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사 - 단군에서 김두한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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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역사를 보자고 한다면 분명 고조선 단군시대부터 시작하려 할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문명 이전의 미개사회인 구석기 내지 신석기가 정답일 것이다. 그것은 신화의 시작점인 단군시대인가? 아니면 신화도 없는 미개사회인가이다. 문명화된 사회에는 신화라는 미개적인 이야기가 사라질 것이라 보이나, 오히려 신화는 문명화되면 될수록 가속화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다양함과 시대의 복잡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다양한 욕망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에 한국역사를 고조선 시대가 아닌 최근 몇 년 내지 몇 십 년으로 잡으면 어떨까나? 참으로 역사공부를 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계를 돌려서 가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것 역시 역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사람은 제일 최근의 일들을 기억하는 존재이지 몇 십 년 전이나 혹은 그 이전의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특히나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들을 찾는 것은 오직 죽은 인간들이 남긴 자료에 의해 분석한다.

 

그래서인가? 역사라는 학문에는 만약이란 단어가 없다. 그것도 아니 만약조차도 나갈 수 없는 것이 역사다. 하지만 최근에 대체역사라는 드라마 내지 소설, 영화까지 존재하므로 인간의 욕망은 역사조차도 바꾸고 싶어 한다. 단지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나 그 자체에서 발생한 이야기들은 수많은 신화로 남을 것이다. 역사와 신화는 다른 존재이나 신화 속에서도 역사가 보이고, 역사 속에서도 신화가 보인다.

 

생각해보자? 우리나라 기원은 서기 전 2,333년이고, 그곳의 군주는 단군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신화 속의 인물인데도 우리에겐 역사의 시초다. 그러면 그는 역사적인 인물인가? 신화 속의 인물인가? 그래도 그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역사라는 것이나 혹은 신화라는 것은 몇 년이 지나도 계속 돌고 돌아가는 하나의 공전과 같은 공식이다.

 

인간은 천동설적 존재가 아니라 지동설적인 존재이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역사라는 것을 찾아가면 그 이전을 찾아가고, 이전의 이야기를 다시 잡으면 다시 그 이전과 이전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지금 우리나라 모습에서 조선 후기와 관계있다는 것을 인지하면 당연한 논리다. 왜냐하면 조선 최초 불평등 조약 강화도조약이 일어난 배경은 천주교탄압과 서구배척, 일본의 대륙진출이란 야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라는 것은 결국 이런 모든 인자들 속에서 이루어져 흘러갈지도 모른다. 적어도 역사학자 내지 고고학자가 아닌 일반인이 보기에는 역사란 인간이 적어갈 흔적이다. 단지 그 흔적은 아쉬운 기분이 들지만 정치적인 상황의 정리본이란 점이다. 우리 역사책에 어느 동네 할아버지가 가다가 수박밭을 보고 수박이 너무 탐스러워 수박 하나를 잘라 먹는 일들은 역사에 올라가지 않는다.

 

역사에서 주로 크고 굵직하고 인간사회에 큰 영향 내지 전환을 일으킨 일들이 대부분 실린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개인 이상의 사회 내지 국가단위의 큰 정치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역사를 제대로 본다는 것은 현 시점에 설아 가는 인간에게 정치적인 해석을 키워줄 수 있다. 혹은 정치사상 도서를 보더라도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고대그리스 철학자, 그리고 그들이 살아간 폴리스국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역사는 특별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영향력이 지금도 현대사회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하여 일반 소시민들이 역사의 주인공에서 소외될 수는 없다. 우리가 역사에서 소외되기 보다는 우리가 역사를 알고 그 역사를 적어가는 주체로는 성장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홍구 교수의 대한민국史는 지금 살아가는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일 최근의 역사를 적어놓았기 때이다. 그것도 중간이 아니라 머리 처음부터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잘못된 역사 관념과 독단에 빠진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권력의 주체는 국가와 사회이다. 사회의 많은 조직인 학교, 직장, 군대, 공장, 법률 등 다양한 제도와 사회적인 여파로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 움직인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는 필수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은 어쩔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가 되기보다는 스스로 판단하고 있다는 사고에 머물 수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여 한홍구 교수는 이 책을 적은 것 같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유일하게 분단국가이다. 독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독인들은 서독인들과 만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백화점에 가서 상품을 사고, 성적인 욕망을 채운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소비욕구와 더불어 인간의 억압에는 성적 억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본주의국가이면서 민주주의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과연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자유롭고 자기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위에서 말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정말 제대로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깨어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칸트가 인간의 이성에 대해 깊이 통찰한 순수이성비판처럼 인간의 자기의 절대적인 진리 즉 Dogmatism이란 교조주의에 매달려 있다. 오히려 이런 교조주의적인 요소가 대한민국 역사 중에서 근현대역사의 필수본이다.

