을 하고 만다. 7개월이 되버린 사산아에 대한 집착과 죄의식은 그녀로 하여금 마약과 매춘은 끝나게 할지는 몰라도 담배와 우울은 끊임없이 섭취하고 있었다.

이런 우울한 형사의 가족사에 서양에서 가장 소중한 가족의 날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에를렌두르에겐 치명적인 시간임은 분명하다. 그런 치명적인 날에 살인사건과 아동폭행사건까지 터지니 그의 마음에는 수심이 쌓인다. 그런 상황에서 이야기의 진행은 이렇다. 에들렌두르가 추운 겨울 어느 고급호텔에서 사건을 접한다. 그 호텔에서 일하던 점원 남자가 그것도 호텔 크리스마스 축제에 산타로 나올 예정인 그가 바지를 벗겨진 나체로 칼에 찔려 죽은 것이다. 게다가 콘돔에는 정액 대신 인간의 침인 타액으로 가득한 채 말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두고 주변 호텔직원들을 캐고 다니지만 죽은 자의 동료들은 모두 그를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에게 찾아온 아동 남성 성욕애자 영국인 헨리, 칼에 찔린 채 아이들의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죽은 산타 구드라우구르의 가족, 친구, 스승 등을 찾아가면서 살인사건의 접점을 찾아간다. 그러나 막상 죽음의 비밀은 어디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살인기구 장치 안에 집어넣고 다양한 사람 중에 누가 살아남는지 알아보려한 큐브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영화 큐브처럼 이 소설에서는 그렇게 스릴러를 전개한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답은 처음이었다는 증거다. 모든 범죄는 시작점과 조우하는 느낌이 여기서 강했다. 그것은 죽은 구드라우구르를 발견한 아름다운 아가씨 외스프의 비명에서이니 사실 제일 처음 목격자가 범죄자일 가능성이 높고 은폐시킬 확률도 높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 진행한다.

하지만 왜 살해할 수밖에 없는가? 살해된 이후라도 왜 그렇게도 살해당했다는 분노보다는 그 외의 분노에 말려야 했는가? 혹은 그런 사건에 던져진 에들렌두르는 왜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가? 단순히 이 소설은 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쫓아가는 추격자만이 아니었다. 살해된 구드라우구르의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꼭두각시인형처럼 아무것도 못했다. 그저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도구가 되어야 하는 구드라우구르, 그런 그를 다정스레 대해주는 어머니,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다.

어머니의 죽음과 구드라우구르의 목소리 변성, 그 후에 돌아오는 모욕, 구드라우구르는 오로지 자신에게 희망이오 빛인 어머니를 잊지 못했는지, 이제는 그가 어머니가 되고자했다. 어머니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하고 장식을 하고, 아마 그런 행동으로 인해 그는 동성연애자가 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들로 말이다. 물론 구드라우구르의 누나 역시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으로 소외감을 느끼고, 구드라우구르가 집을 나가고, 동생이 나가기 전 아버지가 사고로 인해 장애인이 되자 평생 아버지를 보살핀다.

왜 이들은 이렇게도 잔혹하고 비극적인 운명으로 오게 되었을까? 죽은 산타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한 가족은 비극적으로 마감한다. 그리고 죽은 산타를 차가운 칼로 찌른 살인자, 그 살인자 역시 불행했다. 살인자는 살인자로 살고 싶기 보다는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강박관념으로 몰고 갔다. 게이인 산타, 그리고 게이에게 농락당하는 살인자의 동생, 그 동생은 마약과 나태로 절망에 가득한 인생이다.

그래도 같은 배에서 태어난 남매인 이상 누나로서 그를 도와야 했다. 하지만 동생의 약물에 빠지면 빠질수록 누나와 가족들은 어려움에 처하고, 잦은 협박에 시달린다. 그런 와중 살인이 있기 전 6개월 살인자는 동생에게 마약을 팔았단 작자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런 강간을 당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바로 자기 눈앞에 동생이 그의 가난으로 인해 어느 산타행세를 하는 게이에게 농락당한다. 그녀는 동생의 모습에서 예전에 윤간당하 본인의 비참함을 떠오르면 피가 끓고 결국 산타의 가슴에서 따뜻하고 화려한 불꽃이 뿜어져 나온다.

이런 살인사건에서 에들렌두르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증오, 그리고 헌신과 배신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지배하던 어둠에 몸은 맡긴다. 어린 시절 산에서 놀다가 조난당한 2살 어린 가장 친하고 소중한 동생을 말이다. 동생은 평생 시체조차 찾지 못했고, 아버지는 무기력한 인생으로 마감하였고, 어머니와 자신에게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은 잃어버린 늙은 늑대처럼 다정하던 아버지는 이제 죽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에들렌두르는 그런 가족관계에서 숨이 막혔다. 자신이 차라리 죽었다면 그리고 동생이 살았다면 그런 집안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러나 동생 역시 형이 죽고 자기만 살아있다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어느 소년이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소년의 아버지가 범인으로 몰렸으나, 그 소년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따르고 있었다. 사실 알고 보니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가 밖에 우연히 산책할 기회에서 몰래 집에 가서 자신의 아들을 폭행한 것이다. 어떻게 힘없는 어린 아이를 그것도 자신이 낳은 아이를 무참하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말인가? 구드라우구르의 죽음을 조사하는 내내 에들렌두르는 그런 자신의 지난 과거와 그런 과거에서 무의식적으로 벗어나지 못해 이혼까지 맛본 자신을 허무해 한다.

