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천재다 3 - Seed Novel
하람 지음, Nardack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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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재다 이번에 읽은 3번째 권으로 하여 작품 내의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가 된다. 솔직히 이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점은 일반적인 소설과 라이트노벨이란 경소설에서 라이트노벨 그 자체만으로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 같은 허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소설이란 공통성을 인지하여 평가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보통 라이트노벨의 경우 스토리텔링 경로가 환타지와 비일상적이라면 인간의 현실적 일탈이 강하게 요구된다.

 

따라서 현실성이란 부분에서 크게 결여된 라이트노벨은 현실과 괴리감을 주는 것으로 작가와 독자 모두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은 박탈감과 허무감으로 채울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부분은 문학소설에서 있으며, 문학의 기본이며 모든 서사의 최초인 신화조차도 그러하다. 인간이 신화에 매료되는 이유는 많은 이유가 있겠으나, 적어도 신화에는 현실의 인간이 될 수 없거나 혹은 대리적으로 되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한편으로 신화의 인물이란 모든 것을 안고 책임을 져야 하는 하나의 상징 내지 희생양으로 보일 수 있다. 신화 속의 주인공은 언제나 어떤 과업과 시련을 통과해야 하는 필수적인 plot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들을 라이트노벨이라고 없다고 할 수 없다. 차라리 현대사회의 인간들에게 보이는 현실에 대한 비현실의 만족이 라이트노벨이 독자에게 주는 하나의 쾌감일 것이다.

 

그런다고 모든 라이트노벨이 탈현실과 비현실로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인간관계 설정만 그렇지 시간과 공간이 현실의 이야기를 상당히 반영하는 것도 있다. 라이트노벨이 현실적인 일탈과 도피로서 나타난 이야기가 있다면 오히려 현실적인 부분과 현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보인 일본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에서는 분명 현실과의 괴리감, 이질감, 도피감이 상대했다. 현실배경이 아니거나 현실적 인물이 아니거나 현실적인 공간이라 하여도 세계관 내지 인물들이 현실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일본 라이트노벨에서도 현실적인 상황을 제법 표현하는 것이 보인다. 그런 점들로 볼 때 이번에 내가 읽어본 그녀는 천재다는 기존 한국의 라이트노벨이 비현실적 내지 비일상적인 부분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을 알게 한다.

 

이번 3번째 책을 읽다보면서 1번째, 2번째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이 작품에서 왜 윤시아란 인물이 그렇게도 강압적이면서 작은 반응에도 그렇게 하는지 말이다. 그것은 물론 단순히 주인공 평범이의 잠시 입원함에 따른 부재만이 아니었다. 단순히 보자면 평범이가 옆에 없어 라고 보기보단 인간 사회라는 집단적 무리에 대한 이질감 내지 동질감의 차이였다.

 

3번째 권을 읽다보면 평범이는 중학교2학년 때 맹장염이 걸린 일화에서 그동안 윤시아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윤시아와 평범이는 분명 3번째 권에서는 15년이 아닌 16년 친구로 나온다. 그러나 왜 이토록 윤시아가 평범이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없다. 윤시아의 주변 사람들이 평범이와 만날 때 하는 이야기는 오로지 윤시아가 다루는 이야기는 평범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윤시아의 존재가 천재소녀라는 점에서 천재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보통, 일반적, 대체로 라는 단어를 지닌 인식과는 상당히 먼 언어이다. 특수하다는 것에서 오는 낯설음은 이미 1번째와 2번째 권에서 다루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나오는 것이 3권이었다. 사실 이 책에서 그녀는 천재든지 아니든지 평범이라는 남자주인공에게 윤시아는 언제가 연인으로 되어야 할 구조 즉 plot을 가지고 있다.

 

그런다고 하여 그 plot의 기본이 되는 하나의 극적 사건은 평범이가 걸린 맹장염이 아니라 그 맹장염으로 인해 학교 부재 시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왜 사람들은 자신들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기를 망설이는 것일까? 그녀는 천재다는 곧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기 때문에 보통 사람과 차이날 수밖에 없다. 천재들은 천재들 사이에서 인식하는 보편성이 있으나, 그 보편성은 현실 속의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보편성에 다가가지 못하는 점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저 머리 좋고 예쁜 여학생이 고학년으로 갈수록 너무 공부를 잘하게 되자 모든 사람들, 특히 여학생들에게 질투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질투의 대상은 여학생이 아니라 남학생들 사이까지 번진다. 남녀가 분리된 성이라고 할지어도 여학생이 학급의 반을 차지한 이상 그 반이 되는 존재들도 나머지 반에 같이 동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군중심리로 나보다 우월한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는 하나의 적개심으로 나타낸다.

 

윤시아는 분명 중학교를 좋은 중학교로 갈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 평범이를 따라 일반 중학교로 왔다. 그녀는 이미 중학교 2학년 평범이 없는 그 시기까지 이미 질투와 미움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아무도 대해주지 않은 그녀에게 평범이만이 여전히 평범하게 대해주었다. 덕분에 중학교 2학년 시기에 평범이의 부재는 그녀에게 심한 따돌림을 넘어 집단적인 학교폭행까지 이어졌다.

 

아무도 말도 안 걸어주고 무시하는 것까지는 정말 양호한 편이었다. 다른 학생들이 <시아의 신발 안에 압정을 넣고, 선생님이 안보면 때렸으며, 가방을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게다가 여자 아이들은 화장실로 끌고 가서 강제로 교복까지 찢어 버리는 행동도 하였다>. 그들의 행동에는 일절 양심이나 윤리적 판단의식은 없다. 인간의 집단적인 심리는 자신의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따돌림을 넘어 집단 괴롭힘은 윤시아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이며 트라우마다. 1권에서도 왜 윤시아가 일탈행위를 시도 했는가에서 오직 그들의 행동을 막을 수 있던 최후의 방패가 평범이었다.

 

평범이는 너무 평범하고, 그런 평범함으로 윤시아에게 대해주었기 때문에 윤시아는 평범이를 평범하지만 특별한 존재로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 평범함으로 자기를 대해주는 평범이도 지치기 마련이다. 윤시아와 평범이가 도서관에 가서 책을 보는데, 윤시아는 평범이가 그저 옆에만 있기를 원했다. 하지만 평범이는 그것이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윤시아가 들고 오는 책은 모두 평범이에게 어려운 책이었다. 평범이만이 아니라 모든 보통 사람들에게 난해한 도서였기 때문이다.

 

물론 윤시아에겐 그 책들은 하나의 간단하고 쉬운 것들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간단함은 자신에게 통용될 뿐이지 평범이에겐 낯설은 벽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윤시아는 평범이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그런 윤시아를 바라보는 평범이는 여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나약함에 쓴 웃음을 짓는다. 그런 평범이에게 다른 위기가 온다. 온몸이 몸살로 앓아 누울 지경에 있을 때 그가 교장에게 호출 받아 가서 윤시아가 얼마든지 좋은 대학교 심지어 세계 명문대학교에서 오라고 할 정도인데, 평범이 때문에 평범한 대학교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평범이에게 더욱 더 시련으로 오는 것은 윤시아가 자기를 따라오는 것만이 아니라 그 따라오는 문제로 윤시아가 많이 힘들어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교장은 사실 윤시아가 좋은 명문대학에 가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학교로 가주길 바란 것이다. 자신의 학교에 수재가 있는데, 그 수재가 평범한 대학에 가는 이상 자신들의 입지가 죽는다는 이유다. 이 역시 평범이가 느껴야 했던 자신 주변의 학교라는 공간이며, 그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인 만큼 오로지 이권과 명예만 탐내는 야만스런 어른들의 세계였다.

 

그런 고민의 기로 사이에 다른 천재로 통해 평범이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윤시아를 승화시키기로 한다. 이때까지 윤시아는 평범이에게 따라붙고 평범이만을 보고 살아왔다. 이제는 반대로 평범이가 윤시아를 따라가는 것을 결심했다. 평범이의 반의 반장 서유미, 그녀의 집에서 반장 동생 현석이와 꼬마천재 이유리의 대화모습을 보았다. 외우기와 연산능력만으로 세계 최고인 현석이나 그것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그에게 이유리는 현석이의 능력을 개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윤시아 때문에 고민하던 평범이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천재들은, 발전하지 못한 채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면 금방 죽어버리니까요.>, 사실 천재를 다룬 소설이나 역대 내가 알던 천재적인 인간들의 삶을 보면 그런 것 같다. 가령 독일의 문학과 철학, 예술비평에 큰 업적을 남긴 발터 벤야민이라는 사람은 2차 세계 대전 독일 나치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강박관념으로 권총자살을 한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도 억압된 민족현실 속에 좌절한 이상(李箱, 1910.8.20.~1937.4.17.)이라는 문학가도 있다.