 

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김근태 고문후유증, 부천 성고문이 일어나고도 그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는가? 결국 인간의 폭력과 상스러움을 그대로 미화시키는 파시즘적인 요소가 다분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끊이지 않은 지난날의 악몽과 영광이 있었다. 우리에게는 영광이나 그들에겐 영광이었다. 왜냐하면 억압된 대중일수록 권세가들에겐 부와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런 과정을 낱낱이 파고들어가려 한다.

 

다소 내용은 진보적이기도 하나, 때로는 진보의 뒤통수를 날리기도 한다. 그 이유는 이른바 민족주의적인 한국사회의 일면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가 독립군 노선의 정신이기도 하였으나, 때로는 친일파들이 군부독재 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인증하기 위한 묘안이었고, 최근에는 국민단결과 화합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점은 인간이 이런 사고에 젖는 것에 대해 당시 본인들은 알지 못한다.

 

당연히 그들은 옳은 일이며 절대적인 진리이다. 그런 점들이 지금 우리에게 난항을 주고 있다. 특히나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많은 과오도 있지만, 그에 비해 우리 역시 베트남 사람에 저지른 범죄는 감추고 있다. 물론 그런 짓을 하게 한 존재는 극우주의자들의 방법이나 이제는 범죄를 저지른 공모자는 뒤로 빠지고 허울 좋은 명분이 남아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있다. 마치 잘못은 정치가들이 하는데 그 분노의 시위를 죄 없는 의경들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절대적인 믿음과 광기는 결국 하나의 종교적인 주술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막대하다. 그 에너지의 분출구에서는 항상 자신들의 정당성을 찾기를 바란다. 그래서 언제나 희생자란 존재가 필요하다. 자신의 의견을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세력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짓눌러야 하나의 정치적인 헤게모니라는 정당성을 발휘한다. 특히 그것이 대규모적이고 폭력적이고 과격해질수록 더욱 가속화된다.

 

이 책에서는 과거 일본군들이 독립군에게 저지른 일들을 그대로 따라하는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이지 않은가?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가 이제는 좌우이데올로기까지 전환되어 결국 중요한 원점을 놓친 채 그저 조종석이 없는 배 한척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위에서 표류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표류하는 배일수록 광기와 집착을 강대하고, 거기에 메이는 인간들은 더욱 날뛰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많은 학살과 억압, 탄압들 그리고 그것을 뒤로 하여 몰래 이익을 챙기던 엘리트들, 적으로 봐야할 존재가 알고 보니 독립군이고, 국가적인 인물이 알고 보니 최악의 존재였다. 물론 그것은 누구의 눈인가? 누구의 입장에 따라 다르다. 단지 아쉬운 점은 당시 희생당하고 사라진 존재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은 유령이 되어 버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승자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에서 그토록 조선민중을 수탈한 중국장수가 당시 조선정부에는 최고의 영웅이었다. 밟히고 밟힌 조선민중은 결국 약자이었고, 게다가 글도 읽지도 보지도 못하니 영락없이 강자의 승리다.

 

권력의 구조에서 지식은 하나의 도구였고, 언어의 힘으로 권력을 명하기 때문에 지식의 존재 근원에서 언어와 문자는 결국 지배세력이 피지배세력을 잡는 것에 필요한 존재였다. 피비지배자 민중들은 문자와 언어의 이해가 없기에 사고와 사유의 힘은 무척이나 작았다. 단순한 이데올로기 하나만이 절대적 진리다. 지금도 운운되는 매카시즘은 625전쟁이 종결 된지 60년이 되어가는 이 마당에도 꽃피운다.

 

어느 특정세력 내지 의견에 조율하지 않으면 마녀사냥으로 몰아넣는 것은 그 만큼 지식에 대한 부재와 그 부재 속에서 맞은 해방, 그 후 반자발적인 정부조직이란 어두운 기억만이 우리의 그늘에서 살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지나간 일들을 배우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하나의 이벤트로 끝나지만, 이런 식의 일들은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지나간 것을 붙잡고 물어지는 것보다는 앞으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준비성이다.

 

이전에 왜 이런 일이 생기고, 누가 관여하였고,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당시 일이 끝나도 그것에 의해 피해보는 사람들은 계속 고통에 사무치고, 그 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여전히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솔직히 나는 대한민국 사회에 회의적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일이 가끔 터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일은 당시 침묵하고 외면하던 이들이 막상 일이 생기면 크게 분노한다.

