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
이상용 지음 / 홍시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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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은 정말 영화에서 허락하는 것은 너무 많고도 다양해서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영화라는 것이 어떻게 보자면 현실을 너무 현실처럼 보이기 위해 다루었는지 아니라면 현실을 제대로 보라고 하는지 만들었는지 약간 의문이 들 지경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어두운 자리에서 밝은 화면에 향해 몰래 숨어 보는 관음적인 시선이므로 영화는 본래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본다.

 

그런다고 그 영화가 실제 있는 사실은 아니다. 전부 아니라고 하지는 않으나, 적어도 우리 앞에서나 옆에서 바로 벌어지는 일들이 아니다. 더구나 그것이 잘 구성된 각본과 잘 어울리는 배경과 연출이라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관찰이 아닌 관전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마치 야구장이나 축구장에 몰려든 많은 관전자들처럼 거기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영화가 하나의 관찰의 도구로 본다. 단지 모든 사람이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찰하고 싶다는 사람에 한해서이다. 이번에 읽은 이 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은 그야말로 영화에 빠진 한 영화평론가의 글처럼 그는 영화에 단순히 빠진 것이 아니라 그 영화에 빠져 들어가서 자신을 빠지게 한 것들을 손으로 잡아 올린다.

 

확실히 영화는 어는 것을 보는 가에서 차이나기 보다는 어떻게 보는가에서 차이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도서에서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다양한 담론과 화제에 감독과 더불어 그 영화의 시대상에 대해 논하고 있다. 마치 영화라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담고 있는 신화에 지나지 않아 이제는 그 신화되는 것에 대해 틀어보기도 하고 조롱해보기도 한다. 혹은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에게 하나의 우상보다는 하나의 평범함으로 전제하려 한다.

 

일관된 세계관에서 벗어나 일관되지 않고 격리된 시간과 공간 인간인지 아닌지의 모호함에 따라 오히려 더 우리로 하여금 격리되어 있다고 여기게 하는 장치까지 거론한다. 사실 영화가 사실적인 내용일수록 우리는 착각에 빠진다. 왜냐하면 영화는 필름에 담고 있는 하나의 복사물이지 그 자체가 진실이 아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실적이지 않아야 우리에게 하나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제시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하여 영화가 하나의 사실성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 아니라 사실을 이야기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잊고 싶은 일들이나 잊어버린 일들을 스크린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단지 있던 인물이 실존인지 혹은 실존인양 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분명 있었던 일이다. 공간은 그대로이나 사람은 그대로이지 못한 이유는 시간은 공간 그 자체는 불변으로 남겨두나 공간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는 그 공간의 존재를 위한 존재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으면서 딱 확실히 구분하여 말할 수 없는 많은 영화들이 홍수처럼 소개되면서 그 속에는 있는 인간의 인식, 존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역사와 신화, 문학과 철학 속에서 말이다. 영화를 훔쳐보는 혹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대놓고 보고 있든 영화는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단지 중요한 점은 우리 인간들은 행동함에 있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성 외의 무의식적인 영역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영역을 카메라의 앵글로 담아낸다.

 

그래서 영화는 인간의 자기모습을 보는 것이고, 인간 스스로의 모습에 환호와 야유를 보낸다. 그러나 만약 그 영화 속의 모습이 평소 당신과 나의 모습이라면? 영화가 허락하는 모든 것에서 당신의 이야기도 피할 수 없다. 아니라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배우가 자신의 일상이 아닐지언정 자신의 삶과 완전 다르다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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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 나남신서 29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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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시와 처벌이란 단어를 들으면 무엇부터 생각해야 할까? 일단 감시라는 것은 주변에 있는 어떠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일거수 일투족 무엇을 하고 있는지 계속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밥을 먹고 대화를 하고 심지어 사적인 영역까지 지켜보든 하나의 개인 인권 침해 개념으로 이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감시가 어느덧 하나의 당연성과 더불어 인간사회에 살아가는데 오히려 너무 밀접하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감시라는 사회적 구조가 하나의 특별한 정치적 권력에서 그 권력의 압박이 생활의 일부분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그 감시로 통해 결정되어지는 각종 처벌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

 

미셀 푸코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은 바로 그런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적은 도서이다. 이전부터 구조주의학자 중에서 항상 나오는 미셀 푸코는 기존의 권력체계에 대한 부당한 처사를 고발하고, 인간에 대한 인권에 대해 항상 관심을 가진 인물이다. 게다가 계보학적인 학문영역으로 통해 정치사회적인 활동까지 주저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

 

그가 저술한 감시와 처벌은 무엇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일까? 솔직히 이 책에서는 현대사회의 이야기보다는 중세유럽과 근대유럽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현재의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이전에 있었던 과거로 찾아가서 지금까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먼저 감시와 처벌에서는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른바 신체처벌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의 죽음은 참 쉽고도 어려운 이야기다.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것은 상당히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큰 부담감을 줄 뿐만 아니라 인간은 말을 하는 동물이기에 단순히 그 고통을 몸짓과 비명 소리가 아니더라도 언어로 통해 전파할 수 있다. 따라서 죽어가는 수형자의 죽음과 고통을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강한 자극을 동원하는 것이다.