 

이상의 소설 “날개”를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박제가 되버린 천재를 아시오?>라고 말이다. 그는 일제총독부 치하 아래 불온사상자란 이유로 탄압을 받아 체포되다가 병보석으로 풀린 후에 병원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의 인생에서 천재적인 예술성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 죽어갔다. 그런 것은 현석이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이유리와 윤시아, 최수정은 현실 속에서 보통 사람과 다른 두뇌를 가질망정 신체구조나 외양은 모두 비슷했다.

 

그들은 처음과 다른 것이라 단지 내면의 차이로 인해 다름으로 차별을 받았다. 거기에 비해 현석이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래서 그는 살아도 죽어버린 박제처럼 살아오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 이유리와 윤시아의 덕분으로 인생의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을 보이는 것만큼 평범이에겐 하나의 고문이었다. 왜냐하면 누군가 박제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박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보면 평범이는 윤시아를 위한 이별연습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길은 최수정의 사촌에게 전화하여 그녀의 유학준비 부탁과 윤시아의 부모에게 찾아가 그녀의 유학을 설득한다. 평범이의 존재는 이미 모든 것을 넘어섰다. 그의 방문에 윤시아의 부모님은 내딸을 주려면 5년, 즉 윤시아가 대학교 졸업 후에 준다는 뜻이다. 고등학교 이후 먹고 살기 어려워서 딸이 일할 수 있는 나이까지 기다려 달란 윤시아의 아버지 말에 평범이가 얼마나 윤시아에게 큰 기둥인지 다시금 확인했다.

 

떠나고 보내고 싶지 않아도 자유로운 학은 날개를 크게 벌려 나는 것이 아름다운 법이니, 닭장 속에 작은 날개를 보고 혼자 우는 평범이나, 그의 결단은 이제 자신만 바라보는 윤시아가 아니라 자신도 윤시아를 바라본다는 것을 결심하는 것이다. 그의 노력에서 가장 큰 역할은 윤시아가 자신의 그늘 아래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때까지 평범이가 윤시아의 그늘이라 생각했으나, 사실 윤시아의 그늘이 너무 깊고도 커서 그것마저 그늘인지 몰랐던 것을 말이다.

 

그는 중학교 친구 준석에게 부탁하여 윤시아를 괴롭힌 동기를 찾아내어 윤시아에게 사과하도록 했다. 중학교 시절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어른의 세계로 들어가서인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반성으로 윤시아의 가슴에 새겨진 가시를 하나 둘씩 빼도록 했다. 그런 다음 그는 윤시아가 가고 싶은 곳을 향했다. 그곳은 바다. 거친 파도와 모래가 펼쳐진 넓고도 시원한 공간을 말이다.

 

이 작품에서 본 것은 생각보단 리얼리즘 요소를 많이 반영했다는 점이다. 만화, 애니메이션, 라이트노벨, 심지어 TV 안의 드라마에서 경제적인 관념에 대한 부재가 많은 반면 여기에 나온 평범이는 몇 개월 동안 겨우 모우고 모은 용돈을 지갑에 넣어 윤시아를 위한 데이트를 진행한다. 그리고 저녁 해변가에서 그는 드디어 윤시아에게 그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한다. 중학교 때 괴롭게 만든 사람들에게 용서받기, 고3 수능이 앞인데도 방학 때 매일매일 그녀와 보낸 시간들, 오늘 여기 바다에 데리고 와서 그녀를 위한 마지막 이별여행을 말이다.

 

평범이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아버린 윤시아에겐 평범이의 이별통지는 잔인하고도 슬펐다. 눈물 한번 제대로 그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은 윤시아가 평범이 때문에 계속 흘린다. 유학가란 그 말에 눈물로 절규하며 평범이에게 내가 싫어지냐 말에 평범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윤시아를 보며 평범이의 키스는 그의 마음속 깊이 윤시아를 사랑한다는 진심을 보였다. 그런 이별의 첫사랑 친구들은 그렇게 집에 돌아오고 다음날 윤시아를 비행기로 보낸다.

 

아무리 윤시아가 평범이에게 기대된 것은 맞으나 여전히 주도권은 윤시아다. 출국 전 여자친구에게 키스 한번 해주지 않는다고 평범이를 다그치는 윤시아의 슬픈 눈에 평범이는 나중에 빚으로 받는다고 한다. 그런 평범이에게 꼭 날아오라는 윤시아, 그녀도 사실 알고 있다. 평범이는 평범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오기 너무 힘들 것이란 사실을, 그래도 그녀는 기다림을 안고 미국으로 간다.

 

보통 이런 장면이라면 보통 서사적으로 엔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엔딩이 엔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엔딩 너머의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그건 2번째 권에서 평범이가 윤시아에게 실없이 고백한 장면부터 시작해서 미국으로 가는 장면까지 말이다. 윤시아는 미국으로 가도 평범이는 여기에 있다. 그는 자신의 결단에 옳다고 하나 너무 괴로워한다. 그는 대학진로에 많은 고비를 겪는다. 심지어 담임마저 포기하라 한다. 게다가 미국 명문대학교에 간 그녀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그의 마음은 아프다. 물론 그 이야기들은 빨리 사라지기도 하나 그만큼 그의 가슴은 허전함으로 가득할 것이다.

 

평범이의 사투는 괴롭고도 먼 길이다. 그는 자신도 윤시아를 따라갈 것이라고 발버둥 친다. 매일 3시간도 못 잔채 9월 모의고사에 당당하게 자신도 윤시아를 따라 갈 것이라고 쓴 고배를 마신 채 말이다. 하지만 그가 9월 모의고사 당일 그는 쓰러지고 좌절을 한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윤시아의 이름만 외쳐댄다. 그의 절규는 한편으로 다른 여자의 마음을 울린다.

 

내가 보기엔 반장 서유미는 이성적으로 평범이가 싫어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합리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저돌적으로 몸을 날리기 때문이다. 모의고사 보기 전에 쓰러진 그를 찾아온 반장에게 평범이는 반장을 윤시아와 혼동을 한다. 꿈과 현실을 이미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평범이의 뺨에 차갑고 왠지 낯설지 않은 손바닥은 윤시아의 손이 아니라 반장의 손이었다. 현석이 동생을 돌보다가 반장에게 뺨을 맞은 평범이의 몸이 서유미의 손을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분간했지 못했다. 단지 마지막에 들린 <미안, 남자와 키스하는 취미는 없어>라는 반장의 아쉬움과 안도심의 말에 평범이는 잠이 든다.

 

2번째 권을 보면 반장은 평범이에게 자신을 좋아하냐 말에 평범이는 물론 반장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정확하게 답내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 윤시아의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고 혼자 이야기하는 평범이에게 반장은 더 이상 평범이에게 미련을 둘 수 없었다. 그녀의 마음은 비오는 날에 우산이 없던 평범이에게 교실 구석에 있는 낡은 우산을 주면서 같이 가자는 평범이의 제안에 <미안, 나는 남자애랑 같이 하교하는 취미는 없어>라고 했다. 하지만 평범이가 받은 우산은 너무 낡아 제대로 쓰지를 못하는 우산이었다. 아마 이 우산을 가지고 교실로 다시 반장에게 찾아갔다면 같이 하교했을 것이다.

 

평범이의 특징은 역시 평범함도 있지만, 보통 많은 남자처럼 둔한 점도 있었다. 우연히 마중 나온 이유리의 대화 속에 이유리의 안도감과 더불어 한심스럽다는 느낌이 같이 묻어져 나온 것이다. 그런 평범이기에 앞도 뒤도 볼 것도 없이 계속 윤시아에게 달려간다. 비록 모의고사에서 쓴 잔을 마셨지만, 수능당일 그는 자신을 향한 외로움을 향해 뛰어갔고, 수능 후 시험결과 평범이의 성적은 평범하지 못했다.

 

이젠 고등학교가 끝이고, 그의 수능성적은 자신을 말린 주변까지 말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겨우 닭이 닭장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닭의 날개는 날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모두들 바쁜 청춘을 보내고, 그의 얼굴에 수염이 나고 군대까지 전역한 아저씨로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이니, 윤시아와 헤어진 6년이 되었다. 그는 6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결국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마지막 장면에서 늦었다고 토라진 것처럼 보이는 윤시아와 키스를 나눈다. 역시 아메리카에 있던 그녀일까? 6년 전 공항에서 헤어질 때는 평범이는 망설이고, 윤시아는 망설이는 평범이에게 빚을 졌다고 한다. 이제 그 빚을 갚는 장면에서 닭장 속에 있는 닭은 날개짓을 한다. 비록 그 기간은 매우 길고, 자신은 괴롭고 먼 길을 달렸어도 말이다. 마지막에 평범이는 평범이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주영재라는 이름으로 윤시아에게 불린다.