그런 허무함에서 자기 자식들이 있는 것은 알아도 자식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가 아닌 무심한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실망한 자식들은 모두 비행을 저지르고, 딸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증오로 에들렌두르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얼어붙은 가족관계가 게다가 가족들이 있어야 크리스마스의 악몽도 에들렌두르에겐 이번 사건에선 하나의 전환점이 된 듯하다. 가족 간의 폭력사건과 구드라우구르의 사건의 원인은 가족에 대한 관계로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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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
발터 벤야민 지음, 김남시 옮김 / 그린비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발터 벤야민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발터 베야민의 문예이론(文藝理論)이란 서적을 통해 그의 문장력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발터 베야민의 문예이론 중에서 각 소설가의 대한 문학비평은 매우 섬세하고 깊이가 보였으며, 그가 전개하는 영상문화가 꽃피우던 20세기 초반 유럽의 사진과 영화에 대해 글을 적을 때에 그의 관찰력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관찰하여 서술하였다는 사실이 실로 감탄을 자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책의 페이지에 비하여 글자크기(도서출판사 민음사-이데아총서9)가 너무 작다는 것이 조금 못내 아쉬웠다.

그런데 이번에는 적당한 페이지에 글자크기와 자간까지 알맞은 책을 찾았다. 그 서적은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이다. 내가 이 책을 빌리려 했던 이유는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첫 번째 장을 맡은 자신의 자서전 부분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의 어린시절과 청년시절의 일화를 하나의 수필처럼 풀어가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깊은 감수성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미 실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의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글보다는 그의 개인적인 인간상에 관심이 많았다. 게다가 그의 비평적이고 분석적인 글을 읽는다는 사실은 그의 분석적이고 비평적인 대상이 되는 많은 서적까지 봐야하는 점에서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모스크바 일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의 필체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이 책에서의 발터 벤야민이란 인간적 냄새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그는 매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관찰력이 뛰어나고, 마음먹은 일을 위해 아주 끝까지 해내고 마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마음도 약하고 주변의 분위기에도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그의 일기 하나하나마다 적어 내려가는 모스크바에 있었던 일이란 매우 상세히 혹은 시적인 영감으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독일어판 서문처럼 발터 벤야민이 1926년 12월 6일부터 1927년 1월말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던 적어진 일기로서 이 일기를 본다면 단순한 일기라기 보기에는 너무 시적이고, 그런다고 에세이로 보기에는 너무 진솔하다. 여러 가지 상황과 사건 그리고 많은 인물들의 만남에서 발터 벤야민이 느낀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자신이 살고 있던 독일 베를린에서 느낀 감흥이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의 글에서 모스크바는 러시아의 수도라고 하여도 뭔가 도시적인 색 다른 맛이 베여 있었다. 길가다 보면 많은 인파들이 거리로 나와 장사를 한다. 먹는 것, 장난감, 겉옷과 속옷, 각종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다양한 물건들 말이다. 여기는 영하가 25℃에 육박하는 추운 곳이다. 눈이 내려 거리를 수북하게 쌓일 정도로 추운 곳이다. 그러나 저 많은 거리의 상인들로 마치 여기가 추운 겨울보다는 살아 숨쉬는 봄과 같은 모습처럼 비추어졌다.

여기에 비해 러시아보다 덜 추운 독일 베를린은 거리에 사람이 없고 그저 빈 공간만 채울 뿐이다. 러시아에 오게 되면서 서유럽 세계가 다른 관점으로 보인다고 할까나?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모스크바가 그에게 주는 인상이란 매우 신기한 장소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기하다는 것은 낯설고 접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는 유태계 독일인이므로 독일어를 할 줄 알았을 것이고, 프랑스어도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안타깝게도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아닌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가 러시아어를 조금만 더 알았더라면 그의 일기에서 보이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매우 다양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저녁마다 러시아의 문화를 즐기기 위해 찾아간 연극과 영화관에 들리는 목소리는 모두 러시아어다. 그의 눈으로만 통해서는 배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결국 벤야민의 옆에는 통역사가 붙어 있는 것을 종종 읽혀졌으나 그래도 큰 도움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는 금방 싫증이 나거나 지쳤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러시아의 공간에서 많은 것을 얻으려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벤야민의 행동에서 가장 인상 깊은 그가 인형을 매우 좋아하여 수집하려는 모습이다. 특히 러시아를 떠나기 전에 인형을 쌓아둔 창고에서 그 옆의 동료와 함께 인형을 들고 가는데 각각 2박스를 품에 안고 가는 문구에서 벤야민의 독특한 수집가적 입장이 인상깊었다. 게다가 그는 일기 내내 인형을 사거나 관찰하거나 찾고 싶은 모습이 종종 나온다.