 

이 책 제1장 수형자의 신체에서 다미엥이란 한 병사가 루이 15세를 살인시도가 실패하여 사형을 선고받는다. 문제는 인간을 죽이는 그 자체는 보통 인간의 식견으로 매우 끔찍하고 무서운 일이기 때문에 어려우나, 그 방법은 무척이나 간단하다는 점이다. 일단 다미엥이란 사람에 대한 죽음을 열거하기 전에 대표적인 사형이 인간의 목을 베는 참수형이 있고, 참수형도 단두대에서 하는지, 도끼로 하는지 칼로 하는지 작두로 하는지가 있고, 인간 절단에서 요참형이나 또는 사지를 찢어 버리는 능지처참도 있다.

 

그것만 있는가? 끓은 기름이나 물에 넣거나 불에 산채로 태우거나 짐승 밥으로 만들거나 수장시키거나 전기고문하거나 총살하거나 머리를 박살내거나 교사시키거나 약을 먹이거나 너무 많은 사형방법이 있다. 그래서 사형은 어찌 보면 자신이 죽는다는 하나로 고통스럽고 끔찍할 수 있으나, 과거 고문에 대한 역사적인 사료를 참고하면 사형이 오히려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있다는 하나의 특권까지 주게 되었다.

 

가령 마녀사냥을 기록한 사료에는 피가 흥건한 지하바닥, 주변에 인간의 눈과 팔에서 떨어진 손, 다리에서 떨어진 발, 고문에 지치지 못해 차라리 화형대 위에서 불타 죽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잔혹한 고문을 받는 사람 속에 인간이란 죽음이 쉽고도 어려우며, 한편으로 죽음이 불행한 저주이면서도 행복한 마무리라는 엇갈림을 볼 수 있다.

 

그런 사형과 고문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형자 입장에서는 죽음이 어차피 결정된 것이라면 마음 편하게 죽는 편이 행복할 줄도 모른다. 죽음의 고통보다는 죽음 이전의 고문이 더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다미엥의 사형 이전의 고문행위는 참혹하다.

 

그레브 광장에 옮겨간 다음, 그곳에 설치될 처형대 위에서 가슴, ,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 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야 한다. 계속해서 쇠 집게로 지진 곳에 불로 녹인 납, 펄펄 끓는 기름, 지글지글 끓는 송진, 밀랍과 유황의 용해 물을 붓고, 몸은 네 마리의 말이 잡아끌어 사지를 절단하게 한 뒤, 손발과 몸은 불태워 없애고 그 재는 바람에 날려 버린다.”

 

처형 과정이 너무나도 상세하고 잔혹하며 하다못해 편하게 죽는 것조차도 용납하지 않는다. 단순히 도보수의 칼에 목을 베어 효시하는 처형법이 아닌 최대한 고통을 주어 그에게 하나의 권력으로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권력자의 권력에 대항하고 거슬린 대가는 그에 걸맞은 대가를 주는 것이다. 처형자는 임금을 죽이려한 범인이므로 그는 고문당하는 순간에 임금이 된다. 즉 임금이란 신체에 가해자란 사실만큼 임금에 걸맞은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전의 공개적인 처형 집행은 많은 군중들에게 구경거리와 동시에 국왕의 권력을 상기시켜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비추어진다. 처벌의 기능은 곧 군중들에게 권력기관에게 대항하는 순간 자신의 운명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교육이다. 처벌로 통해 나도 역시 저런 비참한 최후를 당할 수 있으며, 그것에 의해 권력에 복종하게 만드는 매우 강력한 조치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강력한 고문과 사형을 당하는 범죄자의 특징은 권력자들에 대한 반항이 가까웠다. 아니라면 사회구조적인 부분이었다. 어느 도적의 죽음에서 그는 많은 사람들의 야유와 욕을 얻어먹겠지만, 그가 죽기 전에 하는 연설은 오히려 그를 영웅으로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해서 되기보다는 사회의 왜곡이나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군중들은 모두 범죄자에게 큰 분노보다는 거기에 있는 사형집행자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죽음의 왕관을 쓴 자가 군중에게 하나의 신화의 영웅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공개적인 처형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군중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는 인물이 특수한 목적의식보다는 사회구조적인 부분에 의해 죽어간다면 그는 군중들에게 큰 메시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이다. 죽이거나 고문하는 것을 점차 공개적인 영역에서 비공개로 변경되고, 얼굴을 알리기보다는 두건을 씌우고, 사형은 점차 광장이 아니라 교도소 내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다고 하여 이런 처형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았다. 처벌은 반드시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면 되는 것이었다. 가령 우리 현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처벌기능을 하는 공간이라면 어떨까? 아니 처벌보다는 감시가 당연시 되는 것이 어떨까?