 

윤시아에게 그저 평범이는 평범이라고 불렸을 때는 자신이 평범이에게 다가간 것이나, 이제 주영재는 자신에게 평범이가 돌아왔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나는 이 둘의 관계를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과정을 무슨 일들로 통해 가는 것인가이다. 그 길은 재미난 이야기도 있지만, 한편으로 현실적인 이야기도 많이 반영되어 있다. 그녀는 천재다라는 라이트노벨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서 인물 설정은 평범이 주변에 천재가 윤시아, 최수정, 서현석, 이유리 라는 4명이 있어서 어느 평범한 고등학생에게 천재 4명이 모인다는 사실은 사실 어렵다.

 

단지 4명이 모였다는 가정 아래 시작되는 서사에서 현실 속의 대한민국의 사회 통념과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실로 리얼리즘 적이라고 볼 수 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최근에 읽어본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근대이후로 현재 문학이 죽었다는 일본 문학비평가 및 철학자의 말에서 현대문학이 너무 영화처럼 혹은 영화를 위한 이야기로 변질되었다는 내용을 보았다.

 

어떻게 보자면 그녀는 천재다를 읽으면서 사실 개인적으로 이것은 만화와 애니메이션 소재보다는 실제 영화적인 속성이 강하다는 것을 느꼈다.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한 영화, 그것은 너무 현실적이기에 비현실 속에 빠지도록 하는 하나의 장치다. 물론 라이트노벨이라고 하여 영화나 문학소설과 다른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서사적인 표현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렇지만 다소 아쉬운 점은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한 라이트노벨이었기에 조금 식상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과 그런 식상한 면이 있기에 충분히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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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재다 2 - Seed Novel
하람 지음, Nardack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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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재다 2권”에서는 드디어 윤시아와 평범이의 관계가 크게 요동을 치기 시작하는 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평범이의 인간상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편이다. 이번 2번째 이야기의 처음 고비는 윤시아에게 찾아온 어느 미소년의 고백이다. 문제는 그 미소년은 미소년이란 직함에 어울리게 외모는 기본에 학력과 집안까지 매우 좋은 학생이었다. 명문고에 다니면서 상위 1%에 들어가는 민준은 그런 평범이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민준이가 윤시아를 찾아와서 그녀에게 사귀어 달라고 한다. 그러나 윤시아는 그럴 생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민준의 행동과 행실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평범이는 그것을 모르고 그저 자신보다 윤시아에게 고백한 민준을 보며,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이다. 교문 앞에서 윤시아가 민준에게 냉대하게 굴면서 최수정과 평범이와 같이 가려고 했으나, 평범이는 그런 잘나고 잘난 윤시아의 옆에 있는 부담에 넘쳐 민준의 모습을 보니 그저 도망치기 바빴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도망치고 그 날 잠이 들었지만, 자기가 자는 동안 윤시아의 전화수신과 문자가 수없이 와있었다. 평범이는 자기가 도망쳤다는 죄책감과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낙담한 모습으로 이불 속에 눕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시장보러 가는데, 우연히 민준과 만나고 그와 원하지 않은 커피숍의 대화에서 평범이는 분노를 느낀다. 이 녀석만큼은 절대로 윤시아를 넘기고 싶지 않다고 말이다.

 

 

15년 지기로 그 어떤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거물에게 드디어 인간적인 삶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대상으로 지망한 민준은 자기보다 공부실력이 떨어지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은 이른바 엘리트주의였다. 사실 2번째 책에서 이 작가의 의도를 생각해보면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가 늦은 시간까지 자율학습에 학생들을 잡아 두는 것과 평소 평범이와 주변 학교생활로 보면 고등학교라는 억압된 공간을 느낄 수 있다.

 

 

획일화적인 사회구조와 그 사회구조 축소판인 학교, 그런다고 해도 준민의 태도는 이원화적인 인물설정에 과도하게 잡혔는지 모른다. 본래 누군가 좋은 역할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그만큼의 악역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가역적인 설정으로 본다면 말이다. 어째든 준민이는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평범이에게 수능모의고사에서 자기보다 잘 하면 평범이를 인정해준다고 한다.

 

 

전국모의고사에서 수준이 3등급 내지 4등급인 평범이에겐 너무 머나먼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둘째치더라도 (자기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진실로 소중하게 여기는 윤시아를 위해 (겉으로 자기 자존심이라 하나) 준민과의 시험대결을 선택한다. 답도 없이 시작한 그의 무모함은 자기 스스로 낙담한다. 모든 공부도 그러하나 수학에 절망적인 성적에 그 성적만큼 평범이는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때 자신에게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주는 천재소녀 최수정과 다른 여자고등학교에 전학을 간 이유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최수정은 이미 평범이에게 큰 도움을 받았기에 그에게 개인교습을 해주기로 했지만, 이유리는 의문이었다. 그래도 여자고교 앞에서 혼자 바보처럼 기다리는 평범이에게 이유리는 냉담하게도 변태로 취급한다. 게다가 그 변태 취급을 당한 후에 우울해 하는 평범이에게 로리콘드리아라고 놀려댄다. 이유리의 친근함은 그런 상대방에 대한 심한 장난인 것이다.

 

 

그런 험한 꼴을 당한 후에 평범이는 최수정과 이유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남은 2주 동안 자기가 이때까지 생각지도 않은 공부를 시작한다. 잠도 못자고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말이다. 게다가 윤시아를 눈에 가시처럼 보고 있으며, 그 윤시아와 가장 친하다는 이유로 미움을 사게 한 서유미 반장까지 가서 물어본다. 학년 3위인 반장이 솔직히 벅찬 대화 상대이나 오히려 반장은 쿨하게 반응한다. 그녀는 단지 평범이가 윤시아의 친구라서 싫은 것이지 평범이 그 자체는 싫지 않았다.

 

 

그렇게 2주의 결과가 나온 날에 평범이의 성적은 학급 내의 학생과 담임마저 패닉에 빠지게 했으나, 그 결과는 민준에게 이길 수 없었다. 그런 악에 빠진 평범이가 민준을 만나게 되자 민준은 평범이에게 쓰레기같은 녀석 물러서라 하나, 평범은 오히려 쓰레기이니깐 못하겠다고 버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윤시아가 등장한다. 평범은 성적은 민준보다 못했으나 상당히 좋은 결과인 반면 윤시아는 평소 평범이보다 못한 결과였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사람취급하지 않아 천재소녀 윤시아에게 대쉬한 민준에게 자기 역시 쓰레기라고 말하는 민준은 그만 기가 막혀 윤시아의 명치에 주먹을 가격한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본 평범이는 아무런 생각도 망설임 없이 민준과 싸운다. 손은 상처 나고, 그의 분노로 가득한 눈빛은 금방이라도 민준을 죽일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평범을 말린 사람은 다름 아닌 윤시아였다.

 

 

민준이 자리에 뜨자 윤시아는 의도적으로 맞은 것이라고 자신의 계산에 끼어든 평범이에게 핀잔을 준다. 윤시아는 평범이에게 그런 소리를 했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평범이가 일부러 공부한 것까지 알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맞아주어 최수정을 괴롭힌 일진을 소탕한 것처럼 민준에게 도리어 혼을 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평범이가 윤시아의 책략을 흐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 평범의 행동은 오히려 윤시아에겐 진짜 친구라는 사실을 평범이가 자기는 이성적인 행동이 아닌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으로 증명한 셈이다.

 

 

그렇다면 왜 평범이는 사람이 좋은 것일까? 자신에게 얼마든지 합리적 이유를 대고 피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보기에 평범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윤시아의 그늘이라 본다. 그는 윤시아 앞에서는 그저 작은 소년이었다. 공부나 외모나 체육이나 그 모든 것으로 이길 수 없는 윤시아에게 자기 스스로 그녀와 친구하는 것이 너무 벅차게 느낀 것이다. 그러나 그만이 윤시아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은 완전 인정하고 윤시아를 받아준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그녀와의 친구관계의 압박은 늘 그에게 콤플렉스적인 요소로 다가온다. 한 마디로 평범이는 자기가 윤시아에게 억눌린 만큼 그 억눌림의 해소로 다른 누구에게 무의식적으로 아무런 대가없이 도와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2번째 책에서는 반장 서유미 중심으로 한 평범이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착실하고 성실한 반장, 3학년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학교 보충수업에서 그저 졸린 닭처럼 힘겨워 하는 모습을 평범이는 감지한다. 평소 눈치 없는 평범이지만, 같이 보충받은 교실에 아는 얼굴이라곤 반장 서유미였다.