 

분노하는 것은 좋고 잘못된 점을 개선하는 것을 고치면 좋다. 단지 아쉬운 일들은 그것을 넘어서고 나서의 후다. 이 책에선 임금의 목을 치지 않는 나라가 한국이라 한다. 인류학자 프레이저 경의 “황금가지”라는 서적을 보면 아버지와 같은 군왕, 부족장을 신으로 여긴다. 신은 자연과 같은 존재로 반드시 신은 늙으면 죽고 다시 태어난다. 이때 이 신의 부활을 위해 기존 부족장이나 왕의 목을 누가 친다. 그 치는 사람은 그 왕과 대결로 통해 승리로 통하여 모든 것을 바꾼다.

 

하지만 한국은 그 그늘 속에 있는 왕의 목을 치지 못했다. 치기도 전에 해방과 북한의 남침이 발생한 것이다. 지나간 일들을 청산하지 못한 것은 왕의 목을 치지 못한 황금가지 소유희망자이다. 앞으로 가지게 될 미래와 권리에서 과거를 빼지 못함은 결국 계속되는 왜곡과 모순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史에서는 이런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다.

 

몰랐던 사실이나 알았던 사실이나, 그것을 제대로 판단했는지 혹은 판단하지 못했는지, 그래도 이 책 전부가 옳다고는 할 수 없다. 단지 일어난 일 자체만은 사실이었고, 거기에 대한 비극은 현실이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되어 우리가 보기엔 부당하고 어긋나 있어도 당시 사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잘못된 일들을 묻어가는 것이 모든 해결방안이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고 판단해야만 역사라는 거대한 정치적 상황들이 정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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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 컬리지언총서 6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 이종태 옮김 / 이후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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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를 보고 있으면 이른바 탈(脫)정치 내지 탈(脫)이데올로기 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본다면 우리는 더욱 심각한 정치적인 영향 내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른 선험적 내지 경험적인 혜안을 실은 인문학 도서에서 많이 찾기도 하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더욱 난항한 방법으로 가고 있다.

 

가령 이전에 내가 본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의 대한 권리”를 읽어보자. 흔히 프랑스라고 한다면 자유, 평등, 인권을 중시한 나라에다가 철학과 예술의 파리도시를 꿈꾼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이나 혹은 알제리 내지 외국과 그 나라의 국민 또한 소수민족과 이방인들에게 펼친 파시즘적인 부분은 매우 끔찍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쟁취했다는 그 사실에 의한 탈파시즘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욱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파국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문제를 어떻게 우리는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은 끝났다. 프랑스에서는 독일군도 물러갔고,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독립 세력들은 정치에 대한 권리를 찾아 새로운 나라를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막상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라는 슬로건을 걸은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자유를 막는 억압과 사람을 차별화는 불평등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1960년대에 들어오게 되자 사회적 큰 변화를 주게 되었다. 그것은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이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파리에서 일어난 루이왕권의 몰락을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니 1776년 세계 최초 내지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는 미국 역시 자유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통한 억압의 시작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있을까?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 그리고 사회관계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하나의 관문을 넘어서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고방식이다. 어떻게 보자면 진보와 미래를 추구하는 시작이 이제는 극도의 보수와 폐쇄로 이어졌다.

 

생각해보자? 미국이란 나라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흑인들이 계속 인종차별로 노역에 시달리고, 밥 먹는 자리나 버스 타는 자리나 심지어 길 걸어가고 있는 보도가 아닌 차도에 걷도록 횡포를 당한다. 이런 나라에서 자유 내지 평등을 외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가치를 묻고 그들이 정당하다고 하는 게 과연 진정한 자유인가? 평등인가? 이런 문제들은 수시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 발현되고 있었다.

 

과연 인간의 관념 속에서 자유와 평등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지금 읽어본 <신좌파의 상상력>이란 도서는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좌파와 그리고 반대되던 우파를 넘어 좌우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인간의 근본에 대해 묻고 거기에 응답하고 많은 대학생, 노동자, 여성, 심지어 고등학생과 어린이까지 다양한 계층들이 자신의 인간존재성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민주사회 내지 자유사회, 그리고 평등적인 사회 관념을 배우는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는 묻혀진 이야기다. 사실 돌이켜본다면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집권하여 전쟁의 열기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와 독일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기울게 하여 국민들을 위기에 빠지게 하였고, 국민들이 1871년 2월 자발적인 정부를 세우려했는데, 프랑스 권력자들은 타국의 군인들을 내국으로 들여 파리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물론 1848년의 2월 혁명도 역시 많은 피와 희생이 있었으나, 진정한 시민이 주인이고, 진정한 정치참여권에 대한 의지는 여기서 부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쉽지도 않고 머나먼 길처럼 보였다. 사실 유럽의 근대사는 매우 어지러웠다. 많은 전쟁과 음모, 혁명, 개혁, 반정 등등 이 모든 것이 폭풍처럼 휘말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1차와 2차 대전 그 후에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까지 말이다.