 

처벌이란 단어를 사용하기에는 무색하나 인간 개인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감시받고 자신의 개인성을 무시당하고 억지로 개조되는 것 자체가 처벌일 수도 있다. 미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다보면 인간은 이미 태어나면서 감시를 받는다. 학교와 공장, 병원, 군대, 직장 등에 말이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기관이다. 아니 인간에게 분리될 경우 많은 문제가 따른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당연함을 가지므로 인간은 곧 감시체제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학교를 다닐 적에 교복을 입고, 두발과 복장이 일정해야 하며, 일정한 시간이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서 교육을 받는다. 또한 일정한 교육과 동시에 시험이 치르고, 시험이 끝나면 결과에 따라 상과 벌을 받는다. 모두 우리는 당연한 사회적 관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감시의 방법이고, 감시 속에서 상벌의 규정은 처벌로 연결된다. 이미 학교부터 감시라는 체계는 당연한 것이 되었고, 군대와 직장까지 가면 그런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다.

 

감시와 처벌이란 도서에는 이런 기능을 권력에 대한 하나의 운영방법으로 설명한다. 특히 종교기관과 학교, 소년원, 감옥, 군대는 이 기능을 탁월하게 진행하는 방법이었다. 절대적인 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페널티로 통한 처벌, 그 후에 교정으로 통해 국가조직에 대항하는 것보단 순종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냈다.

 

더욱 난해한 부분은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는 종교기관이 오히려 속박을 강요하는 수단이었다. 모든 것을 억누르고 강제적으로 실행하게 하고, 특히 시간의 정확한 패턴을 짜서 인간들을 거기에 맞추는 것은 인간 그 자체를 수동적인 존재로 변화시킨다. 소년원이나 감옥은 수시로 감시하게 하여 이들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여부에 따라 생활에 영향을 주어 따르지 않게 금 만든다.

 

인간이 마치 인간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인간이 기계와 기구와 같이 하나의 조작도구로 변화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구조로 변화되면서 프랑스에서 일어난 범죄는 참혹하게 죽어가는 다미엥같은 사람보다는 경제적인 영역에 더 가까워진다. 가령 일상생활에 필요한 빵과 의복과 같은 필수품이나, 공장에서 나오는 각종 상품들이다. 이런 일반 사람들이 쉽게 접목하는 물품에 대한 절도나 강도는 다미엥과 같은 처벌보다는 어느 일정한 곳에 교정을 받아야 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문제는 그런 도구로 되어가는 인간이 그곳만 존재하는 것이 사회 전반적으로 흘러간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정해진 시간만큼 일해야 하고, 그것에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월급이 삭감되거나 쫓겨난다. 감시라는 체계가 어느덧 대부분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그것이 처벌까지 이어질 경우 생존영역에 큰 위기감까지 오게 된 것이다.

 

감시와 처벌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죽어가는 다미엥을 비롯한 그 밖의 인물들이 대다수의 군중들에게 많은 교육을 전달해주는 도구로 되겠으나, 점차 그 들이 군중들을 집결할 수 있는 힘을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죄자들을 점차 은밀하게 다루거나 은밀하게 다루는 것에 넘어 모두 개인화하여 범죄자가 감시자와 일대일이란 느낌을 수시로 받게 해야 하고, 감시자는 범죄자를 격리하는 것처럼 보여 이들을 속박하게 만든다. 모든 것에는 교정행위에 대한 효율성도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나, 프랑스 근대역사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경제난과 더불어 고용주와 국가기관의 횡포에 불만을 터뜨린다.

 

그렇다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방법은 집단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것보다는 집단을 분리하고 나누어 개인화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또한 이들 개인마다 감시할 수 있는 하나의 체계를 만들면 이들의 현재 상태를 계속 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위에서 말한 여러 기관으로 통해 이들을 계속 교육을 시킨다면 그것은 권력을 체계적으로 하위조직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른바 헤게모니적인 정치적인 구속현상은 바로 이런 조직화된 국가기관 내지 교육기관, 종교기관에서 시작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지식이란 것은 하나의 권력으로서 인간들을 조직하므로 각 권력에 알맞은 지식전문가들이 나온다. 이들의 세분화는 권력의 감시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또한 그 감시자의 임무를 맡은 사람마저 감시를 받게 된다. 파놉티콘이란 일망감시체계가 문제가 발생하면 그 일망감시자가 가장 먼저 처벌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감시와 처벌은 위에서 언급하다시피 분명 중세유럽과 근대유럽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나 저자인 미셀 푸코가 프랑스인이란 점에서 프랑스 역사에 대해 주로 기술한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은 아직까지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조직과 단체에 늘 속한다. 하지만 거기에 있으면서 어느 기관의 사람에 의해 항상 통제되고 감시를 받는다. 그것 자체로 하여 문제가 발생한다고 하지 않겠으나, 그것에 의해 정신이나 신체적으로 큰 변화를 맞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 내지 큰 조직에 의한 하나의 헤게모니로서 자신의 말과 행동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과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치적, 사회적인 관념과 행동이 필요하나 그것 자체가 하나의 도구로 전략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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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 - 깨어 있는 시민이 던져야 할 7가지 질문
김병준 지음 / 개마고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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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 내지 국회의원 선거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관심이 모인다. 특히 이들 선거로 통한 정치적인 참여와 주장에 대한 발언은 결국 투표자 내지 지지자들에 대한 이익과 연결된다. 즉 정치라는 큰 사회적 구조에 따라 국가경제 구도가 크게 변하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 경제가 변화가 오면 국민생활에 많은 여파가 온다.