 

 

과묵하고 조용한 반장 그 착실한 그녀가 보충수업에 졸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평범이는 홍삼드링크를 내밀지만, 그녀에게 완강하게 거부당한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평범이가 싫어한다고 말한 것처럼 윤시아 옆에 있는 평범이가 짜증나는 존재로 여겼다. 그런 어색한 반장과의 사이에서 어느날 평범이는 답답한 보충1반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온다. 그런데 그 자리에 많이 보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반장 서유미, 그녀는 옥상 난간에 올라가 마치 뛰어 내릴 것처럼 위험했다. 평범이는 반장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잡아 댕겼다. 그리고 반장은 평범이 위로 떨어졌다. 평범이 눈에 자살시도로 보였으나, 반장은 그저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평범이는 그녀의 섬뜩한 모습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발 하나가 공중 위로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일을 윤시아에게 보고한 평범이에게 반장의 소문을 듣는다. 그녀는 고등학생이면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말이다.

 

그런 착실한 반장이 아르바이트에 보충수업에서 졸고 있다는 것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런 평범이의 고민 속에 반장은 평범이에게 자기 집에 같이 가자고 한다. 예상 밖의 그녀의 제안, 그리고 반장 집에 찾아가자 충격에 빠진 평범이, 반장의 남동생 현석이를 보는 순간 평범이는 반장의 그늘을 보았다. 현석이는 자폐증세로 심각한 집착과 난폭한 행동을 했다. 평범이가 처음 간 날 현석이가 두꺼운 책을 누나에게 던진 것이다. 게다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시간을 재며, 반장의 저녁준비 중에 실수로 음식을 흘리자, 방에 흘린 음식까지 주워먹는 것이다.

 

 

그리고 말리려는 평범이에게 저항까지 했다. 13세의 남자아이라고 생각하기에 믿을 수 없는 힘이었다. 반장이 평범이를 자기집에 데리고 이유는 아버지 사망 이후 어머니가 집안살림을 위해 일하는데, 건강이 좋지 않아 자기가 대신 일하니 1달 동안 동생을 봐달라는 것이다. 평범이는 그 누구도 받아주지 않을 이 괴로운 일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 반응을 본 반장은 평범이보고 자기를 좋아하냐 물어본다. 하지만 평범이는 여성으로 반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의 그늘을 받아준 것이다.

 

 

반장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나 한편으로 납득했다. 그가 바로 윤시아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사실 평범하다는 것은 좋은 것만도 나쁜 것만도 아니라 주변생활에 큰 불행이나 사건이 없다는 의미다. 클로버라는 식물에서 잎이 4장이면 행운이나 3장은 행복이라 했다. 평범은 3장의 클로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클로버는 3장과 4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3장에서 1장이나 2장을 떼어도 클로버다. 그런 클로버가 반장 서유미인 것이다.

 

 

그리고 3장의 클로버 사이의 4장을 가지고 태어난 윤시아는 그야말로 축복받았다. 천재미소녀, 그렇지만 그녀 역시 어두운 과거를 있었고, 그 어두운 그늘에 있던 사람은 평범이었다. 그런 평범이기에 최수정도 평범이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반장에게는 다른 이면이었다. 왜냐하면 평범이가 윤시아에게 반장의 일을 말하고, 반장 집에 윤시아가 가면서 부터이다. 윤시아는 분명 천재이고, 평범한 사람과 대할 수 있을 정도로 상식과 교양이 있으며, 겉모습을 보자면 그저 미인이다.

 

 

그렇지만 천재라는 것은 다른 누군가 비교되고, 그 비교에 의해 차별당할 수 있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배척받는 일을 윤시아도 있었다. 그런 윤시아이기에 반장의 동생 현석과 윤시아는 깊은 공감을 나눈 것이다. 그렇지만 반장은 그것을 가지지 못했다. 현석이는 유미에게 누나라고 부른 적도 없으면서 윤시아에게 시아누나라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반장은 윤시아를 더욱 더 미워했다.

 

 

왜 윤시아는 완벽한 외모와 지성을 타고나서 저렇게 잘난 듯이 살아가는데, 왜 자신의 동생은 천재이면서 사반트 증세로 밖에도 나가지 못하고, 이렇게도 자신을 힘들게 하느냐 말이다. 거기다가 자신에게 십 년 동안 누나라고 말해주지 않은 현석이 얼마 되지도 않은 시아에게 누나라고 하는 순간 반장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분노로 가득했다. 반장이 윤시아를 미워한 이유는 바로 동생과의 삶에서 하늘은 공평하지 않은 것과 공평하지 못한 상태에서 윤시아에겐 평범이가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 자신의 동생은 장애로 눈이 있어도 세상의 빛도 볼 수 없는데, 그래서 자기는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거기다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 모든 것을 윤시아가 가졌기에 너무 비참하게 느낀 것이다. 윤시아의 방문으로 평범이의 뺨을 때린 반장,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윤시아는 마음속으로 아파한다. 대신 그녀의 말에선 평범이의 처음으로 때리는 뺨을 빼앗긴 사실을 말이다. 윤시아는 자신의 친구를 자신처럼 대하는 반장에게 질투했고, 반장은 자기 동생이 천재라서 모든 것을 포기한 자신의 인생에 평범이를 친구로 둔 윤시아를 질투했다.

 

 

그런 난감한 싸움에 평범이는 윤시아에게 아쉬움의 대상으로 반장에게 윤시아를 데리고 온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그런 평범이가 느낀 것은 평범하니 그저 물러설 것이란 좌절감이다. 그런데 의외로 윤시아는 평범이에게 책을 던져 그를 때린 후에 그를 설교한다. 가서 반장을 도우라고 말이다. 윤시아는 알 수 있었다. 반장에게 평범이가 필요하고, 현석이에게 자기가 필요했으나, 갈 수 없기에 오직 평범이만이 현석을 구해줄 수 있다고 말이다.

 

 

윤시아가 없는 평범이의 하루는 고되고 힘들었다. 자신의 평범한 머리로 윤시아에게 따라갈 수 없었고, 윤시아와 현석이의 대화 속에서 자신은 소외됨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보자면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윤시아는 그런 사람들 속에 있는 평범이를 보며 마음속으로 울었을 것이다. 그런 힘겨운 투쟁 속에서 평범이는 윤시아와 최수정에게 조언을 받으며 반장과 현석을 위해 노력한다.

 

 

사실 이 모습에 반장은 매우 놀란다. 반장은 자지가 뺨을 때려 평범이가 다시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낙담했었다. 그러나 그가 오자 반장은 다시 평범이에게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어본다. 평범은 반장을 이성적인 존재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존경하는 마음이라고 대답한다. 반장은 그저 평범이를 보며 미소 지으며 납득한다. 그런 긴 시간이 지난 후에 현석이는 장애아동이 모이는 특수학교로 가게 된다.

 

 

그런데 그 전에 평범이는 현석이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이야기는 평범이가 홀로 현석이를 돌볼 때 우연히 현석이가 왜 유미누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이유였다. 그 사실은 교통사고로 반장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린 시절의 반장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때 현석이가 귀찮게 굴자, 어린 시절 반장 무심코 현석이에게 자기에게 말 걸지 말라고 한다. 이때의 정신적 충격으로 현석이는 이후로 반장에게 유미누나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시아누나란 말은 그렇게 잘하는데, 그 대신 자신의 친누나에겐 말조차도 제대로 걸지 못한 것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잊어도 현석이만 그 사실이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평범이는 현석이가 누나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누나에 대한 말에 절대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멀리 다른 곳에 가면 좋은지 그리고 힘든지 물어보니, 현석이는 모두가 힘들어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현석이에게 평범이가 오직 그 난국을 타파하는 것은 지난 과거로부터 시작된 엇갈림을 다시 원위치밖에 없었다.

 

 

현석이가 원주로 기차타기로 한 날, 반장과 평범이는 현석을 데리고 기차역으로 간다. 그리고 거기서 기차를 기다리며 현석이가 기차표를 꺼내기로 했는데, 기차표 대신 편지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현석이가 직접 적은 글이 있었고, 거기에는 현석이 누나 유미에게 전해주고 싶은 사연이 있었다. 그리고 현석이의 말을 들은 유미는 그저 현석이를 품에 안고 눈물로 흘린 뿐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부분에서 평범이가 제안한 방법을 결코 윤시아가 눈치 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윤시아에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단지 1권 째에 본 이유리만큼 평범이는 윤시아에게 과거에 어떤 큰 일이 있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이유리에게 과거의 윤시아를 본다는 것처럼 평범이가 반장과 현석이에게 해준 선물은 윤시아가 예측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윤시아가 어떤 계기인지 모르나, 평범이의 행동패턴을 모두 예지하는 윤시아를 여기까지 지내게 만든 것은 평범이는 결코 사람을 논리적인 계산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대하는 것이다.

