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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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의 주인 여러분, 당신들에게 다스려야 할 하급 동물들이 있다면, 우리 인간들에겐 다스려야 할 하층 계급들이 있습니다”. 이 <명언>에 온 좌중이 함성을 질렀다. 필킹턴 씨는 다시 한번, 동물농장이 식량 분배는 줄이면서 노동시간을 늘린 것을 축하하고 그가 본 대로 이 농장에는 동물들이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축하했다.

위에 적힌 긴 문장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적힌 결론부의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에 흔히 반공사상(反共思想)이라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 과거 실패하고 돌아오면 안 될 소비에트 연방의 문제를 거론이란 점이다. 전에 다른 책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틀린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물론 그런 최후의 일격은 20C 말에 다가오는 쯤에 동독이 서독에 의한 흡수통일,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한 역사적인 기념일이다.

그런다고 이런 승리를 누린 자본주의(資本主義) 역시 승리자인가?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공산주의(共産主義)도 자본주의 모두 패배자이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표방한 소비에트 독재자(獨裁者) 스탈린을 연상케 하는 돼지 나폴레옹의 폭력정치(暴力政治)와 또한 대표적인 자본주의국가인 영국을 상징하는 필킹턴 씨의 최후의 이야기들이다. 늙은 암말인 클로버는 앞 눈이 침침하나 동물농장의 주인인 나폴레옹과 필킹턴의 카드놀이에서 마치 비웃는 듯한 느낌이 살아있다.

인간이나 돼지나 모두 똑같았다. 그들은 서로 스페이스 카드만 내밀고 있었다. 사실 소련은 공산주의라고 하나 그것은 허구적인 공산주의이고, 국가자본주의였다. 해설에도 나오지만, 이제 막 죽기 일보직전이 늙은 돼지인 메이저는 영락할 것도 보이지 않은 듯 칼 마르크스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과 공산주의 선언으로 통해 노동자의 인권(人權)을 보장해 보려 했다. 물론 그의 진정한 의도는 훌륭했으나, 문제는 그의 생각은 어느 순간 변질되어 버린 사상이 되었다. 바로 스탈린 같은 폭력적인 독재자 돼지 나폴레옹 때문이었다.

또한 동물농장의 배경이 아일랜드의 점도 중요하다. 아일랜드 사실 영국에 의해 압박받던 곳이다. 게다가 아일랜드 역시 영국에 의해 각종 잘못된 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공간적으로 영국과 밀접한 장소, 그리고 영국은 마르크스가 최후의 임종을 지킨 곳이다. 단지 분명한 사실은 영국에서나 혹은 기존 유럽국가에서는 노동자의 착취가 상당했다는 점이다. 갖은 고역, 비위생적인 음식과 생활, 비인간적 대우 등 그래서 이 소설에서 혁명은 당연한 역사적인 과정을 인증한다.

그러나 혁명은 하나의 과정에 불과했다. 하나의 거대한 서사가 이루고 나면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서사가 흐른다. 메이저의 죽음과 맞바꿈 정신은 결국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갈등으로 인해 파탄난다. 스탈린이 스노빌같은 트로츠키를 몰아낸 것처럼 여기서 스노블은 나폴레옹의 충실한 견공들의 위력에 쫓겨난다. 그리고 평생을 동물농장에 나타나지 않으나, 무슨 일인지도 몰라도 스노빌의 유령은 다시 나타난다. 또한 거기에 메이저의 유령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 유령은 결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고, 그 누구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으나 돼지의 군주인 나폴레옹을 그들의 유령을 계속 생산하고 또 생산하여 하나의 거대한 악으로 구축했다. 이것은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희생양을 내듯이 말이다. 문제는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숨기려 해도 그 문제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농장은 갖은 가난과 추위 그리고 빈곤과 차별에 시달린다.

평등을 중시한 동물농장이 어느 특정대상을 평등을 중시했다. 어긋난 소비에트를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웃기게도 조지 오웰은 그들의 공산주의를 비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도 비웃었다. 영국이란 국가는 과거 식민지 활동과 더불어 제국주의(帝國主義)적인 면을 나두고도 민주주의 틀에서 과거의 수탈범죄를 감추려 했다. 그렇다면 동물농장에서 비웃고 비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크게 세계적으로 2원화된 정치·군사·외교적인 대립이었다. 그 대립에서는 서로들은 자국민들, 즉 많은 대다수의 약자 편이라 외치나 그 실상은 서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순수한 영혼을 악령(惡靈)으로 변모하고, 악령 그 자체는 성령(聖靈)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도 그런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세상이어도 그 체계는 잘 굴러가고 있었다.

순진하다고 소문난 동물인 양은 처음에 “네발은 좋고, 두발은 나쁘다”라고 하여 정치적인 선전에 아무런 비판 없이 흘러간다. 그런데 나중에 “두발은 좋고, 네발은 나쁘다”고 한다. 그 네발에서 두발로 된 존재는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돼지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가식적이다. 두발로 서는 인간을 혐오하다 결국 자신들이 두발을 가지고, 옆 동네 농장주와 맥주를 마신다.

게다가 많은 동물들은 나폴레옹의 수하 돼지 스퀄러의 말을 모두 믿었다. 거짓된 통계와 홍보 그리고 음모까지, 이 모든 것을 본다면 조지 오웰은 무비판적인 대중들에 향한 비판의식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은 대중들만큼 지식인에 대한 비판도 개의치 않은 듯하다. 돼지들은 모두 이렇게 명분을 댄다. 모두 여러분들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이런 문구는 당시 조지 오웰이나 현재 세계 어디에서의 거짓된 정치가(政治家)들이 많이 사용하는 단어다. 어떻게 본다면 정치체제는 단순히 겉모습일 뿐인지 모른다. 단지 그 체제 속에서 어떻게 해가는 것인가이다. 아니라면 단순히 흑백논리(黑白論理) 이원화(二元化)적인 사고로 통해 이념적(理念的) 대립(對立)을 외치며 정작 중요한 숙제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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