 

따라서 정치자들의 정치적 행보에 따라 많은 변수가 오는 것이 국가 경제와 사회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이 나왔다고 하자? 그렇다면 투표자와 지지자들이 원하는바 모두가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많은 대통령들이 당선 직후에 지지도가 엄청나게 상승하는데 반해, 임기 말이 되면 지지도가 급격하게 감소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다들 대통령이 정치를 못해서 사회적 경제적인 흐름을 맥을 제대로 잡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몰아붙인다. 물론 대통령이 많은 정치적 권력을 생각하면 대통령의 능력과 선택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다면 과연 모든 정치적 행보는 대통령과 그 주변 사람들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 책의 논지는 정치의 모든 선택은 국민이라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민주주의에서 투표로 통해 대표로 뽑아 간접적인 정치행보라고 하여 그 투표자들이 모든 것을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묻는다.

 

오히려 국민 스스로 더욱 거기에 대하여 생각과 판단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직접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지 않으나, 그 정책에 대한 여론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특히 언론과 매체로 통한 정보의 전달력은 결국 국민 스스로가 분위기를 만들어가거나 또는 분위기에 휘말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문제는 대부분의 현대사회에서의 언론과 매체는 대형 미디어로 통한 일방적인 정보전달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정보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오류라는 치명적인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이번에 본인이 읽은 도서인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다”는 그런 정치적인 상황과 여부에 대한 점을 단순히 국민이 가만히 있거나 언론에 휘둘리기 보다는 정확한 정보와 올바른 판단이 요구되는 것은 제시하는 책이다.

 

특히나 노무현 대통령 시절 정책을 맡은 김병준 교수가 저술한 이 책은 정치학과 정책학적으로 모든 정치적인 현상이 단순히 대통령 하나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이 강조한 “깨어있는 시민”을 강조하면서 시민 계몽주의적인 그의 입장을 여기에 잘 나타내고 있다. 진보적인 대통령이면서도 신자유주의자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대통령을 바라보면서 진정한 경제성장과 분배에 대해 여기서 담론을 나누고 있다.

 

가령 페이지36을 보면 <진보주의자들은 반대할 줄만 안다. 말하자면 ‘정의롭지 못한’ 상황이 있으면 이를 반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대안이나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없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추구하며 왜 추구하는지에 대한 합의도 없다. 결국 반대만 한다. 그리고 반대하는 데는 한 목소리를 내지만 집권을 하기나 대안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되면 분열하게 되어 있다.>

 

정말 그렇다. 어떻게든 정치적인 결정으로 통한 정책실행에서 많은 반대론이 있었다. 가령 공군 출신자인 본인으로 과거 정권에 B-747 구매에 대하여 상당히 동의했다. 당시 공군장병 중의 하나라는 사실과 실제 군사작전 업무에서 대통령 의전행사나 국빈행사 관련하여 업무를 봤을 때 대통령 전용기가 B-737은 규모에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외국 순방을 다닐 경우 B-747 급의 대형항공기만 가능했다. 일반 항공기는 순항거리와 능력이 장거리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전용비행기 교체에서 반대를 하던 사람들이 지금에서 다시 하자고 했다. 대통령 전용기 B-747이 없는 문제로 국가에서 많은 예산을 일반 민간항공기 대여에 사용해야 했다. 1번 대여하는데 수십억에서 수백억이란 금액이 필요하므로 당시 공군장병 입장으로 꼭 필요한 일이 무산되었다. 물론 지금 반대한 사람이 B-747 유치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나, 그런 국가정치외교적인 업무에 대하여 생각하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책추진에서 많은 권력적인 요소는 국회에서 나오나, 그것을 흔들 수 있는 기반은 국민들로부터이다. 국민들이 얼마나 깨어나기에 충실하냐의 따라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대통령이란 소리와 함께 신자유주의자 선봉자란 두 가지의 의미를 합하여 좌파 신자유주의라고 했다.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발생되었으며, 국가가 최대한 시장 간섭을 배제한 시장구조다.

 

하지만 좌파라는 것은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노동자의 인권과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것이다. 이 2가지의 토끼를 잡으려면 결국 한 쪽에 치우치면 안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사실은 한국 정치사회에서 언제나 나오는 말은 경제위기, 빈곤층의 생계문제, 양쪽으로 분열된 경제 등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하고 해결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원하던 국민에 대한 계몽주의적인 태도이다. 하지만 그 계몽이란 과거에 신화적인 요소에 젖은 사람들은 억지로 정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 그 스스로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계몽이 또 다른 억압이란 신화를 창조하는 아이러니가 다시 발생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인식이 바뀌면 그 구성원에 따라 사회적인 변화가 바뀐다. 신자유주의적인 부분과 관련하여 현대국제사회는 모든 것이 자본주의에 의거한 경제활동에 따라 변화한다. 과거 중국과 같은 공산국가(국가자본주의이지만)도 역시 시장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은 국제적인 경제, 정치, 외교, 군사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즉, 세계변화에 따라 국내에서도 충분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점과 그 변화에 따라 시장중심의 사회에서 소수약자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는 점이다.

