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 엥겔스 평전
하인리히 겜코브 지음, 김대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생각나던 사람들이 여러 있었다. 그것은 나보다는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솔직히 젊은 대학시절 그렇게 철이 없었다. 생각이 얇고, 기분 내키는 성격이고, 침묵과 변덕으로 가득했다. 정말 어리고 어린 철부지였다. 지금도 철부지 어른이지만, 가끔 내 주변에 겪은 가족, 군대, 사회생활하면서 사회적으로 보는 내 눈으로 조금씩 변했다.

가족을 먼저 생각하니 우선 나는 내 아버지가 생각난다. 나의 아버지는 노동자다. 그리고 배를 타고 멀리 외국으로 가는 외항선원이다. 현재 당시 다니던 회사에 정년 후에 이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다. 비정규직으로 되어 국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이제는 나는 피부로서 경험한다. 물론 나는 취업해서 일을 하고 있으나 아버지는 계속 일을 하신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달래기도 하겠지만, 가정 내의 살림을 보태기도 위해서다. 맑스·엥겔스 평전을 보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일을 하는 이유는 바로 생계의 문제이다. 그건 모든 노동자 내지 비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노동자들이 제대로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입장인가이다. 지금도 여전히 부족하나, 우리 아버지가 처음 노동을 할 때는 지금보다 열악하고, 맑스와 엥겔스가 활동하던 당대 유럽은 훨씬 열악했다.

예전에 맑스의 자본(강신준 교수 번역본)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과도한 노동으로 병을 앓는 사람들이나,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신체적인 기능이 월등하게 하락하는 사람들이나, 또는 임금이 턱없이 못 미치는 사람들 이 모든 것이 과연 인간의 생활 영위에서 가능하게 하는가이다. 참고로 내 아버지는 산업재해도 당하고, 근로환경 문제로 화상도 입으시고, 게다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 수술도 했다.

물론 환경적인 부분도 술을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가끔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어떤 특이한 의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생활 그리고 일상에 귀를 기울이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본래 노동시간은 1일 8시간(식사시간 제외)이나 가끔 그 이상으로 해야 하고, 때로는 밤을 새서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주말과 휴일에도 노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선박 위에서라는 부분이 있지만, 거기는 육상과 달리 노동자의 권리가 크게 보장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은연히 나오는 아버지의 입에서는 가난하다고 배운 것이 없다고 멸시받거나 또는 무시당한 적이 있다는 부분이 나온다. 가난은 죄가 아니나 죄가 되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성실하게 일해도 근로조건으로 인해 재해나 질병이 걸리게 될 경우 직장에서 심각한 패널티를 받게 된다. 이런 이야기가 아직도 현대에도 전해온다. 솔직히 말하여 국가가 운영하고 사회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어떤 힘든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는 어떤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렇지만 그런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 자체로 몰아넣어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면 문제다. 전에 어떤 문화평론가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의 80%는 프롤레타리아이라고 말이다. 그 80%들 사이 중에서 위로 가려고 누군가는 그런 일을 맡게 된다. 그렇다면 그 일을 맡는 사람들을 단순히 낙오자 내지 종으로 보면서 대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지만 그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날리며 자기 과시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이 옳은 일인가?

이런 문제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려온 문제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런 사회에서 너무 정당화되어 있고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된 이 어긋난 사회를 변화하고 싶었다. 그것은 공상세계의 이야기도 아니고, 아무 의미나 계획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로 통해서이다. 나는 자본과 맑스·엥겔스 평전을 읽으면서 이 생각을 했다. 자본은 1~3권까지 나오나, 자본 4권부터는 계속 나올 것이라고 말이다.

사실 맑스가 자본의 집필 지연사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가정문제, 개인 건강문제, 국제노동자연합 관련과 많은 사건들, 그러나 자본은 사회적인 문제와 기존 역사적인 부분에서 서술하자니 맑스가 집필할 시기부터 계속 변화가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수정하고 고치고 변경하니 기간이 지연되었다. 그리고 당시 맑스가 제기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역시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시대에 떨어질 수 있다.

당연히 맑스가 제기한 문제인 당시 사회는 봉건사회에서 시민혁명 이후 소외된 프롤레타리아를 배제한 사회이었고, 자본주의 국가체계도 시작에서 얼마 멀지 않았던 시기다. 그러다 보니 맑스와 엥겔스의 주장은 당시로는 합리적이나 지금은 비합리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부정은 아니다. 가령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살던 시절에 인간이 지구를 날거나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생각했겠는가?

시대적인 흐름과 변화에는 어느 정도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이 지금까지 변화 없이 오는 것은 이 책의 케이스 안쪽에 적혀 있는 장 폴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 문구가 인상적으로 알려준다. “맑스주의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상황들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 사실 내가 있는 시간과 공간적 요소에서 서민계층이나 소외계층을 가끔 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공사현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도 옆에서 보는 기회도 많다.

그러나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아직 많은 보장을 받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그런 보장을 받지 못함으로 다소 천박한 말과 행동들 역시 계속 나온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이제는 짜증내거나 눈살만 찌푸릴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인 것이다. 현장마다 다르겠지만 고단한 노동, 덥고 추운 날씨, 위험한 안전 그 많고 많은 환경들이 이들에게 마음의 여유를 그렇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안타까운 사실은 맑스와 엥겔스는 이런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고 당시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 즉 노동자들도 스스로 인권을 찾기를 바랐다. 지금 잘못된 생각으로 보면 이해가지 않으나 당시 노동자에게 투표권이 없었고, 여자들에게 투표권이나 정치참여권이 없었으며, 10대 아이들도 공장과 광산에 끌려가 12시간 넘는 가혹한 노동을 했다. 게다가 사고를 당해도 제대로 보상 내지 보장을 받지 못했으니 그들의 분노를 이미 충만했다. 하지만 그런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풀어내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분노가 과연 대단했는지 1871년 코뮈나르의 사건은 충격이었다. 독일 전 정부인 프로이쎈군대가 프랑스 국민들을 향해 공격하고, 게다가 그 원인은 부정한 정부였는데, 그 부정한 정부는 자국민들을 총으로 쏘았다. 그때 투쟁하던 국민들 중에서 어린 소년과 여자들도 있었다. 이 어린 영혼들이 왜 총을 맞아가면서 그렇게도 미친 듯이 군대에 저항하였을까? 참으로 비극이었다. 유럽사회가 지금은 엄청난 정치적으로 예술적으로 철학적으로 발달되어 있지만, 그 후면의 역사에선 엄청난 피와 눈물을 흘린 기억이었다.

그 당시 엄청난 피를 흘린 유럽에서 근대를 지나오며 전쟁의 휘몰이에 또 다시 피를 흘렸지만, 지금 유럽을 본다면 그 당시의 피와 눈물이 헛되지 않은 듯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계속 억압당하고 핍박당하고 있다. 지금으로 본다면 맑스와 엥겔스의 정신은 낡은 과거의 유령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유령들은 정말 다시 찾아온다. 찾아 올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정말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그들의 유령을 다시 부를 수밖에 없다는 비극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순히 맑스와 엥겔스만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당시 고통 받고 착취당하고 배고픔과 추위에 분노의 눈물과 저주의 피를 쏟았던 이름 없이 사라져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이 책으로 전하므로 그 진한 여운과 강렬한 인상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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