 

사실 미소 냉전 시대에는 세계는 2원화적인 정치상황이라고 말하여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2가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배척당한다면, 그 배척을 받아들여 그것을 하나의 가치관으로 올린다면 상당한 전환점이 아닌가 싶다. 사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볼리비아 산악지방에서 가슴에 총알에 박힌 채 죽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 CIA의 명령받은 군조직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이래 생각할 것이다.

 

미국의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체 게바라의 죽음과 투쟁에서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이질감이 있었다. 오히려 소비에트 연방은 체 게바라가 제3세계의 독립과 민주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면 소비에트 연방은 피곤해질 뿐이다. 이미 두 강대국은 서로의 힘겨루기를 은연중에 인정하고, 힘을 나누어 기득세력이 이익을 누릴 하나의 진리 아닌 진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억압된 부분들은 세계 어디에 가도 존재했다.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오,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대한 억압이다. 이것에 분노하여 일어난 것이 프랑스 5월 혁명이다. 그것은 당시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이고, 외국인 차별에 대한 인종평등주의이며, 여성과 노동자 심지어 어린이까지 인권을 중시하는 운동이었다. 정치적인 이념노선을 떠나 인간 그 자체의 생존을 위해 모두 투쟁을 하였다.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과 낭테르 대학에서 모든 대학은 노동자에게 24시간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은 곧 지식과 권리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 가려는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열정이었다. 비록 혁명은 실패라고 하나 이듬해 드골정부는 실각하게 이르게 된다. 이런 운동은 1970년 미국에서 5월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는 나는 매우 친숙한 이름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은 미국의 언어학자이면서 세계 최고의 지식인(세계지식인지도 1장을 장식한) MIT공대 언어학과 교수 노암 촘스키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통킹만사건 조작(미군 스스로 통킹만 공작을 함에도 베트남이 했다고 하여 베트남을 침공하였으며, 후에 공작이란 사실이 폭로됨)과 동시에 전쟁으로 죄 없는 현지 국가의 인명과 자국의 군인까지 죽는다고 했다.

 

독재국가의 정치인에게 뒤에 몰래 군사자금과 무기를 제공하여 독재를 이어가게 하고, 그 독재자인 샤, 마르코스, 뒤발리에가 자국민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을 동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들이 벌인 레바논전쟁의 대학살은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영화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 바로 신좌파라는 존재는 기존의 구좌파를 벗어난 존재였으며, 오히려 구좌파와 대립을 하였다.

 

이런 점은 당시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을 주도하던 상황주의자들은 기존 체계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게 전문을 보내 그들마저 부정했다. 그들은 오로지 인간을 억압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거부는 기존의 세계에 가진 낡은 생각을 버리게 했다. 물론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들은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나처럼 타인들도 인권을 가진 존재로 평등해지기를 바란 것은 엄청난 파장이었다.

 

이른바 eros effect라는 삶에 대한 충만한 의지가 여기서 실현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열리는 우드스탁이란 대규모 락공연, 그리고 많은 저항문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잘 아는 불멸의 블루스락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도 그 반문화에서 자유와 생존에 대해 불을 붙인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모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사실 흑인들을 차별하던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춤과 노래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

 

춤과 노래를 하면 사람들이 서로 모이고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게 되는 교감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결국 신좌파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도 자유에 대한 열정을 다루고 있었다. 3.15부정선거에 대한 저항,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 지금도 저항은 일어나고 있으나, 조금 나는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와 약자에 대한 삶의 의지를 외쳤으나, 그런 사람들을 공격한 사람들이 룸펜 프롤레타리아 내지 그냥 프롤레타리아였다.

 

흑인들이 평등과 자유, 그리고 인권보장을 위해 인종차별 반대시위를 할 때 다른 흑인 노동자들이 와서 공격했다.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래도 억압받던 주체들은 자신들이 억압받는 사실이 당연하게 여기게 되던 헤게모니적인 상황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살아가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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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세상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사진집, 2단 접이 특수양장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학고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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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보고 싶은 사람도 보기 싫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언제나 내 곁이나 혹은 우리 곁에 또는 다른 사람의 곁이든, 그저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저 건강하게 지내기만 한다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귀하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정말 좋은가 안 좋은가를 알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아니라면 19C 독일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처럼 사람은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보다는 한 번 다투어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지 그 사람이 정말 친해질 수 있는지 아니면 친해질 수 없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사람이 다른 사람과 계속 친해질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해 계속 다툴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옆에서 혹은 멀리서 그가 다투는 모습만 봐도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안 좋은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그는 노무현이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노무현은 다양한 이름으로 담겨있다. 정치인, 사상가, 변호사, (좋거나 혹은 나쁜) 대통령 등등이다. 그래도 적어도 나라는 사람에게 노무현은 좋은 사람이다.