 

대기업 중심과 수도권 위주의 개발정책에서 소외된 중소기업과 비수도권 내지 비정규직에 대한 배려도 필요하다. 시장과 계층의 분리는 결국 사회적인 왜곡 현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특히 내수시장과 관련하여 중산층과 저소득층의 시장 활성화가 되지 않으면 사회적인 경제구조는 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결국 유리한 위치에 있는 계층과 유리하지 않은 계층의 차이를 좁혀야 한다는 사실이다.

 

경제활동이 대기업에서 잘 되면 중소기업에 저절로 내려온다고 하나 막상 그것이 잘 되면 계층단절이라거나 서민경제의 위기는 그렇게 쉽게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페이지210의 내용은 보면 <더욱이 더 어려운 것은 제1차적인 분배의 영역에 있어서 수출을 해서 엄청나게 돈을 벌어와서 기업은 엄청난 이익을 내고 있고, 대기업의 노동자들까지 엄청나게 배당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중소기업으로 흘러가지 않고 또 일반 다른 서비스산업으로도 확산되지 않는 소위 생산과 분배과정이랄까, 산업간 분배과정이랄까. 이 부분에 있어서의 단절이 어떻게 극복돼야 될 것이냐에 관해서 아직 어느 두뇌집단도, 정부를 포함한 어느 두뇌집단도 그 점에 관해서 ‘이것이다’라고 우리가 할 만한 정책 제안을 해온 곳이 없습니다. 정말 밤잠 안 자고 고심해도 거기에 대한 해답을 준 우리 한국의 두뇌집단은 없습니다.>

 

이 말은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대기업 회장과 함께 간담회에서 한 이야기다. 국가경제의 발전과 거기에 따른 시장규모 확대, 또한 분배의 증대는 전반적으로 다 같이 잘 살아가자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인정했다. 인간의 욕망은 부정하기 보다는 그 자체를 인정하고 이것을 통해 어떻게 절충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정부의 정책, 기업의 경제구조, 시민들의 의식구조가 적절히 맞물려 들어가지 않으면 결국 국민경제는 개선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언제나 반사이익으로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정치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책임전가하려고 한다. 그런다고 해서 당장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문제의 본질로부터 멀어져서 해결의 구체적인 대처기능까지 상실할지도 모른다. 결국 얼마나 제대로 알고 판단하는 몫은 결국 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할이다.

 

그것이 제대로 갖추지 않은 시민들이 가득하면 죽음으로 이르는 병이라는 니체의 말처럼 정말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죽음으로 갈지도 모르겠다. 무용지식은 정말 무서운 이야기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처럼 올바른 지식은 반드시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정치적인 의무이기도 하다. 99%를 위한 대통령은 없겠지만, 99%를 위한 대통령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통령을 선택하는 유권자의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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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사 4 - 386세대에서 한미FTA까지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4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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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史 4번째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한국은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라는 점이다. 이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하면 될까나? 처음부터 누군가에 대한 강제적인 방법과 조치가 동원되어도 그것의 시작과 동시에 끝을 결말내지 않은 부분이 그렇다.

 

1980년 광주시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서 어느 사람들은 혁명과 운동, 혹은 반란 내지 폭동이란 말이 오고간다. 누구의 시선과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역사라는 잔혹한 이야기들의 기록들은 언제나 승자들의 얼굴에 미소를 보내준다. 즉 패자의 역사는 기록되지도 혹은 되더라도 그들의 원래 이야기보다는 다른 이야기로 기록된다.

 

그 최고의 긴장감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이란 큰 상처 속에서 최초 발포자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 아니 현장 지휘관이 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에게 전면에 향하여 발포하라는 명령 이전에 그것을 지시한 그 이상의 존재 역시 드러나지 않은 채 여전히 미궁이다. 결국 죽은 자와 죽은 자의 가족과 친구, 또는 죽였던 자와 죽였던 자의 옆에 있던 사람 모두 피해자로 남게 되는 오명을 안고 간다.

 

총을 맞거나 혹은 심한 폭력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당시 그 운동을 참여 여부를 따라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에 있었기라는 광기의 살육 속에 사라져갔다. 죽은 자의 무덤에서 말은 없다. 하지만 남은 자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영광이 될 것이다. 흔히 상처는 영광 내지 훈장 또는 상징으로 통하기도 하다. 희생양이란 존재는 최고의 악인과 동시에 최고의 행동가라는 2가지 딱지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대적인 흐름과 상황, 정치적 사회적 관계에서 계속 빙글빙글 돌아간다. 우리는 이런 세계에서 급격한 민주주의 사회를 맞이했다고 하나, 사실 유럽의 민주주의 역사에 비해 그 짧고 짧은 역사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했냐고 물어보는 것보다 차라리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전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현명하듯 하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사실이다. 사실 공화국이란 존재에 따라 국민이 주권이 아니라 군왕이 정치지배자이여도 공화국은 존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공화국은 전쟁으로 인해 국민이 신체적, 재산적, 심리적 피해를 입거나 혹은 그런 전쟁에 따른 부담을 느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직접적인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전투무장은 필수불가결적인 정치적인 행위다.