 

 

그런 평범이기에 윤시아는 현석이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이고, 그 후에 현석이는 누나와 사이좋게 지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알아봐주는 최수정과 이유리까지 만나게 된다. 친구가 없던 현석이에게 친구들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평범이는 자기가 손해보고 게다가 찌질이까지 들은 마당에 그에게 돌아온 것은 없었다. 찌질한 바보 평범이는 어떻게 보면 너무 평범한 것이 아니라 너무 평범하다 못해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 평범이가 자신 스스로 너무 평범하나고 나약한 인간이라 옆에서 제대로 잘봐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1권 째부터 윤시아에게 절교 선언하다가 된통 혼나서 취소까지 해야 했고, 윤시아와 진짜 친구가 되어준 것이 고마워 최수정을 위해 온몸이 멍이 되도록 맞았다. 이 모든 사건들은 사실 평범이가 용기 있고 도덕심이 높은 인간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 깊이 자기도 모르는 깊은 무의식의 공간에 윤시아라는 괴물이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괴물은 마음속 깊이 봉인되어 자기도 모르는 상태이나, 이제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미국 헤이버드 대학교에서 온 최수정의 사촌오빠 수민이 오고 나서 부터이다. 수민은 수정을 아끼는 괴짜오빠이나, 상당한 수재이다. 그런 수재가 천재소녀 윤시아를 만나면서 수민은 오로지 윤시아에게 마음을 돌렸다. 평범이를 관찰하고 사촌동생 수정을 위해 평범이에게 수정과 사귀기를 원한 수민이에게 평범이는 자기가 가진 윤시아에 대한 일들을 새롭게 돌아봐야 했다.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으나 주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평범이가 오늘날까지 어떻게 그녀와 지낸 일들을 알아도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군계일학에서 닭장 속의 소년 평범이, 그 닭장위로 날아가는 윤시아, 평범이는 닭장에 있는 자기 때문에 학이 날지 못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리고 윤시아라는 친구는 오랜 지기이기도 하나 선망의 대상이었고, 때로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대상이었다. 오만 희로애락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평범이에게 선택이 다가온다.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최수정인가? 아니라면 자신의 허락 없이 대답하지 않으면 성질내는 윤시아인가? 좋아하는 사람이 윤시아여도 그것이 너무 깊은 내면에 각인되어 그것조차 알지 못한 평범이는 고뇌를 한다. 수민에게 들은 강렬한 이야기에서 자신이 우유부단하고 겁쟁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 우유부단함이 최수정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 그러면 그럴수록 윤시아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말이다. 평범이는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오히려 붙잡혀 있는 것은 윤시아와 최수정이 아닌 자기 내면속의 시아의 그림자였다.

 

 

그런 운명의 갈림길에서 평범이는 최수정의 고백을 거절하고, 윤시아에게 달려가고, 거기서 수민의 꾸지람까지 먹는다. 그리고 다시 윤시아를 찾아 그녀에게 고백을 한다. 다리가 삐어 절룩거려 자신의 등에 업힌 천재소녀에게 말이다. 하지만 그 고백마저도 너무 싱겁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윤시아>, 자기의 깊은 내면을 알았음에도 그것이 너무 깊이 들어간 나머지 그렇게 말해버리는 평범이, 그런 평범이에게 윤시아는 대답 대신 가만히 있었다. 평범이가 윤시아가 대답이 없어 자냐 말에 목을 조르면서 나 잠잘 거니까 시끄럽다고 대답한다.

 

 

게다가 멋도 확신도 낭만도 없이 고백받은 윤시아는 평범이의 행동에 한심하다고 하나 자기 역시 한심하다고 한다. 그러나 평범이는 깨달지 못한 것이 있다. 윤시아는 평범이가 한심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한심하다는 뜻이다. 윤시아에게 오로지 평범이만이 친구이나 평범이는 그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윤시아를 자기에게 떨어져 주기를 바란다. 그런 평범이를 보면서 억지로 참으며 생트집을 잡는 윤시아로선 과연 누가 한심한가를 독백하는 것이다.

 

 

1권 째에 최수정은 평범이에게 진짜 천재는 필요 없는 기억은 버린다고 한다. 이성적인 존재일수록 자기 판단이 정확하기에 그런 것이다. 2권까지를 읽다보면 1권과 달리 평범이의 입장보다는 윤시아의 입장으로 넘어가기가 좋을 것이다. 2권 째의 연일일이라는 2사람의 생일에서 윤시아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평범이는 그 눈물을 보지 못했으나, 평범이 동생인 주선영은 윤시아의 슬픈 모습을 본 것이다.

 

 

그 이유는 이전에 평범이의 생일에 윤시아가 준 선물을 어느 상장에 넣어 먼지가 수북할 정도로 쌓인 것이다. 평범이가 생각하는 윤시아의 생일에는 가격으로 매긴 용돈살인범 선물만을 회상한다. 그에 반해 윤시아의 선물은 가격적인 부분보다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이었다. 특별한 존재이기에 나를 골려먹을까라는 평범이의 생각이나, 그 선물들은 윤시아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 많았다. 그 선물상자 안에는 먼지로 쌓인 스웨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윤시아가 가져온 선물은 하얀색 볼품없는 스웨터였다.

 

 

볼품없고 멋은 없으나 한번 세탁기에 돌렸는지 좋은 냄새가 난 것으로 보아 분명 윤시아는 평범이를 위해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평범이는 그저 윤시아가 내가 평범하여 그런 스웨터가 어울리니 그것이나 입어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평범이는 생인파티가 열리는 윤시아의 집에 가서 스웨터를 입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볼품이 진짜 없는지 평범이 친구인 한성이는 평범이의 스웨터 입은 모습에 비웃기까지 한다. 그러나 평범이는 굴하지 않고 스웨터를 봄까지 계속 입을 것이라고 한다. 결국 윤시아의 마음을 풀어준 것이었다.

 

 

이 작품의 2권까지 읽다보면 1권부터 시작한 것처럼 윤시아는 분명 평범이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평범이는 그런 윤시아의 행동에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이 평범하고 만만한 소꿉친구로 놀리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막상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윤시아의 깊은 마음과 더불어 상처 받는 모습도 보인다. 어떻게 본다면 그런 둔감한 평범이의 모습에 윤시아는 이끌려는지 모른다. 둔감하기에 상대방과 자신의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둔감하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대하는 평범이를 말이다.

 

 

인간에게 가진 성격이나 속성은 뭐든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좋은 점들이 있으면 나쁜 점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특별한 천재소녀로 태어난 윤시아가 평범이에게 특별히 대해주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윤시아에게 특별하게 대하지만, 그 특별함 윤시아란 존재에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평범이의 반의 반장이 윤시아를 싫어하는 것이고, 반장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윤시아를 멀리 하려는 모습도 있는 것이다. 그런 윤시아가 오직 말을 거는 사람은 평범이다. 최수정이 처음 와서 체육복을 평범이에게 빌리려고 할 때 최수정은 여학생이고, 평범이는 남학생이다.

 

 

상식적으로 처음 전학 온 것도 모자라 감수성이 매우 예민한 여고생에게 얼굴도 모르는 남학생의 체육복을 빌려서 입게 한 것은 주변 여학생과 사이가 매우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사실 그렇게 윤시아에게 평범이에게 와서 반강제적으로 빌려간 체육복의 의미는 평범이가 윤시아에게 정말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평범하고 평범한 그가 특별한 이유는 그가 사람을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음이다. 최수정도 고백 전에 6개월 동안 평범이를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얼마 되지 않은 전학생이 그렇게 빨리 친구의 친구인 평범이를 좋아한 것은 이상한 일이나 최수정은 15년 동안 평범이를 지켜본 윤시아의 이야기로 통해 15년 치의 평범이를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평범이의 15년에 대한 면을 모두 이해했어도, 15년 동안의 윤시아와의 깊은 인연의 끈은 가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2권을 읽으면서 이 라이트노벨은 단순히 라이트노벨로 보이기엔 너무 현실적인 부분이 강했다. 재미요소보단 다소 감성적인 인간의 모습을 자극한 것이 여력하게 보인다.

 

너무 높게 평가하는지 모르겠으나, 라이트노벨이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해 가까이 붙어 있지만, 라이트노벨 역시 문학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제목에서 “그녀는 천재다”처럼 평범이가 다가가려는 윤시아에게 도달하는 것은 최종적인 서사의 완료이다. 그러나 그 가는 와중에 어떤 이야기가 있고, 어떤 사연이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역시 중요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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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재다 1 - Seed Novel
하람 지음, Nardack 그림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해지기 바란다. 그러나 자신들이 특별해지는 만큼 평범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인간에게 자신이 남들보다 위에 있고자 하는 우월의식과 더불어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내면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은 개인적인 활동으로 타인의 시야를 받기보다는 개인과 개인이 모인 그룹 사이에서 동시에 인정받기를 원한다.