실제로 볼 수 없었으나, 그저 TV의 뉴스와 신문, 잡지 속의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그를 좋아한 이유는 그가 나를 위한 인간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인간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보다는 타인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점이다. 그러나 그 길은 순탄치 못한 가시밭길과 같은 고난이었다.


가난은 물론이오, 갖은 협박과 음모, 그리고 조작들 그 속에서 그의 인생은 신화와 같은 이야기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노무현의 신화는 화려한 이야기보다는 절망적이고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그의 신화는 영광과 성공보다는 좌절과 패배의 맛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좌절과 패배 뒤에서는 고통 받고 있는 약자들이 있었다.


그가 비극적인 신화의 주인공이도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그가 자신보다 더 어렵고 가난하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배운 게 없어서 백이 없어서 고통 받아본 사람은 그도 마찬가지이나, 그래도 노무현보다 더 가난하고 무식하고 힘없는 사람들은 너무 많았다.


공장에서 월급도 못 받고, 다쳐도 보상도 못 받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했는데 억지로 잡혀 들어가고, 그것도 부족해서 갖은 폭력과 성희롱, 협박과 공갈 이 모든 것이 노무현이 넘어가야할 신화 속의 고난이고 모험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화의 주인공처럼 그들을 위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조롱당하고 모욕당하고 때로는 진지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로 보면서 눈물도 흘러야 했다. 하지만 그런 모욕과 조롱을 받고 일어섬으로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르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모든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그가 탄핵당해도 그가 언론에 공격당해도 심지어 영혼이 신체에서 벗어나 한줌의 재로 변해도 말이다.


그의 죽음은 노무현의 이야기가 끝나고 노무현의 신화가 끝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죽음 앞에 있던 피눈물은 다시 신화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육체적 존재인 노무현은 1명일 줄은 모르나, 정신적 존재인 노무현은 1명이 아니라 끝없이 태어날 것이다.


그가 원하던 사람 사는 세상, 그것은 배운 것이 없고, 가난하여 생계에 시달리고, 아는 것이 없어서 무시당하고 냉대당하고, 힘이 없어서 부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이 꿈도 가진 채 희망을 품기를 원한 세상을 만들어갈 새로운 노무현을 말이다. 흔히들 인간이란 영혼을 가졌다는 관념 아래 정신적인 이성세계를 가졌다고 하여도 인간은 역시 마음을 가진 감정적인 동물인 것 같다.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 그의 얼굴이 마음속으로 이미지를 떠오려도 그래도 역시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이다. 어느 사람들은 웃기도 하고 어느 사람들은 울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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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 부드러운 열정, 세상을 품다
한명숙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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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C 독일에 위대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지닌 시인(詩人) 하인리히 하이네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는 많이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시는 너무나도 인상 깊고 잊을 수 없는 강한 메시지를 주었다. 그것은 “직조공(織造工)의 노래(歌)”였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침침한 눈에는 눈물이 말랐다. 그들은 베틀에 앉아서 이를 간다.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첫 번째 저주는 하느님에게, 추운 겨울에도 굶주리며 그에게 기도하였건만, 우리의 바람과 기다림은 헛되었다. 그는 우리를 원숭이처럼 놀리고, 조롱하고, 바보로 만들었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두 번째 저주는 국왕에게, 부자들을 위한 국왕에게, 우리의 비참한 삶을 본 체도 않고 우리를 협박하여 마지막 한 푼까지 앗아가고, 우리를 개처럼 쏴 죽이게 한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세 번째 저주는 잘못된 조국에게, 이 나라에는 오욕과 수치만이 판을 치고, 꽃이란 꽃은 피기도 전에 꺾이며, 모든 것이 썩어 문드러져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북은 나는 듯이 움직이고 베틀은 삐걱거리며, 우리는 밤낮으로 베를 짠다. 썩어빠진 독일이여, 우리는 너의 수의를 짠다. 우리는 그 속에 세 겹의 저주를 짜 넣는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우리는 철커덕거리며 베를 짠다.

 

읽어보면 그들의 원망과 분노, 한탄이 하늘 위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오늘 다시금 읽어보게 되었다. 그것은 한명숙씨가 노동가요 배포와 관련된 일로 구속을 당한 직후 심한 고문과 독방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다. 그때 공안경찰들이 와서 그녀를 잡아가게 만든 노래는 다음과 같다. 시와 노래는 비슷하니 그 음율적으로 흐르는 언어들은 인간의 마음에 와닿는다.