 

전쟁은 결국 정치적 형태의 가장 물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전쟁과 더불어 변화되는 사회적 정세는 매우 어렵고도 난감하다. 왜냐하면 전쟁의 결정권을 내리는 사람은 극소수의 인원에 비해 전쟁으로 인해 휘말리는 사람들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곧 국민의 의지와 달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쇼이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 총과 칼을 들고 싸우는 병사들은 주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객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직접 전투에 임할수록 전쟁의 주인공이 아니라 전쟁의 방관자로 변모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리스 폴리스국가에서 그리스 사람들이 직접 칼을 들고 전쟁터에 가서 국가를 지키고, 그 권리로서 정치체에 대한 참여가 오히려 더 민주주의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 정치적인 입장과 차이, 거기서 벌어지는 현상에 따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많은 고개를 넘고 넘어야 했다. 4번째 책에서는 한국전쟁에 대한 비극이 인상적이다.

 

미국하면 뭐라고 할까나?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가 전쟁에 의해 위기에 빠질 때 목숨을 걸고 방어해주었다. 많은 젊은 미국인들이 자유와 평화라는 가치관에 의해 뼈를 여기에 묻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고한 가치관과 달리 그들을 이곳에 오게 한 정치적인 영역은 달랐다. 한반도란 위치는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힘겨루기하기가 제일 좋은 곳이었다.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안정이 안되어 있으며, 미국과 소련이란 국가가 어떤 나라인지 파악이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이다.

 

뭐든지 좋은 일은 있다면 나쁜 일도 있다. 전쟁터에서 분명 북한 괴뢰군들을 저지하고 올려 보내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은 최소한의 민주주의 국가로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좋은 일이 있듯이 나쁜 일도 있다는 점이다.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민간인 살인은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책에서 우리가 감추고 싶은 기억을 다룬다. 한국에서 조선역사는 무척이나 많이 다루어도 근현대사를 다루고 싶지 않아 한다.

 

왜냐하면 지금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사회적으로 상당히 영향을 미치는 부류가 여기에 많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를 알아가는 것은 보이고 싶은 부분도 있겠지만,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는 것이다. 그 기억이란 남을 짓밟고 무시하고 자신의 이기심과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많은 일들을 자행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가에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그 지배권은 대한민국 정부고 대한민국 국방부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시 작전통제권은 미군이다.

 

물론 많은 전투물자와 장비가 주한미군의 영향이 있는 것은 알고 있으나, 주한미국이 전시 작전권을 지배하는 것은 국권을 가진 국민으로서 납득하기가 조금 힘들다. 이것은 마치 조선시대에 명이나 청에 충성을 다하고 털리고 있는 조선과 비슷하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장갑차 소녀의 죽음에 대한 문제, 무참하게 맞거나 겁탈당하거나 심지어 폭행으로 죽은 사람, 그 밖에 많고 많은 범죄문제와 그 외의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필두로 을사조약과 경술국치일까지 당하게 되면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일본인들에게 농락을 당했는가? 가다가 맞아도 고발할 수 없고, 조금만 대들어도 퇴학에 감금에 폭력에 시달렸다. 그것이 아직까지 반일감정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란 나라에서 미묘하게 그 감정이 밀고 당긴다. 물론 미국 내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자유와 평화가 자신들만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 이외에도 있는지가 관건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이른바 기득권 세력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정치적인 이해로 외교를 하거나 혹은 이런 문제를 의문시하는 경우 강제적인 제압이 들어가기도 한다. 이른바 귀에 걸면 귀걸이와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것이다. 나는 종종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한국 교육에서는 역사와 철학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역사를 알면 수치스런 부분을 들켜 곤란한 사람이 있고, 철학을 알면 정치적으로 곤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역사적인 사실근거와 거기에 따른 사건들을 제대로 알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역죄로 몰려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더구나 더 재미있는 사실은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아도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당하고 살았던 점이다. 어느 날 과거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길거리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바로 그 사람은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 앞잡이로 독립군을 잡고 고문하던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경찰에 들어가 권력으로 횡포하다가 과거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정치적으로 숙청한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과거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시대와 더불어 625전쟁 그리고 전쟁 이후의 공안정국까지 말이다. 당시 시대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나 과연 그럴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아니라면 최근에 오히려 한국이 일본 치하에 들어가서 계속 그 시대적으로 살아야 했다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군사독재 정부를 찬양하는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약간의 이해는 해볼 수 있겠으나,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과 더불어 한국문화와 정신을 없애려 했던 일제의 횡포를 찬양하는 것은 이해가지 않는다.

 

그래도 분명 이들은 당시 그때가 그리울지도 모른다. 을사오적의 후예가 역사학자가 되어 역사박물관장을 하는 이 시대에 매국노가 애국자 내지 근대사의 선구자란 말을 듣는 세상이니 그때의 찬란한 권력이 그리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민들의 눈을 속이고, 국가를 좀먹은 부류이다. 우리 사회에서 많이 통용되는 이야기 중에서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사회를 위해”라는 슬로건에 왜 아직까지도 이런 사람들을 쓸어버리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품는다.