 

인간이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것도 있으나 더 중요한 점은 인간은 자신이 그 사회로부터 외면을 받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인 면들이 자기 일상적 요소에서 발견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그리고 그 특이한 인간이 자기가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 속에서 매우 밀접하다면 말이다.

 

한국 라이트노벨 작품인 “그녀는 천재다” 제1권을 읽어보며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독특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낯설음과 그 낯선 공간에서 일어나는 어느 한 남학생의 일상을 토대로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다. 기본적으로 라이트노벨이 경소설이란 이유로 상당히 외면 받는 부분이 적지 않은데, 사실 경소설 역시 일상에서 일어나는 삶의 모습이나 또는 삶의 이면에 가려워진 인간의 욕망을 다루지 않은 것이다.

 

그런 부분을 본다면 고전적인 문학소설에서 다루는 담론이나 범주에 닿을 수 없을망정 현대소설과 비교하면 그렇게 차이난다고 볼 수만 없다. 단지 설정에서 다소 재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을 생각하면 일반적인 시나리오를 지닌 소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천재다”를 읽어 보면서 흔히 우리가 TV나 뉴스, 신문에서 나타나 가끔 관심을 유도하는 천재들이 평범한 공간에 있으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인가를 다루는 것은 그렇게 비현실적인 부분이 아니라 본다.

 

이 작품의 히로인으로 등장한 윤시아에 대해 보자면 이 작품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이름 대신 평범이라는 별명을 가진 남학생의 시선에서 그녀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완벽히 마스터 하는 인간이다. 공부와 체육은 기본이고 외모와 몸매, 게다가 합기도까지 완벽하게 수련하여 어린 시절 태권도 했다는 평범이를 그냥 가볍게 제압한다.

 

작품에서 히로인의 존재로 본다면 남성중심의 스토리전개라 하여도 여성의 강력한 현대사회의 각인은 여실히 드러난다. 보통 서사구조를 지닌 작품에서 여성이 수동적인 존재로 많이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반해 여기는 오히려 남성인 평범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나오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경향보다는 무의식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매우 강하다.

 

그런 평범이의 성격에 따라 이른바 둔감한 녀석이란 호칭을 붙이기 딱 좋은 케이스라는 점이다. 이 작품의 발단은 천재소녀인 윤시아가 대학교 면접시험 당일에 화문고등학교 내의 큰 이슈로 떠오른다. 검은 긴 머리카락과 명석해 보이는 그녀가 오늘은 무슨 일인지 머리카락 색을 노랗게 물들이고,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자기 스스로 퇴학한다고 하고, 얼굴에 진한 화장과 귀에는 철렁철렁한 귀걸이까지 달려 있었다.

 

그 상태에서 학교에서 뛰쳐나가 모든 학교 선생이 초비상이 걸린 것이다. 그때 그 누구도 그녀에게 상대할 수 없는 지경에 오직 그녀에게 말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평범이만 브레이크가 고장난 벤츠인 윤시아를 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원인은 바로 평범이에게 있었다. 그녀는 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했을까? 윤시아는 천재라는 점에서 이미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스터한 상태이다. 게다가 고2에 명문대 면접만 가면 붙을 운명이다.

 

그녀는 사실 명문고 대신 국립고로 선택하고, 대학에 일찍 가기보단 평범한 여학생으로 위치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학년 1위에 어려운 외국학회 영문논문까지 독파하여 이해하는 그녀에게 보통 사람에게는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 그런 그녀에게 평범이는 절교를 선언했다. 결국 그 절교선언이 2주 후의 불붙은 화약고처럼 터진 것이다.

 

평범이와 윤시아는 본래 15년 지기 소꿉친구이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서로 잘 어울렸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오랜 친구에게 크나큰 벽을 느낀다. 평범이는 자신의 이름도 거론할 것도 없이 그저 윤시아의 친구로 남았을 뿐이다. 그에게 윤시아란 머나먼 왕국에 살고 있는 완벽한 공주였다. 윤시아 앞에서는 초라한 자신이기에 그는 언제나 윤시아 앞에서 주눅이 들고 수동적 존재로 살아간다.

 

그래서 그것을 견디지 못해 절교선언했으나, 윤시아에게 친구는 오로지 평범이만 있었다. 그것도 자신을 유일하게 천재소녀 윤시아라기 보다는 천재소녀인 윤시아로 말이다. 사실 윤시아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인간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상이한 존재에 대해서는 배척하며, 자신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 대해 질투를 한다. 게다가 그 질투의 대상이 완벽한 조건을 가지게 되면 될수록이다.

 

엘리트의 존재는 결국 보통 사람들과 괴리감을 주게 되어 엘리트끼리 뭉치게 되는 경향이 있으나, 그 엘리트 사이조차도 분류가 생성되면 다시 외면을 당한다. 그런 소외의식을 느끼는 존재가 윤시아이었다. 물론 절교 선언에 대한 취소와 영원히 그런 잔인한 말을 하지 않겠다는 평범이의 말에 문제는 해결되지만, 평소에 하지 않을 담배와 술까지 도전한 윤시아의 모습을 본다면 그녀의 마음은 심하게 상처받은 것이다.

 

평범이의 한달 용돈이 든 지갑을 다 날려버리고, 게다가 술도 못 마시면서 술에 취해 평범이의 등에 업혀 집에 가는 윤시아는 눈물을 보이며 내 곁에 떠나지 말라고 버리지 말라고 한다. 평범이는 윤시아에 대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태도보단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무의식적 행동과 감성적인 태도로 대한다. 그런데 이것이 후에 전학온 최수정이란 여학생에게 큰 위안감이 된다.

 

사실 최수정이란 여학생 역시 천재이다. 그녀는 전학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학년 2위로 차지한다. 그녀는 천재적인 요소로 윤시아와 친해지게 된다. 그러나 다른 인간과 친해지기 어렵게 된다. 그녀 역시 지나친 능력을 가진 탓에 주변 인간들에게 미움을 산다. 더 후에 나타나는 이유리 역시 가시를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와 같은 행동을 보인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천재라는 좋은 칭호만큼 외로움과 배타적인 인간관계에 당해야 했다.

 

이 중에서 최수정은 윤시아와 친해지면서 평범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 역시 친구가 없는 점에서 윤시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그리고 윤시아가 평범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평범이와 친해지게 된다. 그녀는 평범이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평범이가 윤시아에게 하는 것과 같이 해줄 것이라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시아가 자신이 어떤 존재에 상관없이 언제나 친구로서 대해주는 평범이를 원하는 것처럼 최수정 역시 윤시아와 같은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하는 것에서 비로소 인간적인 관계가 성립하는 말이 여기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 최수정이기에 평범이의 태도는 확실히 최수정에게 큰 위안이 되기도 하나, 그런 평범이의 이해타산적이지 못한 인간관계로 자신의 어둠에 이끌어가게 한다. 평범이는 자신이 최수정의 어둠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수정을 괴롭히는 동네 일진에게 달려든다. 어떻게 보다면 이성적이거나 논리적이라는 의미는 자신의 이익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사실 싸움기술을 본다면 평범이 옆의 윤시아가 월등했으나 평범이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일진과 싸웠다. 게다가 싸움은 윤시아가 월등해도 윤시아를 지켜주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평범이는 일진에게 얻어맞아 온몸에 타박상을 입어 싸움이 끝난 후에는 기절하여 병원에 입원을 했고, 그 남은 일진을 정리한 것은 윤시아였다. 처음부터 윤시아는 자신이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으나 앞뒤 없이 뛰쳐나간 평범이를 보면서 그가 친구라는 사실을 행복해 하였다.

 

이 작품을 보면 사실 가장 평범한 사람이 가장 강할 수가 있고, 가장 강력한 사람이 약할 수 있다. 윤시아 앞에서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평범이, 가끔 그런 평범이의 말과 태도에 상처받는 윤시아, 그런 2사람의 사이를 보고 부러워하는 최수정, 평범이가 마치 어린 시절 윤시아처럼 보이는 이유리, “그녀는 천재다” 1권에서는 평범이는 분명 이 천재소녀 앞에서는 상당히 벅찬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자신이 너무 평범하여 때로는 좌절하기도 때로는 그냥 당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인간에겐 지능과 두뇌에는 천재는 있어도 친구간의 우정과 사랑에는 천재는 없다. 또한 자기들과 전혀 다른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과 그렇게 집단적으로 따돌림이나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천재는 없다. 너무 평범한 평범이가 때로는 평범 이상으로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주나 그 평범한 바보의 진실 앞에는 천재들은 천재로 평범이를 대하는 것이 친구로서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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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 -상 - 2월혁명의 발발과 이중권력의 수립
레온 트로츠키 지음, 최규진 옮김 / 풀무질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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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읽어본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란 소설은 무척이나 인상이 깊었다. 동물농장이란 소설에서 모든 동물이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처럼 서로 대화도 하고 소통을 하고 사회를 조직하고 이른바 국가체계까지 발달한다. 멍청한 주인의 무능력한 농장운영에 분노를 이기지 못해 봉기를 일으키는 모습에서 이것이야 말로 러시아 혁명을 비꼬는 하나의 풍자로 보였다.