 

노동자가 얼마나 노동을 더 해야 살수 있나?

우리 모두 지금까지 피땀 흘려 일했는데 아~ 슬픈 현실,

지금까지 빼앗겼는데 계속해서 착취당하면,

노동자는 기계인가요? 느낀 것이 너무 많아요.

설움에 지쳐서 눈빛에 보여요. 내일의 찬란한 빛이.

 

당시의 노동자의 대우는 매우 혹독했다. 사실 한국 민주공화국이라면 당연히 인간은 인간답게 누리고 살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박탈당하고 억압당하고 위협당할 경우 이미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한명숙씨가 총리가 되기 전의 인사청문회의 질문이 정말 코미디와 같았다. 누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은 무슨 국가냐고? 그녀의 대답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질문자가 다른 코멘트를 추가한다. 자본주의국가입니다. 사실 자본주의국가 점에서 한국은 경제자유가 보장되어있는 자본주의국가는 맞다. 그리고 개인의 역량과 능력을 키우는 점에서 자본주의구조사회가 장점도 있다. 문제는 그런 구조사회에서 정말 자유롭게 하는가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돈을 지급받지 못했다면, 어느 사람이 정해진 근로시간이상으로 일을 하고 대가를 지불받지 못한다면, 만일 어느 사람이 안전적인 장치와 보건환경적인 요소에서 소외를 당하면 지금이야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맞는 처사이냐고 말이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지금에 와서 당연한 것들이 당시 그녀가 살아온 길에서는 당연하지 않았다.

 

여성에게 사회적 정치적 참여권을,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국민들에게 맑은 물과 공기를, 너무 당연하고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현은커녕 오히려 단어조차 내뱉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그런 삶 인듯 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생과부가 되어 13년 넘게 남편을 보지 못한 여인, 법적인 절차도 없이 납치되듯이 경찰에 끌려가서 갖은 고문과 협박에 시달리고, 거기에 모자라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말이다.

 

가족 중에 남동생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신체적인 불구를 얻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당연했던 모양이다. 세상은 언제나 고민하고 사유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일정한 지선에 생각을 치우쳐져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또한 편하게 생각하기 좋기에 남들의 입장에 대해서는 침묵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익에서는 눈빛이 변한다.

 

기회주의적인 인간형에 길들어진 사회구조에서 세상은 각박해져 가고,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는 더욱 절망으로 몰아간다. 그렇게 밟히고 밟힌 사람과 그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본인마저 밟힌 한명숙씨의 이야기는 한국사회 이면에 가려워진 어둠이 보인다. 자기를 고문하던 사람들을 원망했냐는 말에 하지 않는다고 하나, 연약한 여자의 몸을 발로 차고 몽둥이로 후려친 존재들에 대한 용서한다는 말조차도 쉽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보면서 조금 공감 가는 부분과 더불어 아쉬운 점이 있었다. 여성부 장관 시절, 아직까지 한국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서 전통적인 부분의 혼동이 남은 것이 안타까웠다. 한국 전통 문화는 조선사회를 많이 따라가는데, 특히 성리학 부분에서 조선 후기부터 시작된 폐단적인 부분을 아직까지 수용하는 점이다. 확실히 전통문화의 존재와 현실화는 필요하다. 한국인들의 정체성에서 과거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한국전통이 아닌 것이 당연지사로 넘어오는 점에서 말이다. 여성 인권문제에서 현실적으로 우리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으나, 학대받아온 여성의 권리문제와 더불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그저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남성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대학교 시절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여성 인권문제도 문제이나 남성의 억압된 사회도 같이 생각할 부분이었다. 문성근씨와 황신혜씨가 출연한 “생과부 위자료 소송사건”처럼 인간은 항상 억압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취지의 여성부가 지금은 안타까운 현상이 되어 있다. 한명숙씨의 이화여대란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촌, 어린이, 노약자, 여성이 주된 초점이라면 지금의 여성부는 엘리트주의적인 이화여대 엘리트를 위한 정치권리 노선이 아닌가도 싶었다. 한명숙씨가 추구한 페미니즘이란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간애적인 마음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그녀가 무참히도 가슴을 짓밟힌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그런 짓밟힌 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더욱 짓밟힌 이들과 같이 가는 것이 그녀의 의지 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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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 - 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하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
문재인.김인회 지음 / 오월의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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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가장 존경하는 정치사상가 한 분 이름이 떠오른다. 그 분의 이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정약용 선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인물로서 한국 근현대사 이전의 철학사에서 모든 철학은 다산학으로 마무리될 정도로 그 분의 철학은 이미 그 깊이를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정약용 선생의 깊은 철학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 분의 행적과 자취를 생각하면 깊은 존경심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정약용 선생 하면 우선 생각나는 것은 그 분이 정치인이면서도 사상가, 철학자, 과학자, 의학자 그리고 뛰어난 법학자란 사실이다. 예전에 다산연구소에서 왕성하게 연구하고 계시는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님 박석무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라는 책을 읽어보면서 나는 내 인생의 스승은 다산 정악용으로 신념을 두었다. 물론 그분의 위대하고 진지하고 깊은 세계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작은 존재이나, 적어도 그 분이 행한 업적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산 정약용이 다산을 쓰기 전에 사암이란 호를 사용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붕당정치로 인해 곡산이라는 작은 마을의 목민관으로 부임한다. 그가 곡사부사가 업무를 맡을 적에 어느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이계심의 난이라고 하여, 이계심이란 농민이 관아에 무리 천 명 정도 데리고 가서 항의하던 사건이었다. 당시 원님에게 물러가라고 했을 정도이니 반정부 시위였으며, 정치적으로 신분이 엄격한 조선시기라면 당장 반역죄로 극단적인 형벌을 받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계심이란 인물이 정약용이 부임하던 그 길에 홀연히 나타나 다산에게 자신들이 처한 억울한 10가지 계목을 요목조목 설명하였다. 다산은 그의 말을 듣자 그를 오라로 묻기는커녕 자신과 같이 따라가자고 했다. 모두들 저 반역 죄인을 잡아 당장 치조를 하자고 원을 했으나, 다산은 딱 말을 잘랐다. 다산은 오히려 “백성의 고통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가 없다.”라고 했다.