사소하고 작은 것에 치밀한 관찰을 보이는 만큼 그런 행동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런 벤야민의 행동과 함께 모스크바 일기에서 중요한 내용은 어느 2인물에 대한 만남이다. 1명은 벤야민이 매우 사랑하였던 여성 아샤 라시스와 그리고 라이히의 관계였다. 아샤는 예전에 벤야민이 1924년 이탈리아 어느 마을에서 만났고, 그때 아샤의 파트너인 라이히를 같이 만났다. 벤야민은 아샤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녀와 대화를 위해 2주간이나 기다렸다는 일화에 벤야민의 집착이 과연 범상하지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벤야민이 모스크바로 갔을 때 그가 흠모한 여인 아샤는 벤야민과의 관계에서 좋은 친구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 벤야민에게 다정하기도 화를 내기도 무심하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벤야민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은 것처럼 일기에 묘사했다. 심지어 그의 마음에서는 아샤와의 관계로 모스크바 생활 자체가 덫에 걸리는 듯하였다. 그런 와중에 아샤의 파트너로 만난 라이히와의 관계 역시 순탄치 않았다.

라이히는 심장이 좋지 않았는지 심장마비 증세를 일으켰으며, 라이히의 발작 이전에 아샤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아 요양원에 계속 머물고 있었다. 벤야민이 러시아에 건너간 시기는 매우 혹독하고 추운 겨울이다니 건강이 좋지 못한 벤야민의 친구 2사람과의 만남은 그렇게 순탄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벤야민은 시간만 되면 2사람과 같이 모스크바를 돌아다녔다.

알 수 없는 러시아로 가득한 연극무대와 영화관, 술집, 찻집, 빵집 등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이 2사람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박물관과 성당, 교회, 세관에도 같이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많고 많은 사람들을 벤야민이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은 모두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과 관련 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중에서 트로츠키의 여동생을 만났다는 기록에서 나는 조금 놀랐다. 트로츠키는 추후 소비에트 연방이 어긋난 국가로 만들게 해버린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인물이다.

그는 레닌 사망 후에 러시아에서 유망한 사상가이었다. 때마침 오늘 동물농장이란 영화를 보아서인지 그런지 동물농장에 등장한 이상적인 사상가 돼지 스노즈 볼이 생각난다. 어째든 벤야민은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한 사람이란 점과 또한 이제는 그들이 당시 혁명시기의 그들처럼 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시간의 흐름에서 그들이 무너뜨린 공간에서 그들은 다시 나라를 세워 일으켜야 했다.

그런 혁명이 10년 후의 러시아는 많은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던 공간이었다. 거리가 어쩌나 북적이는지 달리는 전차 안에 사람들이 얼마나 북적이는지 많은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벤야민의 글로서 충분히 느꼈다. 그런 공간에서 러시아의 문학과 예술은 계속 활발하게 보여주었다. 예전에 문학비평 방법 중에서 러시아형식주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문학도가 아닌지라 그것에 대한 자세한 깊이와 의미는 잘 모른다. 하지만 러시아란 단어 뒤에 형식주의가 붙은 이상 러시아라는 공간이 얼마나 문학과 예술로 충만했는가는 벤야민의 일기에서도 충실하게 보여준다.

위에 적은 내용처럼 벤야민이 저녁마다 연극과 영화를 보고 박물관을 방문하듯이 그곳에는 많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게다가 당원은 1달 월급이 250루블만 고정되어 있었고 나머지 수입원은 문학 활동으로 통해 추가하는 점에서 신기했다. 게다가 정부관료 대부분 사람들이 지식인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도 무시하지 못할 점이다. 연극관인지 영화관인지 박물관인지 조금 기억이 묘연하나 벤야민이 그곳에 방문할 때 그곳의 관장이 예전에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 군인은 군인이 되기 전에 문학가란 점이 조금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벤야민이 찾아간 모스크바는 자신의 친구와 길가의 풍경, 자기가 찾으려 했던 즐거움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 그리고 당시 유럽사회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벤야민은 굳이 이런 내용을 사상적으로 풀어나가면서 적지 않았다. 단지 개인적인 관점에서 풀어갈 뿐이다. 하지만 벤야민의 정치적인 관념이 여기서도 보인다. 그는 분명 고대 유대교적인 신비주의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를 넘나든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는 본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인물이라 모든 것을 프롤레타리아 쪽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부르주아적인 부분도 인정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보이는 특히 벤야민이 좋아하던 아샤에게 보이는 부분은 프롤레타리아적인 요소였다. 벤야민에겐 어느 쪽이든 그것이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고 받아들여지는 부분이 중요한 것 같았다. 그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본다면 모스크바라는 곳이 사람이 활발하게 살아가나, 한편으로 외부 세계와 차단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벤야민에게 이 모스크바의 아름다움이란 잊을 수 없듯이 지금 나의 눈으로 그가 보고 느낀 모스크바를 속삭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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