 

아니 그런 의문을 품은 후에 친일파의 꼬리표가 무척이나 확실해서 그것을 밝히려 하면 왜 이상한 인간으로 몰릴까 싶다. 외국에서는 민족주의자는 분명히 보수우파에 파시즘에 가까운데, 우리는 오히려 우파적이지 못한 나라가 아닌가? 그런 가운데 민주주의는 과연 민주주의로 가는지 아니라면 만주주의로 가는지 한번은 의심가기도 한다. 한국 권력이 집중되고, 개방되지 않은 곳에서는 일본이 세운 만주국이란 괴뢰국과 더불어 만주국에서 나온 만주군이란 유령이 계속 오고가고 있다.

 

만주주의는 해방을 맞이해도 떠나지 않고, 625 이후 더욱 강해진 것도 모자라 더욱 더 치밀하게 되어가고 있다. 어느 시인의 감옥소에는 종이와 볼펜이 없었다. 그곳의 감시자는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의 일본 순사가 감시할 때는 볼펜과 종이가 있었다. 이른바 동족이란 것이 더욱 강렬히 분노로서 다가오는 것일까? 보통 가까운 친구와 가족들이 싸우면 더 골이 깊은 원수가 된다고 한다. 아니라면 자신의 형이 사회주의자로 몰려 그것을 회피하려고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어느 대통령의 몸부림처럼 내가 당하지 않으려면 남을 당하게 해야 한다는 생존의식인가?

 

이런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던 시절에 한국사회는 아직도 골이 깊숙이 들어 가있다. 이 책의 한 장의 주인공인 신영복 교수의 어린 시절에 나온 이야기처럼 어느 마을의 청년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목을 잘라 귀에 철사를 꽂고 수많은 머리를 연결하여 다리나 마을 어귀에 장식하던 광기의 축제가 당연한 것처럼 말이다. 세상은 뭐든지 깊게 생각하기를 좋아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들만의 한 가지의 색으로서 구분지어 그 선을 넘어가는 존재에 대해서는 정의의 철퇴라는 광기가 이성이란 합법으로 변모된다.

 

문제는 그 광기는 아직도 계속 이어져 간다. 사회구조적으로 일어나는 억압과 은폐들은 이제 당연시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사건, 군대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고, 회사생활하며 받아야 하는 각종 스트레스, 가정에서 일어나는 불화 이 모든 것들은 그저 단순히 우연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라는 것은 과거를 배운다. 과거를 배우는 것은 잘한 것과 못한 것 모두 배운다. 그 이유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앎으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이 계속 반복하여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역사는 단지 “있었다.” 에서 그것이 왜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제시해야 한다. 그 의문이 현재의 문제를 당장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그 문제 자체에 대한 답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나간 일은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어도 앞으로 일어나는 미래를 변화할 수 있다. 인간이 정말 시간적인 존재라면 그 과거의 존재에 대한 부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철학적인 자세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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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일기 -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
노무현 외 지음, 김경수 엮음, 노무현재단 기획 / 부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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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니며 일하면서 퇴근 후와 주말에 시간을 쪼개어 마르크스의 “자본”을 읽었다. 그때 읽은 자본에 마르크스는 농촌에서의 농민의 문제를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박석무 다산학술이사장의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를 읽었다. 다산 정약용 역시 농민이 가지고 있던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오늘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를 읽었다. 유독 이 책을 읽으면서 위에 읽은 책들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유럽이든 한국이든 서구사회 기술발전과 문명의 전환은 도시화로 인해 거대한 도시지역을 만들었다. 도시라는 것은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기존에 있던 도시규모에 걸맞은 사업이 생기고, 많은 노동력과 자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노동력은 언제나 도시 안에서 창출하기보다는 항상 농촌, 어촌, 산지와 같은 외부인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항상 농촌은 사람들이 줄어만 가고, 도시화로 인해 식량문제를 위해 농촌은 농촌대로 속박을 당한다. 특히 서구사회의 근대역사에서는 농촌지역의 소지주들의 몰락과 대규모 농장으로 통한 농노들의 확대는 더욱 농촌을 황폐화 시켰다. 과대한 노동과 적은 대가 그리고 인정도 받지 못하는 그들, 언제나 농촌은 사회적 약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물론 모든 농촌이 그런 것은 아니나, 농촌이 가진 문제는 어떻게 보면 우리의 최소한의 식량문제의 해결과 더불어 자연환경 보존이라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촌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도시민들에 비해 소외받는 느낌을 배제할 수 없다. 인구밀도, 주변 인프라, 경제적 여유, 그리고 인간관계에서 말이다. 그런 소외된 공간에 노무현은 다시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퇴임한 2008년 2월 25일 고향으로 귀향하면서 말이다. 모든 대통령은 정부기관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서울 수도권에 머물기 바랐는데, 그는 고향 김해에 있는 봉하마을로 내려왔다. 게다가 사저는 담도 높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검은 선글라스의 사나이도 없었다. 그는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내려온 것이 분명하나 그의 거동은 이임한 대통령이 아니라 그저 고향에 농촌에 시골에 돌아가는 보통 시민으로 돌아갔다.

 

그가 만들고 싶은 고향 봉하마을이란 그동안 한국사회가 도시화와 공업화로 되면서 소외된 농촌을 일으켜 세울 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의 정화와 그 정화된 자연환경 공간에서 인간이 마음껏 그 향기를 맡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오면서 바로 동네주변 하천과 산, 거리를 청소를 권장했고, 자신이 직접 앞에 앞장서서 모범을 보였다. 그는 권위적인 명령을 가진 자보다는 다 같이 함께 걸어가기 바란 것이다.