과연 곡산부사로 오면서 자신의 마을에 얼마나 많은 폐단과 부정이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런 부당한 농민과 가난한 백성들이 자신들의 원통함을 당해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억울하고 눈물 나는 일이다. 이계심의 사건처럼 얼마나 많은 일들이 그 당시 조선 민중을 핍박했을까? 특히 군포와 같이 병역 대신 세금을 거두는 행위는 가렴주구 한 조선의 관료들은 백골징포와 황구첨정과 같이 시아버지가 돌아가셔도 군적에 올리고, 아직 배냇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까지 군적에 올렸다.


게다가 중간에서 관리가 횡령하고, 군수가 횡령하고, 중간에서 감찰하는 중앙관료까지 횡령했으니 나라에 세금이 오지 않고,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그런 원통함 사연을 오로지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는 암행어사였다. 물론 다산은 암행어사로도 활약했다. 그는 왕족과 고위정치가들의 친인척을 비롯해 주변 가까운 사람까지 고발하였다. 법의 적용은 제일 권력이 높은 사람부터 해야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의 법적인 태도는 이계심 사건만이 아니다. 함봉련 사건이라 하여 함봉련이 시비가 붙어 나무꼬챙이를 상대편에 찌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상대방 항문을 찔러 죽었다는 이유로 큰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다산은 당시 함봉련 수사를 하면서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수사로 통해 함봉련을 무죄 방면하였다. 운이 없었다면 그는 참수당하여 효시될 운명이었는데 말이다. 그런 정약용의 법철학은 힘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연구했다.


권력을 지닌 무소불위 대신에게 오히려 죄를 물었으며, 그 원한을 사게 되어 신유사옥과 황사영백서 사건 때 장기현과 강진군으로 유배로 갔다. 그때 다산은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민중들과 농민들을 울고 가슴이 찢게 하는지 다시 보게 된다. 강진군에 유배오고 나서 형제친구들은 모두 사지가 찢어지고, 가족들은 생이별하게 된 그 비극의 갈림길에서 다시 또 비극을 보았다.


당시 어느 농부가 군포세를 내지 못해 집안의 소 한 마리를 관아에서 강제로 끌고 갔는데, 그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자신의 남근을 칼로 잘라내었다. 민에서 돼지 불알 까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너도 나도 사람인데 왜 가난하고 힘 없는 이유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까? 갈밭마을 아낙네는 고통에 사무치면 비명을 지르는 남편의 남근을 붙잡고 관아에 달려갔다. 피가 아직 마르지 않아 피가 손에 철철 넘치는 상태로 말이다.


그러나 관아에 가면 무엇을 하리, 포졸은 관아 문에서 아낙네를 내치고 관아 내의 사또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다. 아낙네는 그대로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의 아픈 이야기를 실감하면서 나온 시가 바로 애절양(哀絶陽)이란 시조이다. 한국 조선 국문학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시조이겠으나, 당시 이 시조를 짓던 다산의 마음은 피가 거꾸로 흘렀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는 그의 원통함이 말이다.