 

그런 러시아혁명의 중심이 되던 인물은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정신을 승계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소비에트의 기본인 볼셰비키당을 건국하였고, 그의 목표는 불운하면서 어리석은 동물농장의 주인인 차르왕국을 영원히 업소중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동물농장처럼 늙은 돼지 메이저는 이미 죽어버렸으나, 영원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아버지로서 나타난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의 돼지 얼굴은 나폴레옹이란 난폭한 돼지에 의해 어설프게 선전에 사용된다. 그것은 마치 스탈린과 북한 괴뢰정부를 만든 반파시스트로 위장한 파시스트들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름을 팔아먹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현재 병행하여 같이 읽고 있는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이런 문구가 살짝 생각난다. 사회(민주공화)주의 혁명에서 왜 진정한 사회(민주공화)주의로 갈 수 없는 이유는 그 사회가 노동자와 농민이 억압당하는 사회가 보통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일 경우 경제적 낙후와 제3세계라는 점에서 기존 강대국에 의해 착취를 당해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사회주의적인 이념으로 운동해도 결국 그것이 민족주의로 연결될 수 없음을 말이다.

 

그들의 나라를 구하는 방법은 초기에는 진보적이나 보수적으로 전환할 수 없는 이유는 복잡한 세계정세에 살아남아야 하는 점, 국민 대부분들이 지금 현재 어려운 실태에 대한 대응이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악독한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혁명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공화적인 국가로 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을 본다면 러시아의 혁명은 너무 낙후된 국가경제와 사회, 게다가 1905년 1월에 발발한 피의 일요일 전후로 러일전쟁이 있었다.

 

러일전쟁에 러시아의 패배, 그리고 그 뒤의 차르정권의 무능함과 부패함은 러시아 국민에게 절대적인 불만을 사게 했다. 그런 와중 국민들은 비극적인 피의 일요일 당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평화시위를 벌였으나 국가권력에 의한 잔인한 대학살로 마감한다. 러시아의 제1의 혁명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제2의 혁명인 1917년 2월 혁명은 새로운 계기로 이어진다.

 

바로 그 피의 일요일에 시작된 러시아의 숨은 군중들의 분노와 자유가 터진 2월 혁명 그 자리를 계속 지켜보던 레온 트로츠키가 적어내린 것이 러시아 혁명사이다. 이 책 표지에 걸린 레온 트로츠키와 주변에 있는 볼셰비키 요원 속에서 조지 오웰 문학소설 동물농장의 스노볼은 그야말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운다. 사실 레온 트로츠키 사진을 이 책의 흑백으로 보는 순간 나는 당황했다.

 

그의 모습은 수염과 흰 머리로 이미 나이가 많이 찬 노인이었으나, 그의 눈빛은 그 어떤 청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이 나고, 당장이라도 ‘나는 앞으로 뛰어 가겠노라’라는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눈빛을 가진 만큼 그의 인생은 과연 그러하다. 1929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1940년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고향에서 아주 떨어진 멕시코에서 살해당할 때까지 그의 혁명적인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스탈린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과 마르크스의 제1의 인터내셔널, 엥겔스의 제2의 인터내셔널 , 레닌의 제3의 인터내셔널이 그리고 스탈린의 의해 와해된 제3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제4의 인터내셔널을 수록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동물농장”을 읽다보면 스탈린의 돼지화신인 나폴레옹은 자기 농장의 동물들에게 평등을 외치나 그들에게 오히려 가중된 노동과 가혹한 전제주의적인 경찰국가를 수립한다.

 

사실 차르에 의한 러시아조차도 무능한 차르와 주변에 있는 빈대 같은 악랄한 정부 관료들이 국민들을 억압하고 감시하기 위해 경찰국가 체계와 더불어 비밀경찰을 투입한다. 게다가 비밀경찰이 볼셰비키에 잠입하여 보고할 정도이니 얼마나 정부의 무능함을 상기했을까? 그런 러시아에서 트로츠키가 보고자 하는 러시아 혁명은 매우 독특하다. 이 혁명의 주체는 볼셰비키가 아니라 농민과 노동자였다.

 

볼셰비키의 역할은 그저 작은 화약에 불과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 현실을 알리는 선전가요, 협의주체였다. 하지만 혁명은 그들에 의해 발발한 것이 아니다. 차르 왕조의 알렉산드로 3세는 무기력하고 감흥 없는 무감정의 왕이었다. 따분한 일과와 그저 평온함을 추구한 이 어리석은 차르는 사이비종교에 빠지고 점술에 의지했다. 특히나 러시아 벌판에서 찾아온 수도승 라푸스틴에게 의지한 모습은 그야말로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어리석은 바보와 같았다.

 

라푸스틴에게 의지만 하면 권력은 금방이라도 떨어졌다. 사기꾼들이 법무부와 각종 정치 조직의 고위 관료 직을 차지했다. 신앙심조차도 없는 러시아 종교인들조차 러시아 정교회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허울 좋은 자리에 의지해 자기 잇속만 채웠다. 이런 공간에 국민들은 배고픔과 추위에 괴로워했다. 식량과 연료가 없는 국민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분노였다.

 

공장은 파업으로 치닫고,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던 어머니들도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어느 순간 여성들 그 자체가 혁명의 중심부였다. 기억나는 장면은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 심한 슬픔과 고통을 받은 병사에게 여성들은 어머니요, 애인이요, 여동생이요, 아내였다. 병사들의 총구에 하나의 꽃을 피우게 한 것이다.

전쟁에 끌려간 그들은 다른 동맹국을 위한 방매막이와 총알막이가 되어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전쟁터에 갈 때 그들이 정확한 정보작전이 아닌 그저 무능한 이동이 얼만지, 저녁에 밥을 얼마나 주지 않았는지 세고 있었다. 신발은 굽도 없고 의복만 부실하였으며, 그런 무능한 장교로 인해 수백만에 이르는 러시아 청년들이 비명횡사했다. 그들이 가고 싶은 곳은 오로지 따뜻한 가족이 있는 집이었다.

그들은 죽기보다는 살아 있기를 바랐다. 죽기 위해 총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런 병사들이 처음에 구속을 당했으나 노동자와 농민들과 합류했고, 거기엔 마음의 안식을 주던 여성들이 있었다. 추위와 배고픔을 지나 이제 죽음 앞에 저항하기 위해 이들은 1917년 2월 혁명의 소용돌이로 흘러간다. 이런 모습을 레온 트로츠키는 거대한 서사 속에서 등장하는 영웅적 주인공이 이 혁명의 주인공이 아니라 이름도 모를 저 평범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라며 이 책을 적은 것이다.

 

물론 이 후에 중간에서 차르에게 손을 던지고, 볼셰비키에게 손을 넌지시 던지는 간활한 자들이 있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소비에트 체계는 러시아의 모든 것을 결정한 기관이었다. 문제는 1924년 레닌의 죽음과 더불어 트로츠키의 정치적 몰락과 망명이 큰 타격이었다. 전에 읽어본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에서 그 당시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러시아는 살아있는 인간들의 공간인 이유가 분명했다.

 

하지만 발터 벤야민이 독일로 돌아가고, 트로츠키가 쫓겨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발터 벤야민은 독일 나치즘에 대한 저항 심리와 우울함으로 자살을 택한다. 그래도 적어도 발터 벤야민이 바라본 모스크바는 그야말로 인간이 살아있던 공간이다. 작은 시장 길에 수많은 행상들, 공연장에 많은 사람들, 발터 벤야민이 좋아하던 러시아 인형, 그리고 그가 혼자서 열령히 흠모하던 지적인 여성 아샤, 그런 모스크바의 일기들은 트로츠키의 몰락으로 끝나 버린다.

 

그렇게 아쉽게도 그의 추방과 망명에서 러시아의 자유는 검게 물들어 갔으나, 그가 하고자 했던 일들은 결코 헛된 일들은 아니었다. 비로 그가 이상주의적인 모습이라고 하여도 그의 이상적인 모습은 현실에서 도피한 이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바꾸자 하는 이상이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나폴레옹이란 돼지가 있어서 러시아혁명 이후 스탈린체계에 대한 풍자만을 다룬 작품은 아니다.