 

그 속에서 시골마을을 위해 오리농법도 하고, 뒷산에 볼품없는 감나무를 베어 장군차도 심고, 동네주민과 같이 웃으면서 살아갔다. 그의 모습은 양복과 넥타이를 맨 정치인 모습보다는 차라리 밀짚모자에 장화를 심은 옆집 아저씨와 옆집 할아버지 모습에 더욱 가까웠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은 대통령 이전과 대통령 시절보다 이때가 가장 최고였던 것이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의 모습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담겨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아니 때로는 더위와 피로에 지친 모습도 역력한 모습도 나온다.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또 그리고 자신을 보기 위해 멀리서 운전 7~8시간을 해서라도 찾아온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는 열심히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으로 지냈다. 그는 내 마음 속의 대통령이란 말과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멀리 경계하듯이 봐야할 존재가 아니라 가까이 아무런 벽도 없이 인간과 인간의 만남처럼 대하기 바랐다.

 

그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있었다. 좋은 학벌과 좋은 능력이 있어서 얼마든지 좋은 일자리와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는데도, 샤프한 현대 도시인보다는 구수한 농민으로 노무현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옆에서 바라본 김경수 비서관은 말 그대로 대통령 노무현을 보던 것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을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대통령으로 남은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아주 흐뭇하다. 애틋하고 인간적이고 마치 아주 보고 싶은 영화 한편을 다시 바라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마지막의 회고록에서 내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는 것 같았다. “담배 하나 주게”라는 그 말에서 내 가슴은 너무나도 쓰라려 왔다. 마지막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말이 담배를 달라는 것에서 그 말이 나에겐 너무 고통스러웠다.

 

이 책을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철칙을 알 수 있다. 물론 그에 대해 누구는 긍정적 혹은 다른 누구는 부정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알던 노무현은 정말 자신이 아닌 남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예전에 신문기사를 본적 있었다. 2003년 태풍 매미가 강타할 때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공연을 관람 중에 태풍이 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것을 알고 사과한 적이 있었다.

 

당시 신문기사에 많은 질타가 쏟아졌으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2003년 12월 나는 군대에 입대하고 그 다음해 2004년 자대에 배치되고, 2005년 공사와 설계시공 등을 관리하는 부서로 배치 받았다. 그때 내 초임 업무는 공사와 설계, 대관협의 문서행정이었고, 또 하나의 업무는 하자보수였다. 건축물을 신축 시공하거나 혹은 노후시설물에 대해 대규모 보수를 하면 거기에 대한 하자가 생길 시에 재보수에 대한 업무를 관리·감독한 일이다.

 

거기서 나는 이런 말을 들었다. 이 매미공사 시에 재해 복구예산이 없었는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판공비를 내어 모두 재해복구비용에 투입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내가 있을 시절에 병영생활관을 개선하기 위해 신축하거나 영내·외에서 거주하는 장교 및 부사관을 위해 관사나 숙소가 한참 이루고 있을 시기였다. 당시 이 업무 때문에 야근과 잔업, 외근만 뛰어다닌 나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군인시절의 나와 내 주변의 군장병을 위한 그의 정책이었다는 사실을 전역 후에 알았다. 그리고 2009년 그의 죽음과 그가 펼친 진정한 가치관을 알았을 때 나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함을 크게 슬퍼했다. 그래서 차라리 “진보의 미래”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와 같이 정치, 사회, 경제, 외교 등에 대한 다양한 학문적인 가치를 넣은 도서를 읽으면 마음이 아프지 않으나 “봉하일기 그곳에 가면 노무현이 있다”라는 책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왜냐하면 그는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느 사람들은 그를 부정하고, 위선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런 위선이라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냐?”고 말만 하지 말고, 그것으로 “실천으로 행함으로서 진정한 선과 미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냐?”고 말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것이다. 한 없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기도 하고, 한 없이 그립게 만들게 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절 그의 정치는 100% 잘했다고 할 수 없다. 모든 정치업무를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말한 집단이기주의 내지 기회주의는 대통령이 타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그 주체인 시민이 해결하여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가진 정치적 이상과 이념들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가치관이다. 정말 잘 살아가는 것은 나만 잘 살기보다는 남과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미사어구는 정말 쉽다. 언제나 선거날이 다가오면 모든 정치인들이 내걸은 하나의 슬로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명제와 철학은 보이지 않는다. 뭐든지 결과만 좋고, 그 과정은 어떻게 되든지 관심 없는 수단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수단으로 보지 말고, 인간은 하나의 목적으로 보고, 그 인간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가치를 인정해야만 좋은 세상이 되어갈 수 있다.

 

그런 세상을 꿈꾸던 노무현은 꿈을 꿀 수 없이 영원한 자연의 세계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꿈은 그에게 머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대통령을 가진 사람에게 다시 그 꿈을 꾸게 하였다. 물론 꿈은 좋은 꿈도 있지만, 무서운 악몽도 있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꾸게 해준 정치인 노무현보다는 그저 인간 노무현은 여전히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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