따라서 법이란 중요한 것이며, 법은 모두 사람에게 공평해야 한다. 특히 힘 없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특히 신중해야한다. 다산 정약용의 서적 중에 목민심서를 보면 형전육조가 있으며, 거기에 더해 흠흠신서라는 전문적인 형법을 연구한 도서도 있다. 그만큼 법이란 무서운 것이다. 법은 어느 한 개인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하고,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멀리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귀양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치적 음모나 억울한 사연으로 많이 끌려간다.


그렇게 가는 것도 억울한데, 그들에게 대해주는 동네주민들 역시 각박하다. 당장 와도 잘 곳을 걱정하고 끼니도 걱정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해주지 않아 외롭고 쓸쓸하다.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가슴은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억울하게 형을 살아가는 존재의 설움이다. 그런 것은 다산이 살아있을 때와 죽고 나서 지금 2012년 대한민국에서 존재하는 하나의 사실이다.


왜 권력을 해체하고, 왜 권력을 분산하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 즉 인권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 문재인 변호사가 운명이란 도서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으나, 사실 변호사 자체가 인간의 권리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변호사 자체가 인권을 위해 일하여 하나 오히려 인권변호사란 칭호가 나왔으니 얼마나 그 많고 많은 억울함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갔을까?


이 책의 말머리에서 그런 억울한 사연과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그 현상을 이 책에서 고발하고, 그것에 대한 대처방안을 강구하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힘없는 국민들이 피해를 받으며, 그 사람들은 공포와 좌절감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며, 그들의 가족과 친구들 역시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검찰이란 단체를 어떻게 우리가 파악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결국 민주주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이런 말을 들었다. 사법고시 합격 후에 판검사가 되면 키가 2개가 따라 온다고 말이다. 하나는 아파트 열쇠고, 하나는 고급승용차 열쇠라는 것이다. 검사는 5급 사무관으로 임용되나 권한은 3급 부이사관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게다가 특수조직에 엘리트이며, 수사권과 기소권으로 통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검사라는 말만 들어도 억장이 무너지고, 앞이 안보일 정도로 무섭다.


무소불위의 권력이 바로 검찰이란 점이다. 한국 검찰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각종 고문과 불법심문 그리고 비윤리적인 행위들을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더욱 확장하기 위해 이른바 마녀사냥 행위를 저지른다. 특히 공안정국이나 독재정치 시에는 법의 중립성을 지키기보다는 권력의 도구가 되었으며, 이제는 오히려 그 권력의 중심까지 올라가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권력은 분산되어 각각 영향을 받지 않으면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은 마키아 밸리라는 군주론 저자도 말했다. 권력이 집중되면 더 이상 간섭과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먹은 행동을 하면 누구도 관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현된다. 이번에 보이는 고급승용차, 외제 명품, 현금 수수 등의 일이 터져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간다. 심지어 음주운전으로 인해 경찰에게 단속되어도 그 자리에서 빠져나간다. 만약 음주운전으로 인해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법을 심판하고 관장하는 이들이 법을 무시하고 법을 농락하면 누가 피해를 보는 것일까? 한국 사회는 이런 권력의 집중화가 결국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한다. 사실 보수와 진보를 논하는 희귀한 정치이데올로기에서 보수적인 자유주의정치는 권력이 국민들을 통제하면 안되는 원리를 가진다. 즉 자유라는 것은 국가에서 관여하지 않는데, 한국에서는 그 보수의 자유주의 원리조차도 지키지 않는다. 어떻게 본다면 20C 초중반에 세계적으로 대세인 전체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것이다.


검사조직은 일본에서 그대로 담습 했으며, 일본에서는 독립군을 죽이고, 조선민중을 억압하기 위해 법을 강제적으로 집행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가만히 있어야 했고, 죄를 짓지 않아도 목에 올가미를 뒤집어 씌웠다. 이른바 권위주의적 엘리트적인 검사들이 특권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건과 마찰이 있었는가? 그런 부분에 대해 이 책에서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것은 결국 필자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이야기 중심으로 화두를 던진 그런 문제들이 계속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상당히 계보학적으로 작성되었다. 서문에서 보이던 철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학자의 글을 보고 사유하고 철학적으로 법을 접근하려고 했다. 철학적으로 접근한 미셀 푸코라는 프랑스 구조주의학자 및 그 외 다양한 학자들을 사상과 철학을 접해 가면서 이 서적은 단순히 정치사회도서를 지나 정치사상에 대한 법철학 도서까지 올리려 했다. 그런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위해 문재인, 김인회 검찰을 생각한다는 정말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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