 

진심으로 그 작품은 트로츠키를 내쳐버린 러시아와 더불어 트로츠키가 바꾸고 싶은 그 세상마저도 풍자한 작품이다. 마지막에 왜 돼지인 나폴레옹은 4발이면서 2발로 서서 인간의 옷을 입고 옆 동네 농장들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었을까? 왜 나폴레옹과 같이 술을 마시던 농장 주인들은 인간이면서도 영화 동물농장의 암캐의 눈에 돼지처럼 보였을까? 돼지처럼 변한 인간, 인간처럼 행동하는 돼지는 마지막 장면에 모두 사라졌으나, 희망은 아직 존재한다고 한다. 트로츠키는 죽었을망정 트로츠키가 추구하던 가치관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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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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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니체의 서적은 읽는 그 순간만큼은 곤란하지 않으나, 그 순간이 지난 다음 순간, 또 이후의 순간이 연결되면 상당히 곤란해지기 시작한다. 뭔가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하다가 마치 다른 이야기로 빠지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또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책의 역자인 김정현 교수의 이야기처럼 니체는 자신의 도서들은 10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인정받을 것처럼 니체가 작고한지 112년 지난 이후 니체는 분명히 큰 영향은 주고 있으나, 그런다고 하여 그렇게 쉽게만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다.

 

 

전에 읽어보았던 비극의 탄생과 반사회적고찰은 어느 정도 공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쉬운 도서는 아니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예술관으로 통해 그리스의 그 웅장하고도 진실한 문화를 찬양했다. 반사회적고찰에서는 독일(당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에서 독일이 이겼다고 거기에 대한 자국민들의 광기에 넘치고 자만에 빠진 황홀에 대해 비판했다.

 

 

도대체가 니체라는 사람은 보통 사람이라는 존재에 대해 가지는 인식 내지 사고구조에 대해 무척이나 비판을 가했다. 심지어는 그 보통 사람에 지나 유명한 인물이나 철학자에 대해서 심하게 비판한다. 그의 비판적인 어조는 상당히 황당하고도 놀라웠다. 독일의 관념철학만 아니라 세계 철학사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인 임마누엘 칸트와 합리주의의 기여자이며 이성에 대한 이원론적인 체계를 확립한 데카르트를 아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우습게 보는 시야가 그렇게만 틀렸다고 그런다고 맞다고 여기기에도 난감하다는 점이다. 전에 다른 철학도서에서 니체에 대한 내용을 봤는데, 니체주의는 자신이 니체주의라는 것에서 벗어나야 니체주의라는 것이다. 과연 그의 책들은 기존의 가진 모든 생각을 버려야지 가능하고, 심지어 버려서 니체의 말에만 따라가도 버림을 당한다.

 

 

니체의 철학도서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로 통해 말하고 싶은 말들을 보면 처음에 차라투스트라가 어리석음에 흥겨워하는 사람들을 선도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느 순간 자신을 따라오는 많은 무리를 모두 내쫓아 내려고 한다. 도대체 그는 자신의 사고를 맞다고 하는 것인가? 틀렸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단순히 맞다와 틀렸다는 아닌 그 이상의 이야기를 넣고자 하는 것일까?

 

 

이번에 읽은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는 역자 후기처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대한 또 다른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책을 읽는 중간에 차라투스트라의 등장을 암시하는 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신은 죽었다는 것처럼 신을 부정하고, 신을 부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가 강력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모이는 곳일수록 니체는 그곳을 진리나 인간의 도리가 있기 보다는 인간을 망치는 곳으로 보았다. “선악의 저편”에 <만인이 좋아하는 책에서는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난다: 거기에는 소인(小人)의 냄새가 베여 있는 것이다. 대중이 먹고 마시는 곳에서는, 심지어 그들이 숭배하는 곳에서조차 악취가 나곤 한다.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면 교회에 가서는 안 된다.>

 

 

사실 이 부분에 강렬한 충격적인 발언을 니체가 가한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기독교의 부정은 곧 자신의 입지마저 꺾을 수 있는 위험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 “도덕의 계보”에 보이다시피 교회가 주도한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이 보인다. 마녀사냥이란 광기는 결국 종교적인 부패에 의해서이다. 그러한 광기의 축제 속에 현명한 재판관은 제대로 판결하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 마녀사냥 당하는 존재마저 거기에 동조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분을 넘어 제대로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도덕이란 단어와 윤리라는 단어에 대해 전에 나는 다소 혼돈을 가졌다. 윤리(倫理)와 도덕(道德)하면 왠지 서로 비슷하고 유사한 의미를 내포하지 않은가? 아니라면 우리 같은 일반 한국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우는 도덕이나 윤리라는 과목조차 듣지 아니한가?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 도덕이란 어느 특정한 시기와 공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고 한다면, 윤리는 어느 특정한 시기나 공간이 아닌 전 세계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나 사고관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은 다른 존재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제1의 철학은 윤리학이란 말을 했듯이 윤리라는 개념은 철학에 가까운 개념으로 본다. 그렇다면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은 철학적인 영역보다는 철학이 아닌 그저 강제적인 인간의 관념에 가깝다는 의미가 아닐까? 다시 니체의 서적으로 돌아가서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 나온 아포리즘의 문구에서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다. - 그러나 집단, 당파, 민족, 시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다.>이라든지 <우리의 가장 강항 충동, 우리 안의 있는 폭군에게는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우리의 양심도 굴복하게 된다.>와 같이 말이다.

 

 

우리 인간들은 집단이란 광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광기는 윤리의식이나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이미 없다. 단지 절대적인 다수의 논리로서 진리로 받아들인다. 진리라는 것이 진리가 아닌 하나의 집단의 무기가 되는 순간 전체주의적인 조건으로 변모된다. 그러나 그런 것이 당연시 되는 것이 예나 지금의 모습이다. 니체는 100년 후의 인간에게 공감이 가는 것이라 1,000년도 넘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런 인간의 집단적 광기는 이미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룩하면서부터 시작된 하나의 잔혹한 축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광기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언의 약속이라는 강항 충동이 있기에 이성만이 아니라 양심마저 내다 버린다. 그것은 인간들은 자신의 눈앞에 불타고 있는 마녀 앞에서 동정의 눈물을 흘리기보다는 분노의 저주를 퍼붓고 있다. 단지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다음 불의 정화의식은 자기 차례인 것을 말이다.

 

 

따라서 니체는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가지는 사고방식에 대해 무척이나 경계한다. 그 중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이성이라는 관념일 것이다. 자신들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므로 절대적인 영역을 제시하고 있는 하나의 선이라는 전제를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면을 인정하더라도 왜 인간들은 계속 타락을 하고 있는가?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플라톤과 이후의 기독교의 교부철학이 과연 인간에게 좋은 삶과 진리를 주고 있는가?

 

 

플라톤 자신에 대한 논리라면 좋을지 몰라도 후세는 그렇게 플라톤처럼 될 수는 없다. 아니라면 기독교가 가진 그런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오히려 인간을 망치고 타락하게 되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얼마 전에 읽어보았던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생각난다. “감시와 처벌”에서 인간에게 하나의 죄의식을 옭아놓아 인간 자신의 죄를 지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죄를 갚기 위해서 구속당하는 것이 당연시 하는 체계적인 인간조작, 더 심각한 사실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조차 못하는 인간의 사고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에서 인간의 자유란 과연 그 위대하다는 자유가 어디까지 논하고 생각해봐야 하는가? 그저 나는 자유롭다고 여기면 자유인가? 그 자유마저도 억압인데도 그것이 하나의 자유라는 관념으로 가득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선악의 저편” 각주에 나온 어느 단두대에 자신이 이슬로 변하게 프랑스 롤랑이란 부인의 외침인 <자유여, 당신의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졌는가!>처럼 인간이 말하고자 하는 그 자유 역시 광기에 차버린 하나의 행위가 아닐까?

 

 

인간은 항상 자신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과연 당연한 것인가? 라고 의문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가령 내가 오늘 배가 고파서 밥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데, 그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는 자체가 오히려 이상해 보이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인간의 의식구조는 물과 음식을 먹어야 하는 동물적인 인간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비교하기를 단지 상식적으로 보기엔 너무 물과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어렵게 보일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고, 다르게 보자면 물과 음식은 눈으로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항상 가지고 있는 이성이란 관념은 물과 음식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잠을 자지 않고 마음만 먹는다면 계속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의문을 품는 것이 어려울까? 정해진 양만 채울 수 있으며 눈에 보이는 물과 음식일까? 눈에 보이지 않은 인간의 이성과 그 사고관념일까? 차라리 후자 편이 더 위험해 보이지 않을런가? 물은 썩으면 뱉으면 되고, 음식이 상하면 토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과 사고는 뱉을 수도 토할 수도 없다. 도리어 그것이 인간의 속박하니 선악이란 존재는 정확한 인간의 윤리의식보다는 단지 도덕이란 사회적인 흐름, 그것도 광기어린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선악의 저편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 것이며, 도덕의 계보를 잡아내어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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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공부중 2013-10-1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너